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7. 16:23

양구에서 일찍 출발해 이천 가는 길에 여주 들러 오랫만에 이모님을 모셔다가 자매상봉 시켜드릴 생각을 했었다. 두 시간 반 가량 더 쓰면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아침결에 눈이 펑펑 쏟아져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포기하고, 대신 돌아오는 길에 군포의 대규 형님에게 들르기로 했다. 형수님이 아내를 무척 좋아하고 미더워하시는 위에, 지금 마침 새 간병인이 필요한 참이라 아내와 의논하고 싶어 한다. 하기야, 이모님은 이 형수님보다 연세도 아래고 거동도 아직 자유로우니 형수님부터 챙겨드리는 편이 옳기도 하다.

이포 와서 점심 먹고 1시 반쯤 요양원에 도착했다. 마침 기저귀를 갈고 계시는데 문으로 누워계시는 얼굴만 보였다. 아내가 들어가니 해맑은 표정으로 좋아하신다. 잠시 후 휠체어를 타고 나와서 나를 보시더니 놀란 표정으로 "어? 너도 왔냐?" 하신다. 아내 얼굴은 나와의 관계와 별도로 "좋은 사람"으로 입력되어 있는 것이다. 아내는 어머니가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신다고 서운해 하곤 했었는데, 이제 체념이 된 셈일까? 따로따로 반가워하시는 것이 싫지 않은 기색이다.

날씨가 추워져 옥외에는 모시지 못하고 병실 앞 복도 건너편의 테이블에 두 시간 남짓 모시고 앉아 있었다. 시설이 좋아 옥내 공기도 깨끗하게 유지하고, 벽면 전체의 유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도 좋아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그리 아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햇빛을 마주보고 앉아 가끔 실눈을 뜨고 볕을 즐기시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막 도착한 에스터 엄마의 선물부터 구경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원장님이 "선물부터 보세요." 하는데 여사님이 벌써 선물보따리를 가져오고 있다. 여사님들 순환근무 간격을 한두 주일로 하다가 근래 한 달로 고정시켰다고 하는데, 간격이 긴 편이 여사님들이 노인분들의 필요를 파악하는 데는 확실히 더 낫다.

벌써 두 번째 도착한 에스터 엄마의 선물에 요양원의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고 있다. 원장님 이하 직원들에서 아직 정신 있는 노인분들까지. 내가 봐도 놀랍다. 김 여사는 정말 "선물"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다. 받는 사람에게 "생각지 못했던 기쁨"을 주는 의미. 제자로서 대하기 시작했던 사람이지만, 근년 연락이 이어진 이후 정말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하기야 그도 이제 50을 바라보는 원숙한 나이가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지만, 신앙을 통해 그만한 원숙에 이르는 것이 교인 아닌 나로서는 신기한 일이다.

우리 내외가 그 동안 그만하면 알뜰하게 어머니를 챙겨드린 셈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김 여사의 정성을 보며 더욱 분발할 생각이 든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necessity를 충족시켜 드리는 것이 우리 역할이었지만, 이제 enjoyment에 중점을 둘 상황이다. 매일 가 뵙던 것이 격주로 뜸해진 만큼, 이 노인네를 이번 가는 길엔 뭘로 좀 놀라게 해드릴까, 궁리 좀 하는 게 좋겠다.

이번 선물의 백미는 에스터가 짜준 자주색 털실모자다. 전번에 보내준 빨강 스카프를 두르고 그 모자를 쓰고 흐뭇한 표정으로 앉아 계신 어머니를 보니, 어머니의 행복한 만년이 더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아마추어 악단의 양로원 방문 연주를 담았다는 CD는 요양원에서 쓰시라고 드렸다. 그리고 또 하나 별난 물건이 있는 것은 대규 형님을 위해서 챙겨 넣었다. 두통이나 피로에 좋다는 눈 쿠션인데, 어머니껜 필요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 마음가짐이 이제 두통 같은 건 완전히 작별하신 것으로 보인다.

노래가락 화법을 전보다는 절제해서 쓰신다. 평상 화법과 노래가락 화법 사이를 수시로 오락가락하시는데, 아무래도 우리에겐 통상 화법을 더 많이 쓰신다. 메시지 내용의 집중도가 떨어지면 노래가락으로 넘어가셨다가, 다시 집중하실 때는 통상화법으로 돌아오시는 것이다.

지난 목요일쯤 작은형이 다녀간 모양이다. 형이 다녀갔냐고 여쭈니, 뜻밖에도 기억하고 계시는 것 같다. 아내가 형에게 전화를 돌려 바꿔드리니까 바로 대화에 들어가신다. "뭐? 토요일날 온다고?" 하시는 걸 보니 형이 방문 약속을 들이댄 모양이다. "그래, 알았다." 하고 조금 후에 어머니가 눈을 장난스럽게 부릅뜨며 전화기에 대고 큰소리를 치신다. "너 토요일날 꼭 와야 한다. ...... 그 날 안 오면 넌 내 자식도 아니다!"

그 때만 해도 긴가민가 했다. 그냥 신나는 김에 큰소리 한 번 치신 건지, 아니면 작은형을 어떻게 대해야겠다는 목적의식이 있으셨던 건지. 그런데 얘기가 몇 마디 진행되면서 어머니가 형 걱정을 어떻게 해주시고, 그 걱정이 얼마나 자상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불쑥 나를 돌아보며 물으시는 것이었다. "기목이 그 녀석... 풀어놓을 게 있을 때 어디 가서 풀어놓냐?"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지만 뾰족한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건성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데, 어머니는 집요하게 파고드신다. 결론인즉, 기협이 네놈한테 풀어놓지 못하면 그 녀석이 어디 가서 풀어놓겠냐는 말씀이시다. 요컨대 날 보고 작은형 보호자까지 맡으라시는 것이다. "형한테 잘 대해줘야지, 네 형인데." 결론을 내리신다.

지난 5월 하순에 이곳으로 옮기신 뒤로는 상황 판단 능력만이 아니라 기억력까지도 많이 회복되신 것 같다. 한 자리에 앉아 계신 지 두 시간이 넘어 좀 답답하시지 않을까 생각되어 복도를 한 차례 돌아보시게 하는데, 처음 들어오셨던 방 앞의 복도 끝에서 산과 정원을 한 차례 내다보다가 말씀하신다. "전에 내가 요 방에 있었지." 조금 놀라서 "어머니, 그 때 생각이 나세요?" 했더니 "여기 처음 왔을 때 이 방에 있었잖아?" 하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억하시는 기간을 석 달이나 지낸 후에 작은형이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함께 크던 시절 작은형은 내가 결단력이 없다고 걱정을 해주곤 했었다. "위기결핍증"이란 말을 만들어 진단까지 해주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형의 그 잘난 결단력은 어디 갔는지. 형이 착한 사람인 줄 나는 잘 안다. 어머니께 와 뵐 때는 어머니 즐겁고 편안하게 해드리려고 애를 쓰겠지. 그런데 어머니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생각하고 판단하실 만큼 정신력이 회복되셨다. 형이 와서 들려드리는 좋은 말씀, 보여드리는 좋은 낯빛을 아마 흔쾌한 태도로 받아들여 주셨겠지. 그러면서 들려드리고 보여드리는 것들의 뒤쪽을 걱정하고 계시다가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려면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확고한 생각을 깔아놓은 위에서 찾아온 아들들의 노는 꼴을 바라보시는 것이다.

앉아 계시는 동안 여러 번 "믿을 놈은 너 하나다.", "너에 대해선 내가 걱정을 않지.", "진작부터 네 걱정은 내가 하지도 않았다." 같은 말씀을 불쑥불쑥 하셨다. 이렇게 내게 아첨하실 필요가 없는데, 하고 좀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쓴 책을 보여드리면 "네가 뭘 안다고 책을 써?" 호통을 치시고, 나를 석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씀드리면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분이, 내가 좀 믿음직해 보인다 해서 저렇게까지 공치사를 하실 리가 없는데, 이상했다. 알고 보니 둘째 아드님에게도 보호자가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상황 판단을 하셔서 내게 '작업'을 거신 것 아닌가! 시병일기를 시작한 후 작은형에게는 보이지 않아 왔는데(이메일로 보내도 내가 보낸 메일은 스팸 처리를 받아 왔다.), 이 글은 프린트해서 일반우편으로 보내서라도 각성을 좀 촉구해야겠다.

복도를 한 바퀴 도신 다음 어머니가 "야! 응뎅이가 빠개지는 것 같다." 하셔서 방에 모셔다 눕혀 드리고 잠시 후에 떠났다. "어머니, 가기 전에 뽀뽀를 해드리고 싶어요." 하니까 흘깃 며느리 눈치를 보시는 듯하더니 "안 해도 괜찮다." 생각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넘어서시는 것이 분명하다! 아내에게도 와줘서 고맙다, 또 오너라, 자상하게 챙기신다.

특기사항 한 가지. 불경을 늘 침대에 누워계실 때 읽어드렸었는데, 어제는 테이블에 펼쳐놓고 나란히 앉아서 읽었다. 그런데, 금강경을 어머니께서 읽으시라고 권했을 때 읽으시면서 경문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경치를 구경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금강경도 다시 외우시는 것이다. 천수경 중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권해 보니 이것도 거의 걸리는 데 없이 외우고 계셨다. 정신 건강이 몇 해 전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회복되신 것을 보면 손발 놀리는 힘이 줄어들었을 뿐, 건강의 기본이 안정되신 것 같다. 봄 되면 걸음마도 새로 가르쳐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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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