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는 존경받는 지도자가 너무 없다." 어제 오늘 듣기 시작한 탄식이 아니다. 이 탄식이 요즘 더욱더 절박해지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형언하기 힘든 파렴치범으로 드러나는가 하면 민주화의 지도자로 자타가 공인해온 인물들이 서로의 식언과 독선을 극단적인 언사로 비난하고 있다.

 

우리 사회만의 문제도 아니다. 2차대전을 전후한 「거인들의 시대」는 옛이야기가 돼 가고, 개성적인 지도자보다 조직의 속성에 따라 세상이 돌아간다. 정치가들의 도토리 키재기보다 마돈나와 빌 게이츠의 화려한 몸짓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냉전의 긴장감마저 사라진 지구촌은 과연 인간적인 지도력 없이 메마른 확률론에 따라서만 흘러갈 것인가.

 

하버드대학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가 <지도자의 정신>(Leading Minds)을 쓴 것도 이런 상황에 아쉬움을 느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지도력을 역사적 상황이나 대중의 요구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하는 근래 유행하는 관점 대신 그는 지도자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는 전통적 관점을 답습한다고 스스로 밝힌다.

 

「많은 사람들의 사고와 감정.행동에 영향을 끼친」20세기의 인물 11명이 이 책에 집중적으로 분석되어 있다. 통상적 의미의 정치적 지도자는 대처 수상 하나뿐이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원자탄 개발을 지휘한 물리학자 오펜하이머, 시카고 대학의 야심적 총장 허친스, GM을 30여 년간 이끈 슬로운, 모범적 군인 마셜 원수, 여성운동의 새 장을 연 엘레너 루즈벨트,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 킹 목사, 바티칸공의회를 이끈 교황 요한 23세, 유럽공동체 형성의 배경에서 활약한 장 모네, 비폭력주의자 마하트마 간디가 등장한다.

 

가드너의 인식론적 지도자론은 추종자들에게 전달하는 「이야기」(story)를 중심개념으로 한다. 시간을 두고 펼쳐지는 것이란 점에서 고정된 형태를 띠는 「메시지」와 다른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의 중심이 되는 것은 집단의 정체성과 가치관이다. 우리가 함께 속한 집단이 어떤 것이며, 그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가르쳐주고 일깨워주는 것이 곧 지도력의 발휘라고 말한다.

 

「이야기」의 형태와 범위를 결정하는 것은 추종집단의 성격이다. 넓고 다양한 구성원을 가진 집단에 먹혀들 수 있는 「이야기」는 그 집단의 가장 낮은 의식수준에까지 맞춰질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그는 추종자의 의식수준을 개인성장의 여러 단계에 비겨 본다. 자기밖에 모르는 유아기, 피아-선악의 대립구도로 세상을 보는 소년기, 세상의 다양성에 눈뜨기 시작하지만 안정된 대응방법을 갖추지 못하는 사춘기, 인간적 종합에 도달하는 성년기.

 

하나의 국가나 민족과 같이 의식수준에 제한이 없는 집단에 대해서는 5세의 유아도 납득시킬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는 통하지 않는다. 강한 지도력이 흔히 배타적인 방향으로 나타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회의 발달은 보다 포용적인 성향을 필요로 하게 하고, 또 가능하게 한다는 관점에서 저자는 미래 지도력의 가능성을 바라본다.

 

『지도자의 정신』에서 다룬 인물의 대부분(허친스와 대처를 제외하고)도 포용적인「이야기」를 제시한 지도자들이다. 특히 미래 지도력의 모델로 가드너는 모네와 간디를 제시했다. 「이야기」의 포용성 외에 지도방법의 간접성과 투철한 실천 자세를 양자는 공유한다. 장 모네는 문명화된 유럽 민주국가들의 단합을 2차대전 전부터 꾸준히 제창했다. 아무런 공식 직함 없이 교분을 가진 각국 정치가들에 대한 개인적 설득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고,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으면 협조한 사람들에게 그 공을 돌렸다.

 

지지부진하게나마 유럽통합이 이루어져온 과정의 그 숱한 어려움에 그가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수준 낮은 대중과 직접 접촉함으로써 상처받는 일이 없었던 데 있었다.

 

마하트마 간디를 흔히 「인도 독립의 아버지」로 인식하지만 그의 진정한 지도력은 전 인류에 끼친 것이었다. 그 「이야기」의 골자는『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재로서, 설령 피억압자라 할지라도 도덕적인 입장을 세움에 당당할 수 있으며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지도력이 인도독립이라는 당면과제를 넘어서서 널리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직접적인 성과에 얽매이기보다 개인생활에서 투철한 실천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미래의 지도력에 대한 가드너의 희망은 국가와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포용정신의 확산에 있다. 유아적인 자기중심주의나 소년적인 흑백론을 넘어서서 다원성을 인식하는 어른들끼리 수준 높은 판을 벌이자는 얘기다.

 

아무리 좋은 얘기라도 민족의 울타리조차 미처 갖추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섣불리 끼어들만한 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이야기」란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지도자 부재(不在)를 생각하는 데 좋은 화두가 되겠다. 1995. 12. 3

 

 

Posted by 문천
2013. 9. 25. 11:25

 

한국의 고스톱처럼 중국의 '국민스포츠'로 꼽을 것이 '훙스(紅十)'였다. 한국에서 더러 노는 '빅투(big two)'와 노는 방식이 꽤 비슷한, 브리지 종류 카드놀이인데, 훙스(하트10과 다디아먼드10)를 쥔 선수끼리 편이 된다는 점이 특색이다. 훙스 두 장을 혼자 쥐었으면 나머지 세 사람이 모두 한 편이 된다. 공원에서든 길가에서든 네 사람 둘러앉을 만한 자리가 있는 곳에서는 훙스 노는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카드 한 벌 있고 사람 넷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으니 고스톱에 필적하는 간편한 놀이다.  

 

간편하다는 점에서 훙스에게 밀리지만 진짜 인기있는 놀이는 역시 마작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훙스는 마작의 대용품이다. 마작용구(패와 상)가 갖춰져 있지 않은 곳에서 놀고 싶을 때 부득이하게 훙스로 만족하는 것이다.

 

처가 식구들 노는 품을 보면 근년 마작이 힘을 얻고 있는 것 같다. 중국 경제가 빈약하던 10년 전에는 괜찮은 마작패 한 벌 갖추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웬만한 꾼이 아니면 집에 마작상(床)까지 갖춰놓지 않았고, 좋아하는 사람들도 대개 동네 노년활동실에서 놀거나 집에서 밥상 위에 담요를 깔고 놀았다. 그렇게 놀아서는 오래 놀기 힘들다. (중국의 노년활동실은 한국의 경로당보다 훨씬 잘 활용되는 공간이다. 누구 사회학자가 그 차이를 한 번 살펴주면 좋겠다.)

 

그런데 지금은 웬만한 집에 자동화된 마작상까지 갖춰져 있다. 이 상에는 마작패 두 벌이 들어 있어서 한 판 논 뒤에 스위치를 누르면 가운데 구멍이 열려 논 패를 쓸어넣을 수 있고, 다시 스위치를 누르면 준비되어 있던 패가 상 위로 올라온다. 그리 비싸지도 않은 모양이다. 우리 동네 노년활동실까지 자동 마작상을 갖추고 있다.

 

큰언니(예봉 어머니) 집에는 자동 마작상이 있고, 둘째 언니와 셋째 언니 집에는 일반 마작상이 있다. 모처럼 4자매가 어울려 놀 수 있는 요즘, 집합만 하면 제일 열심히 하는 것이 마작이다. 우리집에 한 번 모였을 때는 식탁을 거실 가운데 꺼내 놓고 놀았다.

 

전에 연변 있을 때 훙스는 배웠지만 마작은 배우지 않았다. 훙스야 소시쩍부터 즐겨 온 카드놀이와 수준이 비슷한 거니까 사교활동을 위해 배우는 데 별 부담감이 없었다. 하지만 마작은 워낙 그 중독성이 악명높은 놀이인 데다, 거창한 기구까지 사용한다는 점에서 거부감이 들었다. 연변을 떠나 한국에서 7년 지내는 동안, 연변 그립다는 소리를 훙스 놀고 싶다는 말로 표현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연변 와도 훙스 놀아주는 사람이 없다. 처가 식구들과 어울리려면 마작을 배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여기 건너온 이래 대략 하루 건너 실습을 하고 있다. 서너 차례 노니까 조교의 도움 없이 혼자 놀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받은 패에 따라 나름대로 작전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10년 전처럼 마작 배우기를 꺼리지 않게 된 것은 중독성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연속적 움직임이 필요한 놀이를 잘 못하는 만큼 차례에 따라 노는 보드게임(장기와 바둑, 화투로 시작)에 쉽게 빠지는 성향이 있었다. 지나친 중독 성향을 스스로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 몇 해 동안 바둑에 손이 가지 않게 되면서 그 걱정이 없어졌다. 평생 가장 강한 중독 대상이 바둑이었는데, 거기에 묶이지 않는다면 묶일 데가 어디 있겠나?

 

바둑도 더 강해지고 싶은 마음이(이것이 바로 중독현상의 원흉!) 어느 단계에서 가라앉았다. 고수들 바둑을 재미있게 관전할 만한 안목, 그리고 편안한 친구와 대국을 더러 즐길 만한 기량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러니 인터넷에서 모르는 사람들과는 대국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마작도 그럴 것 같다. 작전 선택의 길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바둑으로 치면 5급 정도라 할까? 조금 더 익히면 가족들에게 환영받는 선수가 될 것이고(지금은 입문시키느라고 억지로 붙여준다.), 거기서 조금 더 익히면 보드게임에 강한 적성을 활용해서 가족들 사이에서는 꽤 강한 선수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거기까지다. 가족들이 무서워할 선수가 될 일은 결코 없다.

 

한 차례 모여 몇 시간 놀면 따고 잃는 것이 30원 안쪽이다. 50원 넘게 잃거나 따는 일이 어쩌다 있으면 온 동네 소문날 정도다. 지금까지 수업료 바친 게 100여원 되는데, 이제 수업료가 크게 더 들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재밌는 놀이를 전엔 왜 그렇게 무서워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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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예봉 내외와 우리 내외, 그리고 예봉 어머님, 다섯 사람이 1박2일 다녀왔다. 운전은 예봉 나그네가 내내 했는데, 역시 프로답게 믿음직했다. 차종은 혼다 중국공장 제품인데 덩치도 크고 힘도 좋았다.

 

경박호는 연변에서 장백산 다음가는 경승지다. 관광 중점은 호수의 북쪽 끝, 흑룡강성 녕안시 땅에 있지만 호수의 상류, 남쪽 부분은 연변주에 걸쳐 있다. 용암이 둑 모양으로 골짜기를 가로막고 굳어져 이뤄진 자연호수다. 깊이가 60여 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떠나기 전날 밤에야 컴퓨터 프로그램이 정비되어 인터넷으로 조사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내외가 10년 전에 가본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예봉 어머님이 가본 것은 더 오래 전이었다. 전에는 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그 동안에 길도 좋아졌고 이번에는 기동력이 좋은 만큼 쉽게 찾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잘못된 믿음이었다. 길은 확실히 좋아졌다. 왕청과 춘양을 거쳐 전에 버스를 내렸던 동경성 부근까지는 잘 갔다. 그런데 길이 너무 많아졌고, 도처에 공사중이었다. 열 번쯤 길을 물어 겨우 도착하니 늦은 점심때였다.

 

공원 북문(경박호 관광의 중심지) 거의 다 가서 공사중인 길 앞에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소형 승합차 하나가 다가와 더할 수 없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찍새한테 걸린 것이다. 북문 앞 여관촌의 한 업소였다. 따라가 보니 꽤 깨끗한 집에 5인실이 150원이라서 일단 숙소를 정했다. (중국 1원은 한국돈 약 180원)

 

관광에 대해 물어보니 폭포 구경, 유람선, 지하삼림 세 가지가 있는데, 먼저 폭포 구경을 하고 오후 뒷쪽에 유람선을 타고 내일 아침에 지하삼림을 보는 순서를 권한다. 그에 따라 폭포 구경부터 했는데, 유람선 얘기가 좀 이상하다. 자기네가 주선하면 공원입장료만 내고 승선료는 안 내게 해준다는 건지, 그 반대로 해준다는 건지, 유혹의 냄새가 풍긴다.

 

알고보니 입장료를 안 내고 개구녕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승합차를 타고 산길을 한참 돌아 관광지구보다 몇 킬로 북쪽의 호숫가로 내려간다. 큰 건물이 있는데, '흑룡강성 법관학원(성 단위의 사법연수원? 로스쿨?) 경박분원'이란 간판이 붙어 있는 대문 옆의 호변에서 소형 모터보트(8인승)를 타고 30분쯤 물위를 달리고 나왔다.

 

한 사람에 100원씩 받았다. 공원 입장료가 85원이고 관광지구에서 유람선은 대형이 100원, 모터보트가 200원(장거리 코스는 그 갑절씩), 그리고 공원 내 버스값이 왕복 24원이니까 손님 입장에선 엄청 절약이다. 공식 유람코스가 물론 더 길기는 하지만 맛만 보면 됐지, 뿌리 뽑을 필요가 있나. 어린애들 있으면 관광지구에서 시간 보내기가 좋겠지만 우리 관광단은 일정 빨리 끝내고 여관에 돌아가 마작판 벌일 마음뿐이다.

 

관광의 암시장을 경험한 것이다. 손님 찍어 가는 여관 쪽과 배 모는 쪽이 합작하는 사업인데, 법관학원 관리자와 공원 관리자 쪽에도 상납이 있겠지. 오후 뒷쪽의 감독이 느슨한 시간대를 활용하는 것 같고, 꽤 번창하는 사업으로 보인다. 3시경 우리가 갔을 때는 우리뿐이었는데, 30분 후 나올 때는 수십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7년 전까지 그곳에서 살던 때와는 관료주의와 부정부패 등 사회상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느끼고 있었는데, 아직도 변하지 않은 구석이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입장료와 승선료 등 공식 요금을 절반 이하로 내리면 관광산업이 더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을 텐데, 높은 요금 수준으로 관광객을 쥐어짜는 시늉을 하면서 엉뚱한 넘들 배 불려주는 행태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저녁식사 주문에서 어둑신한 관광산업 행태를 또 하나 겪었다. 주방 뒤의 대형 어항에서 생선을 고르라고 하는데, 이곳의 명물 물고기를 먼저 열심히 권한다. 엄청 비싼 놈이라서 10년 전 왔을 때 우리는 못 먹은 놈이었다. 여럿이 온 길에 한 번 맛을 볼 만한 기회이기는 했다. 그런데 한 놈을 뜰채에 떠서 저울에 달 때 일행 중 누군가가 "그거 괜찮아 보이네." 정도 한 마디 하자 말 떨어지기 무섭게 부엌바닥에 패대기를 친다. 흥정할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그 시점까지 우리 일행 중 누구도 한 근에 320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1킬로 남짓한 생선 요리 한 접시를 670원, 한국돈 12만원에 시킨 꼴이 되었다. 그 돈이면 아무리 물가 비싼 관광지라도 다섯 사람이 호화로운 식사를 할 수 있는데... 제대로 흥정했으면 그 반값으로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나 포함홰서) 혀를 차고 지나갈 텐데, 예봉 어머님이 불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저녁식사는 '분노의 만찬'이 되고 말았다. 나쁜 놈들 돈 벌게 해주면 안 된다고 해서 생선 외에는 토닭 한 마리밖에 더 시키지 못했다. 식탁에 앉았을 때도 식기를 한 세트만 쓰자고(물잔, 술잔과 앞접시. 한 세트에 2~3원 받는다.) 고집했다.

 

73세의 예봉 어머님은 19세 연하의 막내동생이 나랑 결혼할 때 돌아가신 분을 대신해서 내 가시어머니(장모) 역할을 가로맡고 나섰고, 그 동안 그 역할을 실제로 맡아주신 분이다. 카랑카랑한 성격이다. 고집이 너무 세서 주변사람들 난감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지만 생각이 참 명민한 분이다. 자기 주장을 내세을 때는 가차없어도, 그 주장의 한계나 문제점을 쉽게 깨우치고 선선히 태도를 바꾸는 일이 많다.

 

식사 중 그분의 화를 누그러뜨리는 데는 내가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 다음으로 나이가 많고, 다른 일행보다는 어렵게 대해주는 상대니까. 생선 한 점 먹으면서 "천하명어다!" 닭고기 한 조각 집으면서 "천하명계다!" 술 한 잔 마시면서 "천하명주다!" 즐기는 시늉을 할 때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다 보니 얼굴이 조금씩 풀리신다. 식사가 끝나갈 때, "이런 별미를 즐길 기회를 만들어준 여러분께 감사드리는 뜻에서 물고기값만은 제가 내겠습니다." 하니까 "그런 계산법이 어디 있누!" 핀잔을 던지면서는 행복한 가시어머니로 완전히 돌아와 계시다.

 

저녁 후에는 마작을 놀다가 잤다. 이번에 배운 마작 이야기는 언제 한 번 따로 써야겠다. 새로 배우는 일본인과 한국인 선수들의 훈련 기회를 넉넉히 주기 위해 예봉과 아내 중 한 사람이 빠져준다.

 

이튿날 오전에 지하삼림을 구경했다. 10년 전에는 못 보고 돌아갔던 곳이다. 공원 북문에서 서북쪽으로 30킬로 가까이 가서 입장료 55원과 버스값 30원씩을 내고, 버스로 30분 가까이 달려 지하삼림에 도착했다. 두 개의 분화구가 붙어있는 곳인데, '갑' 분화구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을' 분화구와의 경계선으로 올라오고, '을' 분화구 테두리 중 제일 높은 곳의 전망대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도록 관람로가 설치되어 있다. 구경거리로도 참 좋은 데다 산책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갑' 분화구에 들어서자 신이 나서 앞장서 내려가는 예봉 어머님을 보며 나는 걱정이 시작됐다. 내려가는 만큼 도로 올라와야 할 테고, 올라오는 길이라 해서 내려가는 이 길보다 덜 가파를 리가 없는데... 내 몫의 고생도 훤히 내다보이는데, 저 노인이 감당할 수 있을까?

 

'갑' 분화구를 빠져나오는 가파른 계단에서 우리 가시어머님은 강한 의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셨다. 경계선 전망대에서 한참 쉰 다음 '을' 분화구 등산로가 갈라지는 곳에서 내가 바로 내려가겠다고 하자 서슴없이 "나도!" 하신다. 다리 상태가 웬만하시면 "못난 것 다 보겠다!" 흉보기 바쁘실 분인데. 그래서 함께 휴게소로 내려와 모처럼 단둘이 함께 볕을 쬐며 한가하게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지금 아내가 전화통화를 하고는, 오늘 하루는 꼼짝 못하겠다고 하신단다. 마작도 오늘은 쉬시겠단다!

 

돌아오는 길은 돈화를 거치기로 했다. 전날 공원을 찾아가는 길에 '목단강-돈화' 고속도로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돈화를 거치면 길이 조금 더 멀더라도 힘이 덜 들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고속도로에 들어섰는데... 다음 인터체인지에서 내려야 했다. 그 앞은 아직 공사중이라고. 공사가 덜 끝난 고속도로에 '돈화'로 행선지가 표시되어 있다니! 아직 바뀌어야 할 것이 중국에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반도로로 해서 돈화에 도착하니 점심때가 한참 늦었다. 눈에 띄는 대로 물두부집에 들어가 허겁지겁 식사를 했다. 다섯 사람 식사에 27원! 전날 저녁에 900원 짜리 식사를 한 일행으로서는 참 검소한 식사였다.

 

돈화까지 온 길에 장백산도 보고 가면 어떻겠냐고 누군가가 말하자 모두 "좋지, 좋지!" 하면서도 농담이 심하다는 표정이다. 연길까지는 고속도로를 통해 아무 힘들이지 않고 돌아왔지만 각자 집에 들어가기 바빴다. 책임감이 여간 아닌 아내도 세상만사 귀찮다는 기색이다. 내 손으로 라면을 끓여 저녁을 때우고 골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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