꽂힌 거 같아요. "노무현의 대한민국"!

 

 

애초에 이 선생과의 메일을 블로그에 올리기로 한 게 좀 후회될 때가 있네요. 아무래도 여러분 눈을 의식하니까 어느 정도 이상 생각이 정리된 뒤에야 쓸 수 있고,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이 쌓여버리는 폐단이 더러 느껴져요. 이번에도 한 번 틈 내서 샌디에고 학회 소감에 관한 내 소감을 묶어서 얘기하고 싶었는데, 내 생각 먼저 털어놓고 싶은 게 떠올라 버렸어요.

 

엊그제 사랑방엔 마침 어버이날이기도 해서 참석이 적었기 때문에 아주 속닥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죠. 그렇게 앉아 있다가 (어쩌다 얘기가 그리로 흐르게 되었는지도 벌써 가물가물한데...) “노무현의 대한민국”이란 생각이 떠올랐어요.

 

내가 노 씨를 좋아하는 것은 무엇보다 기질이 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깊은 공감을 느낀 일이 많았죠.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잘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이 많이 들리지만, 현실에서 큰 역할을 맡은 정치인으로는 특출하게 강한 역사의식을 가진 인물이 분명합니다.

 

기질은 통하면서도 성장 배경과 활동방식에는 대조적인 면이 많았죠. 그런 대상을 잡아서 그가 한국 사회와 역사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는지 내 마음속에 재구성해 보며, 그가 걸어간 길을 걷게 된 근거를 설명해 보는 것이 좋은 일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개 필부로서 그와 공감하는 포인트들을 떠올리고, 다시 역사학자의 위치로 돌아와 그 포인트들에 대한 논평을 가하는 작업으로 생각해 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느낀 데는 얄팍한 감상도 있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는 담론 방식으로는 잘 포착되지 않는 큰 뜻과 힘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역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사람들 중에 내가 보기에는 노 씨만큼 좋은 가르침의 재료를 남겨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4년이 지난 이제 그의 가르침을 되새길 길이 흐려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내 생각을 서술해 보겠다는 뜻을 세운 바에, 일방적 독백보다 그분과 대화하는 자세를 세워보는 편이 내 생각을 다듬는 데도 좋고 그 서술을 읽는 사람들의 감흥을 북돋워 주는 데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 시대의 키워드가 된 그의 이름으로부터 사람들이 많은 생각을 풀어나갈 길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시대를 겪은 역사학도로서 좋은 일거리가 되겠지요.

 

이 구상을 떠올리자 바로 생각난 것이 이정우 교수와 유시민 선생이죠. 노 씨의 생각을 전해주는 기록 자료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거니와, 이-유 두 분은 기록 자료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보완해 줄 만한 대화의 기억도 많이 가진 분들이니까요.

 

이 교수는 내 책 추천사에서 “모시고 지낸 나보다 만나본 적도 없는 김 아무개가 그분의 시대정신을 더 잘 이해하는 것 같을 때도 있다”고까지 말해준 친구이니 도와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유 선생도 대략 같은 반응을 기대하는 터인데, 오늘 점심에 마침 약속을 해놓았던 참이라 만나서 얘기를 했죠. 기대 이상으로 반가워하네요.

 

노 씨 서거 후 하도 꼭지가 돌아서, 하던 일 접어놓고 “역사 속의 참여정부”란 가제로 작업 하나를 구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노 씨 모습 부각시키는 일에 달려드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몇 달 구상만 하다가 “나 같은 사람까지 안 나서도 더 잘할 사람들 많구나.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나 해야지.” 생각하고 “망국의 역사”로 돌아왔죠. 반년가량 시간을 허비했다고 좀 아깝다는 생각도 했는데, “노무현의 대한민국”! 떠올리고 보니까 손오공이 까불어도 부처님 손바닥 안인가? 하는 생각도...

 

떠올린 지 며칠 되지 않는 설익은 생각이지만, 끌리는 힘을 아주 강하게 느낍니다. 지난 연말 역시 꼭지가 좀 돈 상태에서 “대한민국 실록” 생각을 떠올렸었는데, 꼭지를 좀 가라앉히면서 생각을 차분하게 하려고 그 동안 노력해 왔어요. (내 꼭지는 왜 이렇게 잘 돌까? 의사 상담이 필요한 거 아닐까?) 그러다가 이 생각이 떠오르면서 다시 마음속에 격랑이 일어나는데, 여러 가지 지표가 그럴싸하게 보이기는 해요. 좀 가라앉히도록 노력은 물론 하겠지만 결국 뛰어들 공산이 크게 느껴집니다.

 

내 하고 싶은 얘기 대충 쏟아놓았으니, 이 선생 얘기에도 좀 신경 쓰는 척하겠습니다. 의암의 <우주문답> 재미있었다고요? 재미있죠. 나는 그 작품을 ‘표현의 혁명’으로 봅니다. 조선시대 선비님들, 말로는 그런 재미있는 생각 많이들 나누며 지냈을 것 같아요. 글로 표현할 일이 없었겠죠. 그러다 의암 시대에 와서 터져 나온 게 아닐지.

 

내 블로그에 “유연산” 카테고리가 있죠. <우주문답>의 느낌을 그대로 풍겨준 친구입니다. 의암의 문중 손자죠. 의암이 문중 손자는 잘 둔 셈입니다. (이 친구는 성폭행이나 성추행 능력은 없는 친군데, 성희롱에는 대가였어요. 이 친구한테 배운 노래 하나 가사를 보내드리고 싶은데, 블로그에 올릴 메일이라 참습니다. 노래 부르는 거 싫어하면서도 부르라 그러면 싫다는 적 없어요. 좋아라 나서서 이 노래를 부르면 더 불러달라는 얘기가 절대 안 나오죠.)

 

백 선생이 말했다는 “비판적 중국학의 긴장감” 얘기는 메일 받을 때부터 마음에 걸려 있습니다. 이 선생한테 메일 보낼 생각 할 때마다 그 생각이 떠오르죠.

 

학문에 비판적 자세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비판적 자세만으로 되는 걸까요? 그것도 근대적 환상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유 선생이랑 얘기할 때, “노무현의 대한민국” 같은 일이 참 좋은 일이 될 수 있다고 보는데 자기는 달려들 수 없다고 하더군요. 직접 걸려 있는 입장 때문에. 그러면서 내게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겠다고 하더군요. 나는 그런 필요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격하게 공감하는 점 격하게 표현하겠다고. 표현할 공감 다 표현한 뒤에 전문가 입장으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각도에서 비판할 것을 덧붙이겠다고. 덧붙일 내용의 알맹이에 자신 있는 만큼 그 앞쪽에서는 거리감 없이 마음대로 끌어안겠다고.

 

세상에 어떤 일이 사랑 없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학문도 예외일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실체가 있은 뒤에 비판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실체는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으로 학문을 하는 입장에서는 표현하기 힘들 수 있죠. 하지만 나야 걸릴 거 있나요? 그래도 이 선생께는 충고 한 마디 드립니다: “애들은 따라 하지 마세요~”

 

[본의 아니게 이병한 선생께 실례가 되었습니다. 어제 보낸 메일이 배달되지 못했다는 쪽지가 오고, 다시 메일을 시도해도 배달이 안 되고 있군요.]

 

Posted by 문천

 

국련위원단 감시하의 남조선 총선거는 5월 10일 상오 7시를 기하여 일제히 투표를 개시하였다. 회고컨대 남조선선거가 시행되기까지에는 허다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즉 1946·7 양년에 걸쳐 열린 미소공위 결렬에 이어 미국이 조선 문제를 국련에 상정한 결과 소련 관하 북조선의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가능지역의 선거를 결정 추진시켜 금반 선거가 시행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남조선 선거는 지지 반대의 쌍주곡을 울리면서 지지 측의 선거추진과 반대 측의 남북협상 추진 및 이에 관한 미소 양당국의 상반한 태도 등 복잡 미묘한 국내외 정세리에 당초부터 자유분위기 조성문제를 둘러싼 논의를 일으키면서 마침내 전유권자의 95퍼센트 선거기록과 909명의 입후보 난립을 보이면서 호불호 간에 10일을 맞이하여 투표는 일제히 개시되었다. 준순(逡巡)을 거듭하여 온 남조선정세도 한 바퀴 돌게 되어 다난성을 보이는 조선독립사의 일면의 새로운 일선이 그어져 가고 있다. 그리하여 또한 투표일을 전후한 당국의 비상경계 중에도 경향각지에서 습격 피살사건이 발생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큰 지장 없이 선거실시는 완료되었다.

 

국련 감시와 미군정 하에 시행되는 선거이지만 조선으로서는 처음 있는 남조선 총선거의 날인 5월 10일 서울시내는 한적한 시골거리처럼 하루종일 잠잠한 분위기 속에 투표의 날을 보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혹은 학교 혹은 무슨 사무실 등에 설비된 시내 약 730투표소에는 투표하려 나온 아낙네 노인 젊은이가 한 줄로 늘어서서 한 사람씩 순번대로 투표지를 받아가지고 간격소에 들어가 기입한 다음 투표함에 넣고 나오곤 하였다. 주위에는 장총을 들은 경관, 곤봉을 들은 향보단원들이 길목마다 지켜 엄격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관공서 각 학교, 상점, 음식점, 극장 기타 일체 신문사외의 사회기관은 설날처럼 문을 꼭꼭 닫치고 나다니는 길손도 미군 자동차 외에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고 무덥게 흐리터분한 하늘에 미군 비행기의 폭음소리가 한갖 고요한 기분을 자아내었다. 이리하여 이날 새벽에 장충단 마포 등 투표구에 수류탄사건이 발생하여 범인 2명이 사살당하고 수명이 체포되었다는 벽보가 나붙어 길손들이 지나가다 들여다보는 정경 이외는 큰 일 없이 투표를 끝마친 것이다. 그 후 즉시로 투표지는 시내 선거구 한 개소씩 모두 12개소의 개표장으로 한데 가져다 모아 무장경관 70명, 사복경관 30명, 향보단원 등 물샐 틈 없는 경비진 속에서 개표가 시작된 것이다. 오늘 아침 무렵에는 당선대세가 거의 결정된 선거구도 있을 터이고 한창 투표 숫자의 격전이 벌어져 고비를 달리고 있는 곳도 있을 것이거니와 시내는 늦어도 12일 남조선 전 구역은 15일까지 당선상황이 알려질 것으로 보인다.

 

1948년 5월 11일자 <조선일보>에 그려진 선거 풍경이다. 휴일로 지정된 날인데도 사람들의 움직임이 매우 적었던 모양이다. 서울시내에도 장총 든 경찰과 곤봉 든 향보단이 길목마다 지키고 있다니 시골 분위기는 불문가지다. 사람들은 움츠려 있었다.

 

우려와 달리 난폭한 선거방해 움직임은 극히 적었던 모양이다. 5월 11일자 <경향신문>에는 서울 시내의 두 개 사건이 보도되었다.

 

“시내 2처에 괴한이 폭거”

 

조선민족이면 누구나 다 경축해야 할 총선거일인 10일은 평온리에 선거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일부 도배들이 준동하여 선거를 방해하고 치안을 문란케 하기 위하여 온갖 행동을 기도하고 있었다. 즉 동일 오전 중 현재 수도청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 동일 오전 7시경 서울시내 장충동2가 모 선거투표사무소에 권총을 가진 괴한 수 명이 침입하여 경비 중이던 향보단원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발에 부상을 입히고 도주하는 것을 경관에게 체포되어 반항하다가 경관에게 사살당함.

 

* 동일 오전 9시경 시내 중구 광희동 투표사무소 근처에 괴한 6명이 수류탄을 던져 건물 1동이 파괴되고 1명이 폭상을 당하였는데 전기 범인 6명 중 1명은 사살되고 5명은 포박당했다.

 

5월 12일자 <동아일보> 머리기사 “총선거의 성과 민족 전도를 축복”에는 “정권협상배는 맹성하라”란 부제가 달려 있었다. 기자는 “서울시내에 있어서도 투표장을 습격하여 수류탄을 던지는 등 그야말로 최후의 발악”을 하는 가운데도 “투표성과가 90%를 돌파하였다는 것을 보면 우리 겨레가 얼마나 총선거를 통한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였던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라며 민의의 소재가 확인되었다고 강조한다.

 

서울시내의 11일 정오 현재 개표성적을 보면 무효 대략 3% 내외라 한다. 문맹자가 많은 실정을 아울러 생각한다면 선거 열의가 왕성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등록이 얼마나 자유분위기에서 실시되었으며 좌익층과 중간층이 야합하여 추진하였던 남북협상이 얼마나 민의를 무시한 정권협상배의 망동이었던가를 알 수 있다.

 

같은 날 <동아일보>의 “남조선 선거 대성공” 기사에는 유엔 조위 시리아대표 무길의 말이 이렇게 인용되어 있다.

 

“10일의 남조선 선거는 성공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투표장을 순시하였는데 투표는 극히 원활하고 조직적이었다. 나는 남조선 단독선거에 반대하였으나 만약 원칙이 수락된다면 이는 극히 양호한 거사이다.”

 

정확한 것인지 매우 의심스러운 인용이다. 유엔위원단의 공보 제59호가 5월 13일 발표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제59호 공보의 내용은 위원단의 다른 공보처럼 신문에 게재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튿날 위원단 회의에서는 공보 제59호에 실린 임시의장 무길의 소감이 무길 개인의 소감일 뿐이며 유엔위원단 전체의 소감이 아니라고 발표했다.

 

“공보 59호 조위 의견 아니다. 무길 씨의 사적 견해에 불과”

 

14일 조위에서는 오전 중에 전체회의를 열고 13일 발표된 공보 제59호에 관하여 토의한 후 공보 제63호를 발표하기로 되었다. 원래 제59호는 조위에서 채택된 것이 아니며 각 대표들은 이 공보가 발표된 것을 13일 밤 비로소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공보 중에는 2천만 조선의 열렬한 애국심과 피로써 획득한 전고무비한 5월 10일 총선거 결과에 대한 모욕적 표현이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위에 대한 3천만 조선인의 열화와 같은 기대를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어구도 발견되었던 고로 한 번 그것이 세간에 발표되자 관계당국은 물론 민간 측에서도 일시 수습키 어려운 파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러한 사태가 즉시 조위에 반영되어 공보 제63호가 발표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보 제63호에는 무길 씨가 기자단에게 공보 제59호는 자기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백히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을 부언하여 두는 바이다. 그리고 조위는 14일 오후 3시 반부터 주요위원회를 열고 이승만 박사와 협의하였으며 동 4시 반부터는 김성수 씨와 협의하였다 한다.

 

밑줄 친 문장은 맥락을 알 수 없다. 아무튼 무길이 임시 의장으로서 공보 제59호를 발표하면서 “총선거 결과에 대한 모욕적 표현”과 “조선인의 기대를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어구”가 담긴 소감을 실었기 때문에 관계당국과 민간 측이 격한 파란을 일으켰고 위원단의 다른 위원들이 요구해서 위원단 전체 의견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도대체 무길이 무슨 소리를 한 것일까?

 

<한국사데이타베이스>의 “자료대한민국사”에는 “경향신문, 동아일보 1948년 5월 14일, 15일” 기사라며 공보 제59호 내용이 실려 있다. 실제로 두 날짜 두 신문에는 실려 있지 않은 내용이다. (5월 14일자 <경향신문> “선거 성적 양호, 무 씨 공보59로 발표” 기사 중에는 공보 내용이 “그 내용은 선거는 대체로 양호하였다고 평하였다.”라고만 되어 있다.) 자료 표시에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그 내용은 공보 제59호가 맞다고 보고 옮겨놓는다.

 

◊ 공보 59호

 

조위는 언론집회 및 출판의 기본적 자유가 존중되고 보장되었다고 확인할 때 남조선에 있어서의 선거를 감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4월 29일 조위는 여사한 업무의 달성에 대한 군 당국의 조력과 호의를 만족히 여기어 미주둔군사령관에 의하여 선언된 선거를 감시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금번 선거는 조선의 남북을 포함치 않으며 현재 정당 및 단체의 전부 또는 대부분을 포함치 않았다는 의미에서 전국적인 선거는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조위 전 대표는 조선 문제에 관한 관심에 있어서 언제나 만장일치였지만 금번 선거를 찬양하는 데 있어서는 그들 간에 어떠한 의견의 상이가 있다.

 

대표들 중에는 금번 선거의 결과가 조선 문제의 해결에 공헌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대표도 있으며 그들이 설사 이러한 의심을 포회치 않는다 하드라도 그들은 남조선에 있어서의 선거를 전국적인 것으로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이 용어를 약간 주저하기는 하나 금번 선거를 ‘결정으로 우익적인 선거’라고 부르고자 한다.

 

조위의 다른 대표들은 조위의 업적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하지는 않으나 금번 선거는 조선의 통일과 주권을 향한 일보의 전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확실히 금번 선거를 우익적 선거라고 부르기를 싫어하며 그렇다 하드래도 비 우익 분자 또는 선거를 반대하는 인민 수효는 극소수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다른 대표들은 사태에 대한 최종적인 의견을 표명할 준비가 아직도 되어 있지 않다.

 

금번 선거 진행 중 몇몇 대표는 선거법 위반과 본 위원회의 건의사항 위반 등을 지적한 바 있다. 열거하면 우리들(본 위원단 감시원)은 투표소 내와 그 주위에서 향보단원을 발견한 일이 있다. 향보단은 경찰에 의하여 조직된 것이며 안녕질서를 유지함에 있어 경찰을 방조하는 것이다. 향보단은 투표자의 자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한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투표소에서는 투표장 안에 경관이 들어와 있은 적도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청년단원(혹자는 제복까지 착용)이 투표소 내와 그 주위를 빙돌고 있었다. 우리들 중의 혹자는 몇 개 투표소에 있어 비밀투표가 여행(勵行)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대체로 보아 금반 선거는 원활히 그리고 조직적으로 또한 능률적으로 수행된 것이다. 투표수자가 2·3시간 내에 고율에 이르렀다는 사실 자체가 금반 선거의 능률성을 증시(證示)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능률성을 찬양함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신중한 보류가 필요함을 나는 명기하는 바이다. 여하튼 이번 감시결과에 대한 최종적 결론은 후일에 내릴 터이며 총회에 대한 보고서에 포함시킬 것이다.

 

선거감시는 본위원단 사명의 1 계제를 완결하였다는 사실을 본위원단은 잘 알고 있다. 본 위원단은 상금 이번 피선된 의원들이 즉시 국민정부를 수정하도록 그들에게 권고를 발한 일은 없다. 그리고 각 피선 의원들은 조선의 통일을 위하여 정부수립에 있어 선거를 반대하던 분자들의 지지를 얻도록 진력할 것을 기망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본 위원단은 선거감시를 본 위원단 업무의 명확한 단계라고 앞서 규정하였으며 총회에 대한 보고서의 최초의 부분은 선거에 관한 것을 내용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동 보고서 작성에만 노력을 집중하기 위하여 동 보고서의 작성은 조선 외의 어떠한 장소에서 하기로 하였다. 그 기간 중에 있어서는 서울에 연락반을 잔류시키고 일본을 보고서 작성지로 선정하였던바 맥아더 장군은 본위원단의 방일을 거부하여 왔다. 연이나 본 위원단은 가급적 속히 조선 외에서 보고서의 제1편을 작성한다는 결정을 재확인하는 바이다. 맥아더 장군의 과반 성명에 대해서 본 위원단은 연합국사령부에 대하여 동 보고서 작성에 심심 관심하여 줄 것을 요청 중에 있다.

 

이 내용은 일개 위원 입장이 아니라 임시 의장 입장에서 쓴 것이다. 자기가 선거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부정적으로 보는 위원들도 있고 긍정적으로 보는 위원들도 있으므로 최종적 결론은 후일에 내릴 것이라고 했다.

 

경찰과 향보단이 무장을 하고 투표소를 비롯한 곳곳에 깔려 있었다는 사실은 감시단이 투표소를 방문하지 않고 경찰 발표와 언론 보도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해친다고 보는 위원들이 일부 있다는 얘기도 임시 의장이 해서는 안 된단 말인가? 5월 14일 위원단 전체회의에서 공보 제59호가 실질적으로 취소되는 사태만 보더라도 유엔위원단의 ‘선거감시’가 어느 수준이었는지 대충 알아볼 수 있다.

 

제주도 외의 도별 투표율은 경기도와 경상북도의 90퍼센트에서 강원도의 98퍼센트까지 모두 90퍼센트를 넘겼다. 숫자로는 정말 성공적인 선거다. 그런데 3월 29일부터 4월 9일까지 12일간의 선거인 등록 때 등록률이 80퍼센트에 미치지 못했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뭔가 이상하다.

 

선거인 등록 때 자발적 등록이 극히 적었다는 사실은 4월 10일자 일기에 소개한 한국여론협회의 4월 12일 조사에 극명하게 나타난다. 서울의 등록률은 92.3퍼센트였는데 조사대상자 1,262명 중 26퍼센트인 328명이 “등록 안 하였소.” 대답했다니, 등록이 되어 있는 사람 중에도 상당수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게다가 등록했다고 대답한 934명 중 91퍼센트인 850명이 등록을 강요당했다고 응답했다 한다. 12일간의 등록기간에 등록 대상자의 80퍼센트 등록시키기가 그토록 어려웠는데, 단 하루의 투표날에 90퍼센트 이상의 선거인이 투표장에 갔다?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두 개만이 무효가 되었다. 제주도의 3개 선거구 중 남제주군은 86.6퍼센트 투표율로 유효로 인정되었고, 북제주군의 두 개 선거구는 많은 투표소의 선거 시행에 실패해 무효가 되었다. 십여 년 전 4-3취재반과 가까이 지낼 때, 왜 사태 초기에 북군보다 남군의 상황이 더 안정되어 있었을까 물어보았더니 누군가가 웃으며 대답하던 기억이 난다. “남군에는 경찰관 인원이 적어서 아니었을까요?”

 

남제주군 선거 역시 엄밀히 따지면 유효를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4-3취재반이 채집한 증언 중에 당시 24세였던 남제주군 안덕면 상천리 고대성의 증언이 있다.

 

“5-10선거가 되니 경비대에서 10명가량 나와 마을의 경비를 섰습니다. 투표소는 향사가 없어서 따로 마련 못하고 이장 집에서 투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장과 리서기인 나, 그리고 마을유지 한 분 등 세 사람이 마을 유권자들의 투표용지에 모두 투표를 했습니다. 한 후보에게 몰표가 간 것은 사실입니다. 투표함은 경비대에서 갖고 갔습니다. 시국이 시국인 만치 이에 항의하는 주민도 없었습니다.” (<4-3은 말한다 2> 236쪽)

 

상천리 투표함도 개표소에 도착해서 86.6퍼센트 투표율의 일익을 담당했다. 이것이 남제주군만의 일이었을까? 억지로 끌어올린 선거인 등록률이 80퍼센트에 못 미치는데 투표율이 전국적으로 90퍼센트를 넘었다면 상천리에서 있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 전국 도처에서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문천

 

1. 이 사회에 엉터리 보수가 너무 많다.

 

한민족은 20세기 전반기 대부분을 자기 국가 없이 지냈고 후반기를 두 개의 국가를 갖고 지냈다. 국가 없던 시절을 식민지시대라 하여 나쁘게 보는 데는 이의가 거의 없다. (뉴라이트 때문에 “거의”란 단어를 넣어야 한다.) 한편 국가가 두 개인 시기를 놓고는 의견이 꽤 갈라져 나오는데, 의견 차이가 정치적 입장과 관련되는 경우가 많다.

 

진보는 지금 현실보다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내자는 입장이고 보수는 지금 현실의 좋은 점을 지키자는 입장이다. 둘 다 존중받아야 할 입장이다. 지금 한국인에게 현실 국가체제로 주어져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놓고 진보 쪽에서는 바꿀 필요가 있는 나쁜 점을 더 열심히 들춰보고 보수 쪽에서는 지켜야 할 좋은 점을 더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진보 중에 엉터리 진보가 있고 보수 중에 엉터리 보수가 있다. 멀쩡한 현실을 놓고 근거 없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것이 엉터리 진보다. 유토피아의 환상을 품은 사람들이 혁명의 필요성을 강변하기 위해 인간사회의 자연스러운 현상까지 제도의 결함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많다. 인간의 본성을 벗어나는 이상적 기준에 집착해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고생을 시킬 위험이 있는 노선이다.

 

한편 자칭 보수 중에는 소수집단의 이익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화를 가로막으려 드는 엉터리 보수가 있다. 필요한 범위를 판단하는 기준에는 주관이 작용할 여지가 있는 것이므로 필요한 변화의 범위를 작게 보는 엄격한 보수라 해서 꼭 엉터리라 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변화의 필요를 이해관계 때문에 잡아떼는 부류가 문제다. ‘수구꼴통’이라고 불린다.

 

나는 보수주의자다. 내 정치적 입장을 곰곰이 살펴본 결과 5년 전에 내린 결론이고, 지금까지 내내 생각해도 틀림없는 판단이다. 굳이 덧붙인다면 진보적 주장도 진지하게 검토하려고 노력하는 유연한 보수가 되고 싶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엉터리 보수의 힘이 너무 강하다. 건강한 사회에 꼭 필요한 자기반성을 가로막는 엉터리 보수의 힘은 냉전시대에 쌓아놓은 반공주의 보루를 버리기는커녕 아직까지도 보강-확장 공사에 매달려 있다. 대한민국 역사의 어두운 면을 들춰내기만 하면 ‘빨갱이’, ‘종북’으로 몰아붙이는 백색테러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테러의 주체가 국가이던 상황을 벗어났다는 상황만이 다행이다.

 

엉터리 보수를 대표하는 뉴라이트가 식민지시대 미화와 찬양에 나선 데서 나는 큰 가르침을 얻었다. 식민지 조선과 독립 대한민국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는 가르침이다. 대한민국 역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식민지 역사를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식민지 역사의 어두운 면이 대한민국 역사에도 많이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식민지시대와 대한민국시대의 전환점인 해방공간을 치밀하게 들여다볼 생각이 들었다. 1945년 8월부터 1948년 8월까지 3년간 당시 사람들이 겪은 상황을 2010년 8월에서 2013년 8월까지 65년의 시차를 두고 추체험의 작업에 착수해서 이제 마무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 작업을 통해 무엇보다 ‘해방’과 ‘독립’의 진정한 의미에 생각을 모아 왔다.

 

 

2. ‘해방’의 뜻은 액면대로가 아니었다.

 

‘해방’이란 말에서 나는 나비의 탈바꿈을 떠올린다. 애벌레의 허물을 벗고 날개를 펼쳐 꽃에서 꽃으로 날아다니며 나비로서의 존재를 한껏 구현하게 되는 그 계기. 우리 민족의 ‘해방’도 그런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나비의 탈바꿈은 내면의 많은 고통과 노력이 쌓여 상황을 바꿀 만한 임계점에 도달해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해방은 연합국 승리의 한 부산물일 뿐이었고, 조선민족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온” 것이었고(함석헌), “자다가 떡시루를 받은 격”이었으며(박헌영), 어느 시인은 “일본이 망할 줄 생각도 못해서” 협력했다고(서정주) 한다.

 

연합국 승리로 일본 지배가 끝난 대신 연합국 군대가 조선에 진주해서 조선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과 소련은 조선에 군대를 보내면서 조선 해방과 독립을 도와주기 위해 진주한다고 했다. 그 착한 말씀이 어디까지 진심이었을까? 감춰진 속셈이 없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먼저 연합국 승리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선과 악의 싸움, 정의와 불의 사이의 싸움이라는 다각적 세뇌교육을 온 세상 아이들이 수십 년간 받아 왔다. 그러나 연합국과 추축국의 실제 관계는 그렇게 명쾌한 것이 아니었다. 양측 도덕성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기본적으로는 각자의 국익을 위한 투쟁이었다. 정말로 도덕적 문제가 그렇게 명쾌한 것이었다면 ‘최후의 승자’ 미국과 소련이 전쟁 발발 후 2년이나 기다려서 자기네가 공격받은 뒤에야 참전했겠는가?

 

굳이 비교한다면 추축국의 범죄성이 더 심했고, 연합국 승리가 인류 전체를 위해 다행스러운 면이 없지는 않다. 추축국들이 제국주의 후발국으로서 자원 확보에 뒤져 있기 때문에 과격한 정책을 취한 데서 범죄성의 차이가 생긴 것이다. 연합국이 승리 후 ‘인간성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개념을 서둘러 전범재판에 적용한 것은 이 차이를 부각시킴으로써 자기네 승리를 도덕적 승리로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1941년 8월 대서양헌장에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것도 연합국 사정 때문이었다. 영국은 미국의 참전 설득에 부심하고 있었는데 식민지체제 해체를 지향하는 민족자결주의는 세계질서의 주도권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기는 원리였다. 조선 ‘해방’을 규정한 1943년 11월의 카이로선언도 대서양헌장의 연장선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카이로선언의 실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직전에 나온 모스크바선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스트리아 독립을 약속한 연합국 외상회담의 선언이었다. 오스트리아는 2차대전 발발 직전 국민투표를 통해 자발적으로 독일에 합병되었다.(영화 Sound of Music에 나오는 것 같은 합병 반대자는 국민투표에서 1%도 안 되었다.) 이 시점에서 나온 조선과 오스트리아 독립 약속에는 일본제국과 나치독일의 결속력 약화를 위한 전략적 고려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모스크바선언에는 “오스트리아인 자신의 독립 노력이 있어야 이 선언이 유효할 것”이라는 노골적인 부대조항까지 붙어 있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의 항일운동은 연합국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준에 이르지 못한 채로 종전을 맞았다. 김구가 일본 항복을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라고 한탄한 것도 스스로 해방의 주체가 되지 못한 문제를 가리킨 것이다. 승리자인 미군과 소련군이 조선에 진주하며 명목상으로는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돕는다고 했지만, 전쟁 중이건 전쟁 후건 자기네 국익을 조선인의 복리에 앞세우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다.

 

 

3. 미국은 조선에서 소련보다 불리한 입장이었다.

 

미군과 소련군은 3년 넘게 조선의 남북에 주둔해 있다가 각자에게 의존적인 정부를 세워놓은 뒤에 철수했다. 두 정부는 서로를 ‘괴뢰’라고 비난하다가 전쟁을 치렀고, 전쟁 후에도 오랫동안 냉전의 첨병 노릇을 했다. 미-소 대결을 배경으로 태어난 두 국가는 미-소 대결이 끝나고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결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나의 민족이 대결하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서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은 전쟁을 비롯한 온갖 비극을 불러오는 길이라는 사실을 당시 조선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인이 자유롭게 미래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결코 분단건국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소련이 조선의 분단건국을 원한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과연 그렇다면 두 나라 중 어느 쪽에 진짜 큰 책임이 있는 것일까?

 

미국과 소련의 책임을 평면적으로 비교해 보면 미국 책임이 압도적으로 크다. 소련군은 진주하자마자 조선인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하며 일본인의 행정권과 경찰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겨주어 조선인의 자치에 맡기고 후원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반면 미군은 조선을 통치하던 총독부의 권력을 넘겨받아 스스로 통치자의 위치를 차지했다. 일본을 대신한 외세의 압력이 남북 양쪽에 모두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남에서 미국이 일본 역할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에 비하면 이북에서는 조선인의 자치가 발전해 나갔다.

 

이북에서는 1946년 2월 세워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행정의 주체가 되어 토지개혁 등 조선인이 선택하는 정책을 펼쳐나가게 되었다. 반면 이남에서는 총독부를 이어받은 군정청이 3년간 국가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군정청의 조선인 간부진을 묶어 ‘남조선임시과도정부’란 이름을 붙여 조선인 자치의 인상을 주려 했지만 진짜 정부가 못되었다. 조그만 일 하나라도 최종 결정권은 ‘고문’ 명목의 미군 군정관들이 쥐고 있었다. 임시과도정부의 수반이라는 민정장관부터가 미군 사령관과 군정장관의 명령을 받는 위치였다.

 

대의기구 구성에서도 같은 차이가 나타난다. 이북에서는 1946년 11월 선거를 통해 최고인민회의라는 의회를 만들었다. 이 선거를 흑백함선거니 뭐니 하면서 흠을 잡는 반공주의 선전과 교육을 우리는 받아왔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기본원칙이 잘 지켜진 선거였다. 반면 같은 때 남한에서 시행된 입법의원 선거는 비교가 안 되는 엉터리 선거였다. 입법의원이 민심을 조금이라도 반영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선거로 뽑힌 ‘민선’의원과 같은 수의 ‘관선’의원을 미군 사령관이 임명해야 했다.

 

소련이 착한 나라고 미국이 나쁜 나라라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 아니었다. 소련도 다른 곳에서(예를 들어 폴란드) 한 짓을 보면 미국보다 나을 것이 없다. 조선에서 소련의 태도가 미국보다 좋았던 것은 조선 사정이 소련 쪽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1947년 여름 이북을 여행한 미국 언론인 안나 루이스 스트롱의 기행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러시아인들은 좌익 정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좌익 정부를 세울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수천 명의 정치범들을 석방하면서 의미심장하게 “돌아가서 자유로이 조직하시오.”라고 말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제 치하에서 모든 정치지도자들은 일본에 봉사하거나 아니면 감옥으로 가야 했다. 친일파들이 사라지자 과거의 죄수들은 고향마을의 영웅이 되었다.

 

조선인을 억압한 일본의 경제정책이 자본주의 정책이었으므로 항일운동의 경제적 성향은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해방 당시 조선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토지개혁 등 넓은 범위의 사회주의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일체의 항일운동을 좌익으로 몰아붙이던 조선총독부의 관행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는 구분 없이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의 선택에 맡길 경우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가 선택받을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은 조선에서 강제적 수단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이 조선에 세우고 싶어 한 자본주의 체제는 조선의 상황에도 맞지 않고 민족주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강행하는 데 많은 비용을(경제원조와 국가폭력) 투입해도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대표적 비용이 경찰력이다. 미군정은 일제시대보다 갑절 이상의 경찰 인원을 이남 지역에 키워냈고 일제시대 경찰 경력자로 그 주축을 삼았다. 게다가 전국 경찰을 하나의 ‘국가경찰’로 조직함으로써 남조선을 ‘경찰국가’로 만들었다. 그래서 경찰의 횡포 때문에 민심이 더욱 이반하는 악순환의 수렁에 미국은 빠지게 되었다.

 

 

4. 분단건국의 일차적 책임은 미국에게 있었다.

 

조선의 ‘독립’ 방안을 놓고 두 나라가 취한 입장을 보더라도 미국 쪽 억지가 심했다. 카이로선언 이래 ‘선언’ 차원에 있던 조선 독립 방안을 전쟁이 끝난 후 구체화한 것이 1945년 12월의 모스크바외상회담이었다. 이 회담의 결정 중 크게 문제를 일으킨 것이 ‘신탁통치’ 조항이었다. 조선인의 임시과도정부를 만들어 5년간 또는 그보다 짧은 기간의 연합국 신탁통치를 거친 다음 완전한 독립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신탁통치에는 세 가지 의미가 들어있었다. 첫째 의미는 국가 운영의 경험 없이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는 민족에게 연수기간을 두는 셈이다. 국가기구의 작동이나 국제사회의 역할에 아무 문제가 없을 때까지 선진국의 도움과 감독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은 비록 근대국가 운영 경험은 없더라도 근세까지 민족국가의 오랜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연수기간이 꼭 필요한지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신탁통치의 또 하나 의미는 전쟁 책임에 대한 가벼운 징벌이었다. 오스트리아가 대표적인 경우다. 나치의 압제 때문에 본의 아니게 전쟁에 휘말려들었다는 변명이 공식적으로는 통용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책임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국의 감독기간을 둔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10년의 신탁통치를 거쳐 1955년에 완전한 주권을 회복했다.

 

신탁통치의 마지막 의미는 연합국의 전리품이었다. 전쟁 승리에 공헌하고 전후 세계에서 실력을 가진 나라들이 추축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을 자기네 영향권(sphere of influence)으로 보유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의 경우에는 이 의미가 가장 뚜렷했다.

 

모스크바회담에서 조선에 대해 미국이 장기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한 데 대해 소련이 반대하여 ‘최고 5년간’으로 절충되었다. 소련은 연합국의 간섭 없이 조선의 진로를 조선인의 결정에 맡겨두더라도 자기네에게 유리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탁통치에 반대했던 것이다.

 

모스크바결정의 실행은 미-소 두 점령군 사이의 미소공동위원회에 맡겨졌다. 미소공위는 1946년 봄과 1947년 여름 두 차례 열렸는데, 두 나라 사이의 이견을 좁히지 못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견의 초점은 이남의 반탁세력을 협의대상으로 인정하느냐 여부였다. 미소공위 실패의 책임은 어느 쪽이 크다고 잘라 말하기 어렵다.

 

정작 문제는 미소공위 실패에 대한 대응책에서 일어났다. 미국은 조선 문제를 자기가 표결에 유리한 유엔으로 가져갔다.(미국의 압도적 경제 우위가 유엔 표결에 유리했다.) 이것은 강대국의 협조체제로 세계질서를 유지하는 전통적 방식을 서둘러 포기하고 양 진영이 대결하는 냉전체제를 촉진하는 조치였다. 유엔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한 조선 정부 수립을 결정했는데, 이것은 미국에 유리한 조건에서 선거를 치른다는 것을 의미했다.

 

소련은 유엔 결정을 무시하고 조기 철군과 조선인의 자주적 결정을 주장했다. 해방 직후의 조선 상황도 사회주의가 우세했는데, 그 후 2년 동안 이북에서는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 수립을 위한 준비가 계속 진행되어 왔다. 반면 이남에서는 친일세력을 중심으로 한 극우파가 미군정을 배경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어서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었다. 두 나라의 직접 작용을 없앨 경우 이북의 친소세력이 이남의 친미세력보다 우위에 설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에 소련은 미국에게 함께 조선을 떠나자고 주장한 것이다.

 

유엔에서는 미국이 원하는 ‘가능지역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소련과 이북 당국이 유엔위원단의 이북 지역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가능지역’이란 바로 미국 점령하의 이남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48년 5월 10일 선거가 이남에서 시행되었고, 선출된 제헌의회의 손으로 석 달 후 대한민국정부가 세워졌다. 몇 주일 후 이북에서는 이미 준비되어 있던 정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출범했다. 그리고 2년이 안 되어 남북 간에 전면전이 벌어졌다.

 

 

5. 결국은 우리의 책임을 생각해야 한다.

 

미국은 원래부터 소련에게 적대적인 태도가 강했다. 소련 건국 초기에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도 모두 소련을 적대했지만 1920년대가 지나가는 동안 소련을 승인하고 국교를 맺었다. 그런데 미국만은 끝까지 소련을 승인하지 않고 있다가 루즈벨트 대통령이 취임한 1933년에야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미국이 유럽국들에 비해 더 철저한 자유방임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 것이다.

 

대공황과 2차 대전을 배경으로 루즈벨트가 정부를 이끄는 동안은 미국이 소련과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45년 4월 루즈벨트가 죽고 곧이어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반공-반소 분위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종전 당시 미국 경제력은 전 세계를 압도하고 있었고 군사력도 핵폭탄 독점으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경제력과 군사력을 발판으로 미국의 ‘특별한 위상’을 확보하려는 욕망이 냉전체제 구축을 촉진했다.

 

2차 대전의 최대 승자인 미국과 소련의 영향권 설정은 도처에서 충돌을 일으켰는데 소련은 대체로 방어적 입장이었고, 특히 아시아 방면에서는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지켰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승리를 거둘 자생적 공산주의세력조차 지원하지 않았다. 조선에 대해서도 소련은 종전 전의 약속에만 매달린 반면, 미국은 우월한 실력을 근거로 더 많은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소련을 압박했다.

 

종전 전 연합국 간의 약속은 조선을 하나의 국가로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그 약속을 먼저 등진 것이 미국이므로 분단건국의 일차적 책임은 미국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소련에게도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압박에 대한 소련의 대응 방향은 어떻게든 자기 몫을 지키겠다는 것이었으니, 솔로몬 왕에게 맡겼다면 둘 다 조선의 가짜 어머니라고 판결했을 것이다. 손 하나로는 손뼉이 쳐지지 않는다.

 

미국의 책임, 소련의 책임을 따지기 전에 세계와 조선의 상황 속에 이미 문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식민지화의 직접 원인은 일본의 침략이었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이 세계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 있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차 대전 종전 시점에서도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준비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해방’이 진정한 해방이 되지 못한 근본적 원인은 여기에 있었다. 20세기 중반의 세계는 외세의 압력에 대항할 자세를 갖추지 않은 민족에게까지 민족국가 건설을 허용할 만큼 편안한 곳이 아니었다.

 

조선인의 준비가 부족했다는 사실은 해방공간에서 조선인들의 온갖 행동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소련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경향의 극좌와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추세의 극우가 힘을 장악했다. 민족국가 건설의 원리가 되어야 할 민족주의 정신은 대다수 조선인의 마음속에 있으면서도 미군과 소련군의 존재를 배경으로 하는 극우와 극좌의 힘에 억눌려 현실에 작용하지 못했다. 을사5적보다 더 흉악한 민족반역자들이 이 시대를 횡행했는데도 그들이 지탄받지 않는 상황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과연 한국인은 2010년대의 세계에서 하나의 민족으로 당당한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식민지로 전락하던 백 년 전에 비해 한국인의 힘은 많이 자라나 있고 세계 사정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져 있다. 그런데도 그 자세가 당당하지 못하다. 민족분단 문제도 제 손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 내의 갈등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외부세력에게 이용당하는 존재로 남아있고 세계평화에 공헌보다 위협을 더 많이 제공하는 존재로 남아있다.

 

병을 알아야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처럼 불건강한 역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60여 년 전 이 민족이 외세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했던 것은 어떤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때문이었는가? 당시 이 민족의 약점을 드러냈던 인물들이 어떤 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되어야 하는지, 엄정한 인식이 필요하다.

 

 

 

5월말로 잡혀 있는 강연 초고입니다. "해방일기" 작업 끝나면 원고 대량생산은 얼마동안 멈추고 강연 같은 활동에 치중하며 지내야겠다 생각하는 참에 초청이 들어오기에 덥썩 물었죠. 일반인을 위한 강연으로 더 잘하기 위해 생각할 점 짚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