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7. 16:16

 

예정했던 10시보다 5분 늦게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접선, 이정희 선생님과 강인숙 선생님을 모시고 요양원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차가 잘 빠져 11시 반도 안 되어 이천에 도착했다. 요양원에 바로 가면 식사시간일 것이므로 길목에 있는 정1품에서 이른 점심을 했다.

가는 중에도 이 선생님이 MB정부 욕 하고 싶은 기색을 내내 보이시는 것을 나는 운전에 집중하느라 응대해 드리지 못하고, 강 선생님은 좋은 경치 구경 좀 하시라고 살살 빼셨는데, 식당에 가서 앉으니 봇물이 터졌다. 제일 먼저 이 장관이(강 선생님 부군 이어녕 교수) 어느 자리에선가 "건국 60주년" 운운 하셨다며 '건국'이 당키나 한 소리냐며 핏대 올리신다. <뉴라이트 비판> 작업 하면서 나도 씹었던 거지만, 이 선생님 앞에선 나는 온건파다. "건국의 의미가 아주 없는 일은 아니죠. 너무 과장하는 건 문제지만." 하는 정도로 누그러뜨려 드리기 바쁘다. 늘 같이 다니시는 김호순 선생님이 감기 때문에 오늘 같이 못 오셨다는데, 이 선생님의 고담준론을 피하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연세가 이제 엎어지면 아흔이신데, 이제 세상 걱정은 좀 젊은 사람들한테 맡겨놓으시면 안 되나?

밥값은 내 몫이라고 떠날 때부터 이 선생님이 다짐을 놓으셨었다. 아무리 계산의 달인이라도 이 선생님 고집 앞에선 꼼짝 못할 거다. 계산 잘하는 어느 분이 진짜 고집 센 분 계산 대신 해드리려다가 카드가 방 구석까지 날라가는 봉변을 당했다는데, 이 선생님 앞에서 카드 함부로 꺼내면 찢어버리실 것 같다. 다 잡수신 다음 얼마냐 물으시기에 3만원이라고 말씀드리니까 "한 사람에?" 하시기에 "세 사람에요." 했더니 왜 그렇게 싸냐고 투덜거리신다. 나도 돈 많이 안 만지고 사는 사람이지만, 이 선생님은 나보다도 덜 만지는 분 같은데, 정말 돈 하고 친한 체를 너무 안 하신다.

1시에 요양원에 도착, 강 선생님 가져오신 고구마 상자를 부엌에 들여놓은 다음 두 분을 모시고 2층으로 올라갔다. 먼저 나타난 강 선생님이 "저 아시겠어요?" 하니 "알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시다가 이 선생님이 나서며 "나는?" 하니까 "당신이야 알지." 이 선생님과는 신변잡사에서부터 세상 돌아가는 이치까지 논쟁을 워낙 많이 해 온 사이이고, 그 논쟁의 분위기도 아무 예절이나 규칙 없는 적나라한 때가 많았기 때문인지, 이 선생님을 알아보는 순간 장난스럽고 도발적이면서도 편안한 쪽으로 표정과 말투까지 바뀌신다. 그러면서 강 선생님이 누구인가도 바로 생각나시는 것 같다.

얼마동안 뒷전에서 보고 있는데, 이 선생님이 "기협이가 데려다 줘서..." 하시니까 "기협이도 왔어?" 하고 고개를 돌려 나를 찾으시는데, 기쁘고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시다. 꼭 대상이 내가 아니더라도, 뭐에 대해서라도 저렇게 기뻐하고 반가워하시는 건 참 좋은 일이다. 싫어하시는 게 꽤 많던 분인데, 이렇게 좋아하시는 게 많은, 행복한 분이 되셨다는 게 내 마음에도 정말 기쁘고 반가운 일이다.

복도의 테이블에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 편하신 모습이 두 분 선생님께 기대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얘기는 어머니와 이 선생님을 중심으로 오갔는데, 다른 날에 비해 어머니가 노래가락 아닌 평상 화법으로 많이 말씀을 하셨다. 이 선생님께 받는 자극이 크신 때문인 것 같다. 2~30분 지나면서 노래가락이 살아나기 시작하셨다.

자식들 얘기를 선생님들이 많이 꺼내셨는데, 그런 얘기에서 어머니 마음이 아주 깊은 데서부터 편안하신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영아 얘기에서. 큰형이 영아 얘기 꺼냈을 때 "밥 잘 먹으면 됐지~ 무얼 더 바라겠어요~" 노래 부르시던 의미를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영아가 보통사람처럼 식사를 하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었다. 지금은 식사를 어떻게 하느냐를 따지지 않으신다. "잘 먹데요." 하는 아들들의 보고로 만족하신다. 시비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신 것이라 할까?

두 시쯤 되어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도 그늘과 볕 사이에 고르시라 하니 당연하다는 듯 볕을 택하신다. 세 분을 남겨두고 사무실에 가서 볼일 본 다음 올라가 보니 노래들을 부르고 계셨다. 이 선생님이 나를 보고, 다음에는 와서 며칠 묵어 가겠다고 하신다. 큰형이 지내던 경우에 비춰 지내실 수 있는 조건을 말씀드렸다. 두 분 다 이곳의 시설과 서비스에 큰 감명을 받으셨다. 특히 혼자 지내 오신 이 선생님은 이런 데서 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바짝 드신 모양이다.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 시 가까이 되었을 때 강 선생님이 일어서야겠다고 하신다. 영인문학관에 볼일이 있으시다고. 순간적으로 좀 화가 났다. 일정이 그렇게 빡빡하시면 댁의 차로 오실 일이지, 오랫만에 뵈러 여기까지 왔다가 두 시간도 안 되어 이러실 수가 있나? 그런 사정을 미리 말씀하셨으면 모시고 올지 말지 나도 생각을 해봤을텐데. 그래도 어른들 앞에서 화를 낼 수야 있나? 최대한 좋은 낯으로 말씀드렸다. 저도 모처럼 뵈러 온 것이니 선생님 형편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시간을 말씀해 달라고. 세시 반을 말씀하신다.

방에 모셔 눕혀드린 다음 선생님들 먼저 나가 정원에서 기다리시게 하고 금강경을 읽어드렸다. 먼저 반야심경을 외우니 낭랑하신 것이 근년 뵌 중 최상의 컨디션이시다. 금강경 여섯 꼭지를 읽어드리는데, 눈으로 다 따라 읽으신다.

그만 가겠다고 하니 "벌써?" 눈을 둥그렇게 뜨시고, "기~협~아~ 너 가면 난 어떡하니?" 옛 가락이 모처럼 나오신다. 그 정도 모시고 있다가 일어서기가 나도 서운한데, 어머니야 더하시겠지. 그래도 예전과는 다르시다. "어머니, 저도 더 있고 싶은데 오늘은 친구분들 모셔드려야 해요. 친구분들도 노인이신데 제가 잘해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하니까 "그 친구들이 널 기다리고 있냐?" 하신다. "네, 밑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하니까 "그러면 모셔드리고 도로 올래?" 하신다. "물론 도로 오죠. 오늘은 못 와도 곧 도로 올 거예요." 하니까 마음 놓으셨다는 듯이 "그래라, 와줘서 고맙다."

"뽀뽀를 어디다 해드릴까요?" 하니까 "아무 데나 하렴." "이마랑 뺨이랑 양쪽 다 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렴." 이마와 양쪽 뺨에 뽀뽀해 드리는 동안 수줍은 듯한 미소를 띠우고 "고맙다."를 몇 차례 거듭하신다.

두 분 선생님 모두 어머니의 편안한 모습에 크게 기뻐하신다. 다른 무엇보다 자식들에 대해 편안하게 생각하시는 마음에. 어찌 보면 다들 예순을 넘어서거나 바라보는 나이에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결코 마음 놓을 처지들이 못 된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만족스럽고 편안하게 받아들이시고, 그중의 하나가 자연스럽게 어머니 도와드리는 모습이 옆에서 보기에도 편안하신 모양이다.

강 선생님께서 자기는 아무 데나 택시 탈 수 있는 곳에 내려놓고 이 선생님 모셔다 드리라고 하시지만 굳이 댁까지 먼저 모셔드렸다. 마음속으로라도 화를 낸 일이 미안해서 그랬고, 생각해 보니 강 선생님도 여든을 바라보시는 분인데, 너무 노인 대접을 안해 드린 것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주변사람들 위해주는 일에 애쓰며 살아오신 분인데, 이 연세에까지 일에 쫓기시는 것이 안 됐고, 조금이라도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나라도 마다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다.

그래도 원장님과 얘기 나눌 시간이 없었던 건 아쉽다. 추석 후에 작은형이 한 번 더 다녀간 모양이고, 남지심 선생님과 대덕화 보살님이 다녀가신 모양인데, 그분들 왔을 때, 그리고 큰형 있을 때 어머니 반응이 어떠셨는지는 얘기를 좀 들어 둘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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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