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5월 5일 제주에서 열린 ‘최고수뇌회의’ 경위에 대한 김익렬 제9연대장의 진술을 그의 유고 “4-3의 진실”(<4-3은 말한다 2> 338-344쪽)에서 옮겨놓는다.

 

귀순공작의 성공으로 제주도 전역에 전투가 종식되고 완전 진압이 눈앞에 보이던 중 경찰의 방해공작과 귀순폭도들의 잇단 피살로 폭동이 재연되는 상황으로 급변하고 만다. 당황한 미 군정청장관 딘 장군은 직접 제주도로 내려와 현지에서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제주읍에 비래(飛來)하겠다고 연락해 왔다.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는 사전에 나에게 자기들의 난처한 입장을 설명하고(딘 장군이 자기들의 건의를 들어주지 않고 강압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고 차후 대책과 작전을 건의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3인은 회의에 내놓을 일체의 증거물과 사진첩을 준비하였다. (당시 9연대는 사진자료와 그런 자료를 만들 시설이 없었으나 미군정에서 수집 작성한 앨범이 있었다.)

 

회의는 5월 5일 12시에 개최되었다. 장소는 제주중학교의 미 군정청 회의실이었다. 참가자는 미 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딘 장군 전용통역관 김 씨(목사 출신) 등이었다. 이상 9명이 참가한 회의는 극비에 부쳐졌다. 회의는 맨스필드 대령 사회로 개최되었다. 회의의 첫머리에 맨스필드 대령은 이 회의는 딘 장군의 명에 의하여 참석자 누구든지 자유로이 의견을 말할 수 있으며, 이 회의의 내용은 극비이며 누설자는 군정재판에 회부한다고 선언하고 먼저 경찰에서 설명하라고 하였다.

 

경찰을 대표하여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 씨가 상황 설명과 건의를 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이 폭동은 국제공산주의자에 의한 사전에 조직 훈련 계획된 폭동이며 군-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송호성 장군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 장군은 제주도 실정은 연대장이 자기보다 잘 아니 연대장이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송 장군의 지시에 따라 군의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그 내용과 건의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성을 이용해 공산주의자-불평분자-밀무역자 등 각종 성분의 무리가 일으킨 도민폭동으로 본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자와 경찰 간의 마찰이다. 폭동자 수가 수만으로 증가된 것은 경찰이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 데서 기인된 것이다. 실제 무장한 인원은 300명 이내로 보며 나머지는 여러 가지 불가항력으로 인한 동조자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1) 적의를 가진 폭도와 일반 민중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제주도민으로부터 고립시켜야 된다. (2) 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전개하여야 된다. 일방으로 회유와 선무를 하여 응하지 않는 자는 토벌하는 것이다. (3) 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며 이것이 폭도 증가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제주도경찰을 나의 지휘 하에 달라. 작전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도 이것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보고와 건의가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물을 제시하겠다 하면서 준비하였던 물적 자료와 사진첩을 제시하였다. 사진첩을 보자(사진첩에는 맨스필드 대령이 영문으로 상세한 설명을 기입해 놓았다.) 딘 장군은 흥분하여 안색이 붉어지며 즉석에서 나의 건의를 채택하는 동시에 경찰을 나에게 배속시키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진첩을 조병옥 씨에게 던져주면서 불쾌한 어조로 “닥터 조, 이것 어떻게 된 일이오. 당신의 보고 내용과 전연 다르지 않소.” 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병옥 씨는 사진첩을 두루 살피면서 당황한 기색이더니 갑자기 단상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는 우리말로 자기가 설명하겠노라고 인사를 하고는 그 다음은 유창한 영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조병옥 씨는 처음에는 영어로 한 말을 자신이 통역하는 식으로 설명하다가 열을 띠자 우리말을 치워버리고 영어로만 떠들었다. 영어를 모르는 안재홍 씨, 송호성 장군, 유해진 도지사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조 씨는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가 작성한 것인데)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오.”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닥쳐라!” 하고 고함을 질렀다. 딘 장군은 나를 제지하며 연설 방해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조병옥 씨는 계속해서 나를 가리키며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오.” 하면서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더구나 나의 부친은 내가 다섯 살 때 이미 작고한 분이었다.)

 

딘 장군은 조병옥 씨가 나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깜짝 놀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그냥 두었다가는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낙인을 찍힐 판이었다. 나는 격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뛰어올라 조병옥 씨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나는 유도 3단이었다). 그러나 조 박사는 의외로 힘이 장사였다. 당시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 조 박사는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천 씨가 말리러 올라왔으나 나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서 그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딘 장군이 송호성 장군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 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하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송 장군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 “이놈 연대장! 누구에게 폭행을 하느냐. 네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 하며 고함을 친다. 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호령호령했다. 돌아가는 내용의 대강을 눈치챈 안재홍 민정장관은 “연대장! 손을 놓으시오. 폭행을 멈추시오. 외국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역시 소리만 지를 뿐 단상에 올라와 말릴 뜻은 없었다. 유해진 지사가 단상에 올라와 나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노령이라 역부족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덤볐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딘 장군을 싸움은 말리지 않고 떠들고만 있는 안재홍 씨와 송호성 장군이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냐고 통역관 김 씨를 옆으로 불러 물었다. 그런데 이자의 통역이 또 괴변이다. 그 경황 중에도 내가 단상에서 듣자니 이자는 딘 장군에게 안재홍 씨와 송 장군이 연대장에게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다고 터무니없는 통역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치밀 대로 치밀어서 두 손으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붙잡은 채 단하로 끌어내리면서, 김 통역관에게 발길질을 했다. 입을 걷어찬다는 것이 빗나가서 그만 그자의 음부 급소를 걷어찼다. 김 통역관은 비명을 지르면서 마루 위에 나뒹군다. 놀란 딘 장군은 급히 회의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가더니 대기 경호 중이던 미군헌병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수 명의 MP가 달려들더니 그중 2명의 MP가 양쪽에서 나의 팔을 붙잡아 조 박사에게서 떼어놓고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두 팔을 잡고 꼼짝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장내의 소란은 끝났다.

 

모두가 대단히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딘 장군은 “콰이엇, 콰이엇!” 하면서 진정하라고 명령하였다. 2~3분간의 침묵이 있은 후 딘 장군은 조병옥 씨에게 단상에 올라가 설명을 계속하라고 하였다. 조 박사는 이번에도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욕설로 맞섰다. 딘 장군은 다시 “콰이엇!”을 연발한다. 안재홍 씨도 “연대장! 조용히 하시오.” 하고 말렸다. 송호성 장군도 고함 고함을 지르며 “이놈! 이놈!” 호령했는데 그 대상이 연대장인지 조병옥 씨인지 분명치 않았다. 나는 그것이 조병옥 씨를 향한 욕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안재홍 씨가 탁자를 두드리며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 하면서 방성통곡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울음을 한참 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장내는 순식간에 숙연해지고 안재홍 씨의 통곡소리만 들렸다. 조병옥 씨도 연설을 중지하고 나도 욕설을 멈췄다. 딘 장군은 안재홍 씨와 조병옥 씨의 안색을 번갈아 보면서 어떤 영문인지를 살핀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서서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해산이오.” 하고 고함을 지르듯 선언하고는 문을 열고 총총히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한참 있다가 조병옥 씨가 그 뒤를 쫓아나갔다. 회의장에는 안재홍 씨와 송호성 장군 그리고 나 3인만 남게 되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재홍 씨는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비극이오.” 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비행장으로 직행한 딘 장군이 두 사람에게 속히 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일행은 제주에서 1박할 당초의 예정을 바꿔 딘 장군을 따라서 상경하고 말았다. 회의는 결국 아무런 결론도 못 내린 채 난장판으로 막을 내린 것이다.

 

미군정 최고수뇌회의가 아무런 결론 없이 유회된 다음날 오전 11시경 제주읍 소재 연대임시본부 겸 연락소에 난데없이 경비대 총사령부 고급부관인 박진경 중령이 도착하였다. 나는 최고참모의 방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후임 연대장으로 오늘 아침에 명령을 받고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어떤 밀명, 그것도 내가 염려하고 그토록 싫어했던 그런 밀명을 받고 왔구나 하는 섬뜩한 예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는지 모른다. 출세와 보신을 위해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딘이 자신의 주장에 거의 설복되었다가 조병옥 한 사람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넘어간 것처럼 진술한 것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억지 주장과 또 한 사람의 지나친 흥분 때문에 중요한 회의를 포기하고 일정을 앞당겨 서울로 돌아갔다? 미군정에게는 책임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한 것 같다. 딘은 강경 진압책을 심중에 정해놓고 왔던 것이 틀림없다. 김익렬이 내놓은 자료를 보고 그가 조병옥에게 화를 냈다면 이런 뜻이었을 것 같다. “일을 어떻게 처리하기에 이렇게 들통 나게 만든 거요!”

 

20년 전, 4-3에 관해 아무것도 모를 때 김익렬의 회고문을 보면서 그 회고의 정확성에 대한 아무런 의문도 떠올릴 수 없었다. 1948년 조선의 상황을 폭넓게 살펴본 이제는 그의 기록에도 나름대로 편향된 점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4월 28일 김달삼과의 회담이 사태의 확실한 해결책을 마련한 것이었다고 김익렬은 적었다. 최소한의 조건을 마련해주면 유격대가 투항할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합리적 근거를 가진 믿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유격대 입장에서 가장 절실한 문제는 피난민 귀환이었다. 전투력도 없는 농민들이 도망해 왔으니 당장은 보호해주고 있지만 모두 다 산에 들어와 있으면 식량은 어디서 나나? 농민이 마을에서 농사짓고 있으면 유격대에게도 의지가 되지만 산에 들어와 있으면 짐이 될 뿐이었다. 물론 마을로 돌아가면 경찰의 닦달을 받겠지만, 그 닦달을 최소화하기 위해 ‘귀순 폭도’란 이름으로 돌아갈 길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 단계에서 유격대 자체의 귀순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유격대의 본체는 4월 3일 새벽에 조직적으로 움직인 약 3백 명이었다. 한 달 동안 합류가 더 있었어도 아직 1천 명 선에는 이르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활동력을 가진 수백 명 유격대 중 남로당원은 일부에 불과했고 대다수는 경찰과 우익단체의 횡포에 맞서려는 일반주민들이었다.

 

‘귀순 폭도’의 귀환이 순조로웠다면, 그래서 경찰과 우익단체의 횡포가 억제될 수 있다는 믿음을 얻을 수 있었다면, 남로당원 외의 일반주민들은 하산을 원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된다면 골수분자들만이 유격대로 남든지 섬 밖으로 탈출하든지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4월 28일 구억초교 회담 때 그런 전망이 확실히 세워져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익렬은 유격대에게 속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린애도 아닌 그가 사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억초교 회담을 ‘신뢰 프로세스’의 출발점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전투 중지와 귀순 접수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평화 정착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는 희망했을 것이다. 아마 활동력 있는 진짜 유격대의 귀순을 위해 일층 더 관용적인 정책을 관 쪽에서 끌어내려 했을 것이다.

 

회고록에 그가 구억초교 회담을 완전한 해결책이었던 것처럼 적은 것은 자신의 희망을 과장해서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평화를 바라보는 자기 입장과 대결을 바라보는 조병옥의 입장을 대비시키고 그 사이에서 흔들리는 딘의 입장을 곁들이는 것은 바로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의 산뜻한 구도다. 김익렬의 회고는 표현에서 치우친 점이 더러 있지만 기본적인 문제 제기는 신뢰할 만한 것이라고 본다. 세부사항에서 더러 사실의 전달이 정확하지 못한 점도 의도적 조작이 아니라 극심한 분노로 인해 오래된 기억이 약간의 굴절을 겪은 정도로 이해된다.

 

 

Posted by 문천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이 경찰의 소행이라는 김익렬 9연대장의 증언을 넘어 4-3취재반이 큰 의혹을 느낀 사실은 이 사건 현장을 미군이 촬영한 ‘작품’이 있다는 것이다.

 

기이한 일은 이 예민한 오라리 방화사건 현장이 미군 촬영반에 의해 입체적으로 촬영됐다는 점이다. 그것도 미군 헬기에 의해 불타는 오라리가 공중에서 찍혔는가 하면 지상에서는 오라리 마을로 진입하는 경찰기동대의 출동 모습이 동시에 촬영되었다. 이 무성기록영화 필름은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데 4-3의 초기 상황을 촬영한 유일한 영화기록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존 메릴의 논문 “제주도 반란”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존 메릴의 글을 보면 이 영화의 제목이 놀랍게도 “제주도의 메이데이”(May Day on Cheju-do)로 명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불타는 오라리 현장이 4-3 기록영화의 주무대가 되고 있다는 뜻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영화에서도 오라리 방화가 ‘폭도에 의해 자행된 것’처럼 조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4-3은 말한다 2> 156쪽)

 

이 사건이 폭도 측에서 불시에 일으킨 일이라면 그처럼 치밀한 촬영 준비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4-3취재반은 4월 28일 김익렬-김달삼 회동 직후 경찰의 협상 방해공작이 몹시 극렬해지는 점을 중시하고, 그 변화가 현지 경찰의 자체 결정으로 이뤄질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4월 29일에 딘 군정장관이 비밀리에 제주에 왔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까지 한다.

 

이 추측의 근거는 위에 얘기한 기록영화에 딘 소장의 모습이 보인 사실과 5월 6일 정례기자회견에서 “지난 목요일과 이번 수요일에 다녀왔다.”고 한 말이 5월 7일자 <서울신문>에 보도된 사실이다. 5월 6일이 목요일이었으므로 “이번 수요일”이라 한 것은 5월 5일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함께 다녀온 일을 말하는 것인데, “지난 목요일”이라 한 것은 4월 29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4-3취재반은 해석한 것이다.

 

이 추측의 사실 여부는 더 엄밀하게 따져보지 못했으나 정황에 맞는 추측임은 분명하다. 4월 28일 유격대와의 회담에서 김익렬은 군정장관의 위임을 받은 것으로 대표 자격을 주장했다. 이 회담으로 사태의 전격적 해결 전망이 떠올랐을 때, 보고를 받은 딘 군정장관이 상황 확인을 위해 비밀리에 제주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사태 발생 직후 응원경찰과 함께 경찰토벌대장으로 파견되었던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이 김익렬-김달삼 회담 직후 서울로 돌아왔는데, 그가 이튿날 기자들에게 한 말에는 분명히 음미할 점이 있다.

 

“일병(日兵)이 남긴 작전시설 2천 반도가 이용 - 김 공안국장 제주도 시찰담”

 

무지몽매한 도민을 폭력으로 선동하여 경찰을 습격케 하고 살인 방화 약탈 등 가진 잔악한 행동을 하고 있는 반민족적 도배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지난 5일 제주도로 파견되었던 경찰방위사령 김정호 공안국장은 28일 공로로 귀임하였는데 29일 왕방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해방 전 일본군의 병참기지로 20만의 군인이 주둔하고 있던 제주도의 작전시설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 한라산을 중심으로 약 2천 명으로 추정되는 반도들이 그 시설을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약 3개월을 지탱할 식량과 우수한 군비를 가지고 용의주도한 전략과 전법을 지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지도자는 상당히 병법의 훈련을 받고 실전의 경험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반도를 체포해 문초하여 보면 대개 백정들로, 좌익 계열에서는 일부러 잔악한 살인을 감행하기 위하여 남조선 각지로부터 백정을 모집해 제1선에서 경찰관과 그 가족 선거위원 등을 살해하는 도구로 쓰고 있는 형편이며 또 라디오나 신문으로서 세계의 움직임과 국내 사정을 알 수 없는 지역이므로 더구나 주민들이 순박 우매하여 좌익의 모략과 선전과 위협에 협력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사실 반도들 자체를 소탕하고자 하면 강력한 무장을 하고 1주일 동안이면 전면적으로 결말을 지을 수 있을 것이지만 그중에는 순박한 양민들이 섞여 있으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양민의 살상을 덜기 위하여 선무공작도 진행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4월 30일)

 

“백정을 모집”했다는 황당한 이야기는 ‘반도(叛徒)’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유치한 언사로 이해되는데, 1주일이면 “결말을 지을 수 있”다는 마지막 문단에 ‘경찰의 진심’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찰에게 맡겨주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사태는 몇 주일 동안 경찰에게 맡겨져 있었다. 그런데 경찰이 주민을 지나치게 적대시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키기만 했기 때문에 경비대가 나서게 된 것이고, 경비대는 대화를 통한 해결을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4월 3일 새벽에 움직인 ‘반도’ 수는 3백 명 전후로 추정된다. 몇 주일 동안 입산자 수가 몇 천 명으로 늘어난 것이 누구 때문인가? 오라리 상황에서 단적으로 나타난 것처럼, 경찰과 우익청년단의 위협 때문에 많은 주민들이 ‘항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피신’을 위해 집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엊그제 소개한 김익렬의 회고 중 맨스필드 제주도 군정장관의 말을 인용한 “경찰의 방해공작” 운운은 사태를 대결 국면으로 몰고 가야만 하는 경찰 입장을 가리킨 것이다. 1946년 10월의 소요사태에서도 그랬다. 미군정 경찰이 식민지 경찰보다 더 큰 권력을 키우게 된 것은 미군정의 행정력이 총독부보다 못해서 치안유지 책임을 행정력보다 경찰력에 의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요사태가 커지는 것이 경찰집단의 이익에 부합했다. 하나의 조직이 만들어지면 조직의 원래 목적보다 조직 자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경영학 이론도 본 것 같다.

 

미군정 수뇌부의 입장에도 경찰과 겹치는 측면이 있었다. 2년 반 동안 남조선에 군정을 실시하면서 민심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것이 미군정의 최대 약점이었다. 미군정 수뇌부의 ‘반공주의’는 그 책임을 ‘공산주의자의 책동’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희생자를 줄이면서 사태의 진정한 원인이 드러나게 하기보다 희생을 늘리더라도 ‘공산주의자의 책동’ 주장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을 경찰도 미군정 수뇌부도 바라고 있었다.

 

그래도 1946년 10월 사태에서는 미군정과 경찰의 입장에 차이가 있었다. 경찰이 사태 악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달려든 데 비해 미군정 수뇌부는 상황을 소극적으로 이용하는 태도에 그쳤다. 그래도 명색이 ‘정부’ 아닌가? 경찰이 저지른 짓을 덮어주는 ‘종범(從犯)’의 역할은 맡아도 함께 저지르는 ‘공범(共犯)’ 입장에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1948년 5월초 제주도에서 벌어진 상황을 보면 미군정이 경찰의 공범으로 나서는 정도가 아니라 주범의 위치에 선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든다. 5월 3일 미군과 경비대가 호송하던 ‘귀순 폭도’ 대열에 대한 경찰대의 습격이 단적인 예다. 이 사건에 대한 김익렬의 증언을 살펴본다.

 

이렇게 긴장을 하고 있던 차에 예기하던 불길한 사태가 드디어 5월 3일 발생하고야 만 것이다. 그날 오후 3시경 귀순 폭도 200~300명이 오라리 부락 부근을 거쳐 제주비행장에 설치된 수용소로 귀순한다는 연락이 왔다. 연대고문 드루스 대위와 미군병사 2명, 9연대 병사 7명이 하산하는 귀순 폭도들을 호송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완전무장한 경찰 약 50명이 92식 일본군 중기관총과 카빈총으로 귀순폭도들과 미군들을 기습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폭도들은 총에 맞아 죽고 생존한 나머지는 산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경찰은 계속 미군과 9연대 병사들을 향하여 집중사격하였다. 그들은 중기관총 엄호 하에 드루스 대위 일행에게 공격을 가해 왔다. 경찰은 숫자가 훨씬 많았으나 드루스 대위는 2차대전의 역전의 용사였다. 2명의 미군병사를 시켜 M-1총으로 중기관총 사수를 사살하고 일제히 경찰지휘관을 집중사격하여 그를 쓰러뜨렸다. 경찰은 5명의 시체를 버리고 제주읍 방면으로 도주했다. 쓰러진 자는 제주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위였으며 양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중상은 아니었다.

 

구사일생한 드루스 대위 일행은 격분했다. 부상한 경위를 미군정 본부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하여 주고 나서 드루스 대위 일행을 기습한 이유를 심문하였다. 그자는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하였다.

 

(...) 다음날 미 군정장관은 김정호 경찰토벌대장을 소환하여 어제 발생하였던 사건의 경과를 따졌다. 김정호 씨는 뻔뻔스럽게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이 사건은 공산주의 폭도들이 경찰을 중상하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고 잡아떼었다. 경찰을 미군정과 군대와 이간시키려고 폭도들이 경찰로 위장해 기습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또 드루스 대위에게 총격을 가한 경찰들도 사실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제주도 출신 경찰이며, 이 자들은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의 중기관총 등 무기를 가지고 공산폭도들에 가담하여 현재까지도 경찰복장과 무기를 가지고 민가를 습격하고 선량한 양민을 학살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드루스 대위를 습격했다가 부상을 당하고 생포된 경위도 사건발생 전에는 제주도 경찰서 본부에 근무하던 자였으나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로서 폭동사건이 발생하자 부하들을 데리고 산으로 도망간 사람이라고 하였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그자가 어젯밤 경찰에서 조사를 받던 중 감시 소홀을 틈타서 자살하였으므로 사체를 검증하여 보라는 것이었다. (<4-3은 말한다 2> 335-336쪽)

 

김익렬은 무엇 때문에 4-3 회고문을 남겼는가? 두 가지 동기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 하나는 반공주의에 억눌려 있던 사태의 진상을 밝히려는 책임감이고 또 하나는 조병옥 등 당시 경찰 지도부에 대한 분노다. 분노는 정의감에 입각한 것이지만 역시 사적인 감정이다. 그 감정이 증언의 진실성을 손상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위의 증언 중 밑줄 친 부분은 과연 사실 그대로일지 의혹을 느낀다. 경찰대가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온 것이었을까? 폭도와 경비대 장병의 사살은 몰라도, 미군 장교 죽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딘 군정장관도 책임지기 힘든 일이다. 미군 장병 사살하라는 명령은 당시 경찰 계통 어디서도 절대 나올 수 없었다. 미군 장병이 제주도에서 사살당한다면 온 미국이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공산 폭도의 소행인 것처럼 얼버무릴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정말 죽이러 나왔다면 중기관총까지 갖춘 약 50명의 경찰대가 개인화기만을 가진 미군과 경비대원 열 명을 섬멸하지 못할 리가 없다. 경찰은 월등한 화력과 인원으로 미군을 놀라게 하고 귀순 사업을 방해하려고 나왔을 것이다. 미군을 바보 만들고 ‘귀순 폭도’를 쫓아버리는 데 성공한다면 뒷수습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보장을 받고 나왔을 것이다. 단, 미군을 절대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드루스 대위가 뜻밖에 강경하게 대응하자 대책이 없어서 쩔쩔 매다가 몇 명이 죽고 지휘자가 생포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생포된 지휘자의 자백을 김익렬이 좀 과장해서 전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부분적 과장 외에 날조된 내용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미군이 공격을 받아 응전한 상황이라면 기록에 정확히 남아있을 것이 분명한데, 김익렬이 진술의 신뢰도를 쉽게 훼손당할 날조를 행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위에 제기한 정도의 ‘합리적 의심’ 외에는 그의 증언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귀순 폭도’들이 오라리 방면에서 내려오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이틀 전 방화사건으로 도망했던 그 지역 주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많은 주민들이 경찰이 무서워 앞뒤 안 가리고 산속으로 도망하고 있었다. 그 많은 인원이 산속에서 머무르는 것은 유격대에게도 도움보다 짐이 되었다. 김달삼-김익렬 회담에서 합의한 ‘귀순’은 일차적으로 비전투인원을 정상적 생활조건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피난민을 모두 폭도로 보는 경찰 측 주장과의 정면충돌을 피해 ‘귀순’이란 말을 썼지만, 당시 ‘귀순 폭도’란 실제로 ‘귀환 피난민’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된다. 피난민 귀환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본 연후에 전투인원의 진짜 ‘귀순’도 고려될 수 있는 상황에서 경찰은 귀순을 가로막으러 나선 것이다.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에 미군 측의 치밀한 촬영이 있었다는 점에서 제민일보 4-3취재반은 그 사건 기획에 미군정이 관여했을 개연성을 지적했다. 5월 3일 경찰대의 귀순 대열 습격사건에는 미군정이 끼어들지 않았을까?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나는 본다. 미군 장병을 겁줘서 바보 만드는 ‘작전’이라면 아무리 조병옥이라도 감히 벌이지 못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군정 측이 양해 정도가 아니라 주도했던 일이었을 것 같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이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함께 제주로 날아와 유해진 제주지사, 맨스필드 제주도 군정장관, 최천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김익렬 제9연대장과 함께 가진 최고수뇌회의 경위를 보면 경찰과 미군정의 자세를 알아볼 수 있다. 이 회의에 대한 김익렬의 회고가 볼 만한 것인데, 며칠 후에 따로 올리겠다.

 

5월 5일 이후의 일을 잠깐 살펴본다. 김익렬은 5월 6일에 해임되고 박진경 중령이 후임 연대장으로 부임했다. 박진경이 취임식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려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김익렬은 회고하며 박진경이 초토작전 비밀명령을 딘 군정장관에게 받은 것으로 짐작했다.

 

박진경은 9연대를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내몰았고, 그 공로로 곧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에 대한 경비대원의 반발이 두 차례 사건으로 터져 나왔다. 5월 20일 밤 11명의 하사관을 포함한 41명의 제주 출신 사병이 탈영, 대정지서를 습격한 뒤 입산했다. 그 후 제9연대는 제11연대로 재편되어 본부를 제주읍내로 옮겼는데, 6월 18일 새벽에 연대장 박진경이 부대 내 숙소에서 취침 중 부하에게 사살당했다. 제주에 부임한 지 44일 만이었다.

 

장교 1명과 하사관 3명이 체포되어 8월 14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9월 23일 문상길 중위와 신상우 일등중사가 처형되고 두 명은 특사로 감형을 받았다. (<경향신문> 1948년 9월 25일) 문상길의 진술 내용은 이렇게 보도되었다.

 

4월 3일 제주도소요가 봉기한 이후 전 연대장 김 중령 재임시에는 경찰의 폭도와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대하여 경비대는 도민을 선무하기에 노력하여 그들의 신뢰를 받았으나 박 중령 부임 후로는 경찰과 협력하여 소요부대에 무조건 공격명령을 내렸으며, 도민도 탄압하기 시작했으므로 도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경비대 내부 공기도 동요하였다. 나는 김 중령의 동족상잔을 피하는 해결방침에 찬동하였으며 처음으로 김달삼과 만난 이유는 김 중령과 회견시키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박 대령 부임 후였는데 그때 김은 30만 도민을 위하여 박 대령을 살해했으면 좋겠다고 말하였을 뿐 아무런 지령도 받지 않았고 김과 두 번이나 만난 것은 30만 도민을 동족상잔으로부터 건지기 위하여 경비대의 근본이념 국가지상 민족지상의 정신으로 원만해결책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서울신문> 1948년 8월 13일, <4-3은 말한다 3> 212쪽에서 재인용)

 

박진경 암살사건에 김익렬도 휘말려들었는데 이것이 그야말로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제9연대장에서 해임된 후 여수 주둔 제14연대장으로 부임해 있다가 서울로 연행되어 한 달간 조사를 받고나서 온양 주둔 제13연대장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여순사건이 일어났고, 김익렬의 후임 제14연대장 오동기 중령은 사건 발생을 막지 못했다는 죄로 군법회의에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Posted by 문천

 

1948년 5월 1일 한낮에 제주읍내에서 남쪽으로 약 2킬로미터 떨어진 오라리 연미마을로 30명가량의 청년들이 들어와 십여 채 민가를 불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피해만으로는 4-3사태 중 일어난 수많은 참혹한 사건 가운데 두드러질 것 없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이 사건을 매우 중시하고 세밀히 취재해서 <4-3은 말한다 2>(전예원 펴냄) 제5장 “오라리사건의 진상”(147-176쪽)에 상세히 서술했다. 경찰 측의 소행인 이 사건을 ‘산사람’들 짓으로 선전함으로써 무차별 진압작전의 출발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건의 배경부터 살펴본다. 주민 3천여 명의 큰 마을인 오라리에는 운동가들도 여럿 있어서 해방 후 건준 운동이 활발했으나 마을 분위기를 크게 바꾼 것은 1947년 3-1사건이었다. 발포사건 희생자 6명 중 2명이 이 마을 사람이었는데, 하나는 초등학생이었고 하나는 신체장애자(곱사등이)였다. 시위대도 아닌 희생이었기 때문에 주변의 항의가 거셌고, 그 결과 많은 마을 청년들이 검거되면서 미군정과 경찰에 대한 반감이 짙어졌다.

 

4-3사건 발발 후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인명피해사건은 제주에서 첫 경찰관 가족 살해사건이기도 했다. 4월 11일 새벽에 산사람들이 쳐들어와 58세의 경찰관 부친을 죽이고 집을 불 지른 사건이다.

 

두 번째 인명피해는 그 열흘 후였다. 30대 마을청년 두 사람이 들판에 나갔다가 경찰대에 붙잡혔는데, 경찰은 이들을 ‘폭도 연락병’으로 간주하고 이튿날까지 끌고 다니다가 어느 굴속에 들어가게 하고 쏘아죽인 다음 돌아갔다. 확인사살이 없었던 덕분에 한 사람이 살아서 마을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렸다.

 

이틀 후인 23일 좌익 활동을 하던 28세 청년 김태중이 집에서 경찰에 붙잡혀 연행되었는데, 사흘 후 인근 들판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4월 29-30일의 다음 사건은 김태중의 피살에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29일에는 마을 대한청년단(대청) 단장과 부단장이 산으로 납치당했고 30일에는 대청단원 두 사람의 아내들이 납치당했다. 김태중의 체포 후 대청단원들의 밀고설이 나돌았다고 한다.

 

아낙네 두 사람이 납치되어 가는 중 경찰이 출동했는데 산사람들의 혼란을 틈타 한 사람이 탈출했고, 남은 한 사람은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죽은 강 여인의 장례가 이튿날 아침 행해졌고 장례가 끝난 후 오라리 방화사건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인 이날 오전 9시께 오라리마을 근처인 ‘동산물’에서는 조촐한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그 전날 ‘민오름’에서 살해된 대청단원 부인인 강공부 여인의 장례식이었다. 그 시신은 경찰트럭에 실린 채 하룻밤을 보낸 뒤 장례 현장에 도착하였다. 그 경찰트럭 편으로 경비차 나온 경찰관 3~4명 이외에도 서청-대청단원 30명가량이 함께 올라왔다. 마을사람들은 이 장례 현장을 외면, 얼씬거리지 않았다. 다만 평소 고인 가족과 친분이 있었던 한 집안에서 4명의 식구가 나와 매장 일을 도왔을 뿐이다.

 

매장은 두 시간여 만에 끝났다. 장례가 끝나자 올라올 때와는 달리 트럭은 경찰관들만 태운 채 현장을 떠났고 30명가량의 서청-대청단원들은 그대로 남겨졌다. 어느 새 그 청년들은 손에 몽둥이 등을 쥐고 있었다. 이들 청년단이 오라리마을에 진입하면서 민가들이 하나둘 불타기 시작했다. 처음 불질러진 민가는 유격대에 가담한 연미마을 ‘서동네’ 허두경(당시 40세)의 집이었다. (...)

 

당시 방화사건이 서청-대청 등 우익청년단원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주장은 비단 ‘반도’들에 의해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 사건을 중시한 9연대에서는 협상당사자였던 김익렬 연대장과 이윤락 정보주임 등이 직접 현장조사, 그 방화가 서청-대청 단원에 의해 자행됐다는 결론을 내리고 미군정에 보고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묵살하고 “폭도들이 했다”는 경찰 측의 보고를 수용하였다. 그 후의 흐름을 보면 미군정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 연대장이 추구해온 ‘화평’정책을 불신하고 ‘토벌’정책으로 선회하는 한 단서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4-3은 말한다 2> 155-156쪽)

 

4-3사건은 기본적으로 제주인과 외부와의 충돌이었다. 김익렬은 제주 주둔 제9연대장으로서 외부세력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외부세력의 문제점을 지적한 그의 증언이 특히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그의 경력부터 살펴본다.

 

1921년생의 김익렬은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에서 일본군 소위로 임관했다가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마치고 1946년 1월 조선경비대 소위로 임관했다. 1947년 9월 소령으로 9연대 부연대장에 부임했다가 1948년 2월 중령으로 승진, 연대장을 맡았다. 4-3 발생 후 무력진압에 반대하고 선무작전을 주장하다가 5월 6일 해임되었다. 그 후 군인 경력을 계속해서 국방대학원장을 끝으로 1969년 중장 예편했다. 4-3사건 회고록 “4-3의 진실”을 써놓고 사망(1988년) 후 공개하게 하여 1994년 출간된 <4-3은 말한다 2>에 수록되었다.

 

4-3사건이나 반년 후의 여순사건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군대(경비대)의 위상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경찰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로서 군대의 통념이 당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안진은 “미군정기 국가기구의 형성과 성격”에서 군정기의 경찰과 경비대를 이렇게 비교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3> 194-195쪽)

 

경비대의 무장상태와 교육 및 훈련은 군정경찰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이 낮은 수준이었다. 경비대는 구 일본군이 사용하던 99식, 38식 소총을 기본장비로 하였으며 훈련도 총검술과 폭동진압법 정도에 그쳤다. 군정시기의 경비대는 군정경찰에 비해 병력규모가 현저히 작았으며 장비수준 또한 빈약하였는데 그것은 미군정이 진주 직후부터 남한의 핵심적인 억압기구로서 군정경찰을 육성한 데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득중은 경찰과 경비대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군경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경비대는 무기지급, 계급장, 복장, 급식문제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경찰에 비해 열악한 처지에 있었고, 무엇보다도 경찰예비대라는 위상 때문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경비대 간부 대부분은 일본군이나 관동군 출신이어서 군 우위라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오히려 경찰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이유가 겹쳐져 장교와 사병들은 경찰을 좋지 않게 생각했다. 반면에 경찰 측에서는 경비대를 경찰 조직의 하부 기관쯤으로 보아 무시했고, 사상적으로는 불순하고 향토적 색채를 띠는 오합지졸로 인식했다. 한편 조선경비대 사병들은 과거 ‘일제의 주구’로서 활동했던 경찰들이 자신들보다 높은 대우를 받으며 자신들을 멸시하는 데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 경찰은 수뇌부나 말단이나 거의 대부분이 친일 경력자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일제시기 경험을 공유하고 있었고, 친일잔재 청산에 저항해야만 하는 공동의 이해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 같은 공동의 기반 하에 경찰은 미군정의 정책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조직의 내적인 동질성과 응집력을 더욱 높여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조선경비대는 좌익 인물들이 쉽게 입대할 수 있었다. 입대한 뒤에도 일사불란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사상적 교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선경비대 장교들 많은 수는 친일 경력자나 반공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남로당의 좌익 세포로 활동하는 인물도 상당히 포진되어 있었다.

 

조선경비대 일부 ‘장교’들은 군이 경찰에 압도적 지위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군국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과 갈등을 빚었다면, 좌익 장교들과 하층 농촌 출신인 사병들은 경찰의 친일적 행각과 미군정 정책의 하수인과 반공 전선의 선봉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빨갱이의 탄생>(선인 펴냄) 113-115쪽)

 

김익렬이 회고하는 제9연대의 상황도 이런 틀 안에 있었다. 경비대는 각도에 1개 연대 편성을 목표로 하고 있어서 제주도의 도(道) 승격에 따라 만들어진 제9연대가 막내였다.

 

연대 군사고문관은 군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이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민정에 바쁘다보니, 1-2개월에 1회씩 소위 혹은 중위를 연대에 보내어 연대장과 상의할 정도였으므로 제9연대는 미군정 고문관도 없는 형편이었다.

 

연대 장비는 총기는 구 일본군의 99소총과 대검뿐, 그나마 탄환은 1발도 보유하지 못했다. 물론 기관총이나 미군무기인 M-1이나 카빈총은 1정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반면 당시 경찰은 경비대보다 월등하게 우월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전원이 카빈소총과 구 일본군의 92식 중기관총, 미군 수송 장비에다 각종 미군 신식 무전기와 기타 통신장비 등 상당한 기동력과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미군정은 국내치안을 전적으로 경찰에 맡겼으며 일체의 전투장비 보급도 경찰에 우선하였고 미군정에 대한 충성심에서도 경비대보다 경찰을 신인(信認)하였다. 경비대는 비상시에 경찰의 보조역할을 하다가 장차 독립되면 국군의 모체가 될, 그러니까 평시에는 놀고먹는 말하자면 미군정의 천덕꾸러기며 객원 노릇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자연 경비대의 미군정 하의 존재 위치는 빛을 못 보았으며 따라서 보급지원도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제9연대의 기타 장비를 보더라도 99식 소총과 대검 이외에 수송 장비는 1과 1/2톤 차량 1대, 3/4톤 1대, 지프 1대가 전 부대의 보급과 연락용 전부였다. 무전기는 물론 없었고 대내(隊內) 행정용으로 몇 대의 구식 전화기가 있을 뿐이었다. 연대와 상부와의 연락은 전근대적인 장교전령과 일반전령이 맡아 비밀명령과 문서를 전달하였고, 일반 행정문서는 민간우편과 전화 전보로 연락되었다. 긴급을 요하는 연락은 연대의 1과 1/2톤, 3/4톤 차량, 지프 등 3대가 보급 전령 일체를 행하는데, 이 3대의 차량마저 노후와 부속품 부족으로 1주일간 수리해서 가동하면 2-3일 쓰고 고장이었다. 부속품도 부산, 서울 등지에 가서 구입하는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부대가 별다른 고통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그 이유는 수개월이 가도 급한 연락사항이나 중요한 문제도 없었고, 하등의 긴급을 요하는 일이 없으므로 순조롭고 평온하기만 하였다. (<4-3은 말한다 2> 276-277쪽)

 

이런 상황에서 터진 4-3사건 초기에 경비대는 무풍지대로 남아있었다. 무력을 갖추지 못한 경비대 자체도 나설 엄두를 못 냈고, 군정당국도 경찰에만 의존했으며, 제주 주민들은 경비대를 불필요하게 자극하려 하지 않았다. 연대에서 긴급전령을 경비대 총사령부로 보냈는데, 총사령부에서도 이 사건은 경찰 책임의 치안상황이니 경비대가 명령 없이 나서지 말라는 지시를 보냈다고 한다. 연대에서는 제주 출신 사병들을 휴가 형식으로 내보내 정보를 수집하며 상황 판단에 주력했다고 한다. (같은 책 297-300쪽)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이 진정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악화를 거듭하자 군정당국은 극한적 진압방법인 ‘초토작전’으로 기울어지며 경비대를 작전의 주체로 끌어들인다. 김익렬은 그 동안의 관찰로 사태 악화의 이유가 경찰의 잔인한 진압방법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므로 적대적 진압작전보다 적극적 선무(宣撫)작전을 주장했다. 새로 부임한 연대 군사고문관 드루스 대위와 민정장관 맨스필드 중령의 승인을 받아 김익렬은 화평공작을 펼 기회를 얻었다.

 

김익렬은 제주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문안을 작성, 전단을 작성해 경비행기로 각지의 중산간마을에 뿌렸다. 경비대는 제주민과 적대할 뜻이 없으며, 귀순하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유격대 지도자와 회담을 갖고 싶다는 뜻도 담았는데, 이에 대한 응답이 부대 근처의 벽보로 나타났다. 연대장이 직접 나와야 하고, 수행인이 2인 이상이면 안 되며, 장소는 유격대 지역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벽보를 실마리로 하여 경비대 가까운 중산간마을에 있는 구억국민학교에서 4월 28일에 회담이 열렸다. 27세의 연대장이 마주한 상대는 25세의 김달삼이었다. 본명이 이승진인 김달삼은 도쿄 주오대학을 다니다가 학병으로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왔고, 대정중학 교사로 있다가 남로당 제주도당책과 군사부 책임자를 맡고 있던 인물이었다.

 

김익렬은 김달삼의 요구가 무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연설 내용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언급이나 표현은 거의 없고 제주도에서 민족반역자와 일제경찰, 서북청년단을 축출하고 제주도민으로 구성된 선량한 관리와 경찰관으로 행정을 하여 주면 순종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나는 폭도들의 요구조건이 대단히 단순하고 까다로운 조건이 없다는 것을 직감하였다. 십중팔구 폭도들이 내놓으리라고 예측하였던, 경찰이나 서북청년들 중 살인-고문-강간-약탈한 자를 인도하거나 처형하라는 요구조건은 한 마디도 없었다. 나는 이 요구조건이 상당히 정당하고, 폭동을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한 대가치고는 과히 비싸지 않은 요구라고 생각하였다. (같은 책 324쪽)

 

김익렬의 평화 노력을 깎아내리려는 입장에서 김달삼의 온건한 요구가 진압세력을 혼란시키기 위한 전술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고 진심을 담은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있다. 사람 뱃속을 들어가 보지 않고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김달삼 등 유격대 지도부가 투쟁 확대를 위해 인민의 희생을 더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제주도의 좌익 활동이 비교적 활발했던 것은 사상이 투철해서가 아니라 우익 조직이 약했기 때문이다. 다른 지방과 달리 제주에서는 현지인과 외지인의 차이가 크게 인식되었다. 제주의 좌익 인사들은 투쟁 확대를 위해 현지인을 희생시키는 전술-전략에는 동의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김익렬은 김달삼의 요구조건을 대체로 받아들이고, 폭도의 면책 요구만을 거부했다. 대신 일본 등지로의 피신에 최대한 협력한다는 약속으로 상대방을 만족시켜 합의를 이뤘다. 연락과 토론을 위해 전투 완전 중지까지 72시간의 유예기간을 두고, 5일 후의 전투는 배신행위로 간주한다는 조건의 휴전협정이었다.

 

김익렬의 협상은 맨스필드 군정장관의 승인을 받아 실시에 들어갔다. 전 경찰은 지서만 지키고 외부에서의 행동을 일체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유격대 활동도 차츰 잦아들었으며, 귀순자 캠프가 설치되어 귀순도 갈수록 활발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라리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김익렬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귀순이 시작되자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었다. 군정장관 맨스필드에게 들어간 악선전 중의 하나는 연대장이 폭도들에게 기만당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폭도들이 귀순을 가장하고 시간적 여유를 얻어서 전열을 재정비한 후 대대적인 기습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정식보고서로 작성해 군정청에 제출했다. 반면에 제주읍과 각 부락에는 “연대장이 폭도를 기만하여 폭도 전원을 귀순시켜 놓고 일시에 몰살하려 한다”는 낭설이 돌고 있었다.

 

맨스필드 대령은 이 모든 것들을 경찰들에 의한 귀순 방해공작으로 판단하고 나에게 “경찰의 방해공작이 시작되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하고 특히 나의 신변안전에 유념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나는 깜짝 놀라 경찰의 방해공작이라니 도대체 무슨 의미이며 이유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맨스필드 대령은 자기도 확실히 모른다며 대략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내용의 요점은 수일 내에 귀순작업이 종료되어 폭도진압이 끝나게 되면 경찰과 경무부장 조병옥 씨와 그 추종자들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약 1개월 전 호언장담하고 제주도폭동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공안국장 김정호 씨가 진두지휘하여 토벌을 시작하였는데도 불구하고 폭도진압은 고사하고 경찰은 막대한 피해만 입었다.

 

(...) 사정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수삼 일에 전도에 걸쳐 전투가 종식되고 평온을 되찾았으니 폭동은 사실상 진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자잘한 뒤처리만 남았으니 조병옥 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제주도 현지 경찰의 허위보고만 듣다가 대세의 판단을 그르쳤고 그 진상을 정확히 파악하였을 적엔 때는 이미 늦어 버렸던 것이다. 폭동이 신속하게 진압되어 뒤처리 문제로 들어가 폭동발생의 원인이 밝혀지고 초토작전의 진상이 탄로되면 그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 처하여지는 것을 몰랐을 리 없다. 조병옥 씨 일파는 자기들의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서는 화평-귀순공작을 방해하고 폭동을 재연시켜 자기들이 주장해 온 공산폭동으로 조작하는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방해공작을 극비리에 제주도 현지 경찰에 내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 (같은 책 333-334쪽)

 

당사자 한 사람의 진술에 집중해서 의존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김익렬의 증언은 상식적으로 추정되는 당시 제주도 상황과 부합한다. 그리고 그가 20년 후 중장으로 예편할 때까지의 군 경력이나, 다시 20년 후 죽은 뒤 자기 증언이 공개되도록 한 조치를 보면 신뢰도가 높은 자료에 틀림없다.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 후 사태의 전환 과정을 다음 일기에서 살펴보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