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참여당 창당 무렵부터 유시민을 보지 않고 지냈다. 전화 통화도 없었다. 나랑 얘기 나눌 여가가 없을 것 같아서 연락을 않게 되었고, 그로부터도 역시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김해 재보선 실패를 보면서 그가 정치판 떠날 전망을 떠올리게 되었고, 작년 총선에서 당선될 길 피하려고 기를 쓰는 것을 보며 시간문제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달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그만둔다는 그의 발표가 전혀 놀랍지 않았다.

 

정작 놀란 것은 지난 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받아 보고서다. 무엇보다, 직업으로서 정치를 그만두면 ‘지식소매상’의 직업으로 돌아올 것을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지식소매상의 작업이 아니다. ‘유통’이 아닌 ‘생산’의 영역이다. 이 책 하나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저술활동에서 생산적 측면에 치중하려는 기세를 이 책에서 느낀다.

 

물론 그가 표방한 ‘지식소매상’이 24시간 편의점처럼 상품 종류와 진열 방식까지 본사 지침에만 따르는 백퍼센트 유통업은 아니다. 이웃들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가게를 꾸미고 상품을 고르는 동네 구멍가게를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들여놓는 상품 사이사이에 자기 손으로 만든 물건도 끼워 놓고, 거기 손이 가는 손님이 있으면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속으로는 ‘지식공방(工房)’을 염원하면서 겉으로 ‘지식소매상’ 간판을 내걸었을 것이다.

 

간판만 소매상으로 걸었을 뿐 아니라 가게가 공방 아닌 소매점 모습을 지키도록 의식적 노력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읽은 그의 책 몇 권에서 일관되게 느껴 온 자세다. 들여놓은 상품, 즉 수집한 지식만으로 찾아온 손님을 만족시키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자신의 생각은 포장방법에서나 나타날 정도로 아껴서 내놓는 것이다.

 

이 자세를 그가 ‘비법(秘法)’이라고 자랑하는 ‘거리 두기’(88-89쪽)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비법이 “좌절감, 패배 의식, 상실감, 절망감, 외로움, 자기 비하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책 속에서 자신의 노출을 절제한다면 몇 가지 ‘부정적 감정’을 조절하는 데는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플로베르 작품이었던가? “회상(Reminiscence)”이란 제목의 단편 하나가 가물가물 생각난다. 한 노부인이 교구의 노신부에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온 풍성한 연민의 마음을 치하할 때 그 노신부가 성직에 들어선 계기를 회상하는 내용이 담긴 것이다.

 

너무 예민하고 소심해서 인간관계를 맺을 줄 모르던 청년이 어쩌다 강아지 한 마리에게 마음을 주게 되었는데, 그 강아지가 마차바퀴에 깔려 참혹하게 죽는 모습을 목도하고 충격과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방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으로 걸어 잠근 문 밖에서 아버지가 꾸짖었다. “그런 조그만 슬픔 하나를 견뎌내지 못하면서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는 것이냐?”

 

이 꾸짖음에 청년은 황연히 깨달았다. 인간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직접 겪어내기에 자신이 너무나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래서 성직자가 되어 이웃의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세상을 대하며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갖지 않고 이웃의 기쁨과 슬픔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줌으로써 사랑과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성직자가 되었을 것이다. (40년 전에 읽고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 작품의 정체가 떠오르는 분 계시면 좀 알려주세요. 생각이 나니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데” 목적을 둔 유시민의 ‘거리 두기’가 노신부의 ‘간접적인 삶’과 비슷한 것 아닐까. 그의 글쓰기가 현실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억제하고 건조한 지식의 배열로 자신의 관점만을 제시한 것은 건물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종이 위에는 평면도만 그려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평면도만 보고도 건물 모습을 대충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지식소매상’ 유시민의 책을 통해서만 그를 접한다면 그가 생각한 결과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생각이 이뤄졌는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그는 건물 전체 모습을 최대한 보여주러 나섰다. 이 자세가 이 책 하나에서 끝날 것 같지 않다. 지식을 앞세우는 책을 앞으로 또 낸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노출하는 수준이 전과 달라질 것 같다.

 

그래서 독후감 쓸 생각이 든 것이다. 내 책에 추천사를 세 번이나 실어준 친구의 책에 한 번도 리뷰를 단 적이 없다는 것이 미안하기는 하면서도, 지식을 앞세우는 책에는 나로서 붙일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삶의 의미, 글쓰기의 의미에 대한 자기 생각을 깨놓고 얘기하는 것을 보니 얽혀서 떠오르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는 ‘거리감’ 이야기를 하면서 “검증된 이론이 아니”며, “그저 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론 아닌 실천의 영역이라면 ‘거리’의 실제 의미는 상황에 따라 조절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그의 생각 속에서는 거리 두기가 계속되고 있지만 이제 그 거리는 그만의 거리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거리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닐지.

 

2년 전 김해 보궐선거 후 유시민의 “큰 죄” 발언에 대한 논평을 공개편지 형식으로 쓴 일이 있다. 그 글에 이렇게 적었다.

 

용산 참사 며칠 후 유 선생 서재에 들렀을 때 표정과 기색에서 당신이 나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느낀 일이 생각납니다. 평소와 다른 어눌한 말투로 내게 물었죠. “선생님, 이 세상에 ‘악’이란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요?”

 

이 세상에 어리석음은 있을지언정 ‘악’이란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가 함께 가지고 살아온 생각이 흔들렸던 겁니다. 그 질문에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잊어버렸어요. 나도 악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겠다고 맞장구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첫 질문이 내 마음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것은 얼마 후 <후불제 민주주의>를 받아 봤을 때 그 질문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 책 원고를 막 출판사에 넘길 때 용산 참사가 일어났죠. 그 책의 에필로그 “선과 선의 연대를 위하여”는 참사 뒤에 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악’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쓴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 글에서 당신은 1983년의 서울대 사건을 돌아보며 “최근에 와서야 나는 내가 악한 사람이든 아니든, 실제로 악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반성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잘못된 반성이라고 봅니다.

 

그 사건에서 당신의 역할은 ‘어리석음으로 인한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나는 봅니다. 그리고 그 정도 어리석은 행동은 그밖에도 꽤 있었을 겁니다. 어느 일에나 잘된 면도 있었고 잘못된 면도 있었습니다. 딱 그 한 차례만이 유일하게 “악한 일”이었다고 당신이 살아온 50년 인생에서 격리시키는 것은 당신의 어리석음에 스스로 눈감고 더 이상의 지혜를 포기하는 짓입니다.

 

그 글에서 나는 유시민을 ‘유머리스트’로 본다는 말도 썼는데, 내가 생각하는 유머리스트의 첫 번째 특징은 세상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다. 1983년의 자기 행동을 20여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악한 일”로 깨달았다는 것이 유머리스트답지 못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지적한 것이다.

 

1983년과 2011년의 자기 행동에 자연스럽지 못한 분석적 시각을 들이댄 것도 ‘거리 두기’ 때문 아니었을까?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해? 세상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환상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인데도 역시 넘을 수 없는 벽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는 봤다.

 

새 책에서 그는 두 사건에 대해 전과 다른 시각을 드러내 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행간에서 읽는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전보다는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이것이 ‘거리감’의 철폐는 아니다. 거리감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한 거리감이 아니라 존재의 ‘항상성(homeostasis)’ 유지를 위한 것이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자연과학 개념 갖다 대기 좋아하는 그의 취향이 내게도 옮았나?)

 

지식소매상의 행태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지식의 역할은 매우 좁은 범위에 응축되어 있다. 다시 건축의 비유로 돌아가 본다면, 지식이 벽돌보다 철근의 성질을 갖는 것이다. 건물의 구조는 엄격한 지식으로 구성되지만 벽면은 자유로운 생각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진화론을 적용한 진보와 보수의 개념 설정이 그런 예다. 인간 진화의 초기 단계와 후기 단계를 구분해서 ‘오래된 습성’에 대한 집착을 보수, ‘새로운 습성’을 키우는 자세를 진보로 설명한 것은 (187-188, 250-257쪽) 매우 설득력 있는 관점이다. 진보-보수 현상의 모든 것은 아니라도 많은 것을 아주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관점이다.

 

그 설명 위에서 선택은 열려있다. 그 자신은 야수의 세계를 벗어나는 새로운 습성을 키우고 싶으므로 진보를 택한다. 선악(善惡)이나 현우(賢愚)의 구분에 비해 스스로도 떳떳하고 남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는 관점이다. 예컨대 나는 새로운 습성에 너무 치중하다가 불필요한 병리적 현상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해서 오래된 습성을 잘 지키는 게 낫다고 보는 보수주의자인데, 그가 그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할 것 같지는 않다.

 

연대를 중시하는 것 역시 새로운 습성을 키우는 자세다. 일과 사랑과 놀이는 거의 모든 동물이 하는 것이다. 반면 연대의 습성은 적은 종류의 고등동물이 보여주는 습성이고 인간이 문명을 통해 고도로 발달시킨 기술이기도 하다. (언어가 ‘주먹으로 할 일을 말로 해결’하게 하는 기능을 통해 사회 내부 갈등을 최소화함으로써 인류의 생존력을 높여준 기술이라는 점을 나는 <뉴라이트 비판> 22-23쪽에서 주장한 일이 있다.) 나는 오래된 습성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이지만, 연대를 중시하는 정도의 진보주의에는 열렬히 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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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을 마무리하지 않은 채 놓아둔다. 유 선생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기 전에 써두고 싶었는데 틈을 많이 내지 못했다. 더 손대지 않고 그대로 놔둘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 동안 북리뷰를 매체 게재를 위해서만 해왔지만 이 독후감은 친구의 책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만 내놓는다. 이 블로그의 글 퍼가기를 전면적으로 환영하지만, 개인적인 글인데다가 완결된 것도 아니므로 여기 와서만 봐주시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

 

유엔위원단은 3월 17일 제26차 전체회의에서 미군당국에 제출할 ‘선거를 위한 자유분위기’ 건의안을 채택했다. 1월 18일 제1분위가 만들어진 이래 두 달간의 작업 성과다. 채택 사실은 바로 공보 제48호를 통해 발표되었으나, 그 내용은 사흘 후에야 발표되었다. 미군정 측에 예의를 갖춘 것으로 이해된다.

 

발표된 건의안 내용은 (가) 법률, (나) 강박(强迫), (다) 언론, (라) 정치범의 네 영역에 걸친 18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 특출한 조항만 옮겨놓는다.

 

1. 조선인사와 사계의 전문가 견해를 참작하면 본위원단은 선거에 필요한 자유분위기가 현존 법규에 의하여 어느 정도 보장될지 결정하기 곤란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2. 그러나 본 위원단은 남조선인민의 시민 자유를 증진하기 위하여 형사수속의 변경을 가능케 하는 법령 초안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을 군정장관으로부터 들었다. 신 법령에 의하여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없으며 영장 없이 체포하는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도 구인장 없이는 40시간 이상 유치할 수 없으며 보증인 변호인에 대한 조항과 권력남용에 대한 징벌책이 보장되어야 한다. 본위원단은 이 법령이 시민자유를 보장하는 중대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4. 본 위원단의 의견에 의하면 상기의 자유 가운데에 투표권 기권 그 어느 편이나 평화적 합법적 수단에 의하여 지지하는 권리가 포함되어야 할 것을 부언하며 이 점을 보증한 1948년 3월 3일 남조선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중대한 증언을 주목한다.

 

5. 본 위원단은 선거자유분위기를 충분히 보장하는 법령 혹은 증언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위원단은 이 법령의 적용과 집행에 있어 경무부가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증언에 주목한다. 본 위원단은 조선사람 가운데에 경무부가 그 업무를 수행하는 방법이 때에 따라서는 경무부의 개조까지 희망한다는 여러 가지 의견에 일치점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한편 군 당국은 현 사태를 고려하여 경무부의 성과에 만족하고 있다.

 

8. 본 위원단은 관계당국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함. 즉 관계당국은 청년단체의 지도자들에게 그 당원의 행동은 국련의 감시 하에 있으며 또 그들의 일거일동은 조위가 총회에게 보내는 보고서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을 알려야 된다는 것.

 

16. 범죄를 재래(齎來)하거나 범죄의 선동을 제외하고는 불법집합에 참가하거나 삐라를 살포하는 것은 정치적 위법이라는 의견을 본 위원단에서는 가지고 있다.

 

18. 본위원단은 폭동 혹은 사기행위를 범하지 아니한 정치범에 대하여서는 무조건 석방할 것을 당국에 건의함. (<동아일보> 1948년 3월 21일)

 

제1조에서 남조선의 법률-제도가 선거의 자유분위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제5조에서는 경찰의 역할에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제6조에서는 “경찰의 태도를 세밀 감시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고까지 했다. 가장 중대한 두 가지 문제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그리고 제4조에서 기권의 권리가 명시된 점도 중요하다. 실제로 5-10선거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가 기권의 권리 유린이었다.

 

제2조에서 “시민 자유를 증진하기 위하여 형사수속의 변경을 가능케 하는 법령 초안이 준비되어 있다”는 말을 군정장관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는데, 그 법령(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176호, “인권 옹호 위한 형사소송법 개정”)이 3월 20일부로 발표되었다. 오늘날 사람들 눈에는 당연한 원칙들이지만 그 당연한 원칙들이 당시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안을 작성한 형사소송법 수정위원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살펴본다.

 

1. 본 법령은 불법구류에 대한 국민의 자유권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하여 종래의 형사소송법을 개정하는 것이니 하인이라도 재판관이 발행하는 구속장 없이는 구인 구류 체포 또는 구속 등의 신체구속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다. (제1조, 제3조) 특히 법령이 지정한 예컨대 긴급조치를 필요로 할 때에는 재판관의 영장 없이 구속할 수 있으나 이러한 때는 48시간 (법원 없는 군(郡)-도(島)는 5일)이내에 영장을 얻어야 하고 영장을 얻지 못할 경우에는 즉시 석방하여야 한다.

 

2. 재판관의 영장으로 신체가 구속되면 즉시로 구체적 범죄사실과 또는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고 선임된 변호인은 피의자와의 접견과 신서(信書)가 자유로 왕래할 수 있고 또 유리한 증거를 제출할 권리가 있다. 만일 접견과 신서의 왕래가 금지된 경우에는 법원에 대하여 그 금지에 해제령을 신청할 수 있다.(제11조, 제13·4조)

 

3. 관변 또는 타인에게 신변의 구속을 당한 자는 그 친족 또는 변호인은 해 법원에 그 구속에 적법의 유무의 심사를 신청할 수 있다. (제17조)

 

4. 사법경찰관 또는 검찰관이 죄인의 신체를 구속한 경우에는 재판소의 허가를 얻어 10일간 연장할 수 있으나 그 기간 내에 송청 또는 공소제기를 하지 않으면 석방하여야 한다. (제8조)

 

5. 구속된 피의자가 공판에 회부 후 30일 이상 공판이 개정되지 않으면 보석할 수 있으며 재판소는 경찰청 또는 경찰서에 구속된 개인을 수시 자유로 보석할 수 있다. (제 9조)

 

6. 구속뿐 아니라 가택을 수사하고 물품을 압수당하는 때에도 재판소의 수사영장이 없이는 못할 것이다.(제5조 제20조)

 

7. 검찰관은 불법구속의 유무를 조사하기 위하여 관하 경찰서 유치장을 매일 1회 이상 반드시 감찰하여야 하고 이를 방해하는 자는 6개월 이상 7개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8. 일제시의 악법인 행정집행령과 조선형사령 제12조부터 16조를 폐지하고 만일 불법구속을 하는 경우에는 불법구속기간 중 1일당 천 원씩의 손해를 배상키로 되었는데 만일 이 법령을 준수하지 않는 경우에는 6개월 이상 7개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뿐 아니라 지방검찰청장 관구경찰청장 경찰서장이 직접 부하 직원이 본 법령에 위반하는 것을 방임한 때는 즉시 파면되며 그 후 2개년 간 사법부 또는 경무관 직에 취임하지 못한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6일, “개정 형사소송법, 수정위원회서 해설 발표”)

 

이 정도 기본 원칙들도 지켜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가? 마침 위 해설 중 제7항에 딱 걸리는 문제 하나가 이때 불거져 나왔다. 서울지방검찰청의 29명 검사 일동이 피의자 고문 여부에 대한 검찰관의 검증을 경찰이 거부한 사태를 놓고 하지 사령관, 김병로 사법부장과 이인 검찰총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것이다. 3월 19일자 <동아일보> “검찰관의 검증을 경관 거부는 위법” 기사 중 진정서 내용만 옮겨놓는다.

 

“금월 17일 상오11시경 절도 혐의로 서울시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사법부 내 미인고문관실 전속자동차 운전수 윤종인(23)이 심한 고문을 당하여 빈사상태에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인권옹호에 만전을 기할 것을 지상명령으로 하고 있는 우리 검찰관으로서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으므로 서울지방검찰청 조동진 검찰관을 동 경찰서에 출장케 하여 그 진상 여하를 조사하려 하였으나 동서 수사주임 김원기가 수도관구경찰청장의 명령 없이는 유치장을 검찰관이라도 보여줄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므로 조 검찰관은 부득이 일단 귀청하여 차석검찰과 엄상섭 씨에 보고하자 엄 씨는 곧 동서 수사주임 김 씨의 부당함을 질책하는 동시에 동 서장으로 하여금 등청케 하여 이에 대한 사유를 설명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소식도 없어 재삼 동서에 갔던 바 장기상 서장 역시 수도관구청장의 명령 없이는 검찰관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하여 끝끝내 유치장 조사를 거부하였고 다시 다음 18일 상오 10시경 본 청장으로부터 수도관구청장에게 전화로 조회하였던바 법률에 근거 없는 명령을 발하고 있다고 수도청장은 말하였는데 사법경찰관이 유치장 검열을 거부한다는 것은 남조선의 현행법규로 보아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 부당성은 삼척동자라 할지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경찰관의 이러한 태도가 용인된다면 남조선에 있어서의 인권옹호는 불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총선거가 긴급문제로 되어 있는 오늘 경찰관의 이 같은 비민주주의적 불법태도를 방임하여서는 안 된다. 원컨대 현명하신 각하께서 선처하시와 경찰관 측의 이 같은 독재적 경향을 급속히 시정하여 주시기를 절망(切望)하오며 우리들의 이 지당한 요청을 각하께서 청납하지 않으면 하는 수 없이 유엔조위에 호소할 것이고 여하한 방법에 의하여서라도 이 부당성을 시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경찰은 왜 검사에게 피의자 보여주기를 거부한 것일까? 보여줘서 별 문제 없을 것 같으면 이런 시끄러운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보여줬을 것이다. 보여주면 고문 사실이 대번에 드러날 상태였던 모양이다. 피의자가 미국인 고문관실 운전사였다니, 그 신분 덕분에 이렇게 문제화라도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절도 혐의의 고문관실 운전사가 이렇게 당하는 판에, 연줄 없는 좌익 혐의자들은 경찰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었을까.

 

진정서 끝에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유엔조위에 호소”하겠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검사들은 미군정에게 경찰의 횡포를 시정하려는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수없이 절감해 왔을 것이다. 이제 미군정을 끝내고 조선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유엔위원단이 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법질서 세우는 일을 미군정이 계속 외면한다면 유엔위원단에 의지해서라도 법질서를 세워야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경찰에서 조사 중인 피의자의 상태를 가족이나 변호사는 차치하고 검찰관조차 확인하지 못하게 하다니, 당시의 경찰은 피의자 신병을 자기네 소유물로 여긴 것일까? 이와 관련한 장택상의 담화가 <서울신문> 1948년 3월 20일자에 보도된 것을 보면 정말 아연실색이다. 법률도 경찰청장의 허가 없이는 효력을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 장택상의 ‘민주주의’인가? 사람을 놀라게 하는 그의 재주에는 한계가 없는 것 같다.

 

“우리 경찰은 민주주의식으로, 경무부장도 경찰청장을 경유치 않고는 일선 경찰서장에게 직접 명령하는 제도가 없다. 이후는 검찰관께서 일선 경찰의 사무연락을 하시려거든 일선 주임급과 싸우지 말고 수도청장을 경유하시면 알선할 용의가 있소.”

 

분노한 검찰관들에게 일선 주임급과 싸우지 말라고 야유하고 있다. 이런 담화문은 정말 자기 손으로 쓴 것 같다. 비서가 써드리는 글이라면 체통을 지키는 시늉은 할 텐데.

 

남조선을 경찰국가로 만든 책임자로 장택상과 조병옥이 나란히 지탄을 받았지만, 조병옥이 그래도 국량(局量)이 더 큰 인물이란 사실은 이번 사태에서도 드러났다. 조병옥은 3월 22일 발표한 담화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검찰과 사법경찰은 형사수사에 있어서 이신동체(異身同體)이다. 기실 현행 형사소송법의 규정에 의하면 수사상 법리적 권한으로서는 검찰이 주(主)요 경찰은 종(從)이란 관계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수사에 현실적 임무수행에 있어서는 체포 피의사건의 기본적 조사의 광범 잡다한 활동이 사법경찰에게 부과되고 검찰은 주로 기소기관으로 화함이 역시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수사에 현실상 필요가 이런 분야를 조성한 것이매 검찰과 경찰은 혼연 일치의 실을 거두지 못하면 수사의 완벽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국립경찰은 남조선 특수사정에 의하여 중앙집권제의 독립적 체계를 고지하고 있으나 명령계통을 확보하는 이외에는 사법경찰에 복무하는 경찰관은 자기의 직속상관이 아닐지라도 도의상 실질적 상관으로 인정하고 그 지시에 응하여서 전적 협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검찰당국에서는 국립경찰의 특수성격을 인식하여 그 명령계통의 유지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답습하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소위 서대문경찰서 유치 피의자 고문 검증 거부 문제에 대하여 검찰과 경찰 간의 대외적 발표가 왕래함으로서 검찰 경찰 간의 마찰에 대한 우려가 정도 이상으로 세간에 유포됨에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한다.

 

검찰 문제에 대하여 기실 경찰로서는 거부한 사실이 없다. 다만 국립경찰과 외부기관 간 수립한 교섭절차의 준수 및 시행이 도를 넘고 묘(妙)를 얻지 못한 까닭에 이 차질이 생긴 것이다. 경찰이 교섭절차에 있어 타 외부기관과 동일하게 검찰을 율(律)한 취지와 그 반면에 검찰이 국립경찰의 특수성을 망각하고 형사소송법에 규정한 검찰과 사법경찰의 관계를 문자 그대로 적용하려는 사실에서 무용의 오해 충절이 생겼다고 나는 본다. 그러므로 검찰관의 수사 행사에 대한 장해를 예방하고 검찰과 경찰 간 관계를 원활히 하여서 수사상 협력 일치를 기하고자 한다. 본관은 경찰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지시하였다.

 

1. 사법경찰은 경찰관의 일반수사상 지시를 복종할 것은 물론 검찰관이 경찰관의 장(長)에게 통고하고 그 장의 입회하에는 검찰관은 하시(何時)든지 유치장 급 그 수용인의 검증을 실시할 수 있음.

 

2. 검찰관이 범죄수사상 필요하여 경찰관에 대하여 법률에 의한 출두명령을 발할 때에는 명령을 받은 경찰관은 소속장관에 보고하고 그 소속장관이 관의 필요상 출두를 금하지 않는 이상 출두명령을 거부할 수 없음.” (<동아일보> 1945년 3월 23일)

 

얼마나 교묘한가. 경찰에 대한 검찰의 감독-지시 권한을 인정하는 것처럼 검찰의 자존심을 달래준다. 그러나 검찰의 권한은 원칙적인 것일 뿐이라고 한다. 남조선 ‘특수사정’으로 인한 국립경찰의 ‘특수성’을 이해한다면 형사소송법의 규정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서대문서 사건에서 “기실 경찰로서는 거부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조병옥이 말한 ‘특수사정’이란 무엇인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을 말하는 것이다.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위해 형사소송법을 개정한 데 대한 노골적인 반대까지 단독건국 추진세력에서는 나타났다. 3월 25일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위원회 성명의 요점을 옮겨놓는다.

 

“유엔조선위원단이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 실시를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감사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스러운 분위기 양성을 너무 고조(高調)한 결과 남조선까지 소련의 위성국화 하게 하려고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주게 되는 것은 우리의 심히 의아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그 계획의 실현이 금번에 발포된 형사소송법 개정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은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양성하는 데 공헌할 수는 없을 것이요, 도리어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파괴하여 총선거를 불가능하게 하여 유엔총회에서 43대 0으로 결정된 그 결과를 여기서 나타내게 될 것이 아니고 도리어 소련이 보이콧한 그 결과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될 것이니 우리는 그 태도에 대하여 단호히 반대하지 아니할 수 없다. (...)

 

4월 1일부터 그 개정법이 그대로 시행되면 남조선에는 파괴분자들의 행동을 조장하여 입후보자들의 생명도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고 투표인을 제지하여 기권케 하고 투표소 습격 등 무한한 불상사를 연출하게 될 것이다. 그 책임은 유엔조선위원단과 이 법령 개정에 참획한 대법원장, 사법부장, 민정장관에게 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 입법절차에 있어서도 입법의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관을 경유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중대한 착오로 생각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법령의 실시를 연기하고 즉시 입법의원을 소집하여 신중 심의할 것을 제의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 법령을 그대로 실시하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을 재삼 고조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6일)

 

형사소송법도 입법의원에 맡기잔다. 선거권 연령을 25세 이상으로 정하는 그 입법의원에. 입법의원에 설령 맡긴들 더 이상 법령을 다룰 수 있을 것 같지도 한다. 3월 18일 입법의원 제 211차 회의가 열렸지만, 이제 법령 의결은 고사하고 성원도 힘들게 되었다. 2월 23일 제206차 회의에서 ‘남한 총선거 촉진 결의안’을 채택한 이후 의장단 3인이 모두 사퇴하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간 19인의 의원을 제명처분 했는데, 그 밖의 의원 11인이 의원직을 사퇴했다. 남은 의원 수는 49인이었다. (<조선일보> 1948년 3월 20일)

 

3월 18일에는 독촉국민회 제6차 전국대표자대회도 열렸다. 이 대회에서 이승만의 훈화에 이어 김구 치사를 대독하다가 대의원들의 맹렬한 중지 요구로 중단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대회의 결정 중 특이한 것 하나는 월남민을 위한 특별선거구 설치와 김두한 구명을 대회 명의로 당국에 진정한다는 것이다. 김두한은 1947년 4월 좌익 청년들을 납치 살해한 ‘대한민청’ 사건으로 미군정 군률재판에서 교수형 판결을 받은 사실이 1948년 3월 17일 발표되었다. 독촉의 두 가지 요구에 대해서는 며칠 후 자세히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

 

한국 언론사에 특기할 만한 현상 하나가 3월 내내 벌어졌다. 장덕수 살해사건 재판이 3월 2일부터 4월 1일까지 열리는 동안 동아일보가 엄청난 지면을 이 재판에 쏟아 부은 것이다. 같은 기간 경향신문에 비해 줄잡아 다섯 배의 지면을 투입한 것 같다.

 

장덕수가 ‘동아일보사람’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엄청난 분량이다. 김구에 대한 정치적 공세로 봐야 할 것이다. 지면 투입의 절정은 3월 9일자와 11일자의 제2-제3면을 몽땅 바쳐 피고인 진술서 전문을 게재한 것이다. 3월 8일의 제5회 공판에서 진술서 낭독이 있었는데, 김석황, 신일준, 조상항의 진술서는 3월 9일자 <동아일보>에, 김중목, 손정수, 박광옥, 조엽, 최중하의 진술서가 실렸다.

 

진술서 내용 중 김구의 연루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은 엄청 큰 활자로 부각시켜 놓았다. 김석황의 진술 중 김구와 관계된 중요한 부분을 밑에 옮겨놓는데, 밑줄 친 부분은 큰 활자로 인쇄된 부분이다.

 

(문) 그러면 당신 기억에는 이 회의가 1947년 9월 중순경에 있었는지? 그때에 장덕수 씨 살해사건에 대한 메시지는 무엇인가?

(답) 본인은 신일준, 조상항, 손정수에게 내가 김구 씨를 만났다고 이야기하였고 김구 씨는 한국민주당 놈들은 다 나쁘다, 특히 이 박사 의도를 무시하고 공(共) [두어 줄 빠짐] 은희 이종영을 죽여라.

 

(문) 김구 씨가 지금 당신이 말한 대로 이 3인을 죽이라는 지령을 당신에게 주었는가?

(답) 그렇습니다.

 

(문) 장덕수 씨를 죽이라고 신일준, 조상항에게 김구 씨의 지령을 전할 때에 당신이 그 사람들에게 더 한 말이 있지 않은가?

(답) 만약 그 사람들이 나를 신용 못한다면 김구 씨에게 가 보고서 그 지령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아보라고 그 사람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문)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였는가?

(답) 그 이튿날인지 본인은 신일준, 조상항, 손정수와 같이 이 지령에 대한 질문을 하려고 김구 씨 댁을 방문하였습니다.

 

(문) 그때에 김구 씨를 만나봤는가?

(답) 우리 4인이 김구 씨 침실에 가서 만나봤는데 그분은 교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문) 신일준, 조상항, 손정수를 위해서 이 지령을 증명해 달라고 김구 씨에게 물어봤는가?

(답) 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이 지령을 증명해 달라고 말씀을 여쭈었습니다.

 

(문) 김구 씨가 무슨 말을 하여서 증명하였는가?

(답) 김구 씨는 장덕수 배은희 이종영은 나쁜 놈들이니까 그놈들은 숙청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문) 김구 씨가 제일 처음 당신에게 지령을 줄 적에 그분이 장덕수 씨를 죽이라고 하는 말을 신일준과 그 외의 두 사람에게 자기의 지령을 증명할 때에도 말했는가?

(답) 아닙니다. 장덕수 배은희 이종영을 죽이라고는 말씀 안 하셨습니다. 장덕수 배은희 이종영은 죽일 놈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말씀이 나에게 직접 주신 지령을 증명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죽이라고 직접 명령을 해달라고 그분에게 청하지 않았습니다. (...)

 

(문) 김구 씨가 자기가 장덕수 씨 죽이는 것을 원한다고 확언하였는가?

(답) 김구 선생은 본인이 신일준, 조상항, 손정수에게 전한 말과 같이 장덕수는 죽일 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자기가 장덕수 씨를 죽이는 것을 원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문) 그렇다면 어찌하여 김구 씨의 명령이 증명되는가? 그리고 김구 씨가 사실로 장 씨 살해를 원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문) 김구 씨가 나에게 처음 하신 말씀대로 장덕수 씨는 죽일 놈이라고 신일준, 조상항, 손정수에게 그랬으니까 김구 선생이 장덕수 씨 살해당하는 것을 원한다고 봤습니다.

 

(문) 다시 시작합니다.(“시작으로 돌아가 봅시다.”의 잘못된 통역 아닐지?) 김구 씨가 당신에게 직접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였소? “당신이 장덕 수 씨를 죽이는 것을 나는 원하오.”

(답) 김구 씨가 나에게 네가 장덕수 씨를 죽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지령은 김구 씨가 1947년 9월 상순경 댁에서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때에 김구 씨와 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문) 김구 씨로부터 받은 이 직접 지령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하였는가?

(답) 그 이튿날 본인은 경원여관에 가서 이러한 사명을 누가 이행할 수 있는지 알려고 했습니다. 그 이후에 본인은 그것을 이행할 수 없는 고로 그때에 본인이 김구 씨의 지령을 신일준, 조상항, 손정수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김구 씨가 장덕수, 배은희, 이종영을 숙청하기를 원하신다는 말만 하였습니다.

 

1947년 초-중순 어느 날 김구와 단둘이 있을 때 장덕수 살해 명령을 받았다는 사실(1), 이 명령을 혼자 수행할 길이 없어서 신-조-손 3인에게 전했더니 김구의 뜻을 확인하고 싶다고 해서 3인과 함께 며칠 후 김구를 찾아간 사실(2), 그 자리에서 장-배-이 3인은 ‘죽일 놈’이라고 김구가 말했다는 사실(3)이 위 인용문 안에 들어있다.

 

(2)와 (3)의 사실은 신-조-손 3인의 진술과도 대략 일치한다. 그런데 사실 (1)은 김구와 김석황 두 사람만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김구는 3월 12일과 15일 법정에 증인으로 출두해서 이 사실을 부인했다. 왜 두 사람의 진술이 서로 달랐을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거짓말을 한 것이다. 누가 거짓말을 한 것인지 두 사람 본인 외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나는 김석황은 믿을 수 없는 증인이라고 생각한다.

 

믿을 만한 증인이기 위해서는 사실을 말하는 진실성만이 아니라 진술 태도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설령 김석황의 진술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사실을 밝히는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김석황이 자신의 진술대로 김구의 하수인이라면 김구를 보호하는 태도를 지켜야 한다. 다른 누구의 손으로도 밝혀질 수 없는 김구의 책임을 자기 진술로 드러낸다는 것은 하수인의 태도에 맞지 않는다. 김구에 대한 자신의 자세에는 아무 변화 없다고 그는 재판 내내 주장했는데.

 

김구의 직접 지령을 받았다는 그의 진술이 사실이더라도 그 사실을 그가 밝힌 것은 김구를 함께 피고석에 세우려는 목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구가 함께 피고석에 서면 처단이 약해질 것을 그가 희망했다고 보는 것이다. 체포 당시 김구 앞으로 쓴 편지를 부치지 않은 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같은 희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3월 12일 김구의 증언 내용이 <동아일보> 3월 13일자와 14일자에 실렸는데, 그중 김구의 사건 연루에 관한 문답을 뽑아 옮겨놓는다.

 

검사: 작년 여름에 장덕수 씨가 선생을 방문하고 미소공위에 대한 의향을 달리 해달라는 부탁 내지 의논을 한 적이 없소?

김구: 기억할 수 없소. 친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소.

 

검사: 그때의 장덕수 씨의 미소공위에 대한 의견은 어떠했소?

김구: 모르겠소. (...)

 

검사: 장 씨가 선생을 찾을 때 미소공위 참가에 대하여 불가하다고 한 말을 한 일이 있소?

김구: 기억이 없소.

 

검사: 장 씨의 공위 참가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불가하다고 말한 일이 있소?

김구: 직접 본인을 대하고는 모르겠으나 점잖은 체면에 어찌 그러겠소.

 

검사: 그러면 그 말을 김석황에게도 한 일이 없다는 말이오?

김구: 없소.

 

검사: 김석황 하고 만나 토의한 일이 있소?

김구: 없소.

 

검사: 보통 담화 중에 미소공위 참가가 좀 나쁘지 않으냐, 처치를 해야 좋지 않으냐는 말을 한 일이 있소?

김구: 없소.

 

검사: 작년 8, 9월경에 김석황 조상항 손정수 신일준 4명이 선생을 찾아 “김석황에게 장덕수를 처치하라는 말을 했느냐?”라는 질문을 한 일이 있소?

김구: 없소.

 

검사: 확실하오?

김구: 확실합니다.

 

검사: 어째 선생은 다른 질문에는 기억이 없다고 말하고 이 질문에는 똑 잘라서 확실히 없다고 단언을 하시오?

김구: 사람을 죽이라는 것은 중대사이니 확실치 않을 수가 있소?

 

검사: 선생이 죽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겠지마는 "제거"하라는 말을 쓴 일은 없소?

김구: 안 썼소. 어찌 그 사람 하나를 제거하라고 하겠소?

 

검사: 작년에 미소공위 참가한 사람에 대해서 “제거”한다든지 “좋지 못한 사람”이라든지 그런 말을 한 일 있소?

김구: 없소. (...)

 

검사: 김석황에게 장, 배 등 4씨를 좋지 못하다든지 독립방해자라고 한 말이 없단 말이오?

김구: 기억이 아니라 나의 본심이 그렇소.

 

검사: 선생의 제자가 말하기를 선생의 명령이라 하는데?

김구: 그러기에 누구의 모략이지요.

 

검사: 그러면 누구의 모략이요?

김구: 말 못하겠소. 여러 사람과 단체의 이름이 내 입에서 나올 터이니.

 

검사: 재언하면 김석황이 선생을 가리켜 거짓말을 했단 말이오?

김구: 그렇소. 거짓말을 아니치 못할 환경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었겠지요.

 

검사: 그러면 무슨 환경에서 그 사람이 그렇게?

김구: 내 눈으로는 보지 못하였으나 내가 들으니 경찰에서 고문을 한다고 들었소.

 

3월 15일 김구의 증인 출정은 증언 분량이 많지 않은 대신 극적인 정황이 벌어졌으므로 이를 보도한 3월 16일자 <경향신문> 기사 전부를 옮겨놓는다.

 

“장 씨 사건 증인심문 제2일 - 김구 씨 발연대로 - 축석(蹴席) 퇴정 순간 판사 위류(慰留)로 진정 - 박광옥 대성일갈, 법정 내 아연 소란”

 

장덕수 씨 살해사건 군률재판은 지난 12일 제8회 공판에 이어 15일 오전 9시부터 과도정부 제1회의실에서 제9회 공판이 개정되었는데 이 날도 김구 씨가 증인으로 출정하여 공판정은 방청객으로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심문이 개시되었다. 심문이 차차로 고조에 달한 때문인지 법정의 공기는 처음부터 다소 험악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하고 심문석에 오른 김구 씨의 얼굴도 첫날과는 달리 긴장된 빛을 띠었다. 오전 9시 10분 심판으로부터 개정한다는 선언이 있자 곧 검사로부터 심문이 개시되었다.

 

검사: 토요일에 계속하여 심문하겠소. 피의자들의 진술서 가운데 있는 진술에 대하여 증인은 모략이라 생각한다고 하였는데 그 모략이란 무엇이오?

김구: 내가 법정에 나온 것은 국제 예의를 존중하여 증인으로 출정한 것이지 심문에 있어 마치 죄인이나 피고와 같이 취급을 하니, 죄인으로 취급을 할 터이거든 기소를 하라.

 

검사: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은 증인이 죄가 있어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요?

김구: 나는 그런 사실을 모르니까 어찌 대답을 할 수 있는가. 대답을 거절한 것은 장덕수 씨를 죽인 것에 대하여 내가 관련을 하고 있는 것처럼 꾸미는 것이므로 안 한 것이다.

 

검사: 검사가 질문을 한 것을 대답함으로써 스스로 증인이 죄에 접촉하게 되는 때문인가?

김구: 나는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관계가 없는 것을 어찌 대답을 한단 말인가.

 

이때 5분 동안 휴정을 하였는데 휴정을 하는 동안 변호인단이 판사 앞으로 가서 무엇인가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김구 씨와도 말을 하는데 중대한 일이 벌어질 듯이 방청객의 관심은 김구 씨에 집중되고 있다. 피고들은 머리를 수그리고 있어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다.

 

검사: 피고인 다섯 사람의 진술서에 적힌 진술을 증인이 모략이라 하였는데 모략이라 함은 무엇이오?

김구: 말을 못하겠다.

 

시간으로 9시 49분 바로 이때이다. 피고석에 앉았던 박광옥이 돌연 일어서면서 “그것은 완전한 모략이다! 법정에 태극기를 걸어라!” 하고 외친다. MP가 달려와서 박을 끌고 증인석으로 들어간다. 증인석으로부터 싸우는 소리와 우는 소리가 요란히 일어나 방청석을 아연케 한다. 김구 씨도 뒤를 따라 증인석으로 들어간다. 법정은 일대 소란을 일으키며 살기를 띤다. 이때 뒤를 이어 이번에는 방청석에서 “이제부터 조선 3천만은 다 죽는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난다. 이로써 혼란된 법정은 스스로 휴정이 되고 말았다.

 

피고인들의 얼굴은 또다시 핼쑥하여진다. 박이 들어갔던 증인석으로부터 “죄 없는 사람을 왜 그러는가!” 하는 말이 울음과 섞여 들려온다. 약 25분 후에 박과 김구 씨가 다시 나와 앉아 10시 15분부터 심문이 다시 계속되었다.

 

판사: 피고 자신이 말하여도 좋을 때 얼마든지 말할 수 있으니 조용히 앉아 있으라. 지금 당신들을 위해서 증인이 말을 하는 것이니 당신(피고)들은 직접 말하지 말라.

검사: 아까 말한 ‘모략’에 대해 말해주시오.

변호사: 그 질문은 증인의 위신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반대한다.

 

이로써 김구 씨의 ‘모략’이란 말에 대하여 심문을 끝마치고 판사로부터

 

판사: 언제 어디서 “일본 놈들은 죽일 놈들이다”라고 말하였소?

김구: 상해에 있을 때이며 15년 전 일이다.

 

판사: 누구에게 명령하였소?

김구: 역사를 통해서 잘 알 것이다. 광복군에 명령하였으며 윤봉길에게 백천(白川) 대장을 죽이라고 하고 이봉창에게는 동경에 가서 유인(裕仁)을 죽이라고 하였다.

 

판사: 애국자의 한 사람으로써 장덕수 씨를 생각하였는가?

김구: 국내에 들어와서 장 씨를 애국자라고 말하였는데 나는 그 동안 장 씨가 애국자 노릇을 못 했는지 했는지 모르며 조사해볼 생각도 없었다.

 

이로써 김구 씨에 대한 심문은 끝마치고 10시 37분부터 손종옥 씨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는데 심문 내용은 피고인들이 경원여관에서 말하고 회합을 한 광경과 증거품(사진)을 제시한 데 대한 답변으로 오전 11시 30분 오전 중의 심문을 끝마치었다.

 

누가 뭐래도 김석황은 김구의 ‘심복’으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의 체포와 재판 과정에서 흘러나온 얘기를 보면 축첩도 하고 애기(愛妓)도 두고, 지사(志士)보다 책사(策士)의 느낌이 든다. 독립운동에 세월을 바친 이를 놓고 정황을 세세히 알지 못하는 후세의 서생이 섣불리 폄훼할 일이 아니지만, 편지와 증언으로 김구를 피고석에 함께 끌어들이려 한 책략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김구는 이틀에 걸친 증언에서 장덕수와 잘 아는 사이였지만 장덕수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적도 없고 표명한 적도 없다고 잡아뗐다.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1946년 11월 23일자 <서울신문>에 귀국 1주년을 맞은 김구가 <서울신문> 출범 1주년을 축하하는 글을 실었는데, 그 글에 장덕수를 지목한 대목이 있다. 장덕수가 김성수와 함께 입법의원 선거에 당선하여 물의가 일어났을 때의 글이므로 누구를 지목한 것인지 명백한 것이다.

 

친일분자로 지목을 받는 자 중에서 일찍이 왜적 이상으로 왜국을 위하여 충견노릇을 한 무리는 감히 대두도 하지 못하며 혹 그 정상이 비교적 경한 무리로도 자숙하는 부분도 없지 아니하나 그러나 소위 황국의 성전을 위하여 글장이나 쓰고 연설쯤 한 것은 문제도 되지 아니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발호하는 무리를 대할 때에는 구역이 나지 아니 할 수 없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