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家臣)을 둔 죄”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고조(高祖)의 둘째아들이었다. 그는 원래 태자였던 형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을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으로 죽이고 태자가 되었다가 곧이어 황제가 되었다.
정변을 일으킨 후 세민은 형을 받들어 자신을 적대하던 인물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특히 자신을 억누르도록 건성에게 꾸준히 건의했던 위징(魏徵)을 “그는 자기 위치에서 할 바를 다한 것일 뿐”이라며 자기 측근에 중용한 것은 그의 큰 도량을 드러낸 일로 일컬어진다.
그후 위징은 태종에게 바른말을 아끼지 않고 올리는 ‘충직한 신하’의 상징이 되었고, 태종은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도 열심히 받아들이는 ‘관대한 군주’의 모범이 되었다. “정관정요(貞觀政要)”에는 두 군신간의 믿음을 그린 이야기들이 수없이 들어 있다.
현무문의 변 몇 년 후 태종의 옛 부하 하나가 독직(瀆職)으로 해임된 일이 있다. 태종은 어려웠던 시절의 충성을 생각해 그를 복직시켜 주려 했다. 그러자 위징은 “폐하를 모셨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면 보통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태종을 적대했던 사람이 태종의 부하였던 사람을 우대하지 말라는 것이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격이다. 그런데도 태종은 위징의 간언(諫言)에 따랐다.
그로부터 십여 년 후 이번에는 당인홍(黨仁弘)의 독직사건이 있었다. 그 죄가 커서 사형이 판결되었으나, 워낙 오랫동안 고락을 함께 해온 그를 차마 죽게 할 수 없었다. 태종은 여러 신하를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법이란 하늘이 임금에게 내려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사사로운 정으로 당인홍을 풀어주고자 하니,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남교(南郊)에 멍석을 깔아 하늘에 죄를 고하고 거친 밥을 먹으며 사흘 동안 근신하여 이 죄를 풀고자 한다.” 그리고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같은 처벌을 자신에게 내렸다.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의 하나로 꼽히지만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결코 성인군자 스타일은 아니다. 애증(愛憎)이 뚜렷한,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다. 가신들 때문에 그가 겪은 고민을 들여다보면 인간적 약점을 뛰어넘어 훌륭한 군주가 되고자 애쓴 꾸준한 노력이 참으로 평가받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은 ‘민주주의’와 ‘법치’를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근대 이전의 군주제를 미개한 정치체제로 여기고 그 앞에 ‘전제’라는 말을 자동적으로 떠올린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근대화가 늦은 이유로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를 지목하면서 굳어진 관념이다.
유럽 발 근대문명이 근년 한계를 드러내면서 이 관념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제의 하나였던 당 태종이 법을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위 일화도 그런 반성에 도움이 되는 자료의 하나다. 퇴임을 몇 주일 앞두고 모든 방면의 반대를 무릅쓰며 “대통령의 고유권한”을 행사하는 이명박, 측근의 사면을 위해 근신의 제스처라도 취하는 당 태종, 어느 쪽이 ‘법치’의 참된 정신에 가까운 것인가?
법치의 요건으로 형식적인 측면을 많이 이야기한다. 법이 군주의 전제권력이 아닌 인민의 합의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 법이 통치의 수단이 아니라 통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 바람직한 ‘방향’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형식적 요건으로 법치의 ‘실질’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명박의 사면권 행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명박의 사면권을 뒷받침해 준 제반 법률은 국민을 대표하는 대한민국 국회에서 제정된 것이다. 그리고 이명박이 그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앉은 것도 국민의 합의과정인 선거를 통해서였다. 법치의 형식적 요건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 그런데 그 행위가 법치의 훌륭한 실행이었다고 만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면을 받은 당사자 중에도 정당한 사면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법이 통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나는 회의적이다. 물론 권력자가 법을 자의적으로 농단하고 유린하는 ‘무법’ 상태를 막기 위해 법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법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것은 일종의 물신주의(fetishism)에 빠질 위험이 있다.
법을 통치의 주체로 삼는 원칙에 제일 철저했던 사례로 중국 전국시대의 법가가 있었다. 상앙은 진나라에 법치주의 변법을 실시해 귀족의 견제를 물리치고 왕권을 절대화함으로써 부국강병의 길을 열어주었으나 엄격한 법률에 그 자신이 희생당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을 발전시켜 시황제의 통일에 이르렀으나 결국 진나라를 무너뜨린 것도 지나친 법치주의였다. 시황제가 죽은 후 환관 조고가 권력을 농단할 때 그의 ‘지록위마(指鹿爲馬)’에 누구도 맞서지 못한 것은 그의 행위가 법률적 요건을 갖춘 것이기 때문이었다.
법가의 법치주의는 통치자에게 매력적인 도구였다. 한나라가 천하를 넘겨받은 뒤에도 법가를 중용한 자취는 <사기> “혹리열전(酷吏列傳)”에 여실히 나타나 있다. 사마천은 그 서문에서 “정(政)과 형(刑)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이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므로 덕(德)과 예(禮)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명박을 보고 한 말 같다.
당 태종에게 생각을 되돌려 본다. 태종이 죽은 4년 후인 653년에 반포된 <당률(唐律)>은 중국 법률체계 발전의 획기적 사건이었다. 30권으로 이뤄진 방대한 내용은 태종 재위 중에 준비된 것이다. 5호16국, 남북조의 혼란기를 넘기고 다시 세워진 천하제국의 법률체계 확립은 태종의 중요한 과제였다. 쿠데타로 황제 자리를 차지했던 태종이지만, 안정된 천하질서 수립을 위해 힘껏 노력했던 것이다. 측근 사면을 위해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 것은 그런 마음에서였다.
과연 이명박은 측근을 사면하면서 태종만큼 자기 손해를 감수하는 것일까? 결과적으로는 태종보다 훨씬 더 큰 손해를 떠안을 것 같다.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이 형사책임을 추궁당한 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국가 체면도 있고 최소한의 ‘예우’란 것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명박은 이번 사면으로 그것을 훨씬 쉬운 일로 만들었다. ‘법대로’ 사면권을 행사한 대통령이라면 혹 무슨 책임이라도 있을 때 ‘법대로’ 추궁당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안타까운 것은 자기가 어떤 손해를 떠안고 있는 것인지 그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면 받는 사람들도 그렇다. 죄가 확정된 범행에 대해서는 사면을 받지만 앞으로 새로 밝혀질 혐의가 아무것도 없을까? 이번에 사면을 행한 자나 받은 자가 앞으로 혹시 형사책임을 추궁당하는 일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까? 정권을 맡는 사람들도 간과할 수 없는 호재 아니겠는가.
많은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 이 일이 대한민국의 법치가 형식적 차원을 넘어 더 발전할 길을 열어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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