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환 <한글의 시대를 열다-해방 후 한글학회 활동 연구>(경인문화사 펴냄)

 

저자가 개그맨 출신 방송인이라는 사실, 그가 우리말글 사랑운동을 펼쳐온 사실, 그리고 40세 나이에 학부에 입학해 13년간 일과 공부를 병행한 끝에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따기에 이른 사실을 이 책을 보고야 알았다. 하나하나 의미가 큰 이 사실들을 엮으면 좋은 기사가 될 것도 같지만, 내 몫이 아니다. 책 내용에 관한 생각만 적더라도 한 꼭지 글에 담기가 벅차게 느껴진다.

 

지난 연말 통과된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부제와 같이 해방 후 10년간 한글학회(1949년 9월 이전은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조선어학회-한글학회는 하나의 민간단체이지만 1920년대 이래 민족의 말과 글에 관련된 활동이 이 학회에 집중되어 있던 사정을 놓고 본다면, 이 학회의 활동은 해방된 민족과 새로 세워진 국가의 어문정책을 전면적으로 비춰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에 세워진 두 정권의 성격을 어문정책의 차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독자로서 큰 소득이었다.

 

북한 건국과정에서 제2인자 역할을 맡은 김두봉이 주시경을 사사한 한글학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북한 정권이 어문정책을 중시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인민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 서울대 사학과 교수 김성칠이 적은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민공화국의 일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한글 전용이다. 그러나 이상스러운 건 한글을 전용하면서도 한문에서 나온 문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새 문자들을 만들어서까지 쓴다. ‘독보회’라는 건 늘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그밖에 “창발성을 제고하여서”라든가 “견결히 반대한다”라든가 “경각성을 높여서”라든가 “청소한 우리 인민공화국”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잘 쓴다. 모두 귀에 생소한 말이다. (...)

 

이북에는 적어도 김두봉 씨, 이극로 씨, 김병제 씨 들이 있는데, 그리고 문장가로도 이기영 씨, 이태준 씨를 비롯하여 한설야, 안회남, 김남천, 임화, 이원조 등 다사제제한데, 어쩌면 그렇게도 진부한 표현 방식을 언제까지고 답습하고 있는 것일까. 설사 의식적인 어떠한 움직임이 없더라도 오랫동안 한글을 전용하노라면 저절로 말씨가 부드러워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인데, 갈수록 어려운 한문 문자투성이가 되어감은 대체 어찌한 때문일까. (<역사 앞에서>(김성칠 지음, 창비 펴냄) 1950년 9월 10일)

 

이북의 어문정책에 큰 기대를 건 근거로 김두봉과 함께 이극로와 김병제의 존재를 제시했다. 이극로(1893-1978년)와 김병제(1905-1991년)는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 남북협상 후 평양으로 옮겨간 ‘월북’ 학자들이다. 김성칠이 9-28 서울 수복을 앞두고 북쪽으로 떠나는 친구 하나를 배웅한 뒤 적은 일기를 보면 당시 남한의 문화정책이 빈약하여 많은 문화인들이 북쪽을 향하는 실정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리하여 자꾸만 없어지는 문화인과 기술자들, 몇십년을 길러야 하는 이들을 하루아침에 다 떠나보내고 앞으로 대한민국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려는 것인지?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 심지어 음악가-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 학계로 말하여도 신진발랄한 사람들이 많이 가고 우리같이 무기력한 축들이 지천으로 남아 있다. 간 그들이 모두 볼셰비끼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사람들 또는 양심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죄다 가버렸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깊이 반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간 그들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남의 밥에 있는 콩이 더 굵어보이는 심리도 있었을 것이고, 턱없이 현실에 불만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는 젊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런데다 이북의 선전공작이 강력하고 또 좋은 미끼로서 나꾸었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뿐일까. 이남의 분위기는 과연 그들에게 유쾌한 기분으로 일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그들의 생활이 안정되었었나 함을 생각해볼 때, 결국은 그들의 등을 떠밀어서 38선 밖으로 몰아낸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정책이 너무나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같은 책 1950년 9월 26일)

 

해방에서 전쟁에 이르기까지 남북 간에 많은 인구 이동이 있었다. 상황에 몰려 본의 아니게 옮긴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발적 선택으로 고향이나 활동하던 곳을 떠나 건너편으로 간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이것을 월남 또는 월북이라 한다. 월남 인구가 월북 인구보다 훨씬 더 많았으나 문화예술인과 민족주의자 중에는 월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정황으로 보아 당연한 사실이다. 해방 직후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은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점령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역할을 맡은 반면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은 조선인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하고 자치 권한을 키워주었다. 이남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가 컸기 때문에 생계를 위한 월남이 많았지만, 민족-문화 정책에서는 이북이 유리한 입장이었다.

 

미군정에게는 조선인의 민족주의가 통치의 방해 요소였기 때문에 친일파 처단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경찰과 군정청에 적극 등용하여 권한을 쥐어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친일파가 ‘건국 주도세력’으로 자라났고, 그 세력을 발판으로 세워진 이승만 정권은 겉으로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민족주의를 등지는 성격과 민족문화를 경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민족문화의 중심 요소인 말과 글을 아끼는 사람들의 모임인 조선어학회는 1921년 창립 이래(1931년까지는 ‘조선어연구회’) 학회의 형태이면서도 민족주의운동의 성격을 가진 단체였다. 더욱이 1942년 10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제 말기 최대의 민족주의 탄압이었기 때문에 해방 당시 50여 명의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그 회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민족주의 지도자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해방 때까지 함흥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4인의 회원이 해방 이틀 후 출옥하여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조선어학회 재건 작업이 시작된 것은 해방된 민족의 문화 사업을 요구하는 상황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학회의 정치적 중립을 표방한 것은(1945년 10월 26일 간사회 결정) 분단 점령과 좌우 대립의 상황 속에서 학회 사업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를 이끈 이사(1946년 2월까지는 ‘간사’)진은 위의 4인 및 함께 옥고를 겪다가 먼저 출옥했던 장지영과 김윤경, 그리고 옥사한 이윤재의 사위인 김병제로 구성되었다. 학술적 권위와 민족주의적 명망을 겸비한 진용이었다.

 

학회본부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학회 간부들이 미군정에 협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장지영(1887-1976년)과 최현배(1894-1970년)가 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 들어가 어문정책에 관여했고, 조선어학회가 지켜 온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관철된 것은 그들의 역할 덕분이었다. 그러나 공개적 정책 검토 없이 실무적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기 때문에 훗날 이승만이 ‘간소화 파동’을 일으킬 빌미를 남겼다. 미군정의 적극적 어문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 활동은 민간 차원과 회원들의 개인 차원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북에서는 정권 지도부에게 적극적 어문정책의 의지가 있었지만 그를 뒷받침할 전문 인력이 아쉬운 형편이었다. 이극로와 김병제의 월북이 이북의 필요에 부응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황인데, 저자는 이 사정을 분명하게 밝혀냈다. 특히 박지홍 교수의 인터뷰에서 매우 의미가 큰 증언을 끌어낸 것이 눈길을 끈다.

 

“1948년에 남북협상 있기 전에 이극로 박사가 정재표 선생을 만나자고 그래. 그렇게 약속을 해가지고 우리가 책을 같이 내기로 했는데, 내가 북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그 이유는 김두봉 선생이 편지를 했는데 나라가 두 쪼가리 나더라도 말이 두 쪼가리 나서는 안 된다. 그러니 사전 편찬이 중한데 북에 사람이 없다. 남쪽에는 최현배 선생만 있어도 안 되나? 그러니 당신은 북으로 와 달라. 그래서 내가 응낙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북으로 가게 되면 정 선생님에게는 은혜를 잊지 못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거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북으로 가게 되면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래 남북협상 때 안 돌아왔어요. 못 돌아온 게 아니라 벌써 뭐 식구들을 다 보냈다 그러더구먼요. 그래 그 분이 정말로 우리 국어학을 우리 국어를 우리말을 위해서 갔나? 그게 아니면 북쪽의 정치를 위해서 갔나? 모두 오해를 하고 있거든. 그런데 분명히 북에 갈 때 자긴 정재표 선생한테 얘기할 때 난 오직 거기 가서 조선말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서 간다고.” (59-60쪽)

 

김두봉이 이극로에게 와서 무슨 일을 해달라고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는 것은 정황으로 봐서 매우 그럴싸한 일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58년이 지난 2006년에 와서야 간접 증언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이다. 수십 년 반공독재 기간 동안 ‘월북자’ 이극로에 대한 연구는 물론, 언급조차 못하고 있던 상황 때문에 의미 있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짤막한 증언 하나에서만도 여러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김두봉이 이극로를 초청한 사실 외에도 이극로가 북으로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북행 계획을 비밀로 해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비밀로 하면서도 원고를 주기로 했던 출판인에게는 의리상 알려주지 않을 수 없는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사실까지 이 증언에 담겨 있다. 간접 증언이기는 하지만 원로 학자의 자발적 진술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

 

늦게나마 이런 증언을 열심히 모은 저자의 노력을 치하한다. 텍스트에 매여 사는 역사학도로서는 손이 가기 어려운 분야인데 방송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어 반갑다.

 

연구 대상 인물의 인간성에 대한 접근에서도 방송인의 감각이 좋은 효과를 가져오는 것 같다. 박지홍 교수의 위 증언에서도 이극로의 인간성이 살짝 드러나는데, 박 교수의 글에서 재인용한 이극로의 아래 발언은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여러분! 우리 학회가 낸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최현배 선생의 문법 체계가 그 토대가 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략) 최현배 선생의 문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큰 사전의 체계를 이렇게 빨리 세울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훌륭한 체계를 세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물론 명사, 대명사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최현배 선생이 굳이 이름씨, 대이름씨로 해야 하겠다고 우기신다면, 우리는 그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맞서서 명사-대명사로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흡사 남이 다 지어 놓은 집에 가서 벽지는 무슨 색깔로 하라, 못은 어디에 치라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최현배 선생은 왜정 때 생명을 걸고 우리말의 문법을 집대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선생이 세운 체계를 두고 용어만은 우리 생각에 맞게 고치겠다고 하겠습니까?” (53쪽)

 

이극로의 활동 범위를 대략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1947년 <조선말큰사전> 첫 권 발간을 앞둔 토론에서의 이 발언을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은 껍데기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그가 조선어학회의 중심 사업인 사전편찬 사업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된 경위도 이 발언이 보여주는 자세에서 석연히 이해가 된다.

 

최현배는 한국어 문법 연구의 업적 못지않게 고집 세기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순 우리말에 대한 그의 집착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한편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름씨, 그림씨 등 문법 용어의 고집이 그 단적인 예다. 1947년 조선어학회의 토론 분위기도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대다수 회원이 그의 급진적 주장을 난감해 하는데도 그는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극로는 돌파구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용어 자체로는 ‘이름씨’보다 ‘명사’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문법을 세워준 최현배가 고집한다면 그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존중의 마음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최현배로서도 자기 주장의 급진성을 인정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물러설 수 있었을 것이다. 성향이 서로 다른 동년배 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표현이 오고가는 것이 존경스럽고도 사랑스럽다.

 

이극로는 학회 간부 중 이례적으로 정치활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 이전의 사전 편찬 사업에서도 당대 일류 명사들과 교분을 가진 그의 ‘섭외’능력이 특출한 역할을 맡았고, 그 교분이 해방 후 그를 정치활동으로 끌어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활동은 민족운동의 범위를 지켰고, 파당적 정치활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1947년 가을 조선 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어 분단건국의 위험이 짙어지면서 이극로의 정치활동이 활발해졌다. 홍명희, 김병로,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이 이끄는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해서 남북협상을 제창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홍명희, 백남운 등과 함께 북쪽에 눌러앉았다.

 

이극로가 북한의 첫 내각에서 무임소상을 맡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실제로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밝힌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이다. 평양에서 그의 활동 내용은 바로 초기 북한의 어문정책 그 자체였다. 김두봉이 그를 부른 뜻, 이에 응해 그가 북으로 향한 뜻이 모두 이뤄진 셈이다. 그들이 내다본 것처럼 북한 정권이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문화정책을 꾸준히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의 꾸준한 어문정책에 대비되는 것이 이 책 뒤쪽에서 다룬 남한의 ‘한글맞춤법 간소화 파동’이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날 담화 중 한 대목에 ‘간소화 파동’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국문을 쓰는 데 한글이라는 방식으로 순편한 말을 불편케 하든지 속기할 수 있는 것을 더디게 만들어서 획과 음을 중첩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한글 초대의 원칙이라 할지라도 이 글은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니 이 점에 깊이 재고를 요하여 여러 가지로 교정을 하여서 우리글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340쪽)

 

이 메시지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이승만은 이듬해 한글날 담화에서도 같은 메시지를 되풀이했다.

 

“근래에 이르러 신문 게재나 다른 문화 사회에서 정식 국문이라고 쓰는 것을 보면, 이전 것을 개량하는 대신, 도리어 쓰기도 더디고 보기도 괴상하게 만들어놓아 퇴보된 글을 통용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이것을 교정하지 못하면 얼마 후에는 그 습관이 더욱 굳어져서 고치기 극난할 것이매 모든 언론기관과 문화계에서 특별히 주의하여 속히 개정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340쪽)

 

이승만은 문제를 꺼내놓기만 한 채로 몇 해 동안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국회 내 세력도 약하고 전쟁으로 경황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그가 재선 후 국회에 안정 기반을 확보한 1953년 봄 이 문제를 꺼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4월 27일 백두진 국무총리가 각 부처 장관과 각 도 지사에게 보낸 훈령으로부터 한글 간소화 파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우리 한글은 원래 사용의 간편을 안목으로 창조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온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철자법은 복잡 불편한 점이 불소함에 비추어 차를 간이화하라는 대통령 각하의 분부도 누차 계시기에 단기 4286년 4월 11일 제32회 국무회의에서 정부 문서, 정부에서 정하는 교과서, 타이프라이터용 철자는 간이한 구 철자법을 사용할 것을 의결하였던 바, 기중 교과서, 타이프라이터에 대하여는 준비상 관계로 다소 지연되더라도, 정부용 문서에 관하여는 즉시 간이한 구 철자법을 사용하도록 함이 가하다고 사료되오니, 이후 의차 시행하기 훈령함. (343쪽)

 

1년 남짓 이어진 파동 속에서 벌어진 별의별 우스운 일, 웃지 못 할 일을 훑어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여기서는 넘어가고, 1954년 7월 하순 이승만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면서 파동도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7월 24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행 맞춤법이 옳다고 하는 것은, 학생들이나 또는 언론인들이 한글의 이치가 어떻게 된지도 모르면서 습관에 따라 사용하기 때문이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여도 좋다.” (377쪽)

 

이승만의 ‘간소화’ 주장의 본질은 ‘문법 폐지’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받침, 철자, 띄어쓰기 등 일체의 규제를 풀어 “소리 나는 대로” 적자는 것이었다.

 

청년 이승만이 국내에서 활동할 때는 조선어학회도 생기지 않았고 한글맞춤법 통일안도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그 시절의 문자생활에만 익숙하던 그가 “옛날 성경처럼 적으면 될 것을 왜 그렇게 까다롭게 만들었냐?”고 한글학자들의 그 동안 업적을 몽땅 갖다 버리라는 것이었다. 민족문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독재자의 자의적 판단으로 인해 어문정책이 1년 넘게 마비되는 그런 국가가 초기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식민지시대에 민간-학계의 민족운동으로 추진되던 <큰사전> 편찬 사업은 건국 후에도 한글학회의 민간사업으로 계속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업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간소화 파동으로 지체시키기까지 하고, 심지어 미군정 시기부터 받아온 록펠러재단의 지원까지 받기 어렵게 만든 사태조차 있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이승만 정권은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그것이 입에 발린 민족주의였다는 사실을 한글 간소화 파동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1953년 파동이 시작될 때 문교부장관 김법린과 편수국장 최현배는 한글운동에 오랫동안 노고를 바쳐 온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파동 속에서 자리를 떠나야 했다. 남쪽의 어문 사업은 아무개가 있으니 자기는 마음 놓고 북행할 수 있다고 이극로가 말했던 그 최현배, 그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전후 6년간 편수국을 맡아 어문정책에 열과 성을 다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의 뜻을 키워주지 않았다.

 

누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나? 김법린이 비운 문교부장관 자리를 맡은 이선근은 1954년 7월 12일 국회 질의 중 간소화 정책에 대한 의원들의 비판에 대해 “수일 전 북한괴뢰들이 방송할 때 사용한 말과 같다.”고 대꾸했다고 한다.(372-373쪽) 아, 이 더러운 기시감!

 

 

Posted by 문천

 

김기협: 오늘 오전 장덕수 살해사건의 판결이 군정재판에서 나왔습니다. 3월 2일의 첫 공판 후 꼭 한 달 만이군요.

실행범 박광옥, 배희범과 김석황, 조상항, 신일준, 손정수, 김중목, 최중하 6인의 교사범, 모두 8인이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밖에 조엽과 박정덕 두 사람은 10년형이고요.

 

한 사람을 죽인 책임으로 여덟 사람의 목숨을 내놓으라는 것이 법리에 합당한 것인지 의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군사재판이라 하더라도 나름의 공정성과 타당성을 갖지 않는다면 사법제도로서 신뢰를 얻을 수 없죠. 군정재판에 대한 민심이 어떻습니까?

 

안재홍: 군정재판에 대한 민심은 기본적으로 미군정에 대한 민심과 통하는 거죠. 해방 후 첫 겨울의 식량사태에는 미군정의 책임이 컸고, 그때 인민의 신뢰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1946년 7월말 정판사사건 재판정 소요사건 때 체포된 50명 중 44명에게 1주일도 안 되어 3년 이상의 징역형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엿장수 재판’이란 말이 생겼습니다. 경범죄 정도의 사안을 놓고 그런 중형 판결을 무더기로 내놓다니...

 

힘을 가진 자는 힘없는 자의 질시를 받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힘의 활용에는 절제가 필요한 것인데 미군 군정재판은 그런 절제의 기색을 보인 일이 없습니다. 사법제도의 원리에 깊은 이해를 갖지 않은 일반인들도 미군의 횡포가 일본인보다 못하지 않다는 비판을 하게 된 바탕에는 힘없는 자의 피해의식도 깔려 있는 것이죠.

 

한편 식자들 간에는 재판관할권의 혼란이 걱정거리입니다. 똑같은 사안을 조선인 사법부에 맡기느냐, 군정재판에 회부하느냐 결정이 군정사령관 마음대로예요. ‘포고령 위반’은 군정재판 소관이라고 하는데, 그 포고령이라는 게 걸리지 않는 게 없는 거잖아요? 법령이 미비한 진주 초기에 쓰라는 것이 포고령이었는데, 필요도 없게 된 그 포고령을 생각날 때마다 도깨비방망이처럼 꺼내서 휘두르니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가 자리 잡을 길이 없죠.

 

김기협: 하지만 최근 대한민청 사건으로 군정재판의 인기가 좀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작년 4월 김두한 일당이 좌익 운동원 십여 명을 납치해 마음껏 고문-학대하다가 그중 한 명을 죽이기에 이른 것은 단순 살인사건과 차원이 다른 끔찍한 범죄였죠. 제가 형법에 관해 잘 모르지만 지금도 조직폭력은 단순폭력과 다른 차원의 중죄로 취급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조선인 사법부에서는 이 사건에 상해치사죄 등을 적용해서 직접 살해자에게 7년형을, 그리고 두목인 김두한에게는 “벌금 2만 원 또는 160일간 육체노동”을 판결해서 세간의 조소와 분노를 불러일으켰죠. 김두한이 무법천지로 날뛰는 배경이 경찰총수 조병옥과 장택상임을 세상이 다 알고 있는데, 이제 사법부마저 흉악무도한 범인을 풀어주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울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상고 단계에 있을 때 군정재판으로 이관되었습니다. 결국 지난 2월 중순 판결이 나온 것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3월 15일 하지 사령관의 형량 조절을 거쳐 발표되었죠. 재판에서는 14명에 사형, 2명에 종신형의 판결을 내렸는데 하지가 김두한 한 명의 사형만 확정하고 나머지 15명은 한두 등급씩 감형한 결과였습니다.

 

하지가 너무 깎아준 것 아니냐는 불만은 있어도, 조선인 사법부에서 처리했던 결과에 비하면 제대로 처리한 셈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만족했죠. 그래서 군정재판이란 것이 쓸 만한 데도 없지 않다는 의견도 나오고요.

 

안재홍: 나는 대한민청 사건 이관이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판 결과만 놓고 보면 사법 정의가 살아난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사법제도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과정입니다. 새로운 혐의가 나타난 것도 아닌데 이미 조선인 사법부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을 사령관의 결단으로 이관한다는 것은 조선인 사법부의 권위를 여지없이 짓밟은 짓입니다.

 

1심 판결은 물론 형편없이 잘못된 것이었죠. 죄질이 나쁠 뿐 아니라 법질서를 정면으로 유린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범죄에 ‘상해치사죄’라고? 우발적인 싸움에서 죽음이란 결과가 우발적으로 나온 것이라고? 백주 대낮에 수십 명이 떼거리로 달려들어 십여 명을 납치해서 저항도 못하는 상대를 죽이고 병신 만든 극악한 사건의 수괴에게 벌금형이라니, 이거야 바로 ‘살인면허’ 아닙니까. 일반 백성은 어떻게 숨 쉬고 살라는 말입니까. 조선인에게 사법권이라고 쥐어준 것을 이런 식으로 행사하다니,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인은 안 돼.” 하던 게 이 사건의 검사와 판사 같은 조선인들 대문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데도 길을 가려야 합니다. 왜 1심 같은 잘못된 판결이 나왔는가? 사법권을 주되 올바른 사람에게 제대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병로 사법부장과 이인 검찰총장은 훌륭한 인격자들이지만 그분들에게는 재판과정을 관리할 충분한 권한이 없고, 그 밖의 사법부 간부들 중에는 자질이 부족하고 편파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좌익 법관들을 추방할 때 양심적이고 중립적인 인물들이 많이 쓸려나갔어요. 김병로 부장과 이인 총장으로서는 역부족인 상황입니다.

 

대한민청 1심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면 2심에서는 올바른 판결이 나오도록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사법부가 사법부 노릇 제대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 타당한 이유도 없이 사건 하나만을 쏙 빼서 이관한다면 그러지 않아도 바보이던 조선인 사법부를 완전히 병신 만드는 거죠. 하지 사령관이 사안의 본질을 살필 줄 모른다는 것이 늘 문제인데, 대한민청 사건 이관은 그중에도 심한 일이었습니다.

 

김기협: 그렇습니다. 하지가 모처럼 올바른 생각을 하긴 했는데 방법이 엉망이었네요. 사건 하나 제대로 처리하겠다고 사법부 얼굴에 먹칠을 했으니 “빈대 한 마리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 할지요.

 

장덕수 살해사건으로 돌아와서, 사건의 본질은 정치적 암살인데 사형 8인이라는 건 아무리 군사재판이라도 심한 것 같습니다. 대한민청 경우 14명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가 사령관 조정을 통해 한 명 사형으로 줄였지만, 그때는 판결 내용을 조정 전에 공개하지 않았죠. 대폭 조정이 예정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판결 내용을 그대로 공개한 것으로 보아 사령관 조정에서도 큰 감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교사범으로 사형 판결을 받은 6인이 김구 선생의 가까운 추종자들이고 그분 자신의 연루 소문까지 떠돌았습니다. 그분이 원래 하지 사령관과 사이가 안 좋은데다가 최근 총선거 반대로 적대관계가 심해진 상황이 이 재판에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죠.

 

안재홍: 판결 자체는 미군정재판의 틀을 벗어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사령관 조정에 있으니까 두고 봐야죠. 그런데 2월의 대한민청 경우와 달리 이번에 판결 내용을 바로 공개했다는 점에서는 미군정이 김구 선생을 대하는 태도가 비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사령관 조정에는 당신 태도가 감안될 것이다.” 하고 압박을 가하는 느낌이 들어요.

 

김구 선생이 증인으로 두 차례 출정한 것을 놓고도 그분 주변에서는 그분에 대한 음해의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그렇게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을 증인으로 요청한 것은 변호인단이었어요. 그분의 수하로 자타가 공인하는 피고들이 그분의 연루를 주장하고 있었으니 그분의 출정은 해명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작년 6월 23일의 반탁시위 때 미군정 인사들이 김구 선생이 선동에 나섰다며 의법처리를 주장할 때 내가 끝끝내 막았습니다. 그분이 간접적 작용은 했을지 몰라도 현장에는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해 두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번은 시위사건이 아니라 살인사건이고, 피의자들이 선생의 연루를 주장하고 있는 판입니다. 위신 따질 일이 아니죠.

 

김기협: 그 재판 얘기는 그 정도로 하고... 요즘 모든 조선인의 관심이 총선거와 남북협상에 쏠려 있습니다. 선생님이 1년 남짓 맡아 온 민정장관직의 사의를 표한 것도 거기에 관계가 있는 것이겠죠? <민세 안재홍 선집 2>(지식산업사 펴냄) 252-253쪽에 수록되어 있는 “하지 사령관에게 보낸 공한”을 옮겨놓습니다.

 

나의 민정장관 취임은, 행정권 이양의 취의에 따라, 남조선 미군정에 협력하면서 조선인 자신에 의한 정치의 민주주의적 쇄신과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한 산업경제 재건 건설 등 적극 추진으로, 미국과 외타 연합국의 원조에 관한 남북통일과 진정한 민주주의 독립국가의 완성을 조속 실현하고자 하는 염원에서, 남조선 미주둔군사령관 존 R. 하지 장군의 추천을 수락함으로써 된 바이다.

 

이래 1년이 넘는 동안, 미소 협조는 파열되었고, 본인의 정치노선의 일 주요부분을 구성한 좌우합작도 실패되었고, 정치적 혼란과 민생문제의 곤란도 가중한 현상으로써, 최초 소기한 목적이 성취되기 어려운 사태인 위에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 단행으로 된 현 단계에 있어서는, 평일 그 정치노선이 본 단계성과 합치되는 인물로서 민정 최고책임을 부하케 함이, 정치도덕상 지당한 조처이고, 공인의 출처로서도 의당한 태도임이 명백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 덕망-역량 및 신임이 아울러 적합한 인물에게 이 직무가 이동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에 남조선과도정부 민정장관의 임을 사퇴합니다.

 

또 본관 재직의 중에 거듭하여 상당한 정치적 도의적 비방을 받았사오나, 본인으로서는 그 점에는 관심 아무런 애체(碍滯)되는 바 없는 사실이오며, 주둔군샤령관-군정장관 등 줄곧 나에게 대한 근본적인 신뢰는 변치 않으신 점을 감하(感荷)합니다.

 

또 정국 다난한 즈음, 홀로 현직을 떠나는 의리상 결함되는 점 있지 않을까 숙려하였사오나 역량 있는 인물을 당무케 함이 더욱 큰 책무라고 판단하옵기 여차 사임을 단행키로 한 바이오니, 이상의 사정 심량(深諒)하시고 취허(就許)하심을 근기(謹冀)합니다.

 

‘가능한 지역의 총선거’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그 총선거를 관리하는 민정장관 직에 머무를 수 없다는 뜻을 둘째 문단에서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평소 태도로 본다면 아무리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총선거라도 그 선거가 조금이라도 제대로 이뤄지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을 하실 것 같은데, 아예 관여하지 않으려 하시는 것이 뜻밖입니다. 후임자가 누가 될지는 차치하고, 선생님이 빠진 후 과도정부의 다른 간부들이 공정하지 못한 태도로 임할 것이 걱정되지 않습니까?

 

안재홍: 그렇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기왕 앉아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은 있어요. 그러나 1년 남짓 이 자리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더 이상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온갖 욕설과 협박을 들으면서도, 그래도 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지켜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보면 이뤄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취임할 때 김구 선생께서 “금후 그대는 도로무공(徒勞無功)일 것이고, 결국 득담(得談)만 많이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 그대로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되었을까, 혼자 앉아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결기가 부족한 샌님 기질을 스스로 탓하는 마음이 많이 듭니다. 난세에는 영웅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꼭 세상이 알아주는 영웅이 아니더라도 영웅다운 기개 없이는 지금 조선이 처한 난세에서 조그만 성취라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시국에서 성실한 노력만으로 내 입장을 떳떳이 한다는 것이 소인배의 자기기만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민족의 운명이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이제 나도 더 결연한 태도를 세워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김기협: 위 편지에서는 생각하신 것을 다 적지 못하셨죠. 그런데 끝내 자리에서 물러나신 후 7월에 “민정장관을 사임하고-기로에 선 조선민족”이란 긴 글을 발표하셨습니다.(<민세 안재홍 선집 2> 258-284쪽) 해방 후 겪어온 일에 비추어 시국의 변화를 서술한 글입니다. 아직 쓰지는 않았어도 지금 마음속에 있는 내용이겠죠. 그중 민정장관 직에 관련된 내용에 지금 말씀하신 뜻이 담겨있는 것 같아서 옮겨놓습니다.

 

민정장관 재임의 전말은 후회함은 없다. 다만 그를 통하여 민족운동 상의 득실을 일별하건대, 제일로 미군정 개시 당시 ‘인공’ 방지의 때문에 보수적 세력과 결련하게 된 이유는 증설(曾說) 있고, 다음에 김규식 박사를 의장으로 입의를 열고 나를 민정 수반에 들어 정부 각계에 애국자를 더 많이 등장케 하여, 써 인심을 일신한다고 서둘렀으나, 무위로 마칠 수밖에 없이 된 것이 제2차적 단계요, 이리하여 김-안의 등장이 중도반단으로 무위일밖에 없이 된 때 공포되었던 행정권 이양은 결국 조선인의 무능 또는 불공명(不公明)과 건과(愆過)가 조건과 같이 되어 전연 취소 말살됨과 같은 결과로 된 것은 또 제3단계라고 하겠다.

 

요컨대 조선인은 자체 상호의 취송배제(聚訟排除)에서 민족적 총력을 자신 말살하였고, 미국인은 1차의 전폭적 신임을 조선인에게 표현치 못한 채로 3주년을 지나, 지금 바야흐로 가능지역의 총선거에서 조선인의 독립정부를 산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독립정부 됨에 대하여 그 거대한 기여 있기를 기원치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북조선에서는 예상하였던 인민공화국 선포 준비의 비보(飛報) 왔다. 오호. 기로는 의연 기로이구나.

 

미국인의 조선인 불신, 그리고 조선인의 무능, 공명치 못함과 잘못된 행동이 민족을 위기로 몰고 온 원인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군정재판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구조적 문제지요. 그런데 미국인과 조선인 양측의 문제를 나란히 지적하는 데 그쳐서는 애매한 양비론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문제의 극복을 위해 노력하려면 초점을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초점을 맞춰야 하겠습니까?

 

안재홍: 힘을 가진 쪽의 문제를 먼저 봐야겠죠. 조선인의 문제라 함은 일부 조선인의 문제입니다. 극좌와 극우의 문제죠. 그런데 미국인이 극우 조선인에게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좌우 대립이 극심해지고 양심적 조선인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된 겁니다.

 

미국인의 문제도 엄밀히 따지면 일부 미국인의 문제죠. 그런데 바로 그 일부 미국인이 조선 문제를 좌지우지하는 열쇠를 쥐고 있단 말입니다. 과거 일본인도 양심적인 사람이 많았지만 조선 문제를 좌지우지한 것은 침략주의적 일본인이었죠. ‘해방’이라고 하지만, 제국주의적 외세에 민족의 휴척이 걸려 있는 상황에는 근본적으로 변함이 없습니다.

 

먼저 봐야 할 문제는 외세의 문제이지만, 궁극적으로 중요시할 문제는 조선인의 문제입니다. 앞으로 세계대전을 몇 차례 더 겪는다 해도 민족의 힘이 충분치 못하면 외세의 힘에 민족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해방을 계기로 우리는 큰 희망을 일으켰지만, 이제 굳어져 가고 있는 분단건국이 지금 상황에서 우리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단계에는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그 운명 속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Posted by 문천

 

1948년 3월 25일 이북 지도부가 제안한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와 “소범위의 지도자연석회의”는 서로 다른 층위의 제안이었다. 대표자연석회의(연석회의)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북민전) 초청으로 남북협상의 중심 무대를 만들자는 것이었고, 지도자연석회의(지도자회담)는 김일성과 김두봉 개인 초청으로 연석회의의 원활한 진행을 돕는 보조적 역할을 맡게 하자는 것이었다.

 

지도자회담은 김구와 김규식이 2월 중순에 편지로 보낸 제안에 대한 화답의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북측의 반응이 남측의 제안에 대한 ‘동문서답’이라 하여 남북협상에 대한 북측의 성실성을 의심하는 근거로 보는 견해도 연구자들 중에 더러 보이는데, 꼭 그렇게 볼 일은 아니다. 남북협상의 의미에 대해 북측도 나름대로 보는 시각이 있었을 것이니, 협상 방법에 대해 자기네 제안을 내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북측이 제안한 연석회의와 지도자회담에 남측 참가자 중에도 좌익의 비중이 많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남측의 추진 주체로 민련과 한독당이 부각되어 있었는데 한독당은 물론이고 민련에서도 좌익을 배제하거나 전면에서 후퇴시켜 놓고 있었다. 균형 잡힌 남북협상을 위해서는 남측 대표로 민련과 한독당 외에 좌익의 역할도 필요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느 정도의 역할과 비중이 적절한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절충이 필요한데, 절충을 위한 접촉이 충분치 못한 상황이었다는 것이 아쉬운 일이다.

 

여운형이 있었다면 바로 이런 절충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서중석도 남북협상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이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여운형은 독립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남북 좌우가 연합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여, 그 때문에 남한의 좌익은 물론 우익과 미군정과도 가까이 지내고자 하였으며, 북한과도 계속 연락을 취하였다. 이러한 그의 개방적이고 유연성 있는 태도는 분명히 한쪽 편을 들기를 요구하는 경직된 상황에서는 미군정과 좌우익 모두로부터 불신을 받을 수 있었다. 여운형은 미국과 미군정, 우익에 대해 ‘평화적 투쟁’의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것이 근민당과 공산당의 차이점이라고 강조하였다. 하지 장군이 보기에 여운형의 죽음의 시점에서 좌우합작의 유용성은 이미 끝나고 있었고, 따라서 여운형의 존재도 이제 미군정에게 부담만 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당시의 상황을 검토해볼 때 설득력이 있다.

 

여운형의 죽음은 민족 내부로는 통일전선운동이 한층 더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이보다 더 큰 의미는 강대국과 한반도의 분단과의 관계에 있었다.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에 의한 냉전논리가 1947년 7월 이후 한반도에도 적용됨으로써, 강대국에 의한 한반도의 분할은 필연적인 상황에 접어들었다. 이와 같이 강대국이 노골적으로 힘의 논리를 적용하여 분할하려고 할 때, 거기에 저항하는 세력은 발붙일 땅이 없게 된다. 여운형의 죽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강대국의 강요에 한민족이 손을 놓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럴수록 유연하고 폭넓은 통일전선의 형성으로 민족민주세력이 민족적 지반을 넓혀 민족 내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완화시키고 민족문제, 변혁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이 요구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족적 지반이 강고하면 그만큼 강대국의 세계체제와 그것에 호응하는 추종세력의 영향력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588-589쪽)

 

이념에 의한 분단 추세를 민족의식의 힘으로 억제하기 위해서는 스킨십이 필요했다. 친족 사이라도 접촉을 많이 갖지 않으면 관계가 소원해진다. 여운형의 훌륭한 점을 받드는 시각이 여러 갈래 있지만, 이념과 권력의 장벽을 뛰어넘어 스킨십을 늘리려 한 그의 노력에 무엇보다 높이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고 테러 위협을 많이 겪어야 했던 것도 바로 이 노력 때문이었다.

 

노동당 간부 출신으로 남한에서 말년을 보낸 박병엽의 회고가 몇 권의 책으로 소개되어 있는데, 그중 여운형의 이북 왕래에 관한 내용이 따로 책 한 권 꾸밀 수 있을 만큼 많이 있다.(<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펴냄) 90-184쪽) 그가 죽은 반년 후 남북협상이 현실화를 바라볼 때 그가 있었더라면 남측과 북측, 좌측과 우측 사이의 입장을 절충하는 데 그가 맡았을 역할을 충분히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그 역할을 어느 정도 대신한 사람이 홍명희와 백남운으로 보인다. 박병엽의 회고 중에는 두 사람이 대북 접촉을 증언한 내용도 많이 들어 있다.(같은 책 186-207, 212-223쪽)

 

홍명희는 1946년 3월 하순, 8월 초순, 1947년 11월 중순, 그리고 1948년 2월 하순에 평양을 방문했다고 한다. 김구와 김규식의 편지가 평양에 도착한 시점에서 이뤄진 홍명희의 네 번째 방문에 대해 박병엽은 이렇게 증언했다.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정국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던 48년 2월말 홍명희는 네 번째 평양 방문길에 오릅니다. 이때는 북에서 이미 통일(임시) 헌법이 인민들의 토의에 부쳐진 데 이어 2월 10일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이 임시 헌법을 확정, 발표한 뒤였습니다. 때문에 곧바로 남북협상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이 자리에선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의 정당-단체 지도자들이 협의회를 개최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습니다. 이에 앞서 김구-김규식은 48년 2월 16일 남북협상을 제의하는 서한을 보낸 바 있었죠.

 

하지만 이 시점에서는 남한에서 단독선거 자체가 어떻게 실시될지 추이를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 데다 3월말에 북로당 2차 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죠. 따라서 남북협상의 일정을 그 뒤로 잡자는 점을 확인하는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홍명희와 북로당 지도부는 남북협상을 성사시킬 수 있는 연합전선 성격의 조직체를 남한에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인식을 같이했습니다.”

 

백남운은 1946년 1월말부터 시작해 1948년 2월말까지 열한 번이나 평양을 방문했다니 여운형 못지않게 부지런히 38선을 넘어 다닌 셈이다. 1948년 2월말의 마지막 방문에 관한 박병엽의 구체적 증언은 없는데, 홍명희와 비슷한 역할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김구-김규식의 서한 제안을 벗어나지만 남측에서 받아들일 만한 회담 방법을 기획하는 데 북측에서는 그들의 의견을 참고로 했을 것이다.

 

여운형이 살아있었다면 맡았을 역할과 실제로 홍명희-백남운이 맡은 역할 사이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 홍-백 두 사람이 4월의 남북협상 이후 이북에 주저앉았다는 사실이 이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남북합작을 위해 없는 길이라도 만들어서 가려는 여운형의 적극적 의지가 두 사람에게는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은 양심적 지식인이었지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소극적 선택을 하는 입장에 머무른 것이다.

 

1948년 2월말에 여운형이 평양에 있었다면 북측의 제안이 남측이 받아들이기에 더 좋은 것이 되도록 더 강하게 요구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4월의 남북협상이 더 큰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고 흔히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을 밝히는 ‘연구’ 과정에 적용되는 얘기일 뿐, 사실의 ‘해석’에는 가정이 꼭 필요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남북협상의 양측 입장을 절충하고 조율한 구체적 사실은 밝혀져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협상의 성사를 위한 노력이 없었을 수 없다. 김구 김규식 등 7인 지도자가 3월 12일 발표한 ‘총선거 불참 성명서’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독립 달성을 확집(確執), 김구 씨 등 선거 불참을 공동성명”

 

김구 김규식 김창숙 조소앙 조성환 홍명희 조완구 등 7씨는 12일 별항과 같은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통일과 독립은 우리 전 민족의 갈망하는 바이나 현 세계의 양대 세력의 분할점령으로 인한 대립으로 남북이 분열 각립할 계획은 목하 실현 1보전까지 이르렀다. 남북 양 정부가 수립되는 시에는 그 대항 정책으로 외군 주둔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있고 인민의 부담 역시 증가될 수 있고 남에서 미불(美弗) 원조를 기대한다 하더라도 농단은 모리배가 하고 채무는 일반 인민이 지게 될 것이니 백해(百害)만 있고 일리(一利) 없다.

 

반쪽이 먼저 독립하고 나머지를 통일한다는 것은 다 가능성 없는 것이다. 과거의 귀결로 보아 우리 문제는 국제적 해결이 불가능함은 명백한 바이니 이제는 우리 민족으로 자결케 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미소 양국과 UN은 이 민족자결의 기회를 주도록 힘써주기 바란다.

 

우리들은 현 정세에 추수하는 것이 개인의 이익임을 알고 있으나 민족 참화의 촉진은 양심의 허락하는바 아니므로 가능한 지역 선거에는 불참하고 통일독립 달성에 여생을 바칠 것을 동포 앞에 맹서한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13일)

 

7인 중 5인이 임정 출신이고, 김창숙과 홍명희도 민족주의자로서 그 못지않은 명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나는 이 성명서가 민족주의 진영의 남북협상에 대한 진심과 성의를 확인해 달라는 북측의 요구에 부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2월말 평양에 갔던 홍명희와 백남운 등이 그 요구를 전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백남운은 민족주의자보다 사회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기 때문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민족주의자 입장에서는 가능지역 선거를 반대한다 해서 꼭 불참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거가 끝내 강행될 경우 거기 참가해서 다음 단계 진행에도 최선을 다한다는 노선을 세울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독당과 민련 내에도 선거 보이콧 여부를 놓고 논쟁이 이어져 왔다. 3월 2일 민련 회의의 분위기는 이렇게 보도되었다.

 

“민련 상위(常委)-정위(政委) 연석회의 총선거 참-불참으로 격론”

 

민련 상위와 정무위원 연석회의는 2일 하오2시부터 삼청장에서 열고 남조선 총선거 문제를 토의하였는데 참가파와 불참파 사이에 격론이 야기되었다 하며 결말을 보지 못한 채 5시경 폐회하고 3일 동 장소에서 속회하였다. 그런데 총선거에 민련 자체로는 참가 않을지라도 개인 자격으로 출마함은 방지할 도리가 없는 것이 동 연맹의 태도인 듯하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4일)

 

그런데 3월 8일 민련 상무위원회에서는 선거 불참을 결의했다고 한다.

 

“총선거에 불참, 민련서 결의”

 

민련에서는 8일 오후1시부터 삼청동 김 박사 숙소에 상무위원을 소집하고 총선거 참가 여부에 관하여 장시간 논의하였다 하는데 동 회합에서 이극로 씨를 중심으로 하는 일파에서는 적극적으로 참가를 주장하였다 하며 윤기섭 김붕준 씨를 중심으로 하는 파에서는 참가하지 말고 반대도 하지 말고 중립적 태도를 주장하였다 하며 권태석 장권 씨 등은 참가를 반대하였다는바 결국 표결에 부치게 되어 참가하지 않기로 되었다 한다. 그리고 동 연맹에서는 9일 남조선 총선거 실시는 국토를 양단하고 민족을 분열할 우려가 있으므로 동 연맹은 선거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요지 담화를 발표하였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10일)

 

윤기섭 김붕준 등의 “중립적 태도”라 함은 당분간 참-불참의 태도 표명을 하지 말자는 것이니 결국은 참가파라 할 수 있다. 민족주의자들은 참가를 주장하고 좌익은 불참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련에서 좌익을 뒷전으로 돌리고 있었던 사정으로 본다면 민족주의자들의 주장이 우세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정당도 아닌 민련이 불참 방침을 표방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참 결정이 내려진 것은 그런 결정의 필요가 강력하게 존재한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남북협상파는 김구-김규식 연명의 편지를 평양으로 보내놓고 북측의 반응을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3월 8일 민련의 선거 불참 결정과 3월 12일 민족주의자 7인의 선거 불참 성명은 북측의 반응을 촉구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선거가 끝내 강행될 경우 거기 참가해서 최선의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갖고 있었을 것이다. 반면 좌익이나 북측에서는 이남 선거가 모든 의미에서 실패로 돌아가기 바라는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3월 10일을 전후한 민족주의자들의 선거 불참 방침 결정은 남북협상 성사를 위한 좌익에의 양보라고 해석된다.

 

이극로의 이름이 나온 김에 막 나온 책 하나를 소개한다. 정재환의 <한글의 시대를 열다>(경인문화사 펴냄). 최근 성균관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꾸민 것인데, 이극로를 비롯한 민족주의 학자들의 활동상을 많이 보여주기 때문에 정치 분야에만 서술이 쏠려 있는 해방공간에 대한 관점을 잘 보완해주는 책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