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7. 16:41


며느리 얼굴 보시는 게 근 두 달만이었다. 아내를 먼저 들어가게 하고 잠시 후 뒤따라 들어갔더니, 역시 잘 알아보지 못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내 얼굴을 보고 "어, 너 왔니?" 하고는 눈길을 며느리에게 돌리고 "저게 내 셋째 아들인데, 따라들어오는 걸 보니까 너는 내 며느린가보구나." 하신다. 추리력은 괜찮으시다. 기억력이 문제지. 그리고 기억 잘 안 되시는 것 가지고 별로 답답해 하시는 기색도 없다.

아무래도 기억의 출력 문제보다 입력 문제에 비중이 있는 것 같다. 몇 주 전 전문학교 시절부터의 친구인 이윤재 선생님과 이혜숙 선생님이 오셨을 때는 근 70년 전 일까지 떠올리며 환담을 나누셨는데. 오히려 십여 년 이내에 있었던 일은 잘 기억 못하시는 것이 많다. 뇌 기능이 퇴화하신 뒤 겪으신 일은 기억이 잘 안 되시는 것 같다. 그런데 이곳 오신 후 반년간의 일은 기억이 꽤 되시는 걸 보면 뇌 기능이 많이 회복되신 것 같다.

이 며느리는 지난 몇 해 동안 나 다음으로 많이 보신 사람인데도 쉽게 파악이 안 되신다. 병원 계실 때 거의 매일 가 뵙는데도 간병인이 "이 분 누구세요?" 하면 천연하게 "이 사람? 내 제자야." 하시곤 했다. 하기야 쓰러지시기 전 대자암으로 찾아뵐 때는 아내가 인사드리고 잠깐 물러나 있는 사이에 나를 보고 "저 아주머니 너 아는 사람이냐? 인상이 참 좋구나." 하신 일까지 있으니까.

아내랑 먼저 시간을 가지게 해 드리려고 사무실 다녀올 생각으로 "어머니, 저는 볼일 좀 보고 올께요." 하니까 "볼일? 오줌이냐, 똥이냐?" 하신다. 이럴 때는 짐짓 장난치시는 건지 어떤 건지 잘 분간이 안 된다. 장난치시는 것 같은데, 시치미가 여간 아니시다.

사무실에 가 입원비를 내고 돌아올 때 마침 보험공단 직원이 도착했다. 장기요양보험 갱신을 위한 조사를 나온 것이다. 조사하는 동안 입회해 있는데, 못 보던 사람 보고 안 하던 일 하니까 재미있어 하신다.

조사원의 질문에 대답하실 때마다 "네, 어머니, 훌륭하십니다." 추임새를 넣어 흥을 돋워드리는데, 하다 보니 신이 너무 나셨다. 뭐든지 잘한다고 주장하시는 것이었다. 밥도 손수 잡숫고, 화장실도 혼자 가시고... 조사원이 정말 곧이들으면 보험 수혜자격이 잘릴 지경으로 다 잘한다고 우기시는데, 내가 계속 "네, 어머니, 잘하십니다." 하고 있으니 조사원이 나를 쳐다보고 씩 웃는다.

조사원이 가고 가족끼리 앉자 내 칭찬을 한참 하신다. 그런데 칭찬의 메시지가 단순한 형태가 아니다. 똑똑한데 똑똑한 체하지 않고, 잘났는데 잘난 체 하지 않으니까 그것이 착한 거다, 겸손한 거다, 이런 복합적인 틀이다. 수준 높은 사고력을 회복하신 것이다. "어머니도 잘난 체 않고 겸손하셨잖아요?" 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오무려 익살스런 표정으로 "나야 잘난 체하기 바빴지." 하신다.

내가 당신에게 잘해 드린다는 칭찬까지 나왔을 때 "어머니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잘해 드렸으니까 저도 닮아서 그런 거겠죠." 능청을 떨어봤다. 옛날 일에 대한 기억이 어떠신지 살피고 싶어서였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는 그분들께 잘해 드린 게 하나도 없다." 하다가 잠깐 생각에 잠기신다. 그리고 갑자기 결연한 표정을 짓고 다시 말씀하신다. "그래도 그분들께 불명예는 끼쳐드리지 않았다. 천내리 살 때부터."

천내리 쪽으로 내가 이야기를 끌어드리니까 그 시절의 기억이 여러 가지 나오신다. 명확하지 않은 곳도 더러 느껴지지만 그래도 꽤 분명하게 기억되시는 것 같다. 천내리 가기 전의 기억은 거의 없고 천내리에서 지내던 때부터 기억이 연결된다는 말씀도 하셨다.

천내리. 함경남도(지금은 강원도) 문천군에 속해 있다가 해방 후 천내군으로 분리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3.1운동 이후 쫓기는 몸이 된 외할아버지가 충청도 고향에 외할머니 뱃속의 어머니를 두고 금강산으로 달아났다가 곡절 끝에 정착해 해방 때까지 사신 곳이다. 큰 시멘트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공업도시 하나가 산골에 생겨났는데, 외할아버지는 산판과 상점을 경영해 지역의 유수한 사업가로 행세하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일고여덟 살 때 외할머니를 따라 그리 갔고, 거기서 소학교를 다닌 다음 통신강의로 중등과정을 하다가 스무 살쯤 되어 전문학교 진학을 위해 그곳을 떠나셨던 모양이다. 소학교 다닌 것이 어린 소녀에게 강렬한 경험이었던듯, 전에도 그 시절 얘기를 떠오르는 대로 해주시곤 했는데, 오늘 또 그 얘기가 나오신다.

일본인 학교로 한국인과 중국인 학생들도 같이 다녔는데, 거기서 1등만 하신 일이 아직도 마음에 통쾌하신 모양이다. 그냥 1등이셨겠는가? 2등이 어디 있나 보이지도 않는 1등이셨겠지. 게다가 운동이고 뭐고 공부 외에는 모두 젬병이었다는 게 나랑 비슷하셨던 모양이다. 유아독존의 성향을 키우기에 딱 좋은 조건이다. 소시쩍의 나처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얘기를 끌어내 보려고 약간 시도해 봤지만 성과가 신통치 않았다. 그분들 말년에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시는 것 같다. "그분들께 불명예는 끼쳐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에도 방어적인 뜻이 있는 것 같다.

이야기가 성글어졌기에 휠체어에 태워 모시고 나왔다. 그런데 패션이 달라졌다. 모자는 에스터가 떠준 것 맞는데, 캐시미어 스카프와 양털 슬리퍼 대신 굵은 털실로 짠 숄과 덧신이다. 날렵하고 투박한 차이가 있지만 이 차림도 편안해 하신다. 이종숙 선생님이 손수 떠 보내준 것이 일전에 도착했다는 얘기를 그제서야 들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물건 자체를 누리실 뿐 아니라, 어머니가 많은 분들에게 사랑받는 분이라는 사실을 함께 지내는 분들에게 인식시켜 주는 만큼 그분들도 어머니를 더 존중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복도를 한 바퀴 바람쏘여 드리려는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복도 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할머니들, 간병인들이 말을 걸어오는 데서 어머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응대도 참 잘 하신다. 간병인들 대하는 거야 병원 시절부터 익숙하신 일이거니와, 노인분들 대하시는 데서 상당한 수준의 분별력을 느낄 수 있다. 노인분들 중에는 신체적 조건이나 굳어진 습관 때문에 표현이 원활하지 못한 분들도 있는데, 그런 문제를 다 이해하고 감안하면서 응대하시는 것 같다.

유리창 넓은 곳에서 바깥 내다보는 것은 늘 좋아하신다. 그러나 오늘은 부슬비가 내리고 어두운 날씨라서 그런지 그리 오래 창가에 머물지 않고 거실로 돌아왔다.

텔레비전에서 김삿갓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전공에 가까운 얘기라서 쉽게 파악이 되시는 것 같다. 처음에 장면이 바뀔 때 "저게 어디냐?" 두어 번 물으시고는 꾸준히 시청하신다. 한참 보다가 나를 돌아보며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돼." 하시기에 "알아보실 만한 내용도 많이 있죠?"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그야..." 하신다.

전번 왔을 때 도자기 이야기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던 생각이 난다. 상당 시간 관심을 이어갈 만큼은 이해가 되시는데, 확실한 파악은 안 되시는 모양이다. 아마 일상생활을 파악하시는 데 비겨서 확실하지 못하다고 느끼시는 것이 아닐까. 정말 생활에 대한 파악은 확실해 보인다. 3년 전, 쓰러지시기 전과 비교해 못해 보이지 않는다.

모시고 있은 지 두 시간도 안 되어 "눕고 싶다." 하셔서 방에 모셔다 드렸다. 크게 힘들어 보이시지는 않고 조금 졸려 보이시는 정도였다. 그런데 눕혀드린 뒤에는 도로 초롱초롱해져서 간병인에게 "당신은 누구신데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슈?"로 시작해서 한참 잡담을 즐기시다가 문득 생각난 듯, "너희는 가 보렴. 와줘서 고맙다." 하시는 것이었다.

나오는 길에 원장님과 얘기를 나눴다. 메모해 놓은 것을 보며 지난 토요일에 작은형이 다녀간 일, 엊그제 고종누님 내외분이 다녀간 일을 다 말씀해 주신다. 다른 직원들도 대개 어머니를 좋아하고 잘 대해 드리는 것 같지만, 나보다 한 살 위인 원장님은 어머니의 특성을 정말 잘 이해해 드리는 것 같다. 십여 일만에 찾아온 아들, 며느리에게 두 시간만에 "잘놀았다, 가봐라." 하시는 것도 다 믿을 데가 있으니까 그러시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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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