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7. 16:41


며느리 얼굴 보시는 게 근 두 달만이었다. 아내를 먼저 들어가게 하고 잠시 후 뒤따라 들어갔더니, 역시 잘 알아보지 못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내 얼굴을 보고 "어, 너 왔니?" 하고는 눈길을 며느리에게 돌리고 "저게 내 셋째 아들인데, 따라들어오는 걸 보니까 너는 내 며느린가보구나." 하신다. 추리력은 괜찮으시다. 기억력이 문제지. 그리고 기억 잘 안 되시는 것 가지고 별로 답답해 하시는 기색도 없다.

아무래도 기억의 출력 문제보다 입력 문제에 비중이 있는 것 같다. 몇 주 전 전문학교 시절부터의 친구인 이윤재 선생님과 이혜숙 선생님이 오셨을 때는 근 70년 전 일까지 떠올리며 환담을 나누셨는데. 오히려 십여 년 이내에 있었던 일은 잘 기억 못하시는 것이 많다. 뇌 기능이 퇴화하신 뒤 겪으신 일은 기억이 잘 안 되시는 것 같다. 그런데 이곳 오신 후 반년간의 일은 기억이 꽤 되시는 걸 보면 뇌 기능이 많이 회복되신 것 같다.

이 며느리는 지난 몇 해 동안 나 다음으로 많이 보신 사람인데도 쉽게 파악이 안 되신다. 병원 계실 때 거의 매일 가 뵙는데도 간병인이 "이 분 누구세요?" 하면 천연하게 "이 사람? 내 제자야." 하시곤 했다. 하기야 쓰러지시기 전 대자암으로 찾아뵐 때는 아내가 인사드리고 잠깐 물러나 있는 사이에 나를 보고 "저 아주머니 너 아는 사람이냐? 인상이 참 좋구나." 하신 일까지 있으니까.

아내랑 먼저 시간을 가지게 해 드리려고 사무실 다녀올 생각으로 "어머니, 저는 볼일 좀 보고 올께요." 하니까 "볼일? 오줌이냐, 똥이냐?" 하신다. 이럴 때는 짐짓 장난치시는 건지 어떤 건지 잘 분간이 안 된다. 장난치시는 것 같은데, 시치미가 여간 아니시다.

사무실에 가 입원비를 내고 돌아올 때 마침 보험공단 직원이 도착했다. 장기요양보험 갱신을 위한 조사를 나온 것이다. 조사하는 동안 입회해 있는데, 못 보던 사람 보고 안 하던 일 하니까 재미있어 하신다.

조사원의 질문에 대답하실 때마다 "네, 어머니, 훌륭하십니다." 추임새를 넣어 흥을 돋워드리는데, 하다 보니 신이 너무 나셨다. 뭐든지 잘한다고 주장하시는 것이었다. 밥도 손수 잡숫고, 화장실도 혼자 가시고... 조사원이 정말 곧이들으면 보험 수혜자격이 잘릴 지경으로 다 잘한다고 우기시는데, 내가 계속 "네, 어머니, 잘하십니다." 하고 있으니 조사원이 나를 쳐다보고 씩 웃는다.

조사원이 가고 가족끼리 앉자 내 칭찬을 한참 하신다. 그런데 칭찬의 메시지가 단순한 형태가 아니다. 똑똑한데 똑똑한 체하지 않고, 잘났는데 잘난 체 하지 않으니까 그것이 착한 거다, 겸손한 거다, 이런 복합적인 틀이다. 수준 높은 사고력을 회복하신 것이다. "어머니도 잘난 체 않고 겸손하셨잖아요?"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오무려 익살스런 표정으로 "나야 잘난 체하기 바빴지." 하신다.

내가 당신에게 잘해 드린다는 칭찬까지 나왔을 때 "어머니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잘해 드렸으니까 저도 닮아서 그런 거겠죠." 능청을 떨어봤다. 옛날 일에 대한 기억이 어떠신지 살피고 싶어서였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는 그분들께 잘해 드린 게 하나도 없다." 하다가 잠깐 생각에 잠기신다. 그리고 갑자기 결연한 표정을 짓고 다시 말씀하신다. "그래도 그분들께 불명예는 끼쳐드리지 않았다. 천내리 살 때부터."

천내리 쪽으로 내가 이야기를 끌어드리니까 그 시절의 기억이 여러 가지 나오신다. 명확하지 않은 곳도 더러 느껴지지만 그래도 꽤 분명하게 기억되시는 것 같다. 천내리 가기 전의 기억은 거의 없고 천내리에서 지내던 때부터 기억이 연결된다는 말씀도 하셨다.

천내리. 함경남도(지금은 강원도) 문천군에 속해 있다가 해방 후 천내군으로 분리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3.1운동 이후 쫓기는 몸이 된 외할아버지가 충청도 고향에 외할머니 뱃속의 어머니를 두고 금강산으로 달아났다가 곡절 끝에 정착해 해방 때까지 사신 곳이다. 큰 시멘트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공업도시 하나가 산골에 생겨났는데, 외할아버지는 산판과 상점을 경영해 지역의 유수한 사업가로 행세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일고여덟 살 때 외할머니를 따라 그리 갔고, 거기서 소학교를 다닌 다음 통신강의로 중등과정을 하다가 스무 살쯤 되어 전문학교 진학을 위해 그곳을 떠나셨던 모양이다. 소학교 다닌 것이 어린 소녀에게 강렬한 경험이었던듯, 전에도 그 시절 얘기를 떠오르는 대로 해주시곤 했는데, 오늘 또 그 얘기가 나오신다.

일본인 학교로 한국인과 중국인 학생들도 같이 다녔는데, 거기서 1등만 하신 일이 아직도 마음에 통쾌하신 모양이다. 그냥 1등이셨겠는가? 2등이 어디 있나 보이지도 않는 1등이셨겠지. 게다가 운동이고 뭐고 공부 외에는 모두 젬병이었다는 게 나랑 비슷하셨던 모양이다. 유아독존의 성향을 키우기에 딱 좋은 조건이다. 소시쩍의 나처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얘기를 끌어내 보려고 약간 시도해 봤지만 성과가 신통치 않았다. 그분들 말년에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시는 것 같다. "그분들께 불명예는 끼쳐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에도 방어적인 뜻이 있는 것 같다.

이야기가 성글어졌기에 휠체어에 태워 모시고 나왔다. 그런데 패션이 달라졌다. 모자는 에스터가 떠준 것 맞는데, 캐시미어 스카프와 양털 슬리퍼 대신 굵은 털실로 짠 숄과 덧신이다. 날렵하고 투박한 차이가 있지만 이 차림도 편안해 하신다. 이종숙 선생님이 손수 떠 보내준 것이 일전에 도착했다는 얘기를 그제서야 들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물건 자체를 누리실 뿐 아니라, 어머니가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는 분이라는 사실을 함께 지내는 분들에게 인식시켜 주는 만큼 그분들도 어머니를 더 존중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복도를 한 바퀴 바람쏘여 드리려는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복도 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할머니들, 간병인들이 말을 걸어오는 데서 어머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응대도 참 잘 하신다. 간병인들 대하는 거야 병원 시절부터 익숙하신 일이거니와, 노인분들 대하시는 데서 상당한 수준의 분별력을 느낄 수 있다. 노인분들 중에는 신체적 조건이나 굳어진 습관 때문에 표현이 원활하지 못한 분들도 있는데, 그런 문제를 다 이해하고 감안하면서 응대하시는 것 같다.

유리창 넓은 곳에서 바깥 내다보는 것은 늘 좋아하신다. 그러나 오늘은 부슬비가 내리고 어두운 날씨라서 그런지 그리 오래 창가에 머물지 않고 거실로 돌아왔다.

텔레비전에서 김삿갓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전공에 가까운 얘기라서 쉽게 파악이 되시는 것 같다. 처음에 장면이 바뀔 때 "저게 어디냐?" 두어 번 물으시고는 꾸준히 시청하신다. 한참 보다가 나를 돌아보며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돼." 하시기에 "알아보실 만한 내용도 많이 있죠?"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그야..." 하신다.

전번 왔을 때 도자기 이야기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던 생각이 난다. 상당 시간 관심을 이어갈 만큼은 이해가 되시는데, 확실한 파악은 안 되시는 모양이다. 아마 일상생활을 파악하시는 데 비겨서 확실하지 못하다고 느끼시는 것이 아닐까. 정말 생활에 대한 파악은 확실해 보인다. 3년 전, 쓰러지시기 전과 비교해 못해 보이지 않는다.

모시고 있은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눕고 싶다." 하셔서 방에 모셔다 드렸다. 크게 힘들어 보이시지는 않고 조금 졸려 보이시는 정도였다. 그런데 눕혀드린 뒤에는 도로 초롱초롱해져서 간병인에게 "당신은 누구신데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슈?"로 시작해서 한참 잡담을 즐기시다가 문득 생각난 듯, "너희는 가 보렴. 와줘서 고맙다." 하시는 것이었다.

나오는 길에 원장님과 얘기를 나눴다. 메모해 놓은 것을 보며 지난 토요일에 작은형이 다녀간 일, 엊그제 고종누님 내외분이 다녀간 일을 다 말씀해 주신다. 다른 직원들도 대개 어머니를 좋아하고 잘 대해 드리는 것 같지만, 나보다 한 살 위인 원장님은 어머니의 특성을 정말 잘 이해해 드리는 것 같다. 십여 일만에 찾아온 아들, 며느리에게 두 시간만에 "잘놀았다, 가봐라." 하시는 것도 다 믿을 데가 있으니까 그러시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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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27. 16:40

오랫만에 혼자 뵈러 갔다. 전날 공주에 가 문영이 이사 준비를 확인하고 아침에 입주 수속을 해준 다음 이사가 대충 끝나는 것까지 보고 출발하니 11시 반. 제일 큰 생활여건 안정이 되었으니 어머니 뵈러 가는 발길이 가벼웠다.


두 시에 도착해 보니 침대에 누워계셨다. 반기기는 반기시는데, 조용한 반응에서 마음 편안하신 것을 느낄 수 있어 좋다. 학교 다녀온 아들 맞으시는 것 같다. 좋긴 좋은 일인데, 요란스럽게 기뻐할 별난 일이 아니라 그냥 보통스러운 삶 속에 보통스럽게 나타나는 조그만 기쁨의 하나.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는 조그만 기쁨이지만, 그것이 저절로 흥을 일으켜드린다. 방에 들어설 때 뵌 무덤덤한 표정에 기쁨의 빛이 짙어지더니 학도가 가락이 나오신다. "우리 셋째 아들은 복덩이래요 / 우리 셋째 아들은 복덩이래요 / 마주치는 사람은 다 좋아해요 / 그럼 됐지, 그럼 됐지, 뭘 더 바래요."


음, 오늘은 내 역할이 복덩이구나, 복덩이 노릇 잘 해야지, 속으로 생각하며 여사님에게 물어봤다. 오전에 많이 앉아 계셨냐고. 좀 앉아 계셨지만 너무 피곤하실 정도는 아니라고. 그러지 않아도 좀 있다가 앉혀 드리려던 참이라며 휠체어에 앉혀드린다.


에스터 엄마의 세 번째 선물보따리가 온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양털 슬리퍼와 양털 쿠션. 발을 부드럽게 감싸는 슬리퍼도 편안해 보이시지만, 쿠션은 어머니 행복을 더해 드리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가슴에 내내 끌어안고 계시는데, 몸 앞부분을 따뜻하게 지켜드릴 뿐 아니라 안고 계시는 자세 자체가 어떤 만족감을 드리는 것 같다. 거기에 스카프와 모자까지, 완전히 에스터 패션이다.


병원 계실 때 대덕화 보살님이 이따금 별미를 갖춰드리는 것을 보며 감탄하곤 했는데, 에스터 모녀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좋아하는 분의 행복을 이처럼 알뜰하게 보살펴드리는 것을 보며 정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엔 남도 해드리는 걸 자식이 못해 드린다는 데 자격지심도 들었지만, 이제 두 손 들었다. 성질도 습관도 살갑지 못한 놈이 억지로 흉내낼 일이 아니다. 황새는 황새고 뱁새는 뱁새다. 나는 어머니에게 필수품 노릇만 하면 된다. 기호품과 사치품이 들어오는 길을 가로막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고 보면 상대적으로 볼 때 작은형은 기호품 노릇, 큰형은 사치품 노릇을 하는 셈이다. 작은형이 거의 매주 들른다니 다행이다. 직접 얘기를 듣지 못해도, 그만하면 지낼 만하니까 어머니께도 들를 수 있는 거겠지. 어머니도 한 달 전처럼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신다. 그 때 형 걱정해 주시는 것 보고는 정말 놀랐었다. 상황 인식을 그만큼 포괄적으로 하실 수 있을 줄 모르고 있었었다.


사고력이 늘어나면 그만큼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불만도 늘어나실 수 있지 않을까, 한쪽으로 걱정도 했는데, 그렇지는 않으시다. 문영이 이사한 얘기를 해 드렸는데, 큰형 왔을 때 문영이 본 얘기 듣고 "잘 먹고 살더냐?" 한 마디만 물으시던 것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묻기도 하셨지만, 그리 깊이 캐묻지는 않고 "그래, 네가 살펴주니 마음 놓는다. 고맙다." 하시고는 더 말씀 않으신다.


홀 끄트머리, 식탁 바깥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일본어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텔레비전에서 분청사기에 관한 기획물이 나오고 있다. 그런 프로그램은 보실 만할 것 같아서 식탁 안쪽,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아 드렸더니 한참 보시다가는 나를 돌아보고 다른 말씀을 몇 마디 하시다가 또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오락가락하신다.


내용 일부를 짚어 여쭤보니 민망한 표정으로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 하신다. "아무것도 모르겠는 건 아니죠? 알 듯 말 듯 하시죠?" 하니까 "그야 물론이지." 텔레비전을 향한 채로 말씀하시고는 뭐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며 회심의 미소(내게는 그렇게 보였다.)를 띠고 말씀하신다. "모르는 거 모른다고 하니까 참 편하고 좋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짚어드려 보았다. "교수 하시는 동안 모르는 거 아는 척하느라고 힘드셨죠?" 바로 짚었다. 고개를 마구 끄덕거리며 "그래, 그래!" 하신다.


원장님이 다과를 가지고 와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한 내용은 없어도 어머니 지내시는 상황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가 있어서 고마웠다. 얘기 오가는 중에 수시로 어머니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데, 어머니는 최대한 따라오려고 애는 쓰시지만, 100%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크게 불만스러워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다. 텔레비전 보시는 태도도 그와 비슷하다. 무슨 소린가, 조금 어리둥절해서 쳐다보고 계시다가 이해되는 맥락이 늘어남에 따라 더 깊은 주의력을 가지고 보시게 되는 것 같다.


원장님이 일어난 뒤 남아 있던 과자 때문에 "돼지" 우스개가 나와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그보다 앞서 무슨 얘기 끝에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너는 어렸을 때 그렇게 욕심이 많더니, 그 욕심이 다 어디 갔냐?"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씀이었는지는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내가 먹성이 좋았던 생각이 나셨던 것 같다.


나를 보고 남은 과자를 다 먹으라고 성화를 부리시는 것이었다. 음식 남기지 못하는 습성은 정말 어쩌실 수 없다. 아까 하신 말씀이 생각나 농담을 드렸다. "어머니, 저 옛날엔 욕심이 많았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아들을 자꾸 돼지 취급하지 마세요." 했더니 "돼지"란 말이 마음에 드셨는지 붙잡고 늘어지신다. "한 번 돼지면 영원한 돼지야! 돼지가 돼지 아닌 척하면 못쓴다." 해병대도 안 가보신 분이 왜 이러시나! 식탁 저 쪽에 모여 빨래 정리하던 여사님들 중에 알아듣고 킥킥거리기 시작하는 분들이 있다. 내가 짐짓 엄살을 했다. "어머니, 목소리 좀 낮추세요. 아들이 돼지라고 온 동네 소문내셔야 되겠어요?" 예상대로 흥이 나셨다. 목소리가 반 옥타브 올라가신다. "돼지를 돼지로 아는 게 뭐가 잘못됐냐? 네가 돼지라는 걸 온 세상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 난 돼지 같은 아들이 좋은 걸~" 여기서 즉흥 '돼지 타령'으로 이어진다. 그 내용은 차마 여기 적지 못하겠지만, 여사님들 빨래 정리 작업이 한 동안 중단되었다는 사실만 밝힌다.


병원에 계실 때는 담당 여사님들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여기 와서는 성씨도 파악하지 못하고 지낸다. 자주 가지 못할 뿐 아니라 한 달마다 바뀌게 되어 있으니까. 그래도 이제 대개 다 낯이 익고, 더러 새로 오신 분이라도 어느 분 보호자인지 알면 처음 말을 나누는 데도 별 스스럼이 없다. 어머니가 여사님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잘 알려져 있고 보호자도 까다롭지 않은 사람들로 인식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지난 주 왔을 때 그 방을 맡고 있는 것을 처음 본 안경 낀 여사님도 어머니 살펴드리는 데 열성일 뿐 아니라 어머니를 좋아해서 정말 기쁜 마음으로 살펴드리는 것 같다. 그 좋아하는 대상이 우리 어머니라는 건 다행스런 일이지만, 다른 분들도 다 그만큼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조금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 문제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떠날 때 살짝 확인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 작별 인사 드리고 원장님께 인사하려고 보니 한 구석에서 우리 안경 여사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가가서 간단히 인사하려는데, 원장님이 웃으며 말해 준다. 지금 여사님이랑 얘기하고 있던 게 그 방의 한 할머니 얘기라고. 여사님들이 어머님께만 잘해 드린다고 얼마 전부터 샘을 내기 시작하셨다고.


문에 가까이 어머니와 마주보는 침대의 할머니는 참 순둥이시다. 어머니랑 불경을 읽으면 당신도 듣게 더 크게 읽어달라고 하기도 하고 언제나 호감을 표시하려 열심이시다. 창문 가까운 두 분도 나는 물론 갈 때마다 깍듯이 인사를 드리지만 반응이 좀 시원찮은데, 그런 불만도 충분히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원장님이 현명한 분이고 여사님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일하는 곳이니 잘 처리하실 것을 믿는다.


한 시간 반쯤 앉아 계시다가 침대에 누우셨다. 누워서도 양털쿠션은 가슴에 꼭 안고 계신다. 불경은 반야심경만 외웠다. 다른 할머니 샘내신다는 얘기 듣기 전이었지만, 너무 소리를 많이 내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불경은 앉아 계실 때 독경집을 펼쳐놓고 읽으시는 편이 좋은데, 오늘은 돼지 타령에 시간을 너무 썼다.


오늘은 천천히 또박또박 외우신다. 경문 전체를 머리속에 떠올려 놓고 거기서 술술 풀어내는 듯한 독경 방식이다. 다 외우신 뒤에 "어머니, 쉬세요." 하니까 너무 당연히 할 일이라는 듯이 눈을 감으신다. "머리 긁어 드릴까요?" 했더니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금세 잠이 드신다. 계속 살살 긁어드리고 있으려니 거의 코까지 골기 시작하신다. 시선을 문밖에 두고 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느새 깨어 말을 거신다. 무슨 말씀인지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옆에 늘 있는 녀석에게 툭 던지듯, 아무 긴장감을 느끼지 않게 하던 분위기만 기억난다.


떠날 때 대범하신 태도, 마치 "학교 갔다 오겠습니다." 하는 인사 받으시는 것 같은 태도가 무엇보다 어머니 마음 편안하심을 보여준다. "저 갈께요." 하니까 입술로 뽀뽀 시늉을 하신다. "어디다 해드릴까요?" 상투적 질문에 "너 이마 좋아하지 않냐?" 이마에 뽀뽀해 드리니까 나직하게 "고맙다, 잘 가라." 몇 마디 더 하다가 "뺨에도 하고 싶어요." 하니까 "좋지." 왼쪽 뺨을 살짝 올려 대주시고 다시 나직하게 "고맙다, 잘 가라."


원장님께 고마운 일 하나가 또 생각난다. 작은형이 왔다가 일어설 때 "셋째 아드님은 다녀갈 때 꼭 뽀뽀를 해드리던데요?" 하고 일깨워줘서 작은형도 뽀뽀질을 시작했다고. 원래 그건 큰형이나 하던 짓인데, 이제 3형제가 다 달려들게 되었으니 어머니가 뽀뽀 알레르기를 일으키게 되시지나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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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27. 16:30

68년 전인가? 이윤재 선생님, 이혜숙 선생님과 어머니가 함께 이화여전 입학하셨던 것이. 이화대학에서 함께 근무하시다가 80년대 후반에들 퇴직하실 때까지 참 오랫동안 많은 것을 함께 하신 분들이다. 요즘 기억과 기억력을 많이 회복하고 계신 참에 두 분 방문을 받고 정말 벼라별 옛일이 다 떠오르시는 것 같다.

두 선생님도 참 기뻐하신다. 쓰러지시기 한 달 전이니까 벌써 2년 반이 되었구나. 어머니가 우리 집 다니러 오셨을 때 두 분이 일산으로 찾아와 점심 함께 하셨던 것이. 그때도 사람을 잘 못 알아보실 때였지만 두 분 알아보시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워낙 오랜 친구들이시니까. 그런데 오늘은 알아보시는 것도 그때보다 더 명쾌하신 것 같고, 옛일도 더 잘 기억하시는 것 같다. 보름 전 기억력 회복되신 것을 보고 놀랐는데, 오늘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김호순 선생님 역시 알아보지 못하실 수가 없는 분이다. 국문과 동료로, 열두 살 차이지만 어머니와는 꼭 자매간처럼 지내신 분. 지난 3월 일산의 병원으로 찾아오시고, 요양원 옮긴 뒤로는 처음이시다. 시병일기를 메일로 보내드리기 때문에 어머니 상태가 좋아지신 것을 알고 무척 벼르시다가, 막상 와뵙고는 너무너무 좋아하신다. 꼭 소녀 같으시다. 78세 노인이신데, 연상의 세 분과 함께 있으니 진짜 소녀 기분이 드신 것도 같고.

세 분과 한 분 한 분 반갑게 인사를 나누신 뒤에 뒷전에 있던 내가 눈에 띄니까 순간적으로 얼굴이 확 풀어지신다. 애기 얼굴이 되신다. 내가 반가운 건 다른 분들 반가운 것과 차원이 다르게 나타나서 민망할 정도다. 고개를 쭉 빼어 나를 쳐다보며 벙긋벙긋하시다가, 순간 실태를 깨달으신 듯 얼렁뚱땅하신다. "어? 너도 왔냐? (사람들을 둘러보며) 저 녀석이 내 아들 같은데요?" 그러고 노래가락으로 넘어가신다. "내 아들이면 어떻고 내 아들 아니면 어떠냐? 와줘서 고맙다~"

원장님도 와서 수인사가 대충 끝난 뒤 나는 차에 돌아와 선생님들 가져오신 귤을 부엌에 넣고, 잠시 기다려 남지심 선생님과 <불광> 남동화 보살님을 마중했다. 남 선생님은 그 사이 요양원에도 두어 번 다녀가셨고 남 보살님은 나랑은 초면이지만 어머니랑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온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두 분을 모시고 올라가니 역시 바로 알아보고 반가워하신다. 다섯 분 손님과 나, 원장님, 일곱 사람에게 둘러싸여 어머니 말씀, "아니 이게 웬 일이야? 오늘이 또 내 생일이야?"

신종플루 때문에 위생보안이 삼엄한 때이기도 해서, 이렇게 여러분이 오시면 3층에 앉기로 양해가 되어 있었다. 올라가서는 <불광> 쪽 볼일이 있으면 보시라고 세 분 선생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켜 주셨지만 <불광> 쪽도 크게 볼일은 없었다. 그래도 불교도들끼리 앉은 틈을 이용해 반야심경을 한 차례 외웠다. 어머니가 기운차게 외우시는 모습을 보며 남 보살님도 놀란 기색이었지만, 기력이 없으실 때도 종종 찾아와 쭉 봐 오신 남 선생님은 정말 감동이 크신 것 같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선생님들이 가져온 과자를 먹으며 꼬박 두 시간 동안 잡담이 이어졌다. 학창시절까지 공유하는 두 분 이 선생님, 그리고 어머니 퇴임 전후 이십여 년간 학교 일만이 아니라 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서 밀착되어 있던 김 선생님에게 둘러싸여 앉았으니 정말 벼라별 얘기가 다 나왔다. 내가 새로 듣는 얘기도 꽤 있었다. 돌아가신 분들 말씀도 많이 나왔다. 살아남은 분들이 먼저 가신 분들 얘기를 하려면 뭔가 처연한 기분이 들기 쉬울 텐데, 오늘 그 자리에선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어머니가 기억 저쪽으로 사라졌다가 돌아오신 것 같은 느낌이 생사의 경계를 가볍게 느끼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가 옛날 일을 기억하며 부끄러움 같은 것도 느끼시는 감이 있었다. 특히 김 선생님이 꺼낸 "연애대장" 대목에서. 돌아가신 김초열 여사님, 이숙훈 여사님과 어머니가 그 방면에서 "삼총사"로 통했다고. 좋은 얘기 들을 만한 분이 눈에 띄었다 하면 세 분이 몰려가 "녹여버리려" 드는데, 두 분 여사님은 물적 자원(음식 등)에 주로 의존하시는데 어머니는 지적 자원으로 두 분과의 경쟁에서 늘 우위에 서셨다고. 김 선생님은 어머니 찬양하는 뜻에서 꺼낸 이야기겠지만, "구도"에 대한 어머니의 열성이 좀 지나치시다고 나도 느껴오던 일에 "연애" 이름까지 붙여 내놓으니 좀 열쩍으셨을 거다.

그 얘기만이 아니라 세 분 선생님과 함께 떠올리는 이런저런 옛 일들이 이제 막 되살아나고 있는 어머니의 감성에 자극이 강한 것이 많았을 것 같다. 오늘 말씀을 거의 노래가락으로 일관하신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서적 완충 효과가 있으니까. 노래가락 화법에 두 분 이 선생님도 많이 즐거워하셨지만, 특히 김 선생님은 좋아서 정말 어쩔 줄 모르신다. 처음 앉아서부터 흉내를 시도하다가, 후반부 들어서는 중창 가닥이 제법 어울리기에 이르렀다. 원래 연극 전공으로 표현력이 뛰어나신 분이니까 그렇기도 하고, 어머니와 다년간 교감의 폭과 깊이가 크기 때문일 것도 같다.

어머니 생활 환경이 훌륭한 것에 대해서도 세 분 선생님이 기뻐하셨다. 시설이 좋은 데 우선 놀라시고, 직원들과 간병인 여사님들 친절한 태도에 다시 놀라신다. 평생 사회활동을 해온 분들이기 때문에 꾸민 친절과 진짜 친절을 잘 구별하시는 분들이다. 이사장님이 오랫동안 장애인 사업에 뜻을 지켜오신 배경을 설명해 드리니 끄덕끄덕하신다. 사업주가 수익성에 연연하지 않고 봉사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는 것은 직원들이 건전한 자세로 일할 수 있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도 필요조건은 될 것이다. 연규 형과 연호, 아들 형제가 다 미국에 자리 잡고 있는 이혜숙 선생님은 여기 들어와 살 생각도 나시는 모양이다. 장기요양보험을 알아보겠다고 하신다.

남 선생님과 남 보살님이 먼저 떠나고, 2층에 내려와 세 분 선생님과 잠깐 앉았다. 한 달 전만 해도 두 시간 넘게 앉아 계시면 힘들어 하시던 생각이 나서 스테이션에 앉아 있는 간호사에게 슬며시 물어봤다. 친구들 때문에 흥이 겨워 평소보다 활동량이 많으신 것 아니냐고. 요새는 평소에도 저 정도 활동은 하신다는 대답이다.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금강경을 몇 꼭지 읽었다. 그런데 늘 하시던 독경식 낭송이 아니라 특이한 방식이라서 잠깐 어리둥절했는데, 생각해 보니 노래가락 화법을 낭송에도 적용시키고 계신 것이다. 노래가락 화법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앞으로도 더 생각할 것이 많은 것 같다.

오랜 친구들과 모처럼 몇 시간 흥겹게 지내신 뒤에 떠나 보내기가 좀 힘들지 않으실까 걱정했는데, 근래 언제나처럼 선선하시다. 욕심이 없으신 거다. 먹을것도, 사람도, 있으면 즐기신다. 그렇다 해서 없다고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뒤에 처져 있던 내게 "넌 안 가도 되는 거지?" 하시기에 "제가 모셔다 드려야죠." 했더니, "어, 그래, 잘 모셔드려라." 하신다. 미안한 마음에 "어~머~니~ 가기 전에 뽀뽀 해드리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엉구럭을 떠니 속을 뻔히 알지만 싫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쑥 내밀어주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세 분 선생님이 기쁜 마음을 거듭거듭 표하신다. 어머니 건강도 여러 해 전부터 안 좋으신 데다 자식들도 안정된 위치에 있지 못해서 늘 마음에 걸리셨을 것이다. 그러다가 저렇게 기운을 차리시고, 게다가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시는 것을 보니 너무나 기쁘신 것이다. 인연이 깊으신 분들과 이런 좋은 자리 만들어드렸다는 것이 내 스스로도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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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