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 맞서 동대문갑구에 출마하려던 최능진의 후보등록이 말소되었다.

 

"최 씨 등록 말소, 선위에서 공식 발표"

 

시내 동대문갑구에서 출마한 최능진의 입후보 수속 상 불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방치됨에 대하여 그동안 사회의 많은 비난을 받아오던 국회선거위원회에서는 불법사실의 진부를 조사한 결과 작보한 바와 같이 추천인 217명 중 추천인으로 된 57명이 추천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고 또 그 중 27명의 지문은 전혀 허위인 것이 판명되었으므로 지난 7일 신중 협의한 후 선거법 제27조에 의하여 2백 명 이상의 추천을 필요로 하는 입후보 등록요건을 구비하지 못한 것이 명백하므로 입후보 등록의 무효를 인정하고 서울시 선거위원회를 통하여 동대문갑구 선거위원회에 대하여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을 말소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8일 공식으로 발표하였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9일)

 

최능진(1899~1951년)의 후보 등록 사실은 지난 4월 12일 일기에서 언급했고, 1946년 12월 5일 일기에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 일이 있다. 그는 평안남도 강서군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 집안은 항일운동 명문가이기도 했다. 13년간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조선 체육계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고, 해방 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월남해서 경무부 수사국장을 맡았는데, 조병옥과 장택상에게 맞서다가 파면당했다.

 

투철한 반공 민족주의자라는 점에서 김구 노선에 가까운 인물이며 미군정 수뇌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8년 5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가 “미군 정보기관에 근무”한다고 했다. 그리고 5월 18일자 <경향신문> 기사에는 그의 선거운동원들이 민족청년단원이라 했다. 족청은 미군정의 대규모 지원을 받는 단체였다.) 그런 그가 이승만에 대항해서 출마한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민족주의 입장에서 조병옥-장택상-이승만 그룹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군정 수뇌부가 통제하기 힘든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해 그의 도전을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다. <동아일보>는 후보 등록 이후 최 씨의 후보 자격을 공격하는 데 많은 지면을 들였는데(같은 기간 <경향신문>보다 최 씨 관계 기사가 5배가 넘는다.) 그 중요한 초점 하나가 “외세의 개입”이었다. 미군정이 <동아일보>에게 “외세” 소리를 듣다니.

 

최 씨의 도전은 이승만의 당선에 큰 위협이었다. 지명도에서야 물론 비교가 안 되었지만 이승만에게는 ‘안티’가 많았다. 친일파를 옹호하고 분단건국을 제창해 온 그에게 최 씨의 도전은 마치 김구를 위한 대리전과 같은 느낌으로 많은 유권자를 흥분시킬 수 있었다. 경찰개혁을 주장하다가 파면당한 인물이 반(反) 이승만 표를 모은다면 이승만은 설령 당선된다 하더라도 위신이 형편없게 될 것이었다. (이승만의 걱정은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1950년 민의원 선거에서 조병옥의 참패(성북구)와 장택상의 ‘도피 출마’(칠곡)를 보면 전쟁 전까지는 분단세력에 대한 일반인의 반감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능진은 그 후에도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여 서재필 옹립을 추진했는데 이승만 정부 출범 직후인 10월 초에 내란음모죄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에는 ‘혁명의용군사건’이란 어마어마한 이름이 붙었고 얼마 후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수도경찰청에서 그것까지 연계시키기도 했다.(<동아일보> 1948년 10월 23일 “여수 반군 소요는 최능진 사건 여파”) 최능진은 이 사건으로 이듬해 5월 3년형을 선고받는다. 대한민국 최초의 ‘이승만 정적(政敵) 죽이기’ 사건이었는데, 3년형 밖에 안 떨어진 것을 보면 1949년까지는 이승만 독재체제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최능진은 그 후 전쟁 중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이승만 독재체제가 전쟁을 통해 굳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최능진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서울검찰청 엄상섭 차석검사의 담화문 하나가 눈에 띈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0일, “선거사범 엄벌, 엄 검찰청 차석 경고”)

 

“검찰당국으로서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거사범에 대하여 자세한 소식을 탐지하고 있다. 실례를 들어 본다면 첫째 입후보자들 사이에서 그 입후보를 취소하는 대신에 거액의 금품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빈번한 모양인데 이것은 매수선거의 전형적인 것이며 또 하나는 모 관청 책임자가 그 부하들에게 대하여 입후보자 중에서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물어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인물을 지지한다면 그만이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일장의 설명을 하여 그가 뜻하는 사람에 투표하도록 종용한다고 들리는데 이런 것은 도의적으로는 매국적 행위며 법률적으로는 선거사범이니 선거가 끝난 후에는 이 같은 부정한 도배들은 철저히 규명하여 적발되는 대로 엄중 처단할 방침이다.”

 

엄상섭은 지난 3월 18일 일기에 나온 일이 있다. 검사가 유치장에 구금 중인 피의자 보겠다는 것을 경찰이 가로막는 황당한 사태 때 단호한 태도를 보인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 담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후보 매수’ 문제의 지적이다. 그런 사례가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기에 담화문에서 지적한 것 아니겠는가.

 

단독선거 추진은 민족주의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조선사람의 압도적 대다수가 통일건국을 바라고 있는데도 한민당-이승만 세력이 단독선거를 추진한 것은 실리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총선거는 그들이 큰 실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실리를 얻을 사람의 수가 200명 이하로 제한되어 있었다.

 

후보 난립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독당과 민련이 공식적으로 선거를 보이콧하고 있는 이번 선거는 단독선거 추진세력에게 다시없을 기회였다. 곳곳에서 한민당과 독촉 후보들이 무더기로 출마해 서로 각축을 벌였다. 이승만과 김성수가 애국심과 양보정신을 아무리 떠들어도 밥그릇 앞에서는 그저 마이동풍이었다. 같은 성향 후보의 경쟁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실리를 듬뿍 안겨주는 것보다 좋은 묘책이 없었고, 대한민국 금권선거가 시작되었다.

 

후보 난립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곳이 종로갑구였다. 4월 18일자 <경향신문>에는 이 선거구에 아래 8명의 후보가 출마했다고 보도되었다.

 

박용래(46세) 한국기련, 의사

박순천(51세) 부인신문사장, 독촉애부

서상천(46세) 회사원, 독청

이윤영(59세) 조민당수, 조민당

김은배(38세) 체육신문사장, 무소속

오삼계(58세) 한의, 무소속

최진(73세) 변호사, 민주자주독립당

김대석(42세) 회사원, 무소속

 

숫자로는 8대 1 경쟁이 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곳을 모범 선거구로 만들려는 김성수와 이승만의 노력이 무색해진 곳이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이다. 김성수는 입후보 준비를 하고 있던 종로갑구를 조선민주당 이윤영 부위원장에게 양보한다고 담화를 발표했다.

 

“동지 조만식 시 지기 이윤영 씨를 성원하라 - 김성수 씨 담”

 

금번 총선거에 무엇보다도 통한사는 북한에 총선거를 못하게 되어서 조만식 동지 같은 분이 국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만식 씨는 학생시대부터 나의 가장 신뢰하고 존경하는 분이지마는 8-15 이후 그가 취한 성자(聖者)적 태도에는 진실로 경복하지 않을 수 없다. 조만식 씨는 못 오더라도 특별선거구로 그의 지기들이 국회에 많이 나오려니 하였더니 이제는 그 기대도 어그러졌으니 정의(情誼)상으로나 남북통일의 일을 위해서나 크게 유감되는 일이다.

 

이에 조만식 동지가 위원장인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 이윤영 동지를 국회에 참석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종로구 갑구 선거구에 의원 후보자로 추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윤영 동지는 인격과 덕망이 구비하고 식견이 높은 인물로 현재 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 대표 등 중책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니 본당계와 해 선거구 유권자 여러분은 양지하시고 적극 협력하여 주심을 바란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일)

 

이승만도 뒤따라 이윤영 지원사격에 나섰다.

 

“종로갑구 후보로 이윤영 씨를 추천 - 이 박사 유권자에 호소”

 

이번 총선거에 대하여 내가 입후보자 문제에 간섭이 도무지 없고 오직 민중의 공심(公心)에 맡겨 정당히 결정되기만 바라고 있는 중이나 이북동포 대표 이윤영 목사에 대하여는 침묵할 수 없는 감상을 가졌으므로 특히 서울시 종로갑구 입후보자로 추천하며 전구 일반 유권남녀에게 성심으로 나의 찬성하는 뜻을 표시하고자 한다.

 

이윤영 씨의 열렬한 애국성심과 특수한 인도 자격에 대하여는 모든 동포가 다소간 양해가 있을 것이므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진심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북한에서 모든 동포가 사지에 빠져서 유리방황하며 국권회복만을 위하여 수화를 피치 않고 죽기로써 싸우는 이때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환난상구에 동족상 정의를 표할 기회가 없었던 것인데 이 기회를 이용해서 동 구역 입후보자는 다 기쁘게 양보하며 주권자는 전적으로 투표해서 일변으로는 의로운 인격을 추대하며 또 일변으로 이북 동포들을 위로하는 것이 우리의 정당한 도리요, 건국대계에 많은 공헌이 될 것이니 누구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것이 나 한 사람의 구구한 사정(私情)이 아니요 남한 모든 동포들의 공원(公願)일 줄 믿으므로 간단히 이 말로 이윤영 씨를 추천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7일)

 

영수 이승만과 한민당 대표 김성수가 이처럼 공을 들인 곳에 이승만의 직계라 할 수 있는 독촉애국부인회의 박순천이 끝내 출마한 것이 어찌된 일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직계고 뭐고 실리 앞에서는 안면몰수였다는 것이고, 하나는 이승만이 자기 추종자가 나가서 다음 기회를 위한 발판을 닦게 했다는 것이다. 이윤영이 1만2천여 표로 당선된 이 선거에서 박순천은 3천여 표로 차점자가 되고 2년 후 이 선거구에 다시 나와 당선되었다.

 

투표가 이틀 뒤로 다가왔다. 남로당은 일찍부터 사보타지 전술을 펼치고 있었지만 제주도 이외 지역에서는 두드러진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학생들의 선거 방해운동이 더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검거되는 선거사범의 태반이 학생이었고, 투표일을 앞두고는 중학교까지 동맹휴학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흘밖에 남지 않은 총선거 실시를 반대하여 각종 불상사가 벌어지고 있거니와 특히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중등, 전문, 대학 등 학생들도 동요의 틈을 보이어 이미 경기중학을 비롯하여 대학 예과 등 동맹휴학 문제로 소동을 일으켰으며 모 대학에서도 동 5일 하오 2시경 등교생 30여명이 강당에 모였다가 ‘단선반대’ 등 구호를 들러 일부 맹휴로 들어갔다 하고 그 외도 몇몇 중학에 동요설이 있어 경찰당국에서는 미연 방지책으로 총선거의 수사과 직원들도 총선거가 끝날 때까지 사찰 경비에 근무하도록 각처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조선일보> 1948년 5월 7일)

 

서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선 단정 결사반대 슬로건 아래 맹휴 혹은 데모 등 동요 파문은 도내 13교에 달한다 한다.

 

◊ 광주사범학교: 7일에 일부 학생들의 동요가 있었으나 당국이 즉시 제지. 10일 밤 약 30여 명의 동교 생도는 오전 8시반경 부내 남동 일대에서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데모를 감행.

 

◊ 여수중학: 8일 전교생이 맹휴.

 

◊ 여수여중: 8일 3학년생이 하급생을 선동하여 맹휴하려다가 학교 측에 발견되어 3학년생만이 맹휴.

 

◊ 여수공업: 8일 전교생이 맹휴.

 

◊ 영광여중: 8일 맹휴를 일으키자 생도가 반수 밖에 출석치 않았으므로 학교에서 임시 휴학.

 

◊ 송정리중학: 1일 전교 맹휴.

 

◊ 함평농중: 6일 일부학생 동요.

 

◊ 예학중학: 전교 맹휴.

 

◊ 광주서중: 지난 7일 결석자 2,080명.

 

◊ 목포사범학교: 생도 20명과 직원 9명 체포.

 

◊ 송정리여중: 전교 맹휴. (<서울신문> 1948년 5월 18일)

 

경찰은 연일 강도 높은 조치를 발표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웃지 못 할 내용도 있었다.

 

“노상에 정류함을 부득함 - 거부자는 즉시 본서 동행 - 수도청에서 교통에 관한 지시”

 

최근 국내 정세가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는 데 비추어 수도청에서는 지난 4월 1일부로 수도 관내에 비상경계령을 내리어 치안 확보에 총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한편 이를 더욱 강화하려 함인지 19일부로 관하 각 경찰서에 교통에 관한 지시를 하였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수모(誰某)를 물론하고 경찰관을 제외하고는 노상에 정류함을 부득함.

 

2. 경찰관이 노상에 입대(立待)하는 행인을 발견할 시는 즉시 행보를 명령하고 불응할 시는 본서에 동행하여 보안주임에게 인도할 사.

 

3. 보안주임은 이유를 조사하여 원인 없는 반항을 발견하는 시는 즉시 치안관에 회부할 사. (<경향신문> 1948년 4월 21일)

 

아무리 남조선이 경찰국가가 되어 있었다 해도 이건 너무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물의를 가라앉힌다고 내보낸 해명이 더 가관이다.

 

“교통에 관한 지시는 외국에도 있는 도로법령 - 장 총장 담”

 

수도청에서 지난 19일부 수도 관하 각 경찰서에 지시된 ‘교통에 관한 지시’는 그 동안 항간에서 이를 오해하고 문젯거리가 되어 있으나 수도청장 장택상 씨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준 비상경계의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행인이 가로에서 일 없이 주저하고 있는 것은 교통에 많은 지장이 되므로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지시한 것이다. 더구나 외국에서는 일찍부터 이와 같은 교통법령이 실시되어 가로에 주저하는 자는 즉결처분에 의한 벌금형에 처하고 있는 것이니 일반은 주의하여 당국에 협력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25일)

 

 

Posted by 문천

 

<프레시안>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지난 연초 강추위가 심할 때였다. 오랜만에 서울 나간 길에 무심코 들렀는데 박인규 대표가 내 얼굴을 보더니 회의실로 불러들이고는 목소리까지 낮춰서 <프레시안>의 ‘위기’를 얘기해 줬다. 공교로운 때 들르는 바람에 외부 필자로는 제일 먼저 그 얘기를 듣게 된 모양이다.

 

창간 7년 만에 ‘흑자’ 맛을 봤다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얼굴을 본 것이 4년 전이다. 흑자 기조를 3년가량 겨우 지키다가 다시 지하로 내려가고, 재탈출 전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대선 이후 언론 환경의 악화까지 걱정하게 되자 주주들의 동요가 심각하게 되었다고 박 대표는 설명했다. 마침 어느 재력가가 인수 의사를 밝히자 경영권을 그리로 넘겨주자는 여론이 주주들 사이에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영은 내가 모르는 영역이다. 나는 박 대표의 설명을 들은 뒤 딱 한 가지만 물었다. “그러면 <프레시안>이 ‘독립언론’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는 대답에 딱 한 마디만 더 했다. “그렇게 된다면 나랑은 남이 되는 거네요.”

 

군말 안 붙이고 직설적으로 나오니까 빤한 얘기인데도 충격을 받는 눈치였다. 제일 충실한 필자의 한 사람이 독립언론 아닌 <프레시안>과는 남 된다는 얘기를 말 세 마디도 필요 없이 던지다니! 그 후 외부 필자들 의견도 열심히 수렴했던 모양이다. 지난 주 들렀을 때 강양구 기자가 조합 전환 방침이 정해진 사실을 알려주며 그 결정에 외부 필자들의 의견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해준다.

 

남 될 수도 있다는 현실 앞에서 <프레시안>과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창간 때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진짜 심각한(아내가 걱정할 만한) 관계가 된 것은 5년 전 “뉴라이트 비판” 연재부터였다. 그 연재가 많은 독자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내 글쓰기 의욕이 촉발되어 집중적 저술활동에 뛰어들게 되었고, 그 후의 내 글은 대부분을 <프레시안>을 통해 발표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3년째 진행 중인 “해방일기”처럼 미련한 작업까지 펼치게 되었다. 필자와 매체 사이의 신뢰가 웬만해서는 그렇게 피차 미련한 짓을 저지를 수 없다. 이 신뢰관계에 나는 더 없이 만족한다. 필자로서 내 정체성은 확고한 ‘프레시안 키드’다.

 

이제 돌아보면 내가 ‘프레시안 키드’가 될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 이유가 <프레시안>이 마련해준 ‘독립언론’의 공간에 있었다. 내 글이 지닌 가치를 내가 바라는 대로 독자들이 음미해 줄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프레시안>이 누구보다 효과적인 도움을 주었다. 운영자 몇몇 사람이 나랑 가치관을 많이 공유해 준 덕분도 있지만, ‘독립언론’이라는 데 더 결정적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런 사람들, <프레시안>이 정말 독립언론이기를 그만둔다면 그들 자신도 배겨내지 못할 것 같다.

 

거듭 말하지만 경영은 내가 알지 못하는 분야다. 협동조합 전환이 독립언론으로 남기 위한 방침이라는 ‘뜻’을 반가워하면서도 그것이 현실에서 성공을 바라볼 ‘힘’을 가진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성공을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뜻과 힘이 모여야 한다는 사실만은 알기에 열심히 참여하고자 할 뿐이다.

 

직원들과 기존 주주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프레시안>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재력가에게 회사를 넘기는 것이 그들에게 금전적 이익이 더 크리라는 사실 정도는 나도 안다. 그들이 금전적 가치보다 독립언론의 가치를 더 소중히 여겨 줬기에 이번 전환이 가능하게 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이 마련해준 출발점에서 이제부터 독립언론 <프레시안>을 지키고 키워나가는 일은 우리 조합원들의 몫이다.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30130505122630&section=06&t1=n

 

강 기자가 '결의문' 초안을 보여주는데, 제목이 "주식회사 프레시안이 문을 닫습니다"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한 마디 참을 수 없었다. "낚시질 습성은 참 버려지지가 않나 봐요."

 

Posted by 문천

 

김기협: 어제 제주에서 열린 ‘최고수뇌회의’에서 선생님이 방성통곡을 터뜨렸다는 얘기를 김익렬 연대장에게 들었습니다. 회의 경위를 김 중령에게 듣고 그 통곡의 의미를 대충 짐작합니다만, 65년 후의 독자들을 위해 심경을 말씀해 주시지요.

 

안재홍: 일본 패망이 우리에게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미군 점령 하에서 거듭거듭 해 왔습니다. 미군의 압제가 일본인의 압제마다 덜하지 않다는 사실을 중요한 대목마다 느껴 왔고, 친일파가 일본의 압제를 거들어준 것처럼 미군의 압제를 거들어주는 친미파가 활개를 치는 세상이라면, 그것을 누가 ‘해방’이라고 하겠습니까?

 

작년 초 민정장관에 취임할 때 백범께서 말씀하셨죠. 그대는 이루는 것 없이 나쁜 말만 듣게 될 것이라고. 저도 그렇게 될 것을 모르지 않았습니다. 이 과도정부란 것이 조선인의 정부가 아니고 미군정의 간판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어찌 내가 모르겠습니까. 그런 정부에서 조선인을 위해 일할 수 있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양심 없는 친미파가 그 자리를 맡는 경우보다 나쁜 짓을 덜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어제 다시 처절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양심 없는 친미파가 멀쩡한 사람들을 친공-친소로 몰아붙이면서 자기네만이 미군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아양 떠는 짓은 늘 있어 온 겁니다. 통상 그렇게 몰아붙이는 대상은 그래도 자기주장을 나서서 하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이제 조용히 살아가는 순박한 농민들까지 공산폭도로 몰아붙이다니, 민족이 처한 참혹한 상황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재작년 10월 사태 때보다도 더합니다.

 

김기협: 그 동안 민정장관으로서 도지사의 보고를 통해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계셨나요? 어제 회의에서 접한 상황이 뜻밖의 것이었는가요?

 

안재홍: 유해진 지사로부터 이틀이 머다 하고 보고를 받고 있었는데도 막상 와보고 새로 깨우친 것이 많습니다. 폭도 수가 이리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을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폭도’가 아니라 불안한 마음에 마을을 떠난 주민들이 대다수겠지요.

 

일제 말기에 제주도에는 약 100명의 경찰관이 주재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300여 명까지 증원이 되어 있었는데도 이번 사태가 일어난 것을 보면 경찰이 약해서 일어난 일이 절대 아닙니다. 사태 발발 후 천여 명 응원경찰을 들여오고도 사태 확산을 막지 못해 경비대까지 끌어들이고 있지 않습니까?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김기협: 경찰이 약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면, 경찰이 너무 강해서 일어난 일일까요?

 

안재홍: 바로 그래요. 일제시대 경찰이 포악했다고 하지만, 최소한의 숫자만 배치해 놓으면 저희들도 주민들 눈치를 안 볼 수 없어요. 그런데 너무 많이 깔아놓으면, 옛말에 “소인이 한가로이 있으면 착하지 못한 짓을 한다”(小人閑居爲不善)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문제를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주민이 자발적으로 따라오는 정치라야 성공할 수 있는 정치입니다. 경찰이 자기네 힘만 믿고 주민을 억압해서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고 어떻게 ‘치안’(治安)이 이뤄질 수 있습니까? 경찰은 모든 치안 문제를 적색분자의 획책으로 몰아붙이는데, 그렇게 치안의 껍데기만 쳐다봐서는 백성의 마음을 편안히 하는 진짜 치안이란 연목구어(緣木求魚)일 뿐입니다.

 

제주도만이 아닙니다. 남조선의 경찰 인원은 일제시대의 두 배를 넘어 세 배를 바라보고 있는데 치안 상태가 더 못한 근본 원인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미국인의 의도가 일본인의 의도보다는 덜 나쁜 것으로 믿지만 행정력은 일본인보다 못하고, 그 때문에 조선인에게 더 큰 고통을 끼칠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김기협: 유해진 지사는 선생님과 가까운 인물이고 선생님이 추천해서 제주도에 오게 된 것으로 압니다. 공식 보고 외에 제주 사정에 관한 그의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은 없는가요?

 

안재홍: 속마음 털어놓은 게 있다면 내가 발설해서 안 되겠죠. (웃음) 없습니다. 어제 딘 장군이 먼저 돌아오고 송호성 장군과 나는 하룻밤 묵으면서 사정을 더 알아보려 했는데 딘 장군이 같이 돌아오자고 서두르는 바람에 유 지사와 조용히 얘기할 틈도 없었어요. 딘 장군은 제주도에 관한 정책,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거죠.

 

유 지사와 일본 시절부터 알던 사이고 국민당 이래 정당도 함께 해온 사람이기는 하지만, 내가 추천했다고 하는 데는 어폐가 있어요. 그 사람은 중앙정부 직책은 몰라도 목민관 스타일은 아니죠. 보낼 만한 사람이 따로 없어서 부득이 보낸 거예요.

 

김기협: 보낼 만한 사람이 따로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안재홍: 제주도가 막 도(道)로 승격해서 관직은 높지만 근무조건이 안 좋아서 가려는 사람이 없어요. 나 같은 사람은 절대 못 가요. 봉급은 얼마 안 되고 비용 들 일은 많은데 딴 재주 피울 생각 없는 사람은 갈 수가 없죠. 유 지사는 집이 부자인데다가 염치는 아는 사람인지라 그런 의미에서는 적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김기협: 김익렬 연대장은 어제 회의에서 조병옥 부장이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바람에 자기가 분노를 참지 못했다고 하는데 두 사람 태도를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안재홍: 내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그렇게 눈이 뒤집어질 소리가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조병옥 씨 태도는 원래 온 조선에 다 알려져 있는 것 아닙니까? 김 중령이 아무리 옳은 말을 했다 하더라도 회의 진행을 불가능하게 만든 책임은 분명히 그에게 있었습니다.

 

김기협: 얘기를 돌려서... 어제 김구, 김규식 두 분 선생이 평양에서 돌아왔습니다. 만나보셨는가요?

 

안재홍: 우사 선생은 어제 찾아가 만났고, 백범 선생은 오후에 가 뵈려 합니다.

 

김기협: 이번 평양행의 성과를 김규식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던가요?

 

안재홍: 생각보다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씀하면서도, 그리 만족한 기색은 아니더군요. 그분이 원래 염세적인 분이잖아요? (웃음) 보름 전 떠날 때 비관적인 말씀만 하던 것과 비교하면 그래도 희망적인 생각을 좀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김기협: 제일 큰 성과로 어떤 것을 말씀하던가요?

 

안재홍: 무엇보다 북쪽에서 전쟁 일으킬 염려를 덮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북쪽에 인민군 만들어놓은 것이 소련의 조기 철군 주장을 미국이 거부하는 이유 아닙니까? 4자회담 때 그 문제를 제일 많이 제기했는데, 민족상잔을 피해야 한다는 김두봉 위원장과 김일성 장군의 의지를 분명히 확인했다고 합니다.

 

김기협: 그런 일이 의지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일까요? 군대를 만들어놓은 이상 군대가 동원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 아닙니까? 설령 그쪽에서 도발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남쪽에서 도발할 수도 있는 일이고...

 

안재홍: 저쪽의 평화적 통일노선에 충분히 실현성이 있다고 봤기 때문에 전쟁 걱정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공산주의 노선을 고집하지 않고 대다수 인민이 환영할 만한 민족주의 노선을 앞세우려는 자세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며칠 전 평양 최고인민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안을 통과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토론에서 수정이 있었다고 해요. 수도를 평양으로 하기로 했던 것을 서울로 바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낫과 망치가 들어가는 국기 대신 태극기를 그대로 쓰기로 하고요. 이 헌법안이 북조선에 세울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통일국가의 헌법을 위한 북측의 제안이라는 거죠. 마찬가지로 인민군도 통일국가 군대를 만들기 위한 북측의 준비라는 겁니다.

 

김기협: 두 분 선생만이 아니라 이남의 중간파 모두가 걱정하던 것이 북측에서도 단독건국을 추진하는 게 아니냐는 문제였죠. 이번 방문으로 그 의심을 없앴군요. 그밖에도 생각을 바꾸신 것이 있던가요?

 

안재홍: 이북 인민의 생활상이 이남에 알려져 있던 것보다 괜찮은 편인 것을 보고 마음이 많이 놓였다는 말씀을 하더군요. 이북 사정을 나쁘게만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야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월남민이 많은 것을 보면 사실 걱정이 많이 되었죠. 그런데 이번에 가 보니 고급품 시장은 서울에 비해 아주 빈약해도 식량과 생필품 사정은 괜찮아 보이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장을 방문해 보니 장래가 밝게 보인다고 합니다. 일본 기술자를 보호하고 우대하며 기술을 순조롭게 넘겨받고 소련 기술자들 도움도 많이 받았다는데, 가동이 잘 되는 공장이 많다고 합니다. 경제원조는 이남에서 미국에게 받은 것보다 훨씬 적었는데도 그만큼 상황을 개선해 온 것을 보며 경제독립의 희망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기협: 이번에 전력대금 문제에도 성과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며칠 전 <서울신문>에도(5월 4일자) 북측의 송전 단절 가능성을 제기하는 기사가 나왔는데, 작년 5월까지의 전력 대금을 아직까지 20퍼센트밖에 지불하지 않고 있다는군요.

 

미군정 하는 일에 이해 안 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전력 문제는 진짜 이상해요. 발전시설 확충하는 데는 예산을 쓰면서 전기요금을 안 내다니. 게다가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오는 청구서는 본 척도 안 해요. 자기네는 소련군사령부만 상대한다면서. 과도정부에선 미군에게 미루고, 미군은 소련군에게 미루고, 소련군은 북조선인위랑 얘기하라고 하고. 전기 끊어지면 고생하는 건 남조선 인민이고 망가지는 건 남조선 산업인데, 미군은 뭐 하러 조선에 와 있다는 거예요?

 

작년 봄과 가을 전력대금 미납 문제가 심각할 때 오정수 상무부장이 평양 가서 협정을 맺어 온 덕분에 송전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것 아닙니까. 전력처럼 민생과 산업에 두루 중요한 문제는 미군들 눈치 볼 것 없이 과도정부라도 나서야 할 아닙니까?

 

안재홍: 오늘 딘 군정장관 기자회견에서 이런 문답이 있었습니다.

 

(문) 북조선 전력대금 지불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는 원인은?

(답) 지난번 80차량의 물자를 지불하였다. 그러나 북조선대표들이 요구하는 물자를 만족하게 공급할 수 없다. 더구나 쌀 같은 것을 요구하여 오는 데는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러므로 달러로 지불하고자 교섭하였으나 듣지 않는다. 현재 받고 있는 전기에 대하여 일정한 장소와 시일을 정하여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고자 수차에 걸쳐 공문을 보내었으나 아직 아무런 회답도 없다. 그리고 인천과 부산에 발전함이 설치되었으나 남조선의 전력소비는 자율적으로 유효적절하게 배전 공급을 하는 동시 일반의 절전을 보다 더 철저히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7일, “북조선 전력대 요구대로는 응할 수 없다.)

 

전력대금을 현물로 준다는 것은 협정이 되어 있는 일인데, 현물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충분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과도정부에게는 현물 마련을 위해 예산을 쓸 권한도 없고, 군정장관이 승인하지 않는 조그만 조치 하나도 취할 길이 없어요. 우리는 구경꾼입니다.

 

전력대금 미납에 따른 송전 중단 가능성을 없앴다면 이번 남북협상의 매우 중요한 성과입니다. 인민이 체감하는 문제고, 미군정의 무성의와 과도정부의 무능으로 늘 불안해하던 문제니까요. 송전 계속의 보장은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평양 측의 선의와 진정성이 이남 인민의 큰 신뢰를 받게 해줄 것입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