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2월 2일 저녁 장덕수가 집으로 찾아온 두 명의 범인에게 암살당하고 40시간 만인 4일 오전 현직 경관 박광옥(23세)과 연희대 학생 배희범(20세)이 체포되었다. 별다른 증거를 남기지 않고 현장을 완전히 벗어난 범인들을 이틀도 안 되어 체포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인데, 체포 경위에 관한 발표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더더욱 기이한 일이다. 2년 전 송진우 암살범을 범행 후 백일 만에 체포했을 때 요란했던 것과 너무나 대조된다.

 

체포 경위 중에 조병옥이나 장택상이 밝히기 곤란한 내용이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둔다. 우익 테러조직들 사이에 많은 횡적 연결이 있었다는 사실은 여운형 저격범 한지근의 취조 과정에서도 드러나 있었다. 장덕수 암살범 체포에 이 횡적 연결이 활용되었고 그 내용 중에 밝힐 수 없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 아닐지.

 

하수인 두 사람 체포 후 수사는 즉시 그 배후로 확대되었다. 바로 그 날 오후에 “모 신문사 사장 자택에 동거하는 인물 두 명을 체포하고 모 단체에서 검거하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6일, “장씨 살해범 연루자 각 방면에 수배 체포”) 박광옥의 집에서 발견된 한 장의 사진이 중요한 증거물로 주목받았는데 “(박과 배) 양인이 가슴에 혈서로 장덕수 씨를 암살하겠다는 것을 써 놓고 의사(義士)의 풍채로 박은 것”이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5일, “가슴에 쓰인 혈서 ‘장덕수 암살’”) 윤봉길이 거사 직전에 찍은 기념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니, 배후 수사가 어느 쪽을 향한 것인지 이로써 짐작이 간다.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장택상이 이 사건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아볼 만한 기사가 있다.

 

“박 순경 미거(美擧), 상금을 전재민에”

 

뛰어나는 공을 세운 수도경찰 순경의 연거푼 미담가화. 앞서 고 장덕수 씨 살해범을 체포한 수도경찰 특경대 박준주 순경은 특상으로 장택상 총감으로부터 5천원의 상금을 받았는데 13일 서울시전재원호회를 찾아 그중 3천원을 한파에 헐벗고 굶주린 전재민에 보내달라고 기탁하였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7일)

 

체포 기사 중 체포자에 대해서는 “중부서원 백일현 외 2명”이란 표시 외에 보인 것이 없었다. 박준주 순경은 “외 2명” 중 1명이었던 모양이다. 5천원이면 큰 상금이다. 그런데 그런 상금을 주었다는 기사도 보이지 않는다. 그 상금을 갸륵한 뜻에 바쳤기 때문에 비로소 기사화된 것이다. 그런 큰 상을 준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만한 일이었기 때문에 상 줄 때는 보도되지 않게 한 것이 아니었을지.

 

경찰은 어마어마한 ‘수사위원회’까지 꾸렸다. 수도청장(장택상)을 위원장으로, 경무부 수사국장(조병계)과 부국장(이만종), 수도청 수사과장(노덕술)과 사찰과장(최운하)를 위원으로 하는 수사위원회를 구성했다고 조병옥 경무부장이 12월 1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이다. 범인 8명 중 7명이 체포되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동아일보> 1947년 12월 11일)

 

한 명 체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 것이 김석황이었다. 김석황은 국민의회 동원부장이며 한독당 중앙위원으로서 ‘김구의 행동대장’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김석황이 사건 달포 후인 1월 16일 체포된 경위를 그 날 일기에 적었는데, 체포 당시 몸에 지니고 있던 편지 한 장이 큰 주목을 끌었다. 김구 앞으로 김석황이 쓴 편지였다.

 

미군정 당국은 이 편지에 대해 이례적인 보도 관제를 했다. <동아일보> 1948년 1월 17일자에 이 편지 내용을 실은 기사가 있었는데 편지 내용을 들어냈다. 그럼에도 <동아일보>는 편지 내용 일부를 부득부득 지면에 올렸다. 체포 경위를 보도한 1월 20일자의 커다란 기사 속에 슬쩍 끼워 넣은 것이다.

 

김석황을 체포한 후에 물론 그 신체수색이 있었다. 그 주머니 속에서 미발송의 편지 한 장이 발견되었는데 김석황은 그 편지를 장택상 경무총감에게 보내려고 하였다고 말하였다. 그 편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선생님께서 대권을 잡으실 때까지 소생은 유리개걸(遊離丐乞)하기로 하였습니다. 복원(伏願) 선생님은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 대권은 반드시 선생님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선생님은 천명을 받으셨으니 소생은 잡힐 리가 만무합니다. 이 박사와 한민당 찬역배가 음모를 하오니 선생님은 특별히 신변을 조심하십시오. 대권이 이 박사에게 가면 인민이 도탄에 빠지고 애국자의 살상이 많이 날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대권을 추호도 사양치 마시고 기어코 대권을 잡으십시오. 운운”

 

이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면 아무리 생각하여보아도 장택상 씨에게 보내려고 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차천자적 백백교도적 광신자들로부터 조선 민중이 해방되어야 민주주의국가의 성립이 용이하게 될 것이다.

 

김석황은 왜 그 편지를 몸에 지니고 있었을까? 겉으로 봐서는 써 놓고 미처 부치지 않은 상태에서 체포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너무나 공교로운 일이다. 그를 숨겨주고 살펴준 세 사람이 범인은닉죄로 기소되었다. 언제든지 편지를 쓰면 바로 발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석황이 도피 상태에서 일종의 ‘보험용’으로 이 편지를 늘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든다. 김구의 연루 사실을 드러내는 내용인데, 체포될 때 이 편지가 발각되어 ‘본의 아니게’ 연루 사실이 나타난 것처럼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김구는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라는 믿음으로, 자신이 체포될 경우 김구가 끌려 들어옴으로써 그 위망이 자신까지 보호해 주기 바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석황의 체포로 사건은 일단락된 셈이었다. 불원간 기소와 재판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약 보름간은 관련 보도가 없었다. 그런데 2월 중순 들어 사건의 신속한 공개와 범인들의 엄중한 처단을 요구하는 성명이 여기저기서 나오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2월 12일자에는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한협) 성명이, 14일자에는 테러배후규명대책협의회 성명이, 20일자에는 여성연맹 성명이, 21일자와 26일자에는 한민당 담화문이 실렸다. 남북협상론으로 돌아선 김구에 대한 단독선거 추진 세력의 일제공세로 이해된다.

 

이 사건은 2월 21일 기소되어 3월 2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첫 재판이 열렸다.

 

“고 장씨 살해사건 기소내용”

 

고 장덕수 씨의 살해사건은 그간 미군사령부 직속의 군사위원회에서 취급하여 오던 바 동 사령부 직속 사법진에 의하여 발표된 그 후 소식을 들으면 다음과 같다.

 

2월 21일 포고령 위반으로 기소되어 3월 1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공개재판을 할 터인데 피고인의 성명은 다음과 같다: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조엽, 박정덕.

 

그리고 기소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조엽, 박정덕 등은 공동행위로 또 공동의사에 의하여 김철, 성명미상의 기타 여러 사람과 함께 서울에서 작년 8월 14일에 혹은 그 날 경에 고의적으로 부당히 불법적으로 장덕수, 배은희, 안재홍 및 기타 인사 약간 명을 살해하려고 음모하고 공공연한 행위를, 혹은 상술한 음모에 의한, 또는 그 실행의 행위를 행하였고,

 

2.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박광옥, 배희범 등은 공동행위로 또 공동의사에 의하여 서울에서 작년 12월 2일에 또는 그 날 경에 악의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숙고적으로 불법적이며 계획적으로 장덕수를 카빈총으로 사격하여 살해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27일)

 

재판 개정 날 오후의 증인신문에서부터 김구를 노리는 미군정 측의 의도가 드러난다. 3월 4일자 <동아일보> “장씨 사건 군재 증인심문 개시” 기사 중 박은혜를 신문하는 대목이다.

 

이때 검사는 질문의 머리를 돌려서 장씨 생전의 정치운동에 대해 들은 바 본 바를 말하라고 장씨 부인에게 말함에

증인: 잘은 모르겠으나 한 때 민대와 국의의 합동설이 있었을 때 남편은 이 합동운동에 많은 노력을 하였고 당시 김구 씨와는 의견의 충돌로써 알력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때 김구 씨는 중국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야단을 친 모양이라고 들었습니다.

 

검사: 그것은 언젠가.

 

증인: 임시정부 추진파에서 정치운동을 맹렬히 추진하였을 때입니다.

 

검사: 김구는 누군가.

 

증인: 임정 요인이지요. 즉 임정을 조선정부로 한다고 해서 물의를 자아낸 모양입니다.

 

이때 피고 측 미군 변호인 빌스 대위가 일어서서 “이 사건에 있어서 정치문제까지 심문함은 부당한 일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받아 즉시 재판장은 “심문은 자유이다. 그런 월권행사는 기각하겠다.”라고 일축하였다.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는 이 시기의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기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동아일보>는 재판 기사를 매일 연재하고 있었다. 3월 5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4일의 제3회 공판에서 저격범 두 사람을 체포한 중부서 백일현 경사의 증인신문이 있었는데, 진술한 체포경위가 너무 엉성해서 뭔가 사실을 감춘 느낌이 든다.

 

검사: 그들을 언제 어디서 처음 보았는가.

 

증인: 1947년 12월 4일 상오 10시경 시내 필동 2가 72번지 유봉린 집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검사: 그때의 광경을 말하라.

 

증인: 2일 장덕수 사건이 발생되자 수도청에서는 각서에 범인 수사를 명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다음날인 3일 지명수배가 있어 관내로 검색을 나갔는데 필동 2가 72번지에 갔더니 그 집의 손님이라고 하는 사람의 행동이 수상할 뿐 아니라 지명수배한 사진과 인상이 비슷하여 엄중심문한 결과 범인임이 틀림없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 다음 소지품을 내놓으라고 했더니 없다고 하기에 주인에 명하여 이들의 소지품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런데 손수건에 싼 권총을 가져왔던 것이다. (...)

 

검사: 진범인이라는 결정은?

 

증인: 박광옥을 보고 “당신이 그랬지?” 하고 물었더니 박광옥은 “네” 하고 대답했었소. 그래서 이름을 물었더니 박광옥은 자기는 “종로서 박광옥”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배희범을 보고 “당신이 같이 다니며 그랬냐?” 하고 물었더니 배희범 역시 “네” 하고 대답을 했었소. 그래서 포승을 해서 파출소로 데려왔던 것이오.

 

<경향신문>은 첫 공판의 보도 후 닷새만인 3월 9일자에서 피고들의 진술서 낭독이 있었던 3월 8일의 제5회 공판을 보도했다. 인용된 김석황의 진술 중에 김구 관련 부분이 있다.

 

김석황(54): 본인은 국민의회 동원부장이다. 중국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대한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을 친히 1년 동안 모신 일이 있다. 귀국 후에는 별로 가깝지 않았으며 (...) 장씨 살해 문제에 관해서는 신일준으로부터 1947년 7월경에 민족반역자를 숙청해야 한다는 말 가운데에 장(덕수), 배(은희), 안(재홍)을 죽여야 한다고 들었으나 말렸다. (...) 며칠 후 김구 선생을 찾았을 때 이런 말을 했더니 “이놈들은 나쁜 놈들이야.”라고 했다. 이때 본인은 이 말이 장(덕수)을 죽이라는 직접 명령은 아니나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신(일준)과 김(중목)에게 말했다. 그 후 살해 계획을 김구 선생께 알렸더니 “아, 그런가.”라고만 하였다. 본인의 주머니 속의 편지는 누구라고 이름은 안 썼으나 인편이 있으면 김구 씨에게 보내려고 한 것이다.

 

이 기사에 이어 김구의 소환장 발부와 이승만의 담화문 기사가 실렸다.

 

“김구 씨 소환장 - 군재(軍裁)위원회에서”

 

고 장덕수 씨 살해사건 군률재판은 지난 2일부터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진행 중에 있는데 동 군률재판위원회에서는 피고인 김석황의 변호인 빌 씨의 요청으로 밀톤 로만 담당검사는 3월 6일부로 김구 씨에게 소환장을 보내었다 한다. 이 소환장은 8일 오전 10시 24군단 코넬 스미드 씨가 경교장으로 동 씨를 방문하고 수교하였다는데 동 소환장에는 3월 12일 오전 9시까지 군률재판소에 출정할 것이 적혀 있으며 김석황 등 소송사건을 변호하기 위하여 증인으로서 증명하고 증언할 목적으로 소환하는 것이라고 씌어 있다 한다.

 

“김 주석 관련 운운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 이 박사 담화 발표”

 

이승만 박사는 고 장덕수 씨 사건에 관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고 장덕수 씨 사건에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등사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 주석 부하에 기개인의 무지맹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를 끼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은 이승만 같은 사람들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닐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