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nty Moore, The Emperor's Virtual Clothes / The Naked Truth about Internet Culture

 

"인터넷은 산만한 장난감에 불과"

 

 

우리 사회에도 인터넷 바람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인터넷 이용자가 국내 통신 인구 1백만 명에 비해 비교적 적은 25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지만 매일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지금과 같은 확장 속도가 계속된다면 10년 내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인터넷에 가입할 전망이라 한다.

 

급격한 변화 앞에 극단적인 우려와 기대가 엇갈리고 있다. 조지 오웰의 예언과 같이 개인의 인격이 매몰되는 사회가 올 것인지, 거꾸로 인간의 평등과 자유가 극대화되는 컴퓨토피아가 펼쳐질지, 인터넷은 너무나 큰 변수로 우리 앞에 닥쳐 있는 과제다.

 

작가이자 영문학 교수인 딘티 무어는 1994년 여름 출판사로부터 많은 독자들을 대신해 인터넷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그 잠재력을 문화적-사회적 시각에서 검토해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에 따라 1년간 인터넷을 둘러보고 쓴 기행문이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그의 검토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아직 인터넷을 깊이 살펴보지 못한 독자에게는 인터넷을 이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겠다.

 

무어는 먼저 '주제토론장'(Usenet)을 찾아간다. 1만여 개의 게시판에서 수십만인지 수백만인지 모를 사람들이 꾸준히 의견을 주고 받고, 모욕을 주고 받는다. 쓰레기처럼 뱉어놓은 말들이 도처에 쌓이고 있지만 그 틈으로 요긴한 도움이 오고가기도 하고 공간을 초월한 인정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무어는 계속 가상공간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더듬어나간다. 사랑을 얻는 사람들, 잃었던 사랑을 되찾는 사람들, 관계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의 훈훈한 이야기를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언제든 부담스럽게 느껴지면 스위치를 눌러 빠져나갈 수 있다는 손쉬운 안전성이 새로운 기회를 사람들에게 열어준다. 자기 마음이 내킬 때 이야기를 꺼내고 마음에 드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사연을 가지고도 대화 상대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인터넷이다.

 

이런 해방감이 사람들에게 약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달콤하고 편안한 가상관계에만 빠져들며 현실감각을 잃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무어는 정신건강에 대한 통신의 위협을 본질적인 문제로 보지 않는다.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가 가상공간의 특성에 의해 증폭돼 나타나는 것뿐이며, 문제를 쉽게 인식하도록 해준다는 면에서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개인적 문제보다 무어가 더 조심스럽게 바라보는 것은 통신의 사회적 측면이다. 통신이 시민 간의 의사소통을 극대화함으로써 민주제도의 궁극적 완성을 불러오리라는 일부의 희망적 관측에 그는 회의적이다. 지금까지 정치계에서 인터넷을 활용해 온 실적이 민의 수렴보다 정책 홍보에 치우쳐 왔음을 확인하며 이 추세가 바뀌지 않으리라 보는 것이다. 이념의 문제를 기술이 해결해줄 것을 그는 기대하지 않는다.

 

인터넷에는 임자가 없다. 1969년 미 국방부가 만든 알파넷(ARPANET)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별 의미가 없다. 컴퓨터를 전화선으로 연결하는 기술적 조건이 이뤄진 이상 알파넷이 아니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인터넷은 조직됐을 것이다.

 

현재 4천만 명이 가입돼 있고 계속 빠르게 자라나고 있는 이 조직을 전반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구는 없다. 국경을 초월한 이 조직을 어떤 국가가 관리할 수도 없고, 유엔처럼 비효율적인 기구가 힘을 쓸 것 같지도 않다. 가입자들이 제각기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결과가 어우러져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정보고속도로 건설이 이 같은 무정부상태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도 미지수다. 통신 용량을 확장하는 정보고속도로의 막대한 건설 비용은 대부분 기업의 투자로 충당될 것이 예상된다. 그 투자 동기는 어디에 있으며 어떤 방법으로 관철될 것인가. 대형 소비산업이 이 건설사업에 참여해 정보 접근에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때 과연 어떤 마케팅 활동이 세상을 어떻게 휩쓸지 볼 만할 것이다. 소비자 개개인에 관한 모든 정보를 장악하는 대기업,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한편 무어는 월드와이드웹(WWW)의 장래에서 휴머니즘의 무한한 발전을 생각해보기도 한다. 쉽고 친근감을 주는, 언어도 필요없이 그림을 보고 마우스만 누르면 되는 화상 컨트롤이 월드와이드웹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런 특징이 극한으로 발전해 마우스 입력마저 필요없게 되고 인간의 정신이 곧바로 인터넷에 접속하게 된다면? 인류의 정신이 합일하는 길이 여기에 있지 않나 하고 꿈을 그려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1년 간의 답사를 끝낸 무어는 인터넷이 결국 인간의 모습을 비춰줄 뿐이라고 본다. 인간을 인간 아닌 다른 존재로 바꿔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자연주의자 헨리 데이빗 소로(1817~1862년)의 말이 인터넷에도 맞는다고 무어는 인용한다. "발명품이란 대개 우리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예쁘장한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목적은 개선하지 않고 방법만 개선하려 들기 때문이다." (1996년 1월 28일)

 

 

Posted by 문천

 

Richard Leakey & Roger Lewin, The Sixth Extinction

 

"'인간=만물의 영장' 등식에 반론"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중심적인 관점이다. 생명의 역사, 생명의 본질을 인간의 이성과 경험만으로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떤 초자연적 존재나 힘을 생각할 필요 없이 인간이 관찰하는 현상과 원리만으로 생명현상의 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진화론은 모든 생명체에 작용하는 진화현상의 정점에 인간을 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종교적 신앙 아닌 '과학적' 사고의 발판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최근 들어 다윈 진화론의 인간중심적 합리주의를 재고하는 관점들이 여러 방면에서 모이고 있다. 고생물학의 화석 연구에서 다윈의 관점을 축소시키는 사실들이 나타나 왔다. 카오스 이론의 발달로 진화론의 근간이 되는 통계적 관점이 재검토되고 있다. 또, 환경 문제의 심화로 인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보려는 노력이 변화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리처드 리키의 <제6의 絶滅>이 이런 동향의 최신판이다. 케냐의 고인류학자 리키는 진화론의 과학적 타당성을 존중하면서도 생명의 역사 속에는 진화론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음을 지적한다.

 

'절멸'이란 다세포생물이 처음 나타난 캄브리아기에서 오늘날까지 5억여 년의 진화기 속에 있었던 다섯 차례의 대량 멸종 사태를 말한다. 심한 경우는 기존 생물종의 95퍼센트가, 가벼운 경우에도 65퍼센트가 멸종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하나의 절멸은 지구의 생물상에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최근의 사건은 6,500만 년 전 중생대와 신생대의 경계를 이룬 백악기 절멸이다. 소행성의 충돌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으로 1억 년 이상 지상에 군림하던 공룡이 사라지고 포유류가 그 빈 자리를 이어받게 됐다고 한다.

 

이런 절멸의 시기에는 다윈이 말하는 자연선택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리키는 말한다. 정상상태에서 효과적인 생존과 번식을 위해 축적해 온 진화의 기준은 전혀 새로운 상황 속에서 깡그리 무시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물의 멸종이 진화의 경쟁을 통해 완만한 과정으로 이뤄진다고 믿는 다윈의 관점에서 본다면 승리와 패배는 능력과 노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그 결과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리키는 진화론의 필연성이 배제되고 예측할 수 없는 (소행성의 충돌 같은) 요인에 의해 판갈이가 이뤄지는 고비들이 있었음을 역설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지금 위치 역시 다분히 우연에 의해 주어진 것이라면, 언제라도 그 위치는 새로운 우연에 의해 무너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어 리키는 '진화=진보'의 등식을 공격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카오스 이론에 접근해 가는 실험결과들의 소개는 퍽 재미있다. 한 예만 들겠다.

 

일정한 조건의 가상생태계에 여러 가지 특성의 생명체들을 차례로 투입한다. 물론 미생물-식물-초식동물-육식동물의 순서는 지키지만 민들레를 먼저 넣느냐 엉겅퀴를 먼저 넣느냐 하는 순서를 임의로 바꿔보는 것이다. 어떤 순서로 어떤 종들을 넣어도 처음에는 개체량이 들쑥날쑥하는 조정기를 얼마간 겪다가 차츰 안정된 시스템을 이룬다. 안정된 시스템에 새로운 종을 투입하면 상당한 배타성을 보인다. 사자가 여우보다 우월한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여우가 사는 곳이면 어디든 사자가 끼어들 수 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다. 사자가 배제된 채 안정을 이룬 시스템에 뒤늦게 사자가 들어가면 그 속에서 자손을 번식하고 자리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이런 시스템이 '역사적 특이성'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안정된 시스템을 구성하는 여러 종들을 똑같은 공간 속에 다시 풀어놓아도 원래와 같은 시스템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안정된 시스템, 즉 생태계를 이뤄가는 과정에 의해 그 시스템이 특성이 규정되는 것이며 그 속에는 인간의 지혜로 파악할 수 없는 카오스의 영역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가상공간에서의 가상실험이다. 그러나 수학적으로 표시된 특성을 가진 제한된 수의 종들을 갖고 이런 결과를 얻었다면 더 복잡한 현실세계가 더 복잡한 현상을 보이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실험이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체의 특성들은 전체적인 연관관계 속에서 상대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절대적 우열이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서로 다를 뿐이지, 궁극적으로 낫고 못하고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윈이 말한 바 "모든 생명체가 지행해 나아가는 목표"로서의 '완전성'이란 성립하지 않는 개념이며, 인류가 그 '완전성'을 구현하는 존재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생명의 역사는 진화의 법칙에 따라 규정되는 필연적인 것만이 아니다. 생명체의 특성에는 절대적인 우열이 없는 것이다. 생태계의 원리는 인간의 지혜로 정복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전제들 위에서 리키는 인류문명이 불러올 '제6의 절멸'을 경고한다.

 

인류의 생태계 파괴는 원시시대부터 시작된 일이다. 6만 년 전의 오스트레일리아, 1만 년 전의 아메리카에 인류가 이주하면서 많은 동물종들이 멸정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근대문명의 발달로 생태계에 대한 인류의 위협은 폭발적으로 늘어나 왔다. 지금 같은 자연파괴의 속도가 계속된다면 21세기 중에 현존 생물종의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 한다.

 

문명의 위기, 그리고 그 대처 방안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다시 생각하고 인간 이성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자는 이야기도 여러 사람이 해온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며 아프리카 야생자원 보호에 종사해 온 저자의 제안에서는 특별한 힘이 느껴진다. (1996년 1월 7일)

 

 

Posted by 문천

 

Peter Coveney & Roger Highfield, Frontiers of Complexity

 

"컴퓨터 통해 자연의 복잡성 조명"

 

 

인간의 의식이 언젠가는 자연의 모든 진리를 파악할 수 있게 되리라는 믿음이 과학혁명의 밑받침이 되었다. 초기의 과학혁명에 공헌한 많은 사람들(르네 데카르트, 프랜시스 베이컨 등)이 이런 믿음을 제창했지만 이 믿음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준 것은 아이작 뉴턴이었다. 천체의 운행과 일반 물체의 운동을 한번에 묶어 깔끔하게 설명해낸 뉴턴의 운동 법칙은 플라톤 이래의 꿈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자연의 원리는 단순한 아름다움 그 자체며 인간의 마음을 가리는 꺼풀을 벗겨내기만 하면 그 원리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이 믿음을 바탕으로 한 근대과학의 발달은 환원주의의 길을 열었다. 아무리 복잡한 현상이라도 단순한 요소들로 분석해 개별적으로 파악한 다음 그들을 총합함으로써 현상의 참된 모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정론의 성향이 있었다. 물질계의 현상은 그 안의 물질적 조건과 보편적 자연법칙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며 이 양자를 완전히 이해하면 진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세기 말까지 과학기술의 발달은 이 믿음을 넓히고 다져온 과정이었다. 그 성공은 분자와 원자의 발견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며 원자의 내부에 눈을 돌린 첨단 과학자들은 더 이상 뉴턴의 정원 속에만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등 뉴턴 체제를 넘어서려는 20세기 과학자들의 노력은 결정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극적인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이론(1927년)이었다. 운동량, 위치 등 기본적 물질조건이 독립된 값을 가지지 않는다는 그의 관점은 과학활동의 바탕이 돼온 관측의 의미를 흔들어놓았다.

 

20세기 후반에는 환원주의를 벗어나는 성향이 여러 방면에서 일어났다. 한편에서는 핵무기와 환경 파괴의 위협에 따라 자연의 '정복'을 바라보던 과학의 목적에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컴퓨터를 통한 분석 능력의 발전이 역설적으로 자연에 대한 분석적 연구의 한계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특히 생명현상의 복잡성을 더욱더 세밀히 관찰하게 됨에 따라 그 복잡성이 기술적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사람들은 깨닫기 시작했다.

 

코브니와 하이필드는 1990년의 첫 공동저작 <시간의 화살>에서 결정론적 과학의 한계를 폭넓게 보여준 바 있다. 이번에 5년 만의 공동작업으로 낸 <복잡성의 무한한 지평>에서 그들은 최근 반세기간 이뤄진 자연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의 발전을 컴퓨터의 개념 발전을 통해 살펴본다.

 

이 편력에 저자들이 길잡이로 삼은 것이 '인공생명의 아버지' 요한 폰 노이만(1903~1957년)과 '인공지능의 아버지' 앨런 튜링(1912~1954년)이다. 그들은 각각 그리 길지 않은 일생의 끝부분을 컴퓨터 개발에 바쳤다. 그러나 컴퓨터의 가능성을 내다본 그들의 통찰력은 당대에 개발된 컴퓨터의 형태에 그치지 않고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컴퓨터의 미래를 비춰주고 있다.

 

헝가리 출생의 미국 수학자 폰 노이만은 1944년 여름 개발 중의 ENIAC 컴퓨터를 참관하고 이에 자극받아 그 1년 후 EDVAC 컴퓨터의 개념을 발표했다. ENIAC이 기존 개념의 '계산기'를 전자화한 것에 불과한 데 반해 EDVAC은 프로그램을 기계 속에 저장함으로써 본격적 컴퓨터의 영역을 열었다. 이것은 연산명령 자체를 연산 대상인 숫자, 문자들과 같은 차원의 수학적 요소로 처리한다는 뜻으로, 컴퓨터언어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폰 노이만은 1948년 생명체의 기본 기능인 자기복제 과정의 수학적 원리를 발표했다. 그리고 EDVAC이 만들어진 다음해인 1953년 자기복제의 컴퓨터 모델을 만들어보였다. 그 후 이 원리는 한편으로 생명 연구의 한 분야로 발전해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컴퓨터 설계 및 프로그램 개발에 활용됐다. 컴퓨터 바이러스나 그 숙주가 되는 컴퓨터나 모두 생물체의 성격을 띠게 된 것도 바로 그가 내다본 방향으로 이뤄진 일이다.

 

영국 수학자 튜링은 폰 노이만보다 늦게 실제 컴퓨터 제작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는 오래 전부터 진보적인 컴퓨터 개념을 형성해 놓고 있었다. 1937년에 발표했던 UTM(Universal Turing Machine)이 그것이다. UTM이란 모든 종류의 수학적 연산을 행하는 기계의 가능성을 말한 것이었으니, 각각의 연산을 행하는 개별적 프로그램과 그것을 구사하는 범용컴퓨터의 개념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튜링은 인간의 두뇌를 컴퓨터의 모델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컴퓨터의 작동이 일관된 지시에 따라 순차적으로만 움직이지 않는 비선형(非線型) 구조를 생각했다. 이것은 1960년대 이래 컴퓨터의 발달이 밟아온 길이 되었다. 또 경험을 통해 일하는 방법을 '배워 나가는' 컴퓨터를 그는 생각했다. 이것은 더욱 최근에 컴퓨터 발달의 중요한 진로로 열려가고 있는 길이다.

 

최초의 전자계산기 ENIAC은 환원주의적-결정론적-선형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이로부터 전혀 새로운 컴퓨터의 길을 열어준 대표적 인물이 튜링과 폰 노이만이었다. 길이라기보다 문을 열어주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딛을 자리를 일러주기보다 무한한 복잡성의 세계로 컴퓨터의 눈길을 돌려준 것이니까.

 

환원주의 패러다임에 대해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도전이 이제 컴퓨터 기법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중심으로 뭉쳐지고 있다. 다음 단계 패러다임이 어떤 것이 될지는 아직 명확치 않다. 언젠가는 자연의 비밀을 신에게 나눠받아 '인간 독재'의 자연계를 만들겠다는 오만함이 한풀 꺾이고 있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하다. (1995년 12월 24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