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어먹혔구나!"

 

 

오늘 아침 "진보는 왜 중국을?" 보면서 지금까지 글과 좀 다른 걸 느꼈어요. 읽기가 썩 편안해요. 자기 생각에 대한 자신감이 든든히 느껴집니다.
 
이 선생 글 보면서는 아무래도 내 생각 빌려간 게 다른 것보다 눈에 잘 들어오죠. 근데 오늘 글 보면서는 "떼어먹혔구나!" 느낌이 팍팍 듭니다. 옆집에 소를 빌려주니 그놈이 처음엔 그 집 밭 갈면서도 눈길은 우리 집에 두고 있었는데... 여러 날 잘 먹이고 잘 부리니 이제 자기가 어느 집 소인지도 잊어버리게 된 건가?
 
청상과부 자식 키우듯 혼자 키워온 생각들이니 물론 애착이 깊죠. 그 자식을 누가 못났다고 흉보면 노여운 것은 물론이고, 잘났다고 칭찬해주는 이가 있어도 겉만 보고 하는 소리 같아서 마음에 차지 않는 구석이 있었는데... 이제 이 선생이 내 생각의 함축을 알뜰하게 음미하고 그 연장선까지 순조롭게 펼쳐내는 걸 보니 과년한 딸자식 얼른 치워버리고 말년의 자유를 찾을 마음이 듭니다.
 
오늘 글에서도 '넓은 시각'의 강점이 분명하죠. 19세기 후반 조선과 청나라 상황을 나란히 놓고 봄으로써, 어느 한 쪽만 본다면 설득력이 그리 강하지 않은 관점이 시너지 효과를 통해 힘을 키울 수 있습니다. 거기까진 내가 해온 건데... 그보다 더 넓히는 작업이 나로서는 불급인데 이 선생이 나서 주니 내가 티운 싹에서 큰 결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근년 한국현대사 쪽에 매달리는 데 대해 어느 편집자는 "왜 소 잡는 칼로 닭을 못 살게 구냐?"고 핀잔을 주기도 합니다. 소백정도 늙어서 힘이 부치면 은퇴해서 취미삼아 닭이나 잡고 지내도 되지 않나? 소 잡을 장정이 따로 없으면 몰라도... ^^
 
핀잔에 대한 억하심정에서 해본 억지 소리고~ 한국에 매달리는 게 내 체질과 습관에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서중석 선생 퇴직 행사에 임해 떠오르는 생각을 블로그에 두어 차례 적은 게 있죠. 서 선생과의 만남이 내게는 역사학과의 첫 접촉이었는데,(갓난애 때 아버지가 안아준 거 빼고) 그분이 한 고비 넘기는 걸 보며 많은 생각이 떠오릅니다.
 
동양사로 선택은 했지만 마음은 한국사에 있었어요. 이 선생 세대보다 우리 세대가 더 강하게 느끼는 강박이 있었죠. 얽매이는 데 없이 공부를 넓히려고만 수십 년 애써 왔지만, 바닥에는 민족에 대한 집착이 깔려 있었죠. 그 바탕이 공부를 풀어오는 가닥을 잡아준 셈이고... 나로서는 지금 한국사로 조여드는 것이 일호일흡, 일소일장의 원리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길 같습니다.
 
서중석 선생과의 인연이 지금의 고비에서도 또 한 차례 큰 작용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45년 전 피차 학부생으로 처음 만날 때도 취향 차이가 컸고, 지금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 선생은 그때도 선배로서 화이부동의 아량으로 나를 대해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당장 매달려 있는 과제보다 더 큰 과제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분이라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 연구자 아닌 평론가로 겉으로는 자임해 왔습니다만, 속으로는 연구자 입장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죠. 보수주의자를 자임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부담을 피면하기 위한 술책이었습니다. 보수주의자 간판은 앞으로도 버리게 될 것 같지 않지만, 이제 연구자 역할은 더 드러내서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백퍼센트 연구자를 표방하지는 않겠지만 연구자들과의 관계에서 지금까지보다는 능동적인 입장을 취하려는 겁니다.
 
"노무현의 대한민국" 작업에 관해 그 동안 한국현대사 연구자 몇 사람에게 설명하고 의견을 들었는데, 마음을 놓을 만한 반응을 얻고 있어요. 이 작업은 여러 연구자들과 토론해 가며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해방일기"는 평론가 입장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연구자들의 작업 성과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수동적 입장에 서 있었죠. 개인적 인연을 가진 서중석 선생과 정병준 선생을 이따금 만나 자문을 구하는 것 외에는 평론가로서 연구자들과의 거리를 지킨 겁니다. 그런데 이제 그 거리를 줄이려고 하는 거죠.
 
연구자로서 집필 외의 활동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범위는 만들어볼 생각을 합니다. 출강과 세미나 등... 내년 이후 활동 범위에 대해 금년 중에 궁리와 타진을 해보려고요. 길게 살 곳으로 몇 달 전부터 전주를 생각해 오고 있는데, 그 정도가 적당할지 표준을 두고 생각해보려 합니다.
 
하다 보니 내 얘기가 한참 늘어졌는데, 이 선생 공부로 돌아가서... 공부를 넓히기만 하는 길에는 초점이 흐려지기 쉽다는 약점이 있는데, 이 선생 경우에는 그 점을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기본적인 균형감각이 든든한 것으로 보이니까. 넓히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부분적으로 불안감이 들 수 있겠지만 큰 문제 없을 거예요. 나이가 있으니까. 몇 마디 붙인다고 붙이다 보니 내 마음속의 불안감만 드러낸 셈인가? ㅎㅎ
 
기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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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 주소에 아직 배달이 안 되네요. 여기 들러서 봐주기만 기다려야겠습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