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와 김규식이 김일성과 김두봉 앞으로 2월 중순에 보낸 남북협상 회담 제안 편지 이야기를 2월 27일 일기에 썼다. 편지 발송을 비밀로 하고 있다가 3월 초순에 이르러 소문이 떠돌자 발송 사실을 밝혔지만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그 편지에 대한 평양 측의 반응이 3월 25일 평양방송을 통해 나타났다.

 

“4월 14일 평양서 남북협상 개최 방송 - 좌중(左中) 계열 대책에 열중”

 

유엔조위에서 북조선의 보이콧으로 인하여 가능한 지역에서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중앙정부를 수립하기로 가결되자 김구·김규식 양씨는 이에 반대하고 남북요인회담을 유엔조위에 건의하는 동시에 북조선에도 이와 동일한 서한을 보내어 그 회답 여부가 주목되어 오던 바 지난 25일의 평양방송은 북조선에서 이 서한 내용을 수락하고 남조선 각 정당 단체에 대하여 4월 14일 평양에서 회담할 것을 초청하였다고 전하였다.

 

이 방송에 의하여서는 맹렬한 준비를 다하고 있다는 바 27일에는 중간 급 좌익 각 정당단체마다 각각 자기 정당 단체 사무실에 요인들이 회합하여 평양방송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이리하여 민련에서는 금 28일 상오11시부터 삼청동 김규식 숙소에서 정치 상무 양 위원회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동 문제를 토의하리라 하며 북조선에서 정식 초청이 도착하게 되면 즉시 중간과 좌익의 각 정당 단체 대표가 시내 모처에 회합하며 남북요인회담의 추진방책을 토의할 태세를 취하고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8일)

 

이 반응에 왜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렸을까? 5월 초순으로 예정된 ‘가능지역 총선거’에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금쪽같은 상황인데, 평양 측에서 이토록 신중한 반응을 보인 까닭이 무엇보다 궁금하다.

 

이정식은 “1948년의 남북협상”(<신동아> 1980년 3월호,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펴냄)372-426쪽)에서 한 가지 가능성에 중점을 두었다. 1948년 4월 남북회담의 기획과 실행에 소련의 의지가 1차적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소련 측에서 회담의 목적을 세우고 그에 따라 계획을 세우는 동안 김일성과 김두봉 등 조선인들이 자발적인 회답을 보내지 못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해방공간에서 소련은 중요한 주체의 하나였으므로 이때의 남북협상에도 소련이 관계했을 가능성은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정식은 소련의 역할을 너무 과장하는 감이 있다. “이른바 ‘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와 그 후에 있었던 ‘4김 회담’은 소련군정이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각본에 따라 준비되고 진행된 것이었고 (...) 소련군정은 ‘4김 회담’을 허락하기는 했으나 그 회담의 내용 역시 세밀하게 관리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은 이북 지도부를 소련의 ‘괴뢰’로 보는 냉전기 시각에 너무 얽매인 것 같다.

 

이 관점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이정식이 제시하는 것이 두 가지다. 그 하나는 소련군 민정청장 레베데프가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 슈티코프에게 이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마친 것을 축하하는 군중대회를 개최하겠다고 건의했다.”고 비망록에 적은 것이다. ‘성공적’이란 말 한 마디를 “소련의 목적을 달성했음”의 뜻으로 해석한 것은 무리한 견강부회로 보인다. ‘성공적’이란 말은 다른 기준으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었던 말이다.

 

또 하나의 “명확한 증거”라고 내놓는 것이 1945년 9월 20일의 스탈린 전문이다.

 

소련의 한반도정책의 강령적 원칙은 한반도가 소련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가 되는 것을 막고, 한반도에서 소련의 정치경제적 이해를 보장해줄 좌익정부를 수립하는 데 있었다.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의 정확한 실천이라는 원칙하에 반탁세력의 미소공위 협의 참가를 저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조건을 제기하는’ 정책을 취해 좌익이 우위를 점하는 정부를 수립해서 반데 반봉건적 개혁을 실천할 것을 계획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련은 남북한의 재통합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명확한 증거는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고 내린 지령이다. 그것은 미국과의 협상 결과에 관계없이 북한지역에 단독정부를 세우라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기원> 379쪽)

 

이 대목을 보면서 부지불식간에 한숨을 흘렸다. 이 스탈린 전문은 같은 책 178-214쪽에 수록된 “스탈린의 한반도정책, 1945”에서 스탈린이 이북에 위성국가를 세울 생각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다는 증거로 내놓은 자료인데, 그 해석이 석연치 않다.

 

러시아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옮긴 이 인용에서 ‘정권’으로 옮겨진 말의 원래 뜻이 무엇이었을까?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이란 것이 소련의 위성국가를 뜻하는 말일 수 있는 것일까?

 

<해방일기> 작업에서 나는 전문 연구자들의 작업성과를 겸손하게 받아들여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자임한다. 그러나 냉전에 지나치게 얽매인 시각에는 비판적 논평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이정식은 분단건국의 책임을 소련에 미루는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무리한 추론을 하는 감이 있다. 1948년 봄의 남북협상 배경에 1945년 9월의 스탈린 전문을 들이대는 데서 다시 이 문제를 느낀다. 설령 1945년 9월에 스탈린이 그가 해석하는 것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더라도, 2년 반의 시간이 지난 시점에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었겠는가?

 

일본 항복 당시 스탈린이 한반도를 ‘중추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정식도 인정한다.(같은 책 182-183쪽) 군정 직접 통치를 꾀한 미군과 달리 소련군이 조선인의 자치를 지원하고 자기 역할을 최소화한 정책은 이 맥락에 맞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키는” 방침이 한 달 사이에 스탈린의 마음속에 확정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2년 반 동안 북로당-인민위원회 체제가 착실히 자리 잡아 온 이 시점까지 남북협상 같은 사업을 소련 측이 모두 기획해 줘야 한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소련의 역할보다는 이북 지도부의 내부 문제를 생각할 여지가 많다. 우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로당 측에서 이남의 남북협상파에 대해 주도권을 잡고 싶어 했으리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김구와 김규식이 2월에 보낸 편지는 4김 ‘지도자회담’을 제안한 것이었는데, 3월 25일 평양방송이 전한 것은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초청이었다.

 

실제로 4월에 김구와 김규식이 평양에 갔을 때 김구는 대표자 연석회의에 한 차례 나가 인사만 했고 김규식은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지도자회담에 집착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도자회담’이라 할 때 북로당과 인민위원회를 대표하고 영도하고 있던 김일성과 김일성에 비해 김구와 김규식의 이남 ‘지도자’로서의 무게에는 차이가 있었다. 이북의 총체적 지도자들이 이남 일부 세력의 지도자들과 대등하게 참여하는 ‘지도자회담’이 남북협상의 보조적 역할은 몰라도 중심적 역할을 맡을 수는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남북협상에 임하는 김구와 김규식의 선의를 아무리 존중한다 해도 4인 회담에 집착한 자세에는 비판할 점이 있다. 이북 지도부는 선거 등의 절차를 통해 인민의 지지를 확보해 놓은 집단인데, ‘영수’들끼리의 합의만을 통해 남북협상을 진행한다는 데는 명분과 실제 양쪽으로 한계가 있었다. 협상의 주 무대로 대표자 연석회의를 이북 측에서 준비한 것은 타당성 있는 조치였다.

 

남북협상의 무대에서 남로당을 비롯한 이남 좌익의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남에서 1947년 11월 단선(單選) 반대 움직임이 확산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각 정당 협의회(정협)를 통해서였다. 정협에는 좌익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규식 등 중간파 지도자들은 12월에 민족자주연맹(민련)을 결성해서 남북협상 운동의 중심으로 삼았고 정협과 관계를 끊었다. 그리고 민련 집행부에서 좌익 인사들을 퇴진시켰다.

 

“좌파를 일소, 민련 상위(常委) 개선(改選)”

 

민련 제2차 임시중앙집행위원회는 21일 정오부터 동 연맹 회의실에서 김 박사의 개회사로 개최되었다. 그런데 중집원(中執員) 홍명희 씨 등 27명의 보선과 규약수정안 통과와 상위가 총사직하고 개선한 결과 5당캄파와 민련 좌파인 권태양, 장권, 강순, 성대경 씨 등 5명 대신 민독 계열과 5당캄파 우파인 장자일, 김성주, 신의경, 신숙, 이상백 등 5명과 전 상위 10명이 재선되어 민련 내의 좌파를 일소하였다. 그리고 22일 하오 1시부터 신선출 상임을 열고 23일 하오 1시부터 열릴 중집 속회에 제출할 당면 정치문제 재정문제를 토의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23일)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 같다. 하나는 단독건국 추진 세력에서 남북협상파를 좌익과 야합했다느니 좌익 책동에 놀아난다느니 비난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실제로 좌익의 책동이 조심스러워서였을 것이다. 위 기사에도 나오는 권태양에 대한 송남헌의 회고에서 그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

 

김 박사를 회상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딱 하나 있다. 나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인 권태양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의 정체를 안 것도 몇 년 전에 출판된 한 권의 책을 통하여서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김 박사 주변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도 내가 추천해서 합류하게 된 것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

 

누군가 나와 함께 김 박사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서 적당한 사람이 없는지 물색하던 중, 우연히 대구사범 동기인 권태양을 길에서 만났다. 사정을 설명하며 같이 일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러마고 하여 삼청동 김 박사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후 권태양은 삼청동 집에 기숙을 하며 김 박사의 주위에서 이것저것 열심히 챙겨가며 일을 했다. 그가 성실히 일을 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신분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밀리에 그는 뒤에 설명할 성시백과 선을 대고 있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좌우합작의 추진을 비롯하여 삼청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하나도 빠짐없이 성시백에 보고되었고, 이는 즉시 북한으로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북로당이 좌우합작의 진행 상황을 포함하여 입법의원 대책 등과 같은 사항을 성시백을 통해 훤하게 꿰뚫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모골이 송연함을 느낀다. (...)

 

권태양 말고도 음으로 양으로 북로당과 선을 대고 있던 인물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조소앙의 비서인 김흥곤을 비롯하여 인민당 총무부장 대리를 하던 최백근 등이 그런 부류로 한통속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물론이고 김 박사도 이들의 정체를 전혀 모른 채 그들과 중간파의 진로를 상의하기도 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는데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세상물정을 몰랐다는 생각이 든다. (<송남헌 회고록>(심지연 지음, 한울 펴냄) 156-159쪽)

 

권태양의 역할에 대해서는 남로당 고위간부 출신 박병엽의 증언도 있다.

 

“성시백은 47년 10월에 접어들면서 반탁진영을 본격적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는 중경에서 중국공산당원으로 있으면서 지하공작을 했던 터라 김구-김규식 등 우익 지도자들의 측근과는 모두 연계가 돼 있었습니다.

 

예컨대 김규식의 비서였던 권태양은 ‘윗선’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분명히 성시백 선이었어요. 성시백 밑에 있던 강병찬과 서완석이 권태양-다른 모 비서와 직접 연결된 비선이었습니다. 강병찬과 서완석은 각각 남로당 결성시 반 박헌영계였던 강병도-서중석의 친동생이었지요. 그런데 권태양과 다른 비서는 자기들이 공작원과 연결됐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비선의 횡적 연계는 철저히 금지됐기 때문입니다.

 

김규식의 민련 간부로 일하던 박건웅이나 임정 계통의 김찬 등도 성시백 사람이었지요. 박건웅은 원래 중국공산당원 출신이었으나 중경에서 민족진영으로 돌아섰습니다. 두 사람은 중국에서부터 막역한 사이여서 성시백이 46년부터 서울에서 활동하면서부터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발전했지요.”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하>(중앙일보사 펴냄) 320쪽)

 

이남의 남북협상파가 이남 민의를 대표하기 위해서는 반민족적 분단건국 추진 세력은 내놓고라도, 좌익까지는 포괄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남북협상파가 좌익을 배제하거나 최소한 전면에서 후퇴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은 좌익과 신뢰관계 구축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 어려움은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좌익의 주축 남로당의 연합전선을 거부하는 노선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박헌영 등 남로당 지도부는 자기네가 이남 민심을 장악하고 있다고 이북 지도부에게 장담하고 있었다. 1947년 12월 초와 1948년 1월 말 남북 노동당 연석회의에서 박헌영과 이승엽이 “남한에서의 단정 반대 세력과의 연합은 현 단계에서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는 박병엽의 회고를 1948년 2월 8일자 일기에 소개했다. 그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2-7 구국투쟁’을 결행했던 것이다.

 

박헌영의 1946년 10월 월북은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는 그가 월북한 진짜 이유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의 체포령은 미군정 비난이 이유였고, 비슷한 혐의로 당시 체포된 이주하는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공산당 대표 박헌영이 그때 체포되었다면 너무나 큰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 침해 논란이 따를 포고령 위반죄로 재판에 회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북로당의 국내파 중에는 원래 박헌영을 지지하며 김일성에 반대하는 흐름이 있었다. 나는 박헌영의 월북과 이북 체류가 북로당의 국내파 지분을 지키고 키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그런데 남북협상 국면에 이르고 보니, 북로당 지도부의 대남 정책에 영향을 끼치려는 목적에도 큰 비중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구-김규식의 편지를 놓고 북로당 내 소련파와 연안파 사이에 논쟁이 있었다는 박병엽의 증언이 있는데, 남로당 역시 이 논쟁에 끼어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제의 서한은 외교 경로와 소련군 대표부를 통해 북한에 공식적으로 전달됬습니다. 그러나 북로당은 민련의 2월 4일 결의, 김구의 성명, 심지어 김구-김규식의 편지내용까지 미리 입수했어요.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치공작원 성시백이 민련과 한독당에 끈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동향은 북로당 중앙에 무전으로 즉각 타전됐습니다. (...)

 

북로당은 2월 18~20일 이례적으로 사흘간 남측의 협상 제의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했습니다. 지도부의 관심은 민련이 대북 서한을 띄우기로 한 배경이 무엇이냐에 쏠렸습니다.

 

허가이 등 소련파는 김규식의 협상 제의를 당시 고조되고 있던 남북협상 움직임을 깨려는 미군정의 ‘입김’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들은 그 근거로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들이 뻔질나게 김규식의 사무실을 들랑거렸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이에 맞서 김두봉-최창익 등 연안파는 ‘미국의 작용을 무시할 수는 없겠으나 김구-김규식의 애국적 결단이라는 측면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김일성-김책 등 빨찌산파도 연안파를 지지하는 입장을 폈습니다.” (같은 책 326쪽)

 

 

Posted by 문천

 

이승만과 한민당을 필두로 한 단독건국 추진 세력은 유엔위원단의 5월 9일 가능지역 총선거 실시 결정으로 큰 뜻을 이뤘다. 이제 그들에게 최대의 과제는 이 결정대로 총선거가 시행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그 선거에서 자파의 승리는 오히려 부차적 문제였다.

 

5월 총선거 실행을 위협하는 적은 두 방면에 있었다. 유엔 결정을 애초부터 반대해 온 좌익은 오래된 적이고 드러나 있는 적이었다. 그런데 다른 방면의 위협이 더 크게 떠오르고 있었다. 유엔의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통일건국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미소공위를 함께 반대해 온 김구가 1948년 1월 하순부터 갑자기 발길을 돌려 중간파와 보조를 맞추기 시작하면서 이 위협이 크게 확대되었다.

 

좌익 봉쇄는 미군정과 오랫동안 협조해 온 일이기 때문에 전술상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중간파는 미군정과 나름대로 신뢰관계를 쌓아왔고 유엔위원단 대표들과도 소통이 잘 되는 세력이기 때문에 좌익 몰아붙이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몰아붙일 수 없는 상대였다. 통일건국을 명분으로 한 단독선거 반대에 대처할 논리도 궁색했다.

 

극우세력이 명분의 열세를 무릅쓰고 승리를 바라볼 길은 경찰과 테러조직을 동원하는 폭력밖에 없었다. 중간파의 선거 거부에 공감하는 인민을 선거인으로 등록하고 투표소에 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조직적 폭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유엔위원단은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강조하고 있었고 미군정 당국자들도 이에 상당 수준 호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극우세력은 폭력 동원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3월 23일 민주의원 성명서는 그런 노력의 한 예다.

 

“유엔조선위원단이 오는 5월 9일의 총선거실시를 원만히 하기 위하여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양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음은 우리가 인정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교각살우의 우를 연출치 말기를 바라마지 않는 바이다. 그들의 생각에는 경찰을 구속함으로써만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양성할 수 있을 줄 아는 모양이다. 그것은 조선 실정을 이해치 못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보지 아니할 수 없다. 지금 각처에서 야기되는 파괴적 행동이야말로 그 진원을 소련 치하의 북조선에 두는 것으로서 화폐개혁에 의하여 얻어진 휴지의 구 지폐를 무한정으로 남조선에 수송하여 선거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은 불가무(不可誣)의 사실이 아닌가?

 

경찰서 습격, 무기 탈취, 방화, 심지어 식수에 독약 세균까지도 살포하여 치안을 교란하고 선거를 방해하고 있는 이때에 유엔조선위원단이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불사지심(不思之甚)이라고 평하지 아니할 수 없다. 정치범 석방을 운운하지마는 불법집회니 삐라 살포니 하는 것도 폭동의 일보 직전의 행동인 바에는 취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도 사실인즉 유엔위원단도 지엽말절에 구애되지 말고 좀 더 안광을 널리 하여 세계 정국을 살피고 참으로 조선 독립을 원조하는 데 노력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점을 유엔조선위원단에게 재삼 부탁한다.”(<동아일보> 1948년 3월 24일, “자유보장도 좋으나 좌익책동도 간과 말라.”)

 

민주의원(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이란 1946년 초 우익이 비상국민회의로 집결할 때 그 상설기구로 만들어진 최고정무위원회를 미군정이 자기네 자문기구로 채용하면서 달아준 간판이다. 미군정의 ‘통역정치’ 폐단이 심했던 까닭은 조선인의 민의 수렴 장치가 빈약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의원을 채용했지만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모시는 이 기구의 민의 수렴 기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해 말 입법의원이 만들어지면서 자문기구의 기능이 사라졌는데도 극우세력은 민주의원 간판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경찰서 습격, 무기 탈취, 방화 같은 것은 진부한 레퍼토리고, “식수에 독약 세균” 같은 대목에서 약간의 상상력을 살필 수 있다. 그런데 “화폐개혁에 의하여 얻어진 휴지의 구 지폐”란 무엇인가? 상황 설명이 좀 필요하다.

 

북조선에서 1947년 12월 6~12일 사이에 화폐개혁이 시행되었다. 이 화폐개혁으로 수거된 구 화폐가 대남공작에 사용될 것이라고 반공세력에서 목청을 높인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이 우려를 하지 사령관도 공유하고 있었다. 좌익에서 일으킨 1948년 2월 7일 소요사태에 대한 하지 성명서(2월 10일)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민주주의적 남조선 건설을 파괴하고 조선국가의 경제를 해할 목적으로 감행된 금반 행동은 민주조선의 적이고 또 틀림없이 작년 12월 북조선화폐개혁에서 압수 혹은 교환한 지폐로 매수당한 1·2백 명의 탐욕자에 의하여 감행된 것입니다. 그들은 전력을 다하여 조선을 혼란에 빠뜨리고 조선인의 운명을 불행케 하려는 조선 독립의 적이고 또 조선국민을 불행케 하고 생활 곤란에 함입케 하려는 목적으로 철도와 철도운영기관 같은 국가의 부원(富源)과 자본을 불법하게 파괴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조선국민을 혼란 현혹시켜 소수가 대다수를 독재하려는 공산주의자 욕망을 달성하려고 하며 자유국민에 허용된 자유를 이용하여 여러분이 현재 향유하고 있으며 또 향유할 수 있는 자유를 파괴하여 그들의 부정한 목적을 달성하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12일)

 

이북의 화폐개혁으로 수거된 조선은행권 총액은 약 30억 원으로 추정되었다. 조선은행권 통화량은 1945년 초까지 50억 원에 미달하다가 전쟁 말기의 증발로 약 55억 원인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고, 9월 초 미군 진주까지 몇 주일 동안에 약 30억 원이 발행되었다. 1945년 9월까지 조선은행권 발행고 약 85억 원 중 30억 원가량이 이북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이남의 통화량은 1948년 1월 5일 335억 원에 이르렀다.(<동아일보> 1948년 1월 23일) 100억 원이 넘는 1947년도 추곡 매수자금이 마지막 몇 달간 화폐 급증의 결정적 원인이었거니와, 미군정의 수지 적자를 화폐 증발로 꾸준히 메워 온 결과였다. 이북에서는 통화량 증가의 필요를 소련군 군표 발행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화폐개혁은 일제 통치가 끝난 직후에 필요한 일이었다. 미군정이든 임시인민위원회든 행정을 새로 맡은 입장에서 경제 운용을 위해 통화 파악과 통제가 필요했다. 더구나 점령군 진주 직전 몇 주일 동안 기존 통화량의 절반 이상이 발행되었다면 아직 유통되지 않은 뭉칫돈을 파악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1945년 중에 화폐개혁을 실시하지 않은 1차 책임은 미군정에게 있었다. 조선은행을 장악한 미군이 화폐개혁의 필요성을 판단할 입장에 있었다. 미군정이 화폐개혁을 하지 않는데 이북에서만 시행하는 것은 ‘분단 고착’으로 지탄받을 일이었다. 이북 지도부는 조선 문제가 1947년 가을 유엔에 회부된 뒤에 헌법 제정, 군 창설, 화폐개혁 등 독자적 건국 준비사업을 추진했다. 미소공위 이외의 외부 개입을 배격한다는 명분이었다.

 

이북의 화폐개혁에 대한 김성보의 설명을 살펴본다. (<북한의 역사 1>(역사비평사 펴냄) 135-137쪽) 기본 원칙은 구폐와 신폐를 1대 1로 바꿔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폐 소유자의 신분에 따라 즉시 교환의 한도를 정하고 한도 외의 금액은 인민위원회가 정하는 기간 동안 강제적으로 예금하게 했다. 교환 한도는 봉급자의 경우 지난 달 수입 입금액, 농민은 매호 당 700원, 10인 이하 고용 기업가는 소득세와 과세표준액 1개월분의 50퍼센트 이내, 10인 이상 고용 기업가는 지난 달 지불한 임금액의 50퍼센트 이내였다고 한다. 이 조치의 영향을 김성보는 이렇게 정리했다.

 

화폐개혁이 주민에게 미친 영향은 계층별로 다르게 나타났다. 일반 근로대중은 월 근로소득액까지는 새 화폐를 교환받을 수 있었고, 동결된 예금도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뒤 지불받을 수 있었다. 화폐개혁으로 과잉화폐가 회수되어 시장물가가 하락함에 따라, 근로대중의 실질임금은 높아졌다. 그러나 상공업자들이 입은 타격은 컸던 것 같다. 이들이 교환받게 된 화폐량은 정상적인 기업 경영에 크게 부족한 금액이었다. 동결된 예금은 차후 지불하게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제대로 지불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점에서 화폐개혁은 자본 일반에 대한 수탈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개혁의 성격을 부분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소련국립은행이 발행하여 유통시킨 군표를 새 화폐로 교환해줌으로써 소련 정부가 부담해야 할 군표 발행과 유통의 모든 책임을 스스로 떠맡았다. 소련 정부는 이에 대해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화폐개혁 이후 북한 주둔 소련군의 유지비는 북조선 인민위원회에 직접 반영되었다.

 

1947년 말의 화폐개혁을 통해 일제 식민지 화폐제도가 청산되고 화폐주권이 실현된 점, 과잉화폐를 흡수해 물가안정을 이룬 점은 밝은 면이지만, 상공업자들의 자본력이 위축되고 북한 인민이 소련군 주둔 비용을 그대로 물려받은 점, 남북 간에 이질적인 화폐 체계가 형성되어 분단구조가 심화된 점은 어두운 면에 해당한다.

 

‘과잉화폐’는 정상적 경제 운용을 통해서도 점진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지만, 해방 당시의 과잉화폐는 몇 주일 동안의 쿠데타적 남발에 의한 것이었다. 해방 전의 조선은행권 제작은 일본 조폐창에서 이뤄지는 것이 정상이었는데 그 몇 주일 동안의 인쇄는 서울 시내의 민간 인쇄소까지 동원해서 마구잡이로 이뤄졌다. 당연히 인쇄 품질에도 문제가 있어서 상인들이 ‘붉은 돈’이라 부르며 받기를 꺼려했는데도 미군정이 그 효력을 보장해주었다. 나는 <해방일기> 작업에서 전문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지만, 이처럼 중대한 문제가 방치되어 있는 데는 불만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북의 화폐개혁을 피해 돈을 남쪽으로 보내려는 시도가 있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제 예치로 돈이 묶일 뿐 아니라 터무니없이 큰돈의 교환을 신청할 경우 조사 대상이 될 수도 있었을 테니 구매력이 계속 보장되고 있는 남쪽으로 돈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 간 교통이 통제되고 있었기 때문에 넘어오는 돈의 분량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해방 전 천내리에서(당시는 함경남도, 지금은 강원도) 사업을 하던 외할아버지가 이 무렵 재산을 포기하고 월남할 때 허리에 전대를 두르고 38선을 넘었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 들었는데, 화폐개혁의 상황 아래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미군정은 1946년 5월 좌익 탄압을 시작할 때 ‘정판사사건’을 터뜨렸다. ‘경제교란’을 목적으로 1천여만 원의 위폐를 찍어냈다는 주장도 믿을 근거가 없는 것인데, 이제 그보다 수백 배 돈이 남한 경제를 무너뜨리러 38선을 넘어오고 있다고 극우세력은 주장했다. 아마 그들은 이북 화폐개혁의 목적이 남쪽으로 ‘돈 폭탄’ 쏘아 보내는 데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소련영사관 직원이 이북에서 가져온 돈을 물 쓰듯 하며 귀금속 등을 사 모으는 “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장택상의 발표는 이 우려에 부응하려는 것이었다.

 

“북조선서 박탈한 조은권 귀금속 매점에 살포 - 재경 소 영사관원의 탈선”

 

서울에 주재하는 소련영사관원 세가이 세메노빗취 슈딘은 북조선 화폐개혁을 기화로 북조선 민중으로부터 박탈한 수많은 조선은행권을 남조선에 가져다가 물 쓰듯 하며 귀금속 등을 사 모으고 있는 놀라운 국제적 사건이 요즈음 수도청에 탐지되어 그 죄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가 행하는 바 남조선의 경제혼란을 조장할 목적인지 또는 자기 자신의 사복을 채우기 위한 것인지 여하간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국제법에 보장되는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는 소련영사관원이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선량한 이 나라 백성의 고혈을 빨아들이는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통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장택상 총감의 특별발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세가이 세메노빗취 슈딘은 서울에 주재하는 소련영사관원으로 현재 그 영사관에 유숙하고 있으면서 북조선에 있는 조선인으로부터 박탈하여 온 조선은행권 약 백만 원을 가져다가 서울서 다수한 귀금속 그 외 여러 가지 물품을 매입하였다. 이 은행권은 월여 전에 환금하여준다 하고 약속 이행치 않은 은행권이다. 이 돈이 북조선으로부터 남조선에 있는 남로당에 송금된 것 같은데 무슨 까닭인지 슈딘은 이러한 물품을 매입하였다. 이 매입 목적은 혹은 자기의 사유로 만들는지 혹은 본국에 송치하여 고가로 상업목적을 의도하는지 경찰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북조선 민중으로부터 환금하여준다 기만하고 환금 아니 하여 준 돈을 가져다가 남조선에서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는 소련영사관원이 여사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사의다. 수도경찰은 다행히 이목이 밝아서 비밀 또 비밀리에서 행동하는 이 슈딘의 행사를 잘 알고 있다. 물품매입의 날짜 품명 상점은 다음과 같다. 양심 있는 우리 조선동포는 참고로 잘 보아 주기 바란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6일)

 

밑에 붙어있는 목록에는 2월 25일에서 3월 29일 사이에 이뤄진 27건 매입의 금액, 품명, 장소가 나열되어 있다. 제일 큰 매입이 45만 원에 라이카사진기를 산 것이었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사는 등 2천 원 미만의 매입도 8건이나 포함되어 있다. 1만 여 원짜리 금반지 몇 개와 고급 시계 3개 등 휴대에 편리한 고가품을 개인 수요보다 많이 산 것은 사실이다.

 

슈딘이라는 이 영사관 직원이 무슨 범죄를 저질렀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그는 조선은행권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북조선에 있는 조선인으로부터 박탈하여 온” 것이라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아마 2월 25일에 비싼 사진기를 사는 장면이 포착되자 그때부터 담배 한 갑 사는 것까지 다 미행하며 조사한 모양인데, 그것이 무슨 범죄나 되는 것처럼, 마치 치외법권 때문에 체포하지 못한 것처럼 일방적으로 떠들어대는 것일 뿐이다.

 

슈딘이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남 미군정의 법령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이북 화폐개혁 관계 법령에 대한 범죄일 것이다. 평양에 있는 그의 동료 한 사람이 주변의 조선인에게 조선은행권으로 손목시계나 금반지 따위를 사달라는 부탁을 받아 서울에 있는 슈딘에게 맡긴 것이라고 추측된다.

 

1947년 9월 남조선과도정부 정무위원회가 웨드마이어 특사에게 제출한 ‘시국대책요강’ 중에는 화폐개혁의 필요성이 적시되어 있다.(<경향신문> 1947년 11월 6일) 그러나 이북의 화폐개혁 때까지 미군정은 화폐개혁 조짐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북의 화폐개혁 소식이 전해지고 극우파가 ‘돈 폭탄’ 위협을 제기하자 방어를 위해 화폐개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왔지만 미군정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화폐개혁 없다”

 

북조선 화폐개혁에 따르는 남조선의 인플레를 방지하고자 불원한 장래에 미군정이 화폐개혁을 단행하리라는 외전(外電)과 더불어 항간에는 화폐개혁에 대한 의혹심이 증대한데 중앙청 정무회 화폐대책위원회에서는 이러한 긴급사태에 대처하여 동 문제를 최후적으로 결정하고자 5일 긴급회의를 개최하였는데, 동 석상에서 현 단계 화폐개혁에 대한 정부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결국 재무부고문 로렌 씨의 주장인 “현하 남조선의 화폐개혁은 민생을 가일층 빈궁화시킬 것으로 정치문제에 앞서 실시될 수 없고, 북조선 화폐개혁에 따른 구권 회수도 대일 배상에 있어 북조선 재산까지 포함되어 있는 만치 기술적 관계로 실시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어 남조선 화폐개혁은 현하 사태에 있어서는 실시 않기로 되었다. (<경향신문> 1948년 1월 10일)

 

분단건국의 책임을 따짐에 있어서 이승만과 한민당 등 이남의 분단건국 추진 세력을 옹호하기 위해 이북이 국가 수립을 먼저 진행했다는 주장이 많이 있었다. 1947년 12월의 화폐개혁도 그런 주장에서 많이 지목하는 항목이다. 그런데 이북의 화폐개혁은 시행했다는 사실보다도 그 시점까지 시행을 참아왔다는 점을 더 중시해야 할 것이다. 조선은행은 미군정이 장악하고 있었고, 미군정은 1948년 초까지 조선은행권 발행고를 335억 원까지 늘렸다. 해방 당시 55억 원은 물론이고 진주 당시 85억 원에 비해서도 엄청난 팽창이다. 미군정이 남발하는 조선은행권의 이북 ‘경제교란’을 막기 위해서는 화폐개혁이 일찍부터 필요했다.

 

 

Posted by 문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는 1946년 2월 8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통합으로 이뤄진 단체다. 독촉협의회는 1945년 11월 이승만을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을 지향하여 만들어진 단체였고 총동원위원회는 그 해 연말 반탁운동의 열기 속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단체였다. 1946년 초 신탁통치안을 둘러싸고 좌우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우익 통합을 위해 독촉국민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통합 당시 총동원위원회의 기세가 드높은 반면 독촉협의회는 유명무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비록 총재를 이승만으로, 부총재를 김구로 하였지만 독촉국민회의 주도권은 김구 쪽이 가질 전망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독촉국민회가 완전한 이승만의 사조직으로 자리 잡게 된다. ‘조직의 달인’ 신익희가 김구 쪽에서 이승만 쪽으로 줄을 바꾼 것이 큰 작용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후에 신익희가 이승만과 결별하며 유림에게 합작을 청했을 때 유림에게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호통을 들은 일이나(1946년 8월 4일 일기) 신익희가 자유신문 사장이 되어 김구를 고문으로 내세운 것을 김구가 정면 반박한 일이(1946년 11월 23일 일기) 모두 이 ‘변절’ 때문이었을 것이다.

 

독촉국민회 제6차 전국대표자대회가 3월 18-19일 양일간 시공관에서 열렸다. 총재 이승만의 훈화에 이어 부총재 김구의 치사를 대독하는 중 일부 대의원의 맹렬한 중지 요구로 대독이 중단되었다. 남북협상론을 내놓은 김구의 정치적 고립이 확인되는 해프닝이었다. 치사 낭독 중단 사실을 회의록에 남기지 말자는 제안이 둘째 날 회의 중 있었으나 표결에서 회의록에 그대로 남기자는 주장을 다수 대의원이 지지했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0일)

 

김구의 세력 기반은 한독당과 국민의회밖에 남지 않았다. 독촉국민회 대회의 결의사항 중 “한국민족대표단은 우리 전민족의 최고기관이니 우리는 절대 지지하는 동시에 그 지시를 복종하기로 맹서한다.”는 항목이 이 사실을 분명히 했다.(<경향신문> 1948년 3월 18일) 국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우익에서 주장하는 기구로 국민의회와 민대가 있었는데 김구는 양자 통합을 위해 계속 노력해 왔다. 당시 재판이 진행 중이던 장덕수 살해사건도 이 통합 노력과 관련된 것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두 기구를 대표자대회 없이 약식절차로 통합한다는 발표가 1947년 1월 8일 나왔으나, 이것은 김구 측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김구가 남북협상론으로 돌아선 중요한 이유도 이 통합 노력의 좌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촉국민회가 민대를 “전민족의 최고기관”으로 확인한 것은 국민의회의 권위를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독촉국민회 대회 결정 중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김두한 판결의 재고와 특별선거구 설치를 당국에 진정한다는 것이다. 특별선거구란 월남민 수가 460만 명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대표할 선거구를 남조선 주민의 선거구와 별도로 설치해 달라는 단독건국 추진 세력의 요구였다. 현실성 없는 요구를 정치공세의 일환으로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김두한 얘기는 왜 나온 것일까? 1947년 4월 중순 좌익 활동가들을 납치 살해한 ‘대한민청 사건’은 미군정으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악질 범죄였다. 그런데 7월 3일 선고공판에서 김두한에게 벌금 2만 원 등 경미한 판결이 나오자 미군정은 상고 상태에서 이 사건을 미군 군사법정으로 이관했다. 1948년 1월 22일부터 2월 12일까지 군정재판이 진행되었는데 그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하지의 감형 조치 후 3월 15일 발표했다.

 

“김두한 사형 재심에서 언도”

 

조선인 재판소에서 이미 판결을 받은 김두한 김영태 등 16명에 관한 군률재판은 조사위원회에서 지난 2월 12일 그 심리를 마친 후 그 내용 발표를 보류하고 있던바 지난 15일 조선주둔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즉 동 조사위원들은 김두한·김영태·신영균·홍만길·조희창·박기영·양동수·임일택·김두윤·이영근·이창성·송장환·고경주·김관철 등 14명에 교수형으로, 문화태·송기현 등 2명은 종신형으로 판결하였는데 하지 중장이 다시 재판한 결과 김두한 교수형, 김영태·신영균·홍만길·조희창 4명은 종신형으로, 박기영·양동수·임일택·김두윤·이영근·이창성·송장환·고경주·김관철 등 9명은 30년 형으로, 문화태·송기현 2명은 20년 형으로 각각 감형 수감되었는데 하지 중장으로부터 수감장소가 명령될 때까지는 미군 제7사단 구금소에 임시 수감 중이라 한다.

 

그리고 김두한 사형에 대하여서는 교수 집행 전에 미국 극동사령관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18일)

 

테러가 활개 치는 해방공간의 남조선에서도 ‘군계일학’이라 할 극한테러의 상징 김두한의 교수형이 확정된 것이다. 그런데 이 발표가 나오자 독촉국민회에서 그 감형을 진정하고 나선 것이다. 23일 이화장에서 열린 민대 회의에서도 김두한 감형 추진이 결정되었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25일자) 선거를 앞둔 급박한 상황 속에 김두한 구명이 이승만 세력의 큰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결국 김두한은 형이 집행되지 않은 채 이승만 정부 수립 후 감옥을 빠져나오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오키나와 미군부대에 수감되어 있다가 형 집행 예정일 며칠 전 정부 수립으로 모면했다고 하는데, 그 경위는 확인하지 못했다.)

 

1948년 10월 8일자 <경향신문>에 대전형무소에 복역 중인 김두한이 장출혈로 보석될 것 같다고 하는 기사가 나온 후 그에 관한 기사가 없다가 이듬해 6월에야 신문 지면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김두한 등 송청”

 

지난 5월 30일 종로서에 검거되어 그간 문초를 받고 있던 대한청년단 건설국장 김두한(31), 김준경(40), 박중운(30) 등 3명은 협박 공갈 무기불법소지 불법감금 등의 혐의죄 등으로 17일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청되었다. (<경향신문> 1949년 6월 18일)

 

김두한이 당시 테러리즘의 상징이었던 만큼 그를 보호한다는 것은 “우리 쪽 테러라면 어떤 테러라도 감싸준다.”는 선언이었다. 1948년 3월은 그런 선언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단독선거 강행을 위해 극한테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집권 후 그가 풀려나 활동을 재개한 것도 테러리즘의 수요가 계속되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5-10선거의 공포분위기에 대한 예고가 분명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유엔위원단은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강조하고 있었고, 기권의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3월 18일 유엔위원회 그랑 정보관은 기자와 문답에서 이 점을 다시 밝혔다.

 

(문) 만약 선거가 있어서 투표를 강요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 그것은 위법이며 자유스러운 분위기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문) 합법적으로 선거를 반대할 수도 있는가?

(답) 그 문제에 대하여는 말할 수 없으나 군정당국에 제출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 관한 위원단 건의 가운데 이런 점도 포함되었을는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1948년 3월 19일)

 

김구-김규식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자들이 선거 거부를 표명하고 있는 상황에서 선거 불참여가 인민의 중요한 의사표시 방법이었기 때문에 기권의 권리가 부각되었다. 인민에게 선거 참여를 강요하는 것이 분단건국 추진 세력에게 최대의 과제였다. 5월 18일 독촉국민회 대회에서 이승만 훈화 중 이런 대목이 선거 참여를 강요하는 논리였다.

 

“공산당을 비롯한 선거를 반대하려는 사람들은 갖은 선동과 모략으로 또는 파괴로써 선거를 방해하려고 할 것이니 우리는 이 점에 특히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번 선거는 남북통일선거가 아니므로 대외적 체면상으로 참가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으나 남북통일선거를 하지 말자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3월 20일)

 

3월 18일자 <동아일보>에 기묘한 기사 하나가 실렸다. “이해 곤란한 언동, 군정 연장이 내조(來朝) 목적? - 서 박사 발언 각 방면에 충동”이란 제목인데, 서 박사의 발언 내용은 보이지 않고 그 발언에 대한 극우단체의 비난만 소개되어 있다.

 

총선거대책위원회: “총선거를 반대하는 자는 조선의 정부수립을 반대하는 자이다. 서재필 박사가 무엇 때문에 총선거를 반대하는 암시를 하고 이 박사를 중상하는지 알 수 없다. 결국 그는 조선독립과 조선독립을 도우려고 내조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도구가 되려고 온 것밖에 되지 않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다.”

 

민족통일총본부: “서재필 박사가 이승만 박사를 중상하고 오늘 총선거를 반대하는 암시를 발표한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아마 조선말도 할 줄 모르는 서 박사의 말이 와전되어 악질 반동분자가 역선전한 것으로 보인다.”

 

반탁독립투위: “총선거를 반대하는 암시를 하는 자가 미군정의 관리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것은 유감이다. 미국은 조선독립과 자주정부수립을 도우려고 총선거를 지지하는 우방인데 그러한 자가 미군 관리 중에 있다면 미국정부에 대한 반동이라고 할 것이다.”

 

국민회 선전부: “정치적 이해관계로 총선거를 반대하는 악질 반동분자의 도량이 날로 심하여 가는 금일에 조선독립정부 수립을 도우려는 미국의 현지 관리로서 우리 독립에 협조하러 온 줄 알았던 서재필 박사가 의외로 선거를 반대하는 반동분자의 도구가 되어서 3월14일부 신민일보 등에서 최고영도자인 이 박사를 중상하여 민중과의 이간을 일삼는 것은 진실로 유감스러운 일이며 일 미국 군정관리로서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은 결국 군정을 연장할 기도가 아닌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민일보>에 실린 서재필의 발언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총선거 반대의 암시와 이승만에 대한 중상이라고 한다. 온갖 단체들이 야비한 언사까지 써서 다구리에 나서는 것도 볼 만하고, 원래 발언은 빼놓고 그에 대한 비난만 대서특필하는 동아일보, 역시 대단하다.

 

5-10선거의 자유분위기를 판별할 첫 번째 기준이 기권할 권리의 보장 여부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유엔 소총회와 조선위원단의 “중앙정부 수립을 위한 가능지역 선거”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조선인이 자기 의사를 표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선거 참여 거부였기 때문이다. 분단건국 추진 세력이 이 권리를 묵살하고 싶어 한 것은 당연한 일이거니와 미군정은 이 권리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나? 3월 22일 하지 사령관의 특별성명 뒷부분에 드러나 있다.

 

“통일 위한 총선거, 참가 거부면 적화 초래 - 애국적 대사업에 충성을 다하라.”

 

(...) 만일 조선국민이 투표하지 않는다든지 또는 오도된 지도자들이 참가를 거부하고 자기 부하들에게 선거를 거부하도록 종용한다든지 만일 소수의 진정한 애국자만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여 투표를 하면 그와 같이 조직된 정부는 전조선국민의 희망을 충분히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조선독립의 지연을 초래하며 또 그 결과로 인하여 공산주의의 노력이 팽창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 것이든지 그 선택은 여러분의 자유이다.

 

조선중앙정부를 수립하여 분열된 국가를 통일되도록 공작하는 것도 여러분의 자유요, 또는 혼란을 가져오는 것도 여러분의 자유요, 일 공산당 하의 위성국가가 되어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도 여러분의 자유이다. 외국인으로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어떤 결정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선거는 자유이여야 하고 여러분의 의견도 실행되어야 한다. 여러분만이 이것을 결정할 수 있다. 정당의 지도자이든지 보통 유권자든지를 막론하고 총선거에 참가 불참가는 여러분의 자유이다. 만일 여러분이 참가하여 후보자를 선거하고 누구나 다 투표하여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양성한다면 본관은 이상 말한 책임과 권위 있는 대의원을 맞이할 것이요, 만일 여러분이 참가를 거부한다면 그 결과는 전 조선을 혼란과 공산주의와 외국의 노예로 도입(導入)할 위험에 봉착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23일)

 

‘자유’란 말을 거듭해서 쓰는데, 가만 보면 반어법이다. 형식적으로는 ‘자유’지만 그런 자유를 누리려 드는 것은 ‘방종’이란 뜻이다. 완전 협박이다. 조병옥이 앞장서서 수십만 ‘향보단’을 조직하는 것이 무엇보다 기권의 권리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는데, 미군정이 그것을 승인하는 까닭을 여기서 벌써 알아볼 수 있다.

 

 

 

위 원고를 끝낸 뒤 <신민일보> 1948년 3월 14일자에 실린 서재필-신영철(신민일보사 사장) 대담 기사 "구국 투쟁과 신국민 운동" 내용이 <서재필이 꿈꾼 나라>(최기영 엮음, 푸른역사 펴냄) 349-359쪽에 실려 있는 것을 찾았다. 이승만 추종세력이 문제삼은 것으로 보이는 대목을 옮겨놓는다.

 

"이 박사는 하지 중장을 조선으로부터 퇴임시킬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 박사가 조선에 와서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가라고 하여 노골적인 반소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선에 있어서의 미소 관계는 험악하여지고 하지 중장의 입장은 대단히 곤란하여진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미국 정부는 극우의 이 박사를 지지하는 것은 조선 통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고 하지 중장에게 중간노선을 가는 사람을 물색하라고 지령을 내린 것입니다."

 

"미소의 대립을 격화시키고 조선의 허리를 잘라서 남은 미, 북은 소로 대진(對陣)시켜 놓으면 그 결과가 어떠하리라는 것쯤을 예견치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정치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을 견식 있는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남북 분할을 도(賭)하고라도 단선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는 그 해결점을 미소 전쟁에서 구하려 하고 미소 전쟁이 발발하여야만 조선민족의 살 길이 나선다고 극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소가 싸울 것인지 안 싸울 것인지는 몰라도 조선을 위해서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파괴주의자이니 파괴주의자가 어찌 애국애족하며 건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인류는 평화를 희구하고 있고 평화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지옥인데 자기에게는 비누 한 장 변변히 만들 능력도 없으면서 남에게 전쟁을 권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