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참여당 창당 무렵부터 유시민을 보지 않고 지냈다. 전화 통화도 없었다. 나랑 얘기 나눌 여가가 없을 것 같아서 연락을 않게 되었고, 그로부터도 역시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김해 재보선 실패를 보면서 그가 정치판 떠날 전망을 떠올리게 되었고, 작년 총선에서 당선될 길 피하려고 기를 쓰는 것을 보며 시간문제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달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그만둔다는 그의 발표가 전혀 놀랍지 않았다.

 

정작 놀란 것은 지난 주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받아 보고서다. 무엇보다, 직업으로서 정치를 그만두면 ‘지식소매상’의 직업으로 돌아올 것을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지식소매상의 작업이 아니다. ‘유통’이 아닌 ‘생산’의 영역이다. 이 책 하나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저술활동에서 생산적 측면에 치중하려는 기세를 이 책에서 느낀다.

 

물론 그가 표방한 ‘지식소매상’이 24시간 편의점처럼 상품 종류와 진열 방식까지 본사 지침에만 따르는 백퍼센트 유통업은 아니다. 이웃들의 필요와 취향에 따라 가게를 꾸미고 상품을 고르는 동네 구멍가게를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들여놓는 상품 사이사이에 자기 손으로 만든 물건도 끼워 놓고, 거기 손이 가는 손님이 있으면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속으로는 ‘지식공방(工房)’을 염원하면서 겉으로 ‘지식소매상’ 간판을 내걸었을 것이다.

 

간판만 소매상으로 걸었을 뿐 아니라 가게가 공방 아닌 소매점 모습을 지키도록 의식적 노력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내가 읽은 그의 책 몇 권에서 일관되게 느껴 온 자세다. 들여놓은 상품, 즉 수집한 지식만으로 찾아온 손님을 만족시키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자신의 생각은 포장방법에서나 나타날 정도로 아껴서 내놓는 것이다.

 

이 자세를 그가 ‘비법(秘法)’이라고 자랑하는 ‘거리 두기’(88-89쪽)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비법이 “좌절감, 패배 의식, 상실감, 절망감, 외로움, 자기 비하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책 속에서 자신의 노출을 절제한다면 몇 가지 ‘부정적 감정’을 조절하는 데는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다.

 

플로베르 작품이었던가? “회상(Reminiscence)”이란 제목의 단편 하나가 가물가물 생각난다. 한 노부인이 교구의 노신부에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온 풍성한 연민의 마음을 치하할 때 그 노신부가 성직에 들어선 계기를 회상하는 내용이 담긴 것이다.

 

너무 예민하고 소심해서 인간관계를 맺을 줄 모르던 청년이 어쩌다 강아지 한 마리에게 마음을 주게 되었는데, 그 강아지가 마차바퀴에 깔려 참혹하게 죽는 모습을 목도하고 충격과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방에 틀어박혀 식음을 전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으로 걸어 잠근 문 밖에서 아버지가 꾸짖었다. “그런 조그만 슬픔 하나를 견뎌내지 못하면서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는 것이냐?”

 

이 꾸짖음에 청년은 황연히 깨달았다. 인간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직접 겪어내기에 자신이 너무나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래서 성직자가 되어 이웃의 경험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세상을 대하며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갖지 않고 이웃의 기쁨과 슬픔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여줌으로써 사랑과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성직자가 되었을 것이다. (40년 전에 읽고 기억이 가물가물한 이 작품의 정체가 떠오르는 분 계시면 좀 알려주세요. 생각이 나니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데” 목적을 둔 유시민의 ‘거리 두기’가 노신부의 ‘간접적인 삶’과 비슷한 것 아닐까. 그의 글쓰기가 현실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억제하고 건조한 지식의 배열로 자신의 관점만을 제시한 것은 건물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종이 위에는 평면도만 그려놓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평면도만 보고도 건물 모습을 대충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지식소매상’ 유시민의 책을 통해서만 그를 접한다면 그가 생각한 결과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그런 생각이 이뤄졌는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그는 건물 전체 모습을 최대한 보여주러 나섰다. 이 자세가 이 책 하나에서 끝날 것 같지 않다. 지식을 앞세우는 책을 앞으로 또 낸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노출하는 수준이 전과 달라질 것 같다.

 

그래서 독후감 쓸 생각이 든 것이다. 내 책에 추천사를 세 번이나 실어준 친구의 책에 한 번도 리뷰를 단 적이 없다는 것이 미안하기는 하면서도, 지식을 앞세우는 책에는 나로서 붙일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삶의 의미, 글쓰기의 의미에 대한 자기 생각을 깨놓고 얘기하는 것을 보니 얽혀서 떠오르는 생각이 꼬리를 문다.

 

그는 ‘거리감’ 이야기를 하면서 “검증된 이론이 아니”며, “그저 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론 아닌 실천의 영역이라면 ‘거리’의 실제 의미는 상황에 따라 조절될 수 있는 것이다. 아마 그의 생각 속에서는 거리 두기가 계속되고 있지만 이제 그 거리는 그만의 거리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거리가 되어 가는 것이 아닐지.

 

2년 전 김해 보궐선거 후 유시민의 “큰 죄” 발언에 대한 논평을 공개편지 형식으로 쓴 일이 있다. 그 글에 이렇게 적었다.

 

용산 참사 며칠 후 유 선생 서재에 들렀을 때 표정과 기색에서 당신이 나보다도 더 큰 충격을 받았다고 느낀 일이 생각납니다. 평소와 다른 어눌한 말투로 내게 물었죠. “선생님, 이 세상에 ‘악’이란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요?”

 

이 세상에 어리석음은 있을지언정 ‘악’이란 것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가 함께 가지고 살아온 생각이 흔들렸던 겁니다. 그 질문에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잊어버렸어요. 나도 악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겠다고 맞장구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첫 질문이 내 마음속에 또렷이 남아있는 것은 얼마 후 <후불제 민주주의>를 받아 봤을 때 그 질문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 책 원고를 막 출판사에 넘길 때 용산 참사가 일어났죠. 그 책의 에필로그 “선과 선의 연대를 위하여”는 참사 뒤에 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악’의 존재를 전제로 해서 쓴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 글에서 당신은 1983년의 서울대 사건을 돌아보며 “최근에 와서야 나는 내가 악한 사람이든 아니든, 실제로 악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반성했습니다. 나는 그것이 잘못된 반성이라고 봅니다.

 

그 사건에서 당신의 역할은 ‘어리석음으로 인한 잘못된 행동’이었다고 나는 봅니다. 그리고 그 정도 어리석은 행동은 그밖에도 꽤 있었을 겁니다. 어느 일에나 잘된 면도 있었고 잘못된 면도 있었습니다. 딱 그 한 차례만이 유일하게 “악한 일”이었다고 당신이 살아온 50년 인생에서 격리시키는 것은 당신의 어리석음에 스스로 눈감고 더 이상의 지혜를 포기하는 짓입니다.

 

그 글에서 나는 유시민을 ‘유머리스트’로 본다는 말도 썼는데, 내가 생각하는 유머리스트의 첫 번째 특징은 세상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다. 1983년의 자기 행동을 20여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악한 일”로 깨달았다는 것이 유머리스트답지 못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지적한 것이다.

 

1983년과 2011년의 자기 행동에 자연스럽지 못한 분석적 시각을 들이댄 것도 ‘거리 두기’ 때문 아니었을까?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해? 세상에 대해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나 환상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인데도 역시 넘을 수 없는 벽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는 봤다.

 

새 책에서 그는 두 사건에 대해 전과 다른 시각을 드러내 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행간에서 읽는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전보다는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이것이 ‘거리감’의 철폐는 아니다. 거리감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부정적 감정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위한 거리감이 아니라 존재의 ‘항상성(homeostasis)’ 유지를 위한 것이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자연과학 개념 갖다 대기 좋아하는 그의 취향이 내게도 옮았나?)

 

지식소매상의 행태가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지식의 역할은 매우 좁은 범위에 응축되어 있다. 다시 건축의 비유로 돌아가 본다면, 지식이 벽돌보다 철근의 성질을 갖는 것이다. 건물의 구조는 엄격한 지식으로 구성되지만 벽면은 자유로운 생각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진화론을 적용한 진보와 보수의 개념 설정이 그런 예다. 인간 진화의 초기 단계와 후기 단계를 구분해서 ‘오래된 습성’에 대한 집착을 보수, ‘새로운 습성’을 키우는 자세를 진보로 설명한 것은 (187-188, 250-257쪽) 매우 설득력 있는 관점이다. 진보-보수 현상의 모든 것은 아니라도 많은 것을 아주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관점이다.

 

그 설명 위에서 선택은 열려있다. 그 자신은 야수의 세계를 벗어나는 새로운 습성을 키우고 싶으므로 진보를 택한다. 선악(善惡)이나 현우(賢愚)의 구분에 비해 스스로도 떳떳하고 남에게도 너그러울 수 있는 관점이다. 예컨대 나는 새로운 습성에 너무 치중하다가 불필요한 병리적 현상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해서 오래된 습성을 잘 지키는 게 낫다고 보는 보수주의자인데, 그가 그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할 것 같지는 않다.

 

연대를 중시하는 것 역시 새로운 습성을 키우는 자세다. 일과 사랑과 놀이는 거의 모든 동물이 하는 것이다. 반면 연대의 습성은 적은 종류의 고등동물이 보여주는 습성이고 인간이 문명을 통해 고도로 발달시킨 기술이기도 하다. (언어가 ‘주먹으로 할 일을 말로 해결’하게 하는 기능을 통해 사회 내부 갈등을 최소화함으로써 인류의 생존력을 높여준 기술이라는 점을 나는 <뉴라이트 비판> 22-23쪽에서 주장한 일이 있다.) 나는 오래된 습성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이지만, 연대를 중시하는 정도의 진보주의에는 열렬히 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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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을 마무리하지 않은 채 놓아둔다. 유 선생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기 전에 써두고 싶었는데 틈을 많이 내지 못했다. 더 손대지 않고 그대로 놔둘지도 모르겠다.

 

수십 년 동안 북리뷰를 매체 게재를 위해서만 해왔지만 이 독후감은 친구의 책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만 내놓는다. 이 블로그의 글 퍼가기를 전면적으로 환영하지만, 개인적인 글인데다가 완결된 것도 아니므로 여기 와서만 봐주시기 바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