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계정부’의 실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해 온 ‘근대화’가 산업사회 초입에서의 한 차례 방황이라고 본다면, 본 단계의 근대화는 어떤 방향의 변화일지 무엇을 보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저는 두 가지 지표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이고 하나는 인간사회의 조직방법입니다. 물론 두 지표는 서로 얽힌 것입니다.

 

종래의 근대화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아무런 절제나 균형을 생각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일방적 지배만 생각했지요. 인간의 권리만 생각하고 그 책임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근대적 인간관에서는 인간의 책임보다 권리만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입각한 근대사회 조직방법에서는 조화와 균형을 확보하는 메커니즘이 취약하게 된 것입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관념 자체가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라는 환경론자 머레이 북친의 말에 저는 공감하는데, 이 말을 뒤집어서 하면 더 중요한 뜻이 담길 수 있다고 봅니다. 자연과의 관계에서 균형감각을 잃은 것이 인간사회의 가치관 획일화와 극단적 분화현상을 불러온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1945년 원폭 투하에 충격을 느낀 아인슈타인은 “인류와 문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계정부 창설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현실성 없는 발언이란 비판에 이렇게 대꾸했다고 합니다. “세계정부라는 생각이 현실적이지 않다면 우리 미래에는 단 하나의 현실적 전망만 있을 뿐이다. 바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전면적 파괴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세계정부’란 국가정부가 국가 내의 질서에 책임을 가지는 것처럼 세계적 질서에 책임을 가지는 주체가 나타나는 ‘정치적 세계화’를 뜻하는 겁니다. 우리가 지난 20여 년간 이야기해 온 ‘세계화’는 따져보면 ‘경제적 세계화’만을 뜻한 것입니다. 진정한 ‘세계주의(globalism)’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국가의 파괴를 통해 ‘개인주의’를 확장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죠.

 

국가가 국민의 권리와 책임을 규정하고 보장하는 것처럼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을 관리하는 세계정부의 존재가 인류문명의 지속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는 아인슈타인의 주장은 지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근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정부상태가 계속되어 온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동안 초강대국의 위치를 누려온 미국의 역할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무정부상태 지속이 자국에 유리하다고 미국은 판단했고, 그러한 미국의 정책을 견제할 만한 힘이 지구상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문제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 두 가지만 지적하겠습니다. 하나는 미국의 1인당 에너지 소비량(11.2kw)이 세계 평균(2.1kw)의 다섯 배가 넘는다는 사실이고(2011년 기준), 또 하나는 개인의 총기 보유가 허용된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은 세계체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턱없이 높은 자원소비 수준을 계속해 온 나라고, 문명국답지 않게 힘의 원리에 거의 아무런 절제를 가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2008년의 금융공황은 미국 패권주의 중심의 세계적 무정부상태가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신호였습니다. 중국의 정책 선택이 미국의 정책 선택에 상당한 압박을 가하는 상황이 그 시점부터 시작되었죠. 그 압박의 수준은 냉전시대의 소련보다 훨씬 더 심대한 것이고, 지금도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변화의 추세를 외면하는 미국의 정치적 관성 때문에 대안으로 떠오르는 중국의 입장이 반사적으로 강화되는 형국입니다.

 

중국 역시 힘을 키우면 패권주의 성향을 나타낼 걱정이 있다고도 합니다. 이미 패권주의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주의와 비슷한 것이 될 염려는 없다고 봅니다.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갑을관계’를 맺은 것 같은 압도적인 힘을 중국이 가지게 될 것 같지는 않고, 중국이 미국과 달리 문명의 전통을 가진 나라라는 점도 생각해야 합니다. 유럽식 근대화의 출발에 맞춰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나라는 유동성 과잉 시대의 산물로서 절제의 메커니즘이 원래 취약한 사회입니다. 중국이 설령 큰 힘을 갖게 되더라도 홉스봄이 말한 ‘극단의 시대’를 답습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계정부’는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근대국가처럼 꼭 확고한 체제를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조약과 협약의 집합체 형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원과 환경에 관한 협약의 확대와 강화를 위한 노력에 대해 지금까지 미국의 저항이 뚜렷했지요. 미국의 저항력은 그 동안 약해져 왔고, 앞으로도 계속 약해질 것입니다.

 

68년 전 아인슈타인이 말한 ‘당위’가 이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뚜렷한 현실이 언제까지 이뤄질지 지금 장담하지 못해도, 지금까지의 전 지구적 무정부상태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것은 분명합니다. 무조건적 절대자유가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고, 자연과의 관계에서나 인간관계에서나 ‘절제’가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을 내다봅니다.

 

산업사회가 지구의 한 모퉁이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산업화 선발주자들의 세계정복에는 아무런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세계정복은 인간의 자연정복과 짝을 이루는 변화였습니다. 2중 구조의 이 정복사업은 균형과 조화를 고려할 필요 없이 일방적으로 3백 년간 진행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에 뒤이은 급속한 산업화는 이 정복사업의 한 차례 완성을 가져오면서 세계가 그 다음 단계에 직면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 신자유주의자들은 온 세계를 향해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외쳐 왔습니다. 자기네의 자원낭비 라이프스타일을 모든 인류에게 따라 하라고 권해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13억 중국인과 11억 인도인이 정말 그 라이프스타일을 그대로 따라 한다면?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파국이 명약관화합니다.

 

자연의 제약을 무시하던 인류의 오만을 버릴 때가 되었습니다. 그 오만으로 빚어진 절대자유와 절대인권의 환상이 98%에 대한 2%의 지배를 뒷받침해 왔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제약을 순순히 받아들인다면 인간사회의 조직 원리도 자유와 인권에 대해 보다 겸손한 태도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균형과 조화가 중시되는 새로운 세계체제의 필요성이 현실정치에 얽매이지 않은 아인슈타인의 눈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7. 속박이란 거부할 것이 아니라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정치적 세계화를 바라보는 움직임은 ‘국제주의(internationalism)’란 이름으로 나타나 왔습니다. 그 이념을 아인슈타인은 ‘세계정부’로 표현했지만 그보다 ‘세계연방’이란 말이 더 많이 쓰입니다. 국제주의는 민족주의와 맞서는 것도 아니고 기존 주권국가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민족주의와 주권국가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국제주의가 아니라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의 범주에 들어갈 것입니다.

 

앞으로 나타날 세계정부가 형태에 있어서는 지금의 유엔보다 더 치밀한 조직을 당장 필요로 할 것 같지 않습니다. 국제주의가 한껏 고양된 시점에서 유엔이 탄생했기 때문에 세계정부의 전망이 유엔 조직에 많이 담겨 있었죠. 그 후 미국 패권의 부각에 따라 유엔의 세계정부 조직이 공동화(空洞化)하고 만 것입니다. 세계정부 형성은 유엔을 중심으로 국제적 조약과 협약이 확대-강화되는 과정을 통해 진행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형태가 어떠하든 세계정부 형성이란 전 지구적 차원의 공공성 확충을 의미합니다. 어떤 문명 어떤 사회에서든 지속가능성은 공공성에 바탕을 둡니다. 주먹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 정보의 힘이든 힘의 작용에 절제를 가하는 것이 공공성입니다. 절제 없이 힘이 날뛰는 정글 상태에서는 어느 문명이나 사회도 오래갈 수 없습니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처럼 거대한 변화에는 상당 기간의 과도기가 필요합니다. 새 체제의 건설보다 옛 체제의 파괴에 주력하는 기간입니다. 대형전쟁 등 낭비적이고 불합리한 현상이 많이 일어나지만 자원 공급의 급격한 증가 덕분에 당분간 계속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공공성의 원리가 극도로 약화됩니다. 그러나 자원 공급 증가 추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완화하게 되어 있고, 그에 따라 공공성이 회복된 안정적인 체제가 자리 잡게 됩니다.

 

근대적 현상의 핵심 요소로 꼽혀 온 개인주의가 과도기의 특징입니다. 개인주의는 원자론적 세계관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공공성의 확충은 원자론적 세계관으로부터 유기론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뜻합니다. 원자론적 세계관이 뒷받침하는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인권의 관념이 유기론적 세계관으로는 상대화의 대상이 됩니다. 자유도 인권도 현실의 인간관계 속에서 제한된 의미를 갖게 되는 겁니다.

 

‘멋진 신세계’의 꿈을 잃는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집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역사를 통해 실제 어떤 형태로 존재해 왔는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전제체제니 봉건체제니 속박 속에 살던 상태를 근대인은 미개한 것이었다고 깔보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종이 상당한 속박 속에서 살아갈 특성을 진화시켜 왔습니다. 그런 특성 없이는 자연조건의 속박 속에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요.

 

절대인권과 절대자유는 마치 인간이 자연조건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처럼 생각한 환상의 산물입니다. 사람들이 그 환상에 빠져 문명 발생 이래 사회를 보호해온 공공성의 원리를 잊어버렸을 때 힘을 가진 집단이 아무 견제 없이 힘을 휘두를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대형전쟁을 비롯한 온갖 ‘근대적’ 참극이 일어났습니다.

 

환상을 버리고 속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제는 어떤 성격, 어떤 수준의 속박을 어떤 방법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겁니다. 적합한 방법을 찾지 못하면 공공성이 확충된 새 체제가 지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고, 적합한 방법을 찾는다면 인간의 본성을 지키면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생존과 생활의 양식을 추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 환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합니다.

 

근대화 시작 이래 파기 대상이 되었던 ‘전통’의 재발견이 중요한 일입니다. 근대화 이전 긴 시간에 걸쳐 농업사회가 운영되어 온 원리가 바로 전통입니다. 자연조건이 주는 제약과 그 제약에서 비롯되는 인간 사이의 억압을 가능한 한 가볍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전통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제 산업사회의 정상상태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농업사회의 정상상태를 참고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상상태’라는 공통점 위에서 ‘전환기’와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세계정부 체제는 지금까지의 근대국가처럼 하나의 정부가 모든 국민을 개인으로 상대하는 체제가 아닐 겁니다. 봉건체제처럼 지지와 보호를 교환하는 계약관계가 중층적으로 맺어지는 유기적 관계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유기적 관계 속에서는 파편화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구성원보다 안정된 공동체를 가진 구성원들이 유리한 조건을 누릴 것입니다.

 

공동체의 가치가 자본주의체제 안에서도 부각되기 시작하는 추세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의 네 가지 형태로 토지, 건물, 기계와 함께 ‘인간 자본’을 꼽았지요. 이 인간 자본이 인간 자체가 아니라 생산에 공헌하는 인간의 능력, 즉 그 물질적 측면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랫동안 해석되어 왔는데, 근년의 ‘사회적 자본’ 탐구는 인간 자본의 의미를 점점 더 넓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로버트 퍼트넘의 <나 홀로 볼링 Bowling Alone>은 사회적 자본으로서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책입니다. 사회적 자본의 형태를 '본딩(bonding)'과 '브리징(bridging)'으로 구분한 점이 이 책에서 특히 주목을 끕니다. 본딩은 동질적 집단 내의 유대감이고, 브리징은 이질적 집단들 사이의 연대감입니다. 대표적인 본딩 조직은 조폭이고, 브리징 조직은 자원 봉사나 취미 활동 등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단체에서 나타납니다.

 

두 가지 조직력의 적절한 배합이 사회적 자본의 확충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고 퍼트넘은 설명합니다. 각 집단 내에 적정 수준의 본딩 조직력을 가지면서 다른 집단들 사이에도 집단이기주의를 뛰어넘는 브리징 조직력을 가지는 것이 개인, 집단, 사회의 이해관계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며, 또한 경제 발전을 순조롭게 해주는 조건이라는 거죠.

 

어느 집단이든 조직력을 가진다는 것은 구성원들이 조직의 목적을 위해 희생과 양보를 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 희생과 양보의 중요한 내용이 개인의 자유와 권리입니다. 유기론적 세계체제 안에서는 여러 층위에서 맺어지는 이런 관계가 네트워크를 이루게 될 텐데, 그 기본 원리의 한 모퉁이를 퍼트넘이 보여준 것입니다. 자본주의체제 자체도 이런 방향의 변화를 내다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어떤 체제 안에서도 각 개인은 속박을 적게 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모든 속박을 거부할 수 있다는 환상은 오히려 불필요한 속박까지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현실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환상을 벗어나, 자신의 인간성 발현을 근본적으로 가로막지 않는 적절한 형태와 적절한 수준의 속박을 선택할 때 아인슈타인의 세계정부가 실현될 것입니다.

 

 

 

8. ‘근교원공’의 시대는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

 

 

전국시대 후기까지도 이웃나라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끼리 전쟁을 벌이는 일이 많았습니다. 생산력 발달에 따라 군대가 커지고 군량이 쌓여 전쟁 벌일 여력이 생기기는 했지만 전면전이 되기 쉬운 이웃나라끼리의 전쟁은 꺼리는 경향이 있었던 거죠. 제한된 규모의 원정군을 보내 제한된 범위의 전쟁을 벌이는 이런 경향을 ‘근교원공(近交遠攻)’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진(秦)나라가 ‘원교근공(遠交近攻)’으로 정책을 바꿨습니다. 소양왕(기원전 307~251년 재위)이 범수(范睢)의 헌책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전해지는데, 먼 나라와의 전쟁을 삼가면서 이웃나라 공략에 국력을 집중하는 정책이었죠. 소양왕이 이 정책을 채택한 후 50년이 안 되어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릅니다.

 

전쟁은 파괴적이고 소모적인 사업입니다. 아무리 적이 밉더라도 가용자원에 한계가 있으면 전쟁을 쉽게 벌일 수 없고, 벌여도 오래 계속할 수 없지요. 춘추시대의 ‘계절존망(繼絶存亡)’은 전쟁을 적게 하고 작게 하는 질서의 원리였습니다. 전국시대의 급격한 생산력 발전이 ‘전국(戰國)’시대를 가능하게 하고, 마침내 정복전쟁을 통한 천하통일로 전국시대를 끝내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 마지막 단계가 ‘원교근공’, 즉 총체적 전면전의 시기였습니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진나라의 강한 힘만이 아니라 당시 인민의 평화 염원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염원의 바탕에는 자원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깔려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에 대한 염원이 충분히 크지 않았다면 진나라에 대항하는 각국의 전쟁 노력이 더 끈질기게 지속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진시황의 통일로 안정된 평화가 바로 이뤄진 것이 아니죠. 백년 후 한 무제(기원전 141~87년 재위) 때 흉노 정벌을 거쳐 어느 정도 안정된 천하체제가 자리 잡았다고 저는 봅니다. 전국시대를 벗어나고도 새로운 안정을 얻기까지 백년의 시간이 걸린 거죠.

 

중국의 전국시대 3백년과 비슷한 것이 지금까지의 근대 3백년입니다. 전쟁이 많아지고 커지다가 결국 총체적 전면전의 시기까지 겪었습니다. 산업혁명의 생산력 발전이 가능하게 해준 일입니다. 이 유추를 더 이어나간다면, 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의 패권이 세워진 것을 진시황의 통일과 비슷한 단계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본다면 냉전시대 소련의 역할을 한나라 초기의 흉노와 비겨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원교근공과 근교원공의 비교로 돌아가 보죠. 원교근공은 지극히 소모적인 정책이었습니다. 패권 추구 세력이 방대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을 때 이 정책을 구사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문자 그대로 ‘우승열패’, ‘적자생존’을 통한 패권 통합이었습니다.

 

세계대전은 자원공급의 한계 앞에서 원교근공의 양상으로 벌어졌습니다. 멀리 떨어진 나라들끼리 손잡고 이웃나라들과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냉전 단계에서도 이 양상은 계속되었습니다. 지구 반대쪽에 있는 나라와 ‘혈맹’ 관계를 맺고 같은 민족과 이웃나라를 원수처럼 대한 한국은 그 가장 대표적 사례의 하나였죠.

 

그러나 냉전체제 안에서도 근교원공의 양상으로 바뀌는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냉전 종식을 계기로 그 흐름이 커지고 강해졌습니다. 유럽통합이 가장 두드러진 사례입니다. 냉전기의 동-서 대결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시대의 민족국가 대결까지 극복하고 초국가적 국제질서를 도입하는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말한 문명권의 통합 추세가 바로 근교원공의 원리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유럽 기독교문명권만이 아니라 다른 문명권에서도 통합 추세는 분명히 나타나고 있죠. 그런 추세에서 유럽 통합이 가장 앞서 나가는 것은 근교원공의 실익(實益)을 가장 투철하게 인식하기 때문일 겁니다. 원교근공의 폐단을 가장 철저하게 겪은 지역이니까 인식이 투철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문명권 통합의 추세는 한국을 둘러싸고도 진행되어 왔습니다. 중국과의 교류 확대가 단적인 예죠. 한국사회는 냉전시대의 의식 상태를 벗어나는 데 뒤졌기 때문에 근교원공의 원리를 능동적으로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목전의 경제적 이익만을 보고 중국과의 교류를 늘려온 거죠. 지구 반대쪽과의 무역보다 이웃나라와의 무역에 이로운 점이 많다는, 너무나 자명한 사실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 드러나 왔습니다.

 

이제 와서야 ‘인문(人文) 유대’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웃과의 긴밀한 관계를 능동적으로 추구할 필요가 비로소 인식되기 시작한 거죠. 아직도 물적 교류가 늘어난 현실을 따라오지 못하는 미약한 인식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 인식은 앞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습니다. MD 참여를 비롯한 반동-수구적 정책이 얼마나 자해적인 것인지도 곧 깨닫게 되겠죠.

 

이런 상황에서 중국보다도 더 가까운 이웃, 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한을 ‘이웃’이라고 부르는 데 반감을 느끼는 분들도 계시겠죠. 저는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부부간에도 ‘이웃’을 대하는 것 같은 조심성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부간이니까” 아무렇게 대해도 된다는 방심이 관계를 해칠 위험이 있습니다. 조심할 일은 조심하면서 관용과 배려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편이 좋지요.

 

북한인과 한국인은 같은 민족이지만 오랫동안 격리되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오면서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지금의 서로 다른 점을 비판하기보다 관용하면서 앞으로 관계를 키우며 더 많은 경험을 공유하다 보면 민족으로써 통하는 점들이 살아나게 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통일’이란 말도 마음속에 묻어두고 싶습니다. 너무 큰 욕심을 담은 그 말보다 ‘통합’ 정도에 노력을 모으며 통일의 씨앗이 스스로 자라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갖고 싶습니다.

 

몇 달 동안 닫네 마네 말이 많지만, 저는 개성공단을 만들어낸 남과 북의 여러 관계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북한과의 관계에도 근교원공 원리의 적용이 바람직한 것이고 또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개성공단이 분명히 보여줘 왔습니다. 공단 폐쇄를 비롯해 남북관계를 경색시키고 싶어 하는 세력이 여러 해 동안 정권을 끼고 획책해 왔음에도 공단을 쉽게 없애지 못한 것은 그것이 자해행위라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내세우기보다 근교원공 원리의 연장선 위에 우선 세워놓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도 굳이 목표로 내걸지 않은 채 경제적 득실만 따라오면서 오늘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북한과의 관계도 같은 기준으로 운영해 가다 보면 근교원공 원리의 실익이 저절로 드러날 것이고, 그런 뒤에는 그 특수한 의미도 생각할 여유가 생길 겁니다.

 

 

 

맺는 말: 우리 후손들은 우리보다 좋은 세상을 살았으면.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속박을 어느 정도 감수하며 사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라는 의견을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한 번 제 블로그에 이런 의견을 적었을 때 독자 한 분이 댓글을 달아주셨습니다. 경제적 양보나 사회보장의 축소는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자유의 축소’는 양보도 안 되고 이해도 가지 않는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분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치를 좀 줄이는 것은 물론, 다소의 곤궁에 시달린다 해도 인간의 품격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유가 없는 인생이라면 인간다운 삶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경제적 여유보다 정치적 자유가 더 본질적인 ‘인간의 조건’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자유도 재정이나 마찬가지로 절약도 가능하고 긴축운영도 가능한 것”으로 생각한다고요. 자유가 조금도 없는 인생은 분명히 인간다운 삶이 못 됩니다. 그러나 무한한 자유,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형편에 따라 돈을 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편에 따라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유에 대해 현대인이 신축성 있는 생각을 하기 힘든 것은 그것을 추상적 관념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관념화를 부추기는 이런 극단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응당 누릴 수준의 자유조차 누리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흥정을 거부하는 사람은 시장에서 불리한 입장을 면할 수가 없으니까요.

 

자유는 좋은 것, 속박은 나쁜 것이라는 우리의 통념을 한 번 뒤집어봅시다. 자유의 의미를 넓게 해석하면서 모든 사람의 자유를 보장할 때, 약한 사람보다 강한 사람이 누리는 자유가 더 클 것은 당연한 일이죠. 지나친 자유가 평등의 이념을 해치는 겁니다. 그래서 자유의 가치를 정말 아끼는 사람들은 절대적 존중을 받을 자유의 ‘본질’을 좁혀 보려 애씁니다. 환경과 자원을 아끼는 것과 마찬가지 자세입니다.

 

속박이라는 것도 차분히 생각하면 무조건 나쁜 것이 아니죠. 가족 사이, 친구 사이 등 모든 인간관계가 나름대로 가치를 갖는 것은 속박이 있기 때문입니다. 파편화된 현대세계에 진력이 난 사람들은 이런저런 의미의 ‘공동체’를 이야기하죠. 아무 속박 없는 공동체가 가능한가요? 구성원들의 속박은 모든 공동체의 필수 요소입니다.

 

‘자발적 속박’은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지요.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관계를 맺을 때는 그에 따르는 속박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그 관계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속박을 느낄 때가 있더라도 견뎌내려고 애쓰죠. 자유와 속박의 구분에 큰 의미가 없는 그런 상태가 인간관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자발적 속박에조차 거부감을 느끼기 쉬운 현대사회 분위기가 문제입니다.

 

자유와 평등의 관념은 ‘절대자유’와 ‘절대평등’의 환상을 부추김으로써 전근대 사회의 유기적 질서를 파괴하는 데 이용되어 왔습니다. 이제 절대적 환상을 버리고 상대적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상황에 인류사회가 와 있다고 저는 봅니다. 지난 3백년간 전개된 약육강식의 무정부상태를 벗어날 정치적 세계화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정치적 세계화의 구체적 경로를 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가 유기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이 되리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중세체제로 완전히 돌아가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지난 3백 년간의 ‘근대체제’에서 말살되었던 중세체제의 많은 요소들이 회복될 것을 예상합니다.

 

‘봉건적’이니 ‘전제적’이니 자유와 평등의 기준으로 무작정 폄하해 온 중세체제에 좋은 점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 새로운 시각에서 공부할 필요가 떠오를 것입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여러 형태로 펼쳐졌던 중세체제가 모두 학습 대상이 되겠지요.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공부거리를 많이 제공하는 것이 동아시아 중세체제일 것입니다. 가장 큰 규모로 가장 오랫동안 전개된 체제였고, ‘중세 이후’를 모색한 경험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유교적 천하체제가 이제부터의 정치적 세계화에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유교적 천하체제를 오랫동안 실행한 우리 민족의 ‘전통’이 큰 가치를 가진 경험으로 활용될 수 있겠죠.

 

전통의 여러 측면 중에서 저는 무엇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원리를 먼저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질서에 순응하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중국 중심 천하체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천하체제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정치적 주권과 문화적 독자성을 최대한 지켰습니다. 전면적 거부와 전면적 수용이 모두 멸망의 길임에 반해 화이부동은 민족사회의 생존을 기하면서 동시에 천하체제의 안정에도 공헌한 노선이었죠. 이 노선 덕분에 우리 선조들은 오랫동안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평화와 번영을 잘 누릴 수 있었습니다.

 

68년 전 해방 때 조선인에게는 전통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민족국가 수립 염원은 외국인의 배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선조들이 이 땅에서 살던 방식을 되살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선조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잘 사는 길을 열심히 닦았고, 그 길을 후손에게 남겨줬습니다. 일본 침략으로 끊겼던 그 길을 해방된 조선인은 아직 잊지 않고 있었고, 그 길을 다시 잇고자 했던 것입니다.

 

해방 1년 후 군정청 여론국에서 8,453명에게 지지하는 정책노선을 물었을 때 70퍼센트가 ‘사회주의’를 택했습니다. ‘자본주의’ 14퍼센트, ‘공산주의’ 7퍼센트와 비교가 되지 않는 압도적 지지였죠.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모두 외래의 극단노선이고, 그 중간에 우리에게 맞는 길이 ‘사회주의’일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 겁니다. “전통의 회복을 원하느냐?” 하는 질문이 직접 주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이 주어진 질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난 것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 후 68년 동안 전통에 대한 사람들의 기억이 흐려졌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관념의 지배가 강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존재의 가장 큰 측면의 하나인 ‘민족’을 똑바로 생각하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양심적 지식인들도 관념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죠. 한국 사회가 미국의 충실한 아류가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전통을 잃은 사회가 전통을 가지지 않은 사회를 모델로 삼은 것입니다.

 

대한민국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만 본다면 이 사회는 전통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분단 상태에서 역설적으로 민족사회 복원의 열쇠를 찾습니다. 극히 피상적인 이유로 극단적 단절 상태가 계속되어 온 남북관계는 민족사회의 존재를 언제나 떠올려주는 거울입니다. 온갖 곡절이 이어지고 있는 남북관계를 바라봄에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측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해방일기”의 다음 작업으로 남북관계의 이 측면을 해설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20세기는 괴롭고 부끄러운 시대였습니다. 어째서 그런 시대를 겪게 되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망국의 역사”와 “해방일기” 작업을 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 민족의 대응이 잘못되었기보다 세계적 변화의 압력이 너무나 강했다고 하는, 외인론(外因論) 쪽으로 저는 기울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변명으로 빠지는 것이 아닌가, 늘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차례 작업을 마무리하며, 이만하면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진 하나의 관점을 세웠다는 만족감을 느낍니다. 이 관점이 정말 타당한 것인지는 앞으로 펼쳐지는 상황에 의해 검증되겠지요. 과연 20세기의 불행한 역사가 21세기에도 이어질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은 우리보다 좋은 세상을 살게 될 것인지.

 

지나 봐야 알 일이죠.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느 만큼은 사람 뜻에도 달린 것 아니겠습니까? 백여 년 전 망국 때, 68년 전 해방 때는 우리 선조, 선배들이 좋은 뜻을 많이 일으켜도 외세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좋은 결실을 바로 맺지 못했습니다. 그때보다는 우리 사회의 주체적 노력이 성과를 바라보기에 좋은 환경을 맞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희망을 저와 함께 하는 분들은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우리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