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7. 16:40

오랫만에 혼자 뵈러 갔다. 전날 공주에 가 문영이 이사 준비를 확인하고 아침에 입주 수속을 해준 다음 이사가 대충 끝나는 것까지 보고 출발하니 11시 반. 제일 큰 생활여건 안정이 되었으니 어머니 뵈러 가는 발길이 가벼웠다.


두 시에 도착해 보니 침대에 누워계셨다. 반기기는 반기시는데, 조용한 반응에서 마음 편안하신 것을 느낄 수 있어 좋다. 학교 다녀온 아들 맞으시는 것 같다. 좋긴 좋은 일인데, 요란스럽게 기뻐할 별난 일이 아니라 그냥 보통스러운 삶 속에 보통스럽게 나타나는 조그만 기쁨의 하나.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는 조그만 기쁨이지만, 그것이 저절로 흥을 일으켜드린다. 방에 들어설 때 뵌 무덤덤한 표정에 기쁨의 빛이 짙어지더니 학도가 가락이 나오신다. "우리 셋째 아들은 복덩이래요 / 우리 셋째 아들은 복덩이래요 / 마주치는 사람은 다 좋아해요 / 그럼 됐지, 그럼 됐지, 뭘 더 바래요."


음, 오늘은 내 역할이 복덩이구나, 복덩이 노릇 잘 해야지, 속으로 생각하며 여사님에게 물어봤다. 오전에 많이 앉아 계셨냐고. 좀 앉아 계셨지만 너무 피곤하실 정도는 아니라고. 그러지 않아도 좀 있다가 앉혀 드리려던 참이라며 휠체어에 앉혀드린다.


에스터 엄마의 세 번째 선물보따리가 온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양털 슬리퍼와 양털 쿠션. 발을 부드럽게 감싸는 슬리퍼도 편안해 보이시지만, 쿠션은 어머니 행복을 더해 드리는 것이 한눈에 보인다. 가슴에 내내 끌어안고 계시는데, 몸 앞부분을 따뜻하게 지켜드릴 뿐 아니라 안고 계시는 자세 자체가 어떤 만족감을 드리는 것 같다. 거기에 스카프와 모자까지, 완전히 에스터 패션이다.


병원 계실 때 대덕화 보살님이 이따금 별미를 갖춰드리는 것을 보며 감탄하곤 했는데, 에스터 모녀는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좋아하는 분의 행복을 이처럼 알뜰하게 보살펴드리는 것을 보며 정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엔 남도 해드리는 걸 자식이 못해 드린다는 데 자격지심도 들었지만, 이제 두 손 들었다. 성질도 습관도 살갑지 못한 놈이 억지로 흉내낼 일이 아니다. 황새는 황새고 뱁새는 뱁새다. 나는 어머니에게 필수품 노릇만 하면 된다. 기호품과 사치품이 들어오는 길을 가로막지만 않으면 된다.


그러고 보면 상대적으로 볼 때 작은형은 기호품 노릇, 큰형은 사치품 노릇을 하는 셈이다. 작은형이 거의 매주 들른다니 다행이다. 직접 얘기를 듣지 못해도, 그만하면 지낼 만하니까 어머니께도 들를 수 있는 거겠지. 어머니도 한 달 전처럼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신다. 그 때 형 걱정해 주시는 것 보고는 정말 놀랐었다. 상황 인식을 그만큼 포괄적으로 하실 수 있을 줄 모르고 있었었다.


사고력이 늘어나면 그만큼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불만도 늘어나실 수 있지 않을까, 한쪽으로 걱정도 했는데, 그렇지는 않으시다. 문영이 이사한 얘기를 해 드렸는데, 큰형 왔을 때 문영이 본 얘기 듣고 "잘 먹고 살더냐?" 한 마디만 물으시던 것보다는 더 구체적으로 묻기도 하셨지만, 그리 깊이 캐묻지는 않고 "그래, 네가 살펴주니 마음 놓는다. 고맙다." 하시고는 더 말씀 않으신다.


홀 끄트머리, 식탁 바깥에서 정원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가 일본어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텔레비전에서 분청사기에 관한 기획물이 나오고 있다. 그런 프로그램은 보실 만할 것 같아서 식탁 안쪽,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아 드렸더니 한참 보시다가는 나를 돌아보고 다른 말씀을 몇 마디 하시다가 또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오락가락하신다.


내용 일부를 짚어 여쭤보니 민망한 표정으로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 하신다. "아무것도 모르겠는 건 아니죠? 알 듯 말 듯 하시죠?" 하니까 "그야 물론이지." 텔레비전을 향한 채로 말씀하시고는 뭐가 생각났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며 회심의 미소(내게는 그렇게 보였다.)를 띠고 말씀하신다. "모르는 거 모른다고 하니까 참 편하고 좋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짚어드려 보았다. "교수 하시는 동안 모르는 거 아는 척하느라고 힘드셨죠?" 바로 짚었다. 고개를 마구 끄덕거리며 "그래, 그래!" 하신다.


원장님이 다과를 가지고 와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한 내용은 없어도 어머니 지내시는 상황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가 있어서 고마웠다. 얘기 오가는 중에 수시로 어머니의 이해 범위를 벗어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하는데, 어머니는 최대한 따라오려고 애는 쓰시지만, 100%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크게 불만스러워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다. 텔레비전 보시는 태도도 그와 비슷하다. 무슨 소린가, 조금 어리둥절해서 쳐다보고 계시다가 이해되는 맥락이 늘어남에 따라 더 깊은 주의력을 가지고 보시게 되는 것 같다.


원장님이 일어난 뒤 남아 있던 과자 때문에 "돼지" 우스개가 나와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그보다 앞서 무슨 얘기 끝에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너는 어렸을 때 그렇게 욕심이 많더니, 그 욕심이 다 어디 갔냐?" 무슨 맥락에서 나온 말씀이었는지는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 내가 먹성이 좋았던 생각이 나셨던 것 같다.


나를 보고 남은 과자를 다 먹으라고 성화를 부리시는 것이었다. 음식 남기지 못하는 습성은 정말 어쩌실 수 없다. 아까 하신 말씀이 생각나 농담을 드렸다. "어머니, 저 옛날엔 욕심이 많았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아들을 자꾸 돼지 취급하지 마세요." 했더니 "돼지"란 말이 마음에 드셨는지 붙잡고 늘어지신다. "한 번 돼지면 영원한 돼지야! 돼지가 돼지 아닌 척하면 못쓴다." 해병대도 안 가보신 분이 왜 이러시나! 식탁 저 쪽에 모여 빨래 정리하던 여사님들 중에 알아듣고 킥킥거리기 시작하는 분들이 있다. 내가 짐짓 엄살을 했다. "어머니, 목소리 좀 낮추세요. 아들이 돼지라고 온 동네 소문내셔야 되겠어요?" 예상대로 흥이 나셨다. 목소리가 반 옥타브 올라가신다. "돼지를 돼지로 아는 게 뭐가 잘못됐냐? 네가 돼지라는 걸 온 세상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 난 돼지 같은 아들이 좋은 걸~" 여기서 즉흥 '돼지 타령'으로 이어진다. 그 내용은 차마 여기 적지 못하겠지만, 여사님들 빨래 정리 작업이 한 동안 중단되었다는 사실만 밝힌다.


병원에 계실 때는 담당 여사님들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하려고 노력했었는데, 여기 와서는 성씨도 파악하지 못하고 지낸다. 자주 가지 못할 뿐 아니라 한 달마다 바뀌게 되어 있으니까. 그래도 이제 대개 다 낯이 익고, 더러 새로 오신 분이라도 어느 분 보호자인지 알면 처음 말을 나누는 데도 별 스스럼이 없다. 어머니가 여사님들에게 좋은 인상으로 잘 알려져 있고 보호자도 까다롭지 않은 사람들로 인식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지난 주 왔을 때 그 방을 맡고 있는 것을 처음 본 안경 낀 여사님도 어머니 살펴드리는 데 열성일 뿐 아니라 어머니를 좋아해서 정말 기쁜 마음으로 살펴드리는 것 같다. 그 좋아하는 대상이 우리 어머니라는 건 다행스런 일이지만, 다른 분들도 다 그만큼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조금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런 문제가 실제로 있다는 것을 떠날 때 살짝 확인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 작별 인사 드리고 원장님께 인사하려고 보니 한 구석에서 우리 안경 여사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다가가서 간단히 인사하려는데, 원장님이 웃으며 말해 준다. 지금 여사님이랑 얘기하고 있던 게 그 방의 한 할머니 얘기라고. 여사님들이 어머님께만 잘해 드린다고 얼마 전부터 샘을 내기 시작하셨다고.


문에 가까이 어머니와 마주보는 침대의 할머니는 참 순둥이시다. 어머니랑 불경을 읽으면 당신도 듣게 더 크게 읽어달라고 하기도 하고 언제나 호감을 표시하려 열심이시다. 창문 가까운 두 분도 나는 물론 갈 때마다 깍듯이 인사를 드리지만 반응이 좀 시원찮은데, 그런 불만도 충분히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원장님이 현명한 분이고 여사님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일하는 곳이니 잘 처리하실 것을 믿는다.


한 시간 반쯤 앉아 계시다가 침대에 누우셨다. 누워서도 양털쿠션은 가슴에 꼭 안고 계신다. 불경은 반야심경만 외웠다. 다른 할머니 샘내신다는 얘기 듣기 전이었지만, 너무 소리를 많이 내는 게 좋지 않을 것 같았다. 불경은 앉아 계실 때 독경집을 펼쳐놓고 읽으시는 편이 좋은데, 오늘은 돼지 타령에 시간을 너무 썼다.


오늘은 천천히 또박또박 외우신다. 경문 전체를 머리속에 떠올려 놓고 거기서 술술 풀어내는 듯한 독경 방식이다. 다 외우신 뒤에 "어머니, 쉬세요." 하니까 너무 당연히 할 일이라는 듯이 눈을 감으신다. "머리 긁어 드릴까요?" 했더니 "하고 싶은 대로 하렴."


금세 잠이 드신다. 계속 살살 긁어드리고 있으려니 거의 코까지 골기 시작하신다. 시선을 문밖에 두고 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느새 깨어 말을 거신다. 무슨 말씀인지 지금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옆에 늘 있는 녀석에게 툭 던지듯, 아무 긴장감을 느끼지 않게 하던 분위기만 기억난다.


떠날 때 대범하신 태도, 마치 "학교 갔다 오겠습니다." 하는 인사 받으시는 것 같은 태도가 무엇보다 어머니 마음 편안하심을 보여준다. "저 갈께요." 하니까 입술로 뽀뽀 시늉을 하신다. "어디다 해드릴까요?" 상투적 질문에 "너 이마 좋아하지 않냐?" 이마에 뽀뽀해 드리니까 나직하게 "고맙다, 잘 가라." 몇 마디 더 하다가 "뺨에도 하고 싶어요." 하니까 "좋지." 왼쪽 뺨을 살짝 올려 대주시고 다시 나직하게 "고맙다, 잘 가라."


원장님께 고마운 일 하나가 또 생각난다. 작은형이 왔다가 일어설 때 "셋째 아드님은 다녀갈 때 꼭 뽀뽀를 해드리던데요?" 하고 일깨워줘서 작은형도 뽀뽀질을 시작했다고. 원래 그건 큰형이나 하던 짓인데, 이제 3형제가 다 달려들게 되었으니 어머니가 뽀뽀 알레르기를 일으키게 되시지나 않을지.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09. 12. 22  (0) 2009.12.27
09. 12. 10  (0) 2009.12.27
09. 11. 17  (0) 2009.12.27
09. 11. 2  (0) 2009.12.27
09. 10. 15  (0) 2009.12.27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