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항녕 교수, 실컷 씹어놓고 나서 끝에 “콤플렉스 없는 역사 서술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깊은 동료애를 느낀다”는 말에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나도 열심히 씹히면서 그에게 깊은 동료애를 느꼈으니까. 그의 <조선의 힘>을 읽을 때보다도 더.
공유하는 것이 (그리고 피차 안 가진 것도) 많음을 확인하기 때문에 동료애를 느끼는 것이다. 짧지 않은 서평인데도 싱거운 얘기 없이 짭짤한 얘기로 꽉꽉 차 있는 것 역시 그 때문일 게다.
한 차례 읽고 나서 그의 논평에 대한 내 이런저런 생각을 다음 주에 정리해 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번 다시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모처럼 오 교수와 얽히는 글 올릴 기회가 된다면 <조선의 힘>에 대한 내 생각까지 얹어 제대로 답례를 해드려야겠다. 며칠은 시간을 내야 할 텐데, 앞으로 몇 주일은 <해방일기> 때문에 형편이 안 되겠다.
오 교수와 단둘이 나누는 얘기라면 몇 주일이라도 형편 될 때를 기다리겠지만, 독자들도 계시지 않은가. 그래서 오늘 오전 시간이라도 써서 긴 댓글 하나를 달기로 한다.
‘국가’, ‘권위’, ‘권력’ 등의 개념에 대한 생각의 차이부터 짚어보자.
오 교수도 국가를 문명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시스템 속에서 “매우 유력한 힘을 갖는 제도”로 인정하기는 하지만 나처럼 그 비중을 크게 보지는 않는 것 같다. 동아시아 전통문명에서 국가의 역할은 다른 전근대 세계에서 거의 유례가 없는 큰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명의 위기가 닥쳤을 때 국가 이외의 공동체나 제도에서 대안을 찾기 어려울 만큼 국가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사실 500년을 이어온 나라가 운명이 다할 때,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새로운 모색을 하게 된다. 사람들의 삶의 영역은 왕조만이 아니라, 가족(가문), 사회, 고향, 나라 등 다양한 영역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굳이 왕조에 집착하지 않는다. 당연히 조선 왕조에서 벼슬한 사람들이나 조선에 가치를 부여한 사람들이 자결을 하거나 의병을 일으킨다. 그러나 식민지 상황으로 넘어가면 왕조로 돌아가는 복벽운동이 아닌 독립운동으로 저항운동의 대세가 바뀌게 된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예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왕조에 대한 집착과 국가체제에 대한 집착은 다른 것이다. 사람의 집착은 익숙하고 구체적인 것을 향한다. 조선 왕조가 아직 눈에 보일 때는 조선 왕조에 집착했고, 눈에서 사라지자 민족국가에 매달렸다. 조선 왕조 없어졌으니 이제 개인, 가족이나 고향, 지역만 생각하며 살자고 식민 지배자들은 권장했고, 그에 따라 국가체제에 대한 집착 없이 살아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민족의 관점에서 ‘친일파’로 흔히 몰아붙이지만,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국가 없이, 또는 이민족 국가 아래 살아가는 데 문제를 느끼지 않는 것이 문명의 관점에서 병리적 현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국가를 절대화해서 개인의 자유조차 국가 앞에서 무시하는 국가주의도, 개인을 절대화해서 개인 앞에서 국가의 효용조차 무시하는 개인주의도 내가 배척하는 것은 균형과 조화를 벗어나는 공허한 관념이기 때문이다. 공허한 관념에 휩쓸리는 것은 문명의 전통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인구밀도가 포화상태에 이르고도 오랫동안 원만하게 굴러온 데는 국가의 역할이 컸다. 그 역할이 온전치 못하면 사회가 총체적 난국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동아시아 문명 전통에서 국가 외의 공동체나 제도는 그리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음으로 ‘권력’과 ‘권위’의 관계에 대해 오 교수와 나는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왕권은 원래 신권보다 강한 것이다. 관료제의 정점에 군주가 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바로 그렇게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국왕의 수양을 강조했던 것이다.” 하는 오 교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나는 같은 현상을 다른 시각에서 봄으로써 더 큰 의미를 뽑아내고 싶다. ‘권력’과 ‘권위’를 분석해서 보자는 것이다.
왕조의 창업 시점에서는 군주의 힘이 신하들의 힘보다 커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신하들의 힘이 군주의 힘에 맞서 연합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신하들의 힘의 총합은 언제나 군주의 힘보다 크다. 수성의 안정기에 들어서면 신하들은 연합할 기회를 많이 가지게 되고 군주의 힘은 후계자로 내려오면서 줄어들기 마련이다. 6~7세기 중국의 남조에서 수십 년 주기로 적나라하게 벌어진 현상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혼란을 억제하고 질서와 안정성을 늘리기 위해 현실의 힘을 초월하는 이념적 권위가 ‘천명’의 이름으로 만들어졌다. 현실적 권력은 크든 작든 자기 힘을 발휘하지만, 이념적 권위는 절대적 지위를 누려야만 효용을 가진다. 그래서 오 교수의 위의 말을 나는 이렇게 바꿔서 보는 것이다. “왕권은 신권과 다른 차원의 존재다. 관료제의 정점에 군주가 있었던 것은 현실적 권력의 혼란을 억제하기 위해서였다. 국왕의 수양을 강조한 것은 이 차별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조광조는 권위를 추구했고 송시열은 권력을 추구했다고 나는 보는데, 오 교수가 반대로 보는 것이 이 시각의 차이에 있는 것 같다.
“분명히 조광조 등은 정치권력을 지향했다. 아니면 과거 시험은 왜 보고, 현량과는 왜 설치하겠는가.” 맞다. 오 교수 말대로 인간이 권력을 지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누구나 지향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은 굳이 언급할 의미가 없는 일이다. 왕권과의 관계에서 의미가 있는 것은 왕권에 종속하는 방향이냐, 왕권을 극복하는 방향이냐 하는 차이다. 내가 보기에 조광조는 왕권을 뒷받침하는 권위의 하부구조를 구축하는 데 힘을 집중하고 정치구조 변화의 도구로 삼을 만큼 권력을 중시하지 않았다.
강양구 기자가 오 교수 글을 받아놓은 뒤 나랑 통화할 일이 있을 때 조심스럽게 한 마디 했다. “글을 받아보니까 예상 외로 선생님 관점에 대한 반박이 많던데요? 보고 너무 서운해 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가 대답했다. “설마 우암 옹호에 너무 열 올리신 건 아니겠지? 그것만 아니면 괜찮아요.” <조선의 힘> 읽으면서 송시열에 대한 관점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는 인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읽어보니 송시열 얘기가 그리 많지 않아 다행이다.
“송시열? 권력 사유화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이다. 효종-현종-숙종대 정치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송시열을 놓고 '권력 사유화'라는 말은 못한다. 효종-현종-숙종 내내 송시열은 가시방석이었다.
나중에 경종이 되는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는 말 한 마디로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르지 않았던가? 이런 말, 결코! 요즘 우리가 아는 '정치적인 사람'은 절대 못할 일이다. 아니 안할 일이다. 필자의 말대로 '권력을 사유화'한 사람은 이렇게 당하지 않는다. 곧잘 잘난 척하는 평자였다면 아마 입 다물고 몸보신했을 것이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것이 바로 권력을 가지는 증세 아닌가? 내 책에서 얘기한 ‘권력’이란 주어진 질서 안에서 누리는 크고 작은 힘을 말한 것이 아니다. 기존 질서에서 벗어나거나 바꿀 수 있는 힘을 말한 것이다. 서원을 중심으로 한 사림의 권력화에 중심 역할을 한 것이 송시열의 큰 역사적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림이 조정과 별도의 권력구조를 세운 것은 송시열이 왕권에 대항하는 별도의 권위를 세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 교수는 조광조에 대해 언급했던 것처럼 송시열이 권력을 추구한 사실도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할 것이다. 다만 “권력 사유화”의 뒤쪽 단어가 거슬린 모양이다. 그러나 ‘사유화’ 자체는 도덕적 평가가 개재된 말이 아니다. 조정의 공권력과 별도의 권력구조가 민간에 생겼다면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사유화’다. 그것이 바람직한 일이었는지는 역사의 맥락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송시열과 그 추종자들의 권력 사유화가 역사의 흐름에 끼친 부정적 효과를 중시한다. 그 효과를 오 교수가 다른 면에서 평가하는 것은 좋지만, 위에 인용한 정도의 논거로 ‘권력 사유화’를 부인하지는 말기 바란다.
생각이 다른 점을 열심히 밝혀 얘기했지만, 오 교수 글이 정말 반갑고 고맙다.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절실한 도움을 많이 받는다. 통념에서 벗어나고자 애쓰면서도 투철하지 못했던 점의 지적은 특히 절실하게 느낀다. 혼자 틀어박혀 일하는 것이 걸리적거리는 것 없어서 좋지만 이런 좋은 피드백 기회를 많이 가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말 아쉽다. 작업하면서 <프레시안>에 연재하고 그를 통해 다소의 피드백을 일으킴으로써 원고를 많이 고쳤지만, 역시 한계가 있었다. <해방일기> 작업에서는 피드백 활성화를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다만 한 가지 오 교수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나처럼 ‘밖에서 보는’ 사람이 가진 유리한 면도 좀 더 유의해서 봐주기 바라는 것이다. “왕권이 중간 권력의 힘을 통제함으로써 서민을 보호하는 역할이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핵심”이라는 내 관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공산정권 하의 중국에서는 하나의 표준적 관점으로 제기된 것이다. 급히 쓰는 댓글이라 참고문헌을 지금 대지는 못하지만, 작년에 번역한 안핑 친의 <공자 평전>(돌베개 근간) 같은 책에도 이런 관점이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다.
오 교수와 내가 면식도 없이 동료애를 느끼는 것은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역사 인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같이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일상 작업에서 ‘배척’보다 ‘포용’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는 충고를 덧붙이고 싶다. 배척할 것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배척보다 포용이 작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덧붙인 말이 뜬금없는 것 같아서 눈에 띄는 대로 예를 하나 든다. ‘유교’라는 말에 대해 “이 용어가 유학(儒學)의 종교성을 부각시키고 천황제의 근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앞으로 평자는 '儒家' 또는 '儒學'이라고 쓴다.”고 덧붙였는데, 내가 보기에 ‘유가’, ‘유학’, ‘유교’ 모두 전통시대의 용례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서양문명이 들어온 후 ‘유교’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근대적 상황이 여러 모로 작용한 결과이지, 몇몇 음모자들의 획책이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도 이 말이 다른 말보다 편리한 점을 굳이 무시하고 퇴출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도 비슷한 예가 되겠다. 전통시대에 광해군의 폄하가 심했던 상황은 명백한 것이고, 이를 보정하는 노력은 일본 학자의 것이든 누구의 것이든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당시 상황과 연구자의 입장에 따라 지나쳤던 거품은 제거하더라도, ‘딱지붙이기’로 끝낼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인색해서는 병든 관점을 무너뜨릴 수는 있어도 건강한 관점을 세우는 데는 아쉬움이 있기 쉽다.
덧붙이는 글
지난 주 오 교수의 서평을 보고 서둘러 글을 쓴 까닭은 제대로 응답하기 위해 시간을 넉넉히 쓸 형편이 당분간 어렵다고 생각해서였다. 댓글 정도로 일차 응답을 해놓고 형편이 괜찮을 때(한 달 이상 지난 뒤) 제대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서평 자체도 내용이 빵빵한데다가 감명 깊게 읽었던 오 교수의 책 <조선의 힘>에 관한 내 생각도 엮어서 쓰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댓글로 붙이기에 너무 긴 글을 <프레시안>에 보냈더니 이번 주에 별도 기사로 올리겠다고 한다. 아직 <조선의 힘>도 다시 꺼내보지 못한 채로 어정쩡하기는 하지만, 일단 서평 자체에 대한 직접적 응답이라도 보완을 좀 해놓아야겠다. <조선의 힘>에 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해야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강양구 기자는 오 교수의 글을 받아본 뒤 "비판적인 내용이 뜻밖에 많다"고 했고, 독자들 중에도 그런 인상을 더러 받은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읽어봐도 비판보다 공감이 더 강하게 느껴진다. 내가 너무 낙천적인 성격인가?
무엇보다도 근대주의적 관념에서 벗어날 필요와 전통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필요에 대한 공감, 이것이 내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오 교수는 한국사 연구자들 중 이런 필요에 대한 인식이 특출하게 뚜렷한 분 같은데, 더 많이 확산되기 바란다.
총론에서 합치하기 때문에 각론에서의 차이가 더 뚜렷하게 느껴지고 비판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각론'이라고 하기가 어색할 정도로 총체적인 문제가 조선 후기 노론 중심의 질서 체제에 대한 해석과 평가다. 나는 이 체제가 진정한 '전통'에서 퇴화한 측면을 중시하는데, 오 교수는 이것을 '전통'의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먼저 납작 엎드리고 봐야겠다. 적어도 조선 후기의 역사를 놓고는 오 교수는 전문 연구자고 나는 평론가다. 17~18세기를 전통의 쇠퇴기로 내가 보는 것은 전체적인 그림이 그럴싸해서이지, 인과관계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있어서가 아니다. 오 교수의 관점이 정확한 것일 개연성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전제 하에 모든 지적 사항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대충 검토해 본 결과, 내 관점을 꼭 바꿔야만 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가 잘못된 통념을 벗어나려 애쓰다가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주저앉는 것 같다는 소감을 오 교수가 표한 대목이 두어 곳 있는데, 나는 지나친 허물보다는 모자라는 허물을 감수하려고 애썼다. 확실한 생각이 따로 들지 않는 한 기존 연구의 통상적 관점을 디폴트로 받아들였다.
앞서도 언급했던 광해군 평가를 예로 든다. 나는 10년 전 나온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보고 광해군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페리스코프>에 "광해군의 파병, 노무현의 파병"이란 글을 한 차례 쓴 일이 있는데, 광해군을 높이 평가하는 관점에서 쓴 것이다. 그러다가 연전에 <밖에서 본 한국사>를 쓸 때는 조금 의문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광해군, 임금에게는 무능도 죄"라는 제목으로 평가를 제한해서 썼다. 그리고 이번에 <망국의 역사>를 쓰면서는 오 교수의 <조선의 힘>을 보고 평가를 더욱 제한하게 되었다.
인조반정 후 서인-노론 체제 하에서 광해군이 지나친 폄훼를 당한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고 부당한 폄훼 사실이 밝혀졌다는 이유만으로 광해군을 극도로 찬양할 일도 아니다. 적절한 평가는 폄훼와 찬양의 중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광해군의 역할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었을 것이다.
노론 체제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 체제가 전통의 흐름에서 본류였다고 나도 보고, 그것을 전통의 실체로 보는 오 교수의 관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실체라고 해서 그 병리적 현상을 묵살할 수는 없다. 쇠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면 대안이 필요하게 된 측면을 강조해서 실체로서의 의미를 제한해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병리적 현상을 판단할 기준으로 나는 "중국과 한국의 유교 질서는 군주와 평민 사이에서 중간 권력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핵심적 원리가 있었다"고 하는 '유교국가론'을 제시했다. 오 교수는 이 관점을 단호히 부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다. 유가의 정치 이론에는 왕권이든, 중간 권력이든 공도(公道)에 어긋나면 통제한다. 그 공도 또는 천리(天理)를 익히는 것이 공부이고, 그 공부를 통해 세상을 바로잡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교목지가(喬木之家, 존경 받는 명문가)를 말했고 입현무방(立賢無方, 편견 없는 인재등용)을 가르쳤다. 그뿐이랴! 임금답지 못한 임금은 그저 필부(匹夫)에 지나지 않는다는 역성혁명의 논리도 함께 전해 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내 관점에 대한 부정으로 보이지 않는다. 역시 내가 너무 낙천적인가?
조선 후기 역사에 대해 내가 기본적으로는 연구자 아닌 평론가다. 그러나 평론가라 해서 연구자의 입장을 아주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중국 고대사 관련 주제를 연구자 입장에서 공부한 일이 있고, 여러 해 동안 연구자 입장에서 벗어나 역사를 개관하는 공부를 해왔기 때문에 조선 후기사 연구자들의 손이 쉽게 미치지 못하는 관점을 더러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론이나 그렇듯 내가 제시한 유교국가론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이론이란 정당성이 아니라 타당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니까. 나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이론을 제시했고, 그 기준으로 보면 노론 체제의 병리적 현상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 이론이 오 교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못지않게 타당성 있는 관점을 제시하기 바란다. 들어본 적이 없는 관점이라 해서 무조건 내칠 것이 아니다. 오 교수는 학계에서 다수의 동의를 아직 받지 못하는 참신한 시각을 많이 내놓고 있는데, 그 시각의 서술에 나처럼 타당성 있어 보이는 관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근대주의에서의 탈출이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아직 시작 단계다. 오 교수가 얘기하는 역사 공부의 목적, (1) 재미있어서, (2) 교훈을 얻기 위해, (3)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 세 가지가 모두 근대주의 탈출을 통해 증진될 것을 나는 기대한다. 오 교수 같은 분들과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앞으로 더 많이 나눌 수 있게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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