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37>

기사입력 2004-05-03 오후 2:40:09

  공민왕(1352-1374)은 남긴 서화를 보더라도 당대 특급의 교양인이었다. 그리고 전민변정(田民辨正)과 배원친명(排元親明) 등 시의적절한 정책을 보면 판단력과 추진력이 뛰어난 영명한 군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 후기는 추문과 혼란으로 얼룩졌고, 그가 비명에 죽은 후 그의 개혁정책은 모두 좌초하고 말았다.
  
  공민왕을 둘러싼 이런저런 추문은 그의 정치적 반대자들이 날조한 것으로 보인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격으로 그가 의심스러운 추문 속에 몰락한 후 그의 경제개혁과 자주권 확보 정책에 반대하던 기득권층과 부원파(附元派)가 집권한 것을 보면 그의 개혁정책에 대한 저항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민왕의 온갖 추문은 수구파가 자기네 저항을 정당화하기 위해 뒤집어씌운 ‘네거티브 정치’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공민왕의 개혁은 실패했어도 개혁의 씨앗은 살아남았다. 그가 한미한 출신의 신돈을 앞장세워 개혁을 추진한 것은 기존의 정치권에서 개혁의 주체로 내세울 세력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개혁추진을 위해 과거 출신의 신진관료층을 적극 등용했다. 신돈과 공민왕이 사라진 뒤 수구파가 정권을 장악한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고려 정계의 중견세력으로 성장하며 개혁의 주체로 다시 나설 길을 모색하게 된다.
  
  공민왕이 죽은 십여 년 후 최영 세력이 이인임 세력을 축출한 것(1388)은 수구정권의 내부 모순이 폭발한 것으로, 정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인임의 오랜 독재체제가 무너짐으로써 변화의 조짐이 보임에 따라 개혁 성향 관료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 때 이들이 주목한 것이 명문세가 출신의 최영과 대비되는 변방 출신의 무장 이성계였다. 국제정세의 불안정으로 무관의 위상이 극히 높던 이 시점에서 고려의 기존 정치권에 얽혀 있지 않은 이성계는 개혁파 관료들이 가장 믿음을 줄 수 있는 실력자였다.
  
  1388년의 위화도 회군은 한낱 쿠데타가 아니라 공민왕의 개혁으로 돌아가는 신호탄이었다. 이색, 조준, 정몽주, 정도전 등 공민왕대에 등용되어 개혁정책에 종사하던 신진관료들이 이성계 등 회군파의 비호와 지원 아래 경제개혁정책의 재수립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곧 강경파와 온건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좌파와 우파로 갈라진다. 공민왕대 개혁정책의 부활 수준을 바라보는 온건파는 당시 사유재산의 주종인 사전(私田)을 통제는 하되 유지하려 한 반면, 더 나아가 혁명적 변화를 꾀하는 강경파는 사전을 통째로 없애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는 과전법을 추진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는 경제개혁의 범위를 둘러싼 이 정쟁과 나란히 진행되었다. 온건파는 개혁의 지향성을 저촉하지 않는 한 기존 체제를 최대한 온존하려 하였으므로 개혁에 저항감을 가진 세력도 이에 동조하여 개혁의 속도를 늦추려 하였고, 이들은 왕실에 대한 충성이라는 명분으로 상당한 결속력을 이룰 수 있었다. 한편 강경파는 20여 년 전 신돈의 개혁을 환영하여 신돈을 성인(聖人)이라 칭송하던 민중의 지지를 결집하며 반대파의 구심점이 된 국왕과 대립하게 되었다.
  
  최영 세력을 숙청하며 우왕을 폐한 이듬해에 다시 창왕을 폐한 것은 강경파가 승리한 결과였다.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으로 몰아붙인 것은 이긴 자의 자기정당화를 위한 책략이었거니와, 왕실의 먼 지손 정창군을 공양왕으로 추대하였으나 공양왕 역시 고려 왕조의 지속을 바라는 입장에서 이성계 일파가 추진하는 변화에 반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색과 정몽주를 필두로 하는 온건파는 1392년 4월 이후 이성계가 부상으로 조정에 나오지 못하는 동안 강경파 핵심인물들을 체포하고 귀양보내는 등 반격에 나섰으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진 뒤였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격살된 뒤 7월 17일 이성계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한 저항은 더 이상 없었다. 1390년부터 시행된 과전법은 이리하여 새 왕조의 기초가 되었다.
  
  차떼기 정국은 한나라당을 위축시키고 탄핵 정국은 민주당을 몰락시켜 열린우리당의 총선 승리를 가져왔다. 총선의 이런 결과를 가져온 민심은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 과거에 대한 비판을 더 많이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정권을 위한 정권’의 단계를 벗어나 현실에 제대로 대응하는 정치를 연다는 점에서 위화도 회군에 비견할 의미가 있다. 열린우리당의 정체성 문제가 총선에 이기고 난 뒤 제기되는 것은 ‘과거 청산’이라는 기존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처리해 낸 결과다.
  
  진짜 정치는 이제부터다. 분배 문제를 제대로 다뤄보지도 못하던 수십년간의 ‘정치 실종’ 상황 속에서 누적된 모순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당면한 과제다. 더 이상의 모순 누적을 막으면서 기왕의 모순을 서서히 해소시켜 나가자는 온건론과 모순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자는 강경론이 진지하게 맞서는 것은 당연하고도 바람직한 대결이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 과정에서 경계할 만한 가르침은 정치적 대결에서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당시의 온건파는 수구파와 제휴함으로써 왕조체제의 전복을 초래했고, 강경파는 폭력을 남용함으로써 명분을 훼손했다. 그 결과 내부적으로는 많은 인재가 개혁의 대열에서 이탈했고, 외부적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종속도가 심화되었다. 전지구적 경쟁의 세계 속에서는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Posted by 문천

그저께 파주의 거북마을과 진인선원을, 그리고 어제 용인 백암의 용인백암너싱홈과 안성 죽산의 파라밀 요양원을 둘러보았습니다.
거북마을은 시설이 빈약하고 운영 기준도 '복지'보다 '수용'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아 내키지 않습니다. 한편 진인선원은 1년 전에 봤던 대로 훌륭한 시설에 운영도 원활한 것으로 보여 더 바랄 점이 없었습니다. 위치 빼고는.
진인선원 수준의 요양원에 모시면 지금까지 병원에 모시고있을 때처럼 자주 찾아뵐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직원과 노인들 사이의 관계가 풍성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가족들 사이에 지내는 것 비슷하게 인간관계를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두 주일에 한 번 정도는 보호자가 들여다봐 드리는 것이 장기적으로 필요하겠지요. 진인선원의 위치 문제는 제 둘째 형을 비롯해 잠재적 보호자들(외삼촌, 이모 등)이 찾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지난 주부터 처음으로 당뇨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보호자 역할을 형에게 넘길 가능성도 생각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꼭 보호자 책임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도, 그 동안 일기에서 더러 나타난 대로 둘째 형을 많이 본다는 것이 어머니께 대단히 큰 기쁨입니다. 둘째 형이 쉽게 찾아뵐 수 있는위치란 것이 어머니의 행복에 매우 중요한 조건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제 남쪽의 요양원 두 곳을 찾아가 봤습니다.
파라밀 요양원은 위치도 좋고(죽산 버스터미널에서 택시로 기본요금 조금 넘을 정도) 시설도 좋습니다. 그런데 저는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복지보다 수용의 분위기랄까요? 종교사업에 흔히 있는 독선적, 권위주의적 분위기랄까요? 안내해 준 복지사는 더할 수 없이 친절했지만, 시설의 구조 자체가 그런 느낌을 주더군요. 건물 앞쪽의 넉넉한 공간을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발라 주차장만 가득 만들어놓은 점이라든가, 뒤쪽의 (시설 규모에 비해 조그만) 정원으로 나가는 문을 평상시에 잠가 놓는 점이라든가...
용인백암은 150인 수용의 파라밀, 200인 수용의 진인선원보다는 작은 70인 규모이고 위치가 조금 외진 느낌이지만 분위기는 진인선원보다 못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건물 한 동인데, 구조와 구성이 합리적으로 되어 있고, 정원, 텃밭 등 외부 시설이 넉넉하고 좋군요. 집중관리실도 있어서 의료 서비스도 어느 수준 보장되는 것 같고요.
지금 제 생각은 둘째 형에게 파라밀과 용인백암 두 곳을 둘러보게 하고 뚜렷한 의견이 있을 경우 그에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옮기시고 다시 옮기실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보살님들 의견을 얻고자 이렇게 지금 상황을 알려드리니, 생각나시는 점 있으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기협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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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2010. 1. 3. 11:50

 (제일 처음 썼던 글을 잃었다가 이제 메일 속에서 찾아 올립니다.)

며칠 전부터 정신이 많이 맑아지신 것 같다. 영양상태, 혈액순환 등 건강의 기반조건이 안정되신 덕분인 것 같다. 그러나 큰 회복을 바랄 일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두 달 되었나? MRI 뇌 촬영을 한 후 한 선생도 "뇌가 쪼그라드신다"는 표현으로, 뇌 세포의 신진대사가 거의 막힌 본격적 노쇠현상이니 이제 더 다른 검사를 해 드릴 필요도 없을 것이라고, 체념을 권했었다.

그래도 좋아지신 상태가 1주일 가까이 유지되니 반갑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서너 달 동안 사람 못 알아보시는 것은 물론, 주변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는 상태를 반 시간도 유지하지 못하시던 분이 눈알을 또록또록 움직이시고, 주변의 배려를 느낄 때는 입술을 오무려 웃음도 띠신다.

간병인 여사분들이 어머니를 진심으로 귀여워들 하는 것 같아 참 다행이다. 내가 곁에 모시고 있을 때는 긴장이 되지 않는지 입을 떼어 말씀하시는 일이 별로 없는데, 틈 나는 여사분이 있으면 곁에 와서 어머니를 얼려 입을 떼시게 만들어드린다. 모시고 지내는 시간이 나보다 길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어머니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재간들이 참 좋다. 내가 없을 때도 저런 식으로 적당한 자극을 드리려고 애써 주리라 생각되어 참 고맙다.

늙으면 애기가 된다더니, 여사님들 앞에서 어머니는 온갖 애기노릇을 다 하신다. 내가 없을 때 재미있는 반응 보이신 것을 여사님들은 녹화방송도 해준다. 요새만큼 회복되시기 전 언젠가, 식사 준비를 해드리면서 "할머니, 지금 식사가 아침이예요, 점심이예요, 저녁이예요?" 말을 걸었더니, 눈을 모처럼 똑바로 뜨시고는 "지금 나를 시험치는 거냐?" 호통을 치시더라고, 몇 번째 리플레이를 해주면서도 하염없이 재미있어들 한다. 역시 박사 할머니가 다르시다고.

정신이 맑아지시니 걱정되는 면도 있다. 모시고 앉았을 때 눈길이 마주치거나 이마에 뽀뽀를 해드리는 등 조그만 자극이 있을 때, 얼굴을 찡그려 울상이 되시고는 눈물까지 흘리시는 일이 자주 있다. 한 번 그런 상황에서 마침 곁에 김 여사가 있어 물어보았다. 내가 없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지으시는 일이 자주 있냐고.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면 역시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심리적 고통을 느끼시는 것일 게다. 내 얼굴을 보며 지나간 일의 어떤 대목이 떠올라 회한에 빠지시는 것이겠지.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오신 일생을 마무리하는 자리에 누워서도 마음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시다니...

그러나 이것도 마음을 다잡아 생각한다. 기나긴 고해를 떠나시는 마당에 회한을 반추할 시간을 가지시는 것도 당신의 일생을 더욱 충실하게 만드는 기회가 아니겠는가. 몸의 고통이 적어서 마음의 고통에 몰두하실 수 있는 것이 그분의 복이라 생각하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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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