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8. 13:12

 

오랜만에 게으름을 누리며 며칠 지내다 보니 내게 '게으름'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고딩 때까지는 게으름에 대한 죄의식을 모르고 살았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시키는 일이 벅차게 느껴질 때도 별로 없었고, 주변 애들 둘러봐도 나보다 엄청 부지런해서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 별로 없었다.

 

대학입시에서 황당하게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편안한 마음을 잃었다. 내가 특별한 인재라는 환상에 빠지면서 뭔가 늘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 참에 남이 시키는 것 적고 내가 알아서 할 것 많은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친구들이랑 한참 당구 치고 카드 치며 놀다 보면 "이래도 되는 건가?" 불안한 마음이 수시로 들게 되었다.

 

불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놀 것 다 놀기 위해서는 자기변명이 필요했다. 뭔가 목표를 정해서 공부해 볼 생각이 들어도, "이게 정말 그렇게 중요한 건가?" 스스로 물어보아 절대적인 답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확실한 목표가 설 때까지는 그냥 이렇게 지내지 뭐." 하면서 편안한 게으름에 머물곤 했다. 마음은 좀 불안해도.

 

설렁설렁 지내면서도 공부를 넓혀나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영어와 한문의 독해력 등 기술적 능력 덕분이었다. 그렇게 넓혀나가다 보면 언젠가 집중할 만한 방향이 저절로 떠오르리라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지냈다.

 

그런 생각이 학부에서 지도받던 민두기 교수와 맞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그분과 나는 학문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내 인생에 후회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분에게 말려들지 않은 일 하나는 스스로 대견하다. 그분은 제자들이 충실한 보병처럼 열심히 전진하기를(그분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라고, 자기가 지휘관 노릇을 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나는 자유로움과 자발성이 학문의 첫 번째 요건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석사과정을 경북대로 도망가서 했다. 그리고 석사논문을 참 열심히 썼다. 중국 역법이 집중할 만한 공부 방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사상사의 중요한 열쇠를 담은 주제고, 세계 어느 학자 못지않게 내가 잘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민 교수의 엄격한 지도를 피해 도망온 것이 게으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 확인시킬 필요도 느꼈다.

 

석사과정까지는 그렇게 해서 꽤 성실한 공부 자세를 지켰다. 그런데 박사과정에 입학해 놓고 군에 입대해 3년을 지내는 동안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특별한 인재'로서의 책임감을 내다버린 것이다. 내가 정말 사회에 대해 큰 책임을 가진 인재라면, 그렇게 무의미한 생활을 3년 씩이나 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세상이 어떤 덴지 알기 위해 서너 달 정도 겪어보는 거면 몰라도.

 

1977년 12월에 제대하고 1980년 3월에 박사과정에 복학했다. 학문 말고 다른 직업 갖고 살 수는 없을까, 2년 남짓 모색했으나 뾰족한 길을 찾지 못한 결과였다. 그때의 학계 복귀에 대해서는 과학사학회 송상용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내가 다른 길 보고 있는 동안 그분이 학회활동 계속과 시간강사를 권해주지 않았다면 복학 결심을 하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박사과정에 복학하고 이듬해 전임강사가 되어 '학자'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학문'의 본질에 대해 한국 학계에서는 드문 관점을 갖게 되었다. '사회에 대한 책임'을 무시하는 관점이었다. 학자는 자기 만족을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이고, 그 공부의 성과를 사회가 활용하는 것은 학자 본인이 신경 쓸 필요 없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보았다. 1985년 처음으로 유럽에 가 지낼 때 내 또래 그곳 학자들에게는 그런 관점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더욱 자신감을 갖고 학문을 취미활동으로 여기게 되었다.

 

1990년 교수직을 떠나자 게으름 문제가 학생 시절과 다른 차원에서 떠올랐다. 생계와 얽힌 문제가 된 것이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넓혀도 그 결과가 돈의 형태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일을 제대로 한 게 아니다. 40대 나이가 되어 비로소 사회와의 구체적 관계가 시작된 셈이다. 책을 읽더라도 돈 안 되는 공부는 취미생활일 뿐이니 일을 한 것이 못 되고, 내 게으름에 대한 죄의식을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7년 저술활동을 시작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많이 팔려 생계를 뒷받침해 주지 못하더라도 내 글이 책으로 묶여 나오는 것은 생산활동에 틀림없다. 그 동안 쌓아놓은 공부밑천 덕분에 출판사나 프레시안에서 환영할 만한 작업을 얼마든지 기획할 수 있었고, 오랜 딜레탕트 시기를 벗어나 모처럼 생산적인 인간이 되었다는 보람에 들떠 6년간 글쓰기에 파묻혀 지냈다. 그래서 원고지 2만여 매 분량의 글을 써냈으니 다른 허물은 몰라도 게으르다는 소리는 안 듣게 됐다.

 

생산활동의 절정이 <해방일기>였다. 그 집필 종료를 8개월 앞둔 시점부터 다음 작업 구상을 시작했다. 맹렬한 생산활동에 너무나 길들여진 결과, 부지런한 글쓰기를 계속하지 않는 나 자신을 상상하기 힘들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작업을 구상한 경위가 "뭘 할까" 카테고리에 단속적으로나마 적혀 있다.

 

그런데 <해방일기> 연재 종료 시점이 되자 게으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떠올랐다. 내가 글 쓰는 기곈가? 무슨 작업을 하고 무슨 글을 쓸지에 앞서 조금이라도 더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작업에 매달려 지내는 상태가 너무 오래되었다. 너무 들떠서 지냈다. 이것보다는 내가 더 익숙한 상태로 돌아가 나 자신이 6년 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차분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연변으로, 저술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지내던 곳으로 돌아오면서 체류기간을 가급적 길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뾰족히 할일도 없다. 읽으려고 구해두었다가 아직 못 읽은 책 5권(주경철 <대항해시대>, 프랑크 <리오리엔트>, 가라타니 <세계사의 구조>, <자연과 인간>, 아부-루고드 <유럽 패권 이전>)과 다시 읽을 책 2권(홉스봄, The Age of Extremes, 미야지마 <나의 한국사 공부>)만 들고 왔는데 와서 열흘이 되도록 아직 펼쳐보지 않았다. 가벼운 추리소설과 판타지소설로 소일을 하고 있다. 들고 온 책 꼭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없다.

 

할 수 있는 대로 게으르게 지내려 한다. 그러기엔 여기가 참 좋은 곳이다. 앞으로 한 달 남짓 이렇게 지내다 보면 앞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생각이 꽤 정리될 것 같다.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디어 마작까지!  (2) 2013.09.25
경박호(鏡泊湖) 유람기  (2) 2013.09.21
연변 - 집과 이웃  (3) 2013.09.10
서중석 선생 퇴임잔치 소감  (3) 2013.06.11
통영학교 답사기 / 2013. 5. 17-18  (0) 2013.05.21
Posted by 문천
2013. 9. 16. 17:45

 


1947년 3월 12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원조 계획을 밝히고 승인을 요청했다. 이 연설에서 소련을 직접 들먹이지는 않았다. “무장한 소수 세력 또는 외부 압력의 위협에 저항하고 있는 자유민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겪는 위협이 바로 세계평화와 미국의 안보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손을 잡았던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전쟁이 끝난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적대적 관계로 변해 오고 있었다. 트루먼의 이 연설은 소련과의 협력관계를 포기하는 선언으로 해석되어 ‘트루먼독트린’이란 이름 아래 반세기 가까운 냉전의 출발점으로 기억된다.

 

트루먼독트린의 본격적 실행 조치가 ‘마셜플랜’이었다. 트루먼의 의회 연설 석 달 후인 6월 5일 마셜 국무장관의 하버드 대학 연설로 모습을 드러낸 정책이다. ‘유럽 부흥 계획’이라고도 하는 이 정책은 유럽의 경제부흥 사업을 미국이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에 따라 1951년까지 150억 달러의 원조와 차관이 유럽 각국에 제공되었다.

 

1947년 봄에서 여름에 이르는 시기는 악화되어 오던 미-소 관계가 적대적 관계로 고착되고 있던 때였다. 두 나라의 협력으로 처리하게 되어 있던 조선 독립 문제는 이러한 상황 변화에 영향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는 이 시기에 모처럼 밝은 전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1년 전 중단된 후 방치되어 있던 미소공위가 4월 8일부 마셜 국무장관의 편지를 계기로 재개를 바라보게 되었다. 마셜의 편지는 소-영-중 3개 연합국 외무장관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소련의 몰로토프 외상도 4월 19일부 편지에서 재개 일자를 5월 20일로 지정하며 화답했고, 이를 수락하는 마셜의 5월 2일부 답신으로 회담 재개 방침이 확정되었다.

 

미소공위는 5월 21일에 재개되었고, 양측 대표단이 모두 열심히 일했다. 6월 11일 공동성명 제11호로 구체적인 로드맵까지 나왔다. 회담 성공 가능성이 확실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열심히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북조선 정당-사회단체와의 합동회의를 위해 6월 30일 양측 대표단이 평양으로 옮겨갈 때까지도 회담 실패를 걱정할 징조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7월 들어 회담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는 1년 전 파탄 때와 마찬가지로 협의대상 범위 문제였다. 1년 전에는 반탁운동에 나선 모든 정당-단체를 소련이 거부했는데, 이번에는 기왕의 반탁운동은 불문에 붙이고 참여를 신청한 주체들이 더 이상 반탁운동에 나서지 않도록 하는 기준으로 소련이 양보했기 때문에 회담 재개가 순조로웠던 것이다. 그런데 6월 23일의 극렬한 반탁 시위에 여러 우익 정당-단체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미국이 미소공위에 성의를 보이자 우익 진영에 균열이 일어났다. 미소공위 실패를 원하던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의 이름으로 미소공위를 보이콧하고 싶었지만 그 방침에 순순히 복종하지 않는 움직임이 커졌다. 한독당에 합류했던 국민당과 신한민족당 세력이 이탈했고 한민당도 미소공위 참여를 원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한민당 등의 미소공위 참여 신청을 정면으로 가로막지 못하고 장외에서 반탁운동을 벌이는 수밖에 없었다. 한민당 등 미소공위 참여세력도 ‘반탁’의 명분은 등질 수 없기 때문에 지지 성명 등으로 연루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 측은 6-23시위에 연루된 우익단체의 배제를 주장했고 미국은 이에 반대했기 때문에 미소공위가 또 한 차례 좌초를 겪게 된 것이다. 겉보기로는 그렇다. 하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회담 성사를 위한 열의가 7월 들어 미국 측에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미국 측에 성의가 있었다면 6-23시위 연루자들을 즉각 실격시키지는 않더라도 강력한 경고는 발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 측은 시위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였다. 소련 대표단 자동차가 시위대의 돌팔매질을 당한 사실을 미국 수석대표도 인정했는데 미군정 경찰은 ‘사실무근’이라고 잡아뗐다. 그리고 이후 회담에서 협의대상이나 회담 일정에 대해 조금의 유연성도 보이지 않았다. 회담의 좌초를 바라던 1년 전 태도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6월 중순까지도 회담 성공을 위해 열심히 일하던 미국 대표단의 태도가 이렇게 돌변한 까닭이 무엇일까? 이 무렵 유럽에서 진행된 마셜플랜의 전개 과정을 배경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트루먼독트린과 마찬가지로 마셜플랜도 ‘반공-반소’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유럽국이 협의를 통해 부흥계획을 세우면 미국이 그 계획에 동의할 경우 지원을 제공한다는 것이 마셜플랜의 형태였고 소련 등 공산국들도 초청 대상이었다. 소련이 설령 응하더라도 소련에 대한 원조 제공을 미국 의회가 승인할 가능성이 없었지만, 형식상으로는 초청을 했다. 그리고 동구 공산국을 원조로 유혹해 소련의 영향력을 교란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마셜플랜이 막 발표되었을 때 스탈린 자신도 미국 원조를 신청할 뜻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셜플랜이 소련 봉쇄를 위한 정책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뒤에도 스탈린은 실패를 유도하기 위해 참여하는 전략을 고려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하는 유럽국 협의가 경제공동체 건설과 철저한 상호개방을 원칙으로 세우는 것을 보고 참여를 포기했다.


미국은 마셜플랜 가동 전에 이미 150억 달러의 원조와 차관을 유럽 각국에 제공하고 있었다. 미국의 압도적인 경제력 때문에 모든 연합국이 경제 부흥을 미국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종전 2년이 지난 시점에서 미국 의회는 대외 원조에 차츰 인색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대규모 지원을 계속하면서 그 지원을 ‘체계화’함으로써 공산권을 봉쇄하는 냉전체제 구축에 활용하러 나선 것이었다.


동구권 국가들도 마셜플랜의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는 마셜플랜 발표 직후 참여 의사를 표명했다. 헝가리도 공식 표명은 하지 않았지만 큰 관심을 보였다. 소련은 이 나라들의 마셜플랜 참여를 막기 위해 압력을 대폭 늘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47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일어난 일이었다.

 

마셜플랜 발표를 전후해서 미국은 공산권의 동요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련이 마셜플랜의 성격을 빨리 파악해서 공산국들의 단속에 나서지 못하도록 소련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6월 중순까지 미소공위 재개에 유별난 성의를 보인 것은 마셜플랜으로 공산권을 유혹하던 시점의 일이었다. 7월 들어 미국이 미소공위에서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선 것은 공산권의 보이콧이 확실해진 때의 일이었다.

 

미소공위 좌초의 징후가 분명하게 나타난 것은 미국 측 브라운 수석대표의 7월 16일 성명이었다. 미소공위는 모든 발표를 양측 합의를 거치기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양측의 이견 내용을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은 더 이상 합의를 기대하지 않고 좌초 책임을 상대방에 미루겠다는 뜻이었다. 이로부터 마셜 국무장관이 조선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겠다는 방침을 9월 17일 발표하기까지 두 달 동안 미국 측은 미소공위 좌초를 기정사실화하는 데 몰두했다.

 

좌초 징후를 보이고서부터 유엔 상정을 발표하기까지 거침없는 진행을 보면 미소공위를 폐기하겠다는 미국의 방침이 확고히 세워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정책이 언제 세워진 것이었을까? 6월 중순까지 미국 대표단이 회담 성공을 위해 전력을 다한 태도를 보면 적어도 대표단은 미소공위 폐기 방침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유엔 상정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검토되고 있다가 6월 말 마셜플랜에 대한 소련의 거부 방침이 확인되면서 소련과의 전면적 대결정책에 휩쓸리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7월 12일 웨드마이어 장군을 중국과 조선에 대통령 특사로 보낸다는 소식이 나왔다. 중국과의 관계는 미국에게 극히 중요하면서도 난처한 문제였다. 마셜 국무장관이 1946년 내내 특사로 활동하면서 대책에 고심한 문제였다. 장개석 정부의 극심한 부패 때문에 원조 계속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고 있었고, 장개석 정부의 능력에 대한 의문도 심각해지고 있었다.

 

1947년 봄까지도 국민당군이 공산당 근거지 연안을 함락시키는 등 우세를 보였으나 여름이 되자 공산군이 전열을 정비해 팽팽한 대결상태로 돌아갔다. 미국의 원조를 늘이지 않으면 국민당 측이 열세에 빠질 위험까지 있었다. 그런데 트루먼과 마셜은 원조를 늘이기 힘든 입장이었다. 이 상태를 심층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웨드마이어 특사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 사명을 띤 웨드마이어 특사의 시찰 대상에 조선을 함께 넣은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중국과 조선을 묶어서 하나의 과제로 보는 미국 정부의 시각에 따른 것이었다. 중국에서 장개석 중심의 반공전선을 확고히 할 수 있다면 미국 입장에서는 조선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반면 중국의 반공전선에 안심할 수 없다면 조선에서의 대결에서 물러설 여지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었다.

 

해방 2주년을 석 달 앞둔 시점에서 미소공위가 재개되고 쌍방 대표단이 열심히 회담에 임할 때, 순조로운 건국의 희망이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재개 후 두 달이 지난 7월 중순에는 회담 성공을 바라기 힘든 분위기로 돌아서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여운형 암살은 민족주의자들의 희망을 꺾은 결정적 사건이었다.

 

해방공간 남조선의 거물 정치지도자로 김구와 이승만이 후세에 기억되는 것은 우익 정권이 세워진 후 좌익과 중도파가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당할 때까지 해방 후 2년간, 여운형과 박헌영의 영향력은 김구와 이승만에 뒤지지 않았다. 특히 여운형이 제시한 좌우합작-남북합작 노선은 김구의 독단적 노선에 비해 외세의 작용에 유연하게 대처하면서 민족 내부의 대립을 완화하는 길로서 갈수록 많은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모아가고 있었다.

 

1946년 6월 남조선 단독건국을 제기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 당시에는 분단건국의 위협이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의 노망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이 지나도록 미소공위가 다시 열리지 않고 있는 동안 이 위협이 분명해졌다. 김규식, 안재홍 같은 확고한 우익 민족주의자들이 김구의 곁을 떠나 여운형과의 협력에 매진하게 된 것은 분단건국을 막는 것이 민족주의자들에게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3년 전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작업을 하는 동안 조선 망국의 책임이 얼마만큼 조선인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책에서 내가 외인론(外因論), 조선인의 책임보다 외세에서 망국의 원인을 찾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비겁한 자기변명으로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40여 년간 역사를 공부해 온 발판 위에서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본 것일 뿐이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동아시아에서 '근대화'는 엄청난 힘을 가진 현상이었다. 조선왕조의 패망은 '동아시아 근대화'의 부수적 사건의 하나였을 뿐이다.

 

이제 분단건국을 놓고 조선인 자신의 책임 범위를 생각하면서도 나는 외인론으로 끌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형성된 새로운 상황 속에서 전세계적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미국과 이에 저항하는 소련의 힘이 한반도에서 맞부딪치고 있었다. 두 힘이 남북의 분단건국으로 일시적 평형을 이룰 기세가 1947년 초부터 뚜렷해지고 있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대표하는 중간파는 다른 형태의 평형을 제안하고 나섰다. 좌우합작을 통한 중립적 통일건국은 미국과 소련에게도 분단건국 못지않게 만족스러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었다.

 

여운형 암살범은 경찰을 포함한 남조선의 극우-반공-친미 세력이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 암살 책임이 조선인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인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 세력이 그런 짓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미국의 힘이었다. 조선 망국 때도 친일파 조선인의 역할이 있었지만 그들이 나라를 팔아먹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의 힘이 아니라 일본의 힘 덕분이었다. 구한말의 친일파도 해방공간의 친미파도 일본과 미국의 힘으로 만들어져 일본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이용된 수단이었을 뿐이다.

 

1947년 7월 시점에서 미군정이나 국무부 등 미국의 어느 정부기관에서도 여운형 암살 같은 극단적 조치를 공식적으로 결정했을 리는 물론 없다. 소련과의 협력정책으로부터 냉전 노선으로 넘어가는 이행기에 있었고, 남조선 단독건국 방침도 이제 막 분명해지는 단계였다.

 

여운형 암살은 조선인의 소행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책임을 미국에 두는가? 암살 세력을 미군정이 키워주었기 때문이다. 하수인들은 범행에 미군정 경찰의 도움을 받았고, 그 범행으로부터 처벌보다 보상이 더 클 것을 믿고 있었다. 지난 2년간 여운형이 겪었던 숱한 테러 위협에 대한 미군정의 반응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여운형 암살 세력은 넓은 의미의 '친미'가 아니라 미국 극우파에 호응하는 세력으로서, 미국의 공식 정책이 냉전 노선으로 확정되기 전부터 미-소 대결의 격화를 위해 매진해 온 세력이었다. 남조선에는 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큰 자원이 있었다. 친일파였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서 친일파는 빛을 찾았다.

 

통일건국이 되어 민족국가다운 민족국가가 세워질 때 기득권을 잃는 것은 물론 처단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들에게 분단건국은 기득권을 지키는 것은 물론 더 큰 권력과 이득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뭉쳐 좌우 대립과 미-소 대결을 부채질하는 일에 나섰다. 미국의 온건파에게 대안을 제시하는 중간파가 그들에게 첫 번째 공격 대상이었고, 여운형 암살은 그 공격의 일환이었다.

 

Posted by 문천

 

 
9월 2일 프레시안 강연을 위해 준비한 "21세기 민족주의"가 지난 20년간 공부해 온 문명사론을 담은 것이었습니다. '근대'의 성격에 대한 생각이 그 중심이죠. <밖에서 본 한국사>에도 그 생각이 비쳐져 있었고, <뉴라이트 비판>과 <망국의 역사>에서는 이론적 뼈대로 삼은 것입니다.
 
이 생각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위한 작업을 그 동안 여러 모로 구상해 왔죠. "동아시아의 20세기"와 "대한민국 실록", "노무현의 대한민국" 구상이 모두 이 생각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런저런 구상을 해 오면서, 그 생각을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가급적 작은 것을 찾게 되었습니다. 너무 큰 그릇에 담으려면 일도 많아지고, 담아 놔도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으니까요. <해방일기>에서 절실하게 느꼈죠.
 
지난 강연에서 '민족주의'를 들고 나온 것이 그런 그릇을 하나 찾은 겁니다. '민족주의'라는, 누구나 아는 주제를 통해 이 생각을 표현하는 길을 찾은 거죠. 이 그릇을 계속 다듬어가려 하는데, 재료로 남북관계사를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북관계는 민족주의의 현재와 미래가 펼쳐지는 마당이니까요.
 
종래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기준은 민주주의, 인권, 생산력, 소득수준 등 '근대적' 지표에 의지해 왔습니다. 민족주의는 구호로만 존재할 뿐, 실질적 지표 노릇을 못했죠. 일체의 전통적 가치가 외면받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전통적 가치를 새로 평가하는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지표로 끌어들일 경우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많이 넓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남북관계의 배경이 되는 세계정세의 변화를 새로 그리는 작업도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20세기사 서술 가운데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를 나는 제일 높이 평가하는데, 배경 서술을 그 수준으로만 끌어올려도 그림이 크게 달라지죠.(실제로 그런 수준의 배경 인식을 가진 한국현대사 서술이 아직 없죠.) 홉스봄의 서술은 1991년으로 끝나는데, 그 뒤의 그림도 내가 이어서 그리고자 합니다. 물론 홉스봄이 이미 그려 놓은 범위도 조금 고쳐 그릴 게 있고요.
 
개성공단(남북경협), 이산가족, 북핵, 평화체제 등등 남북관계에 관련된 많은 과제들이 현존하고, 앞으로 더욱더 부각될 것입니다. 이런 과제들에 대한 역사적 시각을 제공하는 작업에 내 문명사론을 활용한다면 독자들이 남북관계에 대한 생각을 다듬고 키우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책이 잘 팔리리라는 희망도.
 
이 정도로 오늘은... 더 궁금한 게 있으면 스스럼없이 물어보세요. 와서 추리소설 읽고 있습니다. 6년 전 저술작업 시작하기 전의 게으른 상태로 마음을 되돌려놓으려 합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