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새해를 맞으며 역사학도의 마음은 무겁습니다. 백년 전 우리 조상들은 나라 잃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35년이 지난 후 "해방"을 맞았습니다만, 식민지 기간의 갑절 가까운 65년이 더 지나 망국 백주년을 맞는 지금까지도 이 사회의 이런저런 모습을 살펴보며 "이 나라가 해방된 나라 맞나?"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년 이 의문이 더욱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1987년 군사독재가 끝나고 뒤이어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나라 안팎의 군사적 압력은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한국이 한국인의 뜻에 따라 진로를 찾아갈 여건이 나아졌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주권국가다운 모습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민족국가 완성의 길을 외면하는 행태가 정권 차원에서까지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피상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남한 사회 내부의 통합성조차 시간이 갈수록 더 약해지는 상황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에게 주권의식이란 것이 없는 듯하기까지 합니다. 백년 전의 조상들은 총칼의 위협 앞에 피눈물을 삼키며 주권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인은 총칼의 위협 없이도 통상 주권, 영토 주권을 미국과 일본에게 갖다바치고 있습니다. 정권을 쥔 소수 집단의 행태만이 아닙니다. 경제적 이익을 위해서는 뭐든 포기할 수 있는 많은 국민들이 "7-4-7" 공약에 현혹되어 도덕성이 의심스러운 그 집단에게 정권을 맡긴 것입니다. 더 그럴싸한 미끼가 있다면, 또는 조그마한 위협이라도 있다면, 나라인들 못 팔아먹겠습니까?


연전 <뉴라이트 비판> 작업을 하면서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을 문명의 길로 이끌어주었다"고 평가하는 한국인들이 있다는 것을 신기해 했습니다. 그런 의식이라면 서아프리카에서 붙잡혀 죠지아의 면화밭에서 일하게 된 노예가 문명세계에 살게 해준 것이 고맙다고 백인들에게 "주인님, 주인님," 하고 굽실거릴 수 있을 겁니다. 그 노예는 고향에 있었을 경우보다 굶어죽을 걱정 덜 하며 더 오래 살았기 쉽지요. 자신을 하나의 인간으로 여기지만 않는다면, 이웃과 가족에 대한 아무 애착이 없다면, 충분히 고마워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식민지배를 고마워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사회의 상황이 잘된 것이라고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가장 잘됐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경제적 성공이겠지요. 그런데 이 사회에서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편안히 느끼는 사람의 수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대다수 국민이 다른 어떤 이유보다 경제적 이유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경제적 고통이 이 사회의 문제의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를 함께 아끼는 자세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바닥이 있습니다. 한국이 많은 다른 나라들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는데도 많은 한국인들이 경제적 고통을 받는 것은 사회의 통합성이 약한 문제에서 오는 것입니다.

함께 아낄 사회로 민족이 있고 국가가 있습니다. 내 민족, 내 국가만 아끼고 다른 민족, 다른 국가를 까뭉개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 개인을 희생시키자는 것도 아닙니다. 나 자신, 내 가족을 아끼는 마음과 국가, 민족을 아끼는 마음, 그리고 인류를 아끼는 마음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심하면 사회가 망해버립니다. 그런데 백년 전 나라가 망할 때의 상황을 돌아보면 지금보다는 한국 사회가 건강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 하는 말로 '정체성'이 뚜렷했습니다. 그런데도 외부의 충격이 너무 강해서 주권을 잃었습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그보다 훨씬 약한 자극 앞에서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회에서는 권리와 책임이 함께 갑니다. 혜택을 많이 누리는 사람들이 사회에 더 많은 공헌을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재산, 수입, 교육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사회의식이 일반인보다도 못하다는 인상을 주는 측면이 많습니다. '지도층'이 전면적 불신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사회의 건강에 큰 위험 요인입니다.

여러 각도에서 살필 수 있는 문제입니다. 역사학도로서 저는 식민지 경험을 문제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통치국은 자국 이익을 위해 식민지 사회를 불건강한 구조로 이끄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 건전한 '지도층'의 성장을 가로막고 '협력자' 집단에 그 역할을 맡기는 것입니다.

협력자로서 성공하는 조건은 기술적 능력이 있으면서 사회의식이 약한 것입니다. 개인의 영달을 바라는 '향상심'으로 효율적 식민통치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일제 하의 '실력자' 계층으로 자라났고, 그중 심한 경우는 향상심의 목표를 자신이 황국 신민이 되는 데 둔 친일파도 있었습니다. 이 집단이 해방 후 대한민국 근대화의 주역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논객들이 있는데, 일리 있는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대한민국의 소위 '지도층'은 일제시대의 친일파가 일본에 의지한 것처럼 미국에 의지하는 행태를 많이 보여 왔습니다. 자기가 속한 이 사회의 안위는 종주국에서 책임질 일로 생각하면서 종주국이 원하는 일을 찾아 열심히 함으로써 개인의 영달을 꾀하고, 스스로 종주국 백성이 되기 바라는 행태를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대한민국이 독립국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친일파가 대중을 조작한 미끼는 '근대화'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의식 없는 지도층이 대중을 조작한 미끼는 '경제성장'입니다. 두 구호는 서로 닮은꼴입니다. 실제로는 종주국의 이익에 영합하면서 이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일처럼 가장하고 일체의 사회의식을 억압한 것입니다.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그 허구성을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뉴라이트 논객들이 "문명의 길"이라 떠받든 것은 결국 "근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이지요. 한국에 근대적 공장도 세워지고 교통시설도 만들어지고 교육, 의료 등 근대적 사업이 시작된 것이 일본의 식민통치 덕분이라는 겁니다.

히말라야 오지나 남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것도 아닌 한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그런 변화를 겪지 않고 "은둔의 나라"로 남아 있었을 수 있을까요? 20세기 중엽까지 쇄국정책을 지키고 있을 수 있었을까요? 일본 통치 밑에서 겪은 근대화 정도는 어떤 상태에서라도 겪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20세기 초반 한국의 상황이었습니다.

요는 근대화라도 어떤 근대화였냐 하는 질(質)의 문제입니다. 산업화 중심의 유럽식 근대화는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갈라지는 구조 분화의 과정이었습니다. 통치국인 일본은 착취자 입장에서 근대화의 양지에 서고 식민지 한국은 피착취자 입장에서 음지에 서게 된 데 국권 상실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양지쪽 근대화의 무엇보다 부러운 점은 전통의 발전과 근대화 과제를 얼마만큼이라도 융화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멀리 볼 것 없이 당장 일본을 보세요. 일본에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 속에서도 전통의 힘이 한국보다 훨씬 더 큰 몫을 맡고 있습니다. 근대화를 겪으면서도 전통의 힘을 살릴 수 있는 만큼 살려두었기 때문에 탈근대 상황의 새로운 변화 앞에서도 그 힘에 의지할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전통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이 식민지 경험의 가장 큰 피해라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전통"이라 하면 흔히 근대성과 대비되는 과거의 물건으로 여기는 경향이 바로 그 결과입니다. 과거에서 현재를 이어주는 정체성의 연속은 미래를 헤쳐가는 데도 지표가 됩니다. 나라 잃은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보다, 침략자를 미워하는 것보다, 전통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되찾는 것이 진정한 "해방"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유럽식 근대화와 다른 "전통적 근대화"를 생각해 봅니다. 조선 후기의 학자와 정치가들은 폐쇄적 농업사회 체제의 한계를 느끼고 질서의 변화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농부와 직공, 상인들도 상황 변화에 적응하려 여러 모로 애쓰고 있었습니다. 산업화 중심의 유럽식 근대화를 부득이 채택하게 되었더라도, 전통적 근대화의 노력을 어느 만큼이라도 접목시킬 수 있었다면 지금처럼 참혹한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쓸 글이 어느 범위를 다루게 될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1910년의 망국의 의미를 "전통의 상실"이라는 관점에서 최대한 밝혀보려 애쓰겠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무거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미안합니다만, 저는 당분간 무거운 마음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Posted by 문천
2009. 12. 29. 12:36
예약했던 대로 윤정옥 선생님을 모시고 갔다. 어머니보다 5세 아래로  30년 가까이 동료로 지내는 가운데, 이효재 선생님과 함께 세 분이 '반 독재' 자세를 이대 교수들 중 두드러지게 분명히 해서 '3총사'로 통했다. 어머니 퇴직 후 이 선생님과 함께 정대협 공동대표를 맡았을 때 주변의 많은 분들이 놀랐었다. 어머니와 이 선생님이 의사표시를 적극적으로 해 오신 데 비해 윤 선생님은 얌전하신 인상대로 표현을 완곡하게 해 오신 편이기 때문에 그저 "친구들 잘못 만나 섭쓸린" 정도로 많이들 여겨 왔기 때문에 '투쟁'에 몸소 나서신 것이 뜻밖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외유내강한 그분 성품을 봐온 나로서는 뜻밖일 것이 없었다.

열 시까지 모시러 가기로 예정해 뒀지만, 전날 밤 일기예보를 보고 전화 드려 한 시 반으로 늦췄다. 워낙 눈이 많이 와서, 오전 중에는 길 사정이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았다. 1시 40분에 댁 앞에서 출발, 3시 반에 요양원에 도착했다. 길 사정도 괜찮아서 오랜만에 선생님과 이런저런 얘기 나누면서 운전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어제 보낸 메일을 보고 원장님이 아무개 선생님 오신다고 말씀드려 두었지만 소용이 없다. 얼굴을 보자 "아니, 당신이 여기 웬 일이야!" 나쁘지 않은 일이다. 누구 오신다는 말씀 들을 때는 그 말씀 듣는 것으로 기쁘고, 얼굴 보일 때는 '뜻밖의 반가움'에 조금도 빠지는 것이 없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심심할 수 있는 단조로운 생활에 불만 느끼지 않고 즐겁게 지내시는 한 가지 조건이 기억력 퇴화일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새로우니까.

어머니의 노래가락 화법이 윤 선생님께는 좀 당혹스러운 것 같다. 지난 주 통화하신 뒤에도 그것이 혹 무슨 증세는 아니신지 내게 물으셨는데, 직접 대하면서 유심히 관찰하시는 것 같고, 돌아오는 길에도 그 의미에 대한 내 생각을 물으셨다. 몇 시간 관찰하면서 많이 이해가 가시는 것 같지만, 김호순 선생님이 즉각 신나서 호응하시던 것과는 많이 대비가 된다. 두 분 다 희곡 전공이신데 왜 그런 차이가 있을까? (희곡 전공이 아니셨던가? 나도 좀 가물가물.)

한 시간 가량 홀에 앉아 있었는데, 다른 분들 오셨을 때보다 대화에 많이 집중하신 편이다. 윤 선생님 차분한 성격 덕분도 있을 테고, 아마 손님이 한 분이라서 집중이 더 잘 되신 면도 있을 것이다. 집중하시는 만큼 지난 일 기억도 쉽게 많이 되시는 것 같았다. 도중에 세돈 형님께 전화가 걸려 바꿔드렸는데, 형님의 청력이 많이 떨어지셨는지 통화가 원활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는 쉽고 빠르게 상대방이 어느 분인지 파악하셨다.

치료사 김 선생이 지나가다가 잠깐 멈춰 어머니 허리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했는데, 지난 주까지 예민하시던 것이 많이 풀려 지금은 큰 고통을 느끼지 않으시는 것 같다고 한다. 원장님과 간병인 여사님도 쫓아와 관찰한 소견을 함께 말해줬다. 생활에 지장될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쪽으로 거의 안심이 된다고.

4시 반쯤 되어 홀에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하기에 방 안에 모시고 들어갔다가 5시 정각 식탁 앞에 모셔드리고 떠났다. 방 안에서는 내가 응대해 드리고 윤 선생님은 구경하셨다. 반야심경을 낭랑히 외우시는 것을 보고 윤 선생님은 너무 놀라신다. 기억력 퇴화를 심하게 겪은 분이 <주 기도문>의 곱절이 넘는 길이에 암호문 같은 글을 술술 외우시는 것이 놀라울 수밖에! 금강경을 나와 번갈아 가며 네 꼭지 읽었는데, 이것은 완전히는 암송이 되지 않으신다. 글자를 보며 읽다가 암송하다가 오락가락하신다.

식사시간이 되어 우리가 일어설 때도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받아들이신다. 뽀뽀해 드릴 때는 차분한 말씨로 "고맙다," 미니멀리즘 취향을 보이시고, 식탁 앞에 모셔 드린 다음 계단 앞에까지 와서 돌아다 보니 옆의 할머니와 대화에 열중하고 계시다. "저 녀석 오늘은..." 하면서 아들 온 게 별 일 아니라는 말씀이 귓전에 들리는 것 같다.

계단 앞에서 이사장님과 마주쳤다. 두 달 가까이 마주치는 일이 없어 혹 무슨 일이라도, 걱정이 들기 시작하던 참인데 여전하신 모습이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아까 홀에서 아드님과 잠깐 마주친 일이 생각난다. 앉아 있는 앞을 지나가다가 잠깐 멈추고 약간 정중한 기분이 들 만큼 고개를 숙여 인사했더니 잠시 "이게 뭐야?" 하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떠올리다가 얼굴과 눈에 웃음기가 떠오르더니 고개를 오른 쪽 옆으로 푹 숙이는 것이었다. 답례를 한다는 뜻이 분명했다. 그리고는 왼손을 내 쪽으로 쭉 펼쳐 내밀었다. 그 손을 살짝 잡았더니 자기도 아주 부드럽게 잡는 것이었다. 표현에 심한 제약을 가진 사람이지만 부드럽고 따뜻한 심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제스처였다. 여러 번 마주치면서 내게는 마음을 풀 수 있다는 인상을 받아 온 모양이다. 이 분뿐 아니라 할머니들도 내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태도가 꾸준히 늘어나 왔다. 어머니도 쓰러지신 이후 제2의 인생을 펼치기 시작하셨는데, 나도 덩달아 예전과 다른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윤 선생님 일 말씀을 많이 들었다. 춘천으로 봄 전에 이사하실 참이라, 그 후에는 어머니 한 번 찾아오기도 힘들 것 같아서 오늘 꼭 오고 싶으셨다고. 춘천 가시는 것이 동생분 요양을 돕기 위해서라니, 봉사의 마음이 그 연세에도 전혀 사그라들지 않으시는 것이 정말 놀랍고 존경스럽다. 40년 넘게 살아 오신 봉원동 집 떠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데. 예전에도 나를 좋은 쪽으로 많이 봐주신 선생님이지만, 작년에 <뉴라이트 비판> 보고 너무나 속시원해 하신 위에 오늘 내가 요양원에서 처신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기분이 좋으신 것 같다. 어머니 친구분들 한 번씩 모셔다 드리면서 그분들 모습을 뵙고 가르침을 얻는 것도 꽤 짭짤한 부수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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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27. 16:43
어제는 이모님을 모시고 갔다. 이모 계신 곳은 여주시 강천면 도전리의 가톨릭 노인시설. 3년 전부터 여주에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도 그리 가뵙지를 못하면서 그냥 평야지대의 야산자락을 떠올리고 있었고, 어머니를 이천에 모시면서는 "이제 자매분께서 가까이 지내시게 되었군." 생각했는데, 막상 모시러 가 보니 강원도 같은 경기도, 이천에서 여주 시내 가는 것보다 여주에서 도전리가 더 멀었다. 그래서 7월 초, 어머니 옮기신 직후에 한 번 모셔드리고 근 반년만에 다시 모신 것이다.

어머니와 열세 살 차이로 터울이 큰 자매간이지만 이모 성품이 차분한 편이어서 터울에 비해 서로 가까이 느껴 오신 것 같다. 오늘도 이모 보고는 어머니가 참 편안해 하신다. 내가 먼저 눈에 띄어 한참 수작을 하시다가 뒤늦게 이모를 알아보고는 눈이 둥그레져서 "야! 네가 웬 일이냐?" 하시고는 금세 예전 그대로 언니 노릇을 하신다. 전번 왔을 때에 비해 너무나 총명하고 활달한 모습에 평소 어떤 일에든 표현을 아끼는 이모까지 싱글벙글.

한 20분 정도? 회포를 푼 다음 이모님은 뒷전에 앉아 관찰하는 위치로 돌아가신다. 내가 어머니와 익숙해진 방식으로 놀아드리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으신 모양이다. 나중에 모셔다드리는 길에 "야, 너 어디서 그렇게 애교가 늘었냐? 어려서부터 봐도 그런 애교가 너한테 있는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하시기에 "정말 저도 몰랐어요. 습관이란 게 참 무서운 거네요." 했더니 "참 별일이다." 하고 빙글빙글 웃으신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외가에서 1년간 살 때부터 나는 성격이 부드럽지 못하고 표현력이 모자라는 아이로 표가 나 있었으니까.

앞서 원장님이 메일로 알려준 일이 있었다. 요즘 들어 어머니가 기저귀 갈 때, 휠체어에 앉혀 드릴 때 등 자세를 크게 바꿀 때 허리를 많이 아파 하신다고. 원장님은 어제 없었지만 간호사, 물리치료사, 간병인이 모두 그 문제를 잘 알고 있어서 의견을 두루 들으며 관찰할 수 있었다. 통증 호소가 극심한 것은 아니지만, 요즘 표현 양태가 전반적으로 점잖으신 것을 감안하면 꽤 심각한 정도까지 아프신 것 같다. 최악의 경우 약해진 뼈에 금이 간 상태까지 상상할 수 있는데, 그것을 확진한다 하더라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치료사 김 선생의 설명이다. 그 연세에는 설령 부러진 뼈가 있더라도 가만히 누워 계시게 하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다는 것.

가능성이 큰 추측은 근육이 약해져서 자극에 민감해진 것인데, 꾸준히 관찰하면서 적절한 도움 방법을 천천히 모색해 나가겠다고 한다. 인생은 고해라는데, 그 정도 문제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겠다. 그 연세에, 그 약하신 몸에, 더 심각한 문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연전까지 달고 계시던 혈압이나 혈당 문제가 보이지 않는 게 어딘가. 그런 문제는 훨씬 더 여러 가지 길로 고통을 갖다드릴 것이다.

윤정옥 선생님, 이효재 선생님과 통화를 시켜 드렸다. 꽤 긴 대화를 자연스럽게 나누신다. 통화 끝에는 내게 바꿔주셨는데, 두 분 다 무척 기뻐하신다. 이대 동료들 중에는 사회와 정치에 대한 태도를 편안히 공유해서 "3총사"로 통한 분들. 이 선생님은 요즘도 내 글 마음에 드는 것을 보면 이따금 전화로 격려해 주신다. 윤 선생님은 어머니 목소리를 듣고는 얼굴 보고 싶은 것을 참을 수 없으신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셔서 28일 모실 것을 약속해 놓았다.

휠체어에 일단 앉은 상태에서 별 통증을 느끼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다른 노인분들과 수작하시는 걸 보면 정말 수준 있는 처세술을 확보하고 계시다. 치매 걸린 한 분이 이모님과 나를 붙잡고 자기를 어디다 데려다 달라고 집요하게 칭얼대는데, 어머니가 한참 보고 있다가 적당한 시점에서 적당한 방법으로 꾸짖는 것을 보고 정말 탄복했다. 직원들이 감싸드리지 않아도 동료 노인분들에게 충분히 존중받으실 만한 자세를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주신다.

저녁 식탁에 모셔다 드리고 떠났는데, 식탁에서 몇 발짝 남았을 때 휠체어를 세우고 "어머니, 다른 분들 안 보게 살짝 뽀뽀해 드리고 싶어요." 하니까 눈을 꿈적꿈적하고 뺨을 얼른 대주신다. 이모와 나를 떠나보내며 조금도 아쉬운 기색이 없으시다. "느네들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 와주면 더 좋지만 안 와도 내 인생엔 문제 없어." 말씀을 듣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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