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위원단(U. 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정식 명칭은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인데, 이 일기에서는 알아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유엔위원단’ 또는 ‘조선위원단’으로 표시했다.)은 1948년 3월 12일 제23차 회의에서 유엔소총회의 ‘가능지역 총선거 실시에 관한 결의안’을 지지하는 결의를 했다. 소총회의 결의가 조선위원단에 대한 구속력이 없으므로 조선위원단의 독자적 결정이 필요하다고 패터슨 캐나다대표가 3월 8일의 제16차 회의에서 지적한 문제가 타당하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3월 12일의 의결이 있게 된 것이다.

 

조선위원단은 나흘 사이에 여덟 차례나 전체회의를 열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갔다. 결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확인된 후 결의에 3분의 2 찬성이 필요한가, 과반수 찬성이 필요한가 하는 토론이 있었다. 과반수 찬성으로 결의가 가능하다는 결정을 본 후 본안 의결에 들어간 결과 찬성 4(인도,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 반대 2(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기권 2(시리아, 프랑스)로 가결되었다. (<서울신문> 1948년 3월 13일) 애초 총회에서 조선위원단을 구성했던 대로 우크라이나까지 참여했다면 과반수 찬성에 다섯 표가 필요했을 것이다.

 

조선위원단은 의결에서 각국 대표가 표명한 견해를 공보 제43호로 발표했는데, 반대한 두 나라, 기권한 두 나라, 그리고 인도대표의 견해를 옮겨놓는다. 중국, 필리핀, 엘살바도르 세 나라 대표의 견해는 지면이 아까워서 빼놓는다.

 

호주는 남조선에 선거를 실시하는 데 반대하는 소총회 당시의 태도를 고지(固持)하였을 뿐 아니라 만일 좀 더 일찍이 발생하였더라면 소총회의 견해도 변경시켰을지 모르는 중요 사태의 발전이 있었다는 새로운 근거 하에서도 또한 본 결의에 반대하였다. 잭슨은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극우 그룹을 제외한 조선의 전 정당은 선거를 보이콧할 것으로 관측한다. 최근의 정세에 의하면 김구 김규식 씨는 선거에 참가하지 않으리라고 한다.”

호주대표는 한 대안을 제기하였다. 그 중점은 군정당국에 대하여 먼저 건의를 한 다음 위원회는 급속히 철퇴하였다가 추후에 그 사업을 진행시키는 것이 가능할는지 정세를 재검토하기 위하여 돌아오자는 것이었다.

 

캐나다대표는 소총회로부터의 권고는 현명치 못하며 위법이라는 신념하에 결의에 반대투표를 하였다. 캐나다 견해에 의하면 제안 중의 선거를 감시하는 것은 현재 위원회를 구속하고 있는 1947년 11월14일부 UN총회의 결의조항에 해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캐나다의 반대투표는 동 정부가 가급적 속히 자유통일민주주의 조선이 탄생하는 것을 열망하고 있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프랑스 대표단은 소총회가 그의 권고를 교부한 금일에 있어서 위원회에서는 이를 이행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협의대상을 위한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리아는 총회결의의 실시를 지지한다든지 거부한다든지 하는 일체의 해석을 회피하기 위하여 기권하였다. 그러나 제3대안은 없는 만치 시리아는 남조선 사태가 자유선거를 보장할 수 있도록 시정된다는 조건 하에서 위원회에 협력할 의향이다.

 

메논은 인도대표로서 위원회의 전원(全員)들은 조선의 일부에만 국한하여 총회의 결의를 실시하는 것이 법적으로 타당한지 않은지의 점에 관하여 솔직히 의문을 품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제 소총회는 위원회로써 이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견해를 표명하였으므로 위원회는 그 결정을 준수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고 그는 말하였다. 위원회의 위원들은 또한 자유선거 실시와 진정한 국민정부 수립의 가능성에 관하여 우려하였다. 자기의 견해에 의하면 위원회는 그 자체가 어디서든지 사태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그 사명을 수행할 권한과 자유재량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총회의 결의를 실시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14일)

 

오스트레일리아대표의 발언 중 “더 일찍이 발생하였더라면 소총회의 견해도 변경시켰을지 모르는 중요 사태의 발전”의 지적이 눈길을 끈다. 대표적 민족주의자 7인의 총선거 불참 선언이 3월 12일 나온 것을 가리킨 것이다.

 

“총선거에 불참, 김구 씨 외 6씨 성명”

 

유엔소총회에서 조선에 가능한 지역만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조선의 중앙정부를 수립하자는 미 측 제안이 통과되자 김구 김규식 씨를 비롯한 일부 진영에서는 태도를 표명한 바 있었는데, 12일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홍명희 등 7씨는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가능한 지역 선거에는 참가하지 아니하겠다는 요지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13일)

 

며칠 전(3월 6일) 일기에서 중간파의 원칙론-현실론 갈등을 언급했는데, 국내에서 단독건국 세력이 추진하고 유엔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가능지역 총선거’가 실현될 경우 이 선거에 참여할 것인가 여부를 놓고 단독건국 반대파 안에서 일찍부터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독 민독 양당 선거파 합작”

 

민족진영과 중간파 일부에서 소 측의 보이콧을 일축하고 남조선만에라도 3월 말 이내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이 때 종래 민족진영에서 활동하던 한독당은 남조선 총선거를 찬성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로 양분되어 맹렬한 의견 대립이 전개되고 있다 한다.

 

그리고 남조선 선거 문제로 동당에서 탈당할 기색을 보이고 있는 모 중앙위원 담에 의하면 과반 민독당에서 남조선만의 총선거에는 불참할 것을 결정한 이래 동 결정에 반대하고 남조선에 총선거가 실시될 때에 이에 참가할 것을 강조하여 동당에서 탈당한 몇몇 간부들은 앞으로 한독당에서 탈당할 몇몇 간부들과 합작하여 안재홍 씨를 중심으로 신당을 조직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한다.

 

이와 동시에 한동안 정치노선이 멀어지고 있던 김구 씨와 김규식 박사 간에는 저반 유엔조위에 대하여 동일한 주장을 한 것을 계기로 접근되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양차에 걸친 회담 및 조위에 대한 양 씨의 합작 건의와 더불어 금후 동향이 극히 주목되는 바이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8일)

 

현실론에도 나름의 타당성이 있었다. 그러나 ‘가능지역 총선거’ 방침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현실론을 내세울 이유가 없었다. 순응해야 할 ‘현실’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 시점에서는 원칙론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오스트레일리아대표가 7인의 총선 불참 선언을 중시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2월 26일 소총회 의결 전에 원칙론의 강력한 표현이 나왔더라면 캐나다대표나 오스트레일리아대표가 반대 이유로 이것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고 표결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소총회 의결에는 통과에 필요한 것보다 단 한 표 더 많은 찬성이 있었을 뿐이다.

 

“협의 대상을 위한 선거”라면 찬성했으리라는 프랑스대표의 발언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메논이 2월 19일 소총회 보고에서 제시한 3개안 중 제2안, 즉 남조선 임시정부를 목적으로 한 총선거 실시를 말하는 것이다. 총선거의 목적이 그처럼 제한적인 것이었다면 분단건국을 확정하는 것이 아니므로 중간파도 반대할 이유가 작았을 것이고 선거 보이콧을 결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3월 13일 저녁 늦게 메논 의장과 호세택 사무국장이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갔을 때의 대화 요지가 3월 14일자 <서울신문>과 <조선일보>에 보도되었다. 그런데 요지를 작성한 경교장 측에서 상황을 잘못 파악하고 있는 것 같다. 선거 목적이 중앙정부 수립이 아니라고 메논이 말한 것처럼 되어 있다.

 

메논: 남북회담에 관한 북조선측 회한이 4월30일까지 미도(未到)할 경우에는 선거에 참가함이 여하?

김구: 서한은 성의에서 발한 것이지 최후통첩과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회한 기간의 여부를 논할 것이 아니다.

 

메논: 남조선 제반 정세로 보아 선거에 참가 협력함이 여하?

김구: 나는 통일정부수립의 약속을 실행치 않은 귀하에게 실망한다. 귀국의 파키스탄 분할 이후의 혼란 상태로 보아 우리는 남한단선으로서 민족분열의 비극을 연출시킬 수 없다.

 

메논: 우리는 중앙정부를 수립하고자 금차 선거를 실시함이 아니라 협의대상으로 하려는 것이니 그 결과로는 남북회담도 잘 진행할 수 있고 통일정부수립도 잘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즉 참가함이 좋지 아니한가?

김구: 그런 말은 못 믿겠다. 첫째 소련 1국이 반대한다고 자기의 결의를 실행하지 못하는 UN이 금일에 통일이니 무엇이니 한다고 해서 믿을 수는 없다. 만일 이후에 통일을 시킬 수 있다면 지금은 왜 못하는가? 그리고 항간에는 벌써 내각 조직에 관한 준비공작이 여러 곳에서 진행되고 있으니 금차 조선 단선이 협의대상에만 그친다고 믿을 수는 없다. 협의대상 성립 이후의 남북회담은 남북통일회의가 되지 못하고 남북 국제회의로 변할 가능성이 농후하니 우리의 통일은 더욱이 곤란케 될 것이다.

 

메논: 그러면 북한에서 공산군이 남하하면 어찌 하겠는가?

김구: 그것을 구실로 서로 군비를 확장하면 결국은 미소의 전초전이 되며 동족상잔만 있게 될 것이며 우리의 통일독립 목적에는 유해무익할 것이다.

 

메논: 만약 귀하가 선거에 불참하면 모 1당이 전제농단하게 될 것이 아닌가?

김구: 나는 정의를 논할 뿐이지 정권을 다투는 것이 아니다. 어떤 정당이든지 그 노선이 진정한 애국적이요 그 치적이 양호만 하다면 허심종수(虛心從隨)라도 하겠다.

 

메논은 이틀 후 기자회견에서 위 기사에 나온 ‘협의목적설’에 대해 “김구 씨가 다소 오해한 것 같다. (...) 중국통역을 통해서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차이가 생긴 것일 것이다. 선거의 목적은 협의대상 구성이 목적이 아니고 조선중앙정부 수립을 위한 것이다.”라고 대답했다.(<동아일보> 1948년 3월 17일) 그리고 조선위원단 공보 제44호도 이 점을 지적했다.

 

항간에는 박두한 선거 목적에 대하여 다소 오해가 있다. 선거가 단지 협의를 목적한 것이라 한다. 이는 잘못이라 할 것이다. 또한 실시되는 선거가 남북조선에 있는 조선인 지도자간의 협의를 방해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에 있어서 본위원단은 선거가 실시되고 국민의회가 구성된 후에라도 여사한 협의가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소총회의장이 본인에게 보내온 서한과 같이 국민의회는 국민정부를 조직하는 토대가 될 것이며 또 정부조직은 조선인 자신이 결정한 문제다. 더욱이 서한은 소총회 결의에 근거하여 발해진 것이며 자유로운 통일민주조선을 위하여 위원단이 환대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본인은 동 서한이 모든 국민에게 깊이 연구되기를 바라는 동시에 오해가 풀리기를 바라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17일)

 

3월 15일의 회견에서 선거 반대 활동의 탄압 여부에 대한 문답도 있었다.

 

문: 지난 13일 경무부장 언명에 의하면 선거반대 행동은 처벌한다고 하였는데 자유분위기 양성 정신에 저촉되지 아니한가?

답: 그 문제에 대해서는 14-15 양일에 걸쳐 토의 중에 있는데 우리가 토의하고 있는 내용은 선거반대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를 반대하는 자들이 자유선거분위기를 교란할 경우에 대한 방책을 토의하고 있는 것이다.

 

“13일 경무부장 언명”이라 한 것은 아마 3월 12일 각 관구 경찰청장 회의에서의 발언을 가리킨 것 같다. 이 날 조병옥의 훈시는 두 가지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1. 총선거 실시가 국책으로 결정된 이상 좌우익을 막론하고 반대하는 행동은 위법행위로 엄중 처단할 것.

 

2. 경찰은 총선거에 관한 제 법령을 공정 엄격하게 집행하여 자유 환경을 조성할 것. (<경향신문> 1948년 3월 14일)

 

선거 보이콧운동을 경찰력으로 분쇄할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3월 12일 조선위원단 회의에서 시리아대표가 말한 것처럼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보장이 위원단의 큰 임무였다. 그런데 조병옥은 선거 실시가 ‘국책’이라고 주장하며 그에 대한 반대 행동을 ‘위법’행위로 처단하겠다고 한다. 어느 나라의 ‘국책’이며 어떤 법을 기준으로 한 ‘위법’이란 말인가? 기자의 질문에 대해 메논은 “자유선거분위기를 교란할 경우”만을 문제 삼는다고 대답했다.

 

5-10선거를 둘러싼 ‘투쟁’의 틀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단독선거 반대파는 “중앙정부 수립을 위한 가능지역 선거” 자체에 반대하는 명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남로당에서는 선거를 파괴하기 위한 전면적 투쟁에 나선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단독건국 추진세력은 경찰력만으로 부족했는지 거대한 ‘향보단(鄕保團)’까지 조직한다. “주민으로서 만 18세 이상 55세 이하의 남자는 단원이 될 의무가 있음(경찰관, 경비대원, 소방서원, 학생은 제외할 수 있음)”의 원칙으로 조직하는 기구였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6일) 조병옥은 이것을 자신이 제안했다고 자랑했다.(<나의 회고록> 193쪽) ‘자유선거’를 위하여?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