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 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는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결의로 만들어진 총회의 부속기구였다. 조선에 총선거를 실시해서 신탁통치 없이 바로 독립국가를 세운다고 하는 결의에 붙여 그 과정을 맡을 위원단을 만든 것이다. 위원단은 아시아 4개국(중국, 인도, 필리핀, 시리아)과 다른 5개국(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프랑스, 엘살바도르, 우크라이나)으로 구성되었는데 우크라이나가 참여를 거부하여 나머지 8개국 대표로 운영되었다.

 

1948년 1월 초순 위원단이 조선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했으나 이북 당국과 소련군이 입경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 사정을 소총회에 보고하고 ‘가능지역의 선거’를 실시하라는 소총회의 권고를 받은 후(소총회는 조선위원단과 병립하는 총회 부속기구이기 때문에 위원단에 ‘지시’를 내릴 위치가 아니라 ‘협의’ 상대였다.) 3월 12일에 같은 방향의 결정을 내렸다.

 

소련은 당사자인 조선인의 의견 청취가 없었다는 등의 이유로 11월 14일의 총회 결정 자체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는데, 3월 12일 위원단 결정의 정당성에는 이와 다른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찬성 4표, 반대 2표, 기권 2표로 ‘과반수 찬성’이라 했는데, 8개국 기준으로 과반수란 얘기다. 총회가 구성한 기구이므로 총회 결정 아니면 축소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정이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3분의 2 찬성이 필요하다고 한 일부 대표의 주장도 상식적으로 타당한 것이다. 유엔위원단의 ‘가능지역 선거’ 결정은 회의에 출석한 대표들의 단순다수결로 원칙 없이 강행된 것이어서 소련의 거부 명분을 뒷받침해 주었다.

 

당시 유엔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것이었다고, 마치 유엔과 그 위원단이 미국의 꼭두각시였던 것처럼 흔히 생각하는데, 아직 냉전이 고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갓 만들어진 유엔에 대한 각국의 태도에는 아직 유동성이 컸다. 미국 제안의 무리한 점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소련 측이 소총회와 조선위원단을 무조건 거부하지 않고 참여해서 반대했다면 미국도 ‘가능지역 선거’보다는 훨씬 더 합리적인 제안을 내놓아야 했을 것이다.

 

2월 25일 소총회에서 미국대표 제섭이 결의안을 제출할 때의 제안 설명 일부를 그 날 일기에 옮겨놓았는데, 그중 한 대목을 다시 살펴본다.

 

조선위원단은 그들을 원조하고 있는 점령당국과 협의하여 선거법 및 그 세칙을 제정하며 적령자 선거권을 기초로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투표지역 혹은 지대를 규정하고 선거 일자를 결정하도록 그 조치를 강구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전 지역 혹은 지대에서 동시에 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감시하기 위하여는 동 위원단의 인원수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동 위원단은 수 지역 혹은 지대에서 순차로 선거를 감시할 것 즉 조선의 남부 도로부터 실시하여 그 도가 완료되면 점차로 북쪽으로 이동 실시하도록 한다는 것을 발표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위원단의 13개월간(1947년 12월에서 1948년 말까지) 비용으로 리 사무총장이 예산위원회에 51만 달러를 신청했다고 한다.(<동아일보> 1947년 11월 12일) 수십 명 인원이 1년간 조선에 체류하며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데 넉넉한 예산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제대로 된 선거감시를 위해서는 인력과 예산이 모두 부족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대표는 선거를 일시에 행하지 않고 지역을 나눠 차례로 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야 위원단의 선거감시가 가능하다고 각국 대표들이 납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방침은 제안 설명에만 나오고 결의안 자체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선거 시행의 주체인 미군정은 한꺼번에 시행할 것을 결정했다. 선거과정에서 실제 감시는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위원단 내부의 토론 내용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지만, 시리아대표를 비롯해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프랑스 대표가 엄격하고 비판적인 태도를 흔히 취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3월 12일의 위원단 결의에 선거의 자유분위기 보장이 확인되어야만 위원단이 선거감시에 나설 것이라는 부대조항이 있었는데, 이 조항에 입각해서 위원단이 선거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줄곧 있었던 모양이다. 위원단은 4월 28일에야 선거감시에 나서겠다는 최종결정을 내렸는데, 캐나다, 프랑스, 시리아 3국 대표가 이 표결에서 기권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29일)

 

결국 선거는 치러졌는데, 5월 10일 일기에서 설명한 것처럼 선거의 자유분위기와 공정성에 만족하지 못한 대표들이 위원단 안에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인 시리아대표 무길이 마침 임시의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위원단 공보 제59호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공보가 나간 이튿날 위원단 전체회의에서 그 내용을 무길의 개인 의견이라고 확정한 것은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미국을 지지하는 대표들에 의한 다수결의 횡포였다.

 

선거의 자유분위기에 대한 위원단의 판단은 총회에 제출할 보고서의 핵심 내용이었다. 위원단이 조선 밖으로 나가 보고서를 작성하기로 한 것은 미군정의 관할지역을 벗어나야 엄정한 작성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위원단은 도쿄에 가려고 했는데 맥아더가 반대했기 때문에 상하이에 가기로 했다. 그러자 맥아더가 입장을 뒤집어 도쿄로 오라고 했는데 위원단은 그냥 상하이로 갔다.

 

“상해서 보고서 작성 - 16일 의장 이하 일행 출국”

 

보고서 작성차 동경으로 향발하려는 국련조위에서는 맥아더사령관으로부터 이를 거절하였으므로 12일 개최된 제39차 전체회의에서 재론된 결과 중국 상해로 떠나기로 결정하고 14일 공보 제62호로서 다음과 같이 발표하다.

 

“1948년 5월 12일의 제39차 전체회의에서 보고는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1. 보고서 제1부를 준비하기 위하여 1948년 5월 18일 이내에 서울로부터 상해로 갈 것.

 

2. 6월 제1주에 서울에 귀환할 것과 모든 필요한 정보를 접수하기 위하여 부재기간 중 서울에 잔류할 대표로써 구성된 연락반을 임명할 것.

 

이 결정의 결과로서 위원단 및 사무국의 다음과 같은 구성들이 1948년 5월 16일에 상해로 가게 될 것이다. 즉 의장 S. H. 잭슨(호주), 유어만(중국), I. J. 바하둘 씽(인도), 야신 무길(시리아), P. J. 슈밀(비서장), 및 R. S. 하우스나(행정관)이다. 다른 대표들과 사무국원들도 수일 내에 이에 따를 것이다.”

 

“이제는 조위 측서 방일(訪日)을 거부 통지”

 

[서울 14일 발 UP 조선] 재일 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그의 방침을 변경하여 국제연합조선위원단의 동경 임시본부 설치를 허가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동 위원단은 최근 거행된 남조선 선거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코자 일본 외의 다른 곳으로 갈 터이라고 무길 의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 위원단은 맥아더 원수의 결정을 주목할 뿐이며 조선 내지 일본 외의 타국에서 보고서를 작성할 계획을 추진시킬 터이다. 본 위원단은 12일 밤 다른 곳으로 가기로 결정하였으며 따라서 맥아더 원수의 신(新) 성명이 이를 변경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5일)

 

맥아더가 애초에 왜 위원단 도쿄 체류를 반대했는지 명확한 설명은 찾지 못했다. 도쿄에 못 오게 하면 서울에서 보고서를 작성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미군정에 유리한 조건이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하지가 도쿄 행을 막아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에 협조적인 위원단 대표들도 이런 유치한 수준의 비협조에는 약이 올랐을 것이다. 결국 미군 지배가 아닌 상하이로 가게 되었으니 미국 쪽에서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훨씬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위원단은 상하이에 갔다가 6월 7일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6월 12일자 <동아일보>의 한 기사를 보면 미국의 요구를 위원단이 고분고분 따라주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좀 길지만 유엔위원단을 둘러싼 긴장된 분위기를 보여주는 기사이므로 전체를 옮겨놓는다.

 

“본 사명에 배치된 행동에 조선인 극도 분노 - 조위 동정에 UP 미 기자 신랄할 비평”

 

[서울 11日 UP특파원 로우퍼 발 조선] UN조선위원단은 남조선에 있어서 UN의 악평을 사고 있다. 8개국으로 구성된 동 위원단은 선거를 감시하고 조선을 독립에로 인도하기 위하여 지난 1월 당지에 도착한 것이다. 당지 남조선의 정객·실업가들은 위원단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나 이제 와서는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끼고 있다. 이들의 견해에 의하면 위원단은 원조차 내도한 체면이 중대시되는 이 마당에서 조선인의 감정을 손상하고 조선에 대한 불만을 표면화시켰다는 것이다. 1개월 전에 선출된 조선국회 내부에서는 이제 이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려 하고 있다.

 

조선에 있어서의 동 위원단의 주요 임무는 미국인과 조선인이 실시한 선거방법에 대하여 판결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위원단은 래 9월 21일 파리에서 UN총회가 개최되기까지 그 판결을 비밀에 부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조선국회 영도자들은 이에 격앙하고 있다. 그들은 신생국가가 여러 가지 원조를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UN의 이 중대결정을 알기까지 3개월을 고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대하여 이론이 있는 것이다.

 

위원단의 보고 작성 방식부터 조선인의 불만을 샀었다. 즉 위원단은 최초에 일본에서 보고서를 작성할 것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이 볼 때는 일본은 숙적이며 따라서 이는 굴욕적인 것이었다. 과연 맥아더장군은 위원단의 일본입국을 거절하였다. 그 결과 위원단은 급거 상해로 향하였는데 이에 따라 폐단이 발생하였다. 위원단이 상해에 체류하는 동안 최초의 국회가 소집되었다. 이는 모든 남조선인에게 있어서는 자랑스러운 순간이었으나 UN위원단은 그가 산출한 국회에 대하여 1명의 대표 내지 메시지 하나를 전달하는 것을 등한히 하였던 것이다. 오직 뒤에 남아있던 2명의 위원단원이 국회에서 사과의 논설을 한데 불과하였다. 그들은 그로서 이를 잊어버리려고 하였으나 조선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또한 2명의 위원단위원들이 당지에 도착하자마자 조사도 하기 전에 ‘경찰국가’·‘정치범’을 처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UN위원단원들은 또한 1일 20불씩의 비용을 타면서 숙박비로 미 상인과 동일히 1일 10불을 미군 측이 지불하는 것을 거절하고 교섭 끝에 이를 6불 이하로까지 내린 데 대하여도 조선인들은 속으로 웃고 있는 것이다.

 

또한 조선인 소식통이 전한 바에 의하면 세 UN위원단위원은 김구·김규식 씨에 대하여 소련군 점령하의 북조선에서 개최된 소련 측 주최의 회합에 행차할 것을 종용하였다고 한다. 조선인 지도자들을 이같이 인도하는 것은 UN대표들의 본분이 아닐 것이며 이는 동양인에게는 확실히 그들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으로 비치는 것이다. 또한 위원단의 ‘중립적’인 사무국은 UN본부에서보다 이곳의 UN활동이 상상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러한 사건이 축적하여 UN위원단은 상상 이상으로 체면을 손상하게 되었다.

 

조선인은 주로 UN과 UN위원단을 통하여 접촉하고 있느니만치 위원단에 대한 감정은 그대로 UN 전체에 적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는 레이크석세스의 한 두통꺼리가 될는지도 모른다.

 

숙박비 흥정까지 들먹이며 위원단의 위신을 깎아내리려고 광분하는 것이 일개 기자의 망발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 측이 원하는 결론을 서둘러 내려주지 않는 데 대한 전 방위 압력의 한 모퉁이로 이해된다.

 

6월 23일자 <동아일보>에는 귀국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대표 잭슨의 인터뷰기사가 실렸는데, 기사 끝머리에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5-10선거에 대한 부정적 의견이 위원단 내에서 지배적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었음을 기자의 질문에서 알아볼 수 있고, 인용된 잭슨의 대답에서는 위원단 내의 의견이 갈라져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씨는 위원단은 5대 3으로 5·10선거를 부인하였다 하는 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하여서는 확답을 회피하고 “어떠한 단체에 있어서라도 만장일치라는 것은 기대할 수 없으며 상이한 의견이 제출됨으로서 더욱 좋은 것이 나올 수도 있다.”라고만 대답하였다.

 

그런데 위원단은 6월 25일 회의에서 5-10선거의 공정성을 인정하는 결의문을 채택했고, 6월 30일 임시의장 미겔 바레 필리핀대표가 국회를 찾아가 이 결의문을 발표한 다음 7월 2일 공보 제70호를 발표했다. 7월 3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결의문 내용을 옮겨놓는다.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단은 1947년 11월 14일 국제연합총회에서 채택된 결의안의 제 조항에 의하여 1948년 5월 10일 조선 내의 가능한 지역에서 시행된 선거를 감시하였고 한국 내의 그 지역에 있어서는 상당한 정도의 자유분위기가 보장되어 언론 출판 및 집회의 자유와 민주주의적 권리가 인정되고 존중되었다는 사실을 이미 선언하였고 여차한 자유분위기가 선거기간 중 존재하였다는 감시반의 보고를 고려하고 본 위원단이 건의한 선거절차가 대체로 정확하게 적용된 것을 본 위원단으로서 만족히 생각하여 1948년 5월 10일의 선거결과는 한국 내의 가능한 지역에 있어서 전 유권자의 자유의사가 표시되고 전 지역 내의 주민 수는 전조선국민의 약 3분지2를 구성한다는 본 위원단의 의견을 기록할 것을 결의함.

 

제69차 본회의에서 본 위원단은 또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1948년 5월 10일에 선거된 국회가 성립되었다는 한국 국회의장으로부터의 정식 통고문에 대한 회한을 결정하였다. 즉 위원단 의장 명의의 회한은 다음과 같다.

 

“본 위원단은 한국국민이 선출한 대표자에 의하여 1948년 5월 31일에 한국 국회가 성립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이 대표자들이 하루바삐 조선 독립과 통일을 달성하도록 촉진할 것을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귀한(貴翰)은 국제연합조선임시위원단의 위임사항을 구성하는 1947년 11월 14일부 국제연합총회의 결의안과 1948년 2월 26일부의 국제연합임시소총회 결의안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관하여는 본 위원단으로서는 당시 본 위원단 의장이었던 G·S·패터슨 씨가 귀하에게 1947년 11월 14일부 국제연합 총회 결의안에 규정된 바와 같이 이 이상의 실천에 관하여 선출된 대표자들의 요청이 있으면 본 위원단은 이에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통고한 1948년 6월 10일부 서한을 참고로 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결국 미국이 원한 결과에 이르고 마는 것이다. 그 결과에 이르는 과정을 앞으로도 틈틈이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

 

2013년의 남북관계에서 개성공단이 가진 의미를 1948년에 갖고 있던 것이 송전선(送電線)이었다. 해방 당시 38선 이북에는 석탄, 전기 등 에너지자원이 많았고 이남에는 식량자원이 많았다. 38선의 경색으로 그 교류가 막힌 것이 해방조선 경제의 큰 장애가 되었는데, 전력 하나만은 이남으로 공급이 계속되었다. 이남 당국의 전력 대금 지불이 원활치 못해도 이북 당국은 민생과 직결되는 송전 문제를 정치와 분리해서 배려한 셈이다. 1948년 5월 14일 정오를 기해 이 배려가 사라졌다.

 

“북조선 급기야 송전을 끊다. - 교섭 전화 중 ‘딱!’ - 단전 시간은 14일 정오”

 

북조선에서 보내는 전력 문제는 그 동안 여러 가지로 교섭 중에 있던 중 지난 14일 오전 12시를 기하여 드디어 송전을 절단하였다 한다. 그런데 북조선인민위원회로부터의 통고에 의하면 5월 14일까지 남조선으로부터 조선인 대표자를 평양에 파견하라 하였음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송전될 때까지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지난 13일 오후 3시 30분 북조선인민위원회로부터 송전선 고압선 전화를 통하여 남조선 전기관계 최고 책임자에게 통화를 요구하여 왔다 한다. 그리하여 남조선 과도정부 오 상무부장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이문환 산업국장과 대화를 하였는데 북조선 측에서는 라디오를 통하여 14일까지 평양에서 전기에 관한 회담을 하기로 통고하였음을 이유로 14일 오전 12시까지 조선인대표자를 평양에 파견할 것을 요구하고 만일 이에 응하지 않으면 14일 12시를 기하여 송전을 절단할 것을 언명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오 상무부장은 남조선의 관계당국과 타협하여 14일 오전 12시까지 즉시 회담하기로 하였다 한다.

 

그런데 14일 오전 8시부터 9시까지 북조선 측과 전화로 통화하려 하였으나 이용하여 오던 고압선 전화는 이미 절단되어 있어서 할 수 없이 송전선으로 연결된 조선전업사 전용전화로써 겨우 연락이 되었을 때에는 오전 10시였다 하는 바 오 상무부장은 이 전화를 통하여 북조선 측과 교섭하려 하였으나 이 전화는 평양에 있어서의 수화자 측의 지점과 인민위원회 측의 거리는 약 4마일이 떨어져 있는 관계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이 산업국장에게 연락하여 통화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 오전 12시가 되자 즉시 송전은 중지된 것이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5일)

 

이 조치가 남북간 대립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5월 16일자 <동아일보>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만주에까지 배전하는 잉여의 북조선 전력 - 동족 간에 단전이 웬 말?”

 

북조선 소련당국은 남조선의 산업경제건설을 방해하고 공산당 반동분자들을 통하여 같은 혈통을 물려받은 동포 형제들을 살상케 하며 각종 시설을 파괴하고 심지어는 민족갈망의 총선거를 반대하던 나머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우리들이 이야기하였던 바와 같이 지난 14일 드디어 남조선으로의 송전을 절단하는 횡폭한 용단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 북조선에는 압록강 수력전기를 비롯하여 장진강 허천강 부전강 강계 부녕 등 각 수력발전 시설에서 2백만 킬로왓트에 가까운 전력을 일으켜 만주와 간도에까지 송전하고도 오히려 20만 킬로왓트의 전력이 남는 형편으로 이는 마땅히 조선의 산업경제를 재건하고 생활을 향상 발전하기 위한 원동력으로 이용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을 점령한 소련군으로 말미암아 남북에 나누인 부모 형제의 본의 아닌 피눈물을 자아내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 약소민족의 억울한 실정을 어디다 호소할 것이랴! 남조선의 2천만 동포형제는 조국 조선이 당면한 험난한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과학과 자본과 노력을 총동원하여 장성하는 조선의 힘을 더욱 충실하게 발전시키기에 모든 정성을 이바지하여야 할 것이다.

 

과연 이 사태의 책임은 북쪽에 있는 것이었나, 남쪽에 있는 것이었나? 북쪽에서는 5월 10일 평양방송을 통해 5월 14일까지 “전력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남조선 조선인 대표”의 평양 방문을 요청하면서 불응할 때는 송전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전기 중단을 통고 - 4김 씨의 언약도 공수표”

 

[조선 제공] 10일 밤 평양방송은 남조선전력공급문제에 관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 김책 부위원장 명의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군사령부는 자기의 대표가 서명한 동 협정을 충실히 하지 않고 전력 대가 완납기일이 이미 10개월이 지난 1948년 4월 1일까지 협정대가의 1.6%[15.6%의 오타인 듯]밖에 지불하지 않았으며 그 후 4월중에 납부할 것을 종합해도 전력대가의 20퍼센트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미군사령부는 1947년 6월 1일 이후에 현재까지의 전력공급에 대하여는 결정까지 체결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미군정당국은 남조선인민들의 어떠한 곤란도 이것을 타개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미군정당국이 전기 문제와 대가 문제를 조절하지 않으려고 하느니만치 우리는 남조선조선인당국 대표를 파견하여 이 문제에 대한 협약을 우리 조선사람끼리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남조선전력문제에 관하여 조선인끼리 협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오는 5월 14일까지 전력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남조선 조선인 대표를 북조선 평양시에 파견할 것을 제안한다. 만일에 5월 14일까지 이에 불응할 시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본의는 아니나 남조선에 대한 전력공급을 결정적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2일)

 

평양 방문 요청 대상자는 당연히 군정청 상무부장이다. 오정수 상무부장은 1947년 5월과 10월에 평양을 방문해서 송전 문제의 이남 측 입장을 대표했던 사람이다. 이제 단전 사태에 임해 그는 경위를 이렇게 밝혔다.

 

“‘전력대(電力代) 누가 아니 준대나’ 오 상무부장 단전의 경위 설명”

 

13일 오후 3시 반 돌연 북조선으로부터의 전화가 있다는 통지를 조선전업사로부터 받고 북조선 이 산업국장과 통화를 하였다. 그런데 북조선 측은 이미 송전 문제에 관하여서는 라디오를 통하여 통고하였음을 이유로 하나 나는 남조선은 군정 하에 있어 관계당국과 타협하여 14일 12시까지 즉시 통지하기로 하였는데 14일 오전 8시경에는 북조선 측에서 이미 연락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전력대가의 35%는 벌써 지불되어 있거니와 45%의 지불대상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며 북조선에 운반하여 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다. 그리고 나머지 전력대가를 지불하기 위한 물자는 수송 도중에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5일)

 

5월 13일 오후까지 꼼짝도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10일 밤 평양방송은 듣지 못한 것은 물론 신문에 보도된 것도 읽지 못했다는 건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북쪽의 전화를 받고서야 “남조선은 군정 하에 있어서” 관계당국과 타협한 뒤에야 통지를 할 수 있다니! 전력 수요의 절반 이상을 북쪽에서 받아 쓰는 형편에 공개적인 송전 중단 위협을 받고도 상무부장으로서 아무 한 일이 없고 할 일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러나 가만 생각하면 오정수 개인 책임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그가 왜 애가 타지 않았겠는가. 그가 꼼짝 못하게 미군 측이 막았을 것이 분명하다. 협상 내용은 차치하고, 평양 방문 자체가 미군 측 허락 없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 사령관은 최근에도 전력 공급에 관해 북조선인민위원회와 교섭하지 않을 뜻을 밝힌 바 있었다.

 

“괴뢰정권과 교섭 않는다. - 전력 문제로 하 중장 코 장군에 송한(送翰)”

 

[서울 2일 UP 조선] 하지 중장은 지난 4월 27일 북조선 소련군사령관 코로트코프 장군에게 발송한 내용을 공개하였는데 그중에서 하지 중장은 북조선으로부터의 전력 대금 지불에 관하여 미국은 북조선 괴뢰정부와 교섭하라는 소련 측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한편 그는 “인민위원회를 북조선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와 교섭할 의향도 없다.”고 말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3일)

 

하지는 단전 이튿날 발표한 성명에서도 미국 당국이 “조선에 진주한 이후 현재까지 전력가 지불에 관하여는 제반노력을 다하여 교섭하여 왔다”는 것을 강변하고 소련 측과 협정 체결을 위한 회합을 요청해 왔으나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주장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소련당국은 그들의 주구인 조선인을 통하여 남조선 내의 선량한 국민들을 공산당 지배하에 유도하려는 정치적 모략으로 남조선에 대한 송전을 단절하고 있다. 또 그들은 남조선 내의 그들의 주구와 세포기관을 동원하여 남조선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파괴하고자 요즈음 수개월간 마음대로 감행하여 오던 살인 파업 방화 등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 미군당국은 아직까지도 소련 측 대표와 회담하여 전기요금문제에 관하여 타협에 도달할 용의가 있다.

(...) 그리고 또 최근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2명의 저명한 조선인 지도자들이 발표한 공동성명서에서는 북조선 괴뢰당국에서 자기들에게 남조선 송전을 단절치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고 하는데 이 또한 흥미있는 일이니 (...)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 허위 약속이었으며 이러한 종류의 약속은 그들의 정치적 지위가 유리하게 호전될 때에는 폐기될 성질의 것이다. (...) 그리고 단전의 시일이 막부당국으로부터 지령되었다는 사실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6일)

 

미군당국이 북조선인민위원회랑 직접 교섭하고 싶지 않으면 남조선임시과도정부는 뒀다가 뭐에 쓰겠다는 건가? 작년 5월과 10월에 했던 것처럼 오정수가 평양에 가서 일 처리하도록 하면 될 것 아닌가. 왜 조선인의 자치에 맡겨놓고 물러나 있는 소련군에게만 매달려야 하나? 미군 측이 단전 사태를 고의적으로 유발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단전 사태는 남조선 민생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미군정이 남조선의 ‘유일한 정부’를 자임한다면 단전 사태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단전 사태를 유발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선 미국 발전선이 들어온 상황부터 본다.

 

“북조선 송전 중단에 대비 - 미 발전함 남조선에 정박”

 

[워싱턴 15일 발 조선] 미 관헌 측에서는 북조선 소련군당국이 베를린과 비엔나에서 미국 교통과 통신기관에 대하여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전술로 남조선지대에 대한 전력 공급을 절단하려고 위협하고 있다 한다. 미국은 이와 같은 비상시에 대비하여 전력을 공급할 발전선을 파견하고 있다. 그런데 당국자의 말에 의하면 북조선의 요구는 작년 5월 이래 남조선에서 사용한 전력에 대하여 수천 불의 대가를 지불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북조선으로부터의 전력 공급 중단을 각오하라는 것인데 미군당국은 소련과 원만한 해결을 하려는 방침으로 교섭 중에 있다 한다.

 

한편 미국에서는 자고나 호(발전함)를 남조선에 파견하였는데 이에 추가하여 엘렉트라 호도 파견하였다 한다. 이 두 발전함은 북조선으로부터 전력이 차단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남조선 각지의 전력을 보충시킬 것이라 한다. (...) 1947년 4월 이래로 남조선은 전력은 받고 있으나 이에 관한 협정은 성립되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최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통고는 전기 물자를 제공하는 외에 수천 불의 채무를 지불치 않으면 송전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한다. 그리하여 미국은 소련사령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은 위협의 확인을 요구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6일)

 

“발전 못하는 미 선박 우리 기술자가 완성”

 

미국 발전선 엘렉트라 호는 인천 도크에 입항한 지 2년이 되어도 발동기 고장으로 발전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간 미인 기술자가 수리 못하고 있던 것을 조선인 기술자의 손에 수리가 완료되어 지난 4월 30일 남조선 전력망에 연결을 끝마치게 되어 근일 중에 발전을 개시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이 발전선의 최대 발전량은 4천KW라 하며 평균 발전력은 2,500KW라 하는데 전력 부족에 허덕이는 남조선 전력 사용에 큰 도움이 되리라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5일)

 

미군정은 북측의 배려에 의지하지 않는 전력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해상 발전의 원가가 지상 발전보다 높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두 척 발전선으로는 이북으로부터의 송전에 비해 절반도 공급이 안 된다. 발전선 배치는 비상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배치받아 놓고 보니 하지는 그것을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송전 협정 체결과 전력 대가 지불 대신 발전선 활용을 택한 것은 남조선의 북조선과의 관계를 끊고 미국에 더욱 의존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가 5월 15일 성명에서 언급한 “최근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2명의 저명한 조선인 지도자”란 물론 김구와 김규식을 가리킨 것이다. 5월 5일 서울에 돌아온 두 사람은 이튿날 발표한 공동성명 끝부분에서 “우리 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증명”하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 예를 들어 말하면 첫째 북조선당국자가 남조선 미당국자와의 분규로 인하여 남조선에 대하여 송전을 최단기간 내에 정지하겠다고 남조선 신문기자에게 언명한 바 있었고 둘째 연백 등 수개처의 저수지 개방문제도 원활히 하지 아니한 일이 있었지마는 이번 우리의 협상을 통하여 그것이 다 잘 해결된 것이다. 앞으로 북조선당국자는 단전도 하지 아니하며 저수지도 원활히 개방할 것을 쾌락하였다. 그리고 조만식 선생과 동반하여 남행하겠다는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북조선당국자는 금차에 실행시킬 수는 없으나 미구에 그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7일)

 

같은 날 김규식은 외국기자단 회견에서도 미군정의 부패상을 비판하여 “40년간 일본 점령 중 조선인은 부정 일본인과 협력하기를 배웠으며 현재 그들은 이 경험을 이용하여 미국인이 그들의 부패를 조장하도록 애쓰고 있다. 약간의 미국인은 부자가 되어 귀국하였다.”라고 말하고, 이북 당국자들의 약속에 대해 “북조선정부는 남방에 전력과 관개용수를 계속 공급할 것을 구두로 승낙하였으며 내란은 없으리라고 약속하였다. 그들의 말한 바는 진정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남북협력에 대한 큰 기대를 표했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8일)

 

미-소 양군이 철수하더라도 이북 측의 군사적 위협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은 남북협상의 의미를 크게 키워주는 것이었다. 미국의 철군 거부와 ‘가능지역 선거’ 주장이 모두 이 위협을 핑계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구와 김규식은 외국군 철수 후에도 “전쟁은 없다”는 이북 측 약속의 진정성을 믿는다고 했다. 그 믿음은 곧 미국 입장의 거부였다.

 

미군정에게는 이 믿음이 남조선 인민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가로막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 효과적인 길 하나가 송전 중단 사태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북 측이 평화의 원칙을 지킬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전력과 관개용수 계속 공급의 약속을 전했다. 그중 하나가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그 모든 약속이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 허위 약속”이라는 주장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었다. 한민당 대표 김성수가 5월 14일 오후에 유엔위원단과 회견한 후 회견 내용을 기자에게 밝힌 것이 5월 16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전력, 수리조합 문제에 관하여: 김구 김규식 양 씨가 전력을 끊지 않을 것과 연백수리조합 문제와 더불어 남북 미소 양군 철퇴하더라도 북조선에서 양성한 보안군은 남조선을 침해 않기로 되었다고 하나 그것은 실천하지 않을 공수표일 것이다. 그 좋은 예는 금번 전기 문제만 가지고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송전 중단 사태를 가져온 일차적 책임은 미군정에게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만의 책임만은 아니다. 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난다고, 이북 측에서 바로 이 시점에 송전 중단을 단행한 것도 의도가 없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북 측은 명분에서 상대적 우위가 확보되기만 하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 측의 오만과 이북(및 소련) 측의 무책임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루는 틈바구니에서 중간파 민족주의자는 설 땅이 없었다.

 

미국에 거주하며 미군정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지켜온 김용중의 논평이 이 문제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김용중은 여운형이 암살 직전에 협력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이다.

 

“좋지 못한 일 - 단전과 김용중 씨 담”

 

[워싱턴 19일 발 조통] 조선사정협회 회장 김용중 씨는 북조선의 송전 단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선 지대에 대하여 송전을 절단하는 이유는 요금을 지불치 않는 때문이라는 것은 부당한 것이며 이는 정치적 의도에서 행하여진 것이다. 이런 행동은 남조선 인민에게 불리한 영향을 줄 것이며 지금까지 북조선과 협조적인 태도를 가진 인사를 이반시키게 할 뿐 아니라 국가 재통일을 기도하는 모든 인사의 사업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0일)

 

이런 와중에 김구는 ‘정양(靜養)’을 위해 마곡사로 떠날 것을 발표했다. 그의 마곡사 행에 <동아일보>는 이런 해석을 붙였다.

 

“남북협상 좌절 - 김구 씨 정양차 마곡사로”

 

김구 김규식 양 씨를 비롯한 중간파에서는 과거 2개 년간 전 조선을 소련의 위성국가화하려는 공산계열의 의도를 냉찰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오던바 최근에 이르러서는 그들 대부분이 남북협상의 성공성이 희박함을 지적하고 단념하고 있으며 다만 소수파 측이 아직 추진시키고 있는 기세가 보이던바 금번 김구 씨의 급변한 태도로 인하여 남북협상은 드디어 완전봉쇄에 함입하고 말았다.

 

즉 김구 씨는 맹렬히 추진하여 오던 남북협상을 단념하고 불일내로 충남 공주에 있는 계룡산 마곡사로 정양차 입산하리라는데 정양기간은 수개월 내지 2, 3년이 될른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리하여 김구 씨는 당분간 정계에서 이탈할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남북협상도 여차한 김구 씨의 태도로 인하여 완전히 좌절된 것이며 다만 상금 북조선에 잔류하고 있는 인사들의 금후 태도가 주목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9일)

 

김구는 이 마곡사 행을 취소했는데, 5월 23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중간파 인사들의 권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짜 이유는 5월 19일자 <동아일보>의 위 기사를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문천

 

5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서울 UP특파원 제임스 로퍼 발 조선] 바이라인 기사가 실렸다. 조선 상황을 그리스와 비교한 것이 눈에 띈다.

 

“조선은 희랍 사태 재연, 좌우 항쟁도 근사”

 

조선은 희랍사태의 완전한 재연이다. 양국에서의 공산당 전술은 동일한 것이며 희랍에서 발생한 전투는 조선에서도 발생할지 모른다. 양국이 지리적으로 근사하다. 양국은 다 산악이 많은 반도이다. 희랍반도는 공산주의자가 지배하고 있는 발칸에 연결되어 있으며 조선은 역시 역사적으로 소란의 온상지이며 현재 공산군이 세력을 펴고 있는 만주에 연결되어 있다. 여차한 정세는 조선과 희랍을 군사적 견지에서 처리하기 곤란케 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국은 정치적 이유로 동지(同地)에 민주주의 거점을 두려고 하여 금전·선전 및 무기 기증으로 투쟁하였다. 민주주의를 시행하기 위하여 서방 연합국은 조선과 희랍에서 자유선거를 지지하였다. 희랍 투표는 영미위원단 감시 하에 행하였는데 10일 남조선에서는 국련위원단 감시 하에 투표를 행할 것이다. 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보이콧 행동으로 투표를 회피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리스에서는 1946년 3월에 총선거가 있었다. 영국군 점령 하에 실시된 이 총선거를 그리스공산당(KKE)을 중심으로 한 민족해방전선(EAM)이 거부했고, 그 동안 겨우겨우 억제해 온 내전이 전면적으로 터지고 말았다. 1년 후인 1947년 3월, 내전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영국의 요청으로 미국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 ‘트루먼독트린’의 직접 배경이었다.

 

1947년 3월 12일 일기에서 그리스 사정을 살펴본 일이 있다. 로퍼 기자의 지적처럼 그리스 사태와 조선 사태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두 곳 사정을 더 비교해 본다.

 

그리스왕국은 1936년 쿠데타로 집권한 메탁사스 정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941년 4월 추축국 군대의 침공을 받을 때는 정부의 인기도 낮았고, 스탈린의 소련이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좌익도 저항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몇 달 후 독-소간 개전과 함께 추축국에 대한 그리스 좌익의 항쟁이 시작되었고, 민족해방전선의 군대 인민해방군(ELAS)이 국내 항쟁의 주축이 되었다.

 

앞서의 일기(1947년 3월 12일)에서 한 가지 숙제로 남겨둔 문제가 있다. 영국 등 연합국이 이웃나라인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는 티토의 공산세력을 흔쾌히 지원해준 반면 그리스에 대해서는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원에 인색했던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더 살펴보니 초기에는 연합국 지원 양상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스에서도 인민해방군이 전투력이 강하고 역할이 큰 만큼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전쟁 후기로 가면서 티토가 연합전선 원리를 굳게 지킨 반면 그리스에서는 좌우 갈등이 심했고, 그 갈등에 좌익 측 책임이 작지 않았다. 민족주의를 앞세웠던 티토에 비해 그리스공산당은 스탈린의 지시를 너무 충실히 따르다가 불신의 대상이 된 측면이 있다. 공산당을 비난하는 우익 선전에는 메탁사스 정권과 추축국 지배에 대한 공산당의 협력이 많이 지적되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연합국 승세가 정해지자 전쟁 후 국가 진로를 놓고 좌우 대립이 심화되었다. 민족해방전선은 우익 망명정부와 경쟁할 민족해방정치위원회(PEEA)를 1944년 3월에 세웠다. PEEA는 많은 그리스인의 지지를 받아 아테네의 괴뢰정부와 대비되는 ‘산(山)정부’로 불렸고, 4월에는 이집트의 망명정부 군대에서 그를 지지하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극한 대립을 막기 위해 5월에 레바논 연석회의가 열려 파판드레우 수상 중심의 좌우합작 거국내각이 탄생했다. 24명 각료 중 여섯 자리가 민족해방전선 측에 주어진 이 내각에 좌익이 동의한 것은 스탈린의 협력 지시에 따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1944년 10월 파판드레우 정부가 귀국하자 문제가 다시 터졌다. 군대 재건을 위해 군사단체 해산명령을 내렸는데 일부 우익 단체를 존속시킨 반면 국내 저항의 주축이었던 인민해방군을 철저히 해체하는 조치였다. 이 명령의 최후통첩이 12월 1일 발표되자 좌익 각료 6인이 즉각 사임했고, 아테네 시내에서 37일간 시가전이 계속되는 ‘데켐브리아나’ 사태가 12월 3일에 터졌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연합국회의에서 소련대표의 침묵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그에게 ‘스핑크스’란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속셈을 알 수 없다는 얘기였다.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스탈린이 동유럽 지역을 소련 영향권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양보하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데켐브리아나를 끝내는 연합국과 그리스 제 정당 사이의 바르키사 조약은 그리스 좌익을 궤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산당이 이 조약을 받아들인 것은 스탈린의 지침 때문이었다. 인민해방군은 해체되고 좌익 인사 수만 명이 투옥되었으며, 인민해방전선을 지지하던 수많은 마을이 백색테러의 공격을 받았다. 좌익 투사들은 소규모 저항조직을 만들거나 인접국으로 피신했다.

 

독일과 일본이 항복한 뒤 소련과 서방 연합국의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1945년 말에 이르러서야 그리스공산당의 노선이 저항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1946년 3월의 총선거를 보이콧했고, 이 선거에서 왕정 지지파가 승리를 거둔 후 9월의 국민투표에서 왕정복고가 결정되었다. 그로써 그리스는 영국의 실질적인 보호국이 되었다.

 

총선거 무렵 재개된 내전은 좌익 투사들이 그리스민주군(DSE)를 결성하면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1947년 3월 미국이 영국의 역할을 넘겨받을 무렵에는 10만 명의 정부군이 2만 명의 민주군을 상대로 전국 각지에서 초토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1947년 중에도 항쟁은 계속 확대되었고, 연말에 임시민주정부를 세우면서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불법화되었다.

 

그리스내전은 참혹성과 잔인성에서 극한에 이른 전쟁으로 꼽힌다. 그 면모를 비쳐 보여주는 현상 하나가 양측에서 경쟁적으로 벌인 ‘어린이 구출작전’이다. 좌익 측은 전투지역의 어린이 수만 명을 인접 공산국과 자기네 점령지역으로 옮겼다. 인도적 조치라고 주장하지만 정부 측에서는 세뇌를 통한 전사 양성 목적이라고 비난했다.

 

정부 측도 많은 어린이들을 수용소로 보냈다. 프레데리카 왕비가 제안한 조치라 해서 그런 수용소를 ‘퀸즈 캠프’라 불렀다고 한다. 이 역시 정부 측에서는 인도적 조치로 주장하는 반면 반대편에게는 비인도적 조치로 비난받았다. 양측에 의해 수용되어 가족 없이 자라나게 된 어린이 수가 1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1948년 5월, 조선에서 총선거가 실시될 무렵에도 그리스내전은 사그러들 기색 없이 계속되고 있다. 구시대의 제국 영국이 바뀐 위상을 인정하고 물러나게 만든 이 투쟁을 발판으로 삼아 새 시대의 제국으로 위치를 확립하려는 미국이 힘을 쏟아 붓고 있으니, 그 시점에서 그리스는 냉전의 도화선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스도 미-소 대결에 휘말려 국가체제 안정에 실패했다는 점은 조선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조선 경우에 비해 그리스에서는 소련의 책임이 두드러진다. 그리스에 대한 영국과 그를 이은 미국의 정책은 당시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고 지난 뒤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련의 태도는 여러 차례 석연치 않은 변화를 겪었고, 그리스의 비극을 심화시키는 이유가 되었다.

 

소련이 독일 침략을 받을 때까지 그리스공산당이 추축국 침공에 적극 저항하지 못하게 묶은 데서부터 문제가 있다. 1941년 들어서는 독-소 불가침조약 파기가 시간문제였다. 실제로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에 현지인의 저항이 상당히 강했기 때문에 소련 침공이 늦어지고 소련이 상당한 혜택을 보았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그런데 그리스공산당은 침공 저항에 선명한 태도를 보이지 못해서 민족주의 세력과의 사이에 앙금을 남겼다.

 

1944년 말 아테네 시내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는 연합국 공조체제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좌익 군사력을 소멸시키려는 그리스 우익정부의 조치는 소련의 태도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소련은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양보하는 방침에 따라 그리스 상태를 방관했다. 그 결과 대 추축국 항쟁을 통해 양성된 인민해방군 10만 병력이 소멸되고, 2년 후 내전이 재개되었을 때 좌익 측이 엄청난 열세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서방 연합국과 관계가 껄끄러워지자 스탈린은 그리스공산당을 총선거 거부와 내전 재개로 이끌었다. 최악의 조건 위에서 최악의 상황을 벌이게 한 것이다.

 

결국 스탈린의 기형적 대외정책은 그리스 좌익세력을 최후의 구렁텅이에 몰아놓고 만다. 1948년 6월 티토와 관계가 악화하자 스탈린은 그리스공산당에게 반 티토 노선을 강요했다. 티토와의 관계 단절에 대해서는 그리스공산당 안에서도 상당한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스탈린 노선에 따랐고, 인접한 유고슬라비아의 도움을 잃은 민주군은 몇 달 안 되어 궤멸하고 말았다.

 

스탈린은 그리스인에게, 특히 그리스 좌익에게 정말 못할 짓을 했다. 소련의 득실을 기준으로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넘겨준 것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그래 놓고도 내전을 부추긴 목적이 무엇이었나? 서방과의 관계에서 약간의 이득을 얻기 위해 참혹한 분쟁으로 내몬 것이다. 민주군 궤멸 후 소련으로 도피한 잔여 병력은 우즈베키스탄에 수용되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의 소련 정책을 해석하는 데도 그리스 경우가 참고된다. 반공주의 입장에서 소련의 ‘적화 야욕’을 흔히 강조하며 이북 지도부가 소련의 지침을 일일이 따른 것처럼 가정하는데, 1949년 이전 상황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이북 지도부도 그리스에서 벌어져 온 일을 살펴보며 소련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 경우만 하더라도 장개석 정부와 공식적으로 거래하면서 은밀히 내전을 부추긴 소련의 정책은 그리스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분단건국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겉으로 드러나 보인다. 조선의 당시 상황이 친미정권보다는 친소정권이 서기에 유리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무리한 조치를 더 많이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책임에 눈이 가려 소련의 책임을 보지 못한다면 온전한 상황 인식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분단건국이 스탈린에게도 만족할 만한 방향이었으리라는 사실을 같은 시기 그리스 상황에서 짐작할 수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