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은 3월 3일 ‘국회선거위원회’를 군정장관 행정명령으로 설치했다. 5월 총선거의 관리 주체를 만든 것이다.

 

행정명령 제14호 국회선거위원회

 

제1조 국회선거위원회를 자에 설치하며 좌와 여히 동 위원회 위원을 임명함

위원 성명: 장면 김동성 최규동 이갑성 백인제 박승호 이승복 전규홍 김지환 노진설 윤기섭 현상윤 김법린 오상현 최두선

1947년 9월3일부 법률 제5호 (입법의원의원선거법) 규정에 의하여 이미 행한 중앙선거위원회 위원의 임명은 국회선거 위원회 위원의 임명으로써 인준함.

 

제2조 국회선거위원회 및 동 위원은 1947년 9월3일부 법률 제5호(입법의원선거법)에 의하여 중앙선거위원회 및 동 위원에 부여된 일체의 권한과 임무를 자에 부여함. 국회선거위원회는 재조선미국육군사령관이 1948년 3월1일에 발표한 바 조선인민대표의 선거에 관한 포고에 의하여 1948년 5월9일에 거행될 선거에 있어서 전기 법률규정에 의한 권한과 의무를 수행함.

 

제3조 자에 설치하는 국회선거위원회는 군정장관의 인준 및 군정장관이 규정하는 규칙을 조건으로 하여 그 직능의 수행에 필요한 보급과 자금을 남조선 과도정부의 당해기관에서 획득하며 보조인원을 고용할 권한이 유함.

제4조 본령은 공포와 동시에 유효함.

 

1948년3월3일 조선군정장관 미국육군소장 윌리암 에프 딘 (<군정청관보 행정명령 제14호 1948년 3월 3일)

 

딘 군정장관은 3월 4일 국회선거위원 임명식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작년 12월 비공식으로 제위에게 요청하여 선거규칙을 제정하였는데 금반 UN소총회 결의에 의하여 총선거를 실시하게 됨에 있어서 UN조선위원단에서 다소 수정제의는 있을지라도 금반 총선거에 동 규칙을 사용케 됨은 본관으로서는 충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며 동시에 UN위원단의 승인을 얻어 귀하들을 선거위원으로 금일 정식 임명하는 바이다. 이 선거는 세인 주시리에 실시되는 만큼 우리의 총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 중요성에 감하여 제위는 애국적 견지에서 노력할 것을 믿는 바이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6일)

 

군정청이 반년 전 조직했던 ‘중앙선거위원회’(중선위) 구성을 그대로 두고 “UN위원단의 승인을 얻어” 선거 관리 역할을 계속해서 맡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승인”이란 말의 뜻이 애매하다. 위원 한 명 한 명의 임명을 승인받은 것일 수는 없다. 군정장관 행정명령에 의한 국회선거위원회(국선위) 설치에 대한 ‘양해’를 얻었다는 뜻일 것 같다.

 

15인 위원 중 중선위 위원장을 맡고 있던 윤기섭은 사퇴했다. 윤기섭은 최근 부의장을 맡고 있던 입법의원에서도 사퇴했다. 그는 사퇴 이유를 “해외에서 돌아와 그간 국내사정을 연구하였으나 아직도 정통치 못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으며 아울러 입법의원의 과거 1년간 업적과 금일의 현상을 생각할 때 선거최고기관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사의를 표명하였다.”고 밝혔는데,(동아일보 1948년 3월 6일) 단독선거 추진세력의 횡포에 대한 불만을 뜻하는 것이다. 그가 입법의원에서 사퇴한 것도 단독선거 추진세력의 총선거 촉구 결의안(1948년 2월 19일) 강행에 대한 항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기섭이 사퇴한 사실이 아니라 나머지 14인 위원이 사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입법의원에서 김규식과 윤기섭의 사퇴에는 30여 의원이 동조했다. 그런데 15인 중앙선거위원 중에는 입법의원 부의장으로서 당연직처럼 들어간 윤기섭 외에 5월 총선거를 반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중선위는 미군정에 순종하거나 이승만-한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색깔’은 ‘특별선거구’에 대한 국선위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특별선거구 설정 문제, 국회선위에서도 당국에 건의”

 

재남 이북동포 4백60만을 대표할 수 있는 특별선거구 설정문제는 점차로 고조에 달하고 있으므로 16일 오후 5시부터 6시까지 이승만은 메논 의장을 방문하고 요담하였으며 20일에는 이북인민대회를 개최하기로 되었는데, 국회선거위원회에서도 16일 특별선거구 설치를 요청하여 하지사령관에게 건의문을 제출하였다 하는데 그 귀추가 매우 주목된다. (<경향신문> 1948년 3월 18일)

 

반공세력에서는 월남민의 수를 460만 명으로 과장하면서 이들에게도 인구비례로 의석을 할당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실제 월남민의 수는 100만 명 이하로 추정된다. 월남민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민주당 등 일각에서는 특별선거구가 획정되지 않을 경우 선거를 보이콧하겠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특별선거구 외에는 단독선거 추진세력을 대체로 만족시킬 만한 ‘국회의원선거법’이 3월 18일 군정장관 명의로 공포되었다. 법안 전문을 게재한 3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의 도입부를 옮겨놓는다.

 

“국회의원선거법”

 

민주건국의 초석인 국회의원선거법이 지난 18일 군정장관 딘 소장의 서명으로 공포되었다. 동 법안의 유엔조위 제3분과위원회에서 수 주일에 걸쳐서 초안하여 토의한 후 지난 3월 10일 유엔조위 전체회의에 상정 토의하여 동 12일 미군정 당국에 회부되었던바 미군정 당국에서는 이에 대한 전문가들과 다시 동 법안이 조선 실정에 적합한가를 검토하여 입법의원에서 통과된 선거법을 수정하여 공포하게 된 것인데 입의에서 문제가 되었던 선거연령 23세를 21세로 정하였고 일정 하에 고등계에서 사상 관계를 취급한 경찰관을 위시하여 고등관 3등급 이상의 관리, 판임관 이상의 경찰, 헌병, 헌병보, 중추원 참의, 도회 의원 등은 피선거권을 박탈하였으며 8장 57조로 구성된 동 선거법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투표 준비는 어마어마한 작업이었다. 인적 조직만 하더라도 각급 선거위원회에 몇 만 명이 동원되어야 했다. 1947년 11월 중선위에서 작성했던 선거법 시행세칙에는 9도 1특별시, 15개 시-부, 134개 군-도(島), 428개 읍-면의 6천447개 투표구와 투표분구 선거위원회를 구성하는 데 총 4만5천471명의 위원이 필요하다고 했다.(<조선일보> 1947년 11월 27일)

 

실제로는 특별시-도 단위 선거위원들이 3월 25일까지 위촉되었다. 각도 선거위원회는 11명 위원과 11명 후보위원으로 구성되었다.(<경향신문> 1948년 3월 25, 26일) 지방 선거위원의 위촉에 대한 지침은 이에 앞서 3월 19일 국선위 지령 제1호로 각 지방에 발송되었다.

 

“각급 선위에 동일 정당인 3분지1 초과 못한다”

 

국회의원선거법 제4장의 규정에 의하여 각 투표구마다 선거위원회를 설치하게 되었는데 국회선거위원회는 이 선거위원의 선정에 대하여 각급 선거위원장 각도 지방심리원장, 각도 지사에게 다음과 같은 지령 제1호를 19일 발송하였다.

 

<선거위원회위원의 추천 또는 보고에 관한 건>

 

국회의원선거법 제4장의 규정에 의하여 각급선거위원을 선임할 때에는 좌의 사항을 준수하기를 지명(指命)함.

 

가. 어느 선거위원회든지 동일정당 소속자는 3분지1을 초과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1. 정당으로 명확히 이름이 있는 것은 물론이요 기타 단체도 차에 준하여 취급할 것.

2. 공무원은 선거운동을 못하게 되었으나 선거위원회 위원이 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므로 도 군 읍 면 등의 관공리도 선거위원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동일정당 소속자는 3분지1을 초과하지 못한다는 입법정신에 비추어 관공리의 위원 수가 3분지1을 넘지 못하게 할 것.

 

나. 각급 선거위원회의 위원장 위원 후보위원장 및 후보위원을 추천하거나 임명 보고를 할 때에는 위원의 상세한 이력서를 각기 상급위원회 전부에 1부씩 존치할 수 있는 부수를 첨부할 것. (<경향신문> 1948년 3월 21일)

 

국선위의 총선거 일정표가 3월 28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되었다.

 

“선거 일정표, 30일부터 본격적 집무”

 

내 5월 9일 실시될 총선거를 앞두고 국회선거위원회에서는 면밀한 사무일정표를 작성하여 집무하고 있는데 동 일정표에 의하여 선거등록 개시일인 3월 30일부터 선거일인 5월 9일까지의 순서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3월 30일: 선거인등록 개시 / 선거인명부 작성 개시 / 의원후보자등록 개시

* 4월 8일: 선거인등록 마감

* 4월 13일: 선거인명부 작성 완료

* 4월 14일: 선거인명부 종람(縱覽) 개시

* 4월 15일: 의원후보자등록 마감

* 4월 17일: 투표용지에 인쇄할 의원후보자 순위 및 기호 결정 / 투표용지 모형 공시

* 4월 20일: 선거인명부 종람 마감

* 5월 4일까지: 개표의 장소 공고

* 5월 6일까지: 투표 시에 참관할 의원후보자 대리인 신청 접수

* 5월 7일까지: 의원후보자의 사진 제출 마감 / 개표일의 입회인 신청 마감

* 5월 7일: 선거인명부 확정

* 5월 8일: 의원후보자용 게시판 설치

* 5월 9일: 투표

 

도 단위 선거위원회가 3월 25일에야 구성이 완료되었는데 3월 30일 선거인등록을 시작한다니, 등록소 준비는 누가 하고 있었단 말인가? 확인하지 못했지만, 선거준비를 일반 행정기관에서 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겠다. 위에서 본 국선위 지령 제1호 ‘가’조 제2항으로 보아 많은 공무원이 선거위원회에 들어가 선거관리 작업을 계속한 것으로 보인다.

 

선거인등록이 시작되자 단독선거 추진세력은 등록률을 높이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원칙적으로 등록 강요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실제 규제는 어려웠다. 민주독립당은 4월 6일 “하지 중장 및 군정청당국에서 선거반대의 자유가 있다고 누차 언명하였음에도 가진 수단으로 등록을 강요함은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민의를 강압 왜곡함으로써 강행되고 있다고 것을 실증하는 것”이라는 항의 성명을 발표했지만(<조선일보> 1948년 4월 7일) 선거 반대자들에게는 등록을 만류할 권한이 없었다. 민주독립당 대표 홍명희의 4월 10일 기자회견에서 이런 문답이 있었다.

 

(문) 일부에서 현 정세 하에서 남북협상을 추진시키는 것은 남조선선거를 반대하여 방해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본다는데 귀 견해 여하?

(답) 남북협상을 추진시키는 인물이 남조선선거를 반대하는 사람은 틀림없으나 선거를 방해하려는 의도는 전연 없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11일)

 

중간파는 선거 시행에 반대하더라도 선거 진행을 방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 합법투쟁의 한계였다. 남로당의 지하투쟁은 별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지난 2월의 ‘구국투쟁’ 때 역량의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4월 14일 국선위는 유권자의 91.7퍼센트인 805만5798명이 등록했다고 밝혔다. (<조선일보> 1948년 4월 15일. 합계가 맞지 않지만 그대로 옮겨놓았다.) 항쟁 사태가 발발한 제주도의 64.9퍼센트와 경남의 75.3퍼센트 외에 모든 지역이 85퍼센트를 넘었다.

 

서울 769,568(92.3)

경기 1,131,329(95.9)

충북 460,021(96.6)

충남 791,663(90.3)

전북 791,499(86.4)

전남 1,229,200(88.9)

경북 1,210,264(90.6)

경남 1,314,440(75.3)

강원 474,723(96.5)

제주 82,812(64.9)

계 8,055,798(91.7)

 

자유로운 선거 실시의 궁극적 책임은 군정청 아닌 유엔조선위원단에 있었다. 등록기간 중 유엔위원단은 3개 감시단을 구성했는데 그 일정은 이런 것이었다.

 

4월 3일 조위(朝委)에서는 오전 11시부터 전체회의를 열고 선거일자 문제와 현지 선거감시단에 관한 문제를 토의한 결과 각각 다음과 같은 결정을 보았다. 선거일자에 관하여서는 미군당국의 요청에 의하여 1일 연기하여 5월 10일로 확정되었으며 현지감시단의 인원구성과 감시일자는 다음과 같다.

 

제1감시단은 경기도 강원도 및 제주도를 감시하는 동시에 주요위원회의 업무를 겸행하게 되었으며 구성원은 호주대표 잭슨 중국대표 유어만 필리핀대표 루나 프랑스대표 마네 인도대표 바레 및 사무국원 6인이며 감시일정은 다음과 같다.

4월 5일-서울시 / 4월 6일-개성 / 4월 7일-인천 / 4월 8일-춘천 / 4월 9일-제주도

제주도는 숙소관계로 남자 9인이 파견되리라 한다.

 

제2감시단은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를 감시할 것이며 구성원은 시리아대표 무길 캐나다대표 패터슨 및 사무국원 4인이며 감시일정은 다음과 같다.

4월 5일-청주 / 4월 6일-대전 / 4월 7일-전주 / 4월 8일-광주

 

제3감시단은 경상남북도를 감시할 것이며 구성원 엘사바도르부대표 린도 프랑스대표 폴봉쿠르 중국부대표 왕공행 및 사무국장 5인이며 감시일정은 다음과 같다.

4월 5일-6일-대전 / 4월 7일-8일-부산 (...) (<조선일보> 1948년 04월 3일)

 

3개 감시단은 예정대로 움직였다. 유엔위원단이 발표한 공보 제55호를 보면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걱정할 만한 아무것도 감시단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저렇게 번개같이 움직이는 감시단의 눈에 띄려면 무슨 짓을 해야 했을까? 등록 단계에서 유엔위원단의 감시는 실질적으로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공보 55호

 

감시단 제1·제2·제3반은 4월 5일부터 각각 업무를 개시하여 4월 10일에 제1주의 감시를 끝마치었다. 각 반은 등록행동을 감시하였고 자유분위기에 관한 상황을 조사하였다.

 

호주·중국·엘사바도르·프랑스·인도 및 필리핀 대표로써 구성된 제1반은 서울·개성·인천·춘천 및 제주도를 방문하였으며 제주도에서는 3개 투표구 중에서 2개소를 방문하여 선거위원회의 대표들과 면회하였다. 또한 동반은 4월 3일에 시작된 소요사건에 관하여 제주도지사 동 경찰최고책임자 및 미군당국과 회담하였다.

 

캐나다·시리아 대표로 구성된 제2반은 청주·대전·이리·전주·광주 등을 방문하였다.

 

중국·엘살바도르 및 프랑스 대표로 구성된 제3반은 대구와 부산을 방문하였다.

 

제2반과 제3반은 촌락에 있어서의 유권자등록상황을 확인하는 동시에 조-미 당국과의 회담을 통하여 도청, 소재지의 상황을 감시할 목적으로 지방에 여행할 수가 있었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5일)

 

 

Posted by 문천

 

4월 3일 새벽에 일어난 제주도 사태는 나흘 후에야 신문 지면에 나타났다. 4월 5일 시공관에서 열린 총선거촉진 대강연회에서 조병옥 경무부장의 연설 중 좌익분자들의 파괴행동이 있었고 11개 경찰관서가 습격당했으며 경찰관 사망 4명 등 피해가 있었다는 내용이 4월 7일자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신문에 6일의 경무부 발표가 보도되었다.

 

“제주도에 또 좌익폭동 - 사망 13, 부상 39, 물적 손해도 막대 - 경무부 발표”

 

최근 제주도에서 일어난 좌익계열의 폭동에 대하여 6일 경무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지난 4월 3일 이래 제주도에서는 1947년 3-1사건 이상의 불상사가 발생되어서 치안이 극도로 괴란되었다. 공산계열의 파괴적 반민족적 분자들의 지도 아래 총기 수류탄 그 외 흉기를 가진 무뢰배들이 성군작당하여 경찰관서 기타 관공서의 습격 경찰 관리와 그 가족의 살해 선량한 동포 살해 방화 폭행과 약탈 등의 천인공노할 만행들을 마음대로 하여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구에 빠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총선거등록 실시 사무를 정돈상태에 빠트리고 있는데 인적 물적 손해는 다음과 같다.

 

경찰관서습격 11개소 / 테러 11건 / 경찰관피습 2건 / 경찰관 사망 4명 부상 7명 행방불명 3명 / 경찰관가족사망 1명 / 관공리 사망 1명 부상 2명 / 양민 사망 8명 부상 30명 / 전화선절단 4개소 / 방화 경찰관서 3개소 양민가옥 6개소 / 도로 교량 파괴 9개소

 

“응원대를 급파 - ‘양민은 발본퇴치에 협력하라’ 조 경무부장 담”

 

이상과 같은 사태에 비추어 경무부에서는 제주도 동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김정호 공안국장을 현지에 특파하는 동시에 전남에서 응원경찰대를 급파하여 진압 중에 있다. 제주도의 동포 여러분은 안심하시는 동시에 경찰과 적극 협력하여 그 망국도배들을 발본색원적으로 퇴치하여 제주 치안의 완벽을 기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리고 남조선의 그 외의 지역에 계신 동포들도 국제적 정세의 긴박함과 우리 민족의 역사적 위기에 당면한 사실을 똑바로 보아 자유스럽고 평화로운 사회적 환경에서 역사적 대사업인 총선거가 성공리에 끝마치도록 국립경찰에게 애국적 협력을 아끼지 말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7일)

 

4-3봉기에 대한 ‘좌익폭동’ 규정은 발발 직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실제로 봉기가 어떤 모습으로 이뤄졌는지, 제민일보 4-3취재반의 보고 중 남원지서 습격 장면을 살펴보겠다. 봉기의 1차 표적은 경찰지서로, 도내 24개 지서 중 11개소가 3일 새벽 일제히 공격을 받았다.

 

그 무렵 남원지서에는 지서주임 정성순(성산 출신) 경사를 비롯해 고일수(성읍)-양성만(보목) 순경과 이북 출신인 정성용-조덕현 순경 등 5명의 경찰관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틀 전인 4월 1일부터 대동청년단 단원들이 ‘지서 협조원’이란 이름 아래 매일 밤 5명씩 번갈아가며 지서 경비를 거들고 있었다. (...)

 

이날 남원지서의 피습으로 경찰관 고일수 순경과 민간인 방성화가 숨지고, 민간인 2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무장대는 앙심을 품었던 고일수 순경의 사체를 지서 밖으로 끌어내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화장시켰다. 무장대는 지서 무기고에서 미제 카빈총과 일제 99식 총, 그리고 탄알 등을 탈취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4-3은 말한다 2>(전예원 펴냄) 25-26쪽)

 

방성화가 무장대의 돌입 때 총에 맞은 것은 우연한 일이었던 반면 고일수의 참혹한 살해는 계획된 일이었다. 그는 앞서 무릉지서에 근무할 때 지난 회에서 이야기한 양은하 청년의 고문치사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무릉리에서 지낼 수 없게 되어 남원지서로 옮겨왔지만 남원리 봉기의 제1호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다른 경관과 청년단원들의 피해 경위를 보면 고일수 같은 특별한 표적 외에는 꼭 죽일 뜻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근무자 중 절반 가까이가 외지 출신인 것은 도내 어느 지서에서나 마찬가지였고, 제주와 서귀포의 경찰서에는 외지 출신이 더 많았다. 해방 당시 101명이던(일본인 50명, 조선인 51명) 제주도 경찰관 수는 지난해 3-1절사건 때까지 330명으로 늘어나 있었는데 아직 현지인 비율이 높았다. 3월의 총파업 때 65명이 파면당했고, 그밖에 그만둔 사람까지 제주 출신 경찰관 100명 가까이가 경찰을 떠난 것으로 4-3취재반은 추정했다. 그 후 제주도 경찰은 5백 명 선으로 증원되었고, 그 대부분은 육지 경찰에서 충원되었다.

 

경무부의 특별조치로 운수관구를 비롯한 각 관구에서 항구적으로 취임할 경관 245명이 본도에 배치되어 수일 내로 내도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본도 현직 경관 260명을 합하여 정원 500명으로 증원된 것이며, 따라서 잔류한 응원대는 귀환하게 될 것이다. (<제주신보> 1947년 4월 28일, <4-3은 말한다 1> 410쪽)

 

이때 철도경찰에서 옮겨온 한 사람의 증언을 4-3취재반이 전해준다.

 

제주도에 파견 나간 응원경찰과 교체할 지원경찰을 모집한다기에 철도경찰들이 대거 지원했습니다. 1947년 4월 말 지원자들이 부산에 집결했는데 아마도 220명에 이르렀다고 기억합니다. 부산-제주 여객선 편으로 도착해 보니 주민들의 경찰에 대한 반감이 드세다는 것을 금방 느꼈습니다. 첫날 식사대접도 받지 못했을 정도였으니까요.

 

5월 6일부로 동료 철도경찰관 출신 9명과 함께 성산지서에 배속됐는데, 결국 지서에서는 철경 출신이 제주 출신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우세하게 됐지요. 그런데 주민들이 셋방도 빌려주지 않고 식사제공도 꺼려 한동안 애를 먹었습니다. 동료 가운데는 현지 사정에 적응치 못하고 휴가 간다면서 귀향해 버린 경찰관들도 있었습니다. (<4-3은 말한다 1> 411쪽)

 

철도경찰, 즉 운수경찰에 관한 이야기는 1948년 1월 2일자 일기에서 한 일이 있다. 운수경찰은 경무부 아닌 운수부에 속해 있다가 1947년 3월 경무부로 이관되면서 조병옥의 경무부에 적응하는 데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특별수당을 붙여주면서 육지 경찰관 중 제주 전근자를 모집할 때 철도경찰 출신이 압도적 다수였다고 한다.

 

남원지서 외의 여러 지서 습격 상황을 훑어볼 때, 외지인 경찰관이라 해서 특별히 증오의 대상으로 여겨지지는 않은 것 같다. 전 해 3월의 ‘응원경찰’에 비해 철도경찰 출신의 외지인 경찰관들은 제주도를 자기 근무지로 받아들이고 적응 노력을 기울인 결과일 것 같다.

 

경찰 ‘협조원’으로 활동하던 대동청년단(대청)에 대해서도 강한 적대감이 보이지 않는다. 대청단원 몇 명이 살해당했지만 대청 전체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개인적 문제로 보인다. 3-1절사건 이전에 대부분 제주 청년들이 좌익이 아니라도 민청과 민애청에 참여했던 것처럼 사건 이후에는 이념과 관계없이 모두 대청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경찰에 협조하는 것이 부득이한 일이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외가 서북청년단(서청)이었다. 서청이 테러단체로서 특출한 성가를 누린 것은 그 ‘외인부대’ 성격에 큰 이유가 있었다.

 

서청은 월남 청년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반공 성향을 가진데다가 룸펜 상태여서 동원이 쉬웠고, 대다수가 합숙생활을 했기 때문에 기동력도 좋았다. 월남 청년들의 조직적 동원은 이북의 토지개혁으로 월남민이 늘어난 1946년 3월경부터 시작된 일이었는데, 1946년 11월말 서청 결성으로 그 조직력이 극대화하기 시작했다.

 

결성 직후부터 서청의 지방 진출이 활발했던 것은 그 외인부대 성격 덕분이었다. 고향 아닌 곳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체면에 구애됨 없이 무슨 짓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은 서울의 활동에서도 큰 강점이었는데, 이 강점이 지방에서는 더 두드러졌다. 현지 폭력배와는 차원이 다른 만행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고, 또 다른 단체가 따라올 수 없는 결속력을 보인 것이 서청이었다. 이 강점이 제주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서청의 세력 확대에 따라 자금원도 확대되었다. 이북 출신 재산가와 극우 정치세력의 지원으로 출발해서 군정청의 이권이 늘어났다. 정일형 인사행정처장, 오정수 상공부장, 이용설 보건후생부장, 이대위 노동부장 등 군정청의 이북 출신 간부들은 동향인에 대한 동정심에서라도 월남민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기화로 서청은 배급표의 부정 취득에서 적산 불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권을 확보했다.

 

배급표 과다할당이란 소박한 단계에서 적산물자 불하라는 좀 더 과감한 대규모의 협잡을 통해 자금을 확보한 것이다. 서청 간부들은 이러한 협잡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미 군정청을 ‘건너마을 과방(果房)’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협잡에 김성주(사업부장, 섭외부장)가 큰 역할을 했다. 김성주는 “미군 장교와도 개별적인 선을 대어 소위 보급작전에서 많은 수확을 얻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물적 지원에도 비참한 서청원들의 생활은 “종내 갖가지 부작용, 즉 공갈행각을 수반했다.”(임대식 “제주 4-3항쟁과 우익 청년단” <제주 4-3 연구> 215쪽)

 

대다수 서청 단원들은 서청의 조직화 후에도 룸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조직 활동만으로 생계를 안정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조직에 대한 봉사를 통해 조직원의 자격을 지킴으로써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생계를 위한 각종 불법행위를 각자 모색했다. 서청의 지방 확산은 생계를 위한 불법행위의 공간을 넓히려는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이런 서청 단원들에게 제주도가 ‘기회의 땅’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왜 제주도가 다른 지역과 달리 큰 기회를 그들에게 주었는가? ‘원주민’의 권리를 무시해도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 사령관 이하 미군정의 당로자 대부분과 육지의 극우세력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여기고 있었다. 미국 개척기에 아메리카 원주민이 권리가 없는 존재였던 것처럼 제주도 주민들은 공권력의 보호를 거의 받지 못하는 입장에 있었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든 정착을 위해서든 1947년 이후의 제주도는 서청 단원들이 가장 쉽게 활동하는 지역이 되었다.

 

물론 제주도민의 불리한 입장과 서청의 발호는 4-3 발발 이후 크게 악화된 문제였다. 그러나 1947년 11월에 서청 제주지부가 설립된 사실과 4-3 봉기에서 서청 숙소가 지서 다음으로 뚜렷한 표적이 된 사실로 보아 문제가 이미 상당히 자라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3 취재반은 4-3 봉기 이전 서청의 활동 양상을 이렇게 서술했다.

 

서청 제주도지부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47년 11월 2일의 일이었다. (...) 그러나 그 이전에 적지 않은 서청단원들이 제주에 들어와 민심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이북에서 급히 도망쳐 나와 빈털터리가 된 경우가 많았다. 생활에 쫓기다 보니 처음에는 서청단원 가운데 태극기나 이승만 사진들을 들고 다니며 반강압적으로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4-3봉기가 일어난 후 성산포 등지에서 이때 물건구매에 냉담했던 주민들이 빨갱이로 몰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사례가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1947년 초기의 상황이었다. 서청의 위세가 드세어지고 법에도 없는 경찰보조기능이 부여되던 1947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공산당을 때려잡는다는 명분 아래 그들의 백색테러가 제주에서 노골화되었다. 이때는 전국에 ‘서청! 하면 울던 아기도 울음을 그친다’는 유행어가 나돌 때였다. (<4-3은 말한다 1> 434-435쪽)

 

1947년 4월초 유해진 지사 부임 때 서청 단원들을 호위병으로 데려온 것이 서청 제주도 진출의 출발점이라고 하는데, 당시의 서청단장 문봉제는 이 시점에서 단원을 제주도에 보내달라는 조병옥의 요청이 있었다는 증언을 남겼다고 한다.

 

“(...) 우리는 어떤 지방에서 좌익이 날뛰니 와 달라고 하면 서북청년단을 파견했어요. 그 과정에서 지방의 정치적 라이벌끼리 저 사람이 공산당원이라 하면 우리는 전혀 모르니까 그 사람을 처단케 되었지요. 우린들 어떤 객관적인 근거가 있었겠어요? 그 한 예가 제주도인데, 조병옥 박사가 경무부장으로 있으면서 4-3사건이 나자마자 저를 불러 제주도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는데 반공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경찰전투대를 편성한다고 500명을 보내 달라기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4-3은 말한다 1> 437쪽에서 재인용)

 

근 20년 전 제주도에서 살 때 한 서청 출신 노인을 만난 일이 있다. 아라동의 친구 과수원에 놀러간 길에 옆 과수원 노인과 점심식사를 함께 하다가 서청 단원으로 제주에 왔다는 말을 들었다. 과수원에서 숙식을 하는 분인데, 여러 해 동안 혼자 살아온 것 같았다.

 

스무 살 나이로 제주에 올 때 그가 어떤 모습이었을까? 큰 욕심 없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온 사람이었을 것 같은데, 그래도 서청 단원으로서는 못할 짓을 꽤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제주도 여자랑 결혼을 했다는데, 어쩌다 혼자 살게 되었는지도 듣지 못했다. 서청은 제주 사태에서 가해자로 지목되는 존재이지만, 그 단원 중에도 피해자는 많았다.

 

그 무렵에는 4-3취재반의 양조훈, 김종민, 김애자 기자들과 자주 만나 4-3항쟁의 의미를 배우고 있었다. 어려운 조건 아래 힘든 일을 해낸 취재반 여러분에게 새삼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Posted by 문천

 

"동백꽃 지는 계절"

 

지금은 제주에서 동백꽃 지는 철이다. 50년 전의 4월 초에도 그랬다.

 

강요배 화백의 4·3 역사화전이 '동백꽃 지다'라는 제목으로 열린다. 전시회의 타이틀 작 '동백은 지다'는 꽃잎이 흐트러지지도 않은 채 통째로 '툭' 떨어져버리는 동백꽃의 낙화 속에 50년 전 제주민의 수난을 그린 것이다. 민중의 수난으로 4·3의 본질을 보는 그의 시각은 6년 만의 전시회에 보태는 신작 몇 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난다. 한 지역의 특정한 사건으로보다 역사 전반의 비극성으로 눈길이 옮겨진 것이다.

 

역시 제주 출신의 작가 현길언 씨는 4·3을 '미친 시대의 광기(狂氣)'라 부른다. 광기는 합리적 이해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학술적 접근과 정치적 해법은 4·3의 참모습을 이해하는 데도, 그 상처를 아물리는 데도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오히려 문학과 예술의 직관적 접근과 정서적 카타르시스에서 그는 더 긴요한 몫을 기대한다.

 

그러나 학술에도, 정치에도 그 나름의 몫은 있다. 수십 년간 4·3의 비극성을 떠올리지도 못하도록 봉쇄해 온 '공산 폭동'론은 독재정권 시절의 유물이 되었지만 아직도 사법적으로는 그 그림자를 치우지 않고 있다. 국회의 진상조사위 구성도 의원 과반수의 발의서명을 받아놓은 채 해를 넘기며 서랍 속에서 잠만 자고 있었고, 학술적 규명도 아직 본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50년 전의 4월 3일 새벽 500명가량의 무장대가 5·10 선거 반대와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의 추방을 내걸고 제주 각지의 경찰지서를 습격한 것은 공산 폭동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간 2만여 인명을 앗아간 내전 내지 학살 사태 전체를 그렇게 규정할 수는 없다. 어떻게 지역 주민의 10분의 1이 폭도로 소탕될 수 있었단 말인가.

 

1년간의 유혈 사태도 비극이었지만, 그 슬픔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지낸 40여 년의 세월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피해자의 유족들은 슬픔과 억울함을 펼쳐내기는커녕 연좌제의 피해까지 겹쳐서 겪어야 했던 세월이었다. 아마 이것이 더 먼저 풀어야 할 비극일지도 모른다.

 

발발 50주년 기념행사 중 '해원상생 굿'이 특히 눈길을 끈다. 4·3은 폭동이고 항쟁이고를 떠나 하나의 참혹한 비극이었다. 시비곡직보다 비극성을 더 질실히 음미할 사건은 4·3 외에도 우리 현대사에 숱하게 많다. 살아남은 자들의 마음을 순화시키는 굿판을 바란다.

 

15년 전 제주도를 떠날 때 쓴 글이다. 1993년부터 5년간 제주도에서 살면서 4-3사건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지냈어도 그 배경에 대해 아직까지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거의 전 주민이 미군정 통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사태가 다른 곳 아닌 제주도에서 벌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외딴 곳이라는 사실이 큰 이유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충분한 이유일 수는 없다.

 

1947년 3월 1일 31절 행사 군중에 대한 경찰의 무분별한 총격으로 10여 명의 사상자를 낸 ‘3-1절 발포사건’ 이후 4-3 발발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상황의 악화는 어느 정도 분명하게 설명이 된다. 그런데 3-1 시위 이전의 제주도 상황은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을 많이 보이는데, 명쾌한 설명이 힘든 점이 많다. 제주도 군정청 공보관 케리 대위의 1947년 신년사를 보면 1946년 말까지 제주도가 평온한 상황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0월 소요사태의 파장이 제주도에는 미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을 회고컨대) 육지에서는 난동자에 의하여 각 지방에 소요사건이 발발해서 여러분의 동포 가운데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 내에 한하여서는 여러분이 시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함으로써 여사한 불행한 소요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946년을 보내고 1947년을 맞이함에 여러분이 갈망하고 있는 통일적 자주독립을 획득치 못한 것은 유감되는 바이며 또 미군정청에서도 그의 목적인, 즉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오늘까지 실현시키지 못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로 사료되는 바, 금년에는 최대의 노력을 다하여 여러분의 목적과 그리고 군정청의 가장 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로 협심-협력하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입니다.(<제주신보> 1947년 1월 1일, <4-3은 말한다 1>(제민일보 4-3취재반 지음, 전예원 펴냄) 223쪽에서 재인용)

 

1946년 말에 나타난 또 하나 특이한 일은 10월 말의 입법의원 선거를 전국적으로 극우파가 휩쓰는 가운데 제주도에서만 두 명의 좌익 당선자를 낸 것이다. 인민위원회 소속을 내건 문도배와 김경탁은 12월 12일 개원식을 앞두고 서울에 왔지만 막상 입법의원 등록을 하지 않고 개원식에도 불참했다. 두 사람은 12월 14일 민전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입법의회를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경향신문> 1947년 12월 15일)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한 재선거가 1947년 1월말에서 2월초에 걸쳐 시행되었는데, 재선거 공보에 “금번 피선되는 자는 사고 여하를 불문하고 사퇴할 수 없으며”라는 웃지 못 할 구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4-3은 말한다 1> 191-192쪽)

 

양정심의 “주도세력을 통해서 본 제주 4-3항쟁의 배경”(<제주 4-3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51-96쪽)을 보면 해방 후 제주도의 좌익세력 조직은 다른 어느 지역 못지않게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식민지시대에 제주인의 외부 진출이 많았고 그만큼 해방 후 귀환 인구의 비율이 높았던 상황은 분명히 좌익의 확장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외딴 곳이라는 조건 때문에 육지에서 확장되고 있던 극우세력이 아직 제주도에는 진출하지 않았고, 현지 출신의 경찰관들은 조병옥과 장택상의 반공주의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다.

 

1946년 말까지 제주도에는 미군 점령 하의 남조선에서 진행된 극단적 좌우대립 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민위원회는 미군정과 경찰의 심한 탄압을 받지 않은 채로 인민의 신뢰를 지키고 있었고 인민위원회를 주도하는 좌익도 극단적 투쟁노선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10월 소요사태에 제주도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좌익 인사들이 인민위원회 이름으로 입법의원에 당선된 것이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의 취재 중에 이런 내용도 있다.

 

1946년 초에 세화지서 주임으로 발령된 한 경찰관은 현지로 부임하면서 경찰서장이 써 준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소개장을 갖고 가 그 지역 인민위원장에게 전할 정도였으며, 한동안 같은 건물에 인민위원회와 지서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또 그 무렵 안덕지서 주임으로 발령된 경찰관은 지서 건물을 동네 청년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을운동회 때 거액의 희사금을 내고 지서를 인수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3은 말한다 1> 179쪽)

 

1947년 초까지 중앙의 신문에 제주도에 관한 기사가 극히 적었다는 데서도 제주도의 평온한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2월 들어 모리배의 준동에 관한 기사가 나타나고 이어 군정청 간부들의 독직 사실이 밝혀졌다.

 

“무법천지 제주도, 모리배의 기지로 이용”

 

전쟁 때에는 일본군의 동아 침략의 제1선 기지로 사용하여 오던 제주도는 해방 이래 일부 비애국적인 모리배들의 대일 밀수출입의 기지로 화하여 가지가지의 죄악의 씨를 뿌리고 있는데 최근에는 이러한 모리배를 취체 방지할 책임을 가진 감독관청의 책임자까지 모리배와 부동이 되어 범죄를 조장하는 듯한 언행을 취하고 있어 도민의 분개는 절정에 달하고 있다 한다.

 

제주도에서 발간되는 제주신보의 최근 보도에 의하면 당지 해안경비대에 체포된 밀선 복시환(福市丸)을 제주도로부터 목포로 귀환시키던 도중 제주도 산지항에 기항하였던 것을 기화로 약 1천만 원 정도의 물품을 당지의 원모와 한모의 양인이 이를 매수하였다 하며 제주신보 사설란에 “모리배의 천하인가”라는 논설을 게재하였던바 원 한 양인은 1월 26일 밤 8시경 제주신보에 나타나 기자에게 전기 사설을 시비로 잡아 신문사를 말살 운운의 언어도단의 공갈협박을 하였다고 한다. 당지 취체관의 최고책임자인 신모의 태도도 애매하다는 정보를 접한 경무부에서는 이러한 미묘복잡한 정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경무부 감찰장 조병설 씨가 6일경 제주도로 향하여 떠나리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2월 5일)

 

기사 중 “원모”와 “한모”는 같은 날 <동아일보> “‘모리 천하’ 제주도, 경찰간부 통역 등이 주로”에 원만영과 한중옥으로 이름이 밝혀져 있다. “당지 취체관의 최고책임자인 신모”는 제주도 감찰청장 신우균을 가리킨 것이다.(감찰청이란 1946년 8월 제주도의 도(道) 승격에 따라 각도 경찰청에 준해 만들어진 제주도 경찰기구였다.) <4-3은 말한다 1> 232-245쪽에서 이 ‘복시환 사건’을 중시한 뜻에 나는 찬성한다. 감찰청장만이 아니라 군정경찰 책임자로 주둔미군 제2인자 패드릿치 대위까지 끼어든 이 악질 권력비리로 인해 미군정에 대한 민심이 크게 악화되고 3-1 시위 사건을 일으킬 육지의 ‘응원경찰’이 들어오게 되었다는 설명이 합당하다고 보는 것이다.

 

제주도의 경찰에는 ‘도민의 경찰’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1947년 2월 26일자 <자유신문>의 희한한 기사 하나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전(前) 부하를 난타, 제주서 청장이”

 

지난 2월 19일 제주도 감찰청 신우균 청장 관사에 무단침입한 혐의로 얼마 전 파면당한 경사 김인규는 경찰청에서 훈계를 받고 있던 중 돌연 신우균 청장이 장작개비를 들고 취조실에 들어와 김을 무수히 난타하여 왼편 팔과 가슴에 중상을 입혀 방금 도립병원에 입원가료중이라 한다. 이 사건 때문에 신 감찰관은 2월 21일부로 정직처분을 당하였다 한다.

 

딱한 일이다. 대신 때려줄 부하 하나 없어서 청장이 손수 장작개비를 휘둘러야 했다니! 폭행을 당한 전직 경찰관 이름을 4-3 취재반은 ‘김인옥’으로 확인했는데 그가 청장 관사에 무단침입한 까닭이 무엇일까. <4-3은 말한다 1>의 복시환 사건 서술 중 이런 대목이 있다.

 

이쯤 되자 소장파 경찰관들도 들고일어났다. 제주 출신 8~9명의 경찰관들이 이 사건을 면밀히 조사, 신 청장과 감찰청 김여옥 수사과장이 깊이 개입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당사자들을 찾아가 퇴진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김 과장은 사표를 쓰고 순순히 자리를 떠난 반면, 신 청장은 이를 강력히 부인하며 역공을 펴는 바람에 경찰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에 미묘한 갈등을 표출하게 되었다. (235쪽)

 

신우균이 물러난 직후 부르지도 않은 ‘응원경찰’이 제주도에 들이닥친 것은 신우균과 패트릿치가 자기네 변명을 위해 제주도 경찰에 대한 험담을 했기 때문이 분명하다. 충남-충북 경찰청 소속 50명씩, 100명으로 편성된 응원경찰대를 맞아 제주 출신인 강동효 제주서장마저 어리둥절해서 “어떻게 된 영문이냐?” 묻기까지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한다. 4-3취재반은 당시 제주서 사찰계장으로 근무하던 박운봉의 증언을 전해준다.

 

“제주도 내에서 좌익계열이 우세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응원경찰대가 들이닥치자 동료 경찰관마저도 동요하는 빛이 없지 않았습니다. 상관들에게 물어보아도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뒤늦게야 ‘복시환 사건’으로 쫓겨 나간 신우균 감찰청장의 모략에 의해 제주경찰에 대한 상부의 불신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4-3은 말한다 1> 248쪽)

 

신우균은 결국 한 달 후 경무부 사문위원회를 거쳐 파면되었다. 그러나 최경진 경무부 차장의 “현재까지의 죄로서는 사문위원회에 부칠 것이 못 된다.”는 말이 1947년 3월 4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된 것을 보면 애초에 경무부 당국자들에게는 신우균을 처벌하지 않으려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조병옥에게는 남조선을 경찰국가로 만드는 과업에 제주경찰이 하나의 흠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우균의 죄상보다 훨씬 더 큰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서 신임 강인수 감찰청장에게 ‘제대로 된 경찰’ 100명을 딸려 보냈을 것이다.

 

이 응원경찰이 3-1 발포사건을 일으켰다. 폭도들의 경찰서 습격 위협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경찰서에서 꽤 먼 거리에 있던, 아기를 안은 아낙네와 초등학생까지 포함한 피해자들이 등에 총을 맞은 정황과 동떨어진 주장이었다. 이 발포사건은 주민 학살이었다. 발포자가 누구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어도, 제주 출신 경찰관들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기 때문에 외부 경찰을 들여온 것 아니겠는가. 강인수 청장이 3월 11일 이렇게 밝혔다고 한다.

 

“도립병원 앞에서 발포한 경관은 1구서 소속으로 충남에서 내도한 부대장이 당일 도립병원에 배치시켰던 것인데, 무사려한 발포로써 중상자를 낸 사실은 어제 하지 사령부에서 진상조사차 내도한 카스틔어 대좌가 조사하게 될 때에 비로소 나 자신 확연한 사실을 알게 되어 도립병원 앞 발포사건에 대하여는 대단히 미안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4-3은 말한다 1> 310쪽)

 

이 사건에 항의하는 좌익 주도 총파업에 거도적 호응이 있었던 것은 분노 때문이었다. 3월 10일 시작된 총파업은 공무원까지 참여하는 역사에 드문 ‘민관(民官) 총파업’이 되었다. 심지어 제주 출신 경찰관들까지 호응했다가 65명이 파면 처분을 받았다. (당시 제주도의 경찰관 숫자는 330명이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이 파업의 탄압이 미군정의 중요 과제가 되었다. 4백 명의 육지 경찰이 즉각 추가로 투입되었고, 1년여가 지난 4-3항쟁 발발 때까지 2천500명이 이 파업 관계로 체포되었다. 3-1 사건 직후 제주에 온 조병옥의 태도에서 탄압 분위기가 이미 나타나 있음을 4-3 취재반이 전하는 한 당시 도청 직원의 증언에서 알아볼 수 있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도청 안의 사무실에 도청 직원들을 불러 놓고 파업중지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제주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불온하다면서 조선의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싹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놀라운 내용의 연설을 했습니다. 현지 분위기와는 너무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4-3은 말한다 1> 318-319쪽)

 

서울로 돌아온 조병옥은 “경찰당국은 인내와 엄중을 아울러 충고와 경고를 하였으나 군중은 그 해산을 불긍하므로 작년 10월 폭동의 쓰라린 경험을 참고로 하여 부득이 발포”한 것이며 “선동자 지도자들은 후열에 서고 순진한 양민 동포들은 전열에 배치된 까닭으로 6명의 순진한 동포들의 귀중한 생명의 희생을 본 것”이라며 경찰의 발포를 정당화했다. 3월 20일 발표한 담화문의 앞부분만 옮겨놓는다.

 

“금반 제주도 불상사건에 대한 나의 관찰을 피력하여 동포 제위의 참고에 공하려 한다. 이 사건은 남조선에 있는 몇 개의 정치사회단체들의 정치이념을 공통히 하는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휴수(通謀攜手)하여 미군정을 전복하여 사회적 혼란을 유치하여 자기 세력을 부식하려는 전체적 운동의 부분적 현상으로 당도(當道)에 노출한 것이다.” (<동아일보> 1947년 3월 21일 “제주도 불상사에 대한 조 경무부장 담화 발표”)

 

제주도에 대한 조병옥의 시각을 하지 등 미군정 수뇌부도 공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인 초대 도지사 박경훈이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4월초에 유해진이 부임하면서 제주도의 모든 요직에서 제주사람이 배제되는 현상이 시작되었다. 유해진이 부임 때 경호원으로 서북청년단(서청)원 7명을 데려온 것이 제주에서 서청 발호의 출발점이었다고 한다.

 

1947년 3월 ‘민관 총파업’ 탄압으로 시작된 공포분위기는 1년 이상을 끌면서 ‘좌익 탄압’ 아닌 ‘제주인 탄압’으로 확대되어 가기만 했다. 4-3 취재반이 서술한 1948년 3월 중 세 건의 고문치사 사건을 보면 그 몇 주일 후에 발발한 4-3항쟁은 좌익의 우익에 대한 항쟁이 아니라 미군정과 육지인에 대한 제주인의 항쟁일 수밖에 없었다.

 

3월 4일 조천지서에 연행됐던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당시 21세)이 유치 이틀 만인 3월 6일 별안간 숨졌다. 사체의 검시결과 그는 혹독한 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조천지서 고문치사사건의 파문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3월 14일, 이번에는 모슬포지서에서 역시 유치중이던 대정면 영락리 출신 청년 양은하(당시 27세)가 경찰의 구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거의 같은 무렵 한림면 금릉리를 급습한 서청 중심의 경찰대에 붙잡힌 이 마을 출신 청년 박행구(당시 22세)가 곤봉과 돌로 찍혀 유혈이 낭자한 초주검 상태에서 경찰트럭에 태워져 연행되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총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4-3은 말한다 1> 556-557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