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남북관계만은..."

 

부시 행정부는 북한 등 '악의 축'을 이용해 가공(架空)의 긴장 상태를 일으킴으로써 군사 정책을 편의적으로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대외 신인도는 크게 훼손되었다. 클린턴도 탄핵 위험이 절박한 상황에서 이라크 공습을 재개해 군사 정책을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지탄을 받은 일이 있지만, 부시가 벌인 짓에 비하면 약과 중의 약과다. 10년 전에 비해 미국의 '깡패국가(rogue state)' 이미지는 매우 선명해졌다.

 

그런 부시 행정부도 설거지 단계에 접어들어서는 북한을 대하는 태도에 상식을 많이 되찾고 있다. 6자 회담 참가국 중 미국과 함께 가장 북한에게 편협한 태도를 보이던 일본도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모두가 긴장 완화를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한국만이 이명박 정부 출범 후 홀로 경직된 태도를 지키고 있다. 긴장 지속의 피해를 가장 많이 받는 나라의 정부가 맞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뉴라이트가 남북관계의 긴장 상태의 지속 내지 격화를 바라는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펴는 미국이 세계의 군사적 긴장을 키우는 군사 정책을 취한 것과 똑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일이다.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빈부 격차를 늘려 제로섬게임의 한계를 최대한 확장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경제적 자유를 위해 정치-사회적 자유를 제한하는 경향을 가진 것이다.

 

미국이 이런 소모적 정책을 택한 것은 파탄의 순간까지 강자의 입장에서 단물을 뽑아먹을 수 있는 이점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약자의 입장에 가깝고 긴장 완화의 과제를 가지고 있는 한국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부적절한 정책이다.

 

그런 부적절한 정책을 '경제 살리기'라고 다수 유권자가 밀어주었으니, 경제는 살리든지 죽이든지 맘대로 하시라. 환율 시장 개입, 몰상식하게 해도 괜찮다. 시장화도 좋고 민영화도 좋고 대운하도 좋다. 그러나 제발 대북관계만은 근시안적인 장삿속으로 망쳐놓지 말기를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뉴라이트 비판> 163-164쪽)

 

2008년 가을에 쓴 글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몇 달 지나는 동안 온 국민이 걱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걱정은 대개 경제 분야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 내게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이 더 큰 걱정이었다.

 

역사를 공부하고 민족에 대한 생각을 유별나게 많이 하는 사람인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미시적 지표보다 구체화되어 나타나지 않는 거시적 지표가 상황을 더 크게 좌우할 수 있다. 체제의 구조적 변화가 일어날 때 특히 그렇다. 위 글 쓸 당시의 금융위기가 그런 변화기의 표시였고, 그 변화기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변화기에는 남북관계의 추이가 경제 분야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복리를 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에 그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2010년 봄 천안함 침몰 후 이명박 정권이 확실한 근거도 없이 책임을 북한에 뒤집어씌우며 남북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을 때 걱정이 더 깊어졌다. 정부가 이 나라를 심각한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위 글의 취지를 부연한 "경제는 말아먹어도 좋다. 제발 전쟁만은…"을 이 자리에 올렸다.

 

몇 달 후 연평도 포격 사태가 벌어지기는 했지만 실제로 전쟁을 걱정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전쟁을 걱정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전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남북관계 악화가 얼마나 큰 손실을 우리 사회에 가져오고 있는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이 손실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으로 이종석의 <통일을 보는 눈>(개마고원 펴냄)을 권한다.)

 

그런 걱정 속에서 당시 한나라당의 유력 지도자 박근혜 의원이 제기한 ‘신뢰 프로세스’는 반가운 방향이었다. 남북관계 악화를 막기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신뢰’였고, 복잡한 상황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일거에 해결을 보려는 성급함보다 차분히 나아가는 ‘프로세스’의 자세가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 무렵까지 ‘경제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은 많이 허물어졌지만, 대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신뢰 프로세스’라는 그럴싸한 구호 때문만이 아니라 원래부터 적어도 ‘안보’ 의식에 있어서는 전임 대통령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인물로 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 취임을 전후해 북한의 도발적 행동이 격화된 끝에 ‘전쟁’ 얘기까지 거침없이 나오고 개성공단이 폐쇄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북한이 왜 저럴까? 아무런 특별한 정보에 접하지 못하는 일개 서생이라도 상식 차원에서 짐작이 갈 듯 하다.

 

북한 당국자들도 박 대통령이 말해온 ‘신뢰 프로세스’에 기대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지난 5년간 북한 당국자들에게 긴장 완화와 남북관계 개선을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철벽처럼 가로막고 있다가 겨우 비켜선 이제, 남북관계의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당연히 들 것이다.

 

과연 어떤 변화가 가능할지 그들은 살펴보고 있는 단계다. 박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가 진정한 ‘신뢰’를 향한 제대로 된 ‘프로세스’라면 그들은 그에 맞춰 남북관계에 대한 태도와 입장을 결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신뢰 프로세스’가 그럴싸한 말로 꾸민 입에 발린 구호로만 보인다면 그들의 태도와 입장은 그에 따라 바뀔 것이다.

 

새 정부 출범 후 두 달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 ‘신뢰 프로세스’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있다. 외교-안보 라인의 면면은 전 정권과 크게 다른 인상을 보여주지 않고, 전 정권에서 엄청나게 키워놓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다. 오히려 스텔스기가 날아왔느니 어쨌느니, 전보다 더 강화되었다는 선전이 요란하다. 그리고 국방장관 등 관계 요인들의 호전적 발언도 전 정권 때 그대로다.

 

진행 중인 군사훈련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인지 검색해 보니 민주민생평화통일주권연대 홈페이지의 “전쟁을 부르는 2013 키리졸브-독수리 훈련”(http://newssh.net/841)이 눈에 띈다. 그 단체의 목적에 따라 이 훈련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데 다소의 과장이 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제시된 데이터는 조작된 것 같지 않다. “방어 위주의 정례적 연습”이라는 표방에 비해서는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성격의 훈련임이 분명해 보인다. “정례적”이라고 하는데, 지금 규모의 훈련이 정례적으로 된 것은 2008년 이후의 일이다.

 

북한 입장에 좀 서서 생각해 보자. (그렇게 하는 것 자체를 ‘종북주의’로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2007년까지 북한이 보다 평화로운 남북관계를 추구한 자세는 분명하다. 그런데 2008년부터 해마다 근 두 달에 걸친 세계 최대 규모의 군사훈련이 자기네를 겨냥하고 벌어져 왔다. 거기서 받는 실제적 위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기분 나쁠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엄청난 비용을 들여 자기네를 위협하고 있는 상대에게 대화 상대로서 신뢰를 가질 수 있겠는가?

 

이런 위협 아래서는 합작사업인 개성공단 운영에도 지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교통이나 통신 조건에 약간의 제약을 가한 것은 ‘경고’의 의미다. 그런데 그 경고에 대해 남한 국방장관이 “인질” 운운 하며 ‘전쟁 불사’의 결의를 보인 것은 적반하장이었다. 전 정권에서 물려받은 장관이 새 정권 분위기를 파악 못해서 한 소리일까, 아니면 새 정권도 마찬가지 분위기라서 자연스럽게 나온 소리일까, 헷갈리는 상황이다.

 

개성공단 폐쇄는 이걸 분명히 해달라는 요구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합작 사업을 놓고 남한 국방장관이 마치 인질용 사업인 것처럼 말하니, “그건 오해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인질 될 위험 있다는 분들을 모두 돌려보내겠습니다.” 하는 셈이다. 남한에서 국방장관보다 더 큰 책임을 가진 사람이 “그건 국방장관 개인의 오해였습니다. 오해를 좋아하는 그 사람은 집에 돌려보냈으니까 신경 쓸 필요 없이 공단 도로 엽시다. 그런 헛소리가 우리 정부 일각에서 나온 것을 사과합니다.” 하는 것이 공단 재개를 위한 바른 길 아닐까?

 

어떤 프로세스든 프로세스가 펼쳐지기 위해서는 실마리가 필요하다. 대통령 교체는 실마리 잡아내기에 좋은 기회다. 평소 같으면 크게 생색 안 날 조그만 제스처라도 이런 기회에 보여주면 ‘신뢰 프로세스’를 작동시킬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전 정권에서 계획해 놓은 군사훈련을 계획대로 실시하더라도, 규모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는 성의를 보여준다면 상대방이 그 의미를 크게 받아들이고 관계개선의 희망을 키울 수 있다.

 

기회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놓치면 손해가 되는 것이다. 북한을 괜히 적대시하는 인물들이 요직에 그대로 포진해 있고, 그들이 도발적 발언을 멋대로 하는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지고, 전 정권에서 키워놓은 군사훈련이 똑같이 시행될 뿐 아니라 오히려 전보다 훈련 강도가 높아진 것을 자랑해 댄다면, 새 대통령 취임 초의 좋은 기회는 지나가버릴 것이다. 그 뒤 어느 때고 ‘신뢰 프로세스’를 느닷없이 시작하자고 한다면 생뚱맞아 할 것이다. “저 사람들 말로만 ‘신뢰’, ‘신뢰’ 하는데, 진짜 믿을 수 있나?”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