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건국 저지를 위한 남북협상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오늘날의 한국인은 대개 김구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김구가 남북협상 운동에 나선 것은 1948년 1월말 유엔위원단에 의견을 제출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 남북협상 운동을 추진해 온 것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간파였다.

 

해방공간의 정치노선을 ‘좌익’, ‘우익’, ‘극좌’, ‘극우’ 등의 용어로 표현하는 데는 정확성에 문제가 있다. 그 동안 <해방일기>에서도 이런 용어를 쓴 기준에 스스로 문제를 느끼는 대목이 꽤 있다. 한 차례 생각을 정리해 본다.

 

일단 좌익과 우익의 구분에 있어서는, 민족주의 과제를 앞세우는 입장을 우익, 사회경제 과제를 앞세우는 입장을 좌익으로 본다. 해방 조선 사회에는 양쪽 과제가 다 주어져 있었으므로 원론적 의미의 좌익과 우익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없었다. 여운형을 비롯한 많은 좌익 인사들도 민족주의 과제를 존중했고 김규식, 안재홍 등 대부분 민족주의자들도 사회경제 과제를 인정했다. 좌우합작이 가능하고, 또 바람직했던 풍토였다.

 

그런데 이 합작 가능성을 부정하는 두 개의 세력이 있었다. 두 세력이 각각 우익과 좌익을 표방했으므로 극우와 극좌라 부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용어의 정확성에 문제가 생긴다. 극우의 경우 이승만과 한민당의 민족주의 표방은 좌익을 배척하는 수단이었을 뿐, 그들이 실제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 아니다. 해방 전의 활동도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것이었고, 해방 후 추구한 노선도 반민족적인 것이었다. 극좌 경우는 원론적 좌익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념에서 일탈하는 패권주의 성향이 있었다.

 

이러한 배신과 일탈이 널리 일어난 것은 외세에 의존하는 상황 때문이었다. 이남에서는 과거의 친일파가 미군정의 힘에 의지해 민족국가 수립을 회피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한편 좌익에서는 소련의 지원을 발판으로 좌익 내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파벌투쟁이 남북 양쪽에서 일어났다.

 

1945년 말의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나온 ‘신탁통치’를 둘러싼 극좌와 극우의 극한대립이 조선 정치계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이남에서 이를 거부하는 좌우 온건파가 1946년 여름부터 좌우합작에 나섰다. 여기 나선 사람들을 ‘중간파’라 부르는데, 민족주의를 거부하거나 경시하는 극우-극좌와 대비시킨다면 이 중간파가 곧 진정한 민족주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1946년 여름 이후 이뤄진 극우-극좌-중간파의 틀에 맞춰지지 않는 기형적 위치에 김구는 서 있었다. 한민당이 친일파 지주정당이라는 사실은 1946년 10월 합작 7원칙 거부를 계기로 여지없이 확인되었다. 이승만이 민족국가 건설에 뜻이 없다는 사실은 1946년 6월 ‘정읍 발언’ 이후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는 김구가 어떻게 그들과 1947년 말까지 보조를 함께하고 있을 수 있었을까?

 

김구는 1947년 말까지도 이승만을 받들어주면서 그 대가로 조직을 넘겨받으려고 꾸준히 노력했다. 그 노력의 좌절이 확실해진 뒤에야 남북협상 노선으로 돌아섰다. 돌아선 이후의 행적과 면모가 후세에 강렬하게 전해져 한국 민족주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지만 귀국 후 2년간, 1947년 말까지의 행적에는 민족주의자로서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이 많다. 이 점은 지금 더 따지기보다 지금부터 그가 걷는 길을 살펴보며 계속 생각해 보겠다.

 

1947년 가을 미소공위 결렬과 조선 문제 유엔 상정으로 분단건국의 기미가 짙어지자 중간파는 남북협상을 바라보며 민족자주연맹(민련)을 결성했다. 민련 결성에서 눈에 띄는 점은 좌익 인사들을 전면에서 배제한 것이다. 이남에서 극우세력의(지금부터 ‘극우’는 분단건국 추진세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분단건국 노선에 저항하는 남북협상 노선에는 중간파와 좌익이 모이고 있었는데, 민련은 좌익의 민전과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써 혼선을 피하고 극우세력의 모함을(남북협상파는 좌익의 꼭두각시라는) 차단하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민련에 뒤이어 김구의 한독당이 남북협상 노선에 가담함으로써 범위가 확장된 우익 남북협상파는 평양 회의를 앞둔 1948년 4월 3일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통협)를 결성했다. 김규식과 김구 사이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이견이 있었지만 이 협의회를 매개로 공조관계를 조율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평양 회의에서 어느 정도 일관성 있는 우익의 입장을 제시할 수 있었다.

 

평양에서 돌아온 후 열흘이 안 되어 벌어진 송전 중단 사태는 남북협상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김구의 마곡사 정양여행 얘기도 그 충격 속에서 나왔다. 마곡사 행을 취소한 것은 남북협상파의 동지들이 만류한 결과로 알려졌다. 그러자 남북협상파의 진용 정비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독립 열의 불변 - 출발 전 김구 씨 담”

 

김구 씨는 불일간 마곡사로 출발하게 된 데 대하여 작 19일 요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나는 평양에서 귀환한 후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여 당분간 휴양이 필요하다는 내방 인사들의 권고를 받았으며 원래 나와 인연이 깊은 공주 마곡사에서도 불탑의 축조가 완성된 후 수차 참여를 요청하여 왔으므로 잠시 휴양하기 위하여 마곡사 행을 결의하였다. 마곡사에 갔다가 서울에 일이 있을 때에는 어느 때든지 돌아올 예정이다.

 

우리는 지금 전 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조국의 독립주권을 전취하여야 될 혁명 시기에 있는 것이요 정권 쟁취가 목표가 아니니 내가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말은 나에게 부적절한 용어이다. 남북통일을 추진시키려는 나의 입장은 변치 않으며 독립 달성을 기원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0일)

 

“김구 씨 마곡사 행 중지”

 

과반 김구 씨는 평양으로부터 귀경한 이래 건강 상태가 당분간 정양이 필요함을 느끼고 마곡사 행을 결의한 바 있었는데 평양회담에 참석하였던 중간파 인사들의 권고로 마곡사 행을 중지하였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3일)

 

“통일 추진 문제 - 위원회를 설치?”

 

최근 민련 한독 민독당에서는 빈번히 상집(常執)을 개최하여 주목을 끌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전기 각 상집에서는 주로 남북통일 추진 문제를 논의하고 5-10선거를 합법적으로 반대하기 위하여 모종의 위원회 설치에 관하여 언급되었다 하는데 앞으로 동 위원회의 발전 여하가 주목된다. 한편 마곡사로 정양차 여행하기로 되었던 김구 씨는 돌연 20일 이를 중지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3일)

 

같은 남북협상 노선이라도 좌익과 우익의 길이 갈라진다는 사실이 차츰 드러나고 있었다. 남로당의 강경투쟁 노선은 애초부터 분명한 것이었는데, 사로당 계열 등 좌익 비주류도 이제 남로당을 따라 강경투쟁 쪽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이것은 평양 회의 중 나타난 이북 지도부의 노선에 추종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단선반대투위 어디로 가나 - 돌격하는 5당캄파와 완보(緩步)하는 민련”

 

평양회담에 참석하였다가 소위 ‘단선단정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귀경한 각 정당 사회단체의 활동은 남로당의 무자비한 동포상잔을 제외하고는 과거 2주간 괄목할 만한 정치동향을 볼 수 없었으나 기실은 평양에서 결정한 투쟁방법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정중동의 내부알력을 양성하여 오던 중 드디어 그것이 표면화되었다.

 

즉 근민당에서는 지난 15, 18일 등 수차에 걸쳐 상위를 개최하고 주로 평양에서 결정하였던 소위 단선단정반대투쟁 방법에 대하여 토의하였다 하는데 동 문제를 싸고 구 인민당계와 구 사로파의 의견의 타협의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구 사로파에서 당의 헤게모니 장악을 의도하고 있다 하여 동당 소장파의 분격을 사고 있다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 원인은 저간 평양에서 개최된 전정회의[전 조선 정치회의]에 참석차 북행하였던 사로계 정백 씨는 북로당 책임자 앞에서 동당 부당수 장건상 씨는 친미파라고 무고한 일이 있었다는데 그것은 북로당 강진 씨를 통하여 자기의 정치생명을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장건상 씨는 이러한 오해를 북로당 측에 풀기 위하여 장시일 북조선에 체류하였다가 지난 17일 귀경한 것이라는데 장 씨의 귀경에 앞서 지난 15일 개최된 동당 상위에서 부위원장 이영 씨는 이번 반투의 전 지휘권을 자기가 북조선으로부터 임명받았다고 발표하고 합법적 투쟁을 하여 오던 근민당의 노선을 180도 전환시켜 비법투쟁에 유도하려고 책동한 사실이 폭로되어 근민당의 내분은 점차로 확대되어 갈 우려가 있다고 한다.

 

한편 평양 전정회의에서 결정한 동 투쟁을 비합법적으로 전개시키기 위하여 남로당 측은 물론이거니와 동당에 뇌동하고 있는 신진당 김충규 민주한독당 김일청 등 제씨도 근민당 정백 이영 씨 등과 호응하여 암약하고 있는데 지난 16일 전기 양 씨는 삼청장으로 김규식 박사를 방문하고 비합법투쟁 전개에 관한 김 박사의 의견을 타진하였다 한다.

 

그런데 민련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디까지나 민련으로서는 남로당 식 무자비한 투쟁에는 가담하지 않고 합법적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 하며 이를 토의하기 위하여 민련에서는 18, 19일 상집을 열었다 한다.

 

이상과 같이 전정이 요구하는 남조선선거 반대투쟁은 어디까지나 공산당 식 투쟁이나 김구 김규식 양 씨의 노선은 그러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므로 여기에 의견의 차이가 생긴 것이라 한다. 그리고 이에 관련하여 김구 씨의 마곡사 행도 단순한 정양차로만 볼 수 없는 일로, 김구 씨의 앞으로의 태도가 주목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1일)

 

이남 남북협상파가 평양에서 단선단정반대투위를 결성한 것은 이북 지도부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이북 지도부는 이 투위를 통해 이남의 단선반대 운동이 강경노선에 접근하기를 바란 것이었는데, 이남 협상파는 원만한 회담 진행을 위해 이를 받아들이고 대신 외군 철수시 무력 동원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송전을 중단하지 않겠다는 약속 등을 얻었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온 후 송전은 중단되고 좌익 인사들의 책동이 일어나는 상황에 직면하자 협상파 진용을 재정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5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언급된 위원회는 이 필요성에서 제기된 논의로 보인다.

이후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우익 남북협상파는 4월 초 결성했던 통협을 확대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민족주의자 대오 속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독립노농당(독로당) 대표로 국민의회 의장을 맡고 있던 유림의 반발에 관해 내가 찾을 수 있는 신문기사는 1948년 7월 3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된 것이 제일 빠른 것이다.

 

“3상 결정 옹호를 호소한 전제적 영도는 받기 싫다 - 통협 문제와 유림 씨 성명”

 

독로당 유림 위원장은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전국대표자대회가 연기된 데 대하여 2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통협 개조에 관한 민련 한독의 모든 조건에 나는 반대주장을 한 것이 하나도 없고 대회에서 반대 아니 할 약속도 했다. 대회 연기는 그들의 결정이요, 나는 기정(旣定)대로 하자고 애걸복걸을 했으나 그들은 최후의 태도로 거부했다. 회기가 박두했으므로 소집책임자로서는 부득이 연기 통지를 낸 것인데 사실을 왜곡 선전함은 자기 인격을 부인하는 행위이다. 그들이 동의하면 오늘이라도 대회를 소집해서 사무를 교체하고 깨끗이 손을 떼는 것이 나의 최대 희망임을 다시 한 번 말한다.”

 

그런데 서중석은 <우사 김규식의 생애와 사상 2> 242-243쪽에서 “유림은 양김이 평양에서 돌아온 후 남-북 협상에 참여한 인사들에 대하여 ‘공산당 제5열 운운’ 하면서 공격하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었다.”고 했다. 이 성명은 어디에 발표된 것인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정황으로 볼 때 유림의 반발이 5월 중에 이미 시작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재명은 해방공간의 민족주의자들을 소개한 책 <한국현대사의 비극>의 한 장을 유림에게 할애했는데 그 제목이 “고집불통의 우국혼(憂國魂)”이다. 민족주의자 중에는 고집불통이 많다. 고집불통이 아니고야 험난한 길을 다년간 걸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유림은 그중에서도 특히 심한 고집불통이라고 이재명은 본 것이다. 이 책 300쪽에 이렇게 나온다.

 

그 무렵 유림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반대운동의 전면에 나서서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그러한 땀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다. 이 협의회에서 유림은 홍명희 조소앙과 더불어 3인 간사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러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기본 입장의 일치에도 불구, 유림은 김구 김규식 등과는 달리 남북협상, 보다 정확히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38선을 베개 삼아 자결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4월 19일 아침 북행하려는 김구의 옷깃을 붙잡고 유림은 이렇게 말했다. “백범선생, 가지 마시오. 가시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백범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니까 백범선생이지, 신탁통치 찬성자들과 무엇을 협상하자는 것입니까? 그들의 속셈을 모르십니까?”

 

이 책 303-304쪽에 실린 신익희와의 대화는 1946년 8월 4일자 일기에서도 인용했던 것인데, 유림의 결벽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므로 다시 한 번 옮겨놓는다. 1946년 봄부터 김구를 배신하고 이승만을 받들며 승승장구하던 신익희가 1952년 5월의 부산정치파동 후 이승만과 결별하고 반 이승만 세력을 모으려 애쓸 때의 대화라고 한다.

 

신: 단주(旦洲, 유림의 아호), 우리는 과거 친한 동지 사이요,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생사를 같이 한 사이 아닌가? 이제부터 같이 힘을 합쳐 독재자의 손길에서 구민운동을 해보세.

 

유: 그래 해공(海公, 신익희의 아호)!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래 내가 이승만의 첩하고 타협을 해? 차라리 구국타협이라면 이승만하고 하지.

 

신: 단주, 과거는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용서하시게.

 

유: 과거는 동지고 팥죽이고 간에 기생첩과 같은 사람과 타협할 수 없네.

 

유림처럼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사심 없는 인물조차 통일건국의 길 위에서 김구, 김규식과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정의로운 길이 현실 속에서 승리를 거두기 어려운 하나의 문제를 읽을 수 있다. 불의가 존재할 때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함께 대항하려 한다. 그러나 그 대항 방법에 의견이 합치기 힘들다. 정의로운 사람들이 정의의 규정에 지나치게 엄격해서 서로를 용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거듭거듭 일어나는 현상이다.

 

 

Posted by 문천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행사는 교육-교양과 관광의 두 측면을 결합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교육-교양이 직업인 내게는 관광 측면에만 의미가 있다. 지난 주 통영학교 참가도 순수한 관광 목적이었다.

 

프레시안과 필자로서 관계를 맺은 것은 창간 때부터였고 그 관계가 거의 ‘전속’으로 발전한 지도 5년이 되어 간다. 그런데 언론 다음으로 프레시안의 중요 사업인 인문학습원 행사에 참가해 보는 것은 처음이다. 안내를 보니 내용도 매력적이고, 그래도 프레시안 사업이니까 단체관광에 익숙지 않은 내가 적응하기에 덜 어려울 것 같아서 신청했다.

 

새벽 6시 50분 집합에 맞춰 가는 것부터 엄두가 잘 나지 않는 일이었다. 아내가 끌고 가주는 덕분에 대화역에서 5시 반 첫 차를 타니 딱 맞춰서 도착이 된다. 좌석 배정을 보니 맨 앞줄이다. 제1호 신청이었다고 한다. 멀미에 약한 아내가 안도감을 보인다.

 

연휴 첫 날이라 길이 엄청 막히는데, 막히거나 말거나 골아 떨어졌다. 평소 기상시간 비슷하게 되어 잠을 깨니 대전을 지나고 있다. 잠시 후 고속도로를 갈아탄 후 행사가 시작되었다. 교장선생님 훈화 후 자기소개를 하라며 제1호 신청자에게 첫 마이크를 쥐어준다.

 

“이미옥 여사님과 그분께 묻어 사는 김기협입니다.” 첫 마디에 여러 분이 가벼운 웃음을 보여주기에 안심이 되어 마음 놓고 넉살을 떨었다. “저는 프레시안에 글을 연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독자님들이 다른 분 글로 눈길을 돌리기에 뭔가 보니 통영학교 교장선생님 글이더군요. 그분은 뭐로 그렇게 독자의 눈길을 끄는지 정찰을 위해 행사에 참가했습니다.” 청중 반응을 보니 좀 더 나가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제 주변에서 교장선생님 음식 얘기를 보고, 과연 저 표현대로 음식이 맛있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심스러우니 사실을 확인해 달라는 부탁도 있었습니다. 강 선생님 얘기 중 어디부터 뻥이고 어디까지 사실인지 오늘 내일 중에 확인하려 합니다.”

 

공감을 표하는 몇 분의 외침과 여러 분의 폭소 속에 자리에 앉으니 평소 내 주책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아내가 모처럼 칭찬 한 마디. “정말 말씀은 잘 하셔~”

 

학급 분위기 파악을 위해 다른 분들 자기소개를 귀 기울여 들었다. 대충 3분의 1가량은 강 교장의 섬학교나 통영학교 단골손님, 또 3분의 1가량은 인문학습원 단골손님, 우리 같은 초짜가 나머지 3분의 1가량. 어느 위치에서나 편안히 느낄 만한 좋은 구성 같다. 30대에서 60대까지 고른 분포에 20대도 몇 분 있다.

 

예정보다 두 시간 넘어 늦은 점심(대부분 멍게비빔밥)에서 시작해 저녁의 다찌집, 이튿날 아침의 졸복국과 점심의 해물한정식에 이르기까지, 음식에 대해 눈곱만큼도 불만 없다. 기대를 높이 잡았는데도 기대에 어긋남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다찌집의 미더덕. 40여 년 전에 딱 한 번 먹어본 거다. 부산의 고급 한정식집(준 요정급)에서였는데, 그때는 ‘참멍게’라고 소개받았던 것 같다. 멍게랑 같은 접시에 나오기에 “참멍게 참 오랜만이네.” 하고 먹었는데 그게 미더덕이란다. 해물탕에 들어가는 미더덕과는 개념이 다른 거라고 강 교장 글에서 읽었는데, 진짜 개념이 다르다. 평생 먹어본 음식 중 최고를 꼽으라면 꼽힐 자격 있는 놈이다.

 

좋은 음식을 요란 떨지 않고 대범하게 먹는다는 사실이 참 좋다. 허름한 집에서 격식 없이 먹으면 세상 사람들 다 즐기는 것 함께 즐기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다. 앞으로는 어디든 다닐 때 취향 비슷한 이들께 식당 정보를 미리 얻도록 애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먹는 얘기 그만해야겠다. 끝이 없겠다. 자는 얘기도 할 게 별로 없다. 기억을 못하니까. 근데 부부를 갈라 남자방, 여자방으로 수용하는 풍속은 좋은 줄 잘 모르겠다. 큰 방에 4인 이상 넣어 비용을 대폭 줄인다면 몰라도 3인실 갖고... 코를 너무 골까봐 불안해서 잠이 잠 같지 않다. 딱 하룻밤이니까 참아주지, 이틀 이상이면 안 되겠다.

 

남은 얘기는 돌아다닌 얘기다. 일단 산책코스는 참 좋다. 삼칭이 해변길은 아주 좋았고, 동피랑도 좋기는 한데 관광객이 너무 바글거려서 편하지는 못했다. 토요일 새벽에 한 시간 남짓 혼자 다닌 산보길도 괜찮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서피랑이었다. 공교롭게 동피랑과 서피랑을 비교해 보는 행운을 누렸다. 벽화운동 아니었다면 동피랑도 서피랑 비슷하게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깔고 벽화운동의 뜻을 음미할 수 있었다.

 

박경리기념관과 윤이상기념관, 양쪽 다 잘 되어 있다. 윤이상기념관에서는 큐레이터의 해설을 들었는데, 간결하고 요령 있는 해설도 좋았거니와 우리 팀의 듣는 태도가 아주 좋다. 큐레이터는 어느 관광단인지 모르는 채로 해설에 나섰는데, 그도 아주 흡족한 기색이었다. ‘문화관광’의 분위기가 여느 관광단과는 확실히 다르다.

 

강 교장의 역점 강의는 이순신공원과 세병관에서 있었다. 한산 앞바다를 내려다보는 이순신공원에서 판옥선의 역할과 학익진의 의미에 대한 해설은 아주 훌륭했다. 당시 일본의 조선술과 대포 기술이 조선보다 뒤진 점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보강했으면 하는 아쉬움 정도.

 

세병관에서 ‘洗兵’의 의미 해설이 통영학교 교육의 하이라이트라 하겠다. 무기를 씻는 뜻이 갈무리에 있는 것이니, 통제영의 존재 목적이 평화 추구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정말 큰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임진왜란 무렵 중국에서 활동하던 마테오 리치가 중국의 평화적 전통에 탄복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무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갈무리하는 것이다. 무기가 없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고 무기가 횡행하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무기가 갈무리되어 있는 상태, 그것이 참된 평화의 상태라는 것이다.

 

딱 하나 안 보는 편이 좋았겠다고 생각된 것은 옻칠미술관. 나는 잠깐 보고 일찍 나와서 버스기사와 얘기 나누며 한가로운 시간을 가졌다. 내가 왜 옻칠미술관을 싫어했는지는 나중에 생각나면 따로 정리해 보겠다. 얘기가 너무 길 수 있겠다.

 

생각나는 얘기 하나 버스기사에게 해준 것은 좀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그 아저씨 길 좁은 통영에서 진짜 고생 많았다. 해준 얘기는 30여 년 전 계명대학 있을 때 형님으로 대하던 피아노 교수와의 대화다.

 

피아노: 김 교수, 오늘 저녁 별 일 없으면 나랑 한 잔 하지.

 

역사: 형님, 오늘은 곤란합니다. 내일 아홉 시부터 강의가 있는데 준비가...

 

피아노: (짐짓 정색을 하고) 아니 김 교수! 당신은 학자라는 사람이 평소에 학문을 어떻게 하길래 강의 전날 밤마다 쩔쩔 매는 거요!

 

역사: (약이 올라서) 아니 형님, 나는 피아노 강의랑 역사 강의랑 똑같은 강의로 치는 게 이해가 안 가요. 역사 강의는 적어도 몇 십 명, 많으면 백여 명을 놓고 혼자 떠드는 중노동인데, 피아노 강의는 학생 한 명씩 불러들이고 앉아서 듣는 거잖아요?

 

피아노: (표정을 능글맞게 바꾸고) 야 기협아, 네 생각에 버스 운전이 더 힘드니, 택시 운전이 더 힘드니?

 

역사: (어리둥절해서) 그야 버스 운전이 힘들죠. 대형면허도 필요하고.

 

피아노: (회심의 미소를 띠고) 그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버스기사는 손님 몇 십 명 태우고도 저 맨날 다니는 길만 다녀. 근데 택시기사는 손님 하나 태우고도 가자는 골목골목 쫓아 들어가야 해. 어느 쪽이 더 힘드니?

 

역사: (어이를 상실하고) 네, 그러고 보니 택시 운전이 더 힘드네요. 피아노 강의도.

 

아내가 내게 “참 말씀은 잘 하셔~” 할 때가 종종 있다. 내가 생각해도 말 하나 잘해서 곤경을 넘기는 일이 적지 않다. 타고난 재간이 아니다. 초짜 시절 피아노 선생님께 저렇게 싸발리면서 조금씩 터득한 재간이다. 그 선생님, 피아노는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몰라도 내게 말재간 가르쳐준 솜씨는 정말 탁월하다.

 

 

무심코 찍었는데, 사진 나온 걸 보니 추장 자리에 내가 버티고 앉아 있다. 강 교장은 내게서 제일 멀리 피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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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국회 24일 소집? 군정과 선위 연일 협의”

 

전 조선 인구의 3분지2를 대표하고 앞으로 신생 조선국가의 모체가 될 사상 최초의 국회는 선거 종료와 더불어 이미 그 진용이 완비되어 이제 남은 문제로서는 조속한 시일 내에 국회를 소집하여 중앙정부 수립에 매진하는 것이다.

 

즉 바야흐로 탄생되는 우리 국회는 내외 인사의 다대한 관심 속에 시급한 소집이 요청되고 있는 이때에 국회선거위원회와 군정요로 측에서는 이 문제를 중심으로 연일 협의하고 있다 하며 권위 있는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오는 20일에 입법의원의 해산식을 거행한 후 24일에 정식 국회를 소집할 것으로 결정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국회 소집자는 국회의원 중에 최고연령자로 할 것이라 하며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승만 박사가 국회를 소집하게 될 것이며 이는 미군이 조선 문제에 대해서 간섭한다는 인상을 없애기 위함이라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8일)

 

5월 10일의 선거는 미군정이 시행한 것이었다. 선거를 관리한 국회선거위원회(국선위)는 미군정이 구성하고 임명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국회 소집도 당연히 미군정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 국회가 미군정이 만든 것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이북의 최고인민회의의 경우, 소군정으로부터 1946년 2월에 행정권을 넘겨받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11월에 시행된 선거를 준비하고 관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남의 이번 선거는 미군정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시행되었고, 선거법 제정 등 모든 준비와 선거관리가 미군정의 책임 하에 이뤄졌다. 조선인의 ‘자주적’ 선거로 내세우기에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소집이라도 자주적으로 하는 모양새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일에 언제나 제일 부지런한 것이 한민당이다. 5월 21일에 이런 담화가 나왔다.

 

“국회의원 2백 의석 중 본당원으로서 당선된 자는 우선 판명된 분만 하여도 84명에 달한다. 이는 동포의 열렬한 지지의 결과인 줄로 생각한다. 의회 소집에 관하여서는 딘 장관은 권한이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미-소 회담설에도 구애할 것이 없이 선거위원회의 알선 형식으로 6일 이내로 국회를 소집할 것을 희망한다.” (<조선일보> 1948년 5월 22일)

 

한민당으로 표시하고 등록한 후보 91명 중 당선자는 29명뿐이었다. 한민당의 처참한 패배였다. 그런데 84명이란 무슨 얘긴가?

 

5-10선거 때 한민당에 대한 인상이 너무 나빴기 때문에 당원이란 사실을 감추고 출마한 한민당원들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그 숫자가 55명씩이나 되었을 리는 없다. 한민당은 80여 명의 무소속 당선자 중에서 동조자를 찾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용양호박의 대결전 - 한민당, 무소속의원 흡수에 혈안 - 독촉은 제1당으로 군림 태세”

 

5-10선거의 결과로 무소속 83명, 독촉 56명, 한민당 29명, 대청 13명 등으로 장차 조직될 국회의 세력 구성이 거의 결정적으로 낙착되게 되어 선거 전에는 제1당이었던 한민당도 이제는 제2당으로 전락하고 독촉이 제1당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여짐에 따라 한민당에서는 당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무소속의원 흡수공작을 암암리에 개시하였다 한다.

 

즉 무소속 국회의원 중에는 김구, 김규식 양 씨의 노선을 추종하는 세력은 10명 내외에 불과하고 그밖의 의원은 노선 상으로는 한민당에 접근하고 있으나 아직 정식 당원이 아니므로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그런데 동 무소속이 독촉 산하에 참가하여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하여 정당으로 출현하게 되면 제1당으로서 한민당을 능가하게 될 우려가 없지 않으니 만치 한민당에서는 무소속의원을 흡수하고자 입당 종용에 암약하고 있다는데 결국 무소속의원이 끝까지 무소속으로 일관하게 되었는지, 또는 한민당의 무소속의원 흡수공작이 어느 정도 성공할 것인지?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8일)

 

독촉을 중심으로 한 이승만 세력은 한민당과 힘을 합쳐 5-10선거를 추진해 왔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이제는 경쟁관계로 돌아서고 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 시점에서 경쟁의 표면화를 가급적 억제하고 늦춤으로써 건국 과정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이 쪼개지지 않고 유지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5월 22일에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

 

“정당 조직은 정부 수립 후 - 국권회복이 급무”

 

총선거 완료를 계기로 국내 정국은 신국가 건설의 모체인 국회 소집과 더불어 이 국회 내의 세력 구성에 관심이 집중되어 가는 한편 영도권 장악을 위한 자파 세력 부식에 대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정치 동향과 아울러 한독계열을 중심으로 한 독촉 일부 대청(大靑) 등을 중심으로 이 박사를 최고책임자로 하는 제1당 조직이 대두되고 있으며 또한 일부에서 그 공작을 추진시키어 왔다 하는데 이승만 박사는 22일 정식으로 정당 조직은 국권을 완전히 회복한 후에 할 것이라고 지적하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금번 총선거의 대성공으로 세계의 칭찬을 받을 만치 되어서 지금 하루바삐 국회를 소집하고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전 민족의 유일한 희망이요 세계 우호국가의 기대하는 바이니 경향 각 단체나 개인을 막론하고 국권 회복에만 동일한 목적을 삼을 것인데 다소 정객의 사사 요망으로 정당을 조직한다 파벌을 부식한다는 등 모든 활약으로 낭설을 유포해서 민심을 현혹하여 정계를 소란케 하고 있으니 이것은 모든 유지 애국남녀의 통분히 생각할 일이다.

 

나는 자초(自初)로 정당운동을 정지하고 전 민족 통일로 국권을 먼저 회복하고 정부를 수립한 후에 정당을 조리 있게 조직하자는 주장을 하였던 바 불행히 나의 주장대로 되지 못하고 외국 신문 상에 4백여 정당이 분쟁한다는 수치로운 말이 선전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분개히 여길 줄 모르고 오직 당쟁을 힘써서 경향에 분규한 상태를 이룸으로 통일에 방해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냐. 이런 쓰라린 경험을 맛보고도 종시 정당투쟁으로만 일삼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전 민족의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일반 애국남녀는 다시 경성해서 정당이나 파별이나 지방열 등의 사상을 일체 포기하고 국회를 지지하는 유일한 정신으로 대동단결해서 국권회복과 정부수립에 공헌하여 주기 바란다. 정부 수립 후에는 국법으로나 민론으로나 2~3 정당을 세워서 국권과 민권을 동일히 보호해야 할 것이나 오늘 형편으로는 정당주의를 반대할지언정 새 정당을 더 만든다는 것은 결국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증언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3일)

 

이승만은 1945년 10월의 귀국 이래 파벌을 지양한다면서 정당 가입과 결성을 거부해 왔다. 그러면서 자기 지지 세력을 전국적으로 조직해서 실제로는 정당 역할을 하게 했고, 이번 선거에서는 독촉국민회가 그 역할을 맡았다. 초월적인 지도자의 위치에서 다른 정치인들과 같은 평면 위에서 경쟁하지 않는다는 자세였다.

 

5월 22일 40여 명 국회의원 당선자가 모였다. 독촉 회의실에서 모인 것으로 보아 독촉 중심의 모임으로 보이는데, 국회 개원을 준비한다는 목적이었다.

 

“국회에 대기 태세 - 준비 협의차 위원 12씨 선정”

 

국회 소집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22일 오후 3시부터 독촉국민회 회의실에서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이번 당선된 국회의원 45씨의 간담회를 개최하였는데 동 석상에서 “국회 소집을 자주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하여 준비해야겠다.”는 요지의 소감을 피력한 바 있었다. 그리고 동 석상에서 국회 소집에 관한 문제를 논의한 결과 내 27일경 중앙청 회의실에서 국회 소집에 대한 국회의원 사이의 준비 협의를 하기 위하여 준비위원 12명을 선출하였는데 서무에 이윤영 씨 통신에 김도연 씨 연락에 장면 씨가 각각 선출되었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5일)

 

이승만의 측근으로 당시 미국에 있던 올리버의 회고록에도 이 움직임이 언급되었다.

 

선거가 끝나고 대다수의 지지를 얻은 리 박사는 제헌국회에 제출할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 부하들로 구성된 위원회들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 다수의 한국 언론지들은 국회가 결정해야 할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리 박사가 자기 자신의 위원회를 너무 서둘러 조직하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 6월 1일 리 박사는 자기가 성급하게 “지배”하려 든다고 한 언론의 비판에 관해서 나에게 편지를 썼는데 자기의 순전한 목적은 “개원식 준비를 위한 것일 뿐 달리 무슨 의도가 있었겠는가.” 하면서 설명을 해주었다.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박일영 옮김, 계명사 펴냄) 234-235쪽)

 

“제헌국회에 제출할 문제들을 다루기 위해”란 대목이 눈길을 끈다. 위 <경향신문> 기사에는 이 모임이 국회 소집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모임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있던 올리버는 준비위원회의 조직 목적이 제헌국회 운영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민당이 숫자 늘리기에 급급한 상황일 때 이승만은 제헌국회 운영을 위한 조직 활동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대통령책임제 주장이 한민당의 내각책임제 주장을 누르게 되는 한 가지 이유가 이승만의 발 빠른 아젠다 준비에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서중석은 5-10선거 당선자가 이승만 지지 세력 60명 내외, 한민당 세력 60~70명, 그리고 “김규식-김구 노선을 걷는다고 볼 수 있는” 무소속구락부-소장파 세력 60명 내외로 3분되어 있었다고 보았다.(<우사 김규식 생애와 사상 2>(한울 펴냄) 239쪽) 세 세력 중 이승남 세력과 한민당 세력은 선거 직후부터 움직임을 보인 반면 무소속구락부가 6월 10일에야 결성된 것은 선거를 거부한 김구와 김규식이 국회와 관련된 활동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우익에서 활동하던 고려대 교수 변영태가 “만일 김구 씨와 그의 지지자들이 선거에 전력을 기울였다고 한다면, 그들이 국회를 지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현재에도 입법부 내에는 그의 동정자가 한민당보다 수적으로 더 많다.”고 당시 한 말을 강준만은 인용하며(<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2> 133쪽) “5-10선거 거부는 옳았는가?” 의문을 제기한다. 김구와 김규식이 외면한 제헌국회에 상당수의 ‘정의적(情誼的)’ 민족주의자들이 진출해서 반민특위 등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에 맞서는 활동을 벌이다가 탄압당하고 만 뒷일을 생각하면, 양김 씨가 나섰을 경우 제헌국회 구성이 민족주의자들에게 더 유리하게 되었을 가능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남북협상을 추구한 이남 민족주의자들에게 5-10선거 거부를 요구한 좌익 측, 특히 이북 지도부 주장의 문제점을 또한 생각지 않을 수 없다. 5-10선거가 실질적으로는 이남 단독선거였지만 명분상으로는 전 조선 총선거 중 ‘가능지역 선거’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이 거부해야 할 절대적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남북협상 성사를 위해서는 선거 거부를 통해 ‘진정성’을 표해야 했고, 그 결과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쉽게 해준 것이다.

 

그렇다면 이북 지도부의 남북협상에 대한 진정성은 어떤 것이었을까? 민족주의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통일건국을 지향하는 뜻도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북의 단독건국을 확실히 하고 나서 다음 단계에 이남을 끌어들인다는 ‘민주기지론’의 뜻도 있었을 것이다. 5월 14일의 송전 중단에서는 후자의 뜻이 읽힌다. 결국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것도 민주기지론의 궤도를 따른 것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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