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9. 12:36
예약했던 대로 윤정옥 선생님을 모시고 갔다. 어머니보다 5세 아래로 30년 가까이 동료로 지내는 가운데, 이효재 선생님과 함께 세 분이 '반 독재' 자세를 이대 교수들 중 두드러지게 분명히 해서 '3총사'로 통했다. 어머니 퇴직 후 이 선생님과 함께 정대협 공동대표를 맡았을 때 주변의 많은 분들이 놀랐었다. 어머니와 이 선생님이 의사표시를 적극적으로 해 오신 데 비해 윤 선생님은 얌전하신 인상대로 표현을 완곡하게 해 오신 편이기 때문에 그저 "친구들 잘못 만나 섭쓸린" 정도로 많이들 여겨 왔기 때문에 '투쟁'에 몸소 나서신 것이 뜻밖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외유내강한 그분 성품을 봐온 나로서는 뜻밖일 것이 없었다.
열 시까지 모시러 가기로 예정해 뒀지만, 전날 밤 일기예보를 보고 전화 드려 한 시 반으로 늦췄다. 워낙 눈이 많이 와서, 오전 중에는 길 사정이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1시 40분에 댁 앞에서 출발, 3시 반에 요양원에 도착했다. 길 사정도 괜찮아서 오랜만에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 나누면서 운전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어제 보낸 메일을 보고 원장님이 아무개 선생님 오신다고 말씀드려 두었지만 소용이 없다. 얼굴을 보자 "아니, 당신이 여기 웬 일이야!" 나쁘지 않은 일이다. 누구 오신다는 말씀 들을 때는 그 말씀 듣는 것으로 기쁘고, 얼굴 보일 때는 '뜻밖의 반가움'에 조금도 빠지는 것이 없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심심할 수 있는 단조로운 생활에 불만 느끼지 않고 즐겁게 지내시는 한 가지 조건이 기억력 퇴화일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새로우니까.
어머니의 노래가락 화법이 윤 선생님께는 좀 당혹스러운 것 같다. 지난 주 통화하신 뒤에도 그것이 혹 무슨 증세는 아니신지 내게 물으셨는데, 직접 대하면서 유심히 관찰하시는 것 같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 의미에 대한 내 생각을 물으셨다. 몇 시간 관찰하면서 많이 이해가 가시는 것 같지만, 김호순 선생님이 즉각 신나서 호응하시던 것과는 많이 대비가 된다. 두 분 다 희곡 전공이신데 왜 그런 차이가 있을까? (희곡 전공이 아니셨던가? 나도 좀 가물가물.)
한 시간 가량 홀에 앉아 있었는데, 다른 분들 오셨을 때보다 대화에 많이 집중하신 편이다. 윤 선생님 차분한 성격 덕분도 있을 테고, 아마 손님이 한 분이라서 집중이 더 잘 되신 면도 있을 것이다. 집중하시는 만큼 지난 일 기억도 쉽게 많이 되시는 것 같았다. 도중에 세돈 형님께 전화가 걸려 바꿔드렸는데, 형님의 청력이 많이 떨어지셨는지 통화가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쉽고 빠르게 상대방이 어느 분인지 파악하셨다.
치료사 김 선생이 지나가다가 잠깐 멈춰 어머니 허리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지난 주까지 예민하시던 것이 많이 풀려 지금은 큰 고통을 느끼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한다. 원장님과 간병인 여사님도 쫓아와 관찰한 소견을 함께 말해줬다. 생활에 지장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쪽으로 거의 안심이 된다고.
4시 반쯤 되어 홀에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하기에 방 안에 모시고 들어갔다가 5시 정각 식탁 앞에 모셔드리고 떠났다. 방 안에서는 내가 응대해 드리고 윤 선생님은 구경하셨다. 반야심경을 낭랑히 외우시는 것을 보고 윤 선생님은 너무 놀라신다. 기억력 퇴화를 심하게 겪은 분이 <주 기도문>의 곱절이 넘는 길이에 암호문 같은 글을 술술 외우시는 것이 놀라울 수밖에! 금강경을 나와 번갈아 가며 네 꼭지 읽었는데, 이것은 완전히는 암송이 되지 않으신다. 글자를 보며 읽다가 암송하다가 오락가락하신다.
식사시간이 되어 우리가 일어설 때도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받아들이신다. 뽀뽀해 드릴 때는 차분한 말씨로 "고맙다," 미니멀리즘 취향을 보이시고, 식탁 앞에 모셔 드린 다음 계단 앞에까지 와서 돌아다 보니 옆의 할머니와 대화에 열중하고 계시다. "저 녀석 오늘은..." 하면서 아들 온 게 별 일 아니라는 말씀이 귓전에 들리는 것 같다.
계단 앞에서 이사장님과 마주쳤다. 두 달 가까이 마주치는 일이 없어 혹 무슨 일이라도, 걱정이 들기 시작하던 참인데 여전하신 모습이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아까 홀에서 아드님과 잠깐 마주친 일이 생각난다. 앉아 있는 앞을 지나가다가 잠깐 멈추고 약간 정중한 기분이 들 만큼 고개를 숙여 인사했더니 잠시 "이게 뭐야?" 하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떠올리다가 얼굴과 눈에 웃음기가 떠오르더니 고개를 오른 쪽 옆으로 푹 숙이는 것이었다. 답례를 한다는 뜻이 분명했다. 그리고는 왼손을 내 쪽으로 쭉 펼쳐 내밀었다. 그 손을 살짝 잡았더니 자기도 아주 부드럽게 잡는 것이었다. 표현에 심한 제약을 가진 사람이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심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제스처였다. 여러 번 마주치면서 내게는 마음을 풀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아 온 모양이다. 이 분뿐 아니라 할머니들도 내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태도가 꾸준히 늘어나 왔다. 어머니도 쓰러지신 이후 제2의 인생을 펼치기 시작하셨는데, 나도 덩달아 예전과 다른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윤 선생님 일 말씀을 많이 들었다. 춘천으로 봄 전에 이사하실 참이라, 그 후에는 어머니 한 번 찾아오기도 힘들 것 같아서 오늘 꼭 오고 싶으셨다고. 춘천 가시는 것이 동생분 요양을 돕기 위해서라니, 봉사의 마음이 그 연세에도 전혀 사그라들지 않으시는 것이 정말 놀랍고 존경스럽다. 40년 넘게 살아 오신 봉원동 집 떠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예전에도 나를 좋은 쪽으로 많이 봐주신 선생님이지만, 작년에 <뉴라이트 비판> 보고 너무나 속시원해 하신 위에 오늘 내가 요양원에서 처신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기분이 좋으신 것 같다. 어머니 친구분들 한 번씩 모셔다 드리면서 그분들 모습을 뵙고 가르침을 얻는 것도 꽤 짭짤한 부수입이다.
열 시까지 모시러 가기로 예정해 뒀지만, 전날 밤 일기예보를 보고 전화 드려 한 시 반으로 늦췄다. 워낙 눈이 많이 와서, 오전 중에는 길 사정이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1시 40분에 댁 앞에서 출발, 3시 반에 요양원에 도착했다. 길 사정도 괜찮아서 오랜만에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 나누면서 운전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어제 보낸 메일을 보고 원장님이 아무개 선생님 오신다고 말씀드려 두었지만 소용이 없다. 얼굴을 보자 "아니, 당신이 여기 웬 일이야!" 나쁘지 않은 일이다. 누구 오신다는 말씀 들을 때는 그 말씀 듣는 것으로 기쁘고, 얼굴 보일 때는 '뜻밖의 반가움'에 조금도 빠지는 것이 없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심심할 수 있는 단조로운 생활에 불만 느끼지 않고 즐겁게 지내시는 한 가지 조건이 기억력 퇴화일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새로우니까.
어머니의 노래가락 화법이 윤 선생님께는 좀 당혹스러운 것 같다. 지난 주 통화하신 뒤에도 그것이 혹 무슨 증세는 아니신지 내게 물으셨는데, 직접 대하면서 유심히 관찰하시는 것 같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 의미에 대한 내 생각을 물으셨다. 몇 시간 관찰하면서 많이 이해가 가시는 것 같지만, 김호순 선생님이 즉각 신나서 호응하시던 것과는 많이 대비가 된다. 두 분 다 희곡 전공이신데 왜 그런 차이가 있을까? (희곡 전공이 아니셨던가? 나도 좀 가물가물.)
한 시간 가량 홀에 앉아 있었는데, 다른 분들 오셨을 때보다 대화에 많이 집중하신 편이다. 윤 선생님 차분한 성격 덕분도 있을 테고, 아마 손님이 한 분이라서 집중이 더 잘 되신 면도 있을 것이다. 집중하시는 만큼 지난 일 기억도 쉽게 많이 되시는 것 같았다. 도중에 세돈 형님께 전화가 걸려 바꿔드렸는데, 형님의 청력이 많이 떨어지셨는지 통화가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쉽고 빠르게 상대방이 어느 분인지 파악하셨다.
치료사 김 선생이 지나가다가 잠깐 멈춰 어머니 허리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지난 주까지 예민하시던 것이 많이 풀려 지금은 큰 고통을 느끼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한다. 원장님과 간병인 여사님도 쫓아와 관찰한 소견을 함께 말해줬다. 생활에 지장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쪽으로 거의 안심이 된다고.
4시 반쯤 되어 홀에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하기에 방 안에 모시고 들어갔다가 5시 정각 식탁 앞에 모셔드리고 떠났다. 방 안에서는 내가 응대해 드리고 윤 선생님은 구경하셨다. 반야심경을 낭랑히 외우시는 것을 보고 윤 선생님은 너무 놀라신다. 기억력 퇴화를 심하게 겪은 분이 <주 기도문>의 곱절이 넘는 길이에 암호문 같은 글을 술술 외우시는 것이 놀라울 수밖에! 금강경을 나와 번갈아 가며 네 꼭지 읽었는데, 이것은 완전히는 암송이 되지 않으신다. 글자를 보며 읽다가 암송하다가 오락가락하신다.
식사시간이 되어 우리가 일어설 때도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받아들이신다. 뽀뽀해 드릴 때는 차분한 말씨로 "고맙다," 미니멀리즘 취향을 보이시고, 식탁 앞에 모셔 드린 다음 계단 앞에까지 와서 돌아다 보니 옆의 할머니와 대화에 열중하고 계시다. "저 녀석 오늘은..." 하면서 아들 온 게 별 일 아니라는 말씀이 귓전에 들리는 것 같다.
계단 앞에서 이사장님과 마주쳤다. 두 달 가까이 마주치는 일이 없어 혹 무슨 일이라도, 걱정이 들기 시작하던 참인데 여전하신 모습이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아까 홀에서 아드님과 잠깐 마주친 일이 생각난다. 앉아 있는 앞을 지나가다가 잠깐 멈추고 약간 정중한 기분이 들 만큼 고개를 숙여 인사했더니 잠시 "이게 뭐야?" 하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떠올리다가 얼굴과 눈에 웃음기가 떠오르더니 고개를 오른 쪽 옆으로 푹 숙이는 것이었다. 답례를 한다는 뜻이 분명했다. 그리고는 왼손을 내 쪽으로 쭉 펼쳐 내밀었다. 그 손을 살짝 잡았더니 자기도 아주 부드럽게 잡는 것이었다. 표현에 심한 제약을 가진 사람이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심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제스처였다. 여러 번 마주치면서 내게는 마음을 풀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아 온 모양이다. 이 분뿐 아니라 할머니들도 내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태도가 꾸준히 늘어나 왔다. 어머니도 쓰러지신 이후 제2의 인생을 펼치기 시작하셨는데, 나도 덩달아 예전과 다른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윤 선생님 일 말씀을 많이 들었다. 춘천으로 봄 전에 이사하실 참이라, 그 후에는 어머니 한 번 찾아오기도 힘들 것 같아서 오늘 꼭 오고 싶으셨다고. 춘천 가시는 것이 동생분 요양을 돕기 위해서라니, 봉사의 마음이 그 연세에도 전혀 사그라들지 않으시는 것이 정말 놀랍고 존경스럽다. 40년 넘게 살아 오신 봉원동 집 떠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예전에도 나를 좋은 쪽으로 많이 봐주신 선생님이지만, 작년에 <뉴라이트 비판> 보고 너무나 속시원해 하신 위에 오늘 내가 요양원에서 처신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기분이 좋으신 것 같다. 어머니 친구분들 한 번씩 모셔다 드리면서 그분들 모습을 뵙고 가르침을 얻는 것도 꽤 짭짤한 부수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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