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7. 16:02
 


11시 안돼 이천에 도착했지만 은행을 찾아 큰형이 환전하는 데 30분 너머 걸리고 보니 점심시간이 임박했다. 둘이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12시 반에 요양원에 도착했다.

식사가 막 끝나고 아직 식사하던 자리에 앉아들 계실 때였다.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간병인이 휠체어를 밀고 나오니 어머니는 왜 나만 먼저 내보내나,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가 "누가 오셨나 보세요." 소리에 눈을 들어 큰형이 보이자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신다. "너 기봉이 아니냐?" 웃음이 얼굴을 채우고 한 순간 뒤 말씀을 이으신다. "너 먼 데 있지 않았냐?"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어머니 건강상태를 형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형이 와서 이틀 묵을 예정을 직원들이 모두 알고 있었고 어머니께도 틈틈이 말씀 드렸을 텐데, 그런 기억은 이 순간에 없으셨다. 그저 큰아들 얼굴을 바로 알아보셨고, 이 아들이 쉽게 찾아올 형편이 못 된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계신 것이다.

형이 "네, 어머니. 어머니 뵈러 미국에서 왔어요." 하면서 내미는 손을 우선 잡으셨다가 얼른 손을 뻗쳐 얼굴도 한참 만져 보신다. 그러다 흥분이 가라앉으셨는지 형의 손을 쥔 채 노래가락 화법으로 돌아가신다. "우리 아들이~ 날 보러 왔어요~ 착한 아들이~ 날 보러 왔어요~"

둘러선 여러 사람을 둘러보며 아들 타령을 한 동안 하신다. "이 녀석이~ 내 큰아들이요~ 큰아들은~ 착한 아들이요~ 저 녀석은~ 내 셋째아들이요~ 셋째아들도~ 착한 아들이요~" 이런 잘난 체를 둘러선 분들이 다들 곱게 봐주시는 기색인 것을 보면 어머니의 인기가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들 타령이 한참 나가다가 아들이 셋도 되고 넷도 된다. 큰형이 보고드릴 틈을 찾았다. "아들이 넷이면 영아까지 아들인가요? 어제 오랫만에 영아 보니까 잘 지내데요." 영아 얘기가 나오니까 주춤, 보통 말투로 물으신다. "그래? 영아를 봤어? 밥은 잘 먹든?" "네, 밥도 잘 먹고, 잘 지내는 것 같데요." 대답을 듣고는 도로 노래가락이다. "그러면 됐어~ 밥 잘 먹으면 됐지~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라겠니~" 잊지는 않으셔도 걱정 또한 않으시는 것을 보며 형이 정말 마음이 놓이는 기색이다.

아들 타령올 오래 끌다 보니 망발에 가까이 가셨다. "우리 큰아들~ 참 잘난 놈이요~ 다른 놈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둘러섰던 분들이 아니, 셋째 아드님도 얼마나 잘하시는데요, 항의들 하시는데, 내가 짐짓 삐진 시늉으로 일어설 듯하며 "어머니, 잘난 큰아들이랑 잘 노세요. 아무것 아닌 소자는 물러가옵니다." 했더니 끄떡도 않으시며 노래가락을 이으신다. "갈 테면 가라, 이놈아~ 이놈은 아무것도 아니어서~ 내가 제일 좋아하지요~ 아무것 아닌 게 나는 좋아요~" 모두들 손뼉을 치며 웃는다.

정말 대단하시다. 노래가락에 이렇게 중층적인 정감을 담아 풀어내시다니. 옛날 음유시인이나 고급 광대가 쓰던 표현기법이 이런 것이었을까? 노래가락으로 이야기하시는 까닭이 뭐냐고 나중에 형이 여쭐 때는 웃음을 잠깐 거두고 보통 화법으로 대답하셨다. "말하면서 산다는 게 너무 힘들어. 그 동안 너무 힘들었어. 이젠 노래나 부르고 살겠어."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다 보니 혹시 힘드시지 않을까 싶어 내가 여쭸다. "어머니, 똥구멍 아프지 않으세요?" 전에 보면 휠체어에 앉은 지 네 시간 정도 될 때 "야, 똥구멍이 아프다. 나 좀 눕혀다고." 하셨었다. 그런데 이번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으신다. "뭐? 뭐가 아프냐고?" 귀에 가까이 입을 대고 다시 말씀드렸다. "똥구멍 아프지 않으시냐고요. 눕지 않으시겠어요?" 이제 얼굴까지 찌푸리고 소리를 높이신다. "안 들려! 어디가 아프냐고?" 텔레비 보던 분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들 보는데 알아들으시도록 외칠 엄두가 안 나 쩔쩔 매는데, 형에게 고개를 돌리며 흉보는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저 놈 우물쭈물하는 거 보니까 뭐 나쁜 소리 했나보지?" 아무래도 일부러 골탕먹이신 것 같다.

욕도 한 차례 얻어먹었다. 나이 얘기가 나와 "내 나이가 얼마냐?" 묻다가 주변에서 아흔 소리가 나오는 걸 듣고 "내가 아흔이냐?" 나를 향해 물으신다. 장난기가 동해서 "아흔씩이나 되셨겠어요? 마흔이겠죠." 잠깐 어리둥절해서 "마흔?"하다가 장난을 알아채신 듯 인상을 한 차례 북~ 긁고 "예잇! 이 쌍놈!" 한 방 지르시고는 바로 웃음으로 돌아가신다.

이사장님이 올라와 어머니를 모시고 4층의 형이 묵을 방을 보고 나서 그 옆의 아늑한 거실에 넷이 한참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이사장님과 큰형이 주로 얘기를 주고받는데, 어머니가 이따금씩 끼어드는 화법이 여간 절묘하지 않으시다. 말씀을 혼자 많이 하실 때보다 그 묘한 점이 더 뚜렷이 보인다. 다른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흥을 돋워주시는 것이다. 어리숙한 체하는 화법을 원래도 많이 쓰셨지만, 지금은 아주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한 지 두 시간이 되어 가는데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셔서 바람 쏘이러 2층 테라스로 모시고 나갔다. 꽃을 보고 좋아하신다. 그늘에 앉으시겠는가, 볕에 앉으시겠는가 여쭈니 싱긋 웃으며 볕 쪽으로 고개를 돌리신다. 아무래도 볕을 쪼이시는 시간이 넉넉지 못한 모양이다. 형이 있는 동안 간병인들을 재주껏 구워삶아 놓겠지. 날씨가 괜찮은 동안 바깥바람을 최대한 쏘여드릴 수 있도록.

기억력 테스트를 하나 시도했다. "어머니, 며칠 후에 대덕화 보살님이 어머니 뵈러 온대요." "대덕화? 그게 누구냐?" "어머니 쓰러지셨을 때 병원에 모셔다 드린 임 교수요. 그 분 오면 어머니가 좋아하시잖아요?" "그래? 그런 분이 있었던가?" "그분 오면 대덕화 보살님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세요. 모르는 체하면 서운해 하잖아요?" "알았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짖궂은 웃음을 띠우신다. 이름으로는 전혀 기억이 되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지금보다 기력이 약하실 때도 나타나면 바로 알아보시던 얼굴인데.

아들들이 모시고 앉은 동안 노래가락 화법을 많이 안 쓰시는 걸 보면 접대용 화법인 모양이다. 가끔 아들들에게도 접대할 마음이 드실 때는 수시로 쓰신다. 형이 "어머니, 작년 뵐 때보다 더 예뻐지셨어요." 하니까 같잖다는 듯이 하! 헛웃음 뒤에 "우리 아들이~ 날 보고 예쁘대요~ 칭찬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아요~" 노래가 나오시고 내가 "어머니, 지금 들으신 건 칭찬이 아니고 아첨이었어요." 하니까 곧바로 "칭찬도 좋고요~ 아첨도 좋아요~ 좋은 말 들으니까~ 기분이 좋아요~" 이어지신다. 이런 끼가 있으셨던가, 감탄스럽다.

세 시 가까이 되어 눕고 싶으시다기에 방에 모셨다. 금강경을 읽어드릴까 여쭈니 즉각 "그래, 읽어다고." 하신다. 경문을 꺼내면서 "먼저 반야심경부터 한 번 외우시죠. 마하반야바라밀다..." 하니까 바로 따라 외우시는 데 거침이 하나도 없으시다. 금강경을 읽어드리니 또 내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길을 떼시기는커녕 깜박이지도 않으신다. 뭔가 실수가 나올까봐 감시하시는 건지, 소리가 나오는 발원지를 바라보면 더 잘 들릴 것 같아서 그러시는지. 한 꼭지 읽고 나서 "잘 읽었죠?" 하니까 심각하던 표정에 웃음을 떠올리면서 "그래, 잘 읽었다." 다음 꼭지를 읽기 시작하니까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자주 뵙지 못하니 이런 것은 아쉽다. 금강경 듣기 좋아하는 걸 형이 봤으니 혼자 모시고 있을 때 읽어드리려고 애를 쓰겠지. 예수쟁이가 익숙하지도 못한 경문 읽느라 버벅거릴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온다.

제일 긴 꼭지, 제13분까지 읽은 뒤에 "어머니, 저는 가볼께요. 큰형이랑 잘 노세요." 하니까 순간적으로 서운한 표정을 떠올리며 "어디 가려고?" 하셨지만 "집에 가서 일 좀 하려고요." 대답하는 동안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가 "그래, 잘 가거라." 하신다. "뽀뽀를 뺨에 해드릴까요, 이마에 해드릴까요?" 하니까 조금 멋적은 표정으로 "아무 데나 하렴." 하신다. 뽀뽀는 원래 큰형 전매특헌데, 그 동안 내게 허용하신 데 죄책감을 느끼시는 걸까? "괜찮으시면 앙쪽에 다 할께요." 하고 입술을 댈 때는 또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가 계시다.

배웅하러 나온 형과 정원에 앉아서 잠깐 얘기를 나눴다. 어머니 상태가 기쁘다는 얘기, 시설이 상상 못한 정도로 좋다는 얘기에 이어 형이 한 가지를 묻는다. 이사장님 아까 말씀 중 다른 요양원에서 3, 40만원까지 깎아내리는 바람에 운영이 힘들다는 애기가 무슨 뜻이냐고. 내가 이해하는 대로 설명을 해줬다. 장기요양보험이 1인당 120만원씩 나오니까, 수익성 위주로 경영하는 업자들이 원가를 줄여서 달려든다고. 1인당 비용을 20만원 줄이면 요양원 수입을 10% 줄이면서 본인 부담을 40% 줄여줄 수 있으니까 보험 적용을 위한 최소조건에만 맞추려 하고, 여기처럼 고급 서비스를 제공하려 애쓰는 요양원이 불리한 입장이 된다고. 시혜적 복지에는 일반적으로 따르는 문제라고 바로 알아듣는다.

작은형이 6시에 강의 끝난 뒤 온다고 했으니 7시까지 기다리면 3형제가 모처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앉을 수도 있고, 여기 적을 내용도 늘어나겠지만, 작은형이 약속 지킬 것을 믿고 투자하기에는 네 시간이 너무 아깝다. 65세에 요양원 임시 입원한 큰형을 뒤로 하고 집을 향했다. (작은형은 아까 점심때 내게 전화해서 요양원 가는 길과 전화번호를 묻기에 친절히 대답해 줬다. 석 달 전에 가르쳐준 것은 벌써 소용이 없고, 어제 가겠다던 사람이 이제야 길을 묻다니, 정말 신선답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9. 11. 2  (0) 2009.12.27
09. 10. 15  (0) 2009.12.27
09. 9. 17  (0) 2009.12.27
09. 8, 27  (0) 2009.12.27
09. 8. 17  (0) 2009.12.27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