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남북관계에서 개성공단이 가진 의미를 1948년에 갖고 있던 것이 송전선(送電線)이었다. 해방 당시 38선 이북에는 석탄, 전기 등 에너지자원이 많았고 이남에는 식량자원이 많았다. 38선의 경색으로 그 교류가 막힌 것이 해방조선 경제의 큰 장애가 되었는데, 전력 하나만은 이남으로 공급이 계속되었다. 이남 당국의 전력 대금 지불이 원활치 못해도 이북 당국은 민생과 직결되는 송전 문제를 정치와 분리해서 배려한 셈이다. 1948년 5월 14일 정오를 기해 이 배려가 사라졌다.

 

“북조선 급기야 송전을 끊다. - 교섭 전화 중 ‘딱!’ - 단전 시간은 14일 정오”

 

북조선에서 보내는 전력 문제는 그 동안 여러 가지로 교섭 중에 있던 중 지난 14일 오전 12시를 기하여 드디어 송전을 절단하였다 한다. 그런데 북조선인민위원회로부터의 통고에 의하면 5월 14일까지 남조선으로부터 조선인 대표자를 평양에 파견하라 하였음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송전될 때까지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지난 13일 오후 3시 30분 북조선인민위원회로부터 송전선 고압선 전화를 통하여 남조선 전기관계 최고 책임자에게 통화를 요구하여 왔다 한다. 그리하여 남조선 과도정부 오 상무부장은 북조선인민위원회 이문환 산업국장과 대화를 하였는데 북조선 측에서는 라디오를 통하여 14일까지 평양에서 전기에 관한 회담을 하기로 통고하였음을 이유로 14일 오전 12시까지 조선인대표자를 평양에 파견할 것을 요구하고 만일 이에 응하지 않으면 14일 12시를 기하여 송전을 절단할 것을 언명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오 상무부장은 남조선의 관계당국과 타협하여 14일 오전 12시까지 즉시 회담하기로 하였다 한다.

 

그런데 14일 오전 8시부터 9시까지 북조선 측과 전화로 통화하려 하였으나 이용하여 오던 고압선 전화는 이미 절단되어 있어서 할 수 없이 송전선으로 연결된 조선전업사 전용전화로써 겨우 연락이 되었을 때에는 오전 10시였다 하는 바 오 상무부장은 이 전화를 통하여 북조선 측과 교섭하려 하였으나 이 전화는 평양에 있어서의 수화자 측의 지점과 인민위원회 측의 거리는 약 4마일이 떨어져 있는 관계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이 산업국장에게 연락하여 통화하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 오전 12시가 되자 즉시 송전은 중지된 것이라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5일)

 

이 조치가 남북간 대립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5월 16일자 <동아일보>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만주에까지 배전하는 잉여의 북조선 전력 - 동족 간에 단전이 웬 말?”

 

북조선 소련당국은 남조선의 산업경제건설을 방해하고 공산당 반동분자들을 통하여 같은 혈통을 물려받은 동포 형제들을 살상케 하며 각종 시설을 파괴하고 심지어는 민족갈망의 총선거를 반대하던 나머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우리들이 이야기하였던 바와 같이 지난 14일 드디어 남조선으로의 송전을 절단하는 횡폭한 용단을 내리게 되었다.

 

지금 북조선에는 압록강 수력전기를 비롯하여 장진강 허천강 부전강 강계 부녕 등 각 수력발전 시설에서 2백만 킬로왓트에 가까운 전력을 일으켜 만주와 간도에까지 송전하고도 오히려 20만 킬로왓트의 전력이 남는 형편으로 이는 마땅히 조선의 산업경제를 재건하고 생활을 향상 발전하기 위한 원동력으로 이용되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을 점령한 소련군으로 말미암아 남북에 나누인 부모 형제의 본의 아닌 피눈물을 자아내게 하고야 말았으니 이 약소민족의 억울한 실정을 어디다 호소할 것이랴! 남조선의 2천만 동포형제는 조국 조선이 당면한 험난한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과학과 자본과 노력을 총동원하여 장성하는 조선의 힘을 더욱 충실하게 발전시키기에 모든 정성을 이바지하여야 할 것이다.

 

과연 이 사태의 책임은 북쪽에 있는 것이었나, 남쪽에 있는 것이었나? 북쪽에서는 5월 10일 평양방송을 통해 5월 14일까지 “전력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남조선 조선인 대표”의 평양 방문을 요청하면서 불응할 때는 송전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전기 중단을 통고 - 4김 씨의 언약도 공수표”

 

[조선 제공] 10일 밤 평양방송은 남조선전력공급문제에 관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 김책 부위원장 명의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미군사령부는 자기의 대표가 서명한 동 협정을 충실히 하지 않고 전력 대가 완납기일이 이미 10개월이 지난 1948년 4월 1일까지 협정대가의 1.6%[15.6%의 오타인 듯]밖에 지불하지 않았으며 그 후 4월중에 납부할 것을 종합해도 전력대가의 20퍼센트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미군사령부는 1947년 6월 1일 이후에 현재까지의 전력공급에 대하여는 결정까지 체결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미군정당국은 남조선인민들의 어떠한 곤란도 이것을 타개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미군정당국이 전기 문제와 대가 문제를 조절하지 않으려고 하느니만치 우리는 남조선조선인당국 대표를 파견하여 이 문제에 대한 협약을 우리 조선사람끼리 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남조선전력문제에 관하여 조선인끼리 협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오는 5월 14일까지 전력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남조선 조선인 대표를 북조선 평양시에 파견할 것을 제안한다. 만일에 5월 14일까지 이에 불응할 시에는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본의는 아니나 남조선에 대한 전력공급을 결정적으로 중단할 수밖에 없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2일)

 

평양 방문 요청 대상자는 당연히 군정청 상무부장이다. 오정수 상무부장은 1947년 5월과 10월에 평양을 방문해서 송전 문제의 이남 측 입장을 대표했던 사람이다. 이제 단전 사태에 임해 그는 경위를 이렇게 밝혔다.

 

“‘전력대(電力代) 누가 아니 준대나’ 오 상무부장 단전의 경위 설명”

 

13일 오후 3시 반 돌연 북조선으로부터의 전화가 있다는 통지를 조선전업사로부터 받고 북조선 이 산업국장과 통화를 하였다. 그런데 북조선 측은 이미 송전 문제에 관하여서는 라디오를 통하여 통고하였음을 이유로 하나 나는 남조선은 군정 하에 있어 관계당국과 타협하여 14일 12시까지 즉시 통지하기로 하였는데 14일 오전 8시경에는 북조선 측에서 이미 연락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전력대가의 35%는 벌써 지불되어 있거니와 45%의 지불대상은 이미 준비되어 있으며 북조선에 운반하여 가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다. 그리고 나머지 전력대가를 지불하기 위한 물자는 수송 도중에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15일)

 

5월 13일 오후까지 꼼짝도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10일 밤 평양방송은 듣지 못한 것은 물론 신문에 보도된 것도 읽지 못했다는 건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북쪽의 전화를 받고서야 “남조선은 군정 하에 있어서” 관계당국과 타협한 뒤에야 통지를 할 수 있다니! 전력 수요의 절반 이상을 북쪽에서 받아 쓰는 형편에 공개적인 송전 중단 위협을 받고도 상무부장으로서 아무 한 일이 없고 할 일도 없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러나 가만 생각하면 오정수 개인 책임으로 돌릴 일이 아니다. 그가 왜 애가 타지 않았겠는가. 그가 꼼짝 못하게 미군 측이 막았을 것이 분명하다. 협상 내용은 차치하고, 평양 방문 자체가 미군 측 허락 없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 사령관은 최근에도 전력 공급에 관해 북조선인민위원회와 교섭하지 않을 뜻을 밝힌 바 있었다.

 

“괴뢰정권과 교섭 않는다. - 전력 문제로 하 중장 코 장군에 송한(送翰)”

 

[서울 2일 UP 조선] 하지 중장은 지난 4월 27일 북조선 소련군사령관 코로트코프 장군에게 발송한 내용을 공개하였는데 그중에서 하지 중장은 북조선으로부터의 전력 대금 지불에 관하여 미국은 북조선 괴뢰정부와 교섭하라는 소련 측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한편 그는 “인민위원회를 북조선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와 교섭할 의향도 없다.”고 말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3일)

 

하지는 단전 이튿날 발표한 성명에서도 미국 당국이 “조선에 진주한 이후 현재까지 전력가 지불에 관하여는 제반노력을 다하여 교섭하여 왔다”는 것을 강변하고 소련 측과 협정 체결을 위한 회합을 요청해 왔으나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주장한 다음 이렇게 말했다.

 

“소련당국은 그들의 주구인 조선인을 통하여 남조선 내의 선량한 국민들을 공산당 지배하에 유도하려는 정치적 모략으로 남조선에 대한 송전을 단절하고 있다. 또 그들은 남조선 내의 그들의 주구와 세포기관을 동원하여 남조선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파괴하고자 요즈음 수개월간 마음대로 감행하여 오던 살인 파업 방화 등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 미군당국은 아직까지도 소련 측 대표와 회담하여 전기요금문제에 관하여 타협에 도달할 용의가 있다.

(...) 그리고 또 최근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2명의 저명한 조선인 지도자들이 발표한 공동성명서에서는 북조선 괴뢰당국에서 자기들에게 남조선 송전을 단절치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고 하는데 이 또한 흥미있는 일이니 (...)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 허위 약속이었으며 이러한 종류의 약속은 그들의 정치적 지위가 유리하게 호전될 때에는 폐기될 성질의 것이다. (...) 그리고 단전의 시일이 막부당국으로부터 지령되었다는 사실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6일)

 

미군당국이 북조선인민위원회랑 직접 교섭하고 싶지 않으면 남조선임시과도정부는 뒀다가 뭐에 쓰겠다는 건가? 작년 5월과 10월에 했던 것처럼 오정수가 평양에 가서 일 처리하도록 하면 될 것 아닌가. 왜 조선인의 자치에 맡겨놓고 물러나 있는 소련군에게만 매달려야 하나? 미군 측이 단전 사태를 고의적으로 유발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단전 사태는 남조선 민생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미군정이 남조선의 ‘유일한 정부’를 자임한다면 단전 사태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단전 사태를 유발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선 미국 발전선이 들어온 상황부터 본다.

 

“북조선 송전 중단에 대비 - 미 발전함 남조선에 정박”

 

[워싱턴 15일 발 조선] 미 관헌 측에서는 북조선 소련군당국이 베를린과 비엔나에서 미국 교통과 통신기관에 대하여 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전술로 남조선지대에 대한 전력 공급을 절단하려고 위협하고 있다 한다. 미국은 이와 같은 비상시에 대비하여 전력을 공급할 발전선을 파견하고 있다. 그런데 당국자의 말에 의하면 북조선의 요구는 작년 5월 이래 남조선에서 사용한 전력에 대하여 수천 불의 대가를 지불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북조선으로부터의 전력 공급 중단을 각오하라는 것인데 미군당국은 소련과 원만한 해결을 하려는 방침으로 교섭 중에 있다 한다.

 

한편 미국에서는 자고나 호(발전함)를 남조선에 파견하였는데 이에 추가하여 엘렉트라 호도 파견하였다 한다. 이 두 발전함은 북조선으로부터 전력이 차단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남조선 각지의 전력을 보충시킬 것이라 한다. (...) 1947년 4월 이래로 남조선은 전력은 받고 있으나 이에 관한 협정은 성립되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최근 북조선인민위원회의 통고는 전기 물자를 제공하는 외에 수천 불의 채무를 지불치 않으면 송전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한다. 그리하여 미국은 소련사령관에게 대하여 이와 같은 위협의 확인을 요구하였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16일)

 

“발전 못하는 미 선박 우리 기술자가 완성”

 

미국 발전선 엘렉트라 호는 인천 도크에 입항한 지 2년이 되어도 발동기 고장으로 발전을 못하고 있었는데 그간 미인 기술자가 수리 못하고 있던 것을 조선인 기술자의 손에 수리가 완료되어 지난 4월 30일 남조선 전력망에 연결을 끝마치게 되어 근일 중에 발전을 개시하기로 되었다. 그런데 이 발전선의 최대 발전량은 4천KW라 하며 평균 발전력은 2,500KW라 하는데 전력 부족에 허덕이는 남조선 전력 사용에 큰 도움이 되리라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5일)

 

미군정은 북측의 배려에 의지하지 않는 전력 대책을 강구한 것이다. 해상 발전의 원가가 지상 발전보다 높을 것은 당연한 일이고, 두 척 발전선으로는 이북으로부터의 송전에 비해 절반도 공급이 안 된다. 발전선 배치는 비상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배치받아 놓고 보니 하지는 그것을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송전 협정 체결과 전력 대가 지불 대신 발전선 활용을 택한 것은 남조선의 북조선과의 관계를 끊고 미국에 더욱 의존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가 5월 15일 성명에서 언급한 “최근 남북협상에서 돌아온 2명의 저명한 조선인 지도자”란 물론 김구와 김규식을 가리킨 것이다. 5월 5일 서울에 돌아온 두 사람은 이튿날 발표한 공동성명 끝부분에서 “우리 민족끼리는 무슨 문제든지 협조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증명”하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 예를 들어 말하면 첫째 북조선당국자가 남조선 미당국자와의 분규로 인하여 남조선에 대하여 송전을 최단기간 내에 정지하겠다고 남조선 신문기자에게 언명한 바 있었고 둘째 연백 등 수개처의 저수지 개방문제도 원활히 하지 아니한 일이 있었지마는 이번 우리의 협상을 통하여 그것이 다 잘 해결된 것이다. 앞으로 북조선당국자는 단전도 하지 아니하며 저수지도 원활히 개방할 것을 쾌락하였다. 그리고 조만식 선생과 동반하여 남행하겠다는 우리의 요구에 대하여 북조선당국자는 금차에 실행시킬 수는 없으나 미구에 그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7일)

 

같은 날 김규식은 외국기자단 회견에서도 미군정의 부패상을 비판하여 “40년간 일본 점령 중 조선인은 부정 일본인과 협력하기를 배웠으며 현재 그들은 이 경험을 이용하여 미국인이 그들의 부패를 조장하도록 애쓰고 있다. 약간의 미국인은 부자가 되어 귀국하였다.”라고 말하고, 이북 당국자들의 약속에 대해 “북조선정부는 남방에 전력과 관개용수를 계속 공급할 것을 구두로 승낙하였으며 내란은 없으리라고 약속하였다. 그들의 말한 바는 진정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남북협력에 대한 큰 기대를 표했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8일)

 

미-소 양군이 철수하더라도 이북 측의 군사적 위협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은 남북협상의 의미를 크게 키워주는 것이었다. 미국의 철군 거부와 ‘가능지역 선거’ 주장이 모두 이 위협을 핑계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김구와 김규식은 외국군 철수 후에도 “전쟁은 없다”는 이북 측 약속의 진정성을 믿는다고 했다. 그 믿음은 곧 미국 입장의 거부였다.

 

미군정에게는 이 믿음이 남조선 인민에게 퍼져나가는 것을 가로막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 효과적인 길 하나가 송전 중단 사태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북 측이 평화의 원칙을 지킬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전력과 관개용수 계속 공급의 약속을 전했다. 그중 하나가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그 모든 약속이 “공산주의자들의 상투적 허위 약속”이라는 주장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었다. 한민당 대표 김성수가 5월 14일 오후에 유엔위원단과 회견한 후 회견 내용을 기자에게 밝힌 것이 5월 16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는데 이런 내용이 있다.

 

전력, 수리조합 문제에 관하여: 김구 김규식 양 씨가 전력을 끊지 않을 것과 연백수리조합 문제와 더불어 남북 미소 양군 철퇴하더라도 북조선에서 양성한 보안군은 남조선을 침해 않기로 되었다고 하나 그것은 실천하지 않을 공수표일 것이다. 그 좋은 예는 금번 전기 문제만 가지고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송전 중단 사태를 가져온 일차적 책임은 미군정에게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만의 책임만은 아니다. 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난다고, 이북 측에서 바로 이 시점에 송전 중단을 단행한 것도 의도가 없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북 측은 명분에서 상대적 우위가 확보되기만 하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 측의 오만과 이북(및 소련) 측의 무책임이 ‘적대적 공생관계’를 이루는 틈바구니에서 중간파 민족주의자는 설 땅이 없었다.

 

미국에 거주하며 미군정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지켜온 김용중의 논평이 이 문제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김용중은 여운형이 암살 직전에 협력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이다.

 

“좋지 못한 일 - 단전과 김용중 씨 담”

 

[워싱턴 19일 발 조통] 조선사정협회 회장 김용중 씨는 북조선의 송전 단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조선 지대에 대하여 송전을 절단하는 이유는 요금을 지불치 않는 때문이라는 것은 부당한 것이며 이는 정치적 의도에서 행하여진 것이다. 이런 행동은 남조선 인민에게 불리한 영향을 줄 것이며 지금까지 북조선과 협조적인 태도를 가진 인사를 이반시키게 할 뿐 아니라 국가 재통일을 기도하는 모든 인사의 사업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0일)

 

이런 와중에 김구는 ‘정양(靜養)’을 위해 마곡사로 떠날 것을 발표했다. 그의 마곡사 행에 <동아일보>는 이런 해석을 붙였다.

 

“남북협상 좌절 - 김구 씨 정양차 마곡사로”

 

김구 김규식 양 씨를 비롯한 중간파에서는 과거 2개 년간 전 조선을 소련의 위성국가화하려는 공산계열의 의도를 냉찰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오던바 최근에 이르러서는 그들 대부분이 남북협상의 성공성이 희박함을 지적하고 단념하고 있으며 다만 소수파 측이 아직 추진시키고 있는 기세가 보이던바 금번 김구 씨의 급변한 태도로 인하여 남북협상은 드디어 완전봉쇄에 함입하고 말았다.

 

즉 김구 씨는 맹렬히 추진하여 오던 남북협상을 단념하고 불일내로 충남 공주에 있는 계룡산 마곡사로 정양차 입산하리라는데 정양기간은 수개월 내지 2, 3년이 될른지도 모른다고 한다. 이리하여 김구 씨는 당분간 정계에서 이탈할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남북협상도 여차한 김구 씨의 태도로 인하여 완전히 좌절된 것이며 다만 상금 북조선에 잔류하고 있는 인사들의 금후 태도가 주목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9일)

 

김구는 이 마곡사 행을 취소했는데, 5월 23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중간파 인사들의 권고 때문이었다고 한다. 진짜 이유는 5월 19일자 <동아일보>의 위 기사를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