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사랑방 모임에서 처음 이 구상을 떠올리고 이틀 후 이병한 님 앞 메일에 담은 생각을 블로그에 올렸다. 막 떠오른 생각에 마음이 너무 강하게 끌리기 때문에 오히려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어, 겉으로 내놓기보다 속으로 되씹으면서 보름을 지냈다. 그 동안 생각도 꽤 분명해지고, 의견을 청한 몇 분의 반응도 고무적이어서 그 작업을 실행할 공산이 갈수록 크게 느껴진다. 이제 그 구상을 드러내 놓고 정리해 나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무적인 반응 중 이 작업이 좋은 '평전'을 낳을 수 있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사실 나는 '전기'와 구분되는 '평전'이란 장르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기문학이 빈약한 우리 사회에는 '전기'답지 못한 '전기'가 횡행하기 때문에 좀 '제대로 된 전기'를 지향하자는 뜻이 '평전'이란 말에 실린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좋은 평전을 바라볼 수 있겠다는 호의적 의견을 나는 '제대로 된 전기'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전기답지 못한 전기의 일반적 문제는 인물 자체에만 매달려 그 삶이 어떤 맥락 속에 이뤄진 것인지 밝혀주지 못하는 것이다. 맥락이 없으면 비판이 불가능하다. 대상 인물을 영웅시한다든가, 일방적 관점만을 담은 글이 '전기'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를 휩끌어 왔다.
대상 인물의 탐구에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이 속한 사회와 시대에 대한 탐구가 병행되어야 제대로 된 전기가 가능하다. 그런데 내 구상의 기본 목적은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사회와 시대를 밝히는 데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노무현은 자기 시대를 보여주는 하나의 관찰도구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서양 전기문학의 모범적 개념이다. 이 작업이 잘 이뤄지면 형식은 전기이면서 내용은 시대사인 성과를 얻을 것이다.
시대사 정리라는 목적을 위해 효과적 방법을 찾을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해방일기>에서 나는 저인망식 방법을 썼다. 내가 엮어낼 수 있는 한 의미 있는 사실을 몽땅 훑어낸 것이다. 그 성과의 가치를 인정해 줄 독자들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지적 생산활동에 활용할(예컨대 교육에 참고로 삼으려는 역사교사) 입장이 아니고는 그 많은 분량을 읽는 자체로 만족을 충분히 얻을 독자들이 많을 수 없다.
3년의 해방공간을 다루는 <해방일기>보다 더 넓은 범위를 다루기 위해서는 주관을 더 내세울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내 주관 하나만을 일방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적당한 인물을 내세워 내 주관과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구성을 입체화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런 목적에서 노무현이 적합한 인물로 보인다. 같은 사회를 같은 시대에 살아온 사람으로서 나는 그의 관점에 전체적으로 강한 공감을 느낀다. 그런데 갑남을녀 차원에서 공감을 느끼는 층위와 별도로, 역사학도 입장에서는 그와 내가 공감하는 관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층위가 있다.
이 두 개의 층위가 서술에서도 구분되어 나타날 것이다. 그가 중학생 때, 세 살 아래인 내가 초등학생 때 겪은 4-19 무렵부터는 이 사회가 겪은 일들을 그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지, 내 경험을 참고로 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나는 크게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났지만 아주 딴 세상은 아니다. 그가 자기 환경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지내왔을지, 상당한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그의 정치활동을 보며 반가워하고 기뻐하던 내 마음을 이 층위에서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의 층위를 바탕으로 비판적 검토의 층위를 풀어내는 것이 이 작업의 궁극적 목적이다. 바탕 층위는 지금까지 내가 지켜 온 세계관으로 이뤄진다. 그 세계관에 나는 보통 넘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 왔다. 그런데 지금은 더 나은 세계관을 키우고 싶은 마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지금까지의 세계관으로는 마음이 편치 못하기 때문이다. 더 넓고 깊은 세계관을 가져야 현실 속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마음 편하게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사회, 같은 시대를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필요를 느끼고 있다. 나 자신에게 생각의 길을 열어주는 노력이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럴 수 있다면 내 삶의 보람도 커질 것 같다. 이런 필요를 느끼는 분들의 대표로 노무현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와 생각을 함께하는 지점에서 출발, 함께 키워가고 싶은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나 내 도움을 직접 받지 못하지만, 그에게 공감하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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