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5일 평양방송에 이어 3월 27일에 김구-김규식 앞으로 김두봉-김일성의 편지가 전달되었다. 김규식의 비서 송남헌은 전달 장면을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성시백이 편지를 가져왔다는 얘기를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에게 들었다고 회고했다.

 

성시백(1905-1950)은 황해도 평산 사람으로 1928년 중국으로 건너간 후 오랫동안 중국공산당 정보기관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1946년 귀국 후 김일성의 직계 연락원으로 이남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2월 체포되어 전쟁 발발 직후 처형당했다. 밝혀져 있는 활동 내용만도 대단한 인물인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활동은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업을 끝내기 전에 그 활동 범위를 한 차례 정리해 보고 싶은 인물이다.

 

송남헌의 회고에 따르면 성시백이 가져온 원본 편지는 하얀 인조견에 타자한 것으로 “김구 김규식 양위 선생 공감”으로 시작해서 김일성 김두봉 두 사람의 이름과 도장으로 끝맺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튿날 타이프용지에 찍은 사본이 또 전달되었다고 한다.

 

이 편지 내용은 당시 공개되지 않았다. 편지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송남헌의 회고가 큰 도움이 된다.

 

원본은 이처럼 김 박사에게 전달되었는데, 북으로 보낸 편지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편지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내용 중에 당신들이 3상회의 결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어 국토가 분단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식의 무례하고 오만불손한 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국민의 신망을 한 몸에 모으고 있는 백범과 우사를 훈계하고 책망하는 식으로 편지를 보냈기 때문에 창피해서 도저히 원문 그대로를 공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원문을 공개하지 않자, 이를 두고 항간에는 또다시 별의별 억측이 난무했다. 하는 수 없이 4월말 편지의 전문이 아닌 요지만을 공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원래 없던 “2월 16일 보내신 혜함은 받았습니다”라는 문구가 들어 있어 나는 지금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원문을 직접 읽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김구 김규식 두 사람이 편지를 보낸 사실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조차 없었다. 북의 입장에서 언급할 리도 없었다.

 

왜냐하면 “편지를 잘 받았다”고 하는 것은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 김두봉보다 먼저 남북협상을 제의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되는데, 북한이 이 점을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누군가가 뒤에 써넣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데, 삼청동 김 박사측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원본을 갖고 있는 마당에 없는 문구를 일부러 만들면서까지 삽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아마 백범 주변의 사람들이 적어 넣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백범 측에서 공개한 내용에 그런 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과 편지를 직접 주고받을 수 있는 통로가 없던 백범 진영에서 아무래도 편지를 직접 받지 못한 것을 그런 식으로 얼버무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나는 지울 수 없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101-102쪽)

 

위 내용 중 편지 요지를 “4월말” 공개했다는 것은 ‘3월말’의 착오인 것 같다. 4월 1일자 <경향신문>에 발표된 요지가 보도되어 있다.

 

“선거 반대책 강구 - 남북회담 서한 내용 요지”

 

김구 씨와 김규식 박사는 지난 2월 16일 공동 명의로 김일성 김두봉 코로트코프 소 사령관 등 3 요로에 각각 서한을 보냈는데 이에 대하여 김일성 김두봉 양 씨는 연서로써 지난 3월 15일부로 회한을 보내왔는데 동 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고 경교장에서 31일 발표하였다.

 

1. 2월 16일자의 우리 서한을 받았다는 것.

2. 미국의 주장으로써 쏘의 제의가 부결되고 UN위원단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려는 것은 찬성할 수 없다는 것.

3. 우리의 일은 우리가 해결하려는 본지에서 남북조선 소범위의 지도자연석회의를 1948년 4월초에 평양에서 소집할 것을 동의한다는 것.

4. 이 회의에 참가할 성원 범위는 남조선에서는 김구,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 백남운, 김붕준, 김일청, 이극로, 박헌영, 허헌, 김원봉, 허성택, 유영준, 송을수, 김창준, 북조선에서는 김일성, 김두봉, 최용건, 김달현, 박정애 이외 5명.

5. 토의할 내용은 (1) 조선의 정치 현세에 대한 의견 교환, (2)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반동선거 실시에 관한 UN총회 결정을 반대하며 투쟁할 대책 수립, (3) 조선 통일과 민주주의정부 수립에 관한 대책 연구 등등.

6. 만일 우리 양인이 동의할 때는 1948년 3월 말일 내로 통지하기를 희망한다는 것.

 

이남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뜻을 함께 하면서도 남측과 북측의 생각에 차이가 있었고 신뢰도 확고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송남헌의 회고에서 알아볼 수 있다. 평양에서 온 편지의 요지 발표에 왜곡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볼 수 있다. 송남헌은 “2월 16일자의 우리 서한을 받았다는 것”만을 지적했지만, 평양 측 제안 내용을 25인 지도자연석회의만으로 소개한 데도 의문이 있다. 실제로 평양에서 준비한 중심 행사는 더 범위가 넓은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였고, “소범위의 지도자연석회의”는 그 준비행사 정도의 의미였다.

 

서중석은 <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 남북협상>(한울 펴냄) 160-161쪽의 주78에서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회 소장의 이 편지가 진본인지 의문이 있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송남헌의 회고도 이 의문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근거다. 이 의문은 당시 남북 간의 불신이 남긴 하나의 흔적이라 할 것이다. 송남헌은 이 편지에 “백범과 우사를 훈계하고 책망하는 식”의 대목이 있어 원본 그대로 공개할 수 없었다고 했는데, 서중석이 같은 책 159쪽에 인용한 내용이 그런 대목의 하나였을 것이다.

 

“양위 선생이 중국으로부터 조국땅에 들어설 때에 우리는 당신들의 활동을 심심(深深)히 주목하였습니다. 당신들은 평범한 조선사람이 아닌 일정한 정치단체의 지도자들로서 조선인민의 기대와 배치되는 표현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조국땅에 들어온 후에 금일까지 민족입장에 튼튼히 서서 조선이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여나갈 수 있는 정확한 강령과 진실한 투쟁을 문헌으로나 실천으로나 뚜렷하게 내놓은 것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삼상결정과 쏘미공동위원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거듭 파열(破裂)시키었습니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쏘미 양군이 철거하고 조선문제 해결을 조선인 자체의 힘에 맡기자는 소련 대표의 제의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무관심한 태도로 묵과하기도 하였습니다. 더욱 유감스러운 것은 조선에 대한 유엔 총회의 결정과 소위 유엔 조선위원단의 입국을 당신들은 환영하였습니다.”

 

미소공위를 반대했다는 것은 김구에게만 적용되는 비판인데, 유엔위원단을 환영했다는 것은 김규식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이다. 김규식 등 중간파는 유엔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남북협상 진행을 통해 유엔을 설득한다는 입장인 반면 이북 지도자들은 소련이 부정한 유엔 개입을 원천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겉으로 나타나는 남북 간의 입장 차이였다.

 

이 차이의 배경은 궁극적인 건국 방안의 차이에 있었다. 이남 단독건국 추진 세력을 저지한다는 당면 과제는 양측이 공유하고 있었지만, 그 이후의 방향에 대한 양측의 생각이 달랐다. 중간파는 좌우익의 타협을 바라보고 있었던 반면 이북 지도자들은 이북에서 추진해 온 건국 방안에 이남이 따라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북에서는 ‘자주건국’을 추진해 왔고 그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 왔다. 이북에서 추진해 온 자주건국 사업을 놓고 분단건국에 이북이 앞장선 것처럼 해석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이북 지도자들은 이 사업이 ‘북조선’의 단독건국이 아니라 전 조선의 통일건국을 위한 준비라고 주장해 왔다. 명분이 없지 않은 주장이다. 이남에서 미군정의 지나친 개입으로 민의 수렴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동안 이북에서 대다수 인민이 만족할 만한 안정된 정치체제를 구축해 온 것은 통일건국이 이뤄질 경우 유용한 인프라로 쓰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분이 타당해도 실제로는 ‘민주혁명’을 앞세우느냐 ‘민족통일’을 앞세우느냐 하는 문제가 있었다. 민주혁명을 앞세워 분단건국도 불사한다는 ‘반민족적’ 입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입장을 대표한 것이 ‘민주기지’ 노선이다. 궁극적으로는 민족통일국가를 지향한다고 하면서도 민주혁명이 가능한 지역에 먼저 민주기지를 만들고 나서 다른 지역까지 혁명을 확대한다는 것이니,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 분단국가를 세워놓고 나서 이북까지 무슨 수단으로든 통합하겠다는 이승만 노선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다.

 

1946년 11월 16일자 일기에서 북조선의 인민위원회 선거를 설명하다가 민주기지 노선을 언급한 일이 있다. 1948년 봄 시점에서는 이 노선이 분단건국의 큰 추동력이 될 만큼 자라나 있었다. 민주기지 노선이 이북의 정치체제 구축 단계에 따라 겪은 변화를 이신철은 <북한 민족주의운동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57-58쪽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1. 미군과 소련군의 분할점령에 따른 남북정세에 근거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창설기.

2.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부터 미소공위 결렬 때까지 민주개혁과 미소공위를 통한 통일정부수립운동 시기.

3. 미소공위 결렬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시기.

4. 정부 수립 이후 전쟁 발발 직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도 아래 진행되는 통일정부수립운동 시기.

 

이들 시기의 특징을 민주기지론의 주체와 연대의 대상 측면에서 본다면, 첫 번째 시기는 공산주의자들 간의 연대와 분리기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시기는 좌익과 중도좌파 간의 연대 시기, 즉 남북민전의 연대 시기이다. 세 번째 시기는 다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전반기는 1948년 2월 남북협상론이 대두되기 직전까지 중도우파와의 연대를 적극 모색하는 시기이다. 후반기는 남북협상부터 정부 수립까지로, 우파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 시기이다. 이때까지 연대의 범위는 점차 넓어지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네 번째 시기에 이르면 민족주의 우파와의 연대가 엷어지면서 다시 좌파와 중도파의 연합으로 연대 범위가 축소되고 만다.

 

이북 정치체제는 1947년 초 선거를 통한 인민위원회 수립으로 민족자결의 기본조건을 충족시키는 단계까지 발전해 있었다. 미소공위를 통해 최종적인 국가 형태의 완성을 이룰 준비를 해온 것이다. 1947년 가을 미소공위 파탄에 이어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에 조선 문제가 상정되자 이북 지도부는 독자적으로 국가 형태 완성 작업에 들어갔다. 1948년 2월에는 헌법 초안이 발표되고 조선인민군 창설이 공포되었다. 미국과 이남 극우세력이 유엔을 통해 정부수립 과정에 들어선 데 맞서 ‘자주건국’의 길로 매진한 것이다.

 

그 시점에서 중간파와 김구 세력의 남북협상론이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이북 지도부에게 두 가지 방향으로 기회를 열어주는 호재였다. 하나의 방향은 포기했던 통일건국의 희망을 되살리는 것이었고, 또 하나의 방향은 분단건국이 결국 진행되더라도 이남에 수립될 정부의 명분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남의 중간파-우익 남북협상파는 첫 번째 방향에 희망을 걸었지만 이북 지도자들에게는 두 번째 방향이 더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특히 민주기지 노선의 입장에서는.

 

김구와 김규식은 김두봉, 김일성과의 ‘4김 회담’에서 남북 대표가 대등하게 협상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북 지도자들이 이남 협상파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할 수 있었을까? 이남 민심이 협상파를 지지한다고는 해도, 이남의 정치현실을 남북협상으로 이끌 실력을 협상파가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게다가 김규식은 몰라도 김구는 이북에서 최고 악질 반동분자의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황해도 출신인 김구가 귀국 이래 평양은커녕 고향조차 한 번 찾아보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1946년 3-1절 평양 폭탄테러의 세밀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았어도, 김구에게 책임이 전혀 없는 일이었다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다.

 

이북 지도부에게 김구와 김규식의 협상 제안은 ‘투항’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북 입장에 이로운 제안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는 하면서도 지금까지 추진해 온 자기네 노선을 크게 바꿀 뜻을 일으키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체면을 세워주되 자기네의 현실적 실력이 관철될 수 있는 ‘연석회의’ 방안을 준비한 것이었다.

 

 

Posted by 문천

 

샌디에고에 다녀와서

 

 

김기협 선생님,

오늘은 곧장 응답을 합니다.

어제까지 샌디에고에 다녀왔습니다.

3박 4일간 아시아학회(association for asian studies) 총회가 열렸거든요.

1년에 한번씩 열리는 아시아학의 박람회 쯤 되더군요.

본래 학술회의는 그 고답적인 측면이 마땅치 않아서 잘 가지 않는 편인데,

마침 올해는 가까운 곳에서 열려서 바람도 쐴 겸 구경하고 왔습니다.

차를 타고 두 시간을 가깝다고 하니, 거리감각이 한국과는 또 다른 셈이지요.

그래서 오늘은 밀린 메일 쓰면서 쉬어가자 싶던 차, 선생님 메일을 받았습니다.

 

혹시나 했던 공동 작업과는 점점 멀어지네요.

그렇다면 저는 이 교신을 더욱 잘 활용해서,

선생님이 쌓아오신 내공을 쏙쏙 더 빼어가 제 작업의 밑거름으로 삼아야겠습니다.

선생님은 점점 더 '현장'으로 귀의하시는 듯 하고,

저는 점점 더 관심의 범위가 커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번 학회에서도 유독 중국의 서쪽으로 관심이 기울더라고요.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등등,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에 있는 문명권의 '초기 근대'라고 할까,

유라시아의 지난 천년의 역사에 대한 공부가 무척 재미납니다.

선생님이 그간 혼자서 즐겁게 해오셨던 공부가 이런 쪽이 아니었을까 짐작이 되고요.

그래서 그런 안목과 식견이 쌓인 분의 한국현대사 서술은 어떻게 다를까 기대가 됩니다.

 

대학원에서의 제 얕은 경험을 빌자면,

지금 한국(사)학을 하는 후속세대들이 더 관심의 지평이 좁은 것 같아요.

저마냥 이웃나라 역사는 물론 국문학이며 중문학, 정치학, 지역학 들쑤시고 다니다가,

정작 동양사 선생님들의 눈총을 받는 경우도 바람직하지야 않겠지만,

대학원 내내 한국사 수업만 듣는 친구들도 좀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제가 2년여간 이끌었던 세미나에서 다른 학교, 다른 전공, 다른 나라 친구들 엮어내서,

'通-統-筒'이라고 이름을 지었던 적이 있어요.

문자 그대로 경계 너머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거점을 만들자 한 것인데,

중국, 일본 전공하는 친구들은 외국으로 나오고, 지금은 사실상 와해된 것 같습니다.

그 중에 뜻이 맞는 후배 둘이 별도의 살림을 꾸려서,

동아시아 현대사 책을 읽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고요.

세미나에서 이런 시도에 대한 토론도 해보라고 편지를 주었는데,

답이 없는 것을 보면 왜 밖에 나가서도 참견이냐, 못마땅했나 봐요.

 

왜 그럴까 종종 생각해 보고는 하는데,

한글전용세대의 문제는 아닐까 하는 '감'이 들기도 합니다.

한자 문맹의 보편화가 영어 일변도와 무관치 않아 보이고,

그것이 한국현대사나 현대문학, 나아가 사회과학 전반의 '깊이의 부재'와 직결되지 않나.

이는 비단 학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 전체의 '저열함'과도 관계가 있지 않을까.

20세기에 한자와 가장 급진적으로 단절했던 베트남에서 이 문제를 좀 깊이 생각해 보자,

스스로 하나의 과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얼핏 386세대가 꼭 한글전용 1세대쯤 되더군요.

그들의 역사적 실패(라고 저는 2012년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또한 뿌리와의 단절의 소산이 아닐까.

좌/우의 신청년들이 주도했던 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가 막을 내린 것 아닌가.

인쇄술-유럽-알파벳에서 인터넷-중국-한자로의 전환이 진행중인 것은 아닐까.

한자는 활판을 만들어야 하는 인쇄술 시대에는 불리한 문자였지만,

디지털 공간에서는 그 특유의 조합-재조합-변형의 '레고 놀이'의 면모를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한자 네트워크와 그 문자로 구현된 세계관이 접속하면?

표음문자 표기로 민족/국가들이 갈라졌던 근대세계에서,

표의문자를 공통으로 사용하되 저마다 읽는 발음은 제각기였던 중화질서와 유사한 세계가 펼쳐지지 않을까,  

그런 엉뚱한 '감'만 굴리고는 합니다. 

이 디지털과 한자의 접속 또한 베트남에서 궁리할 숙제거리로 여기고 있고요.

한 백년 전에 지석영이 펴낸 <아학편>을 보니,

한자 하나를 통하여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그리고 영어를 동시에 배우게 했더군요.

'디지털-아학편'이라는 컨텐츠 사업도 해볼만 한것 아닌가?

중국이 세계의 중원이 되는 시대가 머지 않았다면?

스마트폰과 디지털-아학편이 결합하면?

미래 세대의 수요까지 고려하면 엄청난 시장일텐데, 하고 흰 꿈도 꿔봅니다.

샌디에고에서 디지털 아시아학에 관한 세미나에 몽땅 참여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샌디에고에서도 한국학 전반에 대한 불만/불안이 없지 않았어요.

너무 끼리끼리만 논다고 할까요.

백낙청 선생이 특별 섹션에 초청되어 오셨습니다.

분단체제론과 최근 한반도 동향에 대한 특강을 하시고, 몇몇 분의 코멘트와 토론이 진행되는 식이었죠.

문자 그대로 빈 틈 없는 '만석'이었고,

그 자리를 채운 이들의 면면도 충분히 상징성을 담는 것이었어요.

그럼에도 온통 한국학 관련자라는 점만은 저로서는 좀 아쉽더군요.

제가 재미있어 뵈어서 찾아다녔던 섹션에는 다양한 국가/민족/인종의 구성이 어우러지는 반면에,

또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거든요.

그렇다면 샌디에고까지 와서 영어로 하는 한국 세미나를 구태여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요.

이런 형식적인 면은 별도로 치더라도,

한반도의 20세기 경험이라는 것을 잘 풀면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을 법한데,

그런 면에서 여전히 취약해 보입니다.

중동의 오리엔탈리즘, 남미의 종속이론, 인도의 탈식민/서발턴연구 등등.

무언가 "made in (divided) korea" 담론이 나와 세계와 소통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밖에서 본 중국사' 작업에는 손을 놓기로 하신 것이라면,

(제가 꿍꿍이 하고 있는 매체가 정말로 출범하게 되면 간곡히 부탁드려 볼까 싶지만요)

'밖에서도 통하는 한국사'를 써주셨으면 합니다.

'20세기 동아시아'를 통해 담고자 했던 문제의식을 농축해서 수출하는 것이지요.

물론 수출 이전에 내수가 튼튼하게 다져져 순항하시기를 바라고요.

 

사실 여쭙고 싶은 게 많습니다.

이번 샌디에고 회의에서도 유교 등 동방사상(여기서는 중국사상이라 했지만.)이 지구적 정치이론이 될 가능성이나,

국제관계의 '중국화' 등 흥미로운 지점이 적지 않았거든요.

'유교 국가'에 대한 확신(?) 같은 걸 갖고 계신 듯 한데,

유구한 농경사회의 정치체제가 산업사회, 나아가 탈산업사회와 어떻게 조우할 수 있는지,

그 이행의 경로를 흐릿하게나마 전망하고 계신 것인지,

또 선생님과 통하는 구석이 있어 보이는 미야지마 히로시의 한국사 이해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등등.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하자면,

하루에 한 편씩 메일을 써도 모자랄 듯 합니다.

진중한 얘기는 제 생각이 모이면 질문을 겸하여 풀어놓겠습니다.

 

-이병한 드림

  

 

 

Posted by 문천

 

메일을 빙자한 독백

 
 
무척 바쁠 것 같네요. LA 떠나기 전에 할 일, 비엣남 계획, 게다가 학위논문 심사도 진행 중이죠? 그것도 모잘라 동아시아방송 구상까지... 나 같은 모노타스크 모델로는 상상하기만도 숨이 가쁩니다.
 
오늘 편지는 편안히 훑어보세요. <해방일기> 이후의 일과 생활에 대한 생각이 자꾸 퍼져나가서 한 차례 정리하고 싶은데, 병한님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식만 빌립니다. 병한님에게 특별히 하고 싶은 얘기는 모두 접어놓고, 내 얘기만 할 겁니다.
 
제일 큰 결정은 한국현대사에 말뚝 박기로 한 겁니다. '중국사 전공'은 이제 잊어버리기로 했어요. 그거 내걸어 어디 취직할 일도 없고... 사마천도 현대사 연구자였잖아?! 하는 1월 23일 포스팅이 있었죠. 동아시아의 전통사학은 자신이 속한 사회와 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표준이었다는 생각이 더 확실해졌어요. 근대적 제도에서 벗어난 내 위치를 활용해서 전통사학의 자세에 접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라나고요. 다른 사회, 다른 시대에 관한 지식과 이해를 활용하더라도 한국현대사를 설명하는 수단으로...
 
일을 한국현대사에 말뚝 박는다면 거처는 한국에 말뚝 박게 되겠죠. 아내도 국적까지 취득하고 보니 그냥 한국사람으로 살아도 괜찮겠다는 눈치고요.
 
할 일에 대해서도 매듭 지을 생각이 줄어들었고요. <해방일기> 끝내면 해방되어 원래 동네로 돌아갈 생각이었고, 그 다음 일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구상을 시작했는데, 이제 "실록"이고 "사론"이고 얼마 시간 들여서 얼마 분량 일을 하겠다는 한계선이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일 자체의 성질에 따라 적합한 크기로 쪼개 적당한 방법으로 해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방법상의 '해방'을 맞은 셈입니다.
 
"사론" 구상은 지키고 있는데, 40년이나 60년 기간을 단일한 포맷으로 처리한다는 생각은 바뀌고 있어요. 몇 개의 시기로 나눠 독립적인 책으로 만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연대기적 서술 구조는 지키려고 합니다. 환원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려면 연대기적 서술이 역시 좋을 것 같아요. 서론과 결론의 개관 외에는 사건과 현상을 시간 순서에 따라 배열하는 거죠.
 
앞으로 몇 달 동안 노력할 일은 함께 공부하는 이들과 접촉방법을 찾는 겁니다. 혼자 공부하는 버릇이 오래되었는데, 바꿔야겠어요. 아무 책임감 없이 재미로만 공부하던 시절의 버릇인데, 이제 내 공부의 쓸모를 찾는 단계에서는 '연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연대' 얘기하니 유시민 선생 생각이 나네요. 이번 낸 책에서 일, 놀이, 사랑과 함께 연대를 인생의 중요한 내용으로 제시한 것이 인상적이더군요. 그렇죠. 그 친구랑도 연대를 해야죠.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친구도 역시 한국현대사 다루는 책을 계획하고 있더군요. 우선 한 권을 예정하고 있는데, 그 한 권 만들고 나서 현대사에 관심 끌 것 같지가 않아요. 그 친구랑은 작업 얘기를 많이든 적게든 계속하게 되겠죠.
 
현대사 전공자들 세미나에라도 들이밀 데 없을까 해서 정병준, 서중석 두 분 선생님께 도움을 청했는데,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네요. 서 선생님은 "요즘 젊은 친구들 나랑도 잘 안 놀아줘요." 하며 좀 서운한 기색까지.
 
후지이 선생에게 전화해서 오는 수요일에 만나기로 했어요. 그 양반 같으면 아웃사이더 내지 주변인의 입장을 겪어봤기 때문에, 그리고 한국의 학술-교육 제도에 덜 매인 편이기 때문에 그런 '연대'의 필요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봅니다. 끼어들 만한 세미나가 없으면 함께 하나 만들어보자고 청할지...
 
서중석 선생님은 대학원 강의를 맡아보는 게 좋지 않겠나 하는 말씀도 해주시는데, 얼핏 그럴싸하게 생각되는 점도 있었지만 차분히 생각하니 내게 적당치 않은 길 같아요. 내가 필요로 하는 건 동료지, 제자가 아니잖아요. 병한님도 혹시 내게서 취하는 게 좀 있다 해서 행여 날 꼰대 취급하지 말아요. 당신은 모처럼 얻은 내 동료니까.
 
<해방일기> 뒤의 일은 가급적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궤도에 접근하려 합니다. 해 바뀌면서 원고 생산 시작하는 정도로 내다보고 있어요. 지금 생각에는 (1)'해방공간'을 첫 작업단위로 삼아 시동을 건 후 (2) '건국-전쟁기', (3) '자유당-민주당 체제', (4) '군사정권기'로 찍어 나가게 되지 않을까... 각 단위의 분량과 체제는 그 단위에 적합하게 각각 정하는 것으로 하고요.
 
있는 생각 가볍게 털어놓는다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가 생각이 자꾸 퍼져나가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네요. 아직 갈피가 덜 잡힌 걸 확인했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잘 지내세요~
 
김기협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