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우리 살림이 '중산층'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되새긴다. 한 사람이 하루에 10만원 이상 드는 패키지관광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2, 3일 바람 쐴 틈을 내면 처조카 내외가 사는 양구를 비롯해 기댈 만한 언덕 있는 곳으로 다녀오는 게 고작이다. 그러다 보니 아내랑 돌아온 지 8년째 관광다운 관광에 나서 보지를 못하고 지냈다.

 

그러다 이번에 큰 마음 먹었다. 5월 17~18일 프레시안 인문학습원의 통영학교에 다녀오기로 하고 거금 46만원을 부쳤다. 프레시안에 연재되는 통영학교 교장 강제윤의 "통영은 맛있다"를 간간이 읽으며 구미가 당기곤 했는데, 이번 행사계획을 찬찬히 읽어보니 힘들게 돌아다닐 일은 많지 않고 맛있게 먹을 일은 많은 것 같다. 아내 의견을 청하니 선선히 찬성한다. 큰 돈 쓰는 게 아깝기는 하지만, 책상 앞에 틀어박혀 지내는 내가 길에 나선다는 게 일단 반가울 것이고, 해물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 데도 마음이 끌릴 것이다. 신선한 해물 없는 데서 자란 한이 맺혀 그런지, 이 사람 회 먹는다면 눈빛이 달라진다.

 

충무(지금은 통영이라며?)에 가본 게 언제였던가. 20여 년 전 대구 있을 때 한 번 놀러 간 생각이 난다. 매력적인 곳이다. 프로그램에 나와 있는 산책코스들이 따뜻한 봄날씨 즐기기에 아주 좋을 것 같다.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그리고 교장선생님이 글을 보면 먹는 데는 진짜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한 끼 한 끼가 즐길 만한 식사가 될 것 같고, 특히 17일 저녁의 '다찌' 집에 기대가 엄청 간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 볼 수는 없을까요. 생선회도 조금, 생선구이도 조금, 쭈꾸미도 조금, 꽃게도 조금, 멍게도, 굴도, 도다리도, 물메기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요. 통영에서는 가능합니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이 다 있습니다.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의 다찌집입니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술집이 다찌입니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옵니다.

전주의 막걸리 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입니다. 대신 술값이 좀 비쌉니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주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음식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지요. 요즘은 다찌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기본요금을 받기도 합니다.

이 좋은 나들이에 아는 얼굴도 더러 함께 하면 좋을 텐데, 엄청난 거금이 드는 이 행사를 주변사람들에게는 권할 수가 없다. "유유는 상종"이라 그런지 주변사람들 얼굴이 다 나 같은 궁상으로 보여서... 우리가 어디 가는지 안내문이라도 살펴보시라고 주소를 붙여놓는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98130329115426&Sectio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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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18세 이상 55세 이하의 모든 남성을 의무적으로 가입시키는 ‘향보단(鄕保團)’ 이야기가 난데없이 튀어나왔다.

 

“향토방위의 목적으로 ‘향보단’을 조직 - 군정의 지령으로 경무부에서”

 

향토를 방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향보단 조직이 방금 진행 중에 있다 하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이 조직은 군정장관의 지시로 경무부 각 관구 경찰청이 주동이 되어 각 행정관청의 협조를 얻어 주직에 착수하였다 하는바 서울시에서는 각 구청에 지시하여 조직을 촉진시키고 있다 한다. 복잡미묘한 정세에 미루어볼 때 향보단의 출현은 일반의 커다란 관심사의 하나라 아니할 수 없으며 그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직: 경찰지서를 단위로 본단을 조직하고 행정구역 즉 동-리-가-로를 단위로 분단을 조직한다.

 

목적: (1) 향토정신의 고취.

(2) 민족 공동 책임 관념의 앙양.

(3) 향토방위를 견고히 함으로써 외래 불순분자의 침입 내지 모략 선동 공작의 여지를 봉쇄함.

(4) 강도 절도 살인 방화 등 악질범죄의 미연 방지.

 

의무: (1) 각 지역의 주민으로서 만 15세 이상 65세 이하의 남녀는 공동책임을 부하함.

(2) 주민으로서 만 18세 이상 55세 이하의 남자는 단원이 될 의무가 있음. (경찰관, 경비대원, 소방관, 학생은 제외할 수 있음)

(3) 각 지역 내의 특정 청년단체로 하여금 단의 직능을 대행케 함을 금지함.

(4) 경찰서장은 항상 단을 정리 파악하는 동시에 단원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정기적으로 사열과 필요한 교육 훈련을 실시함

(5) 단원의 복무규율에 관한 규정은 각 관구 경찰청장이 이를 정함.

 

경비: 단원의 정원 급여 기타 단에 필요한 자재는 각 지역 주민의 의연금으로 충당함. (<경향신문> 1948년 4월 16일)

 

전 주민에게 책임을 지우고 전 남성을(별도 조직을 가진 소방관, 학생 등을 제외하고) 경찰의 지휘 아래 조직-동원하겠다는 어마어마한 발상이다. 이 기사에서는 “군정장관의 지시”라 했는데, 4월 16일 조병옥 경무부장이 일반의 오해를 불식하겠다며 한 말을 보면 실제는 그가 꾸민 일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조직은 경찰이 직접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각 동리에서 자치적으로 하는 것이다. 결코 강제적인 것이 아니고 자기 동리를 방위하기 위하여 만드는 것이다. 이 문제는 앞서 열린 각도지사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총선거를 앞둔 남조선사태는 곤란한 처지에 있는데 3만5천여 명의 경관만으로서는 도저히 13,800개소의 투표소를 지켜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투표소의 자유분위기를 확보하기 위하여 실시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조선에서는 선거사무소 습격사건이 80건이나 발생하였었다.” (<동아일보> 1946년 4월 17일)

 

조병옥은 향보단 조직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회고록에서도 자기 공적으로 열심히 내놓았을 것이다.

 

(‘CIC 수집 정보에 의하면 총선거 실시를 위한 치안 확보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는 하지 사령관에게 대답하며) 또 둘째 이유에 대해서는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현재의 남한 치안문제에 대하여는 2만5천 명의 국립경찰만으로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 역시 긍정하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선거를 치르기 위하여 100만 명의 보조경찰 제도를 설비하여 선거 준비에 만반 태세를 갖출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더니 하지 중장은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렇게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그러한 제도를 용인한다고 하더라도 미 국무성이 승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군정은 경찰국가라는 용인을 받기 쉬운 까닭에 그러한 제도를 설치하기는 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면서 나의 건의에 대해서 난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그 자리를 물러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조경찰 제도에 대하여 단념을 하지 않고 계속 연구한 결과 정다산의 목민심서와 이율곡 문헌을 참고로 하여 (...) 이 향청 또는 유향소 등을 참작하여 이것을 ‘향보단’이라고 명칭하고 5-10총선거를 대비하기 위하여 조직에 착수하였다. (...)

 

이러한 폭도들의 만행을 대비하기 위하여 나는 미리 향보단을 조직케 하고 경찰지서 단위의 각 지역에 55세 이하 청장년의 지원자로서 경찰과의 협력 하에 자발적인 자위조직을 구성케 하였다. 이 향보단은 선거가 끝난 후 선거 실시에 많은 공적을 남기고 그해 5월 22일 역사적인 해단식을 하였다. (<나의 회고록> 186-194쪽)

 

마지막 문단에서 향보단이 ‘자발적’ 조직이었다고 강변하고 선거가 끝난 후 ‘자발적’으로 해단한 것처럼 적었다. 실제로는 해체할 생각이 없었는데 너무나 물의를 많이 일으켜 어쩔 수 없이 폐지하게 된 사정을 잠시 후 살펴보겠다.

 

4월 18일자 <조선일보>의 아래 기사를 보면 경무부에서는 적어도 4월 3일부터 향보단 조직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 동안 비밀에 부쳐져 있었던 것이다.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원안 수정 방침이 나온 것을 보면 여론의 비난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향보단의 원안이 일부 수정될 것이라 한다. 경무부에서는 17일 각 관구경찰청장에게 통첩을 발하여 4월 3일부로서 향보단의 지방자치적 창설을 제시한 원안은 이를 해소하고 수정안이 완료되는 대로 즉시 교부할 것이니 이 사유를 각 지방장관에게도 통지할 것을 제시하였다. 탐문한 바에 의하면 향보단 조직은 군정장관이 경무부장에게 비공식으로 최촉한 것이라 하는데 법령으로 제정된 것은 아니고 또는 전국적 조직체도 아니라 한다. 또한 이는 경찰의 직속기관이 아니며 그 간부는 선거제로 하여 경찰부장은 단원의 훈련의 필요시와 비상사태 이외에는 지휘명령권이 없고 특정 청년단체가 대표할 수도 없다는 것이 명시되고 있다. 한편 경무부에서는 민간의 오해를 일소하기 위하여 그 원안을 수정하게 된 것인데 총선거 완수를 위하여 일반의 자발적 조직을 당국자는 요망하고 있다.

 

법령의 뒷받침도 없이 ‘비공식으로’ 진행되는 일이다. 이 기사에서도 조병옥이 군정장관 지시에 따르는 것으로 되어 있다. 후에 회고록에서 자랑스럽게 자기 공적으로(<목민심서>와 율곡 문헌까지 연구한) 내놓는 것과 대조해 보면 당시 이 일이 얼마나 욕을 많이 먹는 짓이었는지 짐작이 간다.

 

5월 20일 딘 군정장관이 향보단에 관한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5월 10일 선거일까지의 기간 중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장, 군수, 면장, 구, 동 및 가의 책임자는 평화유지에 경찰을 원조하고 협박, 폭동, 살인, 방화 및 기타 각종의 파업으로 선거를 방해하고자 기도하는 분자에 대하여 각기 지역을 방위함에 필요한 각기 지역의 남자시민을 대표함을 승인”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방경찰당국과 긴밀히 협력할 각 지방관청의 관할 하에 둘 것”이며 “시민으로부터 여하한 기부도 갹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각 신문 1948년 5월 21일자)

 

“승인”이라고 했다. ‘지시’가 아닌 것이다. 향토방위를 위한 ‘자발적’ 조직을 군정장관으로서 ‘승인’한다니, 법치의 개념을 가진 군정장관인가? 연변 말 ‘행방 없음’이 생각나며 웃음이 난다. 요새 말 ‘개념 없음’과 비슷한 뜻이다. 주제를 모르고 나서서 엉뚱한 짓 하는 것을 ‘행방 없다’고 한다. 전쟁 발발 직후 딘 소장이 포로로 잡힌 것이 행방 없어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는 것이다.

 

이렇게 조직된 향보단의 기본 장비는 완장과 곤봉이었다. 선거기간 내내 향보단이 질서유지에 공헌하는 모습이 선거 관계 기사에 한 줄씩 들어갔는데, 투표일의 서울 풍경을 그린 5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 “대 장안 선거 일색 - 열성적인 참가로 투표 90%를 돌파?”에서 한 대목을 뽑아 본다.

 

수도 서울이며 또한 이번 총선거의 중심지인 서울의 이날 광경을 그려보기로 한다. 어떠한 선거방해 행위라도 이를 막아내고자 수도청 젊은 7천 경관을 비롯하여 향보단원, 각 애국청년단체원들이 투표소 부근은 물론 거리의 요소요소마다 물샐 틈 없는 경계를 하고 있는 가운데 투표 시작시간인 아침 7시가 되기 전부터 유권자들은 투표소에 운집하여 투표시간만 고대하고 있었다.

 

이목이 번다한 서울 풍경이 이랬으니 시골에서 향보단의 역할은 더 컸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완장 찬 사람들이 투표소 주변에 모여 있는 것이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해칠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에게도 들지 않았던 것일까? 투표 후 유엔조선위원단에서 감시 결과를 발표한 공보 제59호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금번 선거 진행 중 몇몇 대표는 선거법 위반과 본 위원회의 건의사항 위반 등을 지적한 바 있다. 예거하면 우리들은 투표소 내와 그 주위에서 향보단원을 발견한 일이 있다. 향보단은 경찰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며 안녕질서를 유지함에 있어 경찰을 방조하는 것이다. 향보단은 투표자의 자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투표소에서는 투표장 안에 경관이 들어와 있은 적도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청년단원(혹자는 제복까지 착용)이 투표소 내와 그 주위를 빙돌고 있었다. 우리들 중의 혹자는 몇 개 투표소에 있어 비밀투표가 여행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4일)

 

향보단 조직이 자발적인 것이라 하여 그 대대적 동원이 관권선거가 아니라고 우기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다. 그 동안 테러단체의 ‘자발적 조직’에 따른 혼란으로 모자라 이제 전 국민의 ‘자발적 조직’을 조장하겠다니 그 결과가 어떤 무법천지를 만들지 아무런 상상도 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조병옥은 회고록에서 향보단이 5월 22일 “역사적인 해단식”을 거행했다고 하는데, 역사적이고 개뿔이고 해단식 같은 것은 없었다. 5월 22일 군정장관의 해단 명령이 떨어졌고 수도청 관하의 경우 5월 25일 해체가(완장과 곤봉 등의 반납) 행해졌는데(<동아일보> 1948년 5월 26일), 군정장관 명령 직전까지도 경찰은 향보단 해산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경관과 같이 배치 - 수도청서도 대책 고려”

 

지난 총선거 때의 경계를 비롯하여 금후 각종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탄생한 향보단은 경찰의 보조 역할을 하여 그 동안 다대한 성과를 거두고 있어 건국도상에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거니와 동 단원 중에는 일부 난폭한 행동을 보이고 있는 자가 간혹 보이고 있어 향보단 전체에 사회적 악영향을 미치게 하는 관계로 최근 수도청에서는 이를 시정하고 참다운 향보단을 구성하기 위하여 연일 회의를 거듭하고 있다 하는데 앞으로는 야간통행금지 시간에 향보단 배치 장소마다 경관 수 명씩 배치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2일)

 

5월 10일 투표일까지는 향보단의 횡포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질서유지’라는 명분으로 얼버무릴 수 있었다. 그러나 투표일이 지나자 향보단을 낀 폭력 사례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5월 22일자 <경향신문> “향보단원의 구타사건 속출”기사에는 5월 6일과 14일 원서동에서 대동청년단원 한 명씩이 향보단원들에게 끌려가 구타당한 일과 20일 돈암동에서 미24군단 수위감독인 39세의 사내가 향보단원들에게 구타당한 일이 보도되었다. 모두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일이었다. 대동청년단원이나 미군속 같은 신분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당한 폭행은 검찰 조사 받기도 힘들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5월 11일 밤에 한 통신사 기자가 납치, 구타당해 중상을 입은 일이 가장 눈길을 끈 향보단 폭행사건이었던 것 같다.

 

“상공통신 기자, 아들도 역(亦) 중태”

 

기보한 바와 같이 상공통신 기자 이영섭(48) 씨는 지난 11일 밤 성북동 자택에서 향보단원에게 납치당하여 성북동1동회사무소(향보단 사무실)에서 밤새도록 무수 구타를 당하여 중태에 빠진 후 성북경찰서를 거쳐 이튿날 아침 여의전병원에 입원하여 방금 가료 중에 있는데 동 씨의 장남 이문규(27)와 이 씨가 들어 있는 집주인 임무창 양 씨도 같은 날 밤에 같은 장소에서 구타를 당하고 중태에 빠져 있다. 담당의사 이주걸 씨의 말을 들으면 이 씨는 양쪽 팔이 부러지고 머리와 얼굴에 심한 타박상과 양쪽 다리가 상하였다 하며 이 씨의 장남 문규 씨는 팔이 부러지고 머리가 많이 상하였다 한다. 생명은 건질 수 있을 것이나 완치되기까지에는 장구한 시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9일)

 

이 참혹한 테러가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고 더러 과장된 오보도 유포되었던 모양이다. 이 보도가 나간 날 조병옥이 담화를 내놓았는데, 해명이랍시고 내놓은 담화 중에서까지 피해자를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태도가 눈길을 끈다.

 

“향보단 비난 말라 - 통신기자 절명은 허설(虛說) - 조 경무부장 담”

 

최근 시내에서 발행하는 모모 신문지면의 보도에 의하면 총선거를 반대하는 것이 전 인민의 일치된 부르짖음과 같이 떠들어대고 향보단원들의 비행과 횡포가 누누이 보도되어 세인의 이목을 현혹케 하는바 심한바 있어 경무부에서는 신경을 날카롭게 하여 진상을 조사 중이거니와 그 중에서도 수일 전 상공통신기자 이모가 향보단원의 폭력으로 말미암아 입원가료 중 사망하였다는 보도가 유포된 진상을 19일 조 경무부장은 다음과 같이 담화를 발표하였다.

 

“성북동 제1향보단원에게 얻어맞은 청년 세 사람은 여자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 입원가료 중으로 불일 중에 퇴원할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도 이학준 씨는 군정을 비방하고 총선거를 반대하는 삐라 등 두 가마니나 가지고 있었고 그 동판까지도 보관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들이 빚어낸 허황한 풍설과 교묘한 선전술법을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으로 밤을 낮 삼아 애국적 봉공을 하고 있는 향보단이 그들 음흉한 활동을 봉쇄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는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0일)

 

조병옥이 앞장서서 만든 향보단이 우익테러에 이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제도적 근거 없이 민간의 ‘자발적’ 조직을 조장했다가는 어떤 무법천지가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려는 뜻에서였을까, 좌익테러에 향보단을 이용한 사건까지 벌어졌다.

 

“영등포중계소 방화 살인범, 24일 일당 5명 체포”

 

서울중앙전화국 영등포전화중계소 방화 살인 사건은 기보하였거니와 그 후 경찰은 불면불휴의 활동을 계속하여 범인 전부를 체포하였다. 즉 범인은 시내 신길동 270번지 남로당 경기도유격대 백골대 제5중대장 이장수(25)와 정춘수(29) 이경래(23) 최용준(22) 이창근(20) 등 5명을 24일 밤까지 전부 검거하는 동시에 범인들이 빼앗아 갔던 카빈총 두 자루와 4식 장총 한 자루도 관악산 산정에 묻은 것과 시내 모처에 은닉하였던 것을 전부 회수하였다. 그런데 이 범인들은 소학교도 나오지 못한 무지한 청년들로서 경관을 살해 방화할 것을 약속하여 현금 8만 원씩을 받고 거사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또 범인들은 영등포 신길동의 향보단원들로 이장수는 전 대동청년단원이었으며 현 향보단 부단장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6일)

 

5월 23일 새벽 2시 반에 범인 다섯 명이 신길동의 중계소를 습격해 직원 2명과 경찰관 3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출신과 배경에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완장과 곤봉을 얻고 야간통행금지에도 구애받지 않을 수 있었으니, 일 저지르기에 얼마나 좋았을까.

 

 

Posted by 문천

 

지난 1월 28일 일기에서 ‘고쟁생(苦諍生)’이란 필명의 경향신문 논설을 소개했다. 2월 3일자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한 “3영수 협의론”이었다. 유엔의 성격과 한계에 대한 인식이 놀라울 정도로 현실적인 글이었다. 그리고 문제의식의 명석함과 논리의 정연함이 극우파의 선전 문서와는 다른 수준으로 보였다.

 

경향신문은 4월 7일에서 15일까지 7회에 걸쳐 다시 고쟁생의 논설 “총선거의 환경과 태세”를 연재했다. 제목과 달리 내용의 절반 이상이 남북협상 비판에 쏠려 있고 2월의 연재에 비해 필자의 정치적 입장이 견강부회의 느낌이 들 정도로 분명해졌다. 극우파 선전 문서에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다른 선전 문서보다 역시 수준이 높아 극우파의 남북협상 비판 논점을 살펴보는 데는 좋은 참고가 된다.

 

4월 7일자의 제1회 “총선거의 의의를 명패하자”의 요점을 담은 문단을 옮겨놓는다. 이번 총선거가 “우리 역사상 일찍 없었던 장거(壯擧)요 민족의 영예”라는 것이다.

 

“인민을 위한 정부를 인민의 손으로 인민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근세민주주의의 원칙이요 그러하기 위해서는 선거에 의하여 인민의 진정한 대표를 선정하고 이로써 국회를 구성하여야 한다는 것이 또한 민주주의 국가 형성의 필수적 조건이라는 것도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미 공민적 상식이어야 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내 5월 10일로 실시할 총선거는 40년간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의 자주권을 누리게 된다는 점이 더욱 중대하고 광영스러운 의의를 지녔다는 것을 명패(銘佩)하여야 할 것이다.”

 

4월 8일자의 제2회 “선량이란 어떤 것인가”에서는 선거의 의미에 대한 기술적 설명에 이어 “법률적 기술가나 경제적 시정배”보다 “민족정신과 문화의 전통에 통효한 대사가(大史家)”를 비롯한 학자들이 많이 뽑히기 바란다는 희망을 적었다. 아직도 ‘고쟁생’의 정체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이런 대목을 보면 경륜을 지닌 학자를 자처하며 현실정치에 나서고 싶어 하던 안호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든다.

 

4월 10일자의 제3회 “남북협상이란 이북(以北) 독백(獨白)”에서부터 연재의 원 제목을 떠나 남북협상 비판에 뛰어든다. “상서롭지 못한 사례가 비일비재한바 자못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꺼낸 얘기가 중간파 비판에 이르면 궤변의 냄새를 풍기기 시작한다.

 

“한 이념의 진리성 보편성으로 보아서 1 이상이 될 수 없고 중간항을 개입시킬 여지도 없는 것이며 구합(苟合)과 타협도 성립하지 못하는 것이다. 김규식 씨나 김구 씨는 일찍 통일 이념을 발표한 일이 있는가. 김일성 장군이나 김두봉 씨는 따로 발표한 것이 있단 말인가. 설혹 통일 이념은 남북협상에서 작성할 것으로 미루어 본다 할지라도 협상의 내용이라든가 토의할 문제를 언제 이남 동포에게 제시한 일이 있는가. 여론에 부쳐 본 일이 있는가. 그것도 정당이나 어떤 단체의 공리적 타산에서라면 구태여 물어볼 것도 없겠지마는 일이 민족의 장래 대계에 걸린 만큼 거사하는 편은 민중에게 알릴 필요가 있고 그것의 지지 여하를 결정할 민중은 그것을 주지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필자의 요량 같아서는 양김 씨와 여외의 지지 명사들도 통일 이념, 협상 내용과 방안에 대해서 하등 성안(成案), 하등의 자신도 없는 것 같이 보인다.”

 

이념의 순수성을 강변하는 데서 다시 안호상 생각이 난다. 그리고 ‘통일 이념’을 민중에게 발표한 일이 없다고 트집 잡는 것을 보면 고쟁생이 생각하는 ‘통일 이념’이란 민족주의 얘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양자택일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양자 사이의 절충과 합작은 “진리성과 보편성” 때문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전제다.

 

4월 11일자의 제4회 “막부(莫府) 결정의 고집”에서는 이념의 영역을 벗어나 현실 영역으로 내려온다. 김구와 김규식 등 협상파가 협상에 나서는 순간 이남 대표 자격을 잃어버린다는 기발한 논리가 고쟁생의 현실 인식을 가로막고 있기는 하지만. 고쟁생에게는 해방 당시 임정 주석과 부주석이라는 상징성에 아무런 현실적 의미가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초청을 받은 이남 인사는 하등의 선임방식을 치르지도 않았으며 이북 인민위원회의 독단으로 지정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으니 첫째 협상할 인민 구성방법부터가 협상적이 아니고 독단적이요, 더구나 지정받은 면면이 태반 좌익 측이요, 이여(爾餘)라 했자 중간적 회색파, 기회주의자, 180도적 전향자들뿐이니 언어도단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지명받은 면면이 현재 이남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남에 거주한다는 사실만으로 이곳 이남의 대표가 된다면 지명받은 그들이 이북으로 넘어가서 잠깐이라도 거주하더라도 이 사실만으로 그들을 이북인이라고 규정해야 합당할 것이 아닌가.”

 

4월 13일자의 제5회는 “통일의 길은 총선거뿐”이란 제목을 걸었는데 그 결론의 근거인즉 “이북 인민위원회의 초청 인사나 제시한 협상 내용 그대로의 회담이라면 이것은 남북협상이 아니라 이북 단독회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구 씨 김규식 씨가 유엔결정을 반대한 이상 벌써 이남의 대표 될 자격이 상실되었으므로 이북 대표로 쳐야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엔 결정 반대면 이남의 대표 될 자격이 없다? 안호상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파시스트 화법이다.

 

4월 14일자의 제6회 “협상 실패면 하면목(何面目)?”에서는 목전의 선거가 단독선거가 아니라 “가능한 지역에서만 실시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북이 먼저 “민주인민공화국”으로 단독정부를 세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유엔 주관의 총선거가 “현재에 부여된 유일한 독립노선”이며 이 총선거가 전 조선에서 시행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누구냐고 따진다.

 

4월 15일자의 마지막 회 “선거 반대는 방해”에서는 소피스트 논법까지 구사한다. 선거의 개인적 기권도 내란죄로 몰아붙일 수 있는 논법이다.

 

“남북협상파 그 명류(名流)가 이번 선거는 반대나 방해는 하지는 않겠다 하였으나 일언이폐지하면 개념 유희에 불과하다. 반대가 소극적이라면 방해는 적극적이라 할 것이니 반대는 소극적 방해요, 방해는 적극적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는 하나 방해는 하지 않는다는 것은 간휼한 농사(弄辭)요 무언(誣言)이다. 반대가 극하면 방해가 되는 것은 소-적이 원래 2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일호일흡(一呼一吸)이 2원 아닌 것과 일반이다.”

 

고쟁생의 논설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입장을 꾸민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회 마지막 문장에서 마각을 드러내고 만다.

 

“필승이 기대되는 이번의 선거가 만일에 실패하여 군정이 조금이라도 연장된다면 그것에 대한 책임은 반대한 협상파와 파괴하는 남로 계열 내지 이북 인민위원회의 책임이라는 것을 자타가 다 같이 명기하여야 할 것이다.”

 

누구의 필승이 기대된다는 말인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좌익에 대한 우익의 필승, 아니면 선거 반대세력에 대한 추진세력의 필승. 2월 초순의 “3영수 협의론”과 달리 이번 연재에서 고쟁생은 총선거의 필승을 제창하는 파시스트 이데올로그의 면목을 드러냈다.

 

고쟁생의 논설을 통해 협상파에 대한 극우파 공격의 양상을 알아볼 수 있다. 당시의 협상파는 지뢰밭을 걸어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극우파는 정신없이 짖어대고 있었고, 미군정은 말리지 않겠다며 팔짱을 끼고 서서 넘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좌익 중에서 남로당은 좌우합작 때부터 중간파를 적대해 왔다. 희망을 걸 곳은 평양의 지도부뿐인데, 그마저도 마음 놓고 믿을 수 없는 상대였다.

 

3월 하순 평양에서 온 메시지는 2월 중순에 보낸 메시지에 대한 단순한 화답이 아니었다. 오고간 편지 내용의 공개를 결정하는 데도 며칠의 시간이 걸려 3월 31일에야 협상파의 입장이 정리되고 김구와 김규식 두 사람의 ‘소감’이 발표되었다. ‘담화’도 ‘성명’도 아닌 ‘소감’이라는 데서 협상파의 입지가 궁색함을 새삼 느낀다.

 

“독설연(獨設宴)에 참례 격 ‘그러나 청했으니 가야지’ - 초청장 받은 양김 씨 감회”

 

남북정치회담에 대한 초청장을 받은 김구 씨와 김규식 박사는 31일 이에 대한 소감을 경교장에서 양김 씨 명의로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 제1차 회합을 평양으로 하자는 것이나 라디오방송 시에 남한에서 여하한 제의가 있었다는 것을 아니한 것을 보면 제1차 회담도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의아가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남북회담 요구를 한 이상 좌우간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2. 가는 데 있어서는 먼저 내왕수속 절차와 그 방면에 예정해 놓은 프로그램 여하와 남쪽대표의 신변보장 및 1차 회합에 성공치 못한다면 2차 3차 내지 10여 차까지도 기어이 남북통일을 쟁취할 의사 유무까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3. 북조선에서 지명한 15인 이외에도 누락된 정당이나 개인이 많이 있으니 어떤 정당 어떤 개인을 증가할 것을 접흡(接洽)할 것.

4. 이러므로 우리의 생각에는 먼저 그쪽에서 지명한 남쪽 인원끼리라든지 혹은 이에 찬동하는 정당 단체 개인만이라도 속히 집합하여 일체를 상의한 후 연락원 약간인을 택하여 일부 연락원은 38이남 내왕에 관하여 당국과 연락을 할 것.

5. 일부 연락원은 북조선에 가서 이상 일체를 접흡할 것.

아직은 이상만이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이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일)

 

평양 측의 일방적 회담 기획은 극우파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고 있었을 뿐 아니라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협상파에게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위 소감 중 제1항에서 “다 준비한 잔치”라며 불만의 뜻을 표했고 제2, 제3항에서 기획 내용의 조정 희망을 비친 것이었다. 조정을 위해서는 연락원 파견이 필요했다. 4월 5일 여운홍이 하지 사령관을 만나 협조를 요청하고 하지는 “일체 북행에 대한 편리는 원조하지 않으나 방해도 않겠다.”고 대답했다. (<조선일보> 1948년 4월 7일)

 

김구와 김규식의 대리인 격인 연락원으로 안경근과 권태양이 4월 7일 서울을 떠나 8-9일 간에 김두봉과 김일성 등 평양 측 요인들을 만나고 10일에 돌아왔다. 민전과 근민당에서는 6일에 연락원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는데,(<조선일보> 1948년 4월 8일) 한독당과 민련은 미군정에 진행을 알리면서 공개적으로 연락원을 보낸 것이다.

 

“백지로 돌아가자 - 양김 씨, 북조선에 제안 내용”

 

남북협상 운동은 지난 10일 양김 씨가 파견한 북조선 연락원의 귀환으로 일층 활발한 동향을 보이게 되었다. 즉 양김 씨가 북조선 측에 제안한

 

(1) 4-14회담을 연기할 것,

(2) 참가 인원을 광범위로 할 것,

(3) 금반 예비회담에서는 백지로 환원하여 남북통일 문제에 한해서만 협의할 것

 

등 조건을 전적으로 수락하게 되어 쾌속도로 협상 공작은 진척중인바 정계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16,7일경에 양김 씨 측 인물이 북행하여 20일경에 예비회담이 평양에서 개최되리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3일)

 

그런데 4월 13일 김규식이 북행을 보류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연락원이 전한 평양 측 반응에 불만을 갖고 회담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남북회담에 암운(暗雲) 저미(低迷) - 김 박사 행동보류, 김구 씨 등만 북행 결정”

 

연일 경교장에서는 양김 씨를 비롯하여 홍명희 유림 이극로 엄항섭 등 제 씨가 회합하여 지난 10일 귀경한 안·권 양 연락원의 보고를 기초로 하여 남북협상에 대한 북조선의 진의를 파악하고저 부심하고 있는데 지난 13일에는 오후 4시경부터 동 장소에서 양김 씨를 중심으로 북행 여부를 토의한 결과 김구 씨는 북행을 결정하였으나 김규식 박사는 행동을 보류하고 추후로 떠나겠다고 언명하여 항간에는 구구한 풍설이 유포되고 있는데 가장 신빙할만한 정계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북협상의 전망과 김규식의 북행 보류에 대하여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를 열거하고 있다.

 

(1) 이번 남북협상을 통하여 북조선에서는 UN반대의 구체안을 짤 것을 제의하고 이를 주장할 것이나 김 박사의 본의는 민족적 입장에서 남북이 통일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하자는 데 있다. 즉 전자는 좌익 본위 투쟁 위주의 자아 확집이요 후자는 민족적 입장에서 출발한 모든 외교절충까지 포함한 것이다.

 

(2) 10일 현재까지 동 회담에 참석차 북행한 남조선 좌익대표는 남조선민전 산하단체 대표만 65명이나 민련 산하단체에서는 불과 10명을 초과하지 못하고 한독당 대표 5명을 합하여 비율적으로 볼 때 회의 전도에 커다란 암영이 없지 않다는 것.

 

(3) 회의가 진행되면 반드시 남북주둔 미소 양군의 철퇴까지 상정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인데 양군 철퇴를 결의한다고 가정하면 진공상태의 치안책임은 누가 질 것이며 남북 현재의 군사단체 반 군사단체의 해체문제는 어떻게 귀결짓겠는가?

 

상기 3 중요 문제에 대한 확고한 결정을 짓지 못한 까닭에 김 박사는 북행을 보류한 것이라는데 오는 20일경 평양에서 열릴 남북요인회담의 전도는 벌써부터 비관시되고 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3일)

 

바로 이튿날 김규식도 역시 평양에 갈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분위기가 개운치 않다. 민전에서는 남로당, 전평, 전농 등 산하단체 대표 70명이 4월 9일까지 평양을 향해 출발했다고 12일에 발표했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14일) 머릿수만 갖고 결의를 도출하려는 회의라면 민련의 중간파는 들러리 서는 꼴밖에 안 된다. 게다가 가장 가까운 동맹 상대인 김구마저 남북협상의 목적에 대해 김규식과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민련 권고로 김 박사 북행?”

 

평양에서 개최될 남북요인회담에 김구 씨는 자신이 직접 참석하기로 결정하고 김규식 박사는 참가를 보류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 있었는데 김규식 박사도 14일의 민련 정치-상무 연석회의의 결의와 측근자의 권고로 자신이 직접 참석키로 결정하였다 한다. 그런데 지난 13일 하오 1시부터 경교장에서 개최된 회합에서 김규식 박사는 금번의 평양회담은 예비회담으로 하고 본회의는 서울서 개최할 것과 유엔조위의 북조선입경을 허용하여 남북총선거로 통일정부를 수립토록 북조선 측과 교섭할 것 등 4개 조건을 제시하였던 바 김구 씨는 이에 반대하고 유엔조위와의 관계는 일체 포기할 것을 주장하여 양김 씨 간에 약간의 의견대립이 있었다 하며 김 박사는 동 회합에서 불참할 것을 표명한 바 있었다 한다. 그런데 김 박사는 참석 여부에 대하여 언급을 회피하고 있어 앞으로 취할 동 박사의 태도가 또한 주목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6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