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에 맞서 동대문갑구에 출마하려던 최능진의 후보등록이 말소되었다.

 

"최 씨 등록 말소, 선위에서 공식 발표"

 

시내 동대문갑구에서 출마한 최능진의 입후보 수속 상 불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방치됨에 대하여 그동안 사회의 많은 비난을 받아오던 국회선거위원회에서는 불법사실의 진부를 조사한 결과 작보한 바와 같이 추천인 217명 중 추천인으로 된 57명이 추천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고 또 그 중 27명의 지문은 전혀 허위인 것이 판명되었으므로 지난 7일 신중 협의한 후 선거법 제27조에 의하여 2백 명 이상의 추천을 필요로 하는 입후보 등록요건을 구비하지 못한 것이 명백하므로 입후보 등록의 무효를 인정하고 서울시 선거위원회를 통하여 동대문갑구 선거위원회에 대하여 최능진의 입후보 등록을 말소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8일 공식으로 발표하였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9일)

 

최능진(1899~1951년)의 후보 등록 사실은 지난 4월 12일 일기에서 언급했고, 1946년 12월 5일 일기에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 일이 있다. 그는 평안남도 강서군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그 집안은 항일운동 명문가이기도 했다. 13년간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조선 체육계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고, 해방 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가 월남해서 경무부 수사국장을 맡았는데, 조병옥과 장택상에게 맞서다가 파면당했다.

 

투철한 반공 민족주의자라는 점에서 김구 노선에 가까운 인물이며 미군정 수뇌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8년 5월 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가 “미군 정보기관에 근무”한다고 했다. 그리고 5월 18일자 <경향신문> 기사에는 그의 선거운동원들이 민족청년단원이라 했다. 족청은 미군정의 대규모 지원을 받는 단체였다.) 그런 그가 이승만에 대항해서 출마한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민족주의 입장에서 조병옥-장택상-이승만 그룹에게 적개심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군정 수뇌부가 통제하기 힘든 이승만을 견제하기 위해 그의 도전을 부추겼을 가능성도 있다. <동아일보>는 후보 등록 이후 최 씨의 후보 자격을 공격하는 데 많은 지면을 들였는데(같은 기간 <경향신문>보다 최 씨 관계 기사가 5배가 넘는다.) 그 중요한 초점 하나가 “외세의 개입”이었다. 미군정이 <동아일보>에게 “외세” 소리를 듣다니.

 

최 씨의 도전은 이승만의 당선에 큰 위협이었다. 지명도에서야 물론 비교가 안 되었지만 이승만에게는 ‘안티’가 많았다. 친일파를 옹호하고 분단건국을 제창해 온 그에게 최 씨의 도전은 마치 김구를 위한 대리전과 같은 느낌으로 많은 유권자를 흥분시킬 수 있었다. 경찰개혁을 주장하다가 파면당한 인물이 반(反) 이승만 표를 모은다면 이승만은 설령 당선된다 하더라도 위신이 형편없게 될 것이었다. (이승만의 걱정은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1950년 민의원 선거에서 조병옥의 참패(성북구)와 장택상의 ‘도피 출마’(칠곡)를 보면 전쟁 전까지는 분단세력에 대한 일반인의 반감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능진은 그 후에도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을 반대하여 서재필 옹립을 추진했는데 이승만 정부 출범 직후인 10월 초에 내란음모죄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에는 ‘혁명의용군사건’이란 어마어마한 이름이 붙었고 얼마 후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수도경찰청에서 그것까지 연계시키기도 했다.(<동아일보> 1948년 10월 23일 “여수 반군 소요는 최능진 사건 여파”) 최능진은 이 사건으로 이듬해 5월 3년형을 선고받는다. 대한민국 최초의 ‘이승만 정적(政敵) 죽이기’ 사건이었는데, 3년형 밖에 안 떨어진 것을 보면 1949년까지는 이승만 독재체제가 확립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최능진은 그 후 전쟁 중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이승만 독재체제가 전쟁을 통해 굳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최능진 이야기는 그 정도로 하고, 서울검찰청 엄상섭 차석검사의 담화문 하나가 눈에 띈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10일, “선거사범 엄벌, 엄 검찰청 차석 경고”)

 

“검찰당국으로서는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거사범에 대하여 자세한 소식을 탐지하고 있다. 실례를 들어 본다면 첫째 입후보자들 사이에서 그 입후보를 취소하는 대신에 거액의 금품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이 빈번한 모양인데 이것은 매수선거의 전형적인 것이며 또 하나는 모 관청 책임자가 그 부하들에게 대하여 입후보자 중에서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물어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인물을 지지한다면 그만이나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일장의 설명을 하여 그가 뜻하는 사람에 투표하도록 종용한다고 들리는데 이런 것은 도의적으로는 매국적 행위며 법률적으로는 선거사범이니 선거가 끝난 후에는 이 같은 부정한 도배들은 철저히 규명하여 적발되는 대로 엄중 처단할 방침이다.”

 

엄상섭은 지난 3월 18일 일기에 나온 일이 있다. 검사가 유치장에 구금 중인 피의자 보겠다는 것을 경찰이 가로막는 황당한 사태 때 단호한 태도를 보인 사람이다. 그런데 이번 담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후보 매수’ 문제의 지적이다. 그런 사례가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었기에 담화문에서 지적한 것 아니겠는가.

 

단독선거 추진은 민족주의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조선사람의 압도적 대다수가 통일건국을 바라고 있는데도 한민당-이승만 세력이 단독선거를 추진한 것은 실리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 총선거는 그들이 큰 실리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런데 실리를 얻을 사람의 수가 200명 이하로 제한되어 있었다.

 

후보 난립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독당과 민련이 공식적으로 선거를 보이콧하고 있는 이번 선거는 단독선거 추진세력에게 다시없을 기회였다. 곳곳에서 한민당과 독촉 후보들이 무더기로 출마해 서로 각축을 벌였다. 이승만과 김성수가 애국심과 양보정신을 아무리 떠들어도 밥그릇 앞에서는 그저 마이동풍이었다. 같은 성향 후보의 경쟁을 뿌리치기 위해서는 실리를 듬뿍 안겨주는 것보다 좋은 묘책이 없었고, 대한민국 금권선거가 시작되었다.

 

후보 난립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곳이 종로갑구였다. 4월 18일자 <경향신문>에는 이 선거구에 아래 8명의 후보가 출마했다고 보도되었다.

 

박용래(46세) 한국기련, 의사

박순천(51세) 부인신문사장, 독촉애부

서상천(46세) 회사원, 독청

이윤영(59세) 조민당수, 조민당

김은배(38세) 체육신문사장, 무소속

오삼계(58세) 한의, 무소속

최진(73세) 변호사, 민주자주독립당

김대석(42세) 회사원, 무소속

 

숫자로는 8대 1 경쟁이 심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곳을 모범 선거구로 만들려는 김성수와 이승만의 노력이 무색해진 곳이기 때문에 눈에 띄는 것이다. 김성수는 입후보 준비를 하고 있던 종로갑구를 조선민주당 이윤영 부위원장에게 양보한다고 담화를 발표했다.

 

“동지 조만식 시 지기 이윤영 씨를 성원하라 - 김성수 씨 담”

 

금번 총선거에 무엇보다도 통한사는 북한에 총선거를 못하게 되어서 조만식 동지 같은 분이 국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다. 조만식 씨는 학생시대부터 나의 가장 신뢰하고 존경하는 분이지마는 8-15 이후 그가 취한 성자(聖者)적 태도에는 진실로 경복하지 않을 수 없다. 조만식 씨는 못 오더라도 특별선거구로 그의 지기들이 국회에 많이 나오려니 하였더니 이제는 그 기대도 어그러졌으니 정의(情誼)상으로나 남북통일의 일을 위해서나 크게 유감되는 일이다.

 

이에 조만식 동지가 위원장인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 이윤영 동지를 국회에 참석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를 종로구 갑구 선거구에 의원 후보자로 추천하기로 하였습니다. 이윤영 동지는 인격과 덕망이 구비하고 식견이 높은 인물로 현재 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협의회 대표 등 중책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니 본당계와 해 선거구 유권자 여러분은 양지하시고 적극 협력하여 주심을 바란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1일)

 

이승만도 뒤따라 이윤영 지원사격에 나섰다.

 

“종로갑구 후보로 이윤영 씨를 추천 - 이 박사 유권자에 호소”

 

이번 총선거에 대하여 내가 입후보자 문제에 간섭이 도무지 없고 오직 민중의 공심(公心)에 맡겨 정당히 결정되기만 바라고 있는 중이나 이북동포 대표 이윤영 목사에 대하여는 침묵할 수 없는 감상을 가졌으므로 특히 서울시 종로갑구 입후보자로 추천하며 전구 일반 유권남녀에게 성심으로 나의 찬성하는 뜻을 표시하고자 한다.

 

이윤영 씨의 열렬한 애국성심과 특수한 인도 자격에 대하여는 모든 동포가 다소간 양해가 있을 것이므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으며 다만 진심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북한에서 모든 동포가 사지에 빠져서 유리방황하며 국권회복만을 위하여 수화를 피치 않고 죽기로써 싸우는 이때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환난상구에 동족상 정의를 표할 기회가 없었던 것인데 이 기회를 이용해서 동 구역 입후보자는 다 기쁘게 양보하며 주권자는 전적으로 투표해서 일변으로는 의로운 인격을 추대하며 또 일변으로 이북 동포들을 위로하는 것이 우리의 정당한 도리요, 건국대계에 많은 공헌이 될 것이니 누구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이것이 나 한 사람의 구구한 사정(私情)이 아니요 남한 모든 동포들의 공원(公願)일 줄 믿으므로 간단히 이 말로 이윤영 씨를 추천하는 바이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7일)

 

영수 이승만과 한민당 대표 김성수가 이처럼 공을 들인 곳에 이승만의 직계라 할 수 있는 독촉애국부인회의 박순천이 끝내 출마한 것이 어찌된 일일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직계고 뭐고 실리 앞에서는 안면몰수였다는 것이고, 하나는 이승만이 자기 추종자가 나가서 다음 기회를 위한 발판을 닦게 했다는 것이다. 이윤영이 1만2천여 표로 당선된 이 선거에서 박순천은 3천여 표로 차점자가 되고 2년 후 이 선거구에 다시 나와 당선되었다.

 

투표가 이틀 뒤로 다가왔다. 남로당은 일찍부터 사보타지 전술을 펼치고 있었지만 제주도 이외 지역에서는 두드러진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학생들의 선거 방해운동이 더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검거되는 선거사범의 태반이 학생이었고, 투표일을 앞두고는 중학교까지 동맹휴학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흘밖에 남지 않은 총선거 실시를 반대하여 각종 불상사가 벌어지고 있거니와 특히 요즈음에 이르러서는 중등, 전문, 대학 등 학생들도 동요의 틈을 보이어 이미 경기중학을 비롯하여 대학 예과 등 동맹휴학 문제로 소동을 일으켰으며 모 대학에서도 동 5일 하오 2시경 등교생 30여명이 강당에 모였다가 ‘단선반대’ 등 구호를 들러 일부 맹휴로 들어갔다 하고 그 외도 몇몇 중학에 동요설이 있어 경찰당국에서는 미연 방지책으로 총선거의 수사과 직원들도 총선거가 끝날 때까지 사찰 경비에 근무하도록 각처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조선일보> 1948년 5월 7일)

 

서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단선 단정 결사반대 슬로건 아래 맹휴 혹은 데모 등 동요 파문은 도내 13교에 달한다 한다.

 

◊ 광주사범학교: 7일에 일부 학생들의 동요가 있었으나 당국이 즉시 제지. 10일 밤 약 30여 명의 동교 생도는 오전 8시반경 부내 남동 일대에서 단선 단정을 반대하는 데모를 감행.

 

◊ 여수중학: 8일 전교생이 맹휴.

 

◊ 여수여중: 8일 3학년생이 하급생을 선동하여 맹휴하려다가 학교 측에 발견되어 3학년생만이 맹휴.

 

◊ 여수공업: 8일 전교생이 맹휴.

 

◊ 영광여중: 8일 맹휴를 일으키자 생도가 반수 밖에 출석치 않았으므로 학교에서 임시 휴학.

 

◊ 송정리중학: 1일 전교 맹휴.

 

◊ 함평농중: 6일 일부학생 동요.

 

◊ 예학중학: 전교 맹휴.

 

◊ 광주서중: 지난 7일 결석자 2,080명.

 

◊ 목포사범학교: 생도 20명과 직원 9명 체포.

 

◊ 송정리여중: 전교 맹휴. (<서울신문> 1948년 5월 18일)

 

경찰은 연일 강도 높은 조치를 발표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웃지 못 할 내용도 있었다.

 

“노상에 정류함을 부득함 - 거부자는 즉시 본서 동행 - 수도청에서 교통에 관한 지시”

 

최근 국내 정세가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는 데 비추어 수도청에서는 지난 4월 1일부로 수도 관내에 비상경계령을 내리어 치안 확보에 총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한편 이를 더욱 강화하려 함인지 19일부로 관하 각 경찰서에 교통에 관한 지시를 하였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수모(誰某)를 물론하고 경찰관을 제외하고는 노상에 정류함을 부득함.

 

2. 경찰관이 노상에 입대(立待)하는 행인을 발견할 시는 즉시 행보를 명령하고 불응할 시는 본서에 동행하여 보안주임에게 인도할 사.

 

3. 보안주임은 이유를 조사하여 원인 없는 반항을 발견하는 시는 즉시 치안관에 회부할 사. (<경향신문> 1948년 4월 21일)

 

아무리 남조선이 경찰국가가 되어 있었다 해도 이건 너무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물의를 가라앉힌다고 내보낸 해명이 더 가관이다.

 

“교통에 관한 지시는 외국에도 있는 도로법령 - 장 총장 담”

 

수도청에서 지난 19일부 수도 관하 각 경찰서에 지시된 ‘교통에 관한 지시’는 그 동안 항간에서 이를 오해하고 문젯거리가 되어 있으나 수도청장 장택상 씨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준 비상경계의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행인이 가로에서 일 없이 주저하고 있는 것은 교통에 많은 지장이 되므로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지시한 것이다. 더구나 외국에서는 일찍부터 이와 같은 교통법령이 실시되어 가로에 주저하는 자는 즉결처분에 의한 벌금형에 처하고 있는 것이니 일반은 주의하여 당국에 협력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1948년 4월 25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