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 나라를 잃는다 함은 왕조국가 조선의 멸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100년 후의 우리에게 그 왕조국가 자체를 아까워하는 마음은 별로 없다. 망국 10년도 안 되어 독립운동의 주류는 대한제국의 복벽에서 대한민국의 건설로 옮겨왔었다.
조선 왕조의 멸망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왕조국가가 당시 한민족의 가장 큰 상징이었고, 한민족 사회의 전통 질서를 집약한 제도였기 때문이다. 상징으로서 왕조의 멸망은 이민족 지배의 계기였고, 제도로서 왕조의 멸망은 전통 질서의 단절이었다.
망국 단계 이전 왕조의 퇴화 현상을 먼저 살펴본다. 왕조 전기의 정치사회 제도는 중국에서 도입된 유교 정치이념을 한국 사회에 적용한 것이었다. 농업사회의 안정과 번영에 극히 유용한 유교 정치이념은 11세기에서 18세기까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문명권이 세계 최고 최대의 문명으로 발전하는 데 공헌했다. 한국 사회는 14세기 말 조선 건국을 즈음해 이 문명권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수백 년간 높은 수준의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15~16세기 한국 사회의 상황에는 유교 정치 질서가 적합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에는 상황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 조선의 망국은 그 사이의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런 적응 실패의 문제를 살핌에는 새로운 상황의 요구 내용을 파악하고 기존 체제가 이 요구에 제대로 부응했는지 따지는 쪽으로 시선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시대적 요구인 ‘근대화’의 과제에 어떻게 임했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다.
물론 매우 유효한 관점이다. 그러나 근대화 과제의 내용을 후세 사람의 기준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당시의 상황을 음미하는 데는 시야의 한계가 있다. 변화 주체의 주체성을 근본적으로 제약하는 관점이다. 망국 과정에 대한 연구와 고찰이 이 관점에 지나치게 쏠려 온 데 아쉬움을 느낀다.
조선 왕조 아래 한국 사회가 누린 안정과 번영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많지 않은 높은 수준이었다. 상당한 성공을 거둔 체제였다. 성공적인 체제라면 변화에 대한 적응력도 뛰어날 것을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 변화를 위한 동력도 쉽게 찾을 수 있고 변화에 대한 합의도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발전론에서 후진국이 선진국을 추월하는 현상을 근래 많이 살피게 되었다. 아브라모비츠의 캐치업(catch-up) 이론에서 말하는 사회 역량(social capabilities) 같은 무형적 자산이 갈수록 각광받고 있는 것도 그런 현상의 일부다. ‘근대적’ 질서와 다른 종류의 질서라도 나름대로 수준 높은 질서는 사회 발전을 뒷받침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무형적 자산이 각광받게 되는 상황 자체가 지금의 탈근대(post-modern) 추세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근대적 발전의 의미가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을 때는 활용될 길이 없던 문명 역량이 새로운 발전의 의미를 추구하는 단계에서는 요긴한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전통의 가치를 다시 되돌아보는 노력이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전통의 가치를 되돌아보는 시각은 극단적 부정에서 극단적 긍정까지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는 부정적인 쪽으로 많이 편향되어 있다. 일본의 식민주의 관점과 함께 근대유럽의 독선적 문명관으로부터 20세기의 대부분 기간을 통해 압력과 충격을 받은 결과다. 그리고 이 관점이 대한민국의 특권구조 유지에도 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편향성의 보정이 지체되고 있다. 뉴라이트가 전통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지금 단계에서는 극단으로 치우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긍정의 관점을 시도하는 것이 편향성 보정을 위해 필요한 일 같다. 이 시대의 구체적 상황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기반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이 시대의 윤곽에 대한 어렴풋한 파악을 근거로 해서라도 새로운 시각의 제시에 나설 필요를 느끼는 것이 그 때문이다.
내가 파악하는 윤곽이란 이런 것이다. 조선 왕조의 성립 과정에서 상당히 수준 높은 문명 질서가 한국 사회에 자리 잡았다. 수준 높은 질서인 만큼 변화에 대한 적응력도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질서가 왕조 중기 이후 꾸준히 퇴화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19세기 중엽까지 적응력이 매우 약한 상태에 이르렀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침략에 직면해서는 진로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역량을 거의 발휘하지 못한 채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항기의 상황만을 놓고 볼 때 한국 사회의 대응은 매우 무기력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한국 학계에서 그나마 평가받아 온 대응이란 전통의 가치를 부정하고 시대의 요구에 순응하는 ‘개화’였다. 전통의 가치를 지키는 노력은 ‘수구’로 폄하되었다. 어느 사회의 어느 변화에서도 전통을 등지는 개화는 ‘자기 부정’이라는 정체성의 질곡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 개화의 성공은 바로 식민지화를 향하는 길이다. 어떤 형태의 식민지화든.
개항기의 무기력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다. 20세기를 통해 한국 사회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고, 그 발전은 국가체제가 이끌어준 것이 아니라 ‘사회 역량’의 자발적 발현에 의한 것으로 나는 본다. 그 역량이 개항기에 제대로 발현되지 못한 데 당시의 역사적 상황이 작용했음을 확인한다면 그 역량의 존재를 확인하기 쉬울 것이다.
이 사회 역량의 실체를 표현하는 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정신으로 일단 생각한다. 이 정신이 정치체제에 나타난 모습이 근대 정치사상의 관점에서는 사회주의라 할 것이다. 자유주의-개인주의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어느 사회에나 재력과 무력과 정보력을 집중적으로 보유한 유력 계층(‘엘리트 계층’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우에는 도덕성이 전제가 되는 것이 통념이므로 보다 중립적인 표현을 쓴다.)과 그렇지 못한 무력 계층이 존재한다. 개인의 자유를 표방하는 사회에서는 자유의 범위를 명시적으로 제한하지 않더라도 유력 계층이 자유를 집중적으로 누린다. 무력 계층을 억압할 자유를 포함해서.
중국에서 발원한 유교적 신분 질서는 유력 계층이 실력을 키우고 휘두르는 길을 제한하는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생산에 직접 공헌하지 않는 유력 계층의 역할을 억제함으로써 무력 계층에 대한 억압을 최소화하는 이 특성이 중국과 한국 농업사회의 특출한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 것이다.
이 질서의 제도적 핵심은 권력의 공공성에 있었다. 19세기 말 유럽 사회과학자들이 ‘전제주의(despotism)’란 말을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전매특허품처럼 쓴 이래 근대인의 통념이 되었지만, 유교 정치 질서의 원리가 결코 ‘전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근래의 연구로 충분히 밝혀져 왔다.
조선 후기 유교 질서 퇴화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권력의 사유화’에 있었다고 나는 본다. 권력의 공공성은 사회 내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지키기 위한 필수적 기반 요소다. 권력의 사유화는 광해군 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된 현상이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정조는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성격을 가진 권도(權道) 정치를 시도했다. 이 시도가 좌절된 후 19세기의 조선은 권력의 공공성이 완전히 증발되어 버린 상황을 보여주었다.
균형과 조화의 매체인 권력의 공공성과 유력 계층의 역할을 제한하는 도덕 정치의 원리가 조선시대 대다수 한국인에게 사람다운 삶을 보장해준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요소의 퇴화가 19세기의 변화에 대한 한국 사회의 대응을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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