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자 <동아일보>에 [서울 UP특파원 제임스 로퍼 발 조선] 바이라인 기사가 실렸다. 조선 상황을 그리스와 비교한 것이 눈에 띈다.

 

“조선은 희랍 사태 재연, 좌우 항쟁도 근사”

 

조선은 희랍사태의 완전한 재연이다. 양국에서의 공산당 전술은 동일한 것이며 희랍에서 발생한 전투는 조선에서도 발생할지 모른다. 양국이 지리적으로 근사하다. 양국은 다 산악이 많은 반도이다. 희랍반도는 공산주의자가 지배하고 있는 발칸에 연결되어 있으며 조선은 역시 역사적으로 소란의 온상지이며 현재 공산군이 세력을 펴고 있는 만주에 연결되어 있다. 여차한 정세는 조선과 희랍을 군사적 견지에서 처리하기 곤란케 하고 있다.

 

그러나 서방 연합국은 정치적 이유로 동지(同地)에 민주주의 거점을 두려고 하여 금전·선전 및 무기 기증으로 투쟁하였다. 민주주의를 시행하기 위하여 서방 연합국은 조선과 희랍에서 자유선거를 지지하였다. 희랍 투표는 영미위원단 감시 하에 행하였는데 10일 남조선에서는 국련위원단 감시 하에 투표를 행할 것이다. 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보이콧 행동으로 투표를 회피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리스에서는 1946년 3월에 총선거가 있었다. 영국군 점령 하에 실시된 이 총선거를 그리스공산당(KKE)을 중심으로 한 민족해방전선(EAM)이 거부했고, 그 동안 겨우겨우 억제해 온 내전이 전면적으로 터지고 말았다. 1년 후인 1947년 3월, 내전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영국의 요청으로 미국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 ‘트루먼독트린’의 직접 배경이었다.

 

1947년 3월 12일 일기에서 그리스 사정을 살펴본 일이 있다. 로퍼 기자의 지적처럼 그리스 사태와 조선 사태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두 곳 사정을 더 비교해 본다.

 

그리스왕국은 1936년 쿠데타로 집권한 메탁사스 정권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941년 4월 추축국 군대의 침공을 받을 때는 정부의 인기도 낮았고, 스탈린의 소련이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좌익도 저항에 적극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몇 달 후 독-소간 개전과 함께 추축국에 대한 그리스 좌익의 항쟁이 시작되었고, 민족해방전선의 군대 인민해방군(ELAS)이 국내 항쟁의 주축이 되었다.

 

앞서의 일기(1947년 3월 12일)에서 한 가지 숙제로 남겨둔 문제가 있다. 영국 등 연합국이 이웃나라인 유고슬라비아에 대해서는 티토의 공산세력을 흔쾌히 지원해준 반면 그리스에 대해서는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지원에 인색했던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더 살펴보니 초기에는 연합국 지원 양상에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스에서도 인민해방군이 전투력이 강하고 역할이 큰 만큼 많은 지원을 받았다. 그런데 전쟁 후기로 가면서 티토가 연합전선 원리를 굳게 지킨 반면 그리스에서는 좌우 갈등이 심했고, 그 갈등에 좌익 측 책임이 작지 않았다. 민족주의를 앞세웠던 티토에 비해 그리스공산당은 스탈린의 지시를 너무 충실히 따르다가 불신의 대상이 된 측면이 있다. 공산당을 비난하는 우익 선전에는 메탁사스 정권과 추축국 지배에 대한 공산당의 협력이 많이 지적되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연합국 승세가 정해지자 전쟁 후 국가 진로를 놓고 좌우 대립이 심화되었다. 민족해방전선은 우익 망명정부와 경쟁할 민족해방정치위원회(PEEA)를 1944년 3월에 세웠다. PEEA는 많은 그리스인의 지지를 받아 아테네의 괴뢰정부와 대비되는 ‘산(山)정부’로 불렸고, 4월에는 이집트의 망명정부 군대에서 그를 지지하는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극한 대립을 막기 위해 5월에 레바논 연석회의가 열려 파판드레우 수상 중심의 좌우합작 거국내각이 탄생했다. 24명 각료 중 여섯 자리가 민족해방전선 측에 주어진 이 내각에 좌익이 동의한 것은 스탈린의 협력 지시에 따른 것이라 한다.

 

그러나 1944년 10월 파판드레우 정부가 귀국하자 문제가 다시 터졌다. 군대 재건을 위해 군사단체 해산명령을 내렸는데 일부 우익 단체를 존속시킨 반면 국내 저항의 주축이었던 인민해방군을 철저히 해체하는 조치였다. 이 명령의 최후통첩이 12월 1일 발표되자 좌익 각료 6인이 즉각 사임했고, 아테네 시내에서 37일간 시가전이 계속되는 ‘데켐브리아나’ 사태가 12월 3일에 터졌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연합국회의에서 소련대표의 침묵은 두드러진 것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그에게 ‘스핑크스’란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속셈을 알 수 없다는 얘기였다.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스탈린이 동유럽 지역을 소련 영향권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양보하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데켐브리아나를 끝내는 연합국과 그리스 제 정당 사이의 바르키사 조약은 그리스 좌익을 궤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산당이 이 조약을 받아들인 것은 스탈린의 지침 때문이었다. 인민해방군은 해체되고 좌익 인사 수만 명이 투옥되었으며, 인민해방전선을 지지하던 수많은 마을이 백색테러의 공격을 받았다. 좌익 투사들은 소규모 저항조직을 만들거나 인접국으로 피신했다.

 

독일과 일본이 항복한 뒤 소련과 서방 연합국의 사이가 어긋나기 시작하는 1945년 말에 이르러서야 그리스공산당의 노선이 저항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1946년 3월의 총선거를 보이콧했고, 이 선거에서 왕정 지지파가 승리를 거둔 후 9월의 국민투표에서 왕정복고가 결정되었다. 그로써 그리스는 영국의 실질적인 보호국이 되었다.

 

총선거 무렵 재개된 내전은 좌익 투사들이 그리스민주군(DSE)를 결성하면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1947년 3월 미국이 영국의 역할을 넘겨받을 무렵에는 10만 명의 정부군이 2만 명의 민주군을 상대로 전국 각지에서 초토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1947년 중에도 항쟁은 계속 확대되었고, 연말에 임시민주정부를 세우면서 공산당이 공식적으로 불법화되었다.

 

그리스내전은 참혹성과 잔인성에서 극한에 이른 전쟁으로 꼽힌다. 그 면모를 비쳐 보여주는 현상 하나가 양측에서 경쟁적으로 벌인 ‘어린이 구출작전’이다. 좌익 측은 전투지역의 어린이 수만 명을 인접 공산국과 자기네 점령지역으로 옮겼다. 인도적 조치라고 주장하지만 정부 측에서는 세뇌를 통한 전사 양성 목적이라고 비난했다.

 

정부 측도 많은 어린이들을 수용소로 보냈다. 프레데리카 왕비가 제안한 조치라 해서 그런 수용소를 ‘퀸즈 캠프’라 불렀다고 한다. 이 역시 정부 측에서는 인도적 조치로 주장하는 반면 반대편에게는 비인도적 조치로 비난받았다. 양측에 의해 수용되어 가족 없이 자라나게 된 어린이 수가 1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1948년 5월, 조선에서 총선거가 실시될 무렵에도 그리스내전은 사그러들 기색 없이 계속되고 있다. 구시대의 제국 영국이 바뀐 위상을 인정하고 물러나게 만든 이 투쟁을 발판으로 삼아 새 시대의 제국으로 위치를 확립하려는 미국이 힘을 쏟아 붓고 있으니, 그 시점에서 그리스는 냉전의 도화선과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스도 미-소 대결에 휘말려 국가체제 안정에 실패했다는 점은 조선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조선 경우에 비해 그리스에서는 소련의 책임이 두드러진다. 그리스에 대한 영국과 그를 이은 미국의 정책은 당시에도 쉽게 예상할 수 있었고 지난 뒤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련의 태도는 여러 차례 석연치 않은 변화를 겪었고, 그리스의 비극을 심화시키는 이유가 되었다.

 

소련이 독일 침략을 받을 때까지 그리스공산당이 추축국 침공에 적극 저항하지 못하게 묶은 데서부터 문제가 있다. 1941년 들어서는 독-소 불가침조약 파기가 시간문제였다. 실제로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그리스 침공에 현지인의 저항이 상당히 강했기 때문에 소련 침공이 늦어지고 소련이 상당한 혜택을 보았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그런데 그리스공산당은 침공 저항에 선명한 태도를 보이지 못해서 민족주의 세력과의 사이에 앙금을 남겼다.

 

1944년 말 아테네 시내의 내전이 벌어졌을 때는 연합국 공조체제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좌익 군사력을 소멸시키려는 그리스 우익정부의 조치는 소련의 태도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소련은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양보하는 방침에 따라 그리스 상태를 방관했다. 그 결과 대 추축국 항쟁을 통해 양성된 인민해방군 10만 병력이 소멸되고, 2년 후 내전이 재개되었을 때 좌익 측이 엄청난 열세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서방 연합국과 관계가 껄끄러워지자 스탈린은 그리스공산당을 총선거 거부와 내전 재개로 이끌었다. 최악의 조건 위에서 최악의 상황을 벌이게 한 것이다.

 

결국 스탈린의 기형적 대외정책은 그리스 좌익세력을 최후의 구렁텅이에 몰아놓고 만다. 1948년 6월 티토와 관계가 악화하자 스탈린은 그리스공산당에게 반 티토 노선을 강요했다. 티토와의 관계 단절에 대해서는 그리스공산당 안에서도 상당한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스탈린 노선에 따랐고, 인접한 유고슬라비아의 도움을 잃은 민주군은 몇 달 안 되어 궤멸하고 말았다.

 

스탈린은 그리스인에게, 특히 그리스 좌익에게 정말 못할 짓을 했다. 소련의 득실을 기준으로 그리스를 영국 영향권으로 넘겨준 것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그래 놓고도 내전을 부추긴 목적이 무엇이었나? 서방과의 관계에서 약간의 이득을 얻기 위해 참혹한 분쟁으로 내몬 것이다. 민주군 궤멸 후 소련으로 도피한 잔여 병력은 우즈베키스탄에 수용되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의 소련 정책을 해석하는 데도 그리스 경우가 참고된다. 반공주의 입장에서 소련의 ‘적화 야욕’을 흔히 강조하며 이북 지도부가 소련의 지침을 일일이 따른 것처럼 가정하는데, 1949년 이전 상황에는 잘 적용되지 않는다. 이북 지도부도 그리스에서 벌어져 온 일을 살펴보며 소련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 경우만 하더라도 장개석 정부와 공식적으로 거래하면서 은밀히 내전을 부추긴 소련의 정책은 그리스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분단건국에 대한 미국의 책임은 겉으로 드러나 보인다. 조선의 당시 상황이 친미정권보다는 친소정권이 서기에 유리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미국이 무리한 조치를 더 많이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책임에 눈이 가려 소련의 책임을 보지 못한다면 온전한 상황 인식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분단건국이 스탈린에게도 만족할 만한 방향이었으리라는 사실을 같은 시기 그리스 상황에서 짐작할 수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