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0일 선거인등록과 함께 후보자등록도 시작되었다. 후보자등록은 4월 15일 마감이다.(실제로는 16일 마감으로 늦춰졌다.) 일사불란하던 선거 추진세력에서 후보자등록 시작과 함께 잡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난립 방지 대책 애련서 검토”

 

민족진영애국단체대표자 정기회의는 6일 오후 2시부터 이화장에서 소집하고 현재 총선거한 후보가 난립하고 있는 데 대하여 대책을 강구하였다 하는데 총선거를 반대하고 있던 중간파에서 선거방해공작으로 출마할 동향을 보이고 작금의 국내정세에 있어서 입후보 난립 방지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8일)

5월 10일 시행될 남조선총선거는 일부의 강력한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이를 추진시키고 있거니와 경향을 막론하고 입후보 난립으로 상당한 혼전이 예상되고 있다.

 

즉 금반 선거를 지지하는 한민, 독촉계열에서는 입후보 난립 방지를 위하여 여러 가지로 노력하여 왔으나 지금까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선거구에서 정치노선 및 소속당을 동일히 하는 인물이 4, 5인 이상 난립출마하게 되어 정당 수파의 통솔규범의 문란해지고 있는 느낌이 없지 않는바 금반 입후보 난립을 계기로 당시(黨是)에 불만을 표시하는 인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거완료 후에는 탈당소동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입후보등록 마감까지는 정원 200명에 대하여 평균 5배에 달하는 입후보등록이 예상되며 여전히 기성 지반을 가진 인물들이 유력할 것으로 정계 옵서버는 보고 있다고 한다. (<서울신문> 1948년 4월 10일)

 

붕당론(朋黨論)은 의(義)로 뭉친 붕(朋)과 리(利)로 모인 당(黨)을 구분한다. 의로 뭉치면 물처럼 담담하나 화이부동(和而不同)이 되고 잇속으로 뭉치면 꿀처럼 달콤하나 동이불화(同而不和)에 빠진다고 했다. 총선거 추진세력이 단결해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이익을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총선거가 이뤄져 그 과실을 따먹게 되자 모두 제 입에 넣어야겠다고 날뛰는 상황이 바로 벌어진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총선거 추진세력을 망라해 구성한 애국단체연합회(애련)가 교통정리를 하러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입후보 난립에 애련(愛聯)서 공인후보제”

 

애국단체연합에서는 6일 하오 2시부터 이화장에서 정례 화요회를 열고 입후보 난립 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결과 내 15일 입후보등록이 완료된 후 애련으로서의 공인후보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9일)

 

회의 장소가 이화장인 것만 보더라도 애련에 대한 이승만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승만은 후보자 난립을 자기 영향력을 넓히는 기회로 이용하기 바빴던 모양이다.

 

“이 박사 추천 가칭하는 입후보자 허설에 속지 말라”

 

요즘 각 지역에서 출마하고 있는 일부 입후보자들이 이승만 박사의 찬의와 물질의 원조를 얻어 입후보를 하여야 한다는 등 구구한 풍설이 들리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무근이라고 하여 작 14일 이승만 비서실에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최근 경향 각 지역에서 입후보관계로 말미암아 허무한 풍설이 유포되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이 박사께서 자기를 추천했다든가 또는 물질적 원조를 하여준다는 등 갖은 선전을 하고 다니는 일부 인사가 있는 모양이나 이 같은 것은 사실 무근인 고로 앞으로 이 같은 허설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곧 비서실까지 연락하여 주기를 바란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5일)

 

허설(虛說)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진설(眞說)을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이승만의 낙점을 받는 것이 당선의 첩경으로 총선거 추진세력 안에서는 상식으로 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물질적 원조’ 얘기까지 나온다.

 

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에서 이승만이 수천만 원의 정치자금을 움직인 사실을 밝히는 데 큰 노력을 들였다(제13장). 이 연구를 통해 이승만이 정치자금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밝힌 것은 대단히 의미가 큰 중요한 성과다. 그러나 “최소 2천7백만 원, 최대 5천2백만 원”(606-609쪽)이라고 밝힌 것은 ‘최소한’의 의미로 이해해야겠다. 정치자금은 속성상 완전히 밝혀내기 어려운 것이고, 밝혀낸 자금원 목록을 보더라도 성공적으로 감춰진 것이 적지 않음이 분명하다. 5-10선거와 관계된 정치자금의 움직임이 별로 밝혀져 있지 않은데, 위 기사를 보면 상당액이 이승만을 통해 움직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승만은 애련뿐 아니라 독촉국민회를 통해서도 입후보 조정에 개입하고 나섰다. 개입의 명분은 중간파의 위협이었다.

 

“후보 난립 경고, 독촉 선전부 담화”

 

독촉국민회 선전부장 양우정 씨는 13일 입후보난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해방 후 동일한 정강정책을 가진 정당이 난립한 것과 같이 한 당에 속한 인물이 2인 이상이 한 구역에서 출마하는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며 그들의 양심을 묻고 싶다. 그리고 총선거를 반대하는 중간파가 선거에 출마한다는 것은 웃지 않을 수 없다. 정치가라면 정치적 목표가 있어야 할 것인데 조선의 중간파는 기회주의로 민중을 위만(僞瞞)시키고 있으므로 민중은 이러한 독립을 방해하는 자에게 대하여서 투표를 보이콧하여 그들의 책동을 분쇄하여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4일)

 

“입후보 난립에 독촉국민회서 경고”

 

독촉국민회 선전부에서는 15일 입후보 난립을 경고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금반 총선거 출마에 있어서 국민회 동지들은 1구에서 1인 이상 출마하지 말고 호상 양보하여 독립운동자로서의 진실한 정신을 일반에게 시범하여야 할 것이며 동지 상쟁을 말고 모리배 정치부로커 기타 조국을 송두리째 합리적으로 타국에 매도하려는 공산당 및 중간파의 모략출마자와 상대로 싸우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니 국민회 동지들은 우리가 여태 조국의 완전자주독립만을 위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싸워온 우리의 투쟁역사를 회고하고 또 그 정신을 살려서 앞으로 닥쳐올 독립의 방해자와 더욱더 치열한 투쟁이 남아 있다는 것을 잘 각오하고 동지간의 단결을 더욱더 도모하여 독립을 힐락질하는 방해자와 싸울 전투계획을 계속하여 준비하기를 바란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6일)

 

기회주의! 중간파를 매도하는 전가의 보도가 나오지 않을 리 없다. 선거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후보로 출마하다니, 표리가 부동한 것 아니냐는 시비다. 이 비난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Wikipedia>에서 “opportunism”을 찾아보았다.

 

“원칙을 무시하면서,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결과를 살피지 않으면서 상황을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의식적으로 취하는 태도와 행동”이라고 기본 정의가 되어 있다. 일관된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개인적 이득을 취하는 것이 기회주의의 기본 요건인 셈이다.

 

중간파가 내세운 원칙은 민족주의다. 선거 반대는 민족주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선거를 반대하더라도, 그 반대에 불구하고 선거가 시행될 때는 선거 참여가 민족주의 실현을 위한 차선책이 될 수 있다. 선거 반대가 원칙인 것처럼 뒤집어씌워 중간파의 참여에 도덕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트집을 잡는 것은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후보로 나서는 것이 개인적 이득의 추구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국회의원 되는 것을 개인적 이득으로 본다면 중간파 노릇 하는 것보다 이승만 꽁무니 따라다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길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보가 몇이나 있었을까? “opportunism”에 대한 꽤 긴 설명을 훑어보니, 아무래도 중간파보다는 한민당-이승만 세력에게 훨씬 더 잘 어울리는 말이다.

 

중간파-한독당의 저명인사 중에는 아무리 ‘기회주의’ 딱지를 붙이려 해도 일반인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인물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딱지를 붙여보려고 들고 나온 것이 “선거 방해공작”이었다.

 

“한독당과 중간파, 무소속으로 입후보”

 

중간파와 좌익의 선거 방해공작을 목표로 한 선거 출마는 16일 입후보자 등록마감으로 보면 예측한 바와 같이 그들은 무소속이라는 가명을 쓰고 출마하여 후보 난립상태에 빠진 민족진영은 낙관을 불허하는 현상에 있다.

 

그런데 금반 총선거입후보에 특이한 현상은 과반 중집회의에서 선거에 참가하지 않기로 한 한독당이 중앙당원은 물론 각 지방도지부장이 무소속 내지 개인자격의 명칭 하에 출마한 것인데 당 결의를 준수하는 조건하에서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인지 그렇지 않고 당을 이탈하게 된다면 한독당 지방조직에는 장차 상당한 동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1일)

 

예나 지금이나 선거철은 언론의 계절이다. 동아일보는 제 몫을 다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뛴다. 4월 24일자 사설을 “호양 없이는 민족진영 자멸 - 단일후보 선출 시급 - 난립에 우익 공선제 실시”로 내보내 교통정리를 재촉하고, 수시로 ‘후보 단일화’를 찬양하고 나선다.

 

“중간파 입후보로 장흥 손 씨 기권”

 

전남 장흥군에서는 민족진영 측에서 고영완 손석두 양 씨가 입후보로 출마하였는데 그 난립을 이용하여 중간진영의 김중기 씨가 출마하여 중간파와 좌익의 협조를 얻어 민족진영의 당선이 우려되던 바 손석두 씨는 자진하여 자기의 투표 지반을 동지 고영완 씨에게 일체 양보하여 후보 난립 방지에 좋은 모범을 떨치었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1일)

 

“일부 양심인사 입후보를 포기”

 

입후보 난립은 의사를 동일하게 하는 자파 진영의 자멸을 초래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해방 후 3년간이나 조선 민주독립을 목표로 투쟁한 성과까지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는데 과반 애국단체연합회의에서 입후보 난립 방지책을 결정한 후 점차 양심적 입후보자는 자진하여 후보를 포기하고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7일)

 

4월 27일자 기사를 보면 구체적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기사는 제목대로 내보내고 싶은데 팩트가 채워지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결국 4월 16일까지 200개 선거구에 936명이 등록했다.(4월 25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될 때까지 사퇴한 몇 사람을 제한 숫자임.) 정당-단체별로는 대한독립촉성회 239, 한국민주당 91, 한국독립당 7, 여자국민당 2, 대동청년단 88, 민족청년단 21, 대한노총 22, 무소속 412, 기독교 10, 불교 5, 유도회 4, 청우당 1, 기타 34명이었다.

 

독촉국민회 소속 후보만도 선거구 수보다 많고, 한민당-여자국민당-대청-족청-대한노총 등 우익 정당-단체를 모두 합치면 거의 절반인 463명이다. 무소속 412명 중에도 그쪽 경향 후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총선거 추진세력은 후보 난립을 막는 데 실패했다. 그 최고지도자 이승만부터 자기 영향력을 키우는 데 몰두하고 있었으니 총선거의 열매를 따먹으려는 각개약진을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후보등록 과정에서 일어난 파문 하나를 소개한다.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있으면서 조병옥-장택상에게 대항하다가 1946년 12월 파면당했던 최능진이 이승만에 맞서 동대문갑구에 출마하려다가 등록이 되었느니 안 되었느니 옥신각신한 일이다. 5-10선거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므로 한 번 세밀히 살펴볼 일인데, 우선 그 발단만 소개해 둔다.

 

“최 씨 등록 연기 접수는 선거법 위반 아닌가 - 시(市)선위 조치에 비난 자자”

 

딘 군정장관이 직접 임명한 국회선거위원회에서 제정한 선거법에 의하면 16일까지 선거등록 마감을 하여야 할 것인데 동대문갑구에는 등록마감까지 이승만 1인이 등록하였을 뿐이었고 등록마감 직전에 최능진 씨가 소위 이 박사를 지지하는 청년들에게 추천서를 탈취당하였다고 하여 불충분한 추천서를 가지고 등록하려고 하였으나 동대문구 선위에서는 신성한 선거법을 준수하는 의미 하에서 동 씨의 등록접수를 거절하였던바 최 씨는 소위 자유분위기를 방해하였다는 조건하에서 당국과 교섭 중이던바 서울시 선위에서 동 씨의 등록을 21일 오후 7시까지 연기하여 동 씨는 20일 오후에 등록수속을 완료하였다는데 이에 대하여서 비난이 분분하다고 한다.

 

즉 동 씨는 이 박사를 지지하는 청년들에게 추천서를 탈취당하여 자유분위기를 방해하였다는 것은 하등의 근거와 증거가 없는 말이며 또 엄정하고 신성한 선거법을 최능진 일개인을 위하여 등록마감 후 116시간이나 연기한 서울시 선위의 조치는 자유분위기를 역용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하여튼 자유분위기를 역용하려는 일개인 때문에 독립정부수립을 목표로 제정된 선거법을 위반한 데 대하여서 비난이 자못 크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2일)

 

 

Posted by 문천

 

총선거의 첫 단계인 선거인등록이 3월 30일에서 4월 8일까지 진행되었다. 유권자의 91.7퍼센트인 8백여만 명이 등록을 마친 것으로 중앙선거위원회가 발표했다. 선거 추진세력에서 만족하고도 남을 결과였다. 하지 사령관이 만족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4월 13일의 담화문을 발췌 소개한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4일)

 

“남조선 내 유권자등록에 관한 예비적 보고에 의하면 전유권자의 90% 이상의 등록을 완료하였으므로 그들은 5월 10일 시행될 총선거에 투표할 자격을 가졌다. 이것은 조선정부를 형성함에 있어서 조선 국민을 진정으로 대표할 수 있는 자기들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적 총선거에 투표하고자 하는 전 조선 국민의 압도적 표시라고 본다. 또 이것으로써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단과 조선국민에게 조선국민은 총선거를 원하지 않고 국민의 다대수가 이것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공산당과 그들의 많은 세포분자들의 소란한 선전이 허언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

 

그들은 이것을 부르짖으며 또 다수한 민중을 비난하였다. 등록기간 중 각 방면에서 활동한 데 대하여 본관에게 도달된 보고에 의하면 자유분위기에 대한 확실한 방해자는 등록소를 습격하고 등록명부를 파기하며 또 선거관계관을 살해하고 등록과 투표를 부르짖고 있는 입후보자 및 저명한 정계요인을 살해하고자 광범위에 걸쳐 협박하고 있는 공산분자의 소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것은 정히 소련지도자들이 유엔위원단과 조선국민에 혼란을 획책하기 위하여 그들 공산분자들에게 지령을 내린 것이다. 그들은 충분한 보수를 받고 이러한 지령을 실행하고 있으며 또 그들이 가속도로 이것을 계속할 것이라는 것도 우리는 능히 예측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국민의 압도적인 투표등록 성과는 어떠한 강요에 의해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을 것이라는 것도 자타가 모두 다 공인하는 바이며 또 그 투표등록은 민주주의적 제 과정에 대한 위대한 초보적 승리로서 간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으로 조선인 애국자들은 내 5월 10일 투표장소에 출두하여 자기들이 희망하는 입후보자를 비밀투표에 의하여 선거함으로써 제3차의 승리가 재래될 것이다. 그러므로 투표권등록을 완료한 모든 남녀유권자는 당일 무루(無漏) 투표하기를 본관은 열렬히 희망하는 바이다.

 

정부의 대표를 선출함에 대하여 각 개인이 표시하는 바 선택투표권은 자유민주주의적 제 문명국가에서 인류가 가지는 최대의 특권이다. 조선국민이 자유로운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에 있어서 이 특권을 행사함은 조선국민의 수중에 달렸다. 그러므로 내 5월 10일 여러분은 누구나 이 특권을 행사하십시오.”

 

그런데 단독선거 추진세력의 승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여론조사 보고가 4월 12일 한국여론협회로부터 나왔다.

 

한국여론협회에서는 가능지역 선거에 관한 민심동향을 조사하고저 지난 12일 정오 시내 충무로 종로의 2개소에서 통행인 1,262명을 대상으로 그 여론을 조사하였는데 설문내용과 그 결과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설문

1. 귀하는 등록하였습니까? 안 하였습니까?

1. 자발적으로 하였습니까? 강요당하였습니까?

1. 누구에게 강요당하였습니까?

 

조사대상인원수 1,262명

(1) 등록하였소. 934명 74%

(2) 등록 안 하였소. 328명 26%

(3) 자발적으로 하였소. 84명 9%

(4) 강요당하였소. 850명 91% (<조선일보> 1948년 4월 15일)

 

서울의 등록률은 92.3퍼센트로 발표되었는데 조사대상의 26퍼센트가 등록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니 어찌된 일일까. 본인이 등록 사실도 알지 못하는 대리등록이 광범위하게 자행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리고 등록했다는 응답자 중 91퍼센트가 강요당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강요의 정도에도 큰 편차가 있겠지만 압도적 대다수가 등록을 강요당했다는 피해의식을 가졌던 사실을 이 조사결과는 말해준다.

 

군정청에서 한국여론협회를 비난하는 담화문이 곧 이어 나왔다.

 

“인심 문란 목적한 ‘한국여론’에 단(斷) - 공보부서 최후 경고”

 

지난 12일 한국여론협회에서는 지난번 선거인등록에 있어 자발적인가 혹은 강요에 의한 것인가에 대한 가두 여론조사를 충무로 입구와 종로 네거리에서 1,262명의 통행인에게 실시한 결과를 좌익계열 보도기관에서 대대적으로 취급하여 공정한 애국동포들의 의아와 물의를 자아내게 한 바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15일 중앙청 공보부에서는 요지 다음과 같은 공보국장 담화를 발표하여 공정성 없는 가두 여론조사로 인심을 현혹케 하는 언론은 언론자유의 한계 이외라고 경고를 발하였다.

 

“지난 12일 한국여론협회에서 조사한 여론에 의하면 강요에 의하여 등록한 자가 91퍼센트, 자발적 등록이 9퍼센트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남조선 현하의 정세에 비추어 상상할 수 없는 숫자이다. 이러한 과거의 폐단을 제거 시정하고 여론조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얻기 위하여 동 협회에도 주의를 주었던 것이나 하등 연락도 없이 믿을 수 없는 여론을 발표하는 것을 공안상 방임할 수 없는 것이며 언론자유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임을 경고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6일)

 

한국여론협회가 뚜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단체였을까? 한국여론협회의 발족을 보도한 1946년 7월 8일자 <동아일보> “참다운 민성(民聲)을 환기 - ‘한국여론협회’ 신 발족” 기사를 보면 이 협회는 8개 위원회로 구성되는데 위원장 중 장덕수(정치), 조소앙(외교), 김준연(재정), 한경직(노농), 양주동(문화) 등의 이름이 보인다. 좌익 성향은 결코 아니었다.

 

4월 12일 여론조사를 동아일보는 보도하지 않았지만, 조선일보는 보도했다. 당시의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처럼 노골적 극우는 아니었어도 “좌익계열 언론기관”은 터무니없는 소리다. 전가의 보도처럼 ‘좌익 책동’을 뒤집어씌우고 싶으나 한국여론협회가 굳이 따지자면 우익 성향 단체였기 때문에 어정쩡하게 되어 공보부장(장관급)도 아닌 국장급이 나선 것 같다. 담화 내용을 보더라도 조사방법에 대한 구체적 문제 지적 없이 군정청에 “하등 연락도 없이” 진행되었다는 사실만을 불평했다. 여론조사까지 사전 검열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 여론조사가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 당시 서울시민들의 분위기를 생각해본다. 자발적 등록은 7퍼센트 미만이었다. 26퍼센트는 등록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중 정말 등록 안 된 사람은 8퍼센트 미만이었다. 그리고 67퍼센트는 강요당하는 기분으로 등록했다. 강요당했다는 사람 중에 실제적 위협까지 받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잔소리가 귀찮아서나 이웃의 눈치 정도로 내키지 않는 등록을 한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요컨대, 대다수 시민이 꼭 등록해야겠다는 생각도, 꼭 안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고, 그저 귀찮고 기분 나빠서 안 하고 넘어갔으면 좋겠다는 정도 분위기였던 것 같다.

 

한민당-이승만 세력의 반민족적-반민중적 성격은 충분히 드러나 있었다. ‘가능지역 총선거’에 그들이 환호작약하는 것만 보더라도 일반 인민은 선거를 열렬히 환영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선거인등록에 흔연히 임한 사람은 서울 지역에서 7퍼센트 미만이었는데, 그렇지 못한 92퍼센트가 조직적으로 반대에 나설 길이 없었다. 남로당만이 조직적 반대운동에 나섰으나 그를 믿고 호응하는 사람도 극소수였다. 중간파가 확실한 노선을 세워 반대운동에 나선다면 훨씬 넓은 범위의 호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겠지만, 중간파의 움직임은 ‘합법’의 족쇄를 차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와 상황 속에서 한민당-이승만 세력은 거의 아무런 견제 없이 선거의 승리를 향해 매진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요구하는 유엔위원회만을 견제세력으로 의식하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한민당 기관지답게 4월 11, 13, 15일 3회에 걸쳐 “조위(朝委)에 보내는 한민당 멧세지”를 게재했는데, 한민당이 당시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임하고 있었는지 알아볼 수 있는 문서이므로 긴 내용을 모두 옮겨놓는다. 독자들이 유의해서 읽기를 권하고 싶은 대목에 밑줄을 그어놓는다.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유엔총회에서 결의한 총선거를 온전히 수행하도록 하려는 귀 위원단의 가지가지의 고심과 노력에 대해서 충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귀 위원단이 늘 고조하시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선거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특히 본당은 이에 대하여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당은 과거에 있어서 당수 송진우 씨와 정치부장 장덕수 씨를 살해당한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금번 선거에 있어서도 입후보자를 암살할 계획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우리의 절대적 요망은 안심하고 입부호도 하고 선거운동도 하고 투표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 위원단이 특히 이 점에 유의하시는 것은 크게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금번 귀 위원단이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 취한 방침은 결과에 있어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파괴하게 될 우려가 많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목적과 대상은 말할 것도 없이 선거를 잘하기 위해서 선거에 협력하는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입후보도 하고 마음대로 투표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민중으로 하여금 강제로 선거에 보이콧시킬 목적으로 폭동·파괴·방화·살육 등 수단을 불택(不擇)하는 사람들에게 그 행동을 마음대로 하도록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해서 제공한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유엔의 결의에 보이콧하는 모국의 지령을 받아서 이번 총선거를 방해하려는 북한의 인민위원회에서는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대해서 총선거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리고 평양에서는 거의 매일 이것을 방송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 자신의 귀로 직접 듣고 있습니다. 이 지령을 실행하기 위해서 2월 7일 이후 그들이 범한 폭동·파괴·살인·방화 등 건수(3월 23일 현재)는 다음과 같이 전율을 금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경찰관서 108개소 / 테러 102건 / 경관 피살 24인 / 동 부상 75인 / 경찰가족 피살 1인 / 동 부상 9인 / 관공리 피살 3인 / 동 부상 16인 / 양민 피살 12인 / 동 부상 131인

 

총기 피탈 79건 / 탄환 피탈 1,305발 / 기관차 파괴 61량 / 객차화차 파괴 11량 / 기차노선 파괴 13건 / 전화선 절단 214건 / 통신기구 파괴 9건 / 전주 절단 72본 / 동력선 절단 5건 / 경찰관서 방화 5건 / 관공서 방화 3건 / 양민가옥 방화 28건 / 관공서 파괴 13건 / 양민가옥 파괴 15건 / 도로 교량 파괴 29건

 

그리고 최근 북한에서 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선거 때는 북한의 공산군이 38이남으로 처내려온다는 것을 선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신경전을 위한 일종의 모략적 풍설이라고 하더라도 선거일 임박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치열하게 더욱 광범위로 파괴·방화·살육 등 소위 무자비한 투쟁을 할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연백 지방에서는 음료수 우물에 독약을 투입하는 등 행동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불안 공포 속에서 어떻게 안심하고 입후보를 할 수 있으며 안심하고 선거운동을 할 수 있으며 안심하고 투표장소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입후보하는 사람은 전쟁에 출전하는 병사처럼 비장한 결의를 가지지 않고는 입후보를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선거운동자 중에도 많은 희생자가 날 것을 미리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권자 중에는 위협을 느껴서 본의 아닌 기권을 할 사람이 무수히 있을 것도 틀림없는 일입니다.

 

투표소의 파괴·방화·유권자등록명부의 파기·소실·투표함의 운반 도중 피탈 등으로 선거를 몇 번이고 반복하지 않을 수 없는 위험성이 도시를 제한 전 선거구에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거울 들여다보듯이 명확히 알면서도 거기 대응할 방안을 강구할 자유를 가지지 못한 것을 슬프게 생각합니다. 나라 없는 약소민족의 억울한 심정이 이런 데서 일어나는 것을 깨달을 자유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방도가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이에 대한 적당한 조치를 기대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귀 위원단은 이러한 사태를 몰각하고 그 시선과 고려를 전연 딴 방면에 집중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때 실망과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선거를 방해하기 위해서 파괴·방화·폭행·살인을 마음대로 하는 방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치 않고 그 폭동과 방해를 방지할 책임을 가진 경찰의 수족을 결박하고 선거를 수행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청년의 단체행동을 구속하기에만 주력한다면 그 결과는 선거일을 기하여 남북일대를 수라장화 하고 생지옥화 하는 것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을 여러분이 시인하실지 안 하실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5월 10일까지 이것이 사실로 증명될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사실로 증명되는 때는 우리의 희생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금번에 개변된 형사소송법은 그 주안이 귀 위원단의 요청에 응하는 데 있는 모양인데 그것이 이상적 법 이론으로는 훌륭하나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는 도리어 부적당한 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준 전시상태 반 계엄상태에 있는 것이 사실인데 재판소에서 원거리에 있어서 심판관의 영장을 가져오는 데 3일이나 걸리는 경찰관서에서는 도피하는 범죄자를 보고도 손을 댈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임시조치의 방법이 있다 하나 그런 짓을 하다가는 피의자의 교묘한 법정진술에 의해서 체포한 경찰관은 억울하게 1일 80원 미만의 봉급을 받아가지고 피의자에게 1일 1천원의 보상금을 물어주게 될 터이니 어떤 경관이 그런 모험을 하겠습니까?

 

더욱이 1일 80원을 받는 경관은 어느 나라 국민이며 1일 천원 보상금을 받을 범죄피의자는 어느 나라 국민이겠습니까? 범죄피의자는 언제든지 경관에 비해서 13배 이상의 수입이 있는 사람이요 그만큼 고등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란 이론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법률을 초안해낸 사법당국자가 벌써 경찰에 대해서 편견 내지 모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여기에 경찰은 사법관을 신뢰하고 범인을 취급할 용기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결국 경찰의 활동을 극도로 견제하고 공산당원들에게 파괴·방화·살인 등 행위를 마음대로 하도록 무 경찰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밖에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귀 위원단 여러분 우리의 말을 냉정히 친절히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주위에서 여러분과 가장 친절히 가장 빈번히 접근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복면한 공산주의자와 그 공산당의 충실한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우리는 그 인물들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주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의 교묘하고 적극적인 끊임없는 중상적 소개에 의하여 여러분이 한국민주당에 대해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는 짐작합니다.

 

유엔보고서에 본당을 극우라고 규정한 데서 그것을 알았습니다. 또 여러분의 주위에 공산당계열 분자들이 싸고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실정을 바로 보지 못하신다는 것은 금번의 자유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조치로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정말 자유분위기를 파괴하는 것은 공산당인데 그 공산당의 자유분위기 파괴공작을 방지하는 경찰과 청년단체를 자유분위기 파괴자로 오인한 것이 곧 그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여러분에게 불쾌감을 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이런 말을 솔직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다시 한 말씀드릴 것은 선거법 제12조와 제44조에 특히 유의해서 고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개정 형사소송법과 선거법 제12조, 제44조를 연락해서 생각할 때 극렬파괴분자들의 원하는 대로 된 감이 있습니다.

 

2천명 미만을 한 구로 한 투표구 총수가 1만2천 이상이 되고 경찰서 지서 출장소 파출소 수가 2천4백 이상이요 군청 읍 면 동회사무소가 2천4백 이상이니 합계 1만4천8백이나 됩니다. 여기에 세무서 등기소 등을 합하면 요 경계 장소가 도시를 제하고도 1만5천에 달할 것입니다. 그런데 남한의 경관총수는 4월에 증원이 되어가지고도 3만5천5백 명밖에 안 된다고 하니 그렇다면 1만5천 개소에 평균 2명의 경관 배치도 곤란하며 그들은 행동을 극도로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5월 10일에는 총선거를 방해하는 자들이 활동을 마음대로 할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벽지에 있는 투표소가 등록완료 후 투표일까지 25일 간에 한 번만 습격을 당해도 그 기일에 선거는 불가능할 것인데 습격한 의사를 가진 분자가 있기만 한다면 이것을 피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맹렬히 습격을 기도하는 분자가 있는 것도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여러분께서 기어이 그대로 한다고 하면 우리는 오직 독립을 위해서 깊은 한숨을 쉬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가면서라도 이 무방비의 희생을 각오하고 선거에 최선을 다할 결심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한국의 현실사태를 좀 더 이해하실 수 있다면 다음 세 가지를 특히 재고려하여 주시기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1) 형사소송법의 변개를 연기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2) 선거법 제44조의 투표구 인원수(2천 명)를 늘려서 투표구수를 줄이고 경비를 좀 더 안전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3) 선거법 제44조 제2항의 사건이 발생할 때는 그 선거구 전체를 무효로 하지 말고 그 투표구만 다시 선거하도록 하기를 청합니다.

 

 

Posted by 문천

 

“대표자의 책임”

 

당(唐) 태종(太宗)은 형인 태자 건성(建成)을 공격해 죽이고 아버지 고조(高祖)를 협박해 황제자리에 올랐다. 건성의 부하 중 위징(魏徵)은 평소 건성에게 세민(世民), 즉 태종의 야심을 경계하도록 권했었다. 건성이 누명을 쓰고 죽은 후 위징은 그 잔당으로 몰려 태종 앞에 끌려나왔다.

 

태종이 위징에게 “네가 왜 우리 형제를 이간시켰느냐” 하고 호통 칠 때 모든 사람은 그가 죽임을 당할 줄 알았다. 그런데 위징은 당당히 “옛 태자께서 소신의 말씀을 들었다면 오늘의 화(禍)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태종은 그가 자기 소임에 충실했다고 칭찬하며 중용했다. 그 후 위징은 죽을 때까지 바른 말 하는 신하로서 태종의 존중을 받았다.

 

유방(劉邦)이 팽성(彭城)에서 항우(項羽)에게 크게 패할 때 항우의 부하 정공(丁公)에게 포위당했다. 다급해진 유방이 정공에게 소리쳐 “우리 사이에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심하게 굴지 맙시다.” 하고 사정했다. 정공이 이를 딱하게 여겨 인정을 두었는지 유방은 겨우 도망갈 수 있었다.

 

항우가 망하고 유방이 한(漢) 고조(高祖)가 된 뒤 정공이 유방을 찾아왔다. 팽성의 은혜를 생각해 좋은 대접을 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고조는 정공을 당장 묶어 군중(軍中)에 조리돌린 다음 처형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정공은 제 임금 항우의 눈을 속여 사사로운 인정을 두었으니 이처럼 기군망상(欺君罔上)하는 자는 천하가 용납할 수 없다.”

 

당 태종인들 자신의 야심을 이루는 데 방해됐던 인물이 밉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한 고조라고 어려울 때 도움을 베푼 사람이 고맙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을 쓰고 버리는 데 자기 입맛을 앞세우지 않은 것은 나라 다스리는 일을 어렵게 여기고 조심한 때문이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고 대통령은 그 대표자다. 이 나라 최고의 요직에 앉아서 주인과 대표자를 모두 속이며 국가기구를 사물화(私物化)한 자들이 속속 눈에 띈다. 조직의 의리니 인간적 의리니 변명이라고 하지만 이기심 하나를 분식하는 데 불과하니 조직폭력배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권력을 쥔 자들이 국민 속이는 짓이야 동서고금에 지천으로 있어 왔지만, ‘조직인’을 자처한다면서 조직의 우두머리 대통령까지 속인다는 것은 정말 황당한 일이다. 속이는 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속는 사람도 문제가 있다.

 

국민의 대표자로서 대통령은 국민을 속이지 않음은 물론, 국민을 속이려는 자들에게 속아 넘어가면 안 될 책임을 가졌다. 그들을 요직에 임명하는 권한을 국민이 대통령에게 맡겨놓았기 때문이다. 오만하기로 특히 이름난 옛날 황제들도 나라 다스리는 일에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 살펴볼 일이다. (1999년 겨울)

 

옛날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상식을 벗어나는 듯한 의외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교훈의 가치를 가지려면 상식적인 원리를 지켜야 한다. 당 태종과 한 고조의 위 얘기들이 고사(故事)로서 오랫동안 가치를 누린 것은 일견 엉뚱한 행동 같으면서도 사람들이 일상에서 잊어버리고 살기 쉬운 원리를 일깨워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황제가 보여준 원리란 국가(천하)의 ‘공공성’이다. 황제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는 개인적 은혜와 충성을 이용하더라도, 일단 천하(국가)를 주재하는 위치에 서서는 황제 자신이 공공성을 기준으로 사람을 써야 등용된 사람들도 공공성에 입각해서 할 일을 할 것이다.

 

위징이 건성에게 개인적 충성심으로 세민을 억누르라고 권했다면 세민이 대권을 쥔 후에 잡아 죽여야 마땅했다. 그러나 위징은 천하(국가)의 안정을 위한 대책을 개인 건성이 아닌 공인 태자에게 건의한 것이었다. 세민이 건성을 제거한 후 위징을 붙잡아 따졌을 때 “태자가 내 건의를 받아들였다면 오늘의 일이 없었을 것을!” 탄식하는 것을 보고 세민은 그가 새 태자이며 장래의 황제인 자신에게 진정한 충성을 바칠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 위치에서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풀어주고 등용한 것이다.

 

한편 정공은 어떤가. 그가 유방의 포위를 풀어준 것이 천하의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면 유방이 뜻을 이룬 후에 중용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항우가 멸망할 때까지 그 밑에 있었다. 강자인 항우 밑에서 개인의 공명을 추구하는 것이 그의 기본 입장이었고, 한 차례 유방을 풀어준 것은 ‘보험’ 의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유방은 그를 처단함으로써 자기 개인에 대한 충성보다 천하에 대한 일관성 있는 충성이 이제 필요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거대사회의 질서 유지와 발전에 공공성이 필수 요소라는 것은 상식이다. 이것을 그냥 상식으로 받아들이기만 하지 말고 그 이치를 한 번 따져서 생각해 보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처럼 공공성이 취약한 사회에서는 필요한 일 같다.

 

조그만 사회 안에서는 지도자의 개인적 힘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주먹이 무서워서 사람들이 따라올 수도 있고, 꾀가 넉넉해서 사람들을 잘 몰고 갈 수도 있고, 사람됨이 사랑스러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규모가 커지면 개인적 힘이 미치는 데 한계가 나타난다. 개인의 힘 아닌 제도의 역할이 커지게 되고, 그 기초가 되는 것이 공공성의 원리다.

 

중국사를 공부한 나는 중국에서 공공성의 원리가 일찍부터 확립된 사실을 중시해 왔다. 공자가 가장 높이 받든 인물이 주공인데, 주공이 조카인 왕을 보좌하는 섭정 노릇을 잘 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개인의 힘은 주공이 월등했는데도 왕조체제라는 제도의 공공성을 앞세웠기 때문에 주나라 번영의 기초가 튼튼해질 수 있었다. 주나라에 앞선 은나라에서는 왕위의 형제 계승이 많았는데 주나라에서 부자 계승의 원칙이 확립된 것이 주공의 공로였다. 조선의 세조가 개인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음으로써 왕조체제의 제도를 약화시킨 것과 대조되는 일이다.

 

국가제도의 효용성은 무엇보다 폭력의 억제에 있다. 여기서 ‘폭력’이라 함은 주먹으로 치고 칼로 찌르는 것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주먹의 힘이든 돈의 힘이든 정보의 힘이든 힘을 많이 가진 자가 무절제하게 힘을 휘둘러 사회질서를 해치는 것은 모두 폭력이다. 폭력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회는 멸망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니, 폭력을 억제하는 국가제도 발달은 일종의 ‘자연선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국가제도 발달이 유럽보다 앞선 점은 명나라 말기 중국에서 활동한 이탈리아인 선교사 마테오 리치도 증언한 바다. 문관이 무관을 통제하는 제도, 민간인이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싸움이 나 봤자 욕설과 몸 씨름에 그치는 풍속에 그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그 시대 유럽 상황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몇 주째 계속되고 있는 새 정부의 인사 난맥상에 어리둥절해 있다가 “모래밭에서 찾아낸 진주”라는 박 대통령의 말에 무릎을 치게 된다. 중요한 국정을 함께 맡을 사람을 고름에 있어서 그는 자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탁월한 인사를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공공성을 저버리기 쉬운 자세다.

 

진주가 필요하면 보통사람들은 보석상에 가서 제 값 주고 산다. 물론 모래밭에서 찾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들기는 하지만,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물건이 아니라 꼭 필요한 물건이라면 없는 곳에서 공짜로 주우려 하기보다 있는 곳에 가서 돈 주고 사야 할 것 아닌가. 윤아무개 후보 정도 품질의 진주는 보석상 갈 것도 없이 길바닥에 널려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애꿎은 모래밭만 뒤지나. 자기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자기가 아니라면 발탁될 수 없는, 자기만의 인재들로 정부를 꾸려야만 보통 정부 아닌, 대단히 뛰어난 정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으로 발탁하려던 미스터 김도 그렇다. 능력은 차치하고 그 배경으로 볼 때 대한민국 장관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 대통령이 보통사람이라면 도저히 임명할 수 없는 사람에게 박 대통령은 너무 집착했다. 보통사람들의 의구심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미스터 김이 사퇴 후 스스로 증명해 보여주지 않았는가.

 

공공성에 대한 의식, 요즘 말로 ‘공공마인드’가 빈약한 것 아닌가 의심이 들면서 폭력의 억제라는 국가제도의 기본 기능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도 불안한 마음이 든다. ‘경제민주화’가 국가적 화두로 떠오른 것은 이 사회에서 ‘돈의 폭력성’이 심각해진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위직을 마치 ‘재테크 달인 클럽’으로 만들려는 듯한 인사 편향성을 보면 김종인 박사가 무엇을 보고 박 대통령에게 경제민주화의 희망을 걸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 그리고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을 것은 보고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 사람들 중에 이 사회의 장래에 대한 희망을 그에게 건 사람들은 물론 중용해야 한다. 신뢰가 쌓여 있는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자기 득실을 위해 줄서기를 한 사람들은 더러 쓰는 것은 괜찮아도 너무 많이 쓰거나 너무 무겁게 써서는 이제 맡기 시작한 새 역할에 도움이 안 된다. 그중 심한 사람, 정공 같은 사람은 물리쳐야 한다.

 

한편 대통령 당선에 반대해 온 사람이라도 공공성의 기준을 지켜 온 위징 같은 사람은 열심히 써야 한다. 헌법재판소장 자리를 놓고 몇 달째 어지러운 모습을 보며 문득 안경환 교수 생각이 난다. 그런 사람을 지명한다면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얼마나 보탬이 되겠는가. 이명박 정권에서 좋은 쪽으로 바뀐다는 희망을 얼마나 많이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헌법재판소 같은 독립기관을 놓고도 ‘내 편’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이다.

 

한 고조와 당 태종을 다시 돌아보면 황제 자리에 이르는 과정에서는 가신(家臣)집단의 개인적 충성에 의지해서 세력을 일으켰지만, 천하를 주재하는 자리에 일단 서서는 공공성의 기준으로 사람을 썼다. 황제가 되기 위한 ‘승리’와 황제로서의 ‘성공’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승리해서 청와대에 입성한 박 대통령, 이제 대통령으로 성공하기 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