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7. 16:23

양구에서 일찍 출발해 이천 가는 길에 여주 들러 오랫만에 이모님을 모셔다가 자매상봉 시켜드릴 생각을 했었다. 두 시간 반 가량 더 쓰면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아침결에 눈이 펑펑 쏟아져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포기하고, 대신 돌아오는 길에 군포의 대규 형님에게 들르기로 했다. 형수님이 아내를 무척 좋아하고 미더워하시는 위에, 지금 마침 새 간병인이 필요한 참이라 아내와 의논하고 싶어 한다. 하기야, 이모님은 이 형수님보다 연세도 아래고 거동도 아직 자유로우니 형수님부터 챙겨드리는 편이 옳기도 하다.

이포 와서 점심 먹고 1시 반쯤 요양원에 도착했다. 마침 기저귀를 갈고 계시는데 문으로 누워계시는 얼굴만 보였다. 아내가 들어가니 해맑은 표정으로 좋아하신다. 잠시 후 휠체어를 타고 나와서 나를 보시더니 놀란 표정으로 "어? 너도 왔냐?" 하신다. 아내 얼굴은 나와의 관계와 별도로 "좋은 사람"으로 입력되어 있는 것이다. 아내는 어머니가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하신다고 서운해 하곤 했었는데, 이제 체념이 된 셈일까? 따로따로 반가워하시는 것이 싫지 않은 기색이다.

날씨가 추워져 옥외에는 모시지 못하고 병실 앞 복도 건너편의 테이블에 두 시간 남짓 모시고 앉아 있었다. 시설이 좋아 옥내 공기도 깨끗하게 유지하고, 벽면 전체의 유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도 좋아서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이 그리 아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햇빛을 마주보고 앉아 가끔 실눈을 뜨고 볕을 즐기시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막 도착한 에스터 엄마의 선물부터 구경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원장님이 "선물부터 보세요." 하는데 여사님이 벌써 선물보따리를 가져오고 있다. 여사님들 순환근무 간격을 한두 주일로 하다가 근래 한 달로 고정시켰다고 하는데, 간격이 긴 편이 여사님들이 노인분들의 필요를 파악하는 데는 확실히 더 낫다.

벌써 두 번째 도착한 에스터 엄마의 선물에 요양원의 모든 사람들이 탄복하고 있다. 원장님 이하 직원들에서 아직 정신 있는 노인분들까지. 내가 봐도 놀랍다. 김 여사는 정말 "선물"의 의미를 잘 아는 사람이다. 받는 사람에게 "생각지 못했던 기쁨"을 주는 의미. 제자로서 대하기 시작했던 사람이지만, 근년 연락이 이어진 이후 정말 괄목상대하게 되었다. 하기야 그도 이제 50을 바라보는 원숙한 나이가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한 일이지만, 신앙을 통해 그만한 원숙에 이르는 것이 교인 아닌 나로서는 신기한 일이다.

우리 내외가 그 동안 그만하면 알뜰하게 어머니를 챙겨드린 셈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김 여사의 정성을 보며 더욱 분발할 생각이 든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necessity를 충족시켜 드리는 것이 우리 역할이었지만, 이제 enjoyment에 중점을 둘 상황이다. 매일 가 뵙던 것이 격주로 뜸해진 만큼, 이 노인네를 이번 가는 길엔 뭘로 좀 놀라게 해드릴까, 궁리 좀 하는 게 좋겠다.

이번 선물의 백미는 에스터가 짜준 자주색 털실모자다. 전번에 보내준 빨강 스카프를 두르고 그 모자를 쓰고 흐뭇한 표정으로 앉아 계신 어머니를 보니, 어머니의 행복한 만년이 더 두드러지게 느껴진다. 아마추어 악단의 양로원 방문 연주를 담았다는 CD는 요양원에서 쓰시라고 드렸다. 그리고 또 하나 별난 물건이 있는 것은 대규 형님을 위해서 챙겨 넣었다. 두통이나 피로에 좋다는 눈 쿠션인데, 어머니껜 필요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니 마음가짐이 이제 두통 같은 건 완전히 작별하신 것으로 보인다.

노래가락 화법을 전보다는 절제해서 쓰신다. 평상 화법과 노래가락 화법 사이를 수시로 오락가락하시는데, 아무래도 우리에겐 통상 화법을 더 많이 쓰신다. 메시지 내용의 집중도가 떨어지면 노래가락으로 넘어가셨다가, 다시 집중하실 때는 통상화법으로 돌아오시는 것이다.

지난 목요일쯤 작은형이 다녀간 모양이다. 형이 다녀갔냐고 여쭈니, 뜻밖에도 기억하고 계시는 것 같다. 아내가 형에게 전화를 돌려 바꿔드리니까 바로 대화에 들어가신다. "뭐? 토요일날 온다고?" 하시는 걸 보니 형이 방문 약속을 들이댄 모양이다. "그래, 알았다." 하고 조금 후에 어머니가 눈을 장난스럽게 부릅뜨며 전화기에 대고 큰소리를 치신다. "너 토요일날 꼭 와야 한다. ...... 그 날 안 오면 넌 내 자식도 아니다!"

그 때만 해도 긴가민가 했다. 그냥 신나는 김에 큰소리 한 번 치신 건지, 아니면 작은형을 어떻게 대해야겠다는 목적의식이 있으셨던 건지. 그런데 얘기가 몇 마디 진행되면서 어머니가 형 걱정을 어떻게 해주시고, 그 걱정이 얼마나 자상한 것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불쑥 나를 돌아보며 물으시는 것이었다. "기목이 그 녀석... 풀어놓을 게 있을 때 어디 가서 풀어놓냐?" 무슨 뜻인지 짐작이 가지만 뾰족한 수도 없는 일이라 나는 건성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데, 어머니는 집요하게 파고드신다. 결론인즉, 기협이 네놈한테 풀어놓지 못하면 그 녀석이 어디 가서 풀어놓겠냐는 말씀이시다. 요컨대 날 보고 작은형 보호자까지 맡으라시는 것이다. "형한테 잘 대해줘야지, 네 형인데." 결론을 내리신다.

지난 5월 하순에 이곳으로 옮기신 뒤로는 상황 판단 능력만이 아니라 기억력까지도 많이 회복되신 것 같다. 한 자리에 앉아 계신 지 두 시간이 넘어 좀 답답하시지 않을까 생각되어 복도를 한 차례 돌아보시게 하는데, 처음 들어오셨던 방 앞의 복도 끝에서 산과 정원을 한 차례 내다보다가 말씀하신다. "전에 내가 요 방에 있었지." 조금 놀라서 "어머니, 그 때 생각이 나세요?" 했더니 "여기 처음 왔을 때 이 방에 있었잖아?" 하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억하시는 기간을 석 달이나 지낸 후에 작은형이 비로소 나타난 것이다. 함께 크던 시절 작은형은 내가 결단력이 없다고 걱정을 해주곤 했었다. "위기결핍증"이란 말을 만들어 진단까지 해주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형의 그 잘난 결단력은 어디 갔는지. 형이 착한 사람인 줄 나는 잘 안다. 어머니께 와 뵐 때는 어머니 즐겁고 편안하게 해드리려고 애를 쓰겠지. 그런데 어머니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생각하고 판단하실 만큼 정신력이 회복되셨다. 형이 와서 들려드리는 좋은 말씀, 보여드리는 좋은 낯빛을 아마 흔쾌한 태도로 받아들여 주셨겠지. 그러면서 들려드리고 보여드리는 것들의 뒤쪽을 걱정하고 계시다가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한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려면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확고한 생각을 깔아놓은 위에서 찾아온 아들들의 노는 꼴을 바라보시는 것이다.

앉아 계시는 동안 여러 번 "믿을 놈은 너 하나다.", "너에 대해선 내가 걱정을 않지.", "진작부터 네 걱정은 내가 하지도 않았다." 같은 말씀을 불쑥불쑥 하셨다. 이렇게 내게 아첨하실 필요가 없는데, 하고 좀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가 쓴 책을 보여드리면 "네가 뭘 안다고 책을 써?" 호통을 치시고, 나를 석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씀드리면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분이, 내가 좀 믿음직해 보인다 해서 저렇게까지 공치사를 하실 리가 없는데, 이상했다. 알고 보니 둘째 아드님에게도 보호자가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상황 판단을 하셔서 내게 '작업'을 거신 것 아닌가! 시병일기를 시작한 후 작은형에게는 보이지 않아 왔는데(이메일로 보내도 내가 보낸 메일은 스팸 처리를 받아 왔다.), 이 글은 프린트해서 일반우편으로 보내서라도 각성을 좀 촉구해야겠다.

복도를 한 바퀴 도신 다음 어머니가 "야! 응뎅이가 빠개지는 것 같다." 하셔서 방에 모셔다 눕혀 드리고 잠시 후에 떠났다. "어머니, 가기 전에 뽀뽀를 해드리고 싶어요." 하니까 흘깃 며느리 눈치를 보시는 듯하더니 "안 해도 괜찮다." 생각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넘어서시는 것이 분명하다! 아내에게도 와줘서 고맙다, 또 오너라, 자상하게 챙기신다.

특기사항 한 가지. 불경을 늘 침대에 누워계실 때 읽어드렸었는데, 어제는 테이블에 펼쳐놓고 나란히 앉아서 읽었다. 그런데, 금강경을 어머니께서 읽으시라고 권했을 때 읽으시면서 경문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경치를 구경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금강경도 다시 외우시는 것이다. 천수경 중의 신묘장구대다라니를 권해 보니 이것도 거의 걸리는 데 없이 외우고 계셨다. 정신 건강이 몇 해 전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회복되신 것을 보면 손발 놀리는 힘이 줄어들었을 뿐, 건강의 기본이 안정되신 것 같다. 봄 되면 걸음마도 새로 가르쳐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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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27. 16:16

 

예정했던 10시보다 5분 늦게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접선, 이정희 선생님과 강인숙 선생님을 모시고 요양원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차가 잘 빠져 11시 반도 안 되어 이천에 도착했다. 요양원에 바로 가면 식사시간일 것이므로 길목에 있는 정1품에서 이른 점심을 했다.

가는 중에도 이 선생님이 MB정부 욕 하고 싶은 기색을 내내 보이시는 것을 나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응대해 드리지 못하고, 강 선생님은 좋은 경치 구경 좀 하시라고 살살 빼셨는데, 식당에 가서 앉으니 봇물이 터졌다. 제일 먼저 이 장관이(강 선생님 부군 이어녕 교수) 어느 자리에선가 "건국 60주년" 운운 하셨다며 '건국'이 당키나 한 소리냐며 핏대 올리신다. <뉴라이트 비판> 작업 하면서 나도 씹었던 거지만, 이 선생님 앞에선 나는 온건파다. "건국의 의미가 아주 없는 일은 아니죠. 너무 과장하는 건 문제지만." 하는 정도로 누그러뜨려 드리기 바쁘다. 늘 같이 다니시는 김호순 선생님이 감기 때문에 오늘 같이 못 오셨다는데, 이 선생님의 고담준론을 피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연세가 이제 엎어지면 아흔이신데, 이제 세상 걱정은 좀 젊은 사람들한테 맡겨놓으시면 안 되나?

밥값은 내 몫이라고 떠날 때부터 이 선생님이 다짐을 놓으셨었다. 아무리 계산의 달인이라도 이 선생님 고집 앞에선 꼼짝 못할 거다. 계산 잘하는 어느 분이 진짜 고집 센 분 계산 대신 해드리려다가 카드가 방 구석까지 날라가는 봉변을 당했다는데, 이 선생님 앞에서 카드 함부로 꺼내면 찢어버리실 것 같다. 다 잡수신 다음 얼마냐 물으시기에 3만원이라고 말씀드리니까 "한 사람에?" 하시기에 "세 사람에요." 했더니 왜 그렇게 싸냐고 투덜거리신다. 나도 돈 많이 안 만지고 사는 사람이지만, 이 선생님은 나보다도 덜 만지는 분 같은데, 정말 돈 하고 친한 체를 너무 안 하신다.

1시에 요양원에 도착, 강 선생님 가져오신 고구마 상자를 부엌에 들여놓은 다음 두 분을 모시고 2층으로 올라갔다. 먼저 나타난 강 선생님이 "저 아시겠어요?" 하니 "알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시다가 이 선생님이 나서며 "나는?" 하니까 "당신이야 알지." 이 선생님과는 신변잡사에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치까지 논쟁을 워낙 많이 해 온 사이이고, 그 논쟁의 분위기도 아무 예절이나 규칙 없는 적나라한 때가 많았기 때문인지, 이 선생님을 알아보는 순간 장난스럽고 도발적이면서도 편안한 쪽으로 표정과 말투까지 바뀌신다. 그러면서 강 선생님이 누구인가도 바로 생각나시는 것 같다.

얼마동안 뒷전에서 보고 있는데, 이 선생님이 "기협이가 데려다 줘서..." 하시니까 "기협이도 왔어?" 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찾으시는데, 기쁘고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시다. 꼭 대상이 내가 아니더라도, 뭐에 대해서라도 저렇게 기뻐하고 반가워하시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싫어하시는 게 꽤 많던 분인데, 이렇게 좋아하시는 게 많은, 행복한 분이 되셨다는 게 내 마음에도 정말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복도의 테이블에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 편하신 모습이 두 분 선생님께 기대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얘기는 어머니와 이 선생님을 중심으로 오갔는데, 다른 날에 비해 어머니가 노래가락 아닌 평상 화법으로 많이 말씀을 하셨다. 이 선생님께 받는 자극이 크신 때문인 것 같다. 2~30분 지나면서 노래가락이 살아나기 시작하셨다.

자식들 얘기를 선생님들이 많이 꺼내셨는데, 그런 얘기에서 어머니 마음이 아주 깊은 데서부터 편안하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영아 얘기에서. 큰형이 영아 얘기 꺼냈을 때 "밥 잘 먹으면 됐지~ 무얼 더 바라겠어요~" 노래 부르시던 의미를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영아가 보통사람처럼 식사를 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었다. 지금은 식사를 어떻게 하느냐를 따지지 않으신다. "잘 먹데요." 하는 아들들의 보고로 만족하신다. 시비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신 것이라 할까?

두 시쯤 되어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도 그늘과 볕 사이에 고르시라 하니 당연하다는 듯 볕을 택하신다. 세 분을 남겨두고 사무실에 가서 볼일 본 다음 올라가 보니 노래들을 부르고 계셨다. 이 선생님이 나를 보고, 다음에는 와서 며칠 묵어 가겠다고 하신다. 큰형이 지내던 경우에 비춰 지내실 수 있는 조건을 말씀드렸다. 두 분 다 이곳의 시설과 서비스에 큰 감명을 받으셨다. 특히 혼자 지내 오신 이 선생님은 이런 데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바짝 드신 모양이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 시 가까이 되었을 때 강 선생님이 일어서야겠다고 하신다. 영인문학관에 볼일이 있으시다고. 순간적으로 좀 화가 났다. 일정이 그렇게 빡빡하시면 댁의 차로 오실 일이지, 오랫만에 뵈러 여기까지 왔다가 두 시간도 안 되어 이러실 수가 있나? 그런 사정을 미리 말씀하셨으면 모시고 올지 말지 나도 생각을 해봤을텐데. 그래도 어른들 앞에서 화를 낼 수야 있나? 최대한 좋은 낯으로 말씀드렸다. 저도 모처럼 뵈러 온 것이니 선생님 형편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시간을 말씀해 달라고. 세시 반을 말씀하신다.

방에 모셔 눕혀드린 다음 선생님들 먼저 나가 정원에서 기다리시게 하고 금강경을 읽어드렸다. 먼저 반야심경을 외우니 낭랑하신 것이 근년 뵌 중 최상의 컨디션이시다. 금강경 여섯 꼭지를 읽어드리는데, 눈으로 다 따라 읽으신다.

그만 가겠다고 하니 "벌써?" 눈을 둥그렇게 뜨시고, "기~협~아~ 너 가면 난 어떡하니?" 옛 가락이 모처럼 나오신다. 그 정도 모시고 있다가 일어서기가 나도 서운한데, 어머니야 더하시겠지. 그래도 예전과는 다르시다. "어머니, 저도 더 있고 싶은데 오늘은 친구분들 모셔드려야 해요. 친구분들도 노인이신데 제가 잘해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하니까 "그 친구들이 널 기다리고 있냐?" 하신다. "네, 밑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하니까 "그러면 모셔드리고 도로 올래?" 하신다. "물론 도로 오죠. 오늘은 못 와도 곧 도로 올 거예요." 하니까 마음 놓으셨다는 듯이 "그래라, 와줘서 고맙다."

"뽀뽀를 어디다 해드릴까요?" 하니까 "아무 데나 하렴." "이마랑 뺨이랑 양쪽 다 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렴." 이마와 양쪽 뺨에 뽀뽀해 드리는 동안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띠우고 "고맙다."를 몇 차례 거듭하신다.

두 분 선생님 모두 어머니의 편안한 모습에 크게 기뻐하신다. 다른 무엇보다 자식들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하시는 마음에. 어찌 보면 다들 예순을 넘어서거나 바라보는 나이에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결코 마음 놓을 처지들이 못 된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만족스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시고, 그중의 하나가 자연스럽게 어머니 도와드리는 모습이 옆에서 보기에도 편안하신 모양이다.

강 선생님께서 자기는 아무 데나 택시 탈 수 있는 곳에 내려놓고 이 선생님 모셔다 드리라고 하시지만 굳이 댁까지 먼저 모셔드렸다. 마음속으로라도 화를 낸 일이 미안해서 그랬고, 생각해 보니 강 선생님도 여든을 바라보시는 분인데, 너무 노인 대접을 안해 드린 것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주변사람들 위해주는 일에 애쓰며 살아오신 분인데, 이 연세에까지 일에 쫓기시는 것이 안 됐고, 조금이라도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나라도 마다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래도 원장님과 얘기 나눌 시간이 없었던 건 아쉽다. 추석 후에 작은형이 한 번 더 다녀간 모양이고, 남지심 선생님과 대덕화 보살님이 다녀가신 모양인데, 그분들 왔을 때, 그리고 큰형 있을 때 어머니 반응이 어떠셨는지는 얘기를 좀 들어 둘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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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09. 12. 27. 16:02
 


11시 안돼 이천에 도착했지만 은행을 찾아 큰형이 환전하는 데 30분 너머 걸리고 보니 점심시간이 임박했다. 둘이 시내에서 점심을 먹고 12시 반에 요양원에 도착했다.

식사가 막 끝나고 아직 식사하던 자리에 앉아들 계실 때였다.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간병인이 휠체어를 밀고 나오니 어머니는 왜 나만 먼저 내보내나,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가 "누가 오셨나 보세요." 소리에 눈을 들어 큰형이 보이자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신다. "너 기봉이 아니냐?" 웃음이 얼굴을 채우고 한 순간 뒤 말씀을 이으신다. "너 먼 데 있지 않았냐?"

잠깐 동안의 일이지만, 어머니 건강상태를 형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형이 와서 이틀 묵을 예정을 직원들이 모두 알고 있었고 어머니께도 틈틈이 말씀 드렸을 텐데, 그런 기억은 이 순간에 없으셨다. 그저 큰아들 얼굴을 바로 알아보셨고, 이 아들이 쉽게 찾아올 형편이 못 된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계신 것이다.

형이 "네, 어머니. 어머니 뵈러 미국에서 왔어요." 하면서 내미는 손을 우선 잡으셨다가 얼른 손을 뻗쳐 얼굴도 한참 만져 보신다. 그러다 흥분이 가라앉으셨는지 형의 손을 쥔 채 노래가락 화법으로 돌아가신다. "우리 아들이~ 날 보러 왔어요~ 착한 아들이~ 날 보러 왔어요~"

둘러선 여러 사람을 둘러보며 아들 타령을 한 동안 하신다. "이 녀석이~ 내 큰아들이요~ 큰아들은~ 착한 아들이요~ 저 녀석은~ 내 셋째아들이요~ 셋째아들도~ 착한 아들이요~" 이런 잘난 체를 둘러선 분들이 다들 곱게 봐주시는 기색인 것을 보면 어머니의 인기가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들 타령이 한참 나가다가 아들이 셋도 되고 넷도 된다. 큰형이 보고드릴 틈을 찾았다. "아들이 넷이면 영아까지 아들인가요? 어제 오랫만에 영아 보니까 잘 지내데요." 영아 얘기가 나오니까 주춤, 보통 말투로 물으신다. "그래? 영아를 봤어? 밥은 잘 먹든?" "네, 밥도 잘 먹고, 잘 지내는 것 같데요." 대답을 듣고는 도로 노래가락이다. "그러면 됐어~ 밥 잘 먹으면 됐지~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라겠니~" 잊지는 않으셔도 걱정 또한 않으시는 것을 보며 형이 정말 마음이 놓이는 기색이다.

아들 타령올 오래 끌다 보니 망발에 가까이 가셨다. "우리 큰아들~ 참 잘난 놈이요~ 다른 놈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둘러섰던 분들이 아니, 셋째 아드님도 얼마나 잘하시는데요, 항의들 하시는데, 내가 짐짓 삐진 시늉으로 일어설 듯하며 "어머니, 잘난 큰아들이랑 잘 노세요. 아무것 아닌 소자는 물러가옵니다." 했더니 끄떡도 않으시며 노래가락을 이으신다. "갈 테면 가라, 이놈아~ 이놈은 아무것도 아니어서~ 내가 제일 좋아하지요~ 아무것 아닌 게 나는 좋아요~" 모두들 손뼉을 치며 웃는다.

정말 대단하시다. 노래가락에 이렇게 중층적인 정감을 담아 풀어내시다니. 옛날 음유시인이나 고급 광대가 쓰던 표현기법이 이런 것이었을까? 노래가락으로 이야기하시는 까닭이 뭐냐고 나중에 형이 여쭐 때는 웃음을 잠깐 거두고 보통 화법으로 대답하셨다. "말하면서 산다는 게 너무 힘들어. 그 동안 너무 힘들었어. 이젠 노래나 부르고 살겠어."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다 보니 혹시 힘드시지 않을까 싶어 내가 여쭸다. "어머니, 똥구멍 아프지 않으세요?" 전에 보면 휠체어에 앉은 지 네 시간 정도 될 때 "야, 똥구멍이 아프다. 나 좀 눕혀다고." 하셨었다. 그런데 이번엔 눈을 크게 뜨고 되물으신다. "뭐? 뭐가 아프냐고?" 귀에 가까이 입을 대고 다시 말씀드렸다. "똥구멍 아프지 않으시냐고요. 눕지 않으시겠어요?" 이제 얼굴까지 찌푸리고 소리를 높이신다. "안 들려! 어디가 아프냐고?" 텔레비 보던 분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들 보는데 알아들으시도록 외칠 엄두가 안 나 쩔쩔 매는데, 형에게 고개를 돌리며 흉보는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저 놈 우물쭈물하는 거 보니까 뭐 나쁜 소리 했나보지?" 아무래도 일부러 골탕먹이신 것 같다.

욕도 한 차례 얻어먹었다. 나이 얘기가 나와 "내 나이가 얼마냐?" 묻다가 주변에서 아흔 소리가 나오는 걸 듣고 "내가 아흔이냐?" 나를 향해 물으신다. 장난기가 동해서 "아흔씩이나 되셨겠어요? 마흔이겠죠." 잠깐 어리둥절해서 "마흔?"하다가 장난을 알아채신 듯 인상을 한 차례 북~ 긁고 "예잇! 이 쌍놈!" 한 방 지르시고는 바로 웃음으로 돌아가신다.

이사장님이 올라와 어머니를 모시고 4층의 형이 묵을 방을 보고 나서 그 옆의 아늑한 거실에 넷이 한참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이사장님과 큰형이 주로 얘기를 주고받는데, 어머니가 이따금씩 끼어드는 화법이 여간 절묘하지 않으시다. 말씀을 혼자 많이 하실 때보다 그 묘한 점이 더 뚜렷이 보인다. 다른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흥을 돋워주시는 것이다. 어리숙한 체하는 화법을 원래도 많이 쓰셨지만, 지금은 아주 자연스럽게 체화되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한 지 두 시간이 되어 가는데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셔서 바람 쏘이러 2층 테라스로 모시고 나갔다. 꽃을 보고 좋아하신다. 그늘에 앉으시겠는가, 볕에 앉으시겠는가 여쭈니 싱긋 웃으며 볕 쪽으로 고개를 돌리신다. 아무래도 볕을 쪼이시는 시간이 넉넉지 못한 모양이다. 형이 있는 동안 간병인들을 재주껏 구워삶아 놓겠지. 날씨가 괜찮은 동안 바깥바람을 최대한 쏘여드릴 수 있도록.

기억력 테스트를 하나 시도했다. "어머니, 며칠 후에 대덕화 보살님이 어머니 뵈러 온대요." "대덕화? 그게 누구냐?" "어머니 쓰러지셨을 때 병원에 모셔다 드린 임 교수요. 그 분 오면 어머니가 좋아하시잖아요?" "그래? 그런 분이 있었던가?" "그분 오면 대덕화 보살님 와줘서 고맙다고 인사하세요. 모르는 체하면 서운해 하잖아요?" "알았다, 알았어." 고개를 끄덕이며 짖궂은 웃음을 띠우신다. 이름으로는 전혀 기억이 되지 않으시는 모양이다. 지금보다 기력이 약하실 때도 나타나면 바로 알아보시던 얼굴인데.

아들들이 모시고 앉은 동안 노래가락 화법을 많이 안 쓰시는 걸 보면 접대용 화법인 모양이다. 가끔 아들들에게도 접대할 마음이 드실 때는 수시로 쓰신다. 형이 "어머니, 작년 뵐 때보다 더 예뻐지셨어요." 하니까 같잖다는 듯이 하! 헛웃음 뒤에 "우리 아들이~ 날 보고 예쁘대요~ 칭찬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아요~" 노래가 나오시고 내가 "어머니, 지금 들으신 건 칭찬이 아니고 아첨이었어요." 하니까 곧바로 "칭찬도 좋고요~ 아첨도 좋아요~ 좋은 말 들으니까~ 기분이 좋아요~" 이어지신다. 이런 끼가 있으셨던가, 감탄스럽다.

세 시 가까이 되어 눕고 싶으시다기에 방에 모셨다. 금강경을 읽어드릴까 여쭈니 즉각 "그래, 읽어다고." 하신다. 경문을 꺼내면서 "먼저 반야심경부터 한 번 외우시죠. 마하반야바라밀다..." 하니까 바로 따라 외우시는 데 거침이 하나도 없으시다. 금강경을 읽어드리니 또 내 입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눈길을 떼시기는커녕 깜박이지도 않으신다. 뭔가 실수가 나올까봐 감시하시는 건지, 소리가 나오는 발원지를 바라보면 더 잘 들릴 것 같아서 그러시는지. 한 꼭지 읽고 나서 "잘 읽었죠?" 하니까 심각하던 표정에 웃음을 떠올리면서 "그래, 잘 읽었다." 다음 꼭지를 읽기 시작하니까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자주 뵙지 못하니 이런 것은 아쉽다. 금강경 듣기 좋아하는 걸 형이 봤으니 혼자 모시고 있을 때 읽어드리려고 애를 쓰겠지. 예수쟁이가 익숙하지도 못한 경문 읽느라 버벅거릴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온다.

제일 긴 꼭지, 제13분까지 읽은 뒤에 "어머니, 저는 가볼께요. 큰형이랑 잘 노세요." 하니까 순간적으로 서운한 표정을 떠올리며 "어디 가려고?" 하셨지만 "집에 가서 일 좀 하려고요." 대답하는 동안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가 "그래, 잘 가거라." 하신다. "뽀뽀를 뺨에 해드릴까요, 이마에 해드릴까요?" 하니까 조금 멋적은 표정으로 "아무 데나 하렴." 하신다. 뽀뽀는 원래 큰형 전매특헌데, 그 동안 내게 허용하신 데 죄책감을 느끼시는 걸까? "괜찮으시면 앙쪽에 다 할께요." 하고 입술을 댈 때는 또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가 계시다.

배웅하러 나온 형과 정원에 앉아서 잠깐 얘기를 나눴다. 어머니 상태가 기쁘다는 얘기, 시설이 상상 못한 정도로 좋다는 얘기에 이어 형이 한 가지를 묻는다. 이사장님 아까 말씀 중 다른 요양원에서 3, 40만원까지 깎아내리는 바람에 운영이 힘들다는 애기가 무슨 뜻이냐고. 내가 이해하는 대로 설명을 해줬다. 장기요양보험이 1인당 120만원씩 나오니까, 수익성 위주로 경영하는 업자들이 원가를 줄여서 달려든다고. 1인당 비용을 20만원 줄이면 요양원 수입을 10% 줄이면서 본인 부담을 40% 줄여줄 수 있으니까 보험 적용을 위한 최소조건에만 맞추려 하고, 여기처럼 고급 서비스를 제공하려 애쓰는 요양원이 불리한 입장이 된다고. 시혜적 복지에는 일반적으로 따르는 문제라고 바로 알아듣는다.

작은형이 6시에 강의 끝난 뒤 온다고 했으니 7시까지 기다리면 3형제가 모처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앉을 수도 있고, 여기 적을 내용도 늘어나겠지만, 작은형이 약속 지킬 것을 믿고 투자하기에는 네 시간이 너무 아깝다. 65세에 요양원 임시 입원한 큰형을 뒤로 하고 집을 향했다. (작은형은 아까 점심때 내게 전화해서 요양원 가는 길과 전화번호를 묻기에 친절히 대답해 줬다. 석 달 전에 가르쳐준 것은 벌써 소용이 없고, 어제 가겠다던 사람이 이제야 길을 묻다니, 정말 신선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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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