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논 의장과 호세택 사무국장이 3월 6일 뉴욕에서 돌아온 후 유엔조선위원단은 8일 오후 3시 제16차 전체회의를 열었다. 조선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새로운 단계로 진입한 것이었다. 회의의 주요 내용은 당연히 메논의 소총회 참석 보고였다. 보고 내용은 위원단 공보 제37호로 발표되었다. 1948년 3월 9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공보 내용 중 흥미로운 부분을 뽑아 소개하겠다.

 

메논은 보고에서 소총회 토론 중 발표된 각국대표의 의견을 소개하는 데 큰 비중을 뒀다. 그중 첫 번째 초점을 둔 것이 미국 제안에 대한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의 반대였다.

 

미국의 생각은 총회의 결의가 통과되었을 때에 충분히 명확했던 소련 당국의 부정적 태도는 그 결의가 가능한 지역에서 이행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방 캐나다의 의견은 사실에 있어서는 남조선에만 국한될 선거를 실시하고 또 이번 선거를 기초로 해서 중앙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은 총회 결의를 분명히 모독하는 것이라 하고 캐나다대표는 소총회는 조선위원단에 지시를 한다든지 또는 총회의 결의를 대변할 권한까지도 없다고 말하였다. 호주는 대체로 캐나다를 지지했지만 협의를 목적으로 한 선거는 가능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1947년 11월 14일 총회 결의에 대한 해석 문제다. 미국 주장은 “소련이 저렇게 나올 줄 그때도 다 알고 있었던 거 아니냐? 그러면서 그때 총선거 시행 결의를 내린 것은 소련의 태도에 관계없이 총선거를 시행하자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캐나다대표는 “총회 결의는 명백히 조선 전체의 총선거를 지시한 것이다. 실질적 분단선거가 될 총선거를 지지한다는 것은 총회 결의에 어긋나는 것이므로 소총회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패터슨 캐나다대표는 8일 전체회의에서 메논의 보고를 들은 뒤에도 소총회 결의의 의미를 제한해서 봐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소총회는 조선위원단에 지시를 내릴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총회와 조선위원단은 각각 총회를 보좌하는 기구로서 상하관계 아닌 대등한 입장이므로 조선위원단 업무에 관한 소총회 결의는 ‘권고’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8일의 전체회의석상 캐나다 대표 패터슨은 소총회의 결의는 위원단의 조회(照會)에 대한 응답으로서 행한 권고안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UN조위에서 앞으로 결정되어야 할 선거감시 문제를 이미 결정된 것 같이 일반에 주지시킨 것은 유감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에 관하여 동 씨는 동회의 폐회 후 기자와 회견하고 선거를 조위가 감시하느냐 아니하느냐는 아직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하였다.

 

(문) 귀하의 의견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기를 바란다.

(답) 소총회의 결의문을 보면 결의사항에서 ‘소총회의 견해로는’ 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것은 소총회의 결의안이 한 권고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소총회는 총회결의를 고려하고 이러한 사태에 대한 자신의 검토 결과를 보고하는 권한이 있을 뿐이다. 총회에 의하여 구성된 조위에 지시를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소총회 결의문뿐만 아니라 메논 의장에 대한 설명적 서한을 보더라도 분명한 것이다.

 

(문) 그러면 남조선선거 실시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답) 그것은 조위의 책임 하에 그 실시여부를 장차 결정해야 될 것이다.

 

(문) 미결 사항이 결정 사항같이 이미 발표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답) 하지 중장의 선거 실시 포고문 중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은 동 위원단에게 가능한 부분의 조선에서 여사한 선거를 감시하기로 결정하였으며”라고 하였는데 동 결정은 이제부터 위원단이 할 것이지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다.

 

(문) 귀하의 그러한 견해는 귀국의 정치적 태도에 결부되는 것인가?

(답) 그것은 아직 말할 수 없다.

 

(문) 귀국 대표가 소총회에서 조위 탈퇴를 시사한 바 있는데 그 후 어찌 되었는가?

(답) 그 문제는 조위의 금후 결정을 보아 결정될 문제다. (<서울신문>, <조선일보> 1948년 3월 9일)

 

위원단 탈퇴까지 시사하는 캐나다대표의 주장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유엔위원단은 9일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전체회의를 열었는데, 패터슨의 지적을 놓고 토론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전과 오후 회의 사이에 그랑 정보관의 기자회견 문답이다.

 

(문) 8일 전체회의에서 캐나다대표 패터슨 씨가 소총회 결의를 조위가 채택하는 여부는 위원단이 금후 결정할 사항이라고 하였는데 귀하의 해석 여하?

(답) 나도 패터슨 씨 의견과 같다. 선거를 감시하는 문제는 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금후 결정할 문제다.

 

(문) 하지 중장은 5월9일 시행되는 선거가 UN조위에 의하여 감시될 것이라는 전제 하에 선거 실시 포고를 발포하였는데 그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으로 생각되는가?

(답) 나의 추측으로는 유어만 박사가 3·1절에 서울운동장에서 한 연설에 의거한 것 같다.

 

(문) 위원단으로서 정식으로 선거를 감시하겠다는 통고를 하지 장군에게 전달할 일은 없는가?

(답) 없다. 그리고 위원단은 그 멤버가 개인적으로 표명한 의견에 대하여서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문) 2월29일 발표한 스테이트멘트에 1948년 5월10일 이전에 가능지역의 선거를 감시할 것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위원단의 공식적 의사표시로 볼 수 있는가?

(답) 공식 결의는 레졸루숀(결의라고 번역됨)이다.

 

(문) 공식 결정 없이 그러한 스테이트멘트를 위원단의 이름으로 발언할 수 있는가?

(답) 스테이트멘트는 위원단이 책임지는 공식 발표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사표시로 해석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8년 3월 10일)

 

할 일은 잘 하지 않으면서 안 할 일에 열심인 사람이 종종 있는데 하지 경우도 그런 것 같다. 메논 의장이 돌아오기도 전인 3월 1일부로 아래 내용의 포고를 내놓았다.

 

1. 조선인민대표의 선거는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의 감시 하에 본 사령부 관내지역에서 1948년 5월9일 차를 거행함.

 

2. 여사한 선거는 연합국임시조선위원단과 상의 후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개정을 가할 입법의원선거법(1947년 9월3일부 법률 제5호)의 조건과 규정에 의하여 차를 행함.

 

소총회의 의결만 보고 발포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 문제를 총회로부터 위임받은 것은 소총회가 아니라 조선위원단이라는 사실을 패터슨이 지적하고 나섰다. 조선위원단은 3월 8일 이전에 조선 선거에 대한 확정적 결정을 한 것이 없는데, 하지 사령관이 선거를 포고할 근거가 무엇인가? 아무도 이 지적에 합당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2월 29일 발표했던 공보 제33호가 결의사항(레졸루션) 아닌 의사표시일 뿐이라는 궁색한 변명이 나온 것이다.

 

미군정 측도 혼자 바가지 쓸 수 없다고 변명하고 나섰다.

 

미군정당국 측에서는 이에 대하여 미결정 사항을 기정사항같이 취급하게 된 책임은 전연 위원단 측에 있는 것이라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즉 하지 중장 정치고문인 동시에 동 대변인인 미첼의 9일 언약에 의하면 하지 중장의 포고는 위원단 측의 충분한 연락협조로서 결정된 것이라 한다. 즉 전기 28일부 조위 성명서 스테트멘트 및 3월1일 메논의 부재중의 조위 임시의장으로서 서울운동장 3·1기념식에 출석한 유 중국대표의 발언내용을 조위로서의 공식 태도표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체재 중이던 메논 및 동경에 주재 중이던 패터슨 자신도 전화를 통하여 동의하였던 것이라 한다. (<조선일보>, <서울신문> 1948년 3월 11일)

 

3월 8일 메논의 보고를 담은 공보 제37호로 돌아가 본다. 오스트레일리아대표는 캐나다주장을 지지하되 “협의를 목적으로 한 선거는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이것은 메논이 2월 19일 소총회 보고에서 말한 3개안 중 제2안 내용이다. 가능지역의 선거를 시행하되 최종적 건국이 아니라 남조선 인민을 대표하는 임시정부 수립에 목적을 둔다는 것이다.

 

이 제2안에 대한 연구와 논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쉬운 일이다. 미국의 재빠른 제1안 제안과 그 채택에 밀려 소총회에서 토론될 기회도 갖지 못했지만 이치에도 합당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매우 유용한 방안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북에는 소련의 후원 하에 북조선인민위원회가 1년 전 수립되어 북조선 인민의 임시정부 노릇을 하고 있었다. 통일건국을 바란다면 조선인 자치 수준이 뒤져 있던 이남에 상응한 임시정부를 세워 양쪽 임시정부가 건국 방안을 모색하는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었다. 건국 방안 모색을 위한 임시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명실상부한 ‘남조선 총선거’라면 민족주의자들이 5-10선거를 거부한 것처럼 거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로서 최대한 대표성 있는 남조선 임시정부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소총회에서 인도대표는 메논이 아니라 인도의 유엔 상임대표인 펄레였다. 인도의 변절을 메논 한 사람에게 따질 일이 아니다. 그리고 모윤숙의 공로를 너무 과장할 것도 아니다.

 

인도대표 펄레 박사는 선거의 결과 이미 정권이 수립된 북조선과 선거가 2차나 연기된 남조선과의 비교를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 선거가 이 이상 더 지연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다만 협의적 목적으로서만 사용될 것이 아니라 건설적 목적 즉 중앙정부의 설립을 위해서도 작용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펄레 박사는 선거 전이나 그 기간이나 그 후에나 그 정부가 전 국민에 의하여 지지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였다.

 

메논은 기권 12국의 입장에도 언급했다. 기권은 아랍진영과 스칸디나비아 제국에서 집중적으로 나왔다.

 

레바논을 제외한 전 아랍진영은 표결을 기권하였다. 아랍 제국은 팔레스타인 분할의 경험에 비추어 조선에서 이 같은 역사를 반복 말 것을 희망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태도는 아마도 팔레스타인 분할에 있어서 미국 행동에 대한 불만을 반영시켰다.

 

스칸디나비아도 역시 미안(美案)을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태도는 어느 정도 그들의 지리적 위치에 유래한 것이었다. 노르웨이는 항구적 해결의 유일책은 소련과 협의를 계속하여 협조해야만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소련이 불참한 소총회는 비현실적인 분위기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이며 소총회는 여하한 결정도 부여할 법적 권한도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덴마크의 지지를 얻어 문제를 심의하기 위하여 특별총회를 소집할 것을 제안하였다.

 

여러 나라의 입장을 설명한 다음 메논은 소총회 의결의 배경에 “유엔의 위신”에 대한 의식이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메논 씨는 레이크석세스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하며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은 UN의 위신문제였다고 지적하고 다수 대표들은 만일 대다수에 의하여 취하여진 결정이 일국 또는 일개 국가군의 부정적 태도에 의하여 오유(烏有)에 돌아가게 되는 경우에는 UN 위신상 치명적인 것이라고 보고 있다.

 

1947년 가을 이래 유엔총회 및 그 산하기구에서 조선 문제가 다뤄지는 경위를 이번에 세밀히 살피며 지금까지 갖고 있던 생각을 크게 바꿨다. 당시 미국은 냉전에 뛰어들고 있었지만 미국과 함께 뛰어들 태세를 갖춘 나라는 몇 되지 않았다. 유엔에서 미국이 다수국의 지지를 받는 데는 냉전 고착 이후와 달리 큰 명분과 많은 보상이 필요했다.

 

유엔의 권위가 약소국들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제국주의시대와 달리 약소국이 약간의 발언권이라도 갖게 된 것이 유엔의 존재 덕분이었다. 약소국은 유엔의 기능이 강화되기를 바랐다. 미국이 자국 의지의 관철을 위해 유엔을 이용하려 한 반면 소련이 유엔의 기능을 마비시킴으로써 자국 의지를 관철하려 한 차이가 약소국들의 향배에 큰 작용을 했다.

 

김영호의 “6-25전쟁과 유엔의 역할”(<한국현대사의 재조명>(한국전쟁학회 편, 명인문화사 펴냄))에는 이보다 몇 해 후 한국전쟁 당시 유엔의 작동방식이 서술되어 있는데, 초기 유엔의 성격을 살펴보는 데 좋은 참고가 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