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의 바닥에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사랑을 깔고 본다는 것은 전연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소속 사회에 대한 사랑 없이 역사를 본다는 것이 무의미한 행위라는 문제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보는 행위가 어떤 입장에서 이뤄지는가에 따라 사랑을 드러내는 방법에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개인적 행위라면 사랑의 표현 방법에 아무런 제약도 필요 없다. 반면 공공성을 가진 연구 작업에는 사랑의 감정이 개입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감정 개입 없이 얻어낸 연구 결과가 자연스럽게 일으켜주는 감정이라야 안정성을 가진다. 감정을 앞세워 연구 결과를 얻어낸다면 그로부터 일어나는 감정은 일방적이고 소모적인 것이 되기 쉽다.
다수 독자를 위한 역사 서술은 그 중간이다. 연구 작업처럼 감정의 개입을 철저히 삼갈 필요까지는 없지만, 표현에 절제가 있어야 한다. 서술 목적에 따라 절제의 수준에 편차가 있다. 절제가 강한 서술은 독자의 감정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도와주고, 절제가 약한 서술은 필자의 감정을 독자에게 이입한다. 절제가 강할수록 지적 생산력이 큰 서술이 된다.
조선의 망국 과정에 관한 연구에는 감정을 앞세우는 경향이 많이 보인다. 망국이란 주제가 분노, 치욕, 안타까움 등 격렬한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경향은 ‘민족사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지금은 그런 경향이 억제될 필요가 있다. 민족사회가 극히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을 때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조금 억지라도 쓸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민족의 위상에 자신감이 많이 자라난 지금 시점에서는 억지를 될 수 있는 대로 줄일 필요가 있다. 자신감이 큰 사회에서는 다양한 합리적 관점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독단성이 너무 강한 민족주의는 사회의 통합보다 분열에 이바지하기 쉽다.
조선 망국의 원인이 전적으로(또는 거의 전적으로) 일본의 침략 야욕에 있었다고 주장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연구자들 중에도 있다. 이 시대를 연구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이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나는 연구자들의 문제점을 지적할 입장이 아니다. 연구자들이 제공한 연구 결과를 갖고 힘닿는 대로 의미 있는 이야기를 엮어내는 것이 내 몫이다. 그러나 조선 망국의 내재적 요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태도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마치 어두운 골목에서 ‘퍽치기’라도 당한 것처럼 봐서는 ‘망국’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 1259년 고려가 근 30년의 항전 끝에 몽골족에게 항복한 것도 일종의 ‘망국’이었다. 1637년 조선이 만주족에게 항복한 것도 ‘망국’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위기 속에서 한민족은 정체성에 다소간의 손상을 겪었지만 결국 극복해 냈다. 1910년의 ‘망국’은 과연 어떤 위협을 가져왔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데 부적절한 애국심의 지나친 개입이 장애가 된다. 위기의 성격이 파악되지 못한 채로는 극복도 있을 수 없다.
19세기 후반에 일본을 경유해 한국을 덮친 서양 근대문명은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한국보다 힘과 덩치가 훨씬 더 큰 중국조차 그 위세 앞에서 1840년경부터는 자세가 흔들리고 1860년경부터는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위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었다. 조선이 아무리 굳건한 체제를 지키고 있었더라도 정체성의 큰 훼손과 그에 따른 변화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홍수가 덮친 상황을 떠올려 보자. 어떤 구조물도 파괴를 면할 수 없는 큰 홍수가 덮친 상황을. 어느 누구도 원래의 자리에 원래의 자세대로 서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죽어버리고 마는 것은 아니다. 모두 고생을 겪고, 더러 죽거나 다치기도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 목숨을 지키고, 생활 방식을 바꿔서라도 새로운 조건에 적응한다.
홍수를 당한 사회의 조직, 특히 그 지도부의 대응 방식에 따라 피해 양상에 큰 차이가 생긴다. 지도부가 자기네만 살겠다고 민중의 피해를 외면함으로써 불신을 살 경우 피해가 극대화됨과 동시에 조직이 무너져버리고, 민중의 신뢰를 얼마나 지키느냐에 따라 피해도 줄고 조직도 살아남을 수 있다.
13세기에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한 몽골 정복은 고려에게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무신정권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항복 후의 고려가 민족과 국가의 뼈대를 지키며 발전의 길을 찾은 사실에 비춰보면 오히려 무신정권의 지도부 역할에 후한 점수를 줘야 할 것이다.
19세기 후반 서양 근대문명의 침공도 조선에게 피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대응 방식에 따라 피해의 규모를 줄일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대응의 1차 주체인 왕조국가의 대응이 시원치 않았기 때문에 골절상 정도로 겪어낼 만한 충격 앞에서 민족사회가 사경을 헤매는 중상을 입게 되었다.
우리 민족사회는 이 부상에서 아직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남북의 분단 상황을 필두로 양쪽 국가의 구조적 문제들 중 100년 전의 충격에서 유래하는 것이 많이 있다.
분단을 비롯한 제 문제의 극복을 위한 노력이 꾸준히 있어 왔다. 그러나 극복은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는 상황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극악한 상황을 조만간 벗어나더라도 민족사회의 제 문제를 획기적으로 극복할 길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 답답한 상황이 우리가 근대적 가치관에 묶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전통의 가치를 외면한 채 뿌리 없는 근대적 가치만을 쳐다보고 있어서 서로 상치되는 근대적 제 가치의 갈등을 뛰어넘는 길이 구조적으로 막혀 있는 것이 아닐까? 일본을 모델로 한 경제 발전과 미국을 모델로 한 정치 발전에 한계를 느낀다면 이제 ‘우리 길’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나친 애국심에 휘둘리지 말고 망국의 상황을 좀 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바라볼 것을 내가 주장하는 것은 전통의 가치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망국 과정에서 전통 질서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것은 일차적으로 왕조 체제의 퇴화 때문이었다. 전통의 가치 자체가 부실한 것이어서가 아니었다.
홍수가 닥쳤을 때, 사회 전체의 피해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개인의 더 큰 피해를 감수한 사람들이 있었다. 반대로 혼란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노리며 사회의 피해를 더 크게 만든 사람들이 있었다. 홍수가 지나간 뒤 새로운 상황에서 공익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고 사익만을 좇는 사람들이 사회를 계속 좌지우지한다면 그 사회는 홍수의 피해를 극복하기는커녕 홍수 자체의 피해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공익을 받든 사람들의 노력이 좌절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좌절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노력이 무의미한 것이었다고 폄하해서는 그와 같은 방향의 노력이 지금 다시 일어날 길마저 막히고 만다. 조선 왕조의 국가 기능이 얼마나 퇴화된 상태였는지 밝히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첫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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