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사랑방 모임에서 처음 이 구상을 떠올리고 이틀 후 이병한 님 앞 메일에 담은 생각을 블로그에 올렸다. 막 떠오른 생각에 마음이 너무 강하게 끌리기 때문에 오히려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어, 겉으로 내놓기보다 속으로 되씹으면서 보름을 지냈다. 그 동안 생각도 꽤 분명해지고, 의견을 청한 몇 분의 반응도 고무적이어서 그 작업을 실행할 공산이 갈수록 크게 느껴진다. 이제 그 구상을 드러내 놓고 정리해 나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무적인 반응 중 이 작업이 좋은 '평전'을 낳을 수 있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사실 나는 '전기'와 구분되는 '평전'이란 장르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전기문학이 빈약한 우리 사회에는 '전기'답지 못한 '전기'가 횡행하기 때문에 좀 '제대로 된 전기'를 지향하자는 뜻이 '평전'이란 말에 실린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좋은 평전을 바라볼 수 있겠다는 호의적 의견을 나는 '제대로 된 전기'를 바라본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전기답지 못한 전기의 일반적 문제는 인물 자체에만 매달려 그 삶이 어떤 맥락 속에 이뤄진 것인지 밝혀주지 못하는 것이다. 맥락이 없으면 비판이 불가능하다. 대상 인물을 영웅시한다든가, 일방적 관점만을 담은 글이 '전기'라는 이름으로 이 사회를 휩끌어 왔다.

 

대상 인물의 탐구에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이 속한 사회와 시대에 대한 탐구가 병행되어야 제대로 된 전기가 가능하다. 그런데 내 구상의 기본 목적은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사회와 시대를 밝히는 데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노무현은 자기 시대를 보여주는 하나의 관찰도구인 셈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서양 전기문학의 모범적 개념이다. 이 작업이 잘 이뤄지면 형식은 전기이면서 내용은 시대사인 성과를 얻을 것이다.

 

시대사 정리라는 목적을 위해 효과적 방법을 찾을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해방일기>에서 나는 저인망식 방법을 썼다. 내가 엮어낼 수 있는 한 의미 있는 사실을 몽땅 훑어낸 것이다. 그 성과의 가치를 인정해 줄 독자들의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지적 생산활동에 활용할(예컨대 교육에 참고로 삼으려는 역사교사) 입장이 아니고는 그 많은 분량을 읽는 자체로 만족을 충분히 얻을 독자들이 많을 수 없다.

 

3년의 해방공간을 다루는 <해방일기>보다 더 넓은 범위를 다루기 위해서는 주관을 더 내세울 필요가 있다. 그런데 내 주관 하나만을 일방적으로 내세우기보다는 적당한 인물을 내세워 내 주관과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구성을 입체화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런 목적에서 노무현이 적합한 인물로 보인다. 같은 사회를 같은 시대에 살아온 사람으로서 나는 그의 관점에 전체적으로 강한 공감을 느낀다. 그런데 갑남을녀 차원에서 공감을 느끼는 층위와 별도로, 역사학도 입장에서는 그와 내가 공감하는 관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층위가 있다.

 

이 두 개의 층위가 서술에서도 구분되어 나타날 것이다. 그가 중학생 때, 세 살 아래인 내가 초등학생 때 겪은 4-19 무렵부터는 이 사회가 겪은 일들을 그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지, 내 경험을 참고로 그려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나는 크게 다른 환경 속에서 자라났지만 아주 딴 세상은 아니다. 그가 자기 환경 속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지내왔을지, 상당한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그의 정치활동을 보며 반가워하고 기뻐하던 내 마음을 이 층위에서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의 층위를 바탕으로 비판적 검토의 층위를 풀어내는 것이 이 작업의 궁극적 목적이다. 바탕 층위는 지금까지 내가 지켜 온 세계관으로 이뤄진다. 그 세계관에 나는 보통 넘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 왔다. 그런데 지금은 더 나은 세계관을 키우고 싶은 마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지금까지의 세계관으로는 마음이 편치 못하기 때문이다. 더 넓고 깊은 세계관을 가져야 현실 속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마음 편하게 수긍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사회, 같은 시대를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필요를 느끼고 있다. 나 자신에게 생각의 길을 열어주는 노력이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럴 수 있다면 내 삶의 보람도 커질 것 같다. 이런 필요를 느끼는 분들의 대표로 노무현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와 생각을 함께하는 지점에서 출발, 함께 키워가고 싶은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나 내 도움을 직접 받지 못하지만, 그에게 공감하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Posted by 문천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193호로 유흥음식세, 입장세, 골패세의 세령 개정이 1948년 5월 22일 발포되었는데 ‘골패세(骨牌稅)’가 무엇인지 어리둥절하다. 5월 27일 윤호병 재무부장이 발표한 개정 내용 중 골패세에 관한 설명은 이런 것이었다.

 

골패세는 지제(紙製)의 것 5원이던 것을 50원으로 그 외의 것 15원이던 것을 100원으로 마작 100원이던 것을 500원으로 각각 올리었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29일)

 

골패세가 무엇인지 검색해 보니 화투, 마작 등 도박 도구에 붙이는 특별소비세 같은 것으로 1931년 도입되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도박의 성행에 대한 대책으로 제정한 것이라는데, 마작 한 틀에 3원을 붙였다고 한다. 그 크기에 대해서는 전봉관의 <황금광시대>(살림 펴냄)의 “일러두기” 제2항이 좋은 참고가 된다.

 

1930년대 당시 1원의 법정평가는 (...) 금 0.2돈이었다. 즉 10원이 금 2돈이었던 것이다. 금값만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1930년대 10원은 오늘날 14만 원 정도의 가치가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당시는 오늘날보다 물가와 소득수준이 낮았고 경제규모도 훨씬 작았기 때문에, 10원을 가지고 오늘날 14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마작 골패는 재료에 따라 원가에 큰 차이가 있지만 특별히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면 당시 돈 1원으로 괜찮은 물건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3원씩의 골패세를 붙인다는 것은 “도박이요? 마음껏 하세요. 세금만 많이 내시고.” 하는 격이니 중국에서 아편 팔아먹던 영국인 장삿속과 같은 틀의 전형적 식민지 정책이다.

 

그런 정책이 미군정 하에서 그대로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경향신문>은 1949년 3월 3일에서 6일까지 4회에 걸쳐 대한민국 재무부의 “세제개혁임시조치안”을 게재했는데 3월 6일자 기사 중 골패세에 관해 “군정 시 세율을 대폭 인상하였으므로 현행대로 잉치(仍置)함”으로 되어 있는 데서 골패세가 미군정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인계되는 모습을 본다.

 

“해방일기” 작업이 몇 달 안 남은 상황에서 제일 큰 아쉬움을 느끼는 문제의 하나가 경제-재정 분야를 충분히 다루지 못한 것이다. 애초에 자신 없던 분야이므로 사람들 만나 배워가며 진행했어야 하는데 일이 벅차 틀어박혀 지내다 보니 여의치 못했다. 다음 단계 작업에서 보완해야 할 측면이다.

 

마침 제193호 법령 발포를 계기로 나온 기사 중에 남조선 재정의 기본 문제점들을 드러낸 것이 있으므로 옮겨놓는다.

 

“졸렬한 증세보다 탈세자 단속 긴요”

 

과도정부에서는 소득세령을 개정 실시하는 동시 유흥음식세 입장세 골패세 등을 고율로 올려 대중 구매력의 흡수로 적극적인 인플레를 시정하고 나아가 미군정 실시 이래의 적자 360억 원을 보충하며 아울러 앞으로 재생 조선정부의 건실한 운영을 위한 국방 산업 경제 학교 쇄신 등 허다한 시책에 소요될 수백억의 재원을 확보하려 최후의 지혜를 짜내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퇴폐한 기분이 관공서에 충만하고 과세기술의 빈곤 담세역량의 부족과 아울러 세무인원의 능률적인 활동이 결여되어 많은 불합리와 비난을 자아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국고수입의 태반을 차지하는 전매 수입과 운수 체신 등 각 기관의 운영이 활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제품이 옆으로 흘러가고 유흥음식세는 그 8할가량이 업자들의 주머니 속에서 그대로 종적을 감추어 다시 인플레를 조성하는 악순환의 재료가 되었음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비교적 과세하기 쉽고 또 탈세할 염려가 적은 부면에 고율 과세를 부과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 재무당국의 최대한 능력을 국민은 불쌍하게 여기는 동시 좀 더 학리와 실지를 연구 참작하기 바라며 국가법령을 위반하고 사리사욕에 급급하여 탈세를 감행하는 반민족적 도배는 적발되는 대로 엄벌에 처하는 엄격한 태도를 견지하여서 국가 천년의 재정을 반석 위에 서게 하여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3일)

 

세입이 세출의 몇 분지 1밖에 안 되는 상황이 남조선에서는 해방 이후 계속되고 있었다. 화폐 증발과 미국 원조로 버티고 있었다. 북조선 상황은 세밀히 살펴보지 많았지만 소련 원조가 미국의 남조선 원조보다 훨씬 적었고 소련군표 형식의 화폐 증발도 훨씬 적었던 것은 분명하다. 해방 후의 경제-재정 문제를 북조선은 더 잘 극복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1946년 4월 6일에서 19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된 익명 특파원의 “북한 답파기” 일부 내용을 1946년 6월 28일자 일기에 소개했다. 이북 사정이 나쁜 것처럼 선전하기 위한 기획이지만 실제로는 이북 사정의 좋은 점을 적지 않게 보여주고 말았다. 무엇보다 시장이 활발한데도 사치풍조가 없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시중 유휴자금을 동결하는 화폐개혁은 1947년 12월에야 시행되었지만, 1946년 3월의 토지개혁 무렵부터는 이북에서 고급 소비시장이 위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참가자들은 산업시찰에서 대단한 감명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강영주는 <벽초 홍명희 연구>(창작과비평사 펴냄) 558쪽에 이렇게 적었다.

 

황해제철소를 시찰하고 북한의 산업 건설에 대해 높이 평가한 것은 홍명희를 포함하여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남측 인사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당시 평양방송 보도에 의하면 4월 24일 남북연석회의에 참석중인 대표단과 남북조선 기자단 등 약 4백 명이 황해제철소를 시찰했는데, “제철소의 위대한 용광로 제강시설들을 보고 일행은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최후까지 열심히 참관하는 홍명희 이극로 조완구 여운홍 강순 씨들의 감격은 더욱 뜨거운 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해방 후 산업 전반이 마비되다시피 했던 남한의 실정에 비추어볼 때 황해제철소가 가동하고 있는 장면은 홍명희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북의 지도부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고 북한의 장래에 대해 낙관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성공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을 텐데, 일본인 기술자의 활용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김성보가 <북한의 역사 1>(역사비평사 펴냄) 101-103쪽에 “경제 건설을 위해 남은 일본인 기술자들”을 ‘스페셜 테마’의 하나로 다룬 중에 1946년 8월 1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북조선 기술자 징용령’에 호응하여 10월 12일 결성된 북조선 공업기술총연맹 일본인부 이야기가 흥미롭다. 상당수 일본인 기술자들이 이북에 남아 있었고 이북 당국의 경제건설 과업에 적극 협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결의문을 냈다고 한다.

 

전쟁은 끝났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과 독일의 나치스들과 이탈리아의 파스시트들에 의해 선전되고 조직되고 방화된 이 전쟁은 우리 형제와 무고한 세계 인민을 살육하고, 모든 산업시설을 파괴하고, 우리를 빈곤의 밑바닥으로 밀어냈다. 이 소수 범죄자들에 대한 단호한 투쟁을 전개하여, 우리는 세계평화를 확보함과 함께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각 민족의 완전 독립을 열망한다.

 

이에 우리 일본인 기술자는 인민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본래 기술적 사명을 온전히 하기 위해 민주주의 조선의 기초를 만드는 공업화 사업에 적극 참가 협력함과 함께, 이 사업을 통해 신일본의 건설에 절대적인 성원을 보내고 그 촉진을 기하는 것이다. 여기 북조선 공업기술총연맹 일본인부의 신발족(新發足)을 맞아 다시 선명(宣明)한다.

 

이런 명분만이 아니라 일본인 기술자들은 대단한 우대를 받았다. 인민위원회 과장급 월급이 1,500원인데 일본인 기술자는 4,500~6,000원의 월급 외에 생필품과 주택을 제공받았다고 한다. 1946년 11월 당시 이북에는 868명의 일본인 기술자가(가족 포함 2,065명) 활동하고 있어서 각지에 일본인 인민학교도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 - 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역사비평> 64호, 2003 가을)에 보이는 서울의 일본인들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일본인을 대하는 정책에서 남북 간의 차이가 있었다. 미군정은 진주 후 몇 달 동안 식민통치의 최고위층을 우대하며 남조선 통치의 노하우를 전수받는 데 주력했다. 그런데 이북에서는 기술자 집단을 우대하며 실제적 기술을 전수받았다. 해방 후 일본인은 남쪽에서는 미국인들에게 통치기술을 가르쳐주고 북쪽에서는 조선인들에게 생산기술을 가르쳐준 것이다. 이민족 지배가 계속된 이남과 조선인의 자치가 시작된 이북 사이의 차이 중 하나였다.

 

‘가능지역 선거’를 치르고 단독건국을 향해 움직여 가는 이남에서 과연 미군정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는 일이 여기저기 터져 나오고 있다. 미군정의 하곡 수집 정책에 대한 반발로 도지사가 사임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하곡 수집 반대를 이유로 최희송 경북지사가 사표를 제출하고 이 수리가 발표되자 각 국장들도 총사직을 하였는데 대구시보 사장 장인환은 즉시 상경하여 2일 만에 딘 장관과 비행기로 동행 내구(來邱)하여 27일에 지사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에 따른 국장급의 진퇴가 주목되던 바 딘 장관의 알선으로 각 국장은 일단 사직을 보류했으나 장 지사 취임 이래 다시 진퇴문제가 대두되어 이미 내무·상공·농무·후생·노동 각 국장은 장지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초지일관 사의를 표명하여 이미 결정적으로 사직이 예측되어 나머지 2·3국장급도 이러한 공기로 말미암아 사직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신문> 1948년 6월 4일)

 

2년 전 무리한 하곡 수집이 전국적 소요사태의 온상이 되었던 일을 생각하면 주민의 원성을 뒤집어쓸 일을 피하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정 측으로서도 최대의 실패를 겪었던 식량문제만은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경상북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곡 수집량 많다 - 도 군수회의서 재고 진정”

 

하곡 수집을 앞두고 각 도에서 수집 할당량의 재고려를 요망하는 진정이 계속되고 있는 이때 경기도에서도 할당량이 너무 과중하다 하여 중앙청의 재고려를 진정하고 있다. 이번 진정은 28일에 열린 도내 군수회의석상에서 결정하여 29일 대표자 5명이 중앙청에 진정하게 된 것인데 그 내용은 작년도의 실적이 경작면적 10만 정보에 48만 석이 수확되어 수집 할당량이 5만8천 석이었는데 금년도에는 경작면적 7만6천 정보에 수확예상고가 40만 석(이 예상고는 중앙청에서 계산한 것이고 도에서의 예상고는 29만9천 석에 불과하다)으로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집할당량은 7만5천 석으로 늘었다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경기도의 금년 하곡작황은 평년작의 7할 정도임에 비추어 진정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다. (<경향신문> 1948년 5월 30일)

 

농민들 사정은 절박했다. 추곡생산도 북조선으로부터의 송전 중단으로 큰 타격을 입을 전망이 뚜렷해지고 있었다.

 

“경기도내 수리관계 토지, 단전으로 피해 막대 - 이앙기까지 배전 못하면 55만 석 손실”

 

북조선의 단전으로 인하여 막대한 피해가 있는 중 특히 곡창 경기도내의 수리관계 토지로서 단전피해 몽리 면적은 18,405정보나 된다고 하는데 수도기인 6월 이내에 전기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552,171석의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즉 경기도 내 수리조합 44개소 중 전기양수기를 사용하는 곳이 15개소로 전기 관계로 현재 배수를 못하고 있는데 그 중 피해가 격심한 곳은 평택·부천 등지라 하며 그리고 연백·옹진 양 지대의 수리 단수로 인한 피해면적이 19,494정보로 584,820석의 피해가 예상되고 있는바 결국 앞으로의 해결여하에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5월 29일)

 

농업보다 더 직접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은 공업 분야였다.

 

북조선으로부터 송전이 중지된 후 인천의 산업능률은 저하일로를 밟고 있다. 지난 15일부터 20일까지는 간간히 송전이 있었고 20일부터 주간만 송전이 계속되다가 25일 이후부터는 아주 계획성 없는 송전이 계속되어 인천의 350여 공장은 전면적인 마비상태에 빠졌다.

 

한편 일반에서는 발전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있으나 전 기능을 발휘하여도 겨우 6,000킬로 미만의 발전을 유지할 정도인데 현재 기계부족과 고장으로 인하여 1,600킬로를 발전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이 발전선의 배전을 부평 애스캄과 부평수도 송림동 일부 등화용으로 충당되고 있을 뿐 공업용으로는 전연 가망 없다. 단전의 피해는 주동·주물·방직·화학·고무공업에 혹심한 타격을 주고 있어 작금에 있어서는 이 계통의 생산은 전연 없고 대한제분과 식량영단에 대한 작업불능은 민생문제에 큰 위협을 주고 있다. 또한 소사수리조합은 단전의 영향으로 물이 없어 이앙기를 목전에 두고 부근일대는 폐농상태에 빠졌다. (<조선일보 1948년 5월 29일)

 

5월 28일자 <서울신문>에는 전 남조선 발전 상황이 보도되었다.

 

지난 14일 정오를 기한 북조선 당국의 송전중지로 말미암아 남선당국은 비상조치로 각 발전소에 명령하여 오고 있으나 작금은 이나마 최악의 경우에 돌입하고 있다.

 

현재 남조선에서 필요한 전기의 최저 절대량은 약 8만 킬로인데 작 26일 상오 9시 현재 남조선 각 발전소의 발전량은 청평 8천 킬로, 영월 2만2천 킬로, 섬진강 1만3천 킬로, 당인리 7천520 킬로, 보성 3천 킬로, 부산 4천 킬로, 발전선 8천 킬로, 인천 2천 킬로 등으로 겨우 6만5천 킬로 대를 상하하고 있는데 이것조차 석탄부족, 저수지 고갈, 부분품 부족 등으로 연명하기 곤란한 처지에 있다고 한다.

 

즉 청평발전소는 오랫동안 계속되는 한발로 저수지가 거의 고갈하여 금명간 비가 내리지 않으면 곧 휴전 상태에 빠질 것이고 영월발전소는 현재 피크·앞으로 2만2천 킬로까지 내고 있으나 삭도의 불완전 등으로 그 여명이 멀지 않고 당인리발전소도 석탄부족 게이지글라스의 보충난, 일부 변압기의 소실 등으로 전도가 극히 우려되는 바 있으며 더욱 청평발전소의 기능 감소로 말미암아 지난 24일 하오 11시부터 대전지구 이남으로부터 남북선 병행으로서 경인지구에 1만 킬로 역송하고 있으나 종전 경인지방에 전력공급량은 주간에 있어 4만5천, 야간 5만5천이던 것이 현재 1만8천 내지 2만 킬로에 미급하므로 공장지대는 전적으로 종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등 일반가정은 물론 생산공장에도 단전 후의 영향은 막대하여 시급한 해결책이 있기를 일반은 간절히 요망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발전선의 발전량이 8천 킬로와트에 불과한 점이 눈에 띈다. 송전 중단 이전부터 중단 당시까지 미군정은 송전이 중단되어도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며 고자세를 취했다. 무엇보다 발전선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주일이 지난 이제 온 나라가 상상 이상의 타격을 받고 있었다. 자주통일구국생산위원회는 5월 28일 성명서로 미군정의 오만에 직격탄을 날렸다.

 

“금번의 북조선으로부터의 단전 결과는 남조선을 암흑천지로 화하고 민생을 일층 도탄에 빠지게 하였음에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 눈을 감고 정치적 응수에 시종함은 도저히 그 진의를 알 수 없으며 일부 반역도들이 이에 장단을 맞추어 가며 남조선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북조선과의 교섭 무용설을 유포시키고 있음은 일대 매국적 행위라 아니할 수 없다. 과연 남조선에서 자급자족 할 수 있을 것인가?

 

송전이 중단되자 당국에서는 남조선 각 발전소에 도합 8만5천 킬로의 발전을 명령하였으나 실지로는 5만 킬로 미만이 발전되고 있을 뿐으로 이것을 남조선의 평균수요 전력 9만 내지 11만 킬로에 비교하면 실로 4만 내지 7만 킬로나 부족되는 것이다. 더욱이 우선 배급을 하고 있는 수도·전차·통신을 제외하면 일반 공급은 4만 킬로 이하로서 이것으로선 야간전등 수요량 5만 킬로조차 미흡하니 주야 작업을 요하는 공업은 완전히 정지치 않을 수 없으며 각종 산업은 완전히 파탄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수력발전은 수리와 저수량 등 관계로 화력은 저탄량과 운탄시설 불비로 현상유지조차 곤란하니 전력은 더욱 감축될 것이 예상되고 있다. 이에 해결 방침은 단 하나뿐이니 그것은 즉 북조선 인민위원회에 대하여 남조선서 사용한 전기대가만 지불하면 되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군정당국에 대해서 종래의 고집을 즉시 포기하고 진심으로 조선민족을 위하여 본 문제 해결에 허심탄회할 것을 요청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8년 5월 29일)

 

소련군도 미군도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준다며 조선에 진주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조선인에게도 일본 제국주의를 도와 연합국을 괴롭힌 죄가 있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 일본군에게 많이 시달린 미군이 특히 그랬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북 조선인과 대화하지 않겠다는 ‘원칙’ 때문에 이남 조선인을 이렇게까지 괴롭힐 수 있을까?

 

 

Posted by 문천

7-8월 중에 8회 정도로 "해방일기"를 요약하는 강연을 해볼까 하고 주제를 설정해 봤습니다. 강연회 주선은 프레시안에 부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강연은 기회 있는 대로 열심히 다닐 생각인데, 이 정도 주제 범위를 설정해 놓으면 초청받는 자리에 따라 적당히 주제를 조합해서 강연 내용을 꾸릴 수 있겠지요.

 

 

[조선 독립의 약속 카이로선언]

1943년 11월의 카이로선언은 겉으로는 인도주의와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연합국의 전략적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직전에 나온 모스크바선언의 오스트리아 독립 약속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독일과 일본의 항복 후 연합국의 오스트리아와 조선 점령에 있어서도 겉으로는 ‘해방’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전리품으로서 ‘정복’의 뜻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준비]

항일투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한국인의 주관이다. 연합국의 눈에는 일본 패망에 대한 조선인의 공헌이 무시할 만한 정도였다. 1930년대까지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만주지역의 무장투쟁도 전쟁 중에는 밀려나 있었고 화북의 조선의용군도 전투에 참여할 수준이 못 되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국내에서 항일의 자세를 지킨 사람들은 좌익과 우익에 있었지만 일제 말기 전쟁 중에는 아무런 조직 활동도 없는 상태였다. 여운형의 ‘건국동맹’만이 조직 활동을 주장하지만 그 실체가 명확치 못하다.

 

[해방공간 속의 친일파]

일본 통치의 종식으로 친일파는 처단 대상이 될 입장이었고 실제로 이북에서는 친일파 처단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남에서는 미군정이 총독부를 계승했으므로 이민족 통치에 협력하던 친일파의 역할이 계속될 수 있었고, 미군정이 총독부보다 통치 능력이 못한 만큼 친일파의 역할은 오히려 더 커졌다. 친일파는 미군정의 비호 아래 세력을 더욱 키워 친일파를 처단할 만한 민족국가가 세워지지 않도록 획책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친일파의 이런 노력을 ‘반공’의 명분으로 정당화해 주면서 자신의 권력욕을 추구했다.

 

[해방공간 속의 좌익]

조선 좌익의 성장에는 두 갈래의 힘이 뒤얽혀 작용했다. 하나는 식민지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 인식에 기초한 자생적 깨달음이었고, 또 하나는 소련과 코민테른, 또는 중국공산당의 지원이었다. 전자가 범 좌익 형성의 토대였고, 후자는 해방 후 ‘공산당’의 간판을 걸었다.

소련군의 이북 진주에 따라 이북에서는 공산당 중심으로 범 좌익이 북로당을 결성한 반면 이남에서는 헤게모니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1946년 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성립으로 이북의 공산당-북로당이 실력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남로당을 위시한 이남의 좌익 정파들은 이북 지도부에 대해 종속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해방공간 속의 민족주의자]

친일파-대지주 정당인 한민당과 이승만 세력도 민족주의를 내세우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가짜였고 1946년 10월 ‘좌우합작 7원칙’을 둘러싸고 가짜와 진짜 민족주의자들 사이의 경계선이 분명해졌다. 이념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민족주의자들은 1946년 여름부터 좌우합작을 추진했으나 1947년 7월 좌측 핵심인물 여운형의 암살을 비롯한 좌우 양측의 견제 속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중간파’로 불린 이 집단은 분단건국의 길로 접어든 1947년 말부터 통일건국을 위한 남북협상 운동을 벌였으나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민족주의자들의 뜻이 꺾인 중요한 원인 하나가 김구의 노선 혼란에 있었다. 가장 강력한 민족주의 아이콘인 김구가 막판까지 반공극우 세력과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 운동이 힘을 일으키기 어려웠다. 1948년 초 그가 돌아설 때는 이미 판세가 결정되어 있었다.

 

[미국과 소련의 역할]

연합국 중 실세이며 전후 질서의 중심축이 될 두 나라가 조선을 전리품으로 챙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북쪽에 진주한 소련군은 조선의 좌익과 민족주의자들이 인민위원회를 통해 자치체제를 최대한 빨리 갖추도록 도와준 반면 남쪽에 진주한 미군은 총독부의 이민족 지배를 그대로 계승했다. 이 차이는 해방된 조선 사회의 추세가 미국보다 소련에 유리한 방향이었기 때문에 소련은 자연스러운 추세에 편승하면 되고 미국은 가로막아야 되는 입장에서 생긴 것이었다.

분단건국에 대한 동기도 미국 측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통일건국이 되어서는 소련 측에 유리한 결과가 될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 소련도 통일건국에 집착하지 않고 절반을 확보하는 데 만족했는데, 압도적 경제력을 가진 미국이 핵무기까지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면대결을 피한 것으로 이해된다.

 

[경찰국가 남조선]

미군의 남조선 지배는 일본 식민통치보다 더 많이 폭력에 의지해야 했다. 그래서 미국 자신은 물론 제국주의 일본에서조차 시행하지 않았던 국가경찰 제도를 남조선에 도입하고 파시스트 성향의 인물들에게 책임을 맡겼다. 미군정 3년 동안 남조선 경찰 인원은 일제 말기의 3배 가까이 늘어났고 식민지경찰 출신자들이 그 중핵이 되었다. 경찰은 식민통치의 폭압적 측면을 해방 조선에 증폭 재현하고 건국 후에도 대한민국의 국가 성격을 규정하는 강력한 조건으로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1948년의 봄]

미소공위 결렬과 조선 문제 유엔 상정으로 분단건국의 기미가 짙어지면서 이북 지도부는 독자적 건국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통일건국을 위한 자기네 쪽 준비라고 명분을 걸었지만 통일건국이 여의치 않을 경우 단독건국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태세였다.

이남에서는 통일건국이라는 애초의 유엔 결의(1947. 11. 14)를 ‘가능지역 선거’로 변형시켜 실질적 단독건국을 향한 5-10선거가 진행되었다. 미군정과 경찰의 존재 앞에서 선거의 ‘자유분위기’는 바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유엔임시조선위원단이 곡절 끝에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해줬기 때문에 ‘성 로비’ 설까지 후세에 남게 되었다.

이북에서는 점령 초기 약간의 인민 저항이 있다가 차츰 사라진 반면 이남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저항이 강해졌다. 제주 4-3사태는 미군정의 구조적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주었다.

Posted by 문천