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까지 "capitalist"는 "자본의 소유자"란 뜻으로, "capitalism"은 "자본의 소유"란 뜻으로 쓰여 왔을 뿐, 특정한 경제체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1850년 루이 블랑이, 1861년 프루동이 "capitalism"을 "자본주의"에 가까운 뜻으로 처음 썼다고 한다.

<자본론>(1867, 85, 94)에서도 "capitalist"는 "자본주의 생산 양식" 등의 표현으로 수천 번 쓰이지만 "capitalism"이 쓰인 것은 총 10회도 되지 않는다. 1904년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나올 때까지도 "capitalism"이란 말은 그리 널리 쓰이지 않고 있었다. [이상 Wikipedia, "Capitalism"에서]

근세 유럽에서 발전을 시작해 지금까지 전 세계를 석권해 온 경제체제를 "자본주의"라 널리 부르게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경쟁자로 나선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비되는 시각에서 규정된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엄밀한 의미는 아직도 합의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란 넓은 의미로는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보다 더 의미를 좁히는 것은 역사적 경험에 입각한 관점이다. 자유시장이라 함은 경제 현상이 국가의 통제 없이 "보이지 않는 손", 즉 시장 원리에 따라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과연 시장 원리가 완벽한 자기충족성을 가지고 안정된 질서를 형성-유지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담 스미스 시절 이후 비관적 견해가 늘어나 왔다.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통제가 강하던 17세기 상황에서는 시장의 자율성 증대가 바람직한 발전 방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그 후 국가의 역할이 줄어드는 상황을 겪으면서 시장 원리의 한계성이 점차 심각하게 인식되어 온 것이다.

역사적 경험 속의 자본주의는 시장 원리에 대한 과신 경향을 보여 왔다. 중세체제를 벗어나는 사회 발전 방향이 시장 원리를 전보다 더 존중하는 쪽으로 펼쳐진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는 일이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일어난 자본주의는 시장 원리에 대한 과신 때문에 성장에 집착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이 산업혁명의 토양이 되었다.

성장에 대한 이 집착이 유럽식 근대성의 첫 번째 특징이 되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의 길을 걷게 되어 있었다. 다만, 성장을 하나의 미덕처럼 받든 것은 특이한 현상이었다. 12세기 이후의 중국에서는 경제성장의 길을 걷기는 걸으면서도 성장을 부담스럽고 바람직하지 못한 일로 부득이한 한도 내에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지켜졌다.

성장 지상주의 근대화 방식이 다른 완만한 근대화 방식을 이긴 것은 암세포가 건강한 세포를 이기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생산력 경쟁에서든 군사력 경쟁에서든 성장에 맹목적으로 몰두한 사회가 다른 사회들을 이기게 되니까 다른 사회에서도 부러워서든 두려워서든 성장 지상주의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전 세계가 차츰차츰 성장 지상주의 풍조에 말려들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생각난다. 양자역학 원리는 나도 이해가 깊지 못하니 불확정성에 대한 하나의 비유 정도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만, 역사의 전개과정을 생각함에는 매우 요긴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1935년 에르빈 슈뢰딩거가 제기한 이 가상 실험(thought experiment)은 당시 양자역학의 핵심 이론으로 제기된 양자의 중첩(superposition) 현상을 겨냥한 것이다. 중첩 현상이란 소립자의 상태가 어느 특정한 상태가 아니라 가능한 모든 상태의 조합(중첩) 형태에 머물러 있다가 외부로부터의 관측이 있을 때 한 특정한 상태로 붕괴된다는 것이다. 관측이 없는 상황에서는 두 가지 이상의 상태가 동시에 존재하는 셈이다.

슈뢰딩거의 제안은 소립자의 상태를 증폭시켜 그 상태에 따라 밀폐된 공간 속의 고양이의 생사가 결정되도록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 공간을 열기 전까지 고양이는 살아 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의 중첩 상태가 되지 않느냐는 모순 제기였다.

이 모순을 풀기 위해 제안된 한 가지 이론이 '복수우주론(multiple universe)'이다. 고양이가 죽는 경우와 살아남는 경우가 제각기 펼쳐지는 별개의 우주가 갈라져 나온다는 설명이다. 고양이의 생사만이 아니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모든 일에서 별개의 우주가 갈라져 나가게 되어 있으니 지금 이 순간에도 헤아릴 수 없는 우주들이 갈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공상과학과 역사소설을 결합한 '다른 역사(alternate history)'라는 소장르도 이 생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역사는 서로 다른 우주에서 서로 다르게 진행된 수없이 많은 역사의 한 갈래일 뿐이며, 다른 우주에서는 다른 역사가 진행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한나라 군대가 로마를 석권한 경우, 남북전쟁에서 남군이 이긴 경우, 2차대전에서 연합군이 패퇴한 경우를 상정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역사에는 'if'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황금율에 억눌려 있던 창작 욕구가 터져나올 틈새를 찾은 것이다.

적어도 12세기 이후로는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사회에서 중세체제를 넘어설 필요가 나타나고 있었다. 여러 가지 대응책이 수백 년간 나란히 시도되고 있었다. 성장의 압박을 수용하는 것이 대응의 초점이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비교적 미개한 한 지역으로부터 성장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전략이 나타나고 산업혁명을 그 무기로 갖추면서 다른 대응책을 모두 무색하게 만들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를 여는 순간이었다.


산업화를 통한 성장 지상주의 근대화는 18세기 후반 서유럽 한 모퉁이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온 세계를 휩쓸어 왔다. 이 글에서는 이것을 편의상 "산업형 근대화"라 부르겠다.

산업형 근대화가 세계를 석권했다고 하지만, 다른 형태의 근대화가 모두 완전히 절멸한 것은 아니다. 산업형 근대화가 거의 모든 사회에서 채택되었지만, 각 사회에서 독자적으로 추구하던 근대화 노선과 결합된 것이다. 성장 지상주의와 배치되거나 무관한 요소들이 어느 사회의 근대화에도 어느 정도 존재해 왔다.

각 사회의 고유한 그런 요소들을 "전통"이라고 흔히 불러 왔는데, 전통을 굳어진 과거가 아니라 그 사회의 고유한 흐름이라는 역동적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맞는 말이다. 중세체제를 넘어서는 방향에도 각 사회의 문화적 역사적 조건에 따른 차이가 있었다. 어느 사회나 자기 조건에 맞는 "전통적 근대화"를 추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경쟁의 압박 때문에 부득이하게 산업형 근대화를 채택하면서도 각자 형편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는 전통적 근대화를 병행했던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산업화를 먼저 겪은 나라들이 문화적 정체성을 후발국들보다 잘 지켜온 상황을 이 조건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기회를 선점한 이점 덕분에 여유 있는 입장에서 전통적 근대화의 비중을 크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업형 근대화에 따르는 "전통의 단절"이란 부담을 식민지에 떠넘김으로써 자기 부담을 줄일 수도 있었다.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제일 먼저 산업화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서는 전통적 근대화의 의미를 살릴 여유가 적었지만, 주변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는 많았다. 그리고 침략과 점령을 통해 산업형 근대화의 부담을 한국, 타이완, 만주 등 다른 지역에 많이 떠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은 지금 이 지역에서 전통이 제일 많이 살아남은 나라가 되어 있다.

일본과 비슷한 시기에 산업화에 착수한 러시아와 미국은 방대한 자원에 비해 전통이 빈약한 나라들이었고, 그래서 20세기를 통해 산업형 근대화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결과 냉전시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두 나라 중 러시아(소련)가 먼저 무너졌지만, 이것을 미국의 승리라고만 볼 수 없다. 전통적 근대화의 견제 없는 일방적 산업형 근대화는 단기간의 경쟁에는 유리하지만 장기적으로 구조적 결함을 면할 수 없고, 미국도 소련보다 더 버텼다 뿐이지, 이 문제가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세계적 산업화의 초기에는 산업형 근대화의 진도에 따라 경쟁의 승패가 정해졌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와서는 전통적 근대화의 요소를 얼마만큼 살리는가에 비중이 옮겨가고 있다. 전에는 비인간적 기계의 특성을 따라가는 것이 성공의 조건이었는데, 지금은 인간의 특성을 잘 살리는 것이 성공의 길이다. 최근의 경제 위기 속에 유럽이 미국보다 안정된 자세를 보이는 것도 전통적 근대화의 요소가 더 많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산업화 초기 단계에서 일본의 지배를 받은 사실은 많은 후유증을 남겼지만, 그중 가장 큰 문제가 "전통의 단절"이다. 우리 사회 고유의 가치를 찾을 길을 모르기 때문에 보편적, 물질적 가치밖에 추구할 길이 없다. 80년대에 일본이 "일본식 경영"으로 세계를 풍미한 것은 일본이 지켜 온 전통적 근대화의 성과 중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미국과 일본에서 한물간 수법을 물려받기에 바쁘다.

성장 지상주의는 물질적 가치에 사회를 매몰시켜 다른 가치를 찾지 못하게 한다. 유럽 국가들은 제국주의 시대에도 식민지 지역을 성장 지상주의로 몰아넣으면서 자기네 전통적 가치를 최대한 지켰고, 후기 산업화 시대에 와서는 그 전통적 가치를 밑천으로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길을 잘 찾고 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식민지시대의 성장 지상주의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

성장 지상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은 식민지배를 겪은 사회들의 공통된 문제다. 그런데 한국은 식민지 출신의 다른 사회들에 비해 원래 크고 강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정신상태를 해방 60년 뒤까지 지키고 있다는 것은 그 저력을 충분히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태다. 조선 후기에서 개항기까지 한국의 전통적 근대화가 어떤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바짝 살펴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36> 17대 총선에 붙여

기사입력 2004-04-01 오후 1:50:02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중엽까지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1세기 동안 고려에서는 ‘개혁정치’가 주기적으로 시행되었다. 25대 충렬왕(1274-1308)에서 31대 공민왕(1351-1374)에 이르기까지 새 임금이 즉위하기만 하면 정석처럼 개혁정치가 나왔다. 한 임금의 재위기간 중에도 정치상황의 중대한 변화가 있으면 개혁정치를 거듭 내놓기도 했다.
  
  개혁의 표적은 언제나 특권층의 경제력 독점이었다. 고려 후기 대지주들의 토지는 “산천을 경계로 한다”고 할 만큼 대규모로 집중되어 가고 있었는데, 권력층의 대지주들은 온갖 수단으로 조세와 부역을 회피하였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대다수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한편으로는 국가재정이 쪼들리게 되었다.
  
  그런데 10년이 머다하고 개혁을 거듭하는데도 공민왕 때까지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로 문제는 계속되었다. 개혁의 주체가 바로 개혁의 대상이 되는 악순환 때문이었다.
  
  고려정치사 연구자 이익주 박사는 악순환의 원인을 ‘측근정치’에서 찾는다. 원나라는 1259년 고려의 항복을 받은 뒤, 고려의 영토와 인민을 직접 지배하지 않고 고려 왕을 통해 간접 지배하는 방침을 세웠다. 1269년 원종이 원나라의 힘을 빌어 임연(林衍)의 난을 진압한 이래 고려 왕은 원나라에 의지해 신민에게 군림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 고립된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왕과 특수한 관계를 가지는 측근세력의 육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토지소유제도와 조세제도의 개혁 필요성은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었다. 왕이 새로 즉위해 측근세력을 키울 필요가 있을 때 개혁은 ‘물갈이’의 핑계가 되었다. 측근세력의 핵심은 왕이 즉위 전 원나라 조정에 숙위할 때 시종하다가 왕을 따라 돌아온 신진관료들로, 국내에 정치-경제적 기반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개혁의 칼날로 기존의 기득권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새 측근세력에게 사급전(賜給田)을 주어 힘을 키워주고, 일단 새 측근세력이 자리잡은 뒤에는 개혁의 필요성이 잊혀졌다. 신악(新惡)이 구악(舊惡)을 대신하는 일과성 개혁이었다.
  
  1360년대 신돈(辛旽)을 앞세운 공민왕의 전민추정(田民推定) 정책은 백년간 본질을 외면하고 정략에만 이용해 온 제도개혁을 비로소 본격적인 단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모순이 때늦은 개혁 시도 앞에 엄청난 반향을 터뜨렸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왕조가 빚어져 나오게 된다.
  
  공민왕에 이르러, 그것도 즉위한 지 15년이 지나서야 이 개혁이 본격적 단계에서 추진되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궁극적으로 원나라의 쇠퇴에서 큰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공민왕 이전의 고려 왕들에게 안보의 열쇠는 원나라와의 관계에 있었다. 왕의 반대세력에게도 원나라 조정에 왕을 모함하는 것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보다 효과적인 공격방법이었다. 예를 들어 충숙왕(1313-1330) 때 유청신(柳淸臣), 오잠(吳潛) 등이 고려의 나라를 없애고 행성(行省)을 만들어 원나라의 지방행정체계에 편입시켜 달라고 주청했으나 원나라 조정에서 기각한 일이 있었다. 이 입성(立省)책동에 반대한 원나라 관리들은 고려 조정에서 국가의 은인으로 숭앙받았다.
  
  국가의 안보를 원나라에 맡겨놓은 상황에서 국내의 사회경제적 모순은 국왕에게나 관료들에게나 늘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었다. 따라서 제도 자체의 근본적인 개혁은 염두에 없고, 운영기준만을 놓고 일과성 개혁을 되풀이했던 것이다. 그런데 공민왕대에 이르러 사정이 달라졌다. 원나라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국내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일차적인 정치과제로 떠오르게 되고, 공민왕 재위초년을 통해 기존의 측근세력 구조가 해소되면서 1365년부터 ‘판갈이’ 수준의 본격적 개혁에 착수하게 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정치도 반 세기 동안 미국과의 관계에 안보를 맡겨놓은 상황에서 국가 내부의 변화 요구를 수렴하는 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근대화’와 ‘민주화’라는 화두가 오랫동안 정치담론을 지배해 왔거니와, 이 화두들은 외부에서 주어진 표현으로, 내부의 실질적 제반 요구를 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마치 몽고지배기 ‘충’자 돌림 고려왕들의 개혁정치처럼, 신악으로 구악을 대신하는 도토리 키재기에 그쳤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미국의 입장에 완전히 얽매인 위치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내부의 필요를 앞세운 정책이라는 점에서 신돈의 개혁에 버금가는 평가를 내릴 만하다. 그러나 의회가 오랜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있고 대통령의 권력도 불투명한 부패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있어 개혁의 주체가 확립되지 못했다는 것이 그 한계였다.
  
  국회의 쇄신을 우리는 눈앞에 두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다수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17대 국회가 민의 대변을 위한 완벽한 구조를 가지리라고 기대하기에는 제약 요인이 많다. 열린우리당의 지지는 그 당에 대한 신뢰보다 구악에 대한 반발심리에 근거를 많이 두고 있고, 그에 대한 반발로 일부 지역에서 지역주의가 되살아나는 조짐이 있다. 그러나 이번의 변화가 대한민국 국회가 진정한 대한민국 국회로 자리잡는, 건국 이래 가장 뜻깊은 변화, 최소한 그 출발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어느 당이 몇 명의 당선자를 내느냐보다 각 당 내에서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 새 국회에 자리잡느냐가 더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성향의 사람들이 새 국회에 바람직한 사람들인가? 우리 국회가 오랫동안 우리나라의 진정한 요구를 충분히 반영해 오지 못했다는, 국회 노릇을 제대로 못해 왔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인식하는 사람들이다.
  
  역사는 굴러가게 되어 있다. 공민왕의 때늦은 개혁도 결국은 결실을 보았다. 그러나 고려 왕조를 살려내지는 못했다. 너무 늦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의회제도가 그런 운명에 처하지 않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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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35>

기사입력 2003-12-29 오전 9:03:30

  델리의 한 대학에서 역사학을 가르치는 수닐 세티 교수는 얼마 전 아버지의 고향을 처음으로 방문하고 큰 감동을 겪었다. 세티 교수의 할아버지는 지금 파키스탄 땅이 되어 있는 라호레 부근의 대지주였다.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할 때 세티 집안은 종교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수천만 난민 틈에 끼어 인도로 옮겨 왔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난 세티 교수의 아버지는 고향 땅을 다시 밟아 보지 못했고, 최근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완화되어 일반인의 여행이 허용되면서 인도에서 출생한 세티 교수가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게 된 것이었다.
  
  라호레 부근의 펀잡 지역에서는 대지주의 대부분이 높은 계급의 힌두교도였고 소작인은 낮은 계급의 힌두교도나 이슬람교도였다. 독립 전의 토지소유와 계층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문제다. 아무튼 세티 집안은 옛 소작인들에게 별로 미움을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티 교수가 나타나자 옛 소작인과 그 후손들인 지역 주민들이 모두 반가워하며 만나고 싶어했다.
  
  그런데 점심때가 가까워지자 주민들이 난처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힌두교도는 음식을 먹는 데 무척 까다롭다. 누가 만들어준 어떤 음식을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제한이 있다. 힌두교의 관점에서 이슬람교도는 불결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준 음식을 먹어서도 안되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어서도 안된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주민들은 세티 교수와의 반가움도 식사시간이 되면 거두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 때 세티 교수가 말했다. “당신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싶소.” 이 말을 들은 주민들은 너무 놀라서 잠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환호성을 지르며 “이 사람은 우리와 식사를 같이 하겠다네!” 하고 소리치자 다른 사람들이 이를 받아 “이 사람은 우리와 식사를 같이 하겠다네!” 하고 소리쳤다. 이 외침은 온 마을로 퍼져나가 얼마 후에는 마을 구석구석의 남녀노소가 모두 만세를 부르며 “이 사람은 우리와 식사를 같이 하겠다네!” 함께 소리치고 있었다.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EHESS)의 클레망텡 교수가 자료수집차 인도에 간 길에 며칠 전 델리의 교수들과 만난 자리에서 세티 교수에게 들었다고 전해 준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인도 지식인들의 분위기에서 민족 정체성에 대한 그들의 의식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힌두교 연구자인 클레망텡 교수는 식사와 관련된 제약이 힌두교의 핵심적 요소라고 설명하면서 세티 교수의 이야기에 이어 다른 한 교수가 말해준 경험담도 소개했다. 학교시절 이슬람교도인 가까운 친구의 집에 처음 갔을 때, 식사시간이 가까워지자 친구 어머님이 “얘야, 우리 집에 일하러 오는 저 아주머니는 힌두교도니까 저분께 네 식사는 준비해 달라고 부탁할테니 걱정말렴.” 하셨는데 자기가 “어머님, 저는 어머님이 해 주시는 식사를 같이 먹고 싶습니다.” 했더니 너무나 기뻐하고 고마워하시더라는 것이었다.
  
  인도에서 이슬람교와 힌두교를 대립시킨 것은 “Divide and rule” 정책의 표본이다. 인도의 역사를 고대의 황금기와 중세의 암흑기로 대비시키면서 중세 암흑기의 책임을 이슬람 지배에 돌린 것이 영국인들이 퍼뜨린 식민사관의 골자였다. 영국의 지배를 받는 동안 힌두교도들은 인도 역사의 모든 불행을 이슬람 탓으로 돌리는 데 길들여졌고, 이 반감이 두 나라의 분리독립으로 이어졌다. 이옥순 박사의 책 “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푸른역사)는 두 종교 사이의 갈등과 그에 대한 영국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힌두교도로서 높은 계급에 속한 인도 지식인들 사이에 이 갈등의 역사에 대한 반성의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왜 우리는 이 선량한 사람들과 단순히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괴롭히며 지내야 했던가? 수천만이 고향에서 쫓겨나고 수십만이 목숨을 잃은 분리독립의 비극 속에서 우리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이 무도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아닌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파키스탄과의 갈등과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는가? 특히 자신이 속한 높은 계급이 갈등 증폭의 주역이었다는 점을 반성하며 계급에서 벗어나려 하고 종교 자체는 지키되 그 정치-사회적 제도에서는 이탈하려는 경향이 지식인들 사이에 늘어나고 있다.
  
  영국인의 식민사관이 힌두교도와 이슬람을 이간시킨 것은 일본의 식민사관이 한국과 중국을 이간시킨 것과 같은 구조였다. 한국과 중국의 수천년 역사 중에는 좋은 측면도 있고 나쁜 측면도 있었을 것인데, 일본인은 ‘사대주의’라는 이름으로 그 전체를 폄하했다. ‘독립’이라는 좋은 이름을 중국과의 관계 정리에 밀어댔기 때문에 합방을 주도할 친일파 괴수가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고 독립문 현판을 쓰는 웃지 못할 일까지 벌어졌다.
  
  식민사관만이 아니라 근대 역사학 자체가 이웃과의 갈등을 조장하는 불건전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의 주류 학계가 일본 역사만을 신성화하고 이웃나라들의 역사를 깔아뭉개려 든 것은 어느 식민지배자가 강요하고 유도한 일이 아니었다. 국가와 사회를 파국의 길로 몰고 간 일본 역사학계의 편향성은 당시 일본사회의 군국적 분위기 탓이기도 하지만, 또한 자기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만 복무하려는 근대 역사학의 기본성향으로 이해할 측면이 적지 않다.
  
  식민사관만이 아니라 국가주의 시대 역사학의 배타적 성향을 극복하는 것이 세계화 시대의 과제일 것이다. 혹자는 말한다. 남들은 칼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 먼저 버리면 버린 사람만 손해가 아니냐고. 그러나 이웃나라를 ‘역사의 칼’만으로 대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까지 불구대천의 관계였던 독일과 프랑스가 유럽공동체 안에서 손잡고 지내는 시대가 되지 않았는가. 이웃나라 사이의 협력이 증가하는 블록화의 세계 안에서 이웃끼리의 갈등에 발목을 붙잡히고 있는 나라들은 그만큼 불리한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없다.
  
  인도에서는 지식인층의 반성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힌두주의가 정치계에서 우세를 점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영국제 식민사관이 교육계에서 우세를 되찾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지식인들은 이것이 정치인들의 이기주의와 편의주의 때문이라고 걱정한다. 우리 사회의 지역감정에서 보듯, 정치인들에게는 대립의 감정처럼 정치 조작에 편리한 도구가 없다. 양심적인 지식인들, 그리고 역사학자들에게는 대립을 해소하고 화합을 찾아가는 길을 사회에 제시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로 주어져 있다. 이 길을 방해하려는 자들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 방해를 극복하기 위해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