2013. 9. 10. 23:11

 

연길시 동쪽 끄트머리에서 북쪽으로 언덕 하나 넘너가면 연변과학기술대가 있다. 그 언덕을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아파트단지 하나가 생겼다. 화익명축(단지 이름인데, 지금 쓰는 자판으로는 한자 입력을 어찌 하는지 모르겠다). 시가지가 계속 넓혀져 왔는데, 동북쪽으로는 제일 바깥이다.

 

최근 연길 온 것이 3년 전인데, 그때 어쩌다가 이 단지에 88평방미터(27평) 크기의 아파트 하나를 샀다. 단지 일부가 준공되고 아직 입주하기 전이었다. 주차장을 지하에 만들고 지상은 모두 정원으로 꾸민다는 설계가 마음에 들었다. 연길에서는 그런 설계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곳에서는 아파트를 기본공사만 해서 분양하고 입주자가 각자 내장(여기 말로 '수리')을 해서 들어가 산다. 막내동생을 무척 아끼는 셋째 처형이 내장을 맡아서 감독해줬고, 아내가 잠깐잠깐 다니러 와서 확인을 했다. 나는 이번 와서 처음으로 들어와 봤다.

 

무엇보다 조용해서 좋다. 가로세로 약 250미터 크기 단지의 중심부 가까이 있는데, 건물 바깥이 모두 정원이니까 큰 소음 날 것이 없다. 방 둘 중 앞쪽 큰 방을 서재로 꾸며 줬는데, 이틀 앉아 있는 동안 소음에 방해받은 일이 한 차례도 없었다. 중국 생활에서 바라기 힘들었던 복이다.

 

연길 주민의 아마 95퍼센트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할 것이다. 겨울이 길고 추위가 심해서 단독주택은 난방 문제가 장난 아니다. 10년 전 연변 처음 왔을 때는 대개 아파트 단지별로 중앙난방을 했는데, 겨울 동안은 온 시내가 석탄 그을음에 덮여 지냈다. 그 동안 도시 전체에 난방을 공급하는 시설이 시 동남쪽에(겨울바람이 빠져나가는 방향) 만들어져 도시 분위기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다.

 

단지별 중앙난방도 1980년대에 시작된 것이었다고 한다. 그 이전의 아파트는 재개발로 거의 없어졌는데,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파트 옥상이 굴뚝의 숲이다. 각 집에서 석탄을 땐 것이다. 아파트 건물과 나란히 석탄창고가 있어서 자기 칸에 석탄을 쌓아놨다가 매일 바케츠로 퍼 올라가는 것이 일이었다고 한다.

 

도착한 날 가족들과 둘러앉아 점심 먹을 때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오래된 아파트의 난방 효율이 떨어질 때 배관 수리가 큰 문제거리였다. 보통 6층이니까 한 줄의 열두 가구가 모두 합의하고 분담금을 내야 공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사를 하는 줄에서는 서로서로 큰 파이프를 써서 열량을 많이 가져가려고 경쟁하는 것도 골치아픈 문제였다. 그런데 이제는 배관 수리를 공공사업으로 만들어 지방정부가 예산을 편성해 공사를 시행한다고 한다. 놀라운 수준의 공공성 발전이다.

 

10년 전 왔을 때 중국의 아파트 풍경이 참 황량했다. 공동주택의 공용공간에 대한 관념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전용공간 안에는 대개 깔끔하게 꾸며놓고 살지만 건물 밖은 진짜 한데고, 계단, 복도도 살풍경한 곳이 많았다. 전에 살던 녹원소구가 비교적 관리를 잘 하는 편이었지만, 건물 밖은 완전히 시멘트와 아스팔트로만 발라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없이는 6층 건물까지 지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1990년대까지 지은 아파트는 거의가 6층이다. 1층에 상가가 있는 경우는 7층까지 허용되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아파트가 건축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내가 여기 있을 때 덴티러우(전제루, 엘리베이터 있는 빌딩)의 아파트 가격은 새로 짓는 아파트값의 갑절이 넘었다. 아직 시내를 두루 둘러보지 못했지만 이틀간 오며가며 본 느낌으로 이제 덴티러우 가구 수가 전체의 10퍼센트 선에 육박하지 않을지?

 

고급아파트 수요가 덴티러우로 몰리면서 일반 아파트의 단지 품질 향상 노력은 소홀하게 되지 않았는지? 3년 전까지 화익명축처럼 단지를 정원으로 가꾼 사례가 없었는데 그 후에도 더 생긴 것 같지 않다. 이곳 아파트 시세가 다른 단지보다 크게 높지도 않다고 한다. 단지의 분위기는 시세에 큰 작용을 못하는 모양이다.

 

같은 단지에 사는 가장 든든한 이웃은 예봉이다. 큰언니의 큰딸인 예봉 덕분에 이 집을 사게 됐다. 일본에서 오래 지낸 예봉이 연길에 돌아와 살 생각을 하던 중에 어쩌다가 건설 중의 이 단지에 아파트 여러 채를 갖게 되었고, 그중 하나를 우리에게 넘겨준 것이다. 자기는 옆 동에 살고.

 

아내가 예봉에게 이모지만, 나이는 큰 차이가 없다. 이모랑 얘기하다가 얼결에 "언니"라고 부르는 실수도 한다.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 제일 말 잘하는 사람의 하나다. 입만 떼면 뒤집어질 준비를 해야 하는 재담꾼을 여럿 봤지만, 이런 능청스런 이야기꾼은 처음이다. 뒤집어질 준비를 할 틈도 주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재주를 한-중-일 3개국어로 자유자재 구사한다는 사실이다. 일본에서 10여 년 지내는 동안 대단히 큰 돈을 벌었다고 하는데, 말재주가 절대적 밑천이었으리라는 사실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곳에서 남편을 '나그네'라 하는 것이 참 묘한 풍속으로 보였는데, 예봉의 남편은 정말 그 말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다. 일본인인데, 이름도 지금 모르겠다. 몇 해 전 한국 왔을 때 들었는데 잊어버렸다. 여기 가족들도 다 '예봉이 나그네'로만 여기고 이름에는 신경 쓰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트럭운전이 직업이었다고 하는데 55세쯤? 행동거지를 보면 교양미가 꽤 느껴지는데, 교양을 전혀 내세우지 않는다. 허무주의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 것 잘 누리면서 살되, 싫어하는 일 피하는 데 더 중점을 두는, 나랑 비슷한 취향을 가진 것 같다. 그 동안 중국어 공부 열심히 해서 가족들과 이제 이야기를 좀 나누게 되었는데, 나는 중국어도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는 게 스스로 참 한심하다. 이 친구랑 얘기 나누면서 지내면 썩 재미있을 것 같은데. 25년 동안 덮어놨던 일본어를 다시 끄집어내?

 

예봉을 처음 볼 때부터 그 말재주에 탄복했거니와, 그 인품에 또한 탄복한 것은 이혼하는 과정을 보면서다. 내가 처음 볼 때까지도 김 서방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김 서방이 박사학위를 받자 얼마 안 있어 이혼했다. 부모가 농학원(연변농대로 합쳐짐)에 근무하면서 모범생 하나를 고르고 골라 결혼시켰고, 김 서방이 일본에 유학하면서 거기 살게 된 것이었다. 김 서방은 참 신실한 사람인데, 내가 보기에 유머감각이 약하다. 쓸 데 없는 일에도 자존심을 내세우고 불필요하게 엄격한 기준을 고집하는 일이 많았을 것 같다. 그 사람이 학위 받을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준 다음, 독립시켜 주고 자신의 즐거운 인생을 찾아 나선 예봉, 성실성과 결단력이 아울러 뛰어난 사람이다.

 

이번 체류 동안 예봉 내외랑 바람 쐬러 좀 다니게 될 것 같다. 둘 다 게으른 사람이라 어디 돌아다닐 생각도 별로 않고 지내는 모양이다. 아내가 언제 한 번 경박호 같이 놀러가자고 권했더니 즉각 호응하더란다. 예봉이 워낙 막내이모를 좋아하고, 그 나그네도 나랑 대하는 게 편안한 기색이다. 연변 일대 도로 사정도 크게 달라졌다는데, 예봉네 차로 길 맛을 좀 봐야겠다. 몇 해 전 같으면 이곳에서 차를 갖고 살 생각이 없었는데, 길 맛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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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Alfred E Eckes, Jr, Opening America's Market / U S Foreign Trade Policy Since 1776

 

"자유무역 실현될까, 미 정책의 고민"

 

 

세계시장의 단일화를 향한 개방 압력이 여러 해째 우리를 들볶아대고 있다. 이 압력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주역으로 나서고 있는 미국의 입장을 아는 것이 긴요한 일이다. 이런 관심에 꼭 맞는 책이 막 나왔다. 앨프리드 엑스의 <미국 시장 개방의 길>. 현대사 연구자이면서 1981~1990년 9년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저자가 미국의 무역정책을 실무와 학술 양쪽에서 바라보며 쓴 책이다.

 

저자는 제일 먼저 자유무역과 시장 개방이 미국 정신의 본질과 연결된 것이라는 통념을 배격한다. 자유무역론의 출발점이 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이 발표된 것이 공교롭게도 바로 미국의 독립선언이 나온 1776년의 일이었다. 많은 미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스미스의 새로운 세계관에 공감했다. 그러나 그 공감은 원론적이고 정서적인 데 그칠 뿐, 현실정치에는 큰 작용을 하지 못했다.

 

엑스는 대표적 자유주의자 토머스 제퍼슨과 같은 인물들이 독립 초기의 이상론적 자유무역 주장으로부터 현실론적 보호관세 정책으로 돌아서는 과정을 밝혔다. 지금의 초강대국 미국이 식민지 산업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당시에 선진국들의 불평등 무역정책에 시달리며 자기 방어를 위한 현실론을 굳혀가는 과정은 각별한 감흥을 갖고 읽어나가게 되는 대목이다.

 

1812년의 대 영국 전쟁 무렵까지 확립된 보호관세 정책이 한 세기 이상 미국의 성장을 뒷받침해준 '전통적 미국 무역정책'이 되었다고 저자는 본다. 미국사의 다른 측면들과 연결해보아도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이다. 엑스의 관점에서 가장 논란을 일으킬 대목은 과연 이 보호무역 정책의 종말을 어떻게 풀이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 같다.

 

1929년 10월 대공황이 터질 당시 미국 의회는 보호무역 정책을 확인하는 스무트 관세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법이 이듬해 6월 확정됨에 따라 미국의 공황이 유럽까지 번져 무역전쟁 분위기를 촉발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1992년 선거를 앞두고 앨버트 고어가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로스 페로에게 스무트 상원의원과 홀리 하원의원 초상을 선물로 보내며 그런 파국이 또 일어나기를 바라냐고 야유하는 촌극이 있었다. 그만큼 스무트 관세법은 잘못된 국가이기주의 정책으로 정평 있었다.

 

자유무역 이념에 냉소적인 입장인 저자는 스무트 관세법에 별다른 잘못이 없었으며, 때맞춰 일어난 파국의 책임을 뒤집어쓴 희생양이 된 것이라고 해명한다. 방대한 자료를 근거로 스무트 관세법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점들을 반박하는 것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면들이 있다. 희생양을 많이 필요로 해온 미국 정치의 특성을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호무역을 선호하는 저자의 관점으로 인해 역사성이 외면당하는 듯한 불만감이 이 대목에서부터 일어난다. 그의 고찰은 대부분 19세기 상황을 배교 대상으로 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한 상황 변화는 고려하지 않았다. 그에게 1910년대 저관세 정책은 일시적인 일탈 현상일 뿐, 시대 변화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대공황이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처럼 그려지는 것이다.

 

이후 상황의 서술을 보면 이 불만감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 엑스는 무역정책이 정치적 고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냉전시대 서방진영의 역량과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방으로부터 수입을 규제하지 않음으로써 국내의 사회-경제적 부담을 감수한 일, 탈냉전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지도력 정립을 위해 구체적 국익을 희생시켜 가면서까지 자유무역 체제를 추구하는 일이 그에게는 모두 불만스러운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대표적 비판자였던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국부론>이 개인의 부와 인류의 번영만을 고찰 대상으로 하면서 국가의 존재를 충분히 감안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 뒤를 따라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엑스의 관점이 이 시대에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러나 미국의 무역정책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는 인물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세계화'의 길목에서 간과하지 못할 일이다.

 

인류가 국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과연 '자유무역의 천년왕국'은 열릴 것인가. 엑스의 책을 덮으며 떠오르는 의문이다. 엑스가 인용한 카를 마르크스의 말이 귓전에 남는다. "자유무역 체제는 국가 간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간의 대립을 극한으로 끌고 갈 것이다. 그 결과 사회혁명이 촉진되리라는 단 한 가지 이유에서 나는 자유무역 체제에 박수를 보낸다." 다가오는 상황에 대한 고찰의 방향을 넓힐 필요가 절실하게 느껴진다. (1995년 11월 26일)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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