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부터 5년간 제주도에 살다가 IMF사태를 맞아 당시 상황에서 제주도의 활로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서 1998년 1월 14일부터 20일까지 <한라일보>에 "IMF와 제주"란 제목으로 6회에 걸쳐 글을 올린 일이 있습니다. 서류를 정리하다가 그 글이 나왔는데, 15년 전 글이지만 아직 생각할 점이 있는 것 같아 여기 옮겨둡니다.

 

 

1. 다시 바라볼 기회

 

이것도 엘니뇨현상인지, 푹한 날씨에 겨울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중에 엉뚱한 IMF한파가 온 국민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있다. 국가파산이니 모라토리엄이니 지금까지 넘겨온 고비들도 아슬아슬한데, 알 만한 사람들의 말로는 아직까지 오픈게임도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태는 봄이 되며 진짜로 심각하게 벌어지기 시작해 백척간두의 상황이 얼마나 오래갈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방뉴스를 봐도 석유 옥수수 등 수입 원료의 가격폭등으로 농업, 수산업, 목축 등 제주의 기반산업들이 원가상승의 벽에 부딪치고 있다는 소식이 꼬리를 문다. 그래도 서울에 다니러 가서 보고 느끼는 총체적 파국에 비하면 여기는 안온한 편이다. 이곳이 외진 곳이라서 소식이 더딘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몇몇 전문가의 얘기를 들으며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의 말로는 이번 사태가 국내 1차산업에는 전반적으로 유리한 효과를 가져오는 면이 많다고 한다. 환율인상으로 인해 수입 원료의 가격이 오른다 해도 1차산업에서는 2차산업보다 원가의 구성비가 낮기 때문에 영향을 적게 받는 반면, 수입품에 비해 제품의 경쟁력이 높아지는 율은 훨씬 높기 때문에 수요 증가의 효과가 더 크리라는 것이다. 요컨대 수입개방의 타격을 우리 1차산업에 심각하게 만든 원흉이 낮은 환율과 과소비 풍조였는데 이 요인들이 제거됨으로써 우리의 1차산업이 올바른 대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차산업의 비중이 큰 제주로서는 IMF사태가 행운의 기회라고도 할 것이다.

 

해외관광과 경쟁하는 제주의 관광산업도 마찬가지다. 신혼여행을 비롯한 해외관광의 발길이 제주로 많이 돌아서고 있다. 이것은 종래 이따금 있던 반짝성 절약운동과 질이 다르다. 경기 위축으로 인해 국민의 관광 지출 총액은 얼마간 줄어들 것이다. 그 감소는 해외관광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날 것이며 국내 관광지 중 해외여행의 대체성을 가장 많이 띠고 있는 제주는 상대적으로뿐 아니라 절대량에 있어서도 관광수입의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

 

감귤시장의 전망도 밝다. 환율 인상은 오렌지 등 수입 과일에 대한 제주감귤의 경쟁력을 일거에 곱절로 늘려주었다. 전체적으로 유리한 가격이 형성되고 작은 알까지 시장상품화될 것이 예상된다. 주스 원료로 쓸 파치도 갑절 가까운 값을 받게 될 것이다. 당장은 혼란스럽고 괴롭더라도 제주산업의 양대축인 감귤과 관광이 잘 풀려나간다면 제주의 앞날은 밝게 내다볼 수 있다.

 

한국이 한국의 장래를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시점에서 제주는 제주의 장래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두 가지 중요한 생각의 가닥이 있다고 나는 본다. 그 하나는 과거의 거품을 걷어내고 현실의 밑바닥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한국의 다른 모든 지역과도 함께하는 조건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주의 고유한 조건을 올바로 음미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광산업과 감귤시장의 경우에서 보듯, 깉은 외부조건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제주는 다른 지방과 다른 고유한 반응조건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거품 속에서는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던 이 특이성을 잘 음미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자체가 지금의 위기상황에서 얻는 하나의 전화위복의 결실이 될 것이다.

 

 

 

2. 노동집약형 관광산업으로

 

관광은 매출액으로 제주도 전 산업의 약 40%를 점하는 중요한 분야다. 그러나 대다수 도민은 제주의 관광수입이 제주인의 주머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불만감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매출 규모에 있어서도 비중이 크고 부가가치 효과도 높은 골프장과 특급호텔 등 거대시설은 거의 전부가 외지자본의 소유로, 제주인의 수입은 종업원의 급료와 약간의 재료 납품에 불과하다.

 

중문단지 건설 이래 외지의 대자본을 중심으로 관광산업이 개발된 결과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개발계획은 단지 위주의 자본집약형을 추구해 왔다. 이것이 제주 관광산업의 성장을 위한 유일한 길일까?

 

제주 관광산업의 기본자원은 자연이다. 이 자원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에 따라 자본과 노동력이 투입돼야 함은 물론이다. 국제수준의 호텔조차 제대로 없던 시절에 대자본을 끌어들여 중문단지를 만든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시본시설이 웬만큼 갖춰진 이제, 반반한 자연조건을 가진 곳이면 빼놓지 않고 거대단지와 거대시설로 도배를 해야 할 지는 또 다른 문제다.

 

이곳에 와서 돈을 써줄 관광객의 입장으로 눈을 돌려 보자. 하룻밤에 20만 원씩 하는 특급호텔에 어떤 사람들이 묵어 왔는가. 일부 고소득층 아니면 공금으로 위로성 행사를 가지는 경우나 평생 한 번만이라도 실컷 사치를 해보겠다는 신혼여행객들이다. 거품이 걷힐 때 제일 먼저 씻겨나갈 사람들이다. 실제로 요즘 특급호텔의 이용률이 크게 줄어든 반면 1~2급 호텔의 이용률이 높아진 '알뜰관광' 풍조를 눈여겨 봐야 한다.

 

제주관광의 마케팅 표적은 한국의 도시중산층에 집중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제주의 자연과 인문 조건을 가장 요긴하게 음미할 계층이며 시장규모도 제일 크기 때문이다. 이 계층이 지금까지는 해외관광의 주류를 이뤄왔는데 근래의 상황 속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어서 제주관광 속의 비중을 늘릴 전망이다.

 

이 계층의 기본성향은 향락관광보다 휴양관광이다. 온갖 신기한 향락시설이 다 있는 대도시에서 빠져나와 또 새로운 향락을 찾기보다는 제주의 편안한 환경 속에서 푸근한 휴식을 취하고 싶어 한다. 관광객이라는 별도의 인종으로 행세하기보다 최소한의 안락성만 보장된다면 민박집에 머물며 제주사람들과 같은 식당에서 밥먹고 싶어 한다. 이름붙은 관광코스에서 벗어난 곳을 즐길 기회라도 있으면 횡재라도 한듯 좋아한다. 혹시 은퇴한 뒤에 아주 와서 살 수는 없을까 이런저런 사정을 알아보기도 한다.

 

30년 전에 비하면 제주도의 민간자본 축적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몇백억대 이상의 대자본만을 중심으로 진행돼 온 지금까지의 관광개발 정책 아래서는 큰 몫을 맡을 수가 없었다. 자금난과 불경기의 전망으로 거대시설 건설을 위한 외지자본 유입의 중단이 예상되는 지금이 역내자본에 근거한 중소규모 사업자를 육성할 기회다. 규격화된 호텔방을 그만 늘려야 특색있는 민박집이 늘어날 것이요, 대형 관광식당가를 만들지 말아야 주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기는 식당 스타일이 살아날 것이다.

 

관광산업은 서비스를 파는 산업이다. 이웃처럼 느껴지는 민박집 아저씨, 식당 아줌마들의 소탈한 웃음과 대화를 대다수 관광객은 잘 훈련된 직업적 서비스보다 좋아한다. 제주의 보통사람들이 의욕적인 자영업을 근거로 관광 일선에 나서야 관광수입의 알맹이가 제주에 떨어진다. 직업적 관광업자들이 지키는 관광단지와 관광코스에 관광객을 격리시키는 관광정책은 이제 바뀌기 바란다.

 

 

3. 이제는 하나의 도시다.

 

미국의 50개 주 중 49개 주에는 지방자치가 주(state)-군(county)-읍(township)의 3 단계로 되어있다. 유일하게 하와이주만은 읍이 없이 두 단계로 되어 있다. 하와이의 네 개 군 가운데 하나는 전체 인구의 70%를 점하는 오아후섬이고, 또 하나는 전체 면적의 60%가 넘는 하와이섬이다.

 

하와이만 두 단계의 지방자치를 행하는 것은 다른 주들보다 작아서가 아니다. 미국 본토에 하와이보다 인구가 적은 주는 열 개 가까이 되고 면적이 더 작은 주도 둘이나 있다. 이유는 하와이가 섬이라는 데 있다. 하와이, 오아후, 마우이, 카와이 등 네 개의 큰 섬에 인근의 작은 섬들을 붙여서 각각 하나의 군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개발과 관리의 단위가 된다. 각각의 단위를 일관성 있게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 밑에 별도의 자치단위를 안 두는 편이 좋은 것이다.

 

제주도의 과거 행정조직을 본다면 조선시대의 1목(牧) 2현(縣)이나 지금의 2시 2군이나 모두 육지부의 조직방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섬 지역이라는 특성을 감안하지 않은 방법이다. 일제시대의 도제(島制)처럼 제주도 전체를 도보다 작고 군보다 큰 하나의 단위로 보아 1읍 12면으로 편성한 것이 제주의 고유한 조건에는 오히려 합당한 방법이었다. 크고작은 섬을 많이 가진 나라라서 섬 지역의 특성을 인식하는 안목은 나았던 것인지.

 

면적이 1만 평방킬로미터가 넘는 하와이섬, 인구가 백만 가까이 되는 오아후섬이 모두 지방자치의 기초단위 노릇을 하는데 제주도가 통일된 지방자치단위를 이루지 못하고 그 밑에 기초단체를 따로 두고 있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이 섬 위에 쓰레기처리장 만드는 일을 네 개 단체가 각각 결정하는 것이 좋은 일인가? 아스팔트 포장도 개설계획을 네 개 시-군이 제가끔 세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당장 월드컵경기장만 해도 그렇다. 이 섬에 월드컵 경기를 유치하는 일을 놓고 서귀포시와 제주도 사이에 적지않은 혼선이 있어 왔고 유치가 결정된 이제 경기장 건설비 문제가 막막하다. 서귀포시와 다른 자치단체들 사이의 분담률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도민의 입장에서 볼 때 월드컵 경기는 제주도에 오는 것이지, 서귀포에 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월드컵 경기 개최가 도시 단위로 결정된다는 데 있다. 가로지르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제주도는 실질적으로 하나의 도시다. 그런데 그중 구(區) 하나의 크기로 볼 지역을 쪼개 '시'라고 이름을 붙여놓은 때문에 월드컵 경기 유치의 주체가 혼란스러운 것이다.

 

제주는 도-시-군의 강요된 구획방법을 벗어나 자신에게 적합한 지방자치 체계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 섬 전체의 장래가 달려있는 일들은 모두 하나의 자치단위로 묶는 것이 바람직하다. '도(道)'라는 이름 대신 '도(島)'라는 고유한 자치단체명을 가져도 좋고 '광역시'의 이름을 취해도 좋다. 그 밑의 하위단체의 경우는 행정관만을 선출하고 의회는 따로 두지 않는 정도가 어떨까 한다.

 

거품경제가 꺼져가는 요즈음 지방자치도 과감한 구조조정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9년 전 지방자치 실시에 즈음하여 기존 행정체계의 대폭 조정을 구상하다가 무산된 일을 기득권층, 특히 공무원 집단의 밥그릇 걱정 때문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작년의 여수 지역 3개 시-군 통합을 보면 주민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주의 자치구조가 주민들의 의지에 따라 새로 만들어질 날을 기다린다.

 

 

4. '생활환경'도 특산물이다.

 

농업과 환경은 원천적인 상극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1백만 년 전 현생인류가 나타나고부터 1만여 년 전 농업이 발생할 때까지 지구상 인류의 개체수는 1백만에서 5백만 사이를 오락가락했다고 한다. 지구생태계 속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구성원들에게 큰 위협을 가하는 일 없이 기후 등 조건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면서 지낸 것이 인류의 원시상태다.

 

그러다 어느 날 농업을 발명하고부터 개체수가 엄청나게 늘기 시작해 지금은 원시상태의 1천 배가 넘는 상태에 와 있다. 이 번영은 다른 생물종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한 것이다. 인류에게 쓸모있는 생물종만을 골라 더욱 쓸모있는 모습으로 바꿔가며 키우고 쓸모없거나 해로운 생물종은 아는 사이, 모르는 사이에 박멸해 가며 지구 표면을 인류의 번식에 유리한 모습으로 바꿔온 것이다.

 

제주 땅에도 기천 명 인구가 살며 채집과 수렵으로 생활한다고 하면 몇만 년이 지나도 환경에 별 영향을 주지 않고 지낼 것이다. 그러나 이미 수십만 명이 살고 있는 이상, 환경을 그대로 지킨다는(preservation) 것은 불가능하다. 가까운 장래에 큰 파탄을 맞지 않도록 최대한 아끼는(conservation) 것이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환경을 아낌에는 개발의 이익과 환경의 가치 사이에 끊임없는 저울질이 필요하다. 그런데 개발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현재 드러난 가치에만 시각이 한정된다는 점이다. 환경자원의 잠재적 가치를 넓고 깊게 음미하지 않는다면 황금알 낳는 거위를 잡아먹는 어리석음을 면할 수 없다.

 

희소성은 재화의 가치를 증진시키는 결정적 요소다. 그 동안 제주의 관광과 특작물이 희소성의 가치를 누려온 것은 국가의 장벽 덕분이다. 해외관광이 어려운 시절 이국적 풍취를 제법 가진 제주가 관광지로 인기있었고, 수입과일이 귀하던 시절 제주의 감귤과 온실재배 바나나, 파인애플이 경쟁력을 가졌다. 그러나 무역개방과 세계화의 시대를 맞아 그 희소성은 빛이 바래고 있다.

 

희소성을 누릴 대체상품으로 제주의 환경을 생각해 볼 만하지 않겠는가. 육지부의 환경파괴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다. 그에 비하면 제주는 마음먹고 노력하면 한국인 대다수가 와서 살고 싶어할 곳으로 지킬 수 있다. 아무리 돈 있다고 우리 말과 우리 음식이 없는 곳에 가서 살려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쾌적한 환경을 찾아 뉴질랜드로 이민갔던 사람들 중에 돌아오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지 않은가.

 

농업생산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연을 학대하기보다는 환경을 아끼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라 생각한다.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앨젤레스 사이의 캘리포니아 해안지대에는 소위 실버타운이 즐비하다. 그곳에서 쾌적한 노후를 지내려고 미국 각지에서 평생 번 돈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곳에서는 농업과 목축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는 대신 자연환경을 잘 지킴으로써 땅값 상승과 서비스산업의 성장을 기하고 있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물과 기름 소비의 억제다. 원수(原水) 값을 올리는 최근의 정책은 반갑지만, 더 바짝 올려 다른 곳에서 물을 실어오는 원가 수준에 접근시켰으면 한다. 수입가격이 엄청나게 오르는 기름을 집중적으로 소비하는 영농형태는 지양하고 농업과 목축업의 규모를 지금 수준으로 동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기름의 소비세와 자동차등록세도 제주의 환경을 지키기 위한 기준에 따라 결정하는 길이 만들어지기 바란다.

 

 

5. 330대의 미니버스

 

LA에서는 자동차 없이 꼼짝도 할 수 없다. 전철도 지하철도 없고, 대부분의 버스는 구역 내에서만 운행하기 때문에 승용차가 아니면 돌아다니기가 너무 힘들다. 여행자라도 차를 빌리지 않으면 관광버스가 데려다주는 곳밖에 다닐 수 없다.

 

지금은 1천만을 헤아리는 LA의 인구가 아직 1백만이 안 되던 1930년대까지 이 도시는 미국에서 가장 전차 노선이 잘 깔려있는 도시의 하나였다. 그런데 1938년에 자동차회사 GM이 스탠다드 석유회사, 파이어스톤 타이어회사와 힘을 합쳐 전차회사를 매입했다. 그리고 전차를 없애버렸다.

 

2차대전 후 팽창하는 LA의 도시계획은 자동차 위주로 설계됐다. 시내의 어느 지점도 고속도로에서 6km 이상 떨어진 곳이 없다. 그러나 세계제일의 도로망도 7백만 대의 차량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LA시민들의 냉소적인 자랑거리 두 가지는 '세계최대의 주차장'과 '원조 스모그'다.

 

필자가 처음 제주에 와본 것이 1980년이다. 통계를 찾아보니 그때 제주도의 등록차량은 6천 대 미만이었는데 최근의 통계(1966년)는 12만여 대로 20배 이상 늘었다. 그 주범은 승용차, 특히 자가용 승용차다. 화물차는 이 기간 중 10배 는 반면 자가용 승용차는 물경 70배로 늘어 전체 차량 대수의 56%를 점하고 있다. 화물차의 증가를 생산활동의 성장에 대략 비례하는 것으로 본다면 소비 성향이 강한 자가용 승용차는 그보다 7배의 속도로 증가해 온 것이다.

 

거품시대의 대명사 자가용은 불황기를 맞아 수많은 제주의 가구에 힘겨운 부담이 되고 있다. 그러나 쉽게 차을 없앨 수도 없는 것은 그 편리함에 길이 든 까닭도 있지만 공공운송 체계가 미흡한 때문이다. 이 거품을 시원스레 걷어내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결단에 앞서 정책의 획기적 전환이 필요하다.

 

보통사람들이 자가용 없이도 불편하지 않게 다니려면 얼마나 큰 공공운송 체계가 필요할 것인가? 제주에서 가장 외지고 작은 마을이라도 하루 20회 이상 버스가 닿고 가장 한적한 군도(郡道)라도 50회 이상 버스가 지나다닐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지금 운행 중인 시외버스 330대의 갑절이면 충분하리라 한다. 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버스는 중소형이면 된다. 330대의 미니버스를 투입해 수만 명의 자가용 차주들로 하여금 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앞으로도 자가용의 추가 수요를 막을 수 있다면 제주의 경제를 위해, 그리고 제주의 환경을 위해 엄청난 이득이 될 것이다.

 

지금보다 갑절의 버스를 운행하면서 수지를 맞춘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공공운송은 공영사업이 되어야 할 것이며, 지금보다도 운임을 낮춰 적자 폭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마 연간 100억원대의 적자가 날 것이다. 그러면 이 적자를 보전할 재원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자가용 승용차의 차량세를 대폭 올리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새로 등록하는 차량은 곧바로 크게 올리되 기존 차량은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올리는 것이다. 상당수의 차주는 앞으로 자가용의 보유를 포기하겠지만, 역시 상당수의 차주는 보유를 계속한다고 볼 때 머지않아 차량세 수입 증가가 1백억원대에 이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세계라 하더라도 교통만은 시장논리에 방임할 수 없다는 것이 LA의 교훈이다. 제주의 환경은 제주인의 쾌적한 생활을 위한 조건일 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소중한 자원이기도 하다. 330대의 미니버스로 몇만 대 승용차를 대신할 수 있다면 이 불황기에서 얻는 최대의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6. 섬의 운명

 

크레타섬의 웅장한 미노스궁전 유적을 보노라면 섬들을 무대로 펼쳐진 에게문명의 면모를 실감할 수 있다. 문명 초기부터 상업이 발달한 지중해 지역에서는 근세에 이르기까지 섬 지방이 육지보다 선진문명을 누리고 요충지 역할을 맡는 일이 많았다. 동남아시아의 이슬람 지역도 마찬가지다.

 

이와 반대로 농업문명의 원리를 철저하게 지켜온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섬 지방의 의미가 변망에 그치고 말았다. 근세에 들어와 서양인들이 진출하면서 비로소 길목에 있는 몇몇 섬들이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가장 미개한 섬오랑캐로 꼽히던 일본인들이 근세에 들어와 서양인들의 자극을 받으면서 두각을 나타낸 것도 그런 예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제주 역시 12세기 초 고려에 복속한 이래 조선 말까지 변방의 위치를 지켜왔다. 열악한 농업조건과 교통여건 때문에 공세(貢稅)를 통한 중앙정부에의 공헌은 변변치 못한 반면, 행여나 왜구의 거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안보상의 부담으로만 인식되었다.

 

아마 13세기 말부터 1세기간의 원(元) 복속기가 요충지로서 제주의 가치가 이례적으로 발휘된 시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고려가 원의 지배를 벗어날 때 목호(牧胡)의 난이 일어난 것도 1세기간 상승해 있던 제주의 위상이 다시 추락하는 데 대한 반발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원의 직할지로서 탐라총관부는 고려에 대한 일방적 복속기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비극인 합방을 맞아서도 제주의 위상은 조선시대보다 높아진 면이 있었다. 조선시대 5백년을 통해 최고의 학술-교육기관인 성균관에 진출한 제주인이 몇이나 되었던가. 그에 비해 일제시대에는 상당수 제주인이 서울뿐 아니라 일본의 대학에 진출해 일류의 학문과 기술을 습득했다. 제주의 산업도 다각화되었고, 또 형편에 따라 육지나 일본으로 나가 일거리를 찾게 된 것도 조선조 후기의 출륙금지령에 비하면 제주인의 숨통을 풀어준 일이었다.

 

어찌보면 제주의 운명은 민족의 운명과 궤적을 달리한 측면이 없지 않다. 이것은 전 국토의 98%를 점하는 육지부(및 연안도서)와 기본조건이 다르다는 데서 오는 섬의 운명이다. 중앙집권적 농업국가는 전국을 획일적으로 다루려는 경향을 가진다. 대부분의 국토와 다른 조건을 가진 섬 지역은 다르다는 데서 오는 유리한 점은 묵살당하고 불리한 점만 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앙의 국가가 세계제국을 지향하는 외부 세력에게 유린당할 때에야 비로소 요충지로서 그 유리한 점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해방 후의 역사를 봐도 대한민국의 폐쇄성이 심하던 시절에는 제주가 극심한 고통과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다가 개방성이 늘어남에 따라 제주의 위상도 향상되어 왔다. 관광과 감귤 등 육지부와 다른 특징이 좋은 대접을 받게 되고 일본에 진출한 제주인들과의 유대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IMF사태를 맞아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떨어지는 상황은 지방자치 발전의 기회를 제기하고 있거니와, 그 의미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제주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것이다.

 

제주는 민족과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독자적 발전의 길을 찾아갈 여지가 있으며, 그것이 또한 민족과 국가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신없이 닥쳐오는 세계화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풀뿌리민주주의와 풀뿌리자본주의의 실험장으로 가장 적합한 곳이 제주이기 때문이다. 민족의 과제인 통일을 위해서도 제주의 주체성 성장은 통일에의 접근로를 다변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공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