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es Bergman, Orion's Legacy

 

"사냥이란 개념 통해 문명 위기 진단"

"현대문명의 자연정복, 사냥꾼 처벌로 상징화 - '사냥문화의 극복' 포스트모더니즘 과제 암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인류가 1만여 년 전쯤 농업을 시작하면서 특이한 발전의 길로 접어들었다. 자연의 세계와 다른 문명의 세계를 키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오늘의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과 동떨어진 혼자만의 위치에 서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인류는 자연에서 직접 먹이를 구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사냥과 관련된 개념들이 얼마나 현대인의 의식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지적으로 찰스 버그먼은 <오리온의 후예들>을 연다.

 

예컨대 여자를 구하는 남자를 사냥꾼의 자세로, 남자의 손에 떨어지는 여자를 사냥당하는 동물의 입장으로 비유하는 관념은 일반 현대인의 의식 속에 아직까지 남아있다. 그리고 이 관념은 문명의 형성기 사냥의 시대에 남자들이 사냥을 전담하던 상황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사실 이 관념은 20세기의 '과학적' 발견으로 강화된 것이다. 1924년 남아프리카의 해부학자 레어먼드 다트는 요하네스버그 부근의 동굴에서 백만년 전 유인원의 유골을 발굴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 이름붙여진 이 유인원은 같은 동굴에서 원숭이의 구멍난 두개골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커다란 짐승을 잡아먹고 산 것이라고 다트는 추정했다.

 

인류의 조상이 오랫동안 사냥을 주업으로 하였으리라는 다트의 주장은 수십년간 많은 고고학자-인류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오랫동안 사냥으로 살아오면서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 사냥의 행동양식에 의해 결정되었으리라는 설명도 여기서 파생돼 나왔다. 예를 들어 사냥의 주체였던 남성이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을 보이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당연하다는 것이다.

 

이 학설이 오랫동안 풍미한 데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비롯해 인간의 공격성과 파괴성을 어떻게든 해명해야 했던 시대상황이 작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80년대 이후 이 학설이 불신을 받게 된 데는 남녀평등이 강조되는 새로운 시대상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트의 '육식 유인원' 설을 정면으로 반박한 <사냥꾼? 사냥감?(The Hunters or the Hunted?)>에서 C K 브레인은 요하네스버그 원숭이 두개골의 구멍이 유인원의 무기가 아니라 표범의 이빨로 난 것임을 치밀하게 고증했다. 그 무렵 인류의 조상은 큰 집승을 잡아먹으러 찾아다니기보다 잡아먹히지 않으려 피해다니기 바빴으리라는 것이다.

 

사냥을 생업으로 하는 아프리카 부시먼의 면밀한 연구도 육식 유인원 설에 반증을 제공한다. 사냥에 종사하는 남자가 사냥에 쓰는 시간이 1주일에 10여 시간에 불과하며, 사냥한 동물이 인간의 식량 중 차지하는 비중도 5분의 1에서 3분의 1 수준이라 한다. 이런 사회에서 사냥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일 뿐, 문화 형성 방향을 결정하는 배경요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당당한 정복자로서 사냥꾼의 모습은 문명이 성립된 뒤에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라고 버그먼은 설명한다. 그리스신화의 위대한 사냥꾼 오리온은 세상의 모든 짐승을 죽이겠다고 장담한다. 키오스 섬의 짐승을 모두 죽인 뒤 오리온은 그 섬의 공주 메로페를 겁탈했다가 두 눈을 잃고 쫓겨난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의 도움으로 시력을 되찾지만, 인간이 여신과 통교했다는 죄로 사냥의 여신 알테미스가 보낸 전갈에게 물려죽는다.

 

그러나 신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해서 밤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주었다. 겨울하늘의 오리온은 바로 앞의 황소좌 꽁무니를 끝없이 쫓아다닌다. 어찌 보면 플레이아데스 성단(星團)의 처녀들을 쫓아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자기 뒤에 전갈좌가 쫓아오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있다. 짐승과 여자를 한없이 추구하며 죽음의 위협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이 신화를 만든 사람들에게 사냥꾼의 모습이었을까?

 

이성과 폭력이 그리스인의 사냥 신화에 어울려 나타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냥은 자연에 대한 도전이며 문명의 힘을 집중해서 발휘하는 행위였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크세노폰과 플라톤이 후진의 교육에서 사냥을 중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일이다.

 

테베의 사냥꾼 악티온이 다이아나 여신의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본 죄로 사슴의 모습으로 변해 자기 개들에 찢겨죽는 설화는 매우 상징적이다. 말하는 능력, 자기가 주인임을 밝힐 능력을 빼앗긴다는 것은 문명의 힘으로 자연을 정복하는 사냥꾼에게 꼭 맞는 처벌이라 할 것이다.

 

유럽에서는 근세까지 사냥이 인간의 중요한 활동영역으로 지속되어 왔으며 그런 속에서 그리스인이 만든 사냥 이데올로기가 전승되어 왔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철학을 '지식의 사냥'으로 보았던 관점은 유럽인의 근대과학에까지 그대로 살아있다. 오늘날 운위되는 '문명의 위기'를 '사냥문화의 위기'로 좁혀 봐야 한다는 저자의 관점에 따른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과제는 사냥문화의 극복에 있는 것일까. (1996년 9월 14일)

 

 

Posted by 문천

 

6.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계정부’의 실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근대화’가 산업사회 초입에서의 한 차례 방황이라고 본다면, 본 단계의 근대화는 어떤 방향의 변화일지 무엇을 보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저는 두 가지 지표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이고 하나는 인간사회의 조직방법입니다. 물론 두 지표는 서로 얽힌 것입니다.

 

종래의 근대화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아무런 절제나 균형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일방적 지배만 생각했지요. 인간의 권리만 생각하고 그 책임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의 책임보다 권리만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입각한 근대사회 조직방법에서는 조화와 균형을 확보하는 메커니즘이 취약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라는 환경론자 머레이 북친의 말에 저는 공감하는데, 이 말을 뒤집어서 하면 더 중요한 뜻이 담길 수 있다고 봅니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균형감각을 잃은 것이 인간사회의 가치관 획일화와 극단적 분화현상을 불러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945년 원폭 투하에 충격을 느낀 아인슈타인은 “인류와 문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계정부 창설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현실성 없는 발언이란 비판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세계정부라는 생각이 현실적이지 않다면 우리 미래에는 단 하나의 현실적 전망만 있을 뿐이다. 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전면적 파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계정부’란 국가정부가 국가 내의 질서에 책임을 가지는 것처럼 세계적 질서에 책임을 가지는 주체가 나타나는 ‘정치적 세계화’를 뜻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난 20여 년간 이야기해 온 ‘세계화’는 따져보면 ‘경제적 세계화’만을 뜻한 것입니다. 진정한 ‘세계주의(globalism)’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국가의 파괴를 통해 ‘개인주의’를 확장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죠.

 

국가가 국민의 권리와 책임을 규정하고 보장하는 것처럼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을 관리하는 세계정부의 존재가 인류문명의 지속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근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어 온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동안 초강대국의 위치를 누려온 미국의 역할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정부상태 지속이 자국에 유리하다고 미국은 판단했고, 그러한 미국의 정책을 견제할 만한 힘이 지구상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문제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 두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11.2kw)이 세계 평균(2.1kw)의 다섯 배가 넘는다는 사실이고(2011년 기준), 또 하나는 개인의 총기 보유가 허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은 세계체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턱없이 높은 자원소비 수준을 계속해 온 나라고, 문명국답지 않게 힘의 원리에 거의 아무런 절제를 가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2008년의 금융공황은 미국 패권주의 중심의 세계적 무정부상태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신호였습니다. 중국의 정책 선택이 미국의 정책 선택에 상당한 압박을 가하는 상황이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죠. 그 압박의 수준은 냉전시대의 소련보다 훨씬 더 심대한 것이고, 지금도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변화의 추세를 외면하는 미국의 정치적 관성 때문에 대안으로 떠오르는 중국의 입장이 반사적으로 강화되는 형국입니다.

 

중국 역시 힘을 키우면 패권주의 성향을 나타낼 걱정이 있다고도 합니다. 이미 패권주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주의와 비슷한 것이 될 염려는 없다고 봅니다.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갑을관계’를 맺은 것 같은 압도적인 힘을 중국이 가지게 될 것 같지는 않고, 중국이 미국과 달리 문명의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유럽식 근대화의 출발에 맞춰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나라는 유동성 과잉 시대의 산물로서 절제의 메커니즘이 원래 취약한 사회입니다. 중국이 설령 큰 힘을 갖게 되더라도 홉스봄이 말한 ‘극단의 시대’를 답습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계정부’는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근대국가처럼 꼭 확고한 체제를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조약과 협약의 집합체 형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원과 환경에 관한 협약의 확대와 강화를 위한 노력에 대해 지금까지 미국의 저항이 뚜렷했지요. 미국의 저항력은 그 동안 약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 약해질 것입니다.

 

68년 전 아인슈타인이 말한 ‘당위’가 이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뚜렷한 현실이 언제까지 이뤄질지 지금 장담하지 못해도, 지금까지의 전 지구적 무정부상태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은 분명합니다. 무조건적 절대자유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고, 자연과의 관계에서나 인간관계에서나 ‘절제’가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을 내다봅니다.

 

산업사회가 지구의 한 모퉁이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산업화 선발주자들의 세계정복에는 아무런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세계정복은 인간의 자연정복과 짝을 이루는 변화였습니다. 2중 구조의 이 정복사업은 균형과 조화를 고려할 필요 없이 일방적으로 3백 년간 진행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에 뒤이은 급속한 산업화는 이 정복사업의 한 차례 완성을 가져오면서 세계가 그 다음 단계에 직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 신자유주의자들은 온 세계를 향해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외쳐 왔습니다. 자기네의 자원낭비 라이프스타일을 모든 인류에게 따라 하라고 권해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13억 중국인과 11억 인도인이 정말 그 라이프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한다면?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파국이 명약관화합니다.

 

자연의 제약을 무시하던 인류의 오만을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 오만으로 빚어진 절대자유와 절대인권의 환상이 98%에 대한 2%의 지배를 뒷받침해 왔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제약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인간사회의 조직 원리도 자유와 인권에 대해 보다 겸손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중시되는 새로운 세계체제의 필요성이 현실정치에 얽매이지 않은 아인슈타인의 눈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7. 속박이란 거부할 것이 아니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 세계화를 바라보는 움직임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란 이름으로 나타나 왔습니다. 그 이념을 아인슈타인은 ‘세계정부’로 표현했지만 그보다 ‘세계연방’이란 말이 더 많이 쓰입니다. 국제주의는 민족주의와 맞서는 것도 아니고 기존 주권국가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민족주의와 주권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국제주의가 아니라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의 범주에 들어갈 것입니다.

 

앞으로 나타날 세계정부가 형태에 있어서는 지금의 유엔보다 더 치밀한 조직을 당장 필요로 할 것 같지 않습니다. 국제주의가 한껏 고양된 시점에서 유엔이 탄생했기 때문에 세계정부의 전망이 유엔 조직에 많이 담겨 있었죠. 그 후 미국 패권의 부각에 따라 유엔의 세계정부 조직이 공동화(空洞化)하고 만 것입니다. 세계정부 형성은 유엔을 중심으로 국제적 조약과 협약이 확대-강화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형태가 어떠하든 세계정부 형성이란 전 지구적 차원의 공공성 확충을 의미합니다. 어떤 문명 어떤 사회에서든 지속가능성은 공공성에 바탕을 둡니다. 주먹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 정보의 힘이든 힘의 작용에 절제를 가하는 것이 공공성입니다. 절제 없이 힘이 날뛰는 정글 상태에서는 어느 문명이나 사회도 오래갈 수 없습니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처럼 거대한 변화에는 상당 기간의 과도기가 필요합니다. 새 체제의 건설보다 옛 체제의 파괴에 주력하는 기간입니다. 대형전쟁 등 낭비적이고 불합리한 현상이 많이 일어나지만 자원 공급의 급격한 증가 덕분에 당분간 계속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공공성의 원리가 극도로 약화됩니다. 그러나 자원 공급 증가 추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화하게 되어 있고, 그에 따라 공공성이 회복된 안정적인 체제가 자리 잡게 됩니다.

 

근대적 현상의 핵심 요소로 꼽혀 온 개인주의가 과도기의 특징입니다. 개인주의는 원자론적 세계관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공공성의 확충은 원자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유기론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원자론적 세계관이 뒷받침하는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인권의 관념이 유기론적 세계관으로는 상대화의 대상이 됩니다. 자유도 인권도 현실의 인간관계 속에서 제한된 의미를 갖게 되는 겁니다.

 

‘멋진 신세계’의 꿈을 잃는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집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역사를 통해 실제 어떤 형태로 존재해 왔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전제체제니 봉건체제니 속박 속에 살던 상태를 근대인은 미개한 것이었다고 깔보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종이 상당한 속박 속에서 살아갈 특성을 진화시켜 왔습니다. 그런 특성 없이는 자연조건의 속박 속에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절대인권과 절대자유는 마치 인간이 자연조건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생각한 환상의 산물입니다. 사람들이 그 환상에 빠져 문명 발생 이래 사회를 보호해온 공공성의 원리를 잊어버렸을 때 힘을 가진 집단이 아무 견제 없이 힘을 휘두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대형전쟁을 비롯한 온갖 ‘근대적’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환상을 버리고 속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성격, 어떤 수준의 속박을 어떤 방법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겁니다. 적합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공공성이 확충된 새 체제가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고, 적합한 방법을 찾는다면 인간의 본성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생존과 생활의 양식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환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합니다.

 

근대화 시작 이래 파기 대상이 되었던 ‘전통’의 재발견이 중요한 일입니다. 근대화 이전 긴 시간에 걸쳐 농업사회가 운영되어 온 원리가 바로 전통입니다. 자연조건이 주는 제약과 그 제약에서 비롯되는 인간 사이의 억압을 가능한 한 가볍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전통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제 산업사회의 정상상태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농업사회의 정상상태를 참고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상상태’라는 공통점 위에서 ‘전환기’와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세계정부 체제는 지금까지의 근대국가처럼 하나의 정부가 모든 국민을 개인으로 상대하는 체제가 아닐 겁니다. 봉건체제처럼 지지와 보호를 교환하는 계약관계가 중층적으로 맺어지는 유기적 관계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유기적 관계 속에서는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구성원보다 안정된 공동체를 가진 구성원들이 유리한 조건을 누릴 것입니다.

 

공동체의 가치가 자본주의체제 안에서도 부각되기 시작하는 추세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의 네 가지 형태로 토지, 건물, 기계와 함께 ‘인간 자본’을 꼽았지요. 이 인간 자본이 인간 자체가 아니라 생산에 공헌하는 인간의 능력, 즉 그 물질적 측면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랫동안 해석되어 왔는데, 근년의 ‘사회적 자본’ 탐구는 인간 자본의 의미를 점점 더 넓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로버트 퍼트넘의 <나 홀로 볼링 Bowling Alone>은 사회적 자본으로서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책입니다. 사회적 자본의 형태를 '본딩(bonding)'과 '브리징(bridging)'으로 구분한 점이 이 책에서 특히 주목을 끕니다. 본딩은 동질적 집단 내의 유대감이고, 브리징은 이질적 집단들 사이의 연대감입니다. 대표적인 본딩 조직은 조폭이고, 브리징 조직은 자원 봉사나 취미 활동 등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단체에서 나타납니다.

 

두 가지 조직력의 적절한 배합이 사회적 자본의 확충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고 퍼트넘은 설명합니다. 각 집단 내에 적정 수준의 본딩 조직력을 가지면서 다른 집단들 사이에도 집단이기주의를 뛰어넘는 브리징 조직력을 가지는 것이 개인, 집단, 사회의 이해관계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며, 또한 경제 발전을 순조롭게 해주는 조건이라는 거죠.

 

어느 집단이든 조직력을 가진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조직의 목적을 위해 희생과 양보를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 희생과 양보의 중요한 내용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입니다. 유기론적 세계체제 안에서는 여러 층위에서 맺어지는 이런 관계가 네트워크를 이루게 될 텐데, 그 기본 원리의 한 모퉁이를 퍼트넘이 보여준 것입니다. 자본주의체제 자체도 이런 방향의 변화를 내다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떤 체제 안에서도 각 개인은 속박을 적게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모든 속박을 거부할 수 있다는 환상은 오히려 불필요한 속박까지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현실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환상을 벗어나, 자신의 인간성 발현을 근본적으로 가로막지 않는 적절한 형태와 적절한 수준의 속박을 선택할 때 아인슈타인의 세계정부가 실현될 것입니다.

 

 

 

8. ‘근교원공’의 시대는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전국시대 후기까지도 이웃나라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끼리 전쟁을 벌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생산력 발달에 따라 군대가 커지고 군량이 쌓여 전쟁 벌일 여력이 생기기는 했지만 전면전이 되기 쉬운 이웃나라끼리의 전쟁은 꺼리는 경향이 있었던 거죠. 제한된 규모의 원정군을 보내 제한된 범위의 전쟁을 벌이는 이런 경향을 ‘근교원공(近交遠攻)’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진(秦)나라가 ‘원교근공(遠交近攻)’으로 정책을 바꿨습니다. 소양왕(기원전 307~251년 재위)이 범수(范睢)의 헌책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먼 나라와의 전쟁을 삼가면서 이웃나라 공략에 국력을 집중하는 정책이었죠. 소양왕이 이 정책을 채택한 후 50년이 안 되어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릅니다.

 

전쟁은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사업입니다. 아무리 적이 밉더라도 가용자원에 한계가 있으면 전쟁을 쉽게 벌일 수 없고, 벌여도 오래 계속할 수 없지요. 춘추시대의 ‘계절존망(繼絶存亡)’은 전쟁을 적게 하고 작게 하는 질서의 원리였습니다. 전국시대의 급격한 생산력 발전이 ‘전국(戰國)’시대를 가능하게 하고, 마침내 정복전쟁을 통한 천하통일로 전국시대를 끝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마지막 단계가 ‘원교근공’, 즉 총체적 전면전의 시기였습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진나라의 강한 힘만이 아니라 당시 인민의 평화 염원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염원의 바탕에는 자원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깔려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에 대한 염원이 충분히 크지 않았다면 진나라에 대항하는 각국의 전쟁 노력이 더 끈질기게 지속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진시황의 통일로 안정된 평화가 바로 이뤄진 것이 아니죠. 백년 후 한 무제(기원전 141~87년 재위) 때 흉노 정벌을 거쳐 어느 정도 안정된 천하체제가 자리 잡았다고 저는 봅니다. 전국시대를 벗어나고도 새로운 안정을 얻기까지 백년의 시간이 걸린 거죠.

 

중국의 전국시대 3백년과 비슷한 것이 지금까지의 근대 3백년입니다. 전쟁이 많아지고 커지다가 결국 총체적 전면전의 시기까지 겪었습니다. 산업혁명의 생산력 발전이 가능하게 해준 일입니다. 이 유추를 더 이어나간다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의 패권이 세워진 것을 진시황의 통일과 비슷한 단계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본다면 냉전시대 소련의 역할을 한나라 초기의 흉노와 비겨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원교근공과 근교원공의 비교로 돌아가 보죠. 원교근공은 지극히 소모적인 정책이었습니다. 패권 추구 세력이 방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을 때 이 정책을 구사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문자 그대로 ‘우승열패’, ‘적자생존’을 통한 패권 통합이었습니다.

 

세계대전은 자원공급의 한계 앞에서 원교근공의 양상으로 벌어졌습니다. 멀리 떨어진 나라들끼리 손잡고 이웃나라들과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냉전 단계에서도 이 양상은 계속되었습니다. 지구 반대쪽에 있는 나라와 ‘혈맹’ 관계를 맺고 같은 민족과 이웃나라를 원수처럼 대한 한국은 그 가장 대표적 사례의 하나였죠.

 

그러나 냉전체제 안에서도 근교원공의 양상으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냉전 종식을 계기로 그 흐름이 커지고 강해졌습니다. 유럽통합이 가장 두드러진 사례입니다. 냉전기의 동-서 대결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시대의 민족국가 대결까지 극복하고 초국가적 국제질서를 도입하는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말한 문명권의 통합 추세가 바로 근교원공의 원리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유럽 기독교문명권만이 아니라 다른 문명권에서도 통합 추세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죠. 그런 추세에서 유럽 통합이 가장 앞서 나가는 것은 근교원공의 실익(實益)을 가장 투철하게 인식하기 때문일 겁니다. 원교근공의 폐단을 가장 철저하게 겪은 지역이니까 인식이 투철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문명권 통합의 추세는 한국을 둘러싸고도 진행되어 왔습니다. 중국과의 교류 확대가 단적인 예죠. 한국사회는 냉전시대의 의식 상태를 벗어나는 데 뒤졌기 때문에 근교원공의 원리를 능동적으로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목전의 경제적 이익만을 보고 중국과의 교류를 늘려온 거죠. 지구 반대쪽과의 무역보다 이웃나라와의 무역에 이로운 점이 많다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 드러나 왔습니다.

 

이제 와서야 ‘인문(人文) 유대’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웃과의 긴밀한 관계를 능동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한 거죠. 아직도 물적 교류가 늘어난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는 미약한 인식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 인식은 앞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습니다. MD 참여를 비롯한 반동-수구적 정책이 얼마나 자해적인 것인지도 곧 깨닫게 되겠죠.

 

이런 상황에서 중국보다도 더 가까운 이웃, 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한을 ‘이웃’이라고 부르는 데 반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시겠죠. 저는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부부간에도 ‘이웃’을 대하는 것 같은 조심성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간이니까” 아무렇게 대해도 된다는 방심이 관계를 해칠 위험이 있습니다. 조심할 일은 조심하면서 관용과 배려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편이 좋지요.

 

북한인과 한국인은 같은 민족이지만 오랫동안 격리되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오면서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지금의 서로 다른 점을 비판하기보다 관용하면서 앞으로 관계를 키우며 더 많은 경험을 공유하다 보면 민족으로써 통하는 점들이 살아나게 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통일’이란 말도 마음속에 묻어두고 싶습니다. 너무 큰 욕심을 담은 그 말보다 ‘통합’ 정도에 노력을 모으며 통일의 씨앗이 스스로 자라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갖고 싶습니다.

 

몇 달 동안 닫네 마네 말이 많지만, 저는 개성공단을 만들어낸 남과 북의 여러 관계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북한과의 관계에도 근교원공 원리의 적용이 바람직한 것이고 또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개성공단이 분명히 보여줘 왔습니다. 공단 폐쇄를 비롯해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싶어 하는 세력이 여러 해 동안 정권을 끼고 획책해 왔음에도 공단을 쉽게 없애지 못한 것은 그것이 자해행위라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내세우기보다 근교원공 원리의 연장선 위에 우선 세워놓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도 굳이 목표로 내걸지 않은 채 경제적 득실만 따라오면서 오늘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북한과의 관계도 같은 기준으로 운영해 가다 보면 근교원공 원리의 실익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고, 그런 뒤에는 그 특수한 의미도 생각할 여유가 생길 겁니다.

 

 

 

맺는 말: 우리 후손들은 우리보다 좋은 세상을 살았으면.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속박을 어느 정도 감수하며 사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라는 의견을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한 번 제 블로그에 이런 의견을 적었을 때 독자 한 분이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경제적 양보나 사회보장의 축소는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유의 축소’는 양보도 안 되고 이해도 가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분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치를 좀 줄이는 것은 물론, 다소의 곤궁에 시달린다 해도 인간의 품격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유가 없는 인생이라면 인간다운 삶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경제적 여유보다 정치적 자유가 더 본질적인 ‘인간의 조건’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자유도 재정이나 마찬가지로 절약도 가능하고 긴축운영도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고요. 자유가 조금도 없는 인생은 분명히 인간다운 삶이 못 됩니다. 그러나 무한한 자유,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형편에 따라 돈을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편에 따라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유에 대해 현대인이 신축성 있는 생각을 하기 힘든 것은 그것을 추상적 관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관념화를 부추기는 이런 극단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응당 누릴 수준의 자유조차 누리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흥정을 거부하는 사람은 시장에서 불리한 입장을 면할 수가 없으니까요.

 

자유는 좋은 것, 속박은 나쁜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한 번 뒤집어봅시다. 자유의 의미를 넓게 해석하면서 모든 사람의 자유를 보장할 때, 약한 사람보다 강한 사람이 누리는 자유가 더 클 것은 당연한 일이죠. 지나친 자유가 평등의 이념을 해치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의 가치를 정말 아끼는 사람들은 절대적 존중을 받을 자유의 ‘본질’을 좁혀 보려 애씁니다. 환경과 자원을 아끼는 것과 마찬가지 자세입니다.

 

속박이라는 것도 차분히 생각하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죠. 가족 사이, 친구 사이 등 모든 인간관계가 나름대로 가치를 갖는 것은 속박이 있기 때문입니다. 파편화된 현대세계에 진력이 난 사람들은 이런저런 의미의 ‘공동체’를 이야기하죠. 아무 속박 없는 공동체가 가능한가요? 구성원들의 속박은 모든 공동체의 필수 요소입니다.

 

‘자발적 속박’은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관계를 맺을 때는 그에 따르는 속박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그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속박을 느낄 때가 있더라도 견뎌내려고 애쓰죠. 자유와 속박의 구분에 큰 의미가 없는 그런 상태가 인간관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자발적 속박에조차 거부감을 느끼기 쉬운 현대사회 분위기가 문제입니다.

 

자유와 평등의 관념은 ‘절대자유’와 ‘절대평등’의 환상을 부추김으로써 전근대 사회의 유기적 질서를 파괴하는 데 이용되어 왔습니다. 이제 절대적 환상을 버리고 상대적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상황에 인류사회가 와 있다고 저는 봅니다. 지난 3백년간 전개된 약육강식의 무정부상태를 벗어날 정치적 세계화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정치적 세계화의 구체적 경로를 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가 유기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 되리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중세체제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지난 3백 년간의 ‘근대체제’에서 말살되었던 중세체제의 많은 요소들이 회복될 것을 예상합니다.

 

‘봉건적’이니 ‘전제적’이니 자유와 평등의 기준으로 무작정 폄하해 온 중세체제에 좋은 점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 새로운 시각에서 공부할 필요가 떠오를 것입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로 펼쳐졌던 중세체제가 모두 학습 대상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공부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것이 동아시아 중세체제일 것입니다. 가장 큰 규모로 가장 오랫동안 전개된 체제였고, ‘중세 이후’를 모색한 경험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유교적 천하체제가 이제부터의 정치적 세계화에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유교적 천하체제를 오랫동안 실행한 우리 민족의 ‘전통’이 큰 가치를 가진 경험으로 활용될 수 있겠죠.

 

전통의 여러 측면 중에서 저는 무엇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원리를 먼저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질서에 순응하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중국 중심 천하체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천하체제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정치적 주권과 문화적 독자성을 최대한 지켰습니다. 전면적 거부와 전면적 수용이 모두 멸망의 길임에 반해 화이부동은 민족사회의 생존을 기하면서 동시에 천하체제의 안정에도 공헌한 노선이었죠. 이 노선 덕분에 우리 선조들은 오랫동안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평화와 번영을 잘 누릴 수 있었습니다.

 

68년 전 해방 때 조선인에게는 전통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민족국가 수립 염원은 외국인의 배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이 땅에서 살던 방식을 되살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선조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잘 사는 길을 열심히 닦았고, 그 길을 후손에게 남겨줬습니다. 일본 침략으로 끊겼던 그 길을 해방된 조선인은 아직 잊지 않고 있었고, 그 길을 다시 잇고자 했던 것입니다.

 

해방 1년 후 군정청 여론국에서 8,453명에게 지지하는 정책노선을 물었을 때 70퍼센트가 ‘사회주의’를 택했습니다. ‘자본주의’ 14퍼센트, ‘공산주의’ 7퍼센트와 비교가 되지 않는 압도적 지지였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모두 외래의 극단노선이고, 그 중간에 우리에게 맞는 길이 ‘사회주의’일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겁니다. “전통의 회복을 원하느냐?” 하는 질문이 직접 주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주어진 질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 후 68년 동안 전통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이 흐려졌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관념의 지배가 강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존재의 가장 큰 측면의 하나인 ‘민족’을 똑바로 생각하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양심적 지식인들도 관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죠. 한국 사회가 미국의 충실한 아류가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전통을 잃은 사회가 전통을 가지지 않은 사회를 모델로 삼은 것입니다.

 

대한민국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만 본다면 이 사회는 전통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단 상태에서 역설적으로 민족사회 복원의 열쇠를 찾습니다. 극히 피상적인 이유로 극단적 단절 상태가 계속되어 온 남북관계는 민족사회의 존재를 언제나 떠올려주는 거울입니다. 온갖 곡절이 이어지고 있는 남북관계를 바라봄에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측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해방일기”의 다음 작업으로 남북관계의 이 측면을 해설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20세기는 괴롭고 부끄러운 시대였습니다. 어째서 그런 시대를 겪게 되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망국의 역사”와 “해방일기” 작업을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의 대응이 잘못되었기보다 세계적 변화의 압력이 너무나 강했다고 하는, 외인론(外因論) 쪽으로 저는 기울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변명으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늘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차례 작업을 마무리하며, 이만하면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진 하나의 관점을 세웠다는 만족감을 느낍니다. 이 관점이 정말 타당한 것인지는 앞으로 펼쳐지는 상황에 의해 검증되겠지요. 과연 20세기의 불행한 역사가 21세기에도 이어질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은 우리보다 좋은 세상을 살게 될 것인지.

 

지나 봐야 알 일이죠.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느 만큼은 사람 뜻에도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백여 년 전 망국 때, 68년 전 해방 때는 우리 선조, 선배들이 좋은 뜻을 많이 일으켜도 외세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좋은 결실을 바로 맺지 못했습니다. 그때보다는 우리 사회의 주체적 노력이 성과를 바라보기에 좋은 환경을 맞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희망을 저와 함께 하는 분들은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우리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문천

 

3. 문명 전통의 단절은 소유의 상실을 넘어 존재의 상실이었다.

 

 

백 년 전의 망국이 우리 민족사회에 실제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한 번 따져보죠. 당시 사람들에게는 조선이라는 왕조의 멸망이 제일 큰일로 보였겠죠. 왕조가 수백 년 동안 국민 생활의 모든 면에 작용해온 역할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합방 당시 제일 뚜렷한 저항은 ‘대한제국’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나타났죠.

 

그런데 불과 10년 후 3-1운동에서는 ‘대한민국’이 독립의 주체로 나타납니다. 대한제국은 사실 국가 노릇을 별로 잘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문을 닫자마자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사라진 겁니다. 왕조가 제 노릇 잘못해서 문 닫는 것은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도 응당 있을 수 있는 일로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왕조의 멸망이란 당장 충격은 컸더라도 겉보기만큼 큰 의미를 가진 일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왕조 멸망보다 후세의 우리 눈에 더 크게 보이는 것은 이민족 지배입니다. 민족국가 성립 이래 한민족은 이민족 지배를 받은 일이 거의 없어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큰 침략 때도 이민족 군대가 들어와 군사활동을 벌였을 뿐이지 지배체제를 만들지는 않았죠. 이민족 지배에 가장 가까운 경험이라면 13-14세기의 몽골지배기인데, 간접지배에 그친 것이기 때문에 ‘지배’가 아니라 ‘간섭’이란 말을 굳이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조선 지배는 철저한 직접지배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인류의 절반이 식민 지배를 겪고 있었어도, 통치기구의 밑바닥까지 일본인 손에 장악하고 있던 조선처럼 철저한 직접지배는 유례가 드물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저는 두 가지 의미에서 궤변이라고 합니다. 첫째, 일본처럼 조선을 먹고 싶어 하는 나라가 없었어요. 가장 비근하게 지목하는 것이 러시아인데, 러시아도 만주의 이권 앞에서는 조선을 일본에게 선뜻 양보했습니다. 아관파천으로 얻은 유리한 입장을 활용하지 않았어요. 러일전쟁은 러시아가 조선을 넘봐서가 아니라 일본이 만주를 넘봐서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둘째, 설령 다른 나라 식민지가 됐더라도 일본 지배처럼 지독한 지배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대개의 지배국은 피지배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해서라도 웬만한 일은 현지인에게 맡깁니다. 조선처럼 통치기구의 과장급까지 현지인이 배제되는 식민통치는 문명수준이 훨씬 낮은 곳에서나 있었던 일입니다.

 

조선이 일본 통치 아래 근대화를 이뤘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근대화의 객체가 된 것이지 주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식민지배의 협력자집단이 근년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데, 조선의 친일파는 협력자라도 아주 수준 낮은 협력자였어요. 친일파 중의 친일파 박흥식이 천황 한 번 (단체로) 배알했다고 방방 뜨는 꼴을 봤다면 다른 곳 협력자들이 웃었을 겁니다. 해방 당시 근대적 제도의 운영경험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는 사실이 그 후의 발전에 큰 족쇄가 되었습니다.

 

이런 면을 살피다가 왕조의 멸망과 이민족 지배에 이어 망국의 세 번째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문명 전통의 단절이라는 문제입니다.

 

어떤 문명이든지 나름의 질서를 갖고 있으며, 그 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일차적 역할을 맡는 엘리트계층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합니다. 학식과 재산을 가진 엘리트계층은 자기 사회 안에서 특권을 누리기 때문에 그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공헌할 동기를 가집니다. 엘리트계층의 역할이 제도와 관습으로 안정되어 있는 사회는 어떤 변화 앞에서도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합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선비’ 또는 ‘양반’이란 이름의 엘리트계층이 있었습니다. ‘양반’이란 이름은 특권을 누리는 측면과 흔히 결부된 것이므로 ‘선비 정신’ 측면에 중점을 두고 보죠. 선비의 전통은 중국과 상당부분 공유한 것인데, 송나라의 범중엄(范仲淹)이 선비 정신을 잘 요약한 말이 있습니다. “선비는 천하의 걱정을 남보다 앞서서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뒤에 누린다.” 권리보다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말한 것이죠.

 

선비의 일차적 기준은 학식입니다. 학식은 모든 경쟁에서 유리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학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일을 넓고 깊게 보는 눈도 가졌습니다. 그래서 개인적 욕심을 채우는 데만 골몰하지 않고 세상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데도 힘을 쓰게 되죠. 크게 보면 그것이 자기 이익을 제대로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 속에는 학식을 갖고도 자기 이익만 생각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관습과 제도가 작동했습니다. 예기(禮記)에 “형벌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고(刑不上大夫) 예법은 서인에게까지 내려가지 않는다(禮不下庶人)”고 한 대목이 있죠. 피지배계층이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통제되는 반면 지배계층은 명예를 아끼는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중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선비는 안보의 주체요, 공공성의 수호자였던 겁니다.

 

조선 후기의 정치 퇴화는 선비 정신의 침체를 가져왔습니다. 정치투쟁이 목숨을 건 전쟁처럼 되면서 웬만큼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들도 패거리 의식을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어요. 생사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공공성을 챙길 여유를 가질 텐데 그런 여유가 자꾸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19세기 들어서는 심지어 임금까지도 정치투쟁의 마당에서 선수로 뛰게 되었어요. 모든 국가권력이 사유화의 대상이 되어 공공성이 증발해 버린 상태를 매관매직의 성행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기능이 쇠퇴하면 왕조는 망하게 되고, 얼마동안 혼란을 겪다가 선비계층의 풍토가 쇄신되면서 다음 왕조가 들어서는 것이 중국과 조선에서 반복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도 문명 전통의 일부로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때 일본의 침략을 받으면서 정상적 경로를 벗어나 식민지로 전락해버리고 만 겁니다.

 

일본 식민지배가 일으킨 해악이 여러 가지 지적되어 왔는데, 나는 선비정신의 억압이란 문제를 특히 중시합니다. 선비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도태당하고 그런 것 안 가졌거나 버린 사람들이 혜택 받는 상황이 수십 년간 펼쳐지는 가운데 우리가 ‘친일파’란 이름으로 떠올리는 유형의 집단이 재산과 고등교육을 집중적으로 향유하게 되었습니다.

 

선비정신이 한 차례 쇠퇴해도 혼란을 겪다 보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 문명의 흐름입니다. 달이 기울었다가 다시 차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런데 조선 후기에 침체한 선비정신은 식민지시대를 겪으며 말살되고 말았습니다. 문명 전통의 단절은 소유의 상실을 넘어 존재의 상실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 사회의 생명의 원리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4. 우리는 근대화의 주체였던가, 객체였던가?

 

 

‘전통’의 의미에 생각을 모아 보겠습니다. 전통을 근대화의 장애물로서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생각이 많이 퍼져 있었습니다.

 

근대화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만 보는 관념은 한국인만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산업혁명의 시작 이래 부국강병에서 나타나는 그 놀라운 효과를 보며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유일한 활로로 여기는 근대화의 풍조가 유럽에서 일어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근대화 진행과정의 각 단계에서 선발국과 후발국의 대비가 나타났습니다. 후발국은 열세 만회를 위해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죠. 그래서 근대화된 체제를 빨리 세우기 위해 기존 체제를 마구 때려 부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도시재개발을 위해 옛 시가지를 뭉개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죠.

 

근대화의 선발국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든 자본주의든 자기네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펼쳐진 현상이었습니다. 이웃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억지로 한 일이 아니죠. 그래서 영국의 근대체제에는 전통의 연장이라는 측면이 크게 남아 있습니다. 의회제도만 보더라도 오늘날 기준으로는 불합리한 요소들이 많이 남아있고 신분의식도 강합니다.

 

바로 그 뒤를 이은 프랑스나 네덜란드 같은 서유럽국가의 근대화 진행에는 영국에 뒤졌다는 조바심 때문에 다소 서두른 면이 있지만 그래도 전통의 연장이 꽤 이뤄졌습니다. 그보다 뒤진 독일, 그리고 더 뒤진 미국, 러시아, 일본 등 후발국으로 갈수록 전통의 연장이라는 측면이 더욱더 좁아지게 되었죠.

 

20세기로 넘어올 무렵까지 ‘열강’의 명단이 한 차례 작성되었습니다. 이 명단에 든 나라들은 선발국을 쳐다보며 열등감과 초조감에 쫓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주변을 굽어보며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자존심을 지킬 여지가 있었던 거죠. 막차를 탄 일본의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유행한 ‘탈아입구(脫亞入歐)’ 구호가 전통 부정의 자세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몇 십 년 후 그 일본을 부러워한 중국 지식인들의 신문화운동에 나타난 극단적 유교 전통 부정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열강 대열에 들지 못한 나라들은 정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피정복자들은 정복자들의 압도적 힘 앞에서 자기네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지키기 힘들었고, 정복자들은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피정복사회의 전통을 열심히 파괴했습니다. 물질적 정복과 정신적 정복이 나란히 진행된 거죠. 식민지 조선이 겪은 일입니다.

 

일본의 세계대전 패전으로 일본인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한국인이 이질적 문명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자기네 영향력 확보를 위해 당시 한국인이 염원하던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정권을 세워주었고, 그 결과 한국인은 전쟁과 독재를 겪어야 했습니다.

 

독재정권은 지식인의 양심적 활동을 억압하는 일본 식민지배의 민족탄압 정책을 이어받았습니다. 독재정권 아래 특권을 누린 집단은 식민지시대의 친일파 집단과 거의 같은 속성을 갖게 되었죠. 전자의 집단이 후자 집단의 직계 후예라는 주장이 무성한 것은 그 동일한 속성 때문입니다. 정신적 후예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특권 집단은 독재정권 종식 이후 식민지배나 독재권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기 특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계속해서 맡고 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자기가 속한 사회를 보호하려는 유산계층과 유식계층의 노력이 미약한 사회는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엘리트계층의 부재는 패망을 피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근로자와 사업가들이 아무리 생산에 힘을 써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국부 유출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문화인들의 문화 활동도 민족문화 성장과 발전으로 잘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왜 전통의 의미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지 생각을 돌려보죠. 우리 사회가 당해 온 침략과 정복은 ‘개인의 파편화’를 통해 이뤄져 왔습니다. 개항기 때 만국공법의 ‘만국평등’ 원리를 내세워 동아시아 천하체제를 해체시킨 일을 생각해 보세요. 일본 침략의 첫 번째 구호가 ‘조선 독립’ 아니었습니까? 매국노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을 쓴 사실이 그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허구의 평등을 내세워 현실의 차등을 가려놓음으로써 천하체제의 결속력을 해체하고 손쉽게 각개격파에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유동성 증가가 근대화의 기본 과제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라 해서 꼭 한 순간에 몽땅 해치워야 하는 것은 아니죠. 사회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유기체의 속성을 가진 조직입니다. 유동성을 늘리더라도 적절한 속도로 적절한 수준까지 늘려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유동성의 급격한 증가에는 부담이 따릅니다. 힘이 강한 사회는 이 부담을 힘이 약한 사회에게 떠넘깁니다. 자기는 견딜 만한 정도로 완만하게 유동성을 늘리면서 다른 사회에게는 주체성을 지킬 수 없는 급격한 유동화를 강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복’이죠. 정복당하는 사회에서도 근대화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근대화를 ‘당하는’ 겁니다. 근대화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것입니다.

 

허구의 평등으로 현실의 차등을 감추는 것은 ‘만국평등’만이 아니라 ‘만인평등’의 구호를 놓고도 벌어진 일입니다. 피정복사회의 정복에 대한 저항력을 꺾기 위해 그 내부질서를 무너뜨리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법으로 평등의 이념이 이용된 것입니다. 오해 없기 바랍니다. 나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 평등이 사회 구성원들의 꾸준한 노력을 통해 주체적으로 이뤄지기 바라며, 외부의 정복자가 던져준 평등이 내부질서 붕괴에 이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20세기를 통해 우리 민족사회가 외부세력에게 당해 온 침략의 중요한 본질이 강요된 유동성 증가에 있었다고 저는 봅니다. 파편화된 개인이 각자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비생산적이고 불건강한 사회풍토, 안보의 주체와 공공성의 수호자로서 엘리트계층의 부재가 모두 성숙과정 없는 유동성 증가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사회의 생명의 원리로서 전통이 꺾여버린 것입니다.

 

 

 

5. 지금까지의 ‘근대’란 ‘가(假)근대’가 아니었을까?

 

 

산업혁명은 농업혁명에 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 맞는 존재양식의 큰 변화입니다. 농업혁명 이전의 인류는 먹을 것을 자연에게서 ‘얻어먹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주면 먹고, 안 주면 굶고. 농업혁명으로 ‘찾아먹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자연이 던져주지 않아도 재주껏 먹이를 찾아 허기를 달래게 된 거죠. 그러다가 산업혁명은 ‘뺏어먹는’ 단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자연을 변형-훼손시키면서 식량과 에너지를 뽑아내 욕심을 채우게 된 것입니다.

 

존재양식의 변화에 따라 사회의 조직 원리에도 변화의 필요가 일어납니다. 농업혁명 이전 인류의 개체수는 지구상에 1천만 이하로 추정됩니다. 몇 억이 되었을 때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지금은 70억에 이르렀습니다. 말 그대로 세계가 ‘좁아지는’ 변화입니다. 좁아진 공간 안에서 어울려 살려면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중세 농업사회로, 그리고 근대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유동성 증가가 필요하게 된 것은 이 까닭입니다. 농업혁명으로 채집-수렵사회에서 농업사회로 넘어올 때도 체제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농업사회에 적합한 체제가 안정되는 데는 무척 긴 시간이 걸렸죠.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안정된 체제가 자리 잡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체제 변화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근대체제’로 이해해 온 자본주의-민주주의체제가 사실은 산업사회에 가장 적합한 체제가 아니라 더 안정성 있는 체제를 모색하는 과정의 하나의 시행착오나 과도적 현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2년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로 환경과 자원의 한계 문제가 부각된 이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개념에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40년 동안 파국을 늦추기 위한 노력은 늘어나 왔지만, 확실한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았죠. 기존의 근대체제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탈(脫)근대’(postmodern)란 말을 흔히 하는데, 저는 ‘본(本)근대’를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근대’가 ‘중세’처럼 상당기간 인류사회의 안정된 상태를 이루려면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 온 근대보다 훨씬 지속성 있는 체제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근대를 ‘가(假)근대’(pseudomodern)로 볼 수도 있는 거죠. 꼭 이런 말을 쓴 논설을 아직까지 본 일이 없습니다만, 비슷한 맥락에서 ‘근대’의 개념을 재고하려는 시도는 꽤 보입니다. ‘가근대-본근대‘를 하나의 가설로 내놓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20세기 후반에 ‘탈근대’란 이름으로 시작된 변화를 ‘근대화’의 본 단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펼쳐진 근대를 완성된 근대로 보기 때문에 ‘탈근대’란 이름을 붙인 것인데, 돌이켜 생각하면 이 3백년의 시기에는 인류사회가 안정된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농업문명 시작 때도 오랜 시간에 걸쳐 대형화된 전쟁이 세상을 휩쓸던 상황을 여러 문명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농업사회 체제 정착에 그런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산업사회 체제 정착에도 수백 년의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요?

 

과연 지금의 변화가 ‘탈근대’란 이름대로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 또 한 차례 격변의 시대를 인류가 겪게 될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넘어선 진정한 ‘근대화’로 안정된 세계체제를 이룩하게 될지, 지금 바로 단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을 ‘본근대’ 쪽으로 한 차례 모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근대라면 ‘근대 이후’가 어떤 것이 될지 판단할 근거가 별로 없는 반면, ‘본근대’의 방향은 지금까지의 궤적에서 이어나가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근대화의 본질은 사회유동성의 증가에 있습니다. 중세체제가 한계에 접근하며 유동성 대폭 증가의 필요가 느껴질 때 그 대책이 여러 방향으로 강구되었겠지요. 그중 유력한 대책으로 떠오른 것이 산업혁명을 앞세운 유럽식 근대화였습니다. 유동성을 일거에 급증시키는 극단적 대책인데, 어떤 변화든 변화 초기에는 극단적 대책이 흔히 통용되죠. 기존 체제 파괴라는 단기적 과제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시계추가 중간에 머물지 않고 반대편 끝까지 가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유동성의 급격한 증대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유럽식 근대화가 궤도에 오르자마자 문제들이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주의, 제도주의 등 대응책이 나왔죠. 그러나 시계추가 관성을 가진 것처럼 기존 ‘근대화세력’이 반동력을 발휘했고, 그 결과 20세기 전반기 동안 두 차례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었습니다.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확장은 유동성 억제 필요에 따른 현상이었는데, 이 역시 시계추가 지나치게 반대쪽으로 간 결과였습니다. 유동성을 너무 줄였던 거죠. 그에 비해 일부 유럽국에서 자본주의체제에 사회주의 원리를 가미하는 중도적 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환경 보호와 자원 절약을 지표로 하는 중도적 정책이 유동성을 적정선에 조정함으로써 산업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효과적인 방향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기본 방향에 거스르는 반동 노선이 신자유주의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유동성의 극단적 증대를 제창합니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파편화하는 데서 출발, 모든 인간적 가치를 자본의 가치에 종속시킴으로써 자본의 지배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없애는 데 목적을 둔 노선입니다. 소수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위해 세계가 움직여가는 자연스러운 방향의 반대쪽으로 매달리는 것이기 때문에 ‘반동 노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국내에서 ‘뉴라이트’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신자유주의 논설을 보면 해외의 신자유주의자들에 비해서도 표현이 무척 노골적입니다. 식민지시대를 겪은 사회에서 식민지 경험을 미화하는 주장이 이렇게 당당하게 횡행하는 것은 별난 일입니다. 타이완은 식민지로서 한국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을 누렸지만, 그런 주장이 공론의 무대에 나서지 못합니다. 신자유주의 반동 노선에 대한 한국사회의 저항력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항력이 약한 문제는 문명 전통의 단절이 심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단적인 문제가 엘리트계층의 부재 현상입니다. 재산과 고등교육을 비교적 많이 누리는 계층이 한국사회처럼 바깥만 쳐다보고 있는 것은 정상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 사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너무 적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