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유엔에는 192개 국가가 가입해 있다. 남극대륙을 비롯한 약간의 특수지역을 제외한 지구상의 육지 모두가 이 192개 국가의 영토로 나뉘어 있다. 전 세계가 배타적이고 평등한 주권을 가진 국가들로 분할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약간의 예외를 빼고는 각 국가의 영토가 하나씩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20세기 후반에 빚어진 상황이다. 100년 전에는 주권국가의 영토보다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가 더 많았다. 그리고 200년 전에는 ‘국가’라 부를 만한 정치조직을 가지지 않은 지역과 주민이 더 많았다. 300년 전에는 유럽에조차 오늘날 통용되는 국가의 개념이 적용될 만한 곳이 몇 안 되었다.
국가는 고대세계에서 만들어진 제도다. 외적 규범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제도다. 국가의 요건을 결정하는 일반적 기준도 없었다. 다만 같은 문명권 안에 여러 개 국가가 존재하는 상황이 되면 상호 교섭을 원활히 하기 위해 다소간의 프로토콜이 형성되었지만, 각 국가의 내부 구조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자연발생적 정치조직으로서 국가의 기본 기능은 국내 질서의 유지였다. 그런데 근대로 접어들면서 유럽에서 국제 경쟁의 주체로서 기능이 더 큰 국가들이 나타났다. 14세기 후반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격감을 계기로 기존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여러 방면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지역 간의 경쟁이 심화된 결과였다.
항해활동, 식민지 획득에서 산업화에 이르기까지 지역 간 경쟁이 장기화되고 일상화되면서 경쟁에 적합한 정치조직 형태가 우승열패의 과정을 통해 좁혀졌다. 그것이 민족국가를 틀로 하는 ‘근대국가’였다. 특히 19세기 산업화 단계에서 국가의 기능이 극대화되어 ‘국가주의’ 시대를 열었다.
19세기는 원자론의 시대이기도 했다. 19세기 벽두에 돌턴이 발표한 원자론은 자연 정복을 꿈꾸는 자연과학 숭배의 절정을 가져왔다. 똑같은 원자들의 조합 속에서 물질의 궁극 원리를 찾아냈다는 환상이 정치사상까지 휩쓸었다. 사회를 독립적 개인의 물리적 조합으로 보는 자유주의의 득세와 함께 국제관계도 세계를 배타적 주권국가들의 물리적 조합으로 보는 만국공법 체제가 대세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산업화의 확장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경쟁 열기가 전 세계를 휩쓰는 가운데 승패의 결정적 열쇠는 근대국가의 효율성에 있었다. 독일처럼 급조된 국가라도 근대적 효율성을 갖추면 강자가 되었고, 러시아처럼 오래된 국가라도 그러지 못하면 약자가 되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 더 오래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도 같은 상황이 닥쳤다.
전근대 국가에 비해 근대국가는 ‘공동사회’(Gemeinschaft)보다 ‘이익사회’(Gesellschaft)의 성격을 강화한 것이다. 공동사회의 원리를 고도로 구현한 유교 정치 질서는 이익사회로의 전환에 특히 강한 저항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에서 중국과 한국보다 일본이 적응에 유리한 입장이었다. 일본에도 이익사회화에 대한 저항이 있었지만 인접국들에 비해 적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근대국가 건설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다.
공동사회 성격의 국가에서는 권위와 권력의 분리가 관념상 용납되지 않았다. 아무리 군주가 무능하고 조정이 부패했더라도 군주와 조정을 통하지 않는 개혁 시도는 최악의 범죄, ‘대역(大逆)’이었다. 공화제도 입헌제도 긴 세월을 통해 농업사회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해 준 문명의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천황의 권위와 막부의 권력 사이의 분리를 경험해 온 일본에서는 전통의 저항이 덜했다.
중국과 한국의 권위주의적 유교 정치 질서에는 주기적 왕조 교체가 불가피했다. 도덕적 권위가 군주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권위의 재생산이 힘들었고, 권위의 발판 위에 권력이 운용되었기 때문에 권위의 손상이 권력의 쇠퇴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 왕조의 권위와 권력이 쇠진하면 왕조 교체를 통해 권위와 권력을 일신하는 과정을 거쳤다.
19세기의 청나라와 조선은 왕조의 말기 상황에 빠져 있었다. 조선이 청나라보다도 더 심했다.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엘리트계층은 사회의 보전을 위해 노력을 일으키기 마련이고 이런 노력의 대부분이 ‘근왕(勤王)’의 방향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군주와 측근세력은 이 노력을 권력 사유화의 심화에 이용하기만 했다.
‘서세동점’의 모습으로 닥쳐온 세계적 ‘근대화’의 물결 앞에 동아시아 전통의 흐름은 큰 굴절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십 년만의 큰 홍수 앞에 논밭을 지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논밭이 떠내려가더라도, 복구 노력에 힘을 잘 모으는 사회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반면, 개인의 이해관계에만 매달려 힘을 모으지 못하는 사회는 훨씬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개인주의를 억제하는 유교 정치의 전통은 한국 사회에 닥친 충격을 완화하고 극복을 쉽게 해줄 수 있는 문화적 자원이었다. 이 전통을 앞장서서 짊어지는 것이 유생층과 그에 기반을 둔 관료층이었다. 조선 망국의 날까지도, 그 이후에도 이 전통을 짊어지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뜻이 의병과 자결보다 더 효과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없었던 것은 그 뜻을 집약해 구현해야 할 왕조 체제가 퇴화해 있기 때문이었다.
1905년 보호조약을 맺을 때 의정부 8대신 중 확고히 반대한 것은 한규설 하나뿐이었다. 당시 대신의 대부분은 정상적 유교국가에서 대신의 반열에 오를 만한 교양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고종 즉위 전,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위세를 떨칠 때만 해도 이런 정도 인물들을 대신으로 줄줄이 늘어앉힌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종 치세를 통해 조선 정부의 탈유교화가 꾸준히 진행된 결과였다.
유교 자체에 절대적 가치가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부자가 망해도 3년 먹을 것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5백 년 동안 조선 크기의 나라가 그만한 안정을 지켜왔다는 것은 인류 역사상 드문 일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질서의 원리를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원리가 조선시대를 통해 유가 이념으로 표현되어 왔기 때문에 망국에 임해서도 한국 사회를 보호하는 역할을 유가 이념에서 우선 기대하는 것이다.
유가 이념보다 더 일반적이고 현대인에게 익숙한 표현을 쓰자면 ‘엘리트계층의 도덕성’이라 할 수 있다. 완력이든 재력이든 정보력이든 남들보다 힘을 더 가진 유력계층일수록 사회를 보호하는 데 책임감을 느끼는, 공익을 중시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은 억지로 강제되는 도덕이 아니라 건강한 사회의 자연스러운 추세다. 소속한 사회가 보전됨으로써 가장 큰 이익을 얻는 것이 유력계층이기 때문이다.
유력계층 구성원들이 공익을 중시하는 도덕성을 잃고 사익에만 매몰됨으로써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사회의 신뢰가 무너지면 그 속에서 모든 사람이 함께 겪는 손해가 개인의 이익보다 더 크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약간의 이익을 볼 뿐이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집단의 손실을 초래하는 ‘죄수의 딜레마’ 현상이다. 조선 사회를 지탱해 온 질서의 원리가 죄수의 딜레마를 면하게 해줄 수 있는 자원이었다.
100년 전의 망국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한국 사회가 아직도 죄수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토 전체를 황폐하게 만드는 4대강 사업, 결선투표제 도입과 비례대표제 확대 등 누구나 필요를 인정하는 대의민주주의 개혁의 방치, 그야말로 소수 집단에게조차 이익이 안 될 남북 대결정책 집착 등, 대한제국 지도부를 방불하는 퇴행적 행태가 지금도 펼쳐지고 있다.
식민지가 되었다는 ‘결과’보다 식민지가 되던 ‘과정’을 더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그때고 지금이고 사회의 장래를 결정하는 1차적 요인은 힘 있는 사람들의 행동양식이다. 그때고 지금이고 힘 있는 사람들 중에 공익을 중시하고 사회를 보호하려 애쓴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의 노력이 지금 왜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때 그런 사람들의 노력이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기에 처한 사회를 구하는 데는 적극적 자기희생으로 의병과 독립운동에 나서는 사람들의 몫도 있지만, 스스로를 보통사람으로 여기며 소박한 원칙과 자연스러운 상식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몫이 더 크다. 이민족의 지배를 피하고 싶어 하던 그 많은 사람들의 뜻이 어째서 이뤄지지 못했는가? 국가 부채가 자꾸 늘어나고, 자연 환경이 파괴되고, 민족 문제 해결이 지체되는 일을 피하고 싶어 하는 오늘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100년 전의 실패를 세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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