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 전인가? 이윤재 선생님, 이혜숙 선생님과 어머니가 함께 이화여전 입학하셨던 것이. 이화대학에서 함께 근무하시다가 80년대 후반에들 퇴직하실 때까지 참 오랫동안 많은 것을 함께 하신 분들이다. 요즘 기억과 기억력을 많이 회복하고 계신 참에 두 분 방문을 받고 정말 벼라별 옛일이 다 떠오르시는 것 같다.
두 선생님도 참 기뻐하신다. 쓰러지시기 한 달 전이니까 벌써 2년 반이 되었구나. 어머니가 우리 집 다니러 오셨을 때 두 분이 일산으로 찾아와 점심 함께 하셨던 것이. 그때도 사람을 잘 못 알아보실 때였지만 두 분 알아보시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워낙 오랜 친구들이시니까. 그런데 오늘은 알아보시는 것도 그때보다 더 명쾌하신 것 같고, 옛일도 더 잘 기억하시는 것 같다. 보름 전 기억력 회복되신 것을 보고 놀랐는데, 오늘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김호순 선생님 역시 알아보지 못하실 수가 없는 분이다. 국문과 동료로, 열두 살 차이지만 어머니와는 꼭 자매간처럼 지내신 분. 지난 3월 일산의 병원으로 찾아오시고, 요양원 옮긴 뒤로는 처음이시다. 시병일기를 메일로 보내드리기 때문에 어머니 상태가 좋아지신 것을 알고 무척 벼르시다가, 막상 와뵙고는 너무너무 좋아하신다. 꼭 소녀 같으시다. 78세 노인이신데, 연상의 세 분과 함께 있으니 진짜 소녀 기분이 드신 것도 같고.
세 분과 한 분 한 분 반갑게 인사를 나누신 뒤에 뒷전에 있던 내가 눈에 띄니까 순간적으로 얼굴이 확 풀어지신다. 애기 얼굴이 되신다. 내가 반가운 건 다른 분들 반가운 것과 차원이 다르게 나타나서 민망할 정도다. 고개를 쭉 빼어 나를 쳐다보며 벙긋벙긋하시다가, 순간 실태를 깨달으신 듯 얼렁뚱땅하신다. "어? 너도 왔냐? (사람들을 둘러보며) 저 녀석이 내 아들 같은데요?" 그러고 노래가락으로 넘어가신다. "내 아들이면 어떻고 내 아들 아니면 어떠냐? 와줘서 고맙다~"
원장님도 와서 수인사가 대충 끝난 뒤 나는 차에 돌아와 선생님들 가져오신 귤을 부엌에 넣고, 잠시 기다려 남지심 선생님과 <불광> 남동화 보살님을 마중했다. 남 선생님은 그 사이 요양원에도 두어 번 다녀가셨고 남 보살님은 나랑은 초면이지만 어머니랑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온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두 분을 모시고 올라가니 역시 바로 알아보고 반가워하신다. 다섯 분 손님과 나, 원장님, 일곱 사람에게 둘러싸여 어머니 말씀, "아니 이게 웬 일이야? 오늘이 또 내 생일이야?"
신종플루 때문에 위생보안이 삼엄한 때이기도 해서, 이렇게 여러분이 오시면 3층에 앉기로 양해가 되어 있었다. 올라가서는 <불광> 쪽 볼일이 있으면 보시라고 세 분 선생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켜 주셨지만 <불광> 쪽도 크게 볼일은 없었다. 그래도 불교도들끼리 앉은 틈을 이용해 반야심경을 한 차례 외웠다. 어머니가 기운차게 외우시는 모습을 보며 남 보살님도 놀란 기색이었지만, 기력이 없으실 때도 종종 찾아와 쭉 봐 오신 남 선생님은 정말 감동이 크신 것 같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선생님들이 가져온 과자를 먹으며 꼬박 두 시간 동안 잡담이 이어졌다. 학창시절까지 공유하는 두 분 이 선생님, 그리고 어머니 퇴임 전후 이십여 년간 학교 일만이 아니라 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서 밀착되어 있던 김 선생님에게 둘러싸여 앉았으니 정말 벼라별 얘기가 다 나왔다. 내가 새로 듣는 얘기도 꽤 있었다. 돌아가신 분들 말씀도 많이 나왔다. 살아남은 분들이 먼저 가신 분들 얘기를 하려면 뭔가 처연한 기분이 들기 쉬울 텐데, 오늘 그 자리에선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어머니가 기억 저쪽으로 사라졌다가 돌아오신 것 같은 느낌이 생사의 경계를 가볍게 느끼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가 옛날 일을 기억하며 부끄러움 같은 것도 느끼시는 감이 있었다. 특히 김 선생님이 꺼낸 "연애대장" 대목에서. 돌아가신 김초열 여사님, 이숙훈 여사님과 어머니가 그 방면에서 "삼총사"로 통했다고. 좋은 얘기 들을 만한 분이 눈에 띄었다 하면 세 분이 몰려가 "녹여버리려" 드는데, 두 분 여사님은 물적 자원(음식 등)에 주로 의존하시는데 어머니는 지적 자원으로 두 분과의 경쟁에서 늘 우위에 서셨다고. 김 선생님은 어머니 찬양하는 뜻에서 꺼낸 이야기겠지만, "구도"에 대한 어머니의 열성이 좀 지나치시다고 나도 느껴오던 일에 "연애" 이름까지 붙여 내놓으니 좀 열쩍으셨을 거다.
그 얘기만이 아니라 세 분 선생님과 함께 떠올리는 이런저런 옛 일들이 이제 막 되살아나고 있는 어머니의 감성에 자극이 강한 것이 많았을 것 같다. 오늘 말씀을 거의 노래가락으로 일관하신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서적 완충 효과가 있으니까. 노래가락 화법에 두 분 이 선생님도 많이 즐거워하셨지만, 특히 김 선생님은 좋아서 정말 어쩔 줄 모르신다. 처음 앉아서부터 흉내를 시도하다가, 후반부 들어서는 중창 가닥이 제법 어울리기에 이르렀다. 원래 연극 전공으로 표현력이 뛰어나신 분이니까 그렇기도 하고, 어머니와 다년간 교감의 폭과 깊이가 크기 때문일 것도 같다.
어머니 생활 환경이 훌륭한 것에 대해서도 세 분 선생님이 기뻐하셨다. 시설이 좋은 데 우선 놀라시고, 직원들과 간병인 여사님들 친절한 태도에 다시 놀라신다. 평생 사회활동을 해온 분들이기 때문에 꾸민 친절과 진짜 친절을 잘 구별하시는 분들이다. 이사장님이 오랫동안 장애인 사업에 뜻을 지켜오신 배경을 설명해 드리니 끄덕끄덕하신다. 사업주가 수익성에 연연하지 않고 봉사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는 것은 직원들이 건전한 자세로 일할 수 있는 충분조건은 아니라도 필요조건은 될 것이다. 연규 형과 연호, 아들 형제가 다 미국에 자리 잡고 있는 이혜숙 선생님은 여기 들어와 살 생각도 나시는 모양이다. 장기요양보험을 알아보겠다고 하신다.
남 선생님과 남 보살님이 먼저 떠나고, 2층에 내려와 세 분 선생님과 잠깐 앉았다. 한 달 전만 해도 두 시간 넘게 앉아 계시면 힘들어 하시던 생각이 나서 스테이션에 앉아 있는 간호사에게 슬며시 물어봤다. 친구들 때문에 흥이 겨워 평소보다 활동량이 많으신 것 아니냐고. 요새는 평소에도 저 정도 활동은 하신다는 대답이다.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금강경을 몇 꼭지 읽었다. 그런데 늘 하시던 독경식 낭송이 아니라 특이한 방식이라서 잠깐 어리둥절했는데, 생각해 보니 노래가락 화법을 낭송에도 적용시키고 계신 것이다. 노래가락 화법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앞으로도 더 생각할 것이 많은 것 같다.
오랜 친구들과 모처럼 몇 시간 흥겹게 지내신 뒤에 떠나 보내기가 좀 힘들지 않으실까 걱정했는데, 근래 언제나처럼 선선하시다. 욕심이 없으신 거다. 먹을것도, 사람도, 있으면 즐기신다. 그렇다 해서 없다고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뒤에 처져 있던 내게 "넌 안 가도 되는 거지?" 하시기에 "제가 모셔다 드려야죠." 했더니, "어, 그래, 잘 모셔드려라." 하신다. 미안한 마음에 "어~머~니~ 가기 전에 뽀뽀 해드리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엉구럭을 떠니 속을 뻔히 알지만 싫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쑥 내밀어주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세 분 선생님이 기쁜 마음을 거듭거듭 표하신다. 어머니 건강도 여러 해 전부터 안 좋으신 데다 자식들도 안정된 위치에 있지 못해서 늘 마음에 걸리셨을 것이다. 그러다가 저렇게 기운을 차리시고, 게다가 즐겁고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시는 것을 보니 너무나 기쁘신 것이다. 인연이 깊으신 분들과 이런 좋은 자리 만들어드렸다는 것이 내 스스로도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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