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문명 전통의 단절은 소유의 상실을 넘어 존재의 상실이었다.

 

 

백 년 전의 망국이 우리 민족사회에 실제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한 번 따져보죠. 당시 사람들에게는 조선이라는 왕조의 멸망이 제일 큰일로 보였겠죠. 왕조가 수백 년 동안 국민 생활의 모든 면에 작용해온 역할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합방 당시 제일 뚜렷한 저항은 ‘대한제국’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나타났죠.

 

그런데 불과 10년 후 3-1운동에서는 ‘대한민국’이 독립의 주체로 나타납니다. 대한제국은 사실 국가 노릇을 별로 잘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문을 닫자마자 사람들 마음속에서도 사라진 겁니다. 왕조가 제 노릇 잘못해서 문 닫는 것은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도 응당 있을 수 있는 일로 누구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왕조의 멸망이란 당장 충격은 컸더라도 겉보기만큼 큰 의미를 가진 일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왕조 멸망보다 후세의 우리 눈에 더 크게 보이는 것은 이민족 지배입니다. 민족국가 성립 이래 한민족은 이민족 지배를 받은 일이 거의 없어요.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큰 침략 때도 이민족 군대가 들어와 군사활동을 벌였을 뿐이지 지배체제를 만들지는 않았죠. 이민족 지배에 가장 가까운 경험이라면 13-14세기의 몽골지배기인데, 간접지배에 그친 것이기 때문에 ‘지배’가 아니라 ‘간섭’이란 말을 굳이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본의 조선 지배는 철저한 직접지배였습니다. 같은 시기에 인류의 절반이 식민 지배를 겪고 있었어도, 통치기구의 밑바닥까지 일본인 손에 장악하고 있던 조선처럼 철저한 직접지배는 유례가 드물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저는 두 가지 의미에서 궤변이라고 합니다. 첫째, 일본처럼 조선을 먹고 싶어 하는 나라가 없었어요. 가장 비근하게 지목하는 것이 러시아인데, 러시아도 만주의 이권 앞에서는 조선을 일본에게 선뜻 양보했습니다. 아관파천으로 얻은 유리한 입장을 활용하지 않았어요. 러일전쟁은 러시아가 조선을 넘봐서가 아니라 일본이 만주를 넘봐서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 둘째, 설령 다른 나라 식민지가 됐더라도 일본 지배처럼 지독한 지배를 받지 않았을 겁니다. 대개의 지배국은 피지배국 사정을 잘 알지 못해서라도 웬만한 일은 현지인에게 맡깁니다. 조선처럼 통치기구의 과장급까지 현지인이 배제되는 식민통치는 문명수준이 훨씬 낮은 곳에서나 있었던 일입니다.

 

조선이 일본 통치 아래 근대화를 이뤘다고 하는 주장이 있는데, 근대화의 객체가 된 것이지 주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식민지배의 협력자집단이 근년 중요한 연구대상이 되고 있는데, 조선의 친일파는 협력자라도 아주 수준 낮은 협력자였어요. 친일파 중의 친일파 박흥식이 천황 한 번 (단체로) 배알했다고 방방 뜨는 꼴을 봤다면 다른 곳 협력자들이 웃었을 겁니다. 해방 당시 근대적 제도의 운영경험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는 사실이 그 후의 발전에 큰 족쇄가 되었습니다.

 

이런 면을 살피다가 왕조의 멸망과 이민족 지배에 이어 망국의 세 번째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문명 전통의 단절이라는 문제입니다.

 

어떤 문명이든지 나름의 질서를 갖고 있으며, 그 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일차적 역할을 맡는 엘리트계층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합니다. 학식과 재산을 가진 엘리트계층은 자기 사회 안에서 특권을 누리기 때문에 그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공헌할 동기를 가집니다. 엘리트계층의 역할이 제도와 관습으로 안정되어 있는 사회는 어떤 변화 앞에서도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합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선비’ 또는 ‘양반’이란 이름의 엘리트계층이 있었습니다. ‘양반’이란 이름은 특권을 누리는 측면과 흔히 결부된 것이므로 ‘선비 정신’ 측면에 중점을 두고 보죠. 선비의 전통은 중국과 상당부분 공유한 것인데, 송나라의 범중엄(范仲淹)이 선비 정신을 잘 요약한 말이 있습니다. “선비는 천하의 걱정을 남보다 앞서서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뒤에 누린다.” 권리보다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말한 것이죠.

 

선비의 일차적 기준은 학식입니다. 학식은 모든 경쟁에서 유리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학식이 많은 사람은 세상일을 넓고 깊게 보는 눈도 가졌습니다. 그래서 개인적 욕심을 채우는 데만 골몰하지 않고 세상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데도 힘을 쓰게 되죠. 크게 보면 그것이 자기 이익을 제대로 지키는 길이기도 합니다.

 

물론 현실 속에는 학식을 갖고도 자기 이익만 생각하려 드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관습과 제도가 작동했습니다. 예기(禮記)에 “형벌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고(刑不上大夫) 예법은 서인에게까지 내려가지 않는다(禮不下庶人)”고 한 대목이 있죠. 피지배계층이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통제되는 반면 지배계층은 명예를 아끼는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중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선비는 안보의 주체요, 공공성의 수호자였던 겁니다.

 

조선 후기의 정치 퇴화는 선비 정신의 침체를 가져왔습니다. 정치투쟁이 목숨을 건 전쟁처럼 되면서 웬만큼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들도 패거리 의식을 벗어나기 힘들게 되었어요. 생사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공공성을 챙길 여유를 가질 텐데 그런 여유가 자꾸 줄어들기만 했습니다. 19세기 들어서는 심지어 임금까지도 정치투쟁의 마당에서 선수로 뛰게 되었어요. 모든 국가권력이 사유화의 대상이 되어 공공성이 증발해 버린 상태를 매관매직의 성행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국가기능이 쇠퇴하면 왕조는 망하게 되고, 얼마동안 혼란을 겪다가 선비계층의 풍토가 쇄신되면서 다음 왕조가 들어서는 것이 중국과 조선에서 반복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도 문명 전통의 일부로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때 일본의 침략을 받으면서 정상적 경로를 벗어나 식민지로 전락해버리고 만 겁니다.

 

일본 식민지배가 일으킨 해악이 여러 가지 지적되어 왔는데, 나는 선비정신의 억압이란 문제를 특히 중시합니다. 선비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도태당하고 그런 것 안 가졌거나 버린 사람들이 혜택 받는 상황이 수십 년간 펼쳐지는 가운데 우리가 ‘친일파’란 이름으로 떠올리는 유형의 집단이 재산과 고등교육을 집중적으로 향유하게 되었습니다.

 

선비정신이 한 차례 쇠퇴해도 혼란을 겪다 보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 문명의 흐름입니다. 달이 기울었다가 다시 차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런데 조선 후기에 침체한 선비정신은 식민지시대를 겪으며 말살되고 말았습니다. 문명 전통의 단절은 소유의 상실을 넘어 존재의 상실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 사회의 생명의 원리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4. 우리는 근대화의 주체였던가, 객체였던가?

 

 

‘전통’의 의미에 생각을 모아 보겠습니다. 전통을 근대화의 장애물로서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생각이 많이 퍼져 있었습니다.

 

근대화를 무조건 좋은 것으로만 보는 관념은 한국인만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산업혁명의 시작 이래 부국강병에서 나타나는 그 놀라운 효과를 보며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유일한 활로로 여기는 근대화의 풍조가 유럽에서 일어나 전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근대화 진행과정의 각 단계에서 선발국과 후발국의 대비가 나타났습니다. 후발국은 열세 만회를 위해 서두를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죠. 그래서 근대화된 체제를 빨리 세우기 위해 기존 체제를 마구 때려 부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도시재개발을 위해 옛 시가지를 뭉개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죠.

 

근대화의 선발국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든 자본주의든 자기네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펼쳐진 현상이었습니다. 이웃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억지로 한 일이 아니죠. 그래서 영국의 근대체제에는 전통의 연장이라는 측면이 크게 남아 있습니다. 의회제도만 보더라도 오늘날 기준으로는 불합리한 요소들이 많이 남아있고 신분의식도 강합니다.

 

바로 그 뒤를 이은 프랑스나 네덜란드 같은 서유럽국가의 근대화 진행에는 영국에 뒤졌다는 조바심 때문에 다소 서두른 면이 있지만 그래도 전통의 연장이 꽤 이뤄졌습니다. 그보다 뒤진 독일, 그리고 더 뒤진 미국, 러시아, 일본 등 후발국으로 갈수록 전통의 연장이라는 측면이 더욱더 좁아지게 되었죠.

 

20세기로 넘어올 무렵까지 ‘열강’의 명단이 한 차례 작성되었습니다. 이 명단에 든 나라들은 선발국을 쳐다보며 열등감과 초조감에 쫓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주변을 굽어보며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자존심을 지킬 여지가 있었던 거죠. 막차를 탄 일본의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유행한 ‘탈아입구(脫亞入歐)’ 구호가 전통 부정의 자세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몇 십 년 후 그 일본을 부러워한 중국 지식인들의 신문화운동에 나타난 극단적 유교 전통 부정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열강 대열에 들지 못한 나라들은 정복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피정복자들은 정복자들의 압도적 힘 앞에서 자기네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지키기 힘들었고, 정복자들은 지배를 쉽게 하기 위해 피정복사회의 전통을 열심히 파괴했습니다. 물질적 정복과 정신적 정복이 나란히 진행된 거죠. 식민지 조선이 겪은 일입니다.

 

일본의 세계대전 패전으로 일본인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한국인이 이질적 문명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자기네 영향력 확보를 위해 당시 한국인이 염원하던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 노선에서 벗어나는 정권을 세워주었고, 그 결과 한국인은 전쟁과 독재를 겪어야 했습니다.

 

독재정권은 지식인의 양심적 활동을 억압하는 일본 식민지배의 민족탄압 정책을 이어받았습니다. 독재정권 아래 특권을 누린 집단은 식민지시대의 친일파 집단과 거의 같은 속성을 갖게 되었죠. 전자의 집단이 후자 집단의 직계 후예라는 주장이 무성한 것은 그 동일한 속성 때문입니다. 정신적 후예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 특권 집단은 독재정권 종식 이후 식민지배나 독재권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기 특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계속해서 맡고 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자기가 속한 사회를 보호하려는 유산계층과 유식계층의 노력이 미약한 사회는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엘리트계층의 부재는 패망을 피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근로자와 사업가들이 아무리 생산에 힘을 써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은 국부 유출이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문화인들의 문화 활동도 민족문화 성장과 발전으로 잘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왜 전통의 의미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지 생각을 돌려보죠. 우리 사회가 당해 온 침략과 정복은 ‘개인의 파편화’를 통해 이뤄져 왔습니다. 개항기 때 만국공법의 ‘만국평등’ 원리를 내세워 동아시아 천하체제를 해체시킨 일을 생각해 보세요. 일본 침략의 첫 번째 구호가 ‘조선 독립’ 아니었습니까? 매국노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을 쓴 사실이 그 사정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허구의 평등을 내세워 현실의 차등을 가려놓음으로써 천하체제의 결속력을 해체하고 손쉽게 각개격파에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유동성 증가가 근대화의 기본 과제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이라 해서 꼭 한 순간에 몽땅 해치워야 하는 것은 아니죠. 사회는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유기체의 속성을 가진 조직입니다. 유동성을 늘리더라도 적절한 속도로 적절한 수준까지 늘려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유동성의 급격한 증가에는 부담이 따릅니다. 힘이 강한 사회는 이 부담을 힘이 약한 사회에게 떠넘깁니다. 자기는 견딜 만한 정도로 완만하게 유동성을 늘리면서 다른 사회에게는 주체성을 지킬 수 없는 급격한 유동화를 강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복’이죠. 정복당하는 사회에서도 근대화가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근대화를 ‘당하는’ 겁니다. 근대화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것입니다.

 

허구의 평등으로 현실의 차등을 감추는 것은 ‘만국평등’만이 아니라 ‘만인평등’의 구호를 놓고도 벌어진 일입니다. 피정복사회의 정복에 대한 저항력을 꺾기 위해 그 내부질서를 무너뜨리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수법으로 평등의 이념이 이용된 것입니다. 오해 없기 바랍니다. 나는 평등한 사회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 평등이 사회 구성원들의 꾸준한 노력을 통해 주체적으로 이뤄지기 바라며, 외부의 정복자가 던져준 평등이 내부질서 붕괴에 이용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20세기를 통해 우리 민족사회가 외부세력에게 당해 온 침략의 중요한 본질이 강요된 유동성 증가에 있었다고 저는 봅니다. 파편화된 개인이 각자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비생산적이고 불건강한 사회풍토, 안보의 주체와 공공성의 수호자로서 엘리트계층의 부재가 모두 성숙과정 없는 유동성 증가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사회의 생명의 원리로서 전통이 꺾여버린 것입니다.

 

 

 

5. 지금까지의 ‘근대’란 ‘가(假)근대’가 아니었을까?

 

 

산업혁명은 농업혁명에 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 맞는 존재양식의 큰 변화입니다. 농업혁명 이전의 인류는 먹을 것을 자연에게서 ‘얻어먹는’ 단계에 있었습니다. 주면 먹고, 안 주면 굶고. 농업혁명으로 ‘찾아먹는’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자연이 던져주지 않아도 재주껏 먹이를 찾아 허기를 달래게 된 거죠. 그러다가 산업혁명은 ‘뺏어먹는’ 단계를 열어주었습니다. 자연을 변형-훼손시키면서 식량과 에너지를 뽑아내 욕심을 채우게 된 것입니다.

 

존재양식의 변화에 따라 사회의 조직 원리에도 변화의 필요가 일어납니다. 농업혁명 이전 인류의 개체수는 지구상에 1천만 이하로 추정됩니다. 몇 억이 되었을 때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지금은 70억에 이르렀습니다. 말 그대로 세계가 ‘좁아지는’ 변화입니다. 좁아진 공간 안에서 어울려 살려면 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맺는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중세 농업사회로, 그리고 근대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유동성 증가가 필요하게 된 것은 이 까닭입니다. 농업혁명으로 채집-수렵사회에서 농업사회로 넘어올 때도 체제 변화가 필요했던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데 농업사회에 적합한 체제가 안정되는 데는 무척 긴 시간이 걸렸죠.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안정된 체제가 자리 잡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체제 변화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근대체제’로 이해해 온 자본주의-민주주의체제가 사실은 산업사회에 가장 적합한 체제가 아니라 더 안정성 있는 체제를 모색하는 과정의 하나의 시행착오나 과도적 현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2년 로마클럽보고서 <성장의 한계>로 환경과 자원의 한계 문제가 부각된 이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개념에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40년 동안 파국을 늦추기 위한 노력은 늘어나 왔지만, 확실한 해결책은 나타나지 않았죠. 기존의 근대체제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탈(脫)근대’(postmodern)란 말을 흔히 하는데, 저는 ‘본(本)근대’를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근대’가 ‘중세’처럼 상당기간 인류사회의 안정된 상태를 이루려면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 온 근대보다 훨씬 지속성 있는 체제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근대를 ‘가(假)근대’(pseudomodern)로 볼 수도 있는 거죠. 꼭 이런 말을 쓴 논설을 아직까지 본 일이 없습니다만, 비슷한 맥락에서 ‘근대’의 개념을 재고하려는 시도는 꽤 보입니다. ‘가근대-본근대‘를 하나의 가설로 내놓는 데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20세기 후반에 ‘탈근대’란 이름으로 시작된 변화를 ‘근대화’의 본 단계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펼쳐진 근대를 완성된 근대로 보기 때문에 ‘탈근대’란 이름을 붙인 것인데, 돌이켜 생각하면 이 3백년의 시기에는 인류사회가 안정된 체제를 구축한 것이라고 보기 힘듭니다. 농업문명 시작 때도 오랜 시간에 걸쳐 대형화된 전쟁이 세상을 휩쓸던 상황을 여러 문명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농업사회 체제 정착에 그런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산업사회 체제 정착에도 수백 년의 과도기가 필요했던 것 아닐까요?

 

과연 지금의 변화가 ‘탈근대’란 이름대로 전혀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 또 한 차례 격변의 시대를 인류가 겪게 될지, 아니면 지금까지의 시행착오를 넘어선 진정한 ‘근대화’로 안정된 세계체제를 이룩하게 될지, 지금 바로 단정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을 ‘본근대’ 쪽으로 한 차례 모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탈근대라면 ‘근대 이후’가 어떤 것이 될지 판단할 근거가 별로 없는 반면, ‘본근대’의 방향은 지금까지의 궤적에서 이어나가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근대화의 본질은 사회유동성의 증가에 있습니다. 중세체제가 한계에 접근하며 유동성 대폭 증가의 필요가 느껴질 때 그 대책이 여러 방향으로 강구되었겠지요. 그중 유력한 대책으로 떠오른 것이 산업혁명을 앞세운 유럽식 근대화였습니다. 유동성을 일거에 급증시키는 극단적 대책인데, 어떤 변화든 변화 초기에는 극단적 대책이 흔히 통용되죠. 기존 체제 파괴라는 단기적 과제에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움직이는 시계추가 중간에 머물지 않고 반대편 끝까지 가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입니다.

 

유동성의 급격한 증대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유럽식 근대화가 궤도에 오르자마자 문제들이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사회주의, 제도주의 등 대응책이 나왔죠. 그러나 시계추가 관성을 가진 것처럼 기존 ‘근대화세력’이 반동력을 발휘했고, 그 결과 20세기 전반기 동안 두 차례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었습니다.

 

20세기 후반 공산주의 확장은 유동성 억제 필요에 따른 현상이었는데, 이 역시 시계추가 지나치게 반대쪽으로 간 결과였습니다. 유동성을 너무 줄였던 거죠. 그에 비해 일부 유럽국에서 자본주의체제에 사회주의 원리를 가미하는 중도적 정책이 상당한 성과를 거뒀습니다. 환경 보호와 자원 절약을 지표로 하는 중도적 정책이 유동성을 적정선에 조정함으로써 산업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효과적인 방향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기본 방향에 거스르는 반동 노선이 신자유주의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유동성의 극단적 증대를 제창합니다.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함으로써 파편화하는 데서 출발, 모든 인간적 가치를 자본의 가치에 종속시킴으로써 자본의 지배에 대한 일체의 저항을 없애는 데 목적을 둔 노선입니다. 소수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위해 세계가 움직여가는 자연스러운 방향의 반대쪽으로 매달리는 것이기 때문에 ‘반동 노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국내에서 ‘뉴라이트’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신자유주의 논설을 보면 해외의 신자유주의자들에 비해서도 표현이 무척 노골적입니다. 식민지시대를 겪은 사회에서 식민지 경험을 미화하는 주장이 이렇게 당당하게 횡행하는 것은 별난 일입니다. 타이완은 식민지로서 한국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을 누렸지만, 그런 주장이 공론의 무대에 나서지 못합니다. 신자유주의 반동 노선에 대한 한국사회의 저항력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항력이 약한 문제는 문명 전통의 단절이 심한 데서 오는 것입니다. 단적인 문제가 엘리트계층의 부재 현상입니다. 재산과 고등교육을 비교적 많이 누리는 계층이 한국사회처럼 바깥만 쳐다보고 있는 것은 정상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 사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너무 적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