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환 <한글의 시대를 열다-해방 후 한글학회 활동 연구>(경인문화사 펴냄)

 

저자가 개그맨 출신 방송인이라는 사실, 그가 우리말글 사랑운동을 펼쳐온 사실, 그리고 40세 나이에 학부에 입학해 13년간 일과 공부를 병행한 끝에 성균관대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따기에 이른 사실을 이 책을 보고야 알았다. 하나하나 의미가 큰 이 사실들을 엮으면 좋은 기사가 될 것도 같지만, 내 몫이 아니다. 책 내용에 관한 생각만 적더라도 한 꼭지 글에 담기가 벅차게 느껴진다.

 

지난 연말 통과된 학위논문을 바탕으로 한 이 책은 부제와 같이 해방 후 10년간 한글학회(1949년 9월 이전은 ‘조선어학회’)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조선어학회-한글학회는 하나의 민간단체이지만 1920년대 이래 민족의 말과 글에 관련된 활동이 이 학회에 집중되어 있던 사정을 놓고 본다면, 이 학회의 활동은 해방된 민족과 새로 세워진 국가의 어문정책을 전면적으로 비춰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남북에 세워진 두 정권의 성격을 어문정책의 차이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독자로서 큰 소득이었다.

 

북한 건국과정에서 제2인자 역할을 맡은 김두봉이 주시경을 사사한 한글학자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북한 정권이 어문정책을 중시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인민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 서울대 사학과 교수 김성칠이 적은 일기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인민공화국의 일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한글 전용이다. 그러나 이상스러운 건 한글을 전용하면서도 한문에서 나온 문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새 문자들을 만들어서까지 쓴다. ‘독보회’라는 건 늘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그밖에 “창발성을 제고하여서”라든가 “견결히 반대한다”라든가 “경각성을 높여서”라든가 “청소한 우리 인민공화국”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잘 쓴다. 모두 귀에 생소한 말이다. (...)

 

이북에는 적어도 김두봉 씨, 이극로 씨, 김병제 씨 들이 있는데, 그리고 문장가로도 이기영 씨, 이태준 씨를 비롯하여 한설야, 안회남, 김남천, 임화, 이원조 등 다사제제한데, 어쩌면 그렇게도 진부한 표현 방식을 언제까지고 답습하고 있는 것일까. 설사 의식적인 어떠한 움직임이 없더라도 오랫동안 한글을 전용하노라면 저절로 말씨가 부드러워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인데, 갈수록 어려운 한문 문자투성이가 되어감은 대체 어찌한 때문일까. (<역사 앞에서>(김성칠 지음, 창비 펴냄) 1950년 9월 10일)

 

이북의 어문정책에 큰 기대를 건 근거로 김두봉과 함께 이극로와 김병제의 존재를 제시했다. 이극로(1893-1978년)와 김병제(1905-1991년)는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4월 남북협상 후 평양으로 옮겨간 ‘월북’ 학자들이다. 김성칠이 9-28 서울 수복을 앞두고 북쪽으로 떠나는 친구 하나를 배웅한 뒤 적은 일기를 보면 당시 남한의 문화정책이 빈약하여 많은 문화인들이 북쪽을 향하는 실정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리하여 자꾸만 없어지는 문화인과 기술자들, 몇십년을 길러야 하는 이들을 하루아침에 다 떠나보내고 앞으로 대한민국은 어떻게 살림을 꾸려나가려는 것인지?

 

글줄이나 쓰고 그림폭이나 그리던 사람들, 심지어 음악가-영화인에 이르기까지 쓸 만한 사람이 많이 북으로 가버렸다. 학계로 말하여도 신진발랄한 사람들이 많이 가고 우리같이 무기력한 축들이 지천으로 남아 있다. 간 그들이 모두 볼셰비끼였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던 사람들 또는 양심적인 이상주의자들이 죄다 가버렸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깊이 반성하는 바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간 그들에게도 잘못이 있을 것이다. 남의 밥에 있는 콩이 더 굵어보이는 심리도 있었을 것이고, 턱없이 현실에 불만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는 젊음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그런데다 이북의 선전공작이 강력하고 또 좋은 미끼로서 나꾸었다는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것뿐일까. 이남의 분위기는 과연 그들에게 유쾌한 기분으로 일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인권이 보장되고 그들의 생활이 안정되었었나 함을 생각해볼 때, 결국은 그들의 등을 떠밀어서 38선 밖으로 몰아낸 것이나 다름없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저녁 한 사람의 양심적인 예술가를 또 북으로 떠나보냄에 있어 그가 이 몇해 동안 병고와 생활난과 고문의 위협에 허덕이었음을 생각하고 이 땅의 문화정책이 너무나 빈약함을 통탄하여 마지않는다. (같은 책 1950년 9월 26일)

 

해방에서 전쟁에 이르기까지 남북 간에 많은 인구 이동이 있었다. 상황에 몰려 본의 아니게 옮긴 사람들도 있었지만, 자발적 선택으로 고향이나 활동하던 곳을 떠나 건너편으로 간 사람들도 많이 있었고, 이것을 월남 또는 월북이라 한다. 월남 인구가 월북 인구보다 훨씬 더 많았으나 문화예술인과 민족주의자 중에는 월북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정황으로 보아 당연한 사실이다. 해방 직후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은 조선총독부를 대신해 점령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역할을 맡은 반면 38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은 조선인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하고 자치 권한을 키워주었다. 이남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가 컸기 때문에 생계를 위한 월남이 많았지만, 민족-문화 정책에서는 이북이 유리한 입장이었다.

 

미군정에게는 조선인의 민족주의가 통치의 방해 요소였기 때문에 친일파 처단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경찰과 군정청에 적극 등용하여 권한을 쥐어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친일파가 ‘건국 주도세력’으로 자라났고, 그 세력을 발판으로 세워진 이승만 정권은 겉으로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민족주의를 등지는 성격과 민족문화를 경시하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

 

민족문화의 중심 요소인 말과 글을 아끼는 사람들의 모임인 조선어학회는 1921년 창립 이래(1931년까지는 ‘조선어연구회’) 학회의 형태이면서도 민족주의운동의 성격을 가진 단체였다. 더욱이 1942년 10월의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제 말기 최대의 민족주의 탄압이었기 때문에 해방 당시 50여 명의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그 회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민족주의 지도자로 인정받을 정도였다.

 

해방 때까지 함흥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4인의 회원이 해방 이틀 후 출옥하여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조선어학회 재건 작업이 시작된 것은 해방된 민족의 문화 사업을 요구하는 상황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학회의 정치적 중립을 표방한 것은(1945년 10월 26일 간사회 결정) 분단 점령과 좌우 대립의 상황 속에서 학회 사업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를 이끈 이사(1946년 2월까지는 ‘간사’)진은 위의 4인 및 함께 옥고를 겪다가 먼저 출옥했던 장지영과 김윤경, 그리고 옥사한 이윤재의 사위인 김병제로 구성되었다. 학술적 권위와 민족주의적 명망을 겸비한 진용이었다.

 

학회본부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학회 간부들이 미군정에 협조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장지영(1887-1976년)과 최현배(1894-1970년)가 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에 들어가 어문정책에 관여했고, 조선어학회가 지켜 온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관철된 것은 그들의 역할 덕분이었다. 그러나 공개적 정책 검토 없이 실무적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기 때문에 훗날 이승만이 ‘간소화 파동’을 일으킬 빌미를 남겼다. 미군정의 적극적 어문정책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 활동은 민간 차원과 회원들의 개인 차원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북에서는 정권 지도부에게 적극적 어문정책의 의지가 있었지만 그를 뒷받침할 전문 인력이 아쉬운 형편이었다. 이극로와 김병제의 월북이 이북의 필요에 부응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황인데, 저자는 이 사정을 분명하게 밝혀냈다. 특히 박지홍 교수의 인터뷰에서 매우 의미가 큰 증언을 끌어낸 것이 눈길을 끈다.

 

“1948년에 남북협상 있기 전에 이극로 박사가 정재표 선생을 만나자고 그래. 그렇게 약속을 해가지고 우리가 책을 같이 내기로 했는데, 내가 북으로 가야 되겠습니다. 그 이유는 김두봉 선생이 편지를 했는데 나라가 두 쪼가리 나더라도 말이 두 쪼가리 나서는 안 된다. 그러니 사전 편찬이 중한데 북에 사람이 없다. 남쪽에는 최현배 선생만 있어도 안 되나? 그러니 당신은 북으로 와 달라. 그래서 내가 응낙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북으로 가게 되면 정 선생님에게는 은혜를 잊지 못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거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북으로 가게 되면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그래 남북협상 때 안 돌아왔어요. 못 돌아온 게 아니라 벌써 뭐 식구들을 다 보냈다 그러더구먼요. 그래 그 분이 정말로 우리 국어학을 우리 국어를 우리말을 위해서 갔나? 그게 아니면 북쪽의 정치를 위해서 갔나? 모두 오해를 하고 있거든. 그런데 분명히 북에 갈 때 자긴 정재표 선생한테 얘기할 때 난 오직 거기 가서 조선말 사전을 편찬하기 위해서 간다고.” (59-60쪽)

 

김두봉이 이극로에게 와서 무슨 일을 해달라고 구체적인 제안을 했다는 것은 정황으로 봐서 매우 그럴싸한 일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58년이 지난 2006년에 와서야 간접 증언을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이다. 수십 년 반공독재 기간 동안 ‘월북자’ 이극로에 대한 연구는 물론, 언급조차 못하고 있던 상황 때문에 의미 있는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 짤막한 증언 하나에서만도 여러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김두봉이 이극로를 초청한 사실 외에도 이극로가 북으로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 북행 계획을 비밀로 해야 했다는 사실, 그리고 비밀로 하면서도 원고를 주기로 했던 출판인에게는 의리상 알려주지 않을 수 없는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었다는 사실까지 이 증언에 담겨 있다. 간접 증언이기는 하지만 원로 학자의 자발적 진술이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

 

늦게나마 이런 증언을 열심히 모은 저자의 노력을 치하한다. 텍스트에 매여 사는 역사학도로서는 손이 가기 어려운 분야인데 방송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작업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어 반갑다.

 

연구 대상 인물의 인간성에 대한 접근에서도 방송인의 감각이 좋은 효과를 가져오는 것 같다. 박지홍 교수의 위 증언에서도 이극로의 인간성이 살짝 드러나는데, 박 교수의 글에서 재인용한 이극로의 아래 발언은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

 

“여러분! 우리 학회가 낸 한글맞춤법통일안은 최현배 선생의 문법 체계가 그 토대가 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을 여러분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략) 최현배 선생의 문법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큰 사전의 체계를 이렇게 빨리 세울 수도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 훌륭한 체계를 세울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물론 명사, 대명사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최현배 선생이 굳이 이름씨, 대이름씨로 해야 하겠다고 우기신다면, 우리는 그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맞서서 명사-대명사로 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흡사 남이 다 지어 놓은 집에 가서 벽지는 무슨 색깔로 하라, 못은 어디에 치라 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최현배 선생은 왜정 때 생명을 걸고 우리말의 문법을 집대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선생이 세운 체계를 두고 용어만은 우리 생각에 맞게 고치겠다고 하겠습니까?” (53쪽)

 

이극로의 활동 범위를 대략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1947년 <조선말큰사전> 첫 권 발간을 앞둔 토론에서의 이 발언을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것은 껍데기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그가 조선어학회의 중심 사업인 사전편찬 사업의 중심 역할을 맡게 된 경위도 이 발언이 보여주는 자세에서 석연히 이해가 된다.

 

최현배는 한국어 문법 연구의 업적 못지않게 고집 세기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순 우리말에 대한 그의 집착은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한편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름씨, 그림씨 등 문법 용어의 고집이 그 단적인 예다. 1947년 조선어학회의 토론 분위기도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대다수 회원이 그의 급진적 주장을 난감해 하는데도 그는 주장을 굽히려 들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극로는 돌파구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용어 자체로는 ‘이름씨’보다 ‘명사’가 낫다고 생각하지만, 문법을 세워준 최현배가 고집한다면 그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이런 존중의 마음을 분명히 보여줌으로써 최현배로서도 자기 주장의 급진성을 인정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물러설 수 있었을 것이다. 성향이 서로 다른 동년배 학자들 사이에서 이런 표현이 오고가는 것이 존경스럽고도 사랑스럽다.

 

이극로는 학회 간부 중 이례적으로 정치활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조선어학회사건 이전의 사전 편찬 사업에서도 당대 일류 명사들과 교분을 가진 그의 ‘섭외’능력이 특출한 역할을 맡았고, 그 교분이 해방 후 그를 정치활동으로 끌어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치활동은 민족운동의 범위를 지켰고, 파당적 정치활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1947년 가을 조선 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어 분단건국의 위험이 짙어지면서 이극로의 정치활동이 활발해졌다. 홍명희, 김병로,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민주독립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이 이끄는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해서 남북협상을 제창했다. 그리고 이듬해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홍명희, 백남운 등과 함께 북쪽에 눌러앉았다.

 

이극로가 북한의 첫 내각에서 무임소상을 맡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실제로 어떤 일을 어떻게 했는지 밝힌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내용이다. 평양에서 그의 활동 내용은 바로 초기 북한의 어문정책 그 자체였다. 김두봉이 그를 부른 뜻, 이에 응해 그가 북으로 향한 뜻이 모두 이뤄진 셈이다. 그들이 내다본 것처럼 북한 정권이 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문화정책을 꾸준히 추진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의 꾸준한 어문정책에 대비되는 것이 이 책 뒤쪽에서 다룬 남한의 ‘한글맞춤법 간소화 파동’이다.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 9일 이승만 대통령의 한글날 담화 중 한 대목에 ‘간소화 파동’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국문을 쓰는 데 한글이라는 방식으로 순편한 말을 불편케 하든지 속기할 수 있는 것을 더디게 만들어서 획과 음을 중첩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리 한글 초대의 원칙이라 할지라도 이 글은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니 이 점에 깊이 재고를 요하여 여러 가지로 교정을 하여서 우리글을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를 부탁하는 바이다.” (340쪽)

 

이 메시지는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는데, 이승만은 이듬해 한글날 담화에서도 같은 메시지를 되풀이했다.

 

“근래에 이르러 신문 게재나 다른 문화 사회에서 정식 국문이라고 쓰는 것을 보면, 이전 것을 개량하는 대신, 도리어 쓰기도 더디고 보기도 괴상하게 만들어놓아 퇴보된 글을 통용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이것을 교정하지 못하면 얼마 후에는 그 습관이 더욱 굳어져서 고치기 극난할 것이매 모든 언론기관과 문화계에서 특별히 주의하여 속히 개정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340쪽)

 

이승만은 문제를 꺼내놓기만 한 채로 몇 해 동안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국회 내 세력도 약하고 전쟁으로 경황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그가 재선 후 국회에 안정 기반을 확보한 1953년 봄 이 문제를 꺼내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4월 27일 백두진 국무총리가 각 부처 장관과 각 도 지사에게 보낸 훈령으로부터 한글 간소화 파동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우리 한글은 원래 사용의 간편을 안목으로 창조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온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철자법은 복잡 불편한 점이 불소함에 비추어 차를 간이화하라는 대통령 각하의 분부도 누차 계시기에 단기 4286년 4월 11일 제32회 국무회의에서 정부 문서, 정부에서 정하는 교과서, 타이프라이터용 철자는 간이한 구 철자법을 사용할 것을 의결하였던 바, 기중 교과서, 타이프라이터에 대하여는 준비상 관계로 다소 지연되더라도, 정부용 문서에 관하여는 즉시 간이한 구 철자법을 사용하도록 함이 가하다고 사료되오니, 이후 의차 시행하기 훈령함. (343쪽)

 

1년 남짓 이어진 파동 속에서 벌어진 별의별 우스운 일, 웃지 못 할 일을 훑어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여기서는 넘어가고, 1954년 7월 하순 이승만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면서 파동도 흐지부지하게 되었다. 7월 24일 기자회견에서 이승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행 맞춤법이 옳다고 하는 것은, 학생들이나 또는 언론인들이 한글의 이치가 어떻게 된지도 모르면서 습관에 따라 사용하기 때문이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여도 좋다.” (377쪽)

 

이승만의 ‘간소화’ 주장의 본질은 ‘문법 폐지’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받침, 철자, 띄어쓰기 등 일체의 규제를 풀어 “소리 나는 대로” 적자는 것이었다.

 

청년 이승만이 국내에서 활동할 때는 조선어학회도 생기지 않았고 한글맞춤법 통일안도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그 시절의 문자생활에만 익숙하던 그가 “옛날 성경처럼 적으면 될 것을 왜 그렇게 까다롭게 만들었냐?”고 한글학자들의 그 동안 업적을 몽땅 갖다 버리라는 것이었다. 민족문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독재자의 자의적 판단으로 인해 어문정책이 1년 넘게 마비되는 그런 국가가 초기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식민지시대에 민간-학계의 민족운동으로 추진되던 <큰사전> 편찬 사업은 건국 후에도 한글학회의 민간사업으로 계속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 사업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간소화 파동으로 지체시키기까지 하고, 심지어 미군정 시기부터 받아온 록펠러재단의 지원까지 받기 어렵게 만든 사태조차 있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이승만 정권은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그러나 그것이 입에 발린 민족주의였다는 사실을 한글 간소화 파동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1953년 파동이 시작될 때 문교부장관 김법린과 편수국장 최현배는 한글운동에 오랫동안 노고를 바쳐 온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파동 속에서 자리를 떠나야 했다. 남쪽의 어문 사업은 아무개가 있으니 자기는 마음 놓고 북행할 수 있다고 이극로가 말했던 그 최현배, 그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서 전후 6년간 편수국을 맡아 어문정책에 열과 성을 다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의 뜻을 키워주지 않았다.

 

누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나? 김법린이 비운 문교부장관 자리를 맡은 이선근은 1954년 7월 12일 국회 질의 중 간소화 정책에 대한 의원들의 비판에 대해 “수일 전 북한괴뢰들이 방송할 때 사용한 말과 같다.”고 대꾸했다고 한다.(372-373쪽) 아, 이 더러운 기시감!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