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문천

 

5월 10일의 선거결과는 14일까지 제주도 외에는 모두 개표가 끝났다. 개표결과를 보도한 5월 15일자 <경향신문>에는 “제주도의 3구역은 아직도 보고가 없다.”며 더 이상의 자세한 사정을 알리지 못했다. 2개 선거구의 선거가 무효가 될 것 같다는 보도는 19일에야 나왔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9일, “북제주 2구는 제외되나? 남제주군엔 오용국 씨 당선”)

 

선거가 무효가 될 정도라면 사태가 심상치 않은 모양인데, 제주 상황에 대한 보도는 원활치 못했다. 이 무렵까지 제주 상황의 기사를 가장 많이 싣고 있던 것은 <동아일보>였다. 5월 7일, 8일, 9일, 18일, 20일 5회에 걸쳐 정선수 특파원의 “제주도폭동 현지답사”가 큼직하게 게재되었다.

 

그런데 이 연재는 경찰 대변지로서 <동아일보>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어서 독자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 같다. 특히 5월 8일자의 제2회 게재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5월 1일자 일기에 설명한 오라리사건 얘기인데, 예상했던 대로 경찰 입장을 잘 대변해주다가 이런 대목까지 나오지 않는가!

 

때마침 이들(경찰토벌대)의 장도를 전송해주려고 나왔던 백전노장 백만원의 현상금이 걸린 문용채 제1구 서장은 트럭 가까이 달려와서 자신의 권총을 기자에게 내주며 “만일을 위하여...”라고 친절을 보여준다. (...) 기자도 “하마터면” 하는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팽!” 기분 나쁜 울림을 내며 총알은 기자의 모자를 스치고 또 양 귀를 깎을 듯 지나가는 총탄 아래서 기자는 들었던 붓대를 동댕이치고 허리에 찼던 권총을 내뽑아 안전장치를 풀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 날 오라리에서 취재기자가 붓대를 동댕이쳐야 할 만한 상황이 없었다. 정선수 기자는 경찰서장에게 받은 권총 휘두르고 싶은 생각만 간절했고 취재는 현장에서 할 필요 없이 돌아와서 경찰 쪽 얘기를 받아쓰는 역할이었나보다. (4-3취재반은 이 기사의 허구성을 <4-3은 말한다 2> 168-172쪽에 지적해 놓았다.) 5월 20일의 마지막 회는 이렇게 끝난다.

 

그들이 사용하는 민주라는 말은 소련 휘하 공산당독재라는 뜻이다. 이번 평양연석회의는 솔개미의 풀 뜯어먹는 회의요, 거기 몰려갔던 동무들도 좌중에 몇 마리 꿩들이 되었으니 그는 솔개미는 육식하는 새가 아니더라는 결론을 얻어가지고 와서 다른 꿩들에게 솔개미와 같이 놀기를 권하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솔개미는 결코 마른 풀을 뜯어먹는 새가 아니다. 공산주의 정체를 보려거든 평양 모란봉극장에 가지 않아도 제주도의 형편을 보면 알 것이다. 수족 잘린 노인들과 배 갈린 태모(胎母)를 보면 알 것이다. 그들은 ‘인민’ 이외에는 모두 원수로 본다. 원수인지라 윤리가 없고 자비가 없고 오직 전술 전략이 있을 뿐이다. (...)

 

제주의 비극이 남조선 각지에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민족진영의 결속 강화가 필요하거니와 특히 대중에 대한 선전력의 증대가 긴급하다. 신문 기타 민족진영의 무기력이 지금과 같고는 이 소련 계열의 모략을 파쇄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비극을 방지하는 둘째 요건은 국립경찰력의 강화와 국민과 경찰의 협력 증진이다. 이번 제주사건에 경찰관은 은인과 용기를 둘 다 보여준 것은 감격할 일이다. 복부관통 총상을 받고도 무기를 빼앗으려 덤비는 폭도와 응전하여 이를 격퇴한 것이나 참살 당한 가족의 시체를 매장할 틈도 없이 눈물을 뿌리고 다시 출동하는 광경을 목격한 필자는 우리 경찰관에 대하여 눈물겨운 감사와 마음 든든한 신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선수 기자의 취재가 이뤄진 경위는 밝혀져 있지 않은데, 다른 신문에는 주어지지 않은 편의와 허락을 <동아일보>만 얻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현지답사”는 경찰(내지 미군정)의 홍보작전의 일환으로 보인다. 경찰은 자기네가 원하는 고압적 진압작전에 유리한 쪽으로만 제주 사정이 알려지기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과 미군정의 견해와 다른 관점을 가로막는 것 또한 이 홍보작전의 범주에 들어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독자적 시각을 들이대려는 신문의 접근을 막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고, 관리들의 의견 발표에도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김희주 검찰관의 아래 발언은 이 압력에서 벗어난 예외적 사례로 생각된다.

 

“제주도 소요 종식은 아득 - 김 검찰관의 실정조사 담”

 

검찰청장의 명령으로 지난 6일부터 17일까지 제주도소요 실정 조사차 현지에 출장 중이던 광주지검 김희주 검찰관은 귀청 후 현지 실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요사태는 점차 규모가 확대되어 쌍방에 매일같이 희생자를 내고 있다. 발단 원인으로는 5·10선거 반대가 직접 원인이 되고 있으나 간접적으로 관민을 막론하고 도내인 특유의 배척심리가 각 방면에서 발발된 점도 있다고 본다. 즉 일례를 들면 서북 출신 경관들의 과도한 태도에 분개한 인민의 반항도 관계되고 있는 듯하다.

 

한라산에 본거를 두고 주야로 각 부락에 출몰하는 그들은 기관총과 사제 수류탄 죽창 등으로 경관과 우익요인을 살해하려 하고 있는데 본도에서는 상상 못 할 만한 산림이 방해가 되어 그의 토벌은 실로 어려운 상태에 있다.

 

살벌한 분위기 속에 쌓여 있는 양민들의 희생은 날로 심각하여 가고 있으며 시장에는 겨우 보리·조 등이 간혹 한 말 정도씩 매매되고 있는 형편으로 도민생활은 극도로 피폐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급속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3일)

 

얼마 후 검찰총수 이인이 경찰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는 논평을 낸 것도 이런 식의 독자적 정보 수집을 발판으로 한 것이었을 것이다.

 

“경관보다 유능한 사람을 - 제주사건에 이 검사총장 견해”

 

제주도 폭동사건에 대하여 이인 대검찰총장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1년 전에 제주도 시찰을 할 때 이미 관공리가 부패한 것이 눈에 띄었다. 고름이 곪아서 터지려 할 때 공산당이 찔러 파종된 것이다. 산중에 있는 폭도들은 생명보호만 하여 준다면 하산할 기세가 보이니 백 사람의 경관을 보내기보다 유능한 한 사람을 보낼 것이며 각 부문의 최고책임자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본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16일)

 

일반 언론에 대한 경찰의 발표는 늦고 제한적이며 부정확했다. 이 무렵의 일로 보도된 사건 하나를 검토해 본다.

 

경찰당국 언명에 의하면 지난 20일 북제주군 한림면 저지리에서는 부락민이 일하러 나간 사이에 부락 전체에 방화한 사건이 있어 가옥 식량 및 의류까지 소실당하고 150여 호의 부락은 단지 4호밖에 남지 않았다는바 약 700여 명의 남녀노소 부락민들은 뒷산에서 공포와 굶주림에 떨며 노숙하고 있는 것이 27일에야 경찰에 발견되었다 하는데 그 중 4명의 여자는 한림원에 입원 가료중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1948년 6월 3일)

 

5월 20일에 벌어진 사건을 5월 27일에야 경찰이 파악하였고 그 사실을 6월 들어선 뒤에 발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5월 13일 새벽에 발생했고 경찰이 즉시 파악한 것이다. 사건 이틀 후 40여 명의 경찰 대부대가 응원차 파견되어 주둔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은 산사람들이 저지른 것 맞다. 수많은 중산간마을이 4-3사건 때 불타버렸는데, 거의 모두 군-경의 소행이고 산 쪽에서 저지른 큰 사건은 이것 하나였다. 저항세력은 주민과 유대관계가 깊었기 때문에 마을을 파괴하는 일이 없었는데 왜 이곳은 예외였을까?

 

경찰지서가 있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일제시대에 일본인은 제주도에 일주도로를 뚫고 도로변의 해안마을을 행정 거점으로 삼았다. 모든 관공서와 근대적 시설이 해안마을에 설치되었다. 4-3 당시 제주도의 십여 개 경찰지서 중 중산간마을에 설치되어 있던 것은 성읍리(표선면)와 저지리뿐이었다.

 

제주도의 촌락은 전통적으로 해촌, 양촌, 산촌의 세 가지로 분류되었다. 개항 전에는 해발 50~100미터 위치의 양촌이 지역 질서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농업을 기본산업으로 하는 양촌 사람들은 해촌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일본세력 진출 이후 해촌의 역할이 커지면서 양촌은 더 높은 지대의 산촌과 함께 ‘중산간마을’로 분류되면서 위상이 떨어졌다.

 

일제시대를 지나는 동안 보수적 분위기를 지키는 중산간 사람들과 외부세력과 접촉과 결탁이 많은 해안 사람들 사이에 얼마간의 이질감이 자라났는데, 해방 후 경찰 등 외지인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이 이질감이 더 깊어졌다. 외지인에 대한 대립의식이 제주인 사이에도 점점 더 짙은 그림자를 던지게 된 것이다.

 

이 간극이 경찰지서의 존재로 인해 저지리 큰 마을과 자연부락 사이에서 예리하게 나타났다. 경찰의 확고한 관할을 받는 큰 마을에서는 우익청년단 조직이 진행되고 많은 주민이 경찰보조원 노릇을 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리고 1948년 들어 긴장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2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명이동이란 자연부락에 저항적인 분위기가 강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저지리 큰 마을과 명이동 주민들 사이의 적대관계의 에스컬레이션 과정이 <4-3은 말한다 3> 28-36쪽에 그려져 있다. 이것은 저지리만이 아니라 제주도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던 상황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찰 및 관리들의 활동공간 안에 들어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조건 때문에 이웃마을 사람들과의 사이에 입장에 갈라지는 일이 수없이 많았다.

 

갈등 초기에는 경찰이라도 그 행실에 따라 선별적으로 응징의 표적이 되었지만, 참혹한 일이 쌓이다 보니 경찰관의 가족이라는 것만으로도 죽일 놈이 되었고, 심지어 경찰에게 방을 빌려주거나 밥을 해준 사실만으로 ‘인민의 적’이 되는 분위기가 자라났다. 폭력의 증폭에 이용되는 폭력의 ‘내면화’는 폭력의 피해 중에서도 가장 참혹한 것이다.

 

연전에 나온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돌베개 펴냄)을 보며 참 중요한 영역으로 이제 손이 뻗치기 시작하는구나, 반갑게 생각했다. 한국전쟁의 피해 중에도 숫자로 나타나는 피해보다 사회와 인간관계의 파괴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제주도에서는 다른 곳에 앞서서 이 문제가 터져 나온 것이었다.

 

박찬승이 진도의 한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을 살펴본 뒤에 붙인 글 한 대목을 옮겨놓는다.

 

X리 비극의 원인은 도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동족마을 내부에서의 각 지파 간의 경쟁의식과 사소한 갈등은 오래된 것이었고, 그것은 어느 동족마을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해방 공간의 정치적 변화는 그러한 경쟁의식과 갈등에 불을 질렀다. 그동안 마을에서 우세한 입장에 서 있었던 중파가 해방 이후 좌익에 참여했다가 몰락하는 가운데, 열세에 놓여 있던 계파는 우익에 적극 참여하여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리고 경찰로 표현되는 국가권력은 계파의 우익 청년들을 이용하여 중파의 좌익 청년들을 억압했다. 이 과정에서 양쪽 청년들 간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즉 사소한 갈등을 증폭시키는 계기를 만든 것은 한반도의 분단, 미군정에 의한 의도적인 좌우 분화, 그리고 경찰로 표현되는 국가권력이었다. 이후 양자 간의 갈등은 내연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그러한 갈등을 엄청난 규모로 증폭시키면서 친족 내부의 학살극으로 이끌었다. (127-128쪽)

 

 

Posted by 문천

 

이 글은 손석춘의 책 <박헌영 트라우마>에 대한 비평이 아니다. 그 책에 대한 안재성의 리뷰 “김일성 대신 그이가 북한의 지도자였다면?”에 대한 비평이다. 짧은 글 한 꼭지에 비평을 단다는 것이 좀 어색한 일이기는 하지만, 안재성이 남로당 인물들에 대한 조사와 서술을 많이 해온 분이라는 점에서(<박헌영 평전>(실천문학사 펴냄)도 썼다.) 이 글에 나타난 그의 관점을 점검할 필요를 느낀다.

 

그는 글머리에서 “박헌영과 절친하던 소련의 역사학자 샤브시나 여사”의 증언을 재인용함으로써 박헌영에 대한 애정을 밝혔다. 현명한 선택이 아니라고 본다. 샤브시나는 해방 당시 서울에 주재하는 소련 부영사의 부인이었는데, 그의 기록 <1945년 남한에서>(김명호 옮김, 한울 펴냄)을 보면 매우 편파적인 기록자다. 해방 직후 상황의 외국인 목격자로서 그의 기록을 내 “해방일기” 작업에 많이 활용하고 싶었지만 심한 편파성 때문에 가치가 적었다.

 

박헌영을 일방적으로 미화한 샤브시나의 묘사를 글머리에 옮겨놓은 데서부터 박헌영을 높이 평가하려는 그의 의지가 확인되고, 이 의지가 글 전체를 관통한다. 때로는 박헌영을 높이 평가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으로까지 나타난다.

 

예컨대 그는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 아니라고 단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남한 진보지식인들의 이러한 무지와 편견 혹은 기회주의적 측면”이라고 여지없이 매도한다. 이런 가혹한 비판을 하면서 그 대상을 명확히 표시하지 않는 것은 올바른 비판의 태도가 아니다.

 

나는 비록 진보지식인도 아니고 박헌영에 관해 깊은 연구를 쌓지 못한 사람이지만, 최근 3년간 해방공간의 상황을 넓고 깊게 살피려 애써 온 사람으로서 박헌영에 대한 안재성의 평가를 수긍하지 않는 이유를 나름대로 밝히고 싶다.

 

안재성은 글 끝에서 박헌영은 1945년 11월 30일 방송 연설이 “합리적이고도 감동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고 극찬하며 독자들에게 읽어보기를 권하는데, 나는 그에게 공산당-남로당 외의 그 무렵 다른 연설도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다. 듣기 좋기로 그만 못한 연설을 찾기 힘들 것이다. 정태식이 대독한 이 연설에는 당시 좌익에서 누구나 주장하던 상식적 내용을 넘어서는 것이 없다.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이 연설에서 박헌영은 6개 강령을 제창했는데, 그 대부분을 박헌영 자신이 행동에서 등진 것으로 나는 본다. 예컨대 제5조는 ‘정론 논쟁의 올바른 수단 방법’인데 박헌영이 이끄는 공산당-남로당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태를 많이 보였다. 그리고 제6조는 ‘각 정당은 주의 강령이 동일할 것 같으면 단일 정당으로 통일할 것’인데, 1946년 여름에서 가을에 걸친 좌익 합당 과정에서 박헌영 일파는 극히 패권주의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손석춘은 책 8쪽에서 “심지어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이라고 부르짖는 진보세력도 남쪽에 나타났다.”고 했는데 그런 주장을 내가 살펴본 것은 없다. 하지만 그의 ‘간첩죄’의 일부분은 사실일 것 같다는 생각을 그의 행적을 더듬어 오며 나는 갖게 되었다.

 

예컨대 그의 ‘월북’을 둘러싼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46년 9월 7일 미군정은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들의 체포령을 내렸고, 떠들썩한 체포 작전으로 서울 시내가 발칵 뒤집혔다. 박헌영은 잠적했다가 몇 주일 후 몰래 38선을 넘었다. 그 직후에 공산당이 남로당으로 개편되었는데 허헌이 명목상 위원장을 맡은 남로당을 박헌영은 해주에서 지도했다.

 

9월 7일의 체포령이 경찰 아닌 군정사령부 쪽에서 나온 것부터 이상한 일이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기자들에게 “이번 사건은 경찰에서 단독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상부명령으로 경찰이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 수배 이유는 미군정 비방으로 포고령을 어겼다는 것이었다. 당시 비슷한 혐의로 체포된 이주하는 공안방해죄로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사소한 혐의로 공산당 대표를 체포한다는 것은 미군정에게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좌익 지도자 입장에서는 체포를 당하고 법정투쟁과 선전공세를 펴는 것이 자연스러운 길이었다. 손석춘은 책 189쪽에 1946년 미군정이 조선공산당을 불법화했다고 적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박헌영 자신에게 북쪽으로 넘어갈 동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서울이 모든 면에서 조선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공산당도 서울에 당 중앙이 있었고 박헌영이 그것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소련의 직접 지원을 받는 이북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성장이 원활했다. 박헌영은 해방 직후 서울에 오자마자 소련영사관에 매달려 활동의 근거로 삼았는데 이북 주둔 소련군은 영사관보다 비교가 안 되게 더 큰 지원 통로가 되었다. 1946년 7월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 박헌영은 소련의 지원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 이북에 가 있을 필요를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상황에서 체포령은 마치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려준 격이었다. 그래서 박헌영과 미군정 핵심부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 사령관과 박헌영의 초기 만남을 둘러싼 의문도 이 생각을 뒷받침해 준다.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 연대기>(역사비평사 펴냄)에 의하면 두 사람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만남은 1945년 10월 27일과 11월 15일에 있었다. 그런데 박헌영의 기소장에는 11월 초순 언더우드와 함께 하지를 만난 일이 적혀 있다. 언더우드(원한경)는 10월 26일에 사령관 고문으로 조선에 부임했는데, 해방 전에 박헌영에게 도움을 준 일이 있다고 한다. 박헌영 기소장에는 언더우드가 “선교사로 가장한 미국 정탐기관의 노련한 탐정”으로 지목되어 있다.

 

사령관 고문으로 막 부임한 언더우드가 아는 사이인 공산당 지도자와 사령관 사이의 비밀모임을 주선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비선(秘線)을 유지함으로써 각자의 조직에서 관리자 역할에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가능한 일이다. 약간의 정보 교환만 해도 하지에게는 좌익의 동향 파악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박헌영에게는 좌익의 헤게모니 장악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생각하면 박헌영의 항일투쟁 경력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그가 똥을 집어먹는 등 정신병자 행세로 병보석을 받은 얘기를 손석춘이 책 앞머리에 적었는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같은 사건으로 수감된 죄수들 가운데 옥사한 사람은 있어도 병보석은 박헌영 하나뿐이었다. 병이 나면 감옥 안에서 죽게 놔두지, 풀어주지는 않는 상황에서 죽을병도 아닌 정신병으로 병보석? 그리고 병보석으로 나온 몇 달 후에 해외탈출 성공? 일제당국과 사이에도 어떤 교감이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 증거는 없지만 합리적 의심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 글은 손석춘의 책이 아니라 그에 대한 안재성의 리뷰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재성 글의 근거를 확인하기 위해 손석춘의 책도 대충 훑어보았는데 양쪽 모두에 해당되는 문제 하나를 지적해야겠다. 보천보 얘기다.

 

안재성은 ‘보천보’가 어느 작은 마을에 있는 둑 이름이라고 했다. ‘보천洑’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보천堡’는 면소재지 급의 마을 이름이다. 어떻게 이런 착오가 나왔는지 궁금해서 손석춘 책을 뒤져보니 78쪽에 실린 원경의 발언 내용이다. 물론 문제의 초점은 보천보 전투의 주인공이 김일성이냐 여부에 있는 것이지만 기본 팩트는 정확하게 제시해야 독자의 신뢰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원경의 잘못된 생각을 아무 여과 없이 독자에게 전한 것은 두 분 모두에게 아쉬운 일이다. <프레시안> 편집자에게도 아쉬운 일이다.

 

현실에서 좌절을 겪은 인물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박헌영을 높이 평가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손석춘이 책 뒤에 ‘8월 테제’를 붙여놓은 것은 이것이 그가 이론적 지도자 자격을 얻은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중석은 ‘8월 테제’의 “많은 부분이 12월 테제의 번안이라고 판단될 정도”라고 평했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36쪽)

 

12월 테제는 1928년 제6차 코민테른의 비타협적 노선에 따른 것이었다. 1935년의 제7차 코민테른에서는 연대를 중시하는 쪽으로 노선이 바뀌었다. 그런데 박헌영이 제7차 코민테른의 노선을 해방 때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바로 샤브시나의 증언으로 알아볼 수 있다.

 

재건위원회에서 정치노선을 작성할 때 박헌영은 우리 영사관 도서관에 자료 특히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 관련된 자료를 여러 번 의뢰하곤 하였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연대기> 214-215쪽에서 재인용)

 

해방 직후 서울 시내 여기저기 “박헌영 선생은 어서 나타나 우리를 지도해 주시오!” 하는 벽보가 나붙어 눈길을 끌었다고 한다. 나는 박헌영의 지도력이 ‘8월 테제’보다 이런 책략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비밀을 좋아하는 책략가였다는 사실은 그의 행적 어느 대목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박헌영의 책략가 성향이 민족사회나 좌익 전체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이끈 공산당과 남로당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현시적 효과를 위해 당의 역량과 인민의 신뢰를 지나치게 소진시켰다는 지적은 널리 제기되어 왔다.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그의 책임도 그 연장선 위에서 거론되는 것이다. 그가 실제로 행사한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쥐었을 경우 이 민족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고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안재성의 저술을 내 작업에 고마운 마음으로 많이 활용해 왔지만, 근거 없는 생각을 너무 앞세우지 말아야 독자의 신뢰와 이해를 더 잘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번 글이 특히 그랬다.

 

박병엽의 진술을 안재성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노동당 간부 출신으로 남한에서 여생을 보낸 박병엽의 회고 내용이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2책, 중앙일보사 펴냄)에서는 ‘서용규’라는 가명으로 소개되었고, 최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과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선인 펴냄)에서 본명으로 나타났다. 나는 “해방일기” 작업 중 많은 장면에서 그의 진술이 정황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내렸는데, 아마 안재성은 나랑 다른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http://pressian.com/books/article.asp?article_num=50130507135942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